익명경험담 어떤 남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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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60회 작성일 17-02-0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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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유별이 극심했던 옛날 우리나라에서 오누이 남매간의 정과 사랑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시 3편을 감상해보세요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누나.

<김상옥 봉선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가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 접동새>


1.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 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타고 서울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2.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최순애 오빠생각>


나의 아버님은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당시 49세였다. 당신의 직업은 목각 공예가였고 상까지 받은 적이 있다. 일을 할 때는 여러 날을 작업실에서 보내시기도 했다. 일거리가 없을 때는 주로 역사와 위인전 관한 책읽기를 즐기셨다.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추석만 되면 언제나 인천 시립 공동묘지를 찾아 당신의 어머니(내의 할머니) 묘를 늘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객사하셔서 무덤이 없다.)

할머니 묘지는 매우 복잡한 곳에 위치했지만 아버지는 쉽게 잘 찾으셨다. 절을 올리고 간단한 의식을 마친 후에 아버지는 또 다른 무덤을 찾으셨다. 그때 아버님은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나더러 메뚜기이나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하셨다. 내가 돌아왔을 때까지 아버지는 여전히 무덤가에 앉아 담배를 피셨다. 어떤 때는 우신 눈물자국도 보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나중에 여자 분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 여자 분이 누구였는지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늘 찾아가셨던 여자 분의 묘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그 분은 네 아버지의 수양 누님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양누나라는 분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북경을 다녀오실 정도로 잘 알려진 한의사셨다. 아기를 낳기 위해 절을 짓는데 많은 헌금을 내실 정도로 부유하셨다. 인천에 있는 작은 절에는 아직도 당시에 헌금했던 분들의 명단에 할아버지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그후 어쩐 일인지 할아버지는 일본 순사들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만주로 도피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뿐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물론 가산도 풍지박산이 되었다.

당신 10세였던 아버지는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때 아버지를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신 수양 누나가 있었는데 그분은 아버지보다 5세 위이셨고 직업은 기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독학으로 많은 책을 읽으셨고, 타고난 손재주로 목각 공예 겸 목수가 되셨다. 아버지가 결혼하실 때까지 수양누님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나의 아버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그후 아버님은 홀홀 단신이었던 수양누님을 자주 찾아 뵙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수양누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버님은 그분의 장례를 치뤄주시고, 아버님 자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약 30년 동안 한해도 빼지 않고 수양누님의 묘를 찾으신 것이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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