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경험담 [소개] 너무나도 감동적인 남녀의 사랑 이야기 2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004회 작성일 17-02-08 15:24

본문


"우리 생애 최고의 행복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위고)

"---남자는 여자의, 여자는 남자의 사랑 먹고 살지요---" (어느 유행가 가사)

"남녀의 사랑은 우주 진리의 표상이다." (나의 생각)

나는 오래 전에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Poor Folk)"을 읽고 굉장
한 감동을 받았다.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중 세계 최고일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가난한 사람들"을 제가 번역한 원고가 있습니다. 무척 서툰 번역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분은 요청하세요.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채만식의 단편 <두 순정>과 현
진건의 단편 <정조(貞操)와 약가(藥價)>을 읽고 거의 하루종일 울었다. 한국문학사는 물론
세계문학사가 다시 써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의 문학사상 한국의 이 두 단편소설
보다 남녀간의 위대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없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잠깐:
개인의 취향에 차이가 있겠지만 이 두 작품보다 남녀간의 사랑을 더 감동적으로 묘사한 단
편소설을 읽어본 분이 있으면 저에게 소개해주십시오. 보답하겠습니다.]

다음은 이 두 작품을 원문의 약 절반 정도로 본인이 요약한 것이다.


■두 순정(純情)■
1938년 채만식

모처럼 산행(山行)을 갔다가 일부러 그 암자를 찾아 하루밤을 묵기로 했다. 그
곳에 이상한 노승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산중 절간은 초저녁부터 삼경처럼 깊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지는 소리가
쓸쓸하고, 등잔불이 흔들린다. 청아한 얼굴에 눈썹이 하얀 노승은 눈을 감고 합장
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밤중에 글방에서 돌아온 어린 새서방은 "어머니!"하고 외쳐 부른다. 기다리고
있던 색시가 달려나와 사립문을 열어준다. 12살 새서방은 좋아서 싱글거리고, 21
살 색시는 귀여운 오랍동생을 대하듯 방긋 웃는다.
방으로 들어온 새서방이 색시의 무릎에 엎드리면 색시는 망건을 벗겨준다. 새
서방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색시가 "옛날에 쬐고만 새서방하고 커다
란 색시가 살았는데..."하니까 새서방 봉수는 질색을 한다. 그러다 문득 색시가 웃
는 볼에 옴푹 팬인 보조개가 좋아 보여 손가락으로 꼭 눌러본다. 색시는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들려주었던 호랑이 이야기를 적당히 꾸며댄다. 새서방은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스르르 잠이 든다.
색시는 잠든 새서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매일 바라보는 나무처
럼 안 크는 것 같지만 실상은 꽤 자랐다. 재작년 섣달 시집왔을 때, 새서방 나이
는 열 살, 밤이면 자다말고 엄마를 부르며 울기도 하고 오줌을 싸는 때도 있었다.
겨울이 되어 바쁜 일이 없게 되자 시부모는 새며느리를 근친 보내기로 했다.
시집 온 지 2년이 지나면 누구가 으레 첫 친정 나들이를 가는 법이다.
색시가 한 달간 자기 집(친정)에 간다는 말을 들은 새서방 봉수는 안된다고
펄쩍 뛴다. 오래 전부터 친정나들이를 기다렸던 색시도 그처럼 자기를 따르는 새
서방을 떼어놓고 가기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마음대로 그만둘 수
도 없는 노릇이다. 시부모에게 내세울 말도 없다.
새서방은 글방에도 안 가고 울어대다가 부친에게 매를 맞았다. 색시는 설에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길잡이를 앞세워 오라고 달랬으나 새서방은 울먹거릴
뿐 대답도 하지 않는다.
색시는 마음에 걸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내키지 않는 길을 떠났다. 새서
방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바라본다. 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은 색시가 해
죽 웃으니까 볼에 보조개가 팬다.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아직 모습이 보이니까,
어머니, 하고 부르면 서서 기다려 줄 것 같다. 새서방의 얼굴은 어느 새 눈물로
흠뻑 젖었다.
사흘 뒤에 봉수의 부모는 할 수 없이 어린 새서방을 아내가 있는 처가로 보내
기로 했다. 풀이 죽어 있는 꼴이 어처로와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얻은 외아들이기에 일찌기 장가를 들였고 가난한 살림에 글방에도 보낸 것이다.
부모는 간 김에 설까지 쇠고 아내와 같이 오라고 했다. 봉수는 순식간에 기운이
나서 날뛰었다.
일찍 조반을 먹고 우쭐거리며 길잡이와 함께 길을 떠났다. 들판을 지나 재를
오르 내리고 다시 한참 걸어 처가에 당도했을 때, 해는 중천을 지났다.
새서방이 찰삭거리고 들어서는 걸 본 색시는 고꾸라질 듯이 달려나온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로 얼싸 안을 듯하다. 새서방은 배시시 웃고 서 있다. 장모도
반겨하고, 앓고 누웠던 장인도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다.
색시가 방으로 들어오라니까 볼이 잔뜩 부운 새서방은 "집에 가!"하고 소리친
다. 여섯 살 짜리 처제까지 모두 웃는다. 그러나 그의 고집을 잘 아는 색시는 속
으로 단단히 걱정이 된다. "호호호, 나도 오랜만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한테 왔으
니까 좀 편안히 있다가 가야지! 그렇잖아?"하고 달래보았지만, 새서방은 꼼짝 않
고 집에 가자고 조른다. 할 수 없이 색시가 가긴 갈 테니 우선 방으로 들어가자
고 하니까 새서방은 마지못해 비실비실 따라 들어간다.
이튿날 오후가 지났을 때, 색시는 새서방과 함께 친정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
다. 아무도 그의 고집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반도 안 먹고 점심 때가 되니까
드디어 울음보를 터뜨린 것이다.
실상 색시도 오랜만에 친정에 왔지만 며칠 지나니까 그다지 즐거움을 모르겠
고, 풀이 죽어 있을 새서방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일찌감치 시댁으로 돌아가
는 것이 싫지도 않았다.
해는 좀 기울었으나 재만 넘으면 들판이니까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길을
나섰다. 시댁에 보내는 선물로 꿩 두 마리는 새서방이 보따리에 꾸려 짊어지고,
술 한 병은 색시가 손에 들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바람이 차갑다. 어이없어 하면서 5리까지 따라나왔던 모
친이 돌아설 때 눈발이 폴폴 날리기 시작했다. 재 밑에 왔을 때는 이미 사나운
눈보라로 변해서 길을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새서방을 보
니 입술이 새파래져서 달달 떤다. 겁이 난 색시는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날
이 들거든 오자고 달랬다. 그러나 새서방은 완강히 도리질을 한다. 색시는 할 수
없이 새서방이 짊어졌던 보따리를 제 어깨에 걸치고 한 손으로 새서방의 손을 잡
아끌면서 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비탈을 오르는 작은 길은 이미 눈에 덮였고, 사나운 눈보라는 앞을 가린다. 짐
작만으로 길을 더듬었지만 오르 내리기를 반복할 뿐 아무리 가도 제자리를 헤매
는 것 같다. 더럭 겁에 질린 색시는 허둥거린다. 새서방은 세 걸음에 한번 씩 고
꾸라진다. 와들와들 떨며 얼굴이 사색이다. 참다못해 색시는 새서방을 들쳐업는
다.
다시 얼마를 헤매는 사이에 날이 깜빡 저물었다. 눈보라는 더욱 사나워져 앞
이 보이지 않는다. 등에 업힌 새서방은 엉엉 울어댄다. 춥고 배가 고프다는 것이
다. 처가에 온 후 떼를 쓰느라 밥을 거의 먹지 않았던 것이다. 애가 탄 색시는 치
마를 벗어 새서방에게 덮어준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 속에서 구르는 듯 기는 듯 헤매다 기진맥진해
서 더 이상 한 걸음도 옮겨 놓기가 어렵게 되었다. 정신도 아득아득해진다. 자신
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을 때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논바닥의 벼
포기였다. 산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색시는 더 이상 일어설 기력을 잃고 말았
다.
색시는 새서방을 제 품안에 담뿍 안고 치마로 감싸주었다. 새서방의 울음소리
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혼자 먼저 가나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여기
까지 생각하다 색시는 의식을 잃었다.
그 날밤 재를 넘어오던 동네사람 몇 명이 그들을 발견하여 업고 돌아왔다. 꽁
꽁 얼어붙은 색시는 영영 소생하지 못했지만, 색시 품속에 안겼던 새서방은 무사
히 살아났다.
봉수는 죽은 색시를 잊지 못했다. 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고 해죽 웃는
얼굴에 예쁜 보조개가 옴푹 패는 색시의 환영은 나이가 든 후에서 사라지지 않았
다. 20살 때 그의 부모가 다시 장가를 들이려고 했지만 봉수는 막무가내로 듣지
않았다. 25살에 양친이 다 돌아가자 봉수는 논밭과 살림을 모두 정리한 후 동네
를 떠났다. 그후 그는 어느 산중에 들어가서 중이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노승의 나이를 물어보니 82세라고 한다. 7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지금도 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고 보조개가 옴푹 패는 색시
의 보습이 보입니까?"하고 물으니, 노승은, "실없는 말씀을!"하며 눈을 감고 고개
를 숙이며 합장을 한다. (끝)



■정조(貞操)와 약가(藥價)■
1929년 현진건

최주부는 조그만 D촌이 모시고 있기에는 황송할 만큼 유명한 의원이다. 읍내
김참판댁 손부(孫婦)가 산후증으로 가슴이 치밀어서 다 죽어가는 것을 단 약 세
첩에 돌린 것도 신통한 일이거니와, 더구나 조보국댁 젊은 영감님이 속병으로 한
해를 넘게 고생하여 경향 각지의 명의는 다 불러 보았으나 그래도 효험이 없어
숱한 돈을 들여 가며 서울에 올라가 병원인가 하는 데에서 여러 달 치료를 받았
으나 앙상한 뼈만 남아 돌아오게 된 것을 이 최주부의 약 두 제 먹고 거의 낫게
된 것도 신기한 이야깃거리다. 여기 저기 그야말로 궁둥이 붙일 겨를도 없이 불
려 다녔고 서울 출입까지 빈번했다. 어떤 병이든 그의 손이 닿는 대로 마치 귀신
이 붙어 다니는 것처럼 신통하게 효력을 내었다. 그의 탕약이야 말할 것도 없지
마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의 고약이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이
었다. 곽란을 만나 금방 수족이 차고 맥이 얼어붙은 것도 그의 침 한 대면 당장
에 돌린다.
그중에도 아낙네 사이에 더욱 평판이 좋았다. 그의 빼어난 재주는 부인병--더
우기 젊은 부인병에 더욱 빛난다. 대하증 오줌소태도 영락없이 고쳐 주고, 더욱
놀란 것은 임신을 못하는 여자라도 그의 약을 한두 제만 먹으면 흔히 옥동 같은
아들을 쑥쑥 낳는 것이다.
그는 금년에 갓 쉰 살이다. 그런데 머리에 흰털 하나 없이 검은 윤이 반지르
하다. 시뻘건 얼굴빛과 둥글고 큼직한 코는 언제나 기운이 넘치고 혈운이 좋아
보였다.
본래 먹을 것 없던 그가 이제 와서는 볏섬이나 추수하고 허리띠가 길어져서
웬만한 환자는 잘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젊고 예쁜 여자 환자에게만은 여전히
친절하다.
"망할 자식, 병을 안 보려거든 약국을 집어치우지."하고 그에게 거절 당한 환
자가 더러는 분개했다.
"약국을 집어치우면 계집은 뭘로 호리누." 이렇게 빈정대는 사내도 하나씩 늘
었다.
여름 새벽 부지런한 그는 일찌거니 논꼬에 물을 살피고 돌아오는데 마당 가운
데 개처럼 쭈그리고 앉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누구야?" 얼떨결에 소리치자 그 여자는 놀란 듯이 몸을 일으키며 목이 메인
듯이 대답했다. "저 샌님, 좀 모시러 왔어요."
'또 왔구나!' 그는 불쾌한 듯이 성큼성큼 뜰아랫방으로 들어가며, "요새 모심기
에 바빠서 못 가겠는걸."하고 뱉는 듯이 한 마디 던졌다.
그는 이런 청잣군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명의를 청하러 오면서 탈것도 안 가
지고 타박타박 걸어가자는 이따위 예절 모르는 축들과는 정말 말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오늘날은 당당한 지주님이 아니냐. 제까짓 작인 따위가 이리 오너라 가거
라! 건방지기도 푼수가 있지 않느냐!
'저희들 주제에 약이 다 뭐냐. 개발에 다갈이지!'
그는 이런 청잣군들 만날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제물에 욕지기가
났다.
"샌님! 한시가 바쁩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잠깐 가서 보아주셔요."
"글쎄 일이 바빠서 못 간다 해도 그래."
"못 가시면 어떡합니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시고 짬깐만 가 보아주셔요."
그 여자도 상상한 대로 끈적끈적하게 조르는 패다.
"그야 인명이 재천이니 내가 본다고 살고 안 본다고 죽겠소, 허허." 벌컥 성을
내려다 그래도 체모가 있어 점잖은 투로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사람 앓는 것을 보고 어찌 약 한 첩도 아니 써봅니
까?" 여인은 의원의 말을 그대로 시인하면서 솔직하게 제 맘먹은 그대로 실토했
다.
"약 한 첩! 그러면 병증세를 말하오. 약을 지어주게."
의원은 큰맘을 썼다. 식전 꼭두부터 졸리기도 싫고 거지에게 동전 한푼 적선
하는 셈치고 약 한 첩으로 쫓아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의원은 그제야 영창문을 열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여름의 아침빛은
신선하게 밝았다. 그 때장이 여자는 서슴치 않고 뚜렷히 얼굴을 내보였다. 얼굴빛
은 핏기 하나 없이 핼쑥하다. 그러나 그 반달 모양의 새까만 눈썹, 그 밑에 새벽
빛 모양으로 맑고 시원한 눈, 동그스름한 앳된 입모습은 아직 나이 스물을 얼마
넘기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청잣군은 의외로 젊고 아름다왔다.
"아녜요, 병자도 샌님을 한번 뵈옵기 소원이니 세상없어도 모시고 가야 돼요."
조금도 꾸밈없는 말씨건만 그 목청이 새삼 곱고 보드랍게 느껴졌다.
"대관절 집이 어디요?"
"예서 한 십리 안팎밖에 안돼요."
"십 리 안팎! 이 여름에 가깝지 않은 길인데!" 하고도 의원의 눈 가장자리는
스르르 풀리었다.
"그래 밤을 도와 왔어요. 낮에 가시자면 더우실 듯해서요." 어여뿐 여자의 눈
은 안심한 듯 해죽이 웃는다.
"아무래도 너무 먼걸." 의원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도 그의 눈길은 청잣군의
헤어진 적삼 속으로 군데군데 드러난 흰 살 위를 헤매었다.
의원은 몇 가지 약을 주섬주섬 집어 넣은 후 처음과는 아주 딴판으로 선선히
길을 나섰다.
훤한 광명에 쫓기면서도 실안개는 산허리와 논두렁에 어릿어릿하다. 처음 눈
뜬 새들이 갖은 노래를 종알거릴 때 어미 찾는 송아지 울음이 무겁게 들려 온다.
느리고도 바쁘고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운 논촌의 아침. 청잣군은 앞서고 의원님은
뒤를 따랐다. 걸어온 지 한참만에 그들은 고개 기슭에 다다랐다.
고개를 두어 모퉁이 돌았을 때, 여름해는 어느 틈에 불덩이 같은 얼굴을 나타
냈다. 풀 끝에 맺힌 이슬들은 곧 스러질 제 운명에 마지막 광채를 발하는 것처럼
은가루같이 번쩍인다.
최주부의 눈은 아까부터 앞서 가는 여자의 잔등에 땀이 배인 것을 놓치지 않
았다. 땀이 여러 번 거른 적삼은 땀에 대한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것처럼 살에
착 달라붙었다. 자꾸 번져가더니 어느새 그 둥그스름한 어깨에 커다란 살구꽃이
피었다. 의원의 가슴에는 불꽃이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그러나 청잣군은 제 등에 땀 밴 줄도 모르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잽싸
게 종종걸음을 친다.
"여보시요 아주먼네, 우리 좀 쉬어 갑시다."
사람의 그림자란 얼씬도 않는 고개를 네 모통이나 돌았을 때 뒤선 이는 숨을
헐떡거리며 부르짖었다.
앞선 이는 그제야 잠깐 얼굴을 돌린다.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힌 발그레한 얼
굴, 뒷등 모양으로 앞섶도 착 달라붙어서 뚜렷히 드러난 가슴의 윤곽, 한 옴큼에
쥐어질 듯한 가는 허리.
최주부는 눈을 슴벅슴벅하다가 그대로 풀밭에 주저앉았다.
"덥지 않아요? 이리 와 좀 쉬시우." 그러다 갑자기 앉은 자리가 바로 길가라
는 것을 깨닫자 "여긴 너무 덥군." 하면서 그늘을 찾는 핑계로 산기슭 풀밭으로
휘적휘적 기어 올랐다. 사람 발자국이 밟지 않은 풀밭은 아름다왔다. 병꽃풀, 패
랭이꽃, 백합화들이 제각기 다른 정취로 사람의 눈길을 끈다.
취주부는 앞으로 담쟁이가 얽힌 바위가 가리고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잔
디밭을 발견했다.
"여기가 시원하군. 이리 와 잠깐만 쉬어 갑시다."
청잣군은 얼마쯤 주저하다가 필경 올라오고 말았다. 의원을 못 미더워하는 기
색이 조금도 없고 다만 갈 길이 바쁜데 쉬는 것이 민망한 눈치였다.
"웬 땀을 그렇게 흘리오? 너무 무리한 모양이구먼. 어디 맥이나 좀 짚어 볼까
요." 하면서 왼손으로 그 새새끼 같은 손목을 잡아 당기어 제 무릎 위에 놓았다.
여자는 앞이마 머리칼이 사내의 불덩이 같은 뺨을 스치며 앞으로 잠깐 쓰러진다.
문득 아귀센 두 손은 가늘게 떠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여자는 벼란간에
독수리에게 채인 새새끼 모양으로 깜짝 놀라며 손을 빼려 할 겨를도 없었다. 솥
투껑 같은 검은 두 손은 또다시 땀에 촉촉하게 젖은 여자의 젖가슴에 구렁이처럼
휘감았다.
여자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맑고 깨끗했다. 한군데 흐린 점도 없고 흥분된 기
색도 없다. 슬퍼하거나 분해하지도 않는다. 새파란 잎 새로 흐르는 햇발처럼 명랑
하고, 바람없는 공중에 뜬 나비처럼 조용하고, 풀 끝에 맺힌 이슬 모양으로 영롱
하다. 꼭 아까 모양으로 앞장을 서서 다시 종종걸음을 칠 뿐이다.
최주부가 도리어 겸연쩍었다. '조금 더 앙탈이라도 했더라면....'하고 혼자 웃었
다. 정조관념이란 약에 쓰려고 해도 없고 아무한테나 몸을 맡기고도 눈곱만한 부
끄러운 마음을 모르는 것이 불쾌했다. '이런 것들은 할 수가 없어---' 하고 속으
로 제법 개탄까지 했다. 가다가 심심하면 쫓아가서 손도 쥐어 보고 뺨도 만져 보
았건만 그의 하는 대로 맡기고 눈썹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물결치는 대로 떠
나 가는 부평초와 같이 걸리면 멈추고 놓이면 또 흘러갈 뿐이다.
마침내 그들은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삽짝문 앞에 섰다.
의원은 제 지은 죄가 있어 머리끝이 쭈뼛쭈뼛하여 발 들여놓기가 서먹서먹했
다. 문득 여자의 손가락이 사내의 손목에 쇠꼬챙이같이 박혔다.
"어서 들어가셔요. 우리 아범을 꼭 고쳐 주셔야지 그렇잖으면 큰일날 줄 아셔
요." 나직한 목소리가 의사의 등골에 찬물을 끼얹는 듯하였다.
의사는 허둥지둥 끌려 들어섰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음엔 파리들이 윙하면서 달려든다. 그다음엔 거미같이 마른 네댓 살 되
는 발가숭이 계집애가 양촛자루만한 다리를 비비꼬는 듯이 쭈적거리며 "엄마!"
하고 삐죽삐죽 울기 시작한다.
방 아랫목엔 환자가 웃통을 벗고 누웠는데 만일 뚜룩뚜룩 움직이는 큼직한 눈
이 없었던들 누구라도 해골 송장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내와 의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상반신을 일으키려던 그는 아내의 보드라
운 손길에 다시 누었다.
"고맙네, 그 먼델 갔다와서! 저 땀 좀 봐. 개똥아, 어머니 부채 갖다드려라."
"괜찮아요."하며 여자는 치마꼬리로 땀을 씻고 문득 제 얼굴을 그 해골이 다
된 남자의 얼굴에 문지르며 훌쩍훌쩍 운다.
"왜 울어? 이제 의원님이 오셨으니 나을 텐데!" 환자 또한 목이 메인다. 뼈만
남은 손으로 아내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세상없어도 나을 테야. 안 죽고 살아날 테야. 울지 말아요."
그들은 몇 번이나 서로 울며 위로했다.
"그런데 여보, 내가 죄를...." 하고 아내는 더욱 느껴 운다.
웃목에 서성대고 있던 죄인은 그 소리에 속이 뜨끔했다. 방울 같은 코끝에 땀
이 또 한 방울 맺혔다.
"저 샌님을 모시고 오다가, 저 샌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집에 모시고 온대야
약값 드릴 거리도 없고 당신의 병은 세상없어도 고쳐야 되겠고...." 말끝은 다시
금 눈물에 흐렸다.
아까부터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은 최주부는 그 말에 회오리바람이 온몸에 휩
싸고 뒤흔드는 듯하였다. 금시로 저 해골바가지가 이를 뿌드득 갈고 일어서며 날
카로운 칼로 제 목을 푹 찌를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환자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
다.
"여보, 죄가 무슨 죄요. 잘했소." 한 마디 하고 그 새새끼 같은 팔뚝으로 아내
를 제 가슴에 쓸어안고 흑흑 느낀다.
"그것도 내 병 탓이지. 내 죄지 임자가 무슨 죄요. 임자 죄는 아니오."
최주부는 제 눈과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기괴한 일도 다 있다. 이왕지
사 정조를 깨뜨렸거든 그 비밀일랑 제 속 깊이 감춰 둘 일이지, 그것을 샅샅이
남편에게 고해 바치는 년도 년이거니와 제 정부(情夫)조차 버젓히 데리고 온 계
집을 잘했다고 위로하는 놈도 놈이 아니냐. 이윽고 두 남녀는 떨어졌다. 청잣군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한 얼굴을 의원에게로 돌렸다.
의원은 간신히 가슴을 진정하고 맥도 짚어보고 병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재
작년 가뭄에 부치던 논 열 마지기가 다 타버리고 굶기를 밥먹듯 하였고 작년에는
그 논마저 떨어져 품팔이로 그날그날을 지내노라니까 점점 병이 더쳐서 이지경에
이른 것이라 한다. 그것은 갈 데 없는 부족증이다. 기혈 부족, 원기 부족에서 생
긴 병이니 초제 몇 첩 가지고는 도저히 돌릴 수 없는 병이다.
의원은 이 병은 매우 뿌리가 깊으니 보통 낱첩으로는 낫지 않을 터인즉 가미
한 십전 대보탕 한 제는 먹어야 되겠으며 그 약은 돌아가서 지어보내겠다고 설명
했다. 이왕 지은 허물이니 손해는 보더라도 약 한 제쯤으로 삯쳐 버리고 한시 바
삐 이 괴상한 자리를 떠나려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힘없이 제 팔뚝에 쓰러졌던 그 계집은 이제 와서는 여간 아귀
가 센 것이 아니다. 고쳐주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여기서 움직이지 못한다. 한 달
이고 두 달이고 얼마든지 약을 써서 병뿌리를 빼놔야 놓아 보낼 터이다. 약재를
적어 주면 몇 차례라도 가서 가져오겠다고 악지를 쓴다.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쪽지를 적어주자 환자의 아내는 십리 길을 한숨에 뛰어가고 뛰어왔다.
밤이 되었다.
"난 샌님을 모시고 잘까요?" 아내는 서슴지 않고 예사롭게 남편에게 묻는다.
"참, 그러구려. 개똥이는 내 옆에 갖다 눕히고 임자는 그리로 건너가구려."
남편도 제가 먼저 말할 것을 잊었다는 듯이 찬성이다. 수작이 끝나기가 무섭
게 아내는 실행한다. 이번에는 의원의 몸이 오그라붙는 듯하였다.
"아까는 내가 환장을 해서 그랬지만 다시야 그럴 수 있소? 병자를 두고 딴 방
에서 자다니." 하고 제법 점잔을 빼 보았다.
남편은 마치 손님에게 밥이나 권하는 듯이 아내와 같이 자기를 권한다. 아내
도 남편에 지지 않으려는듯 옷까지 훌훌 벗어 버리고 옆에 착 달라붙어 눕는다.
열흘 동안이나 최주부는 정말 땀을 뺏다. 감옥살이 고통도 이토록 지겹지는
않을 듯싶었다.
다행히 환자는 약발을 잘 받았다. 평생 약 한 첩 들어가보지 못한 위장에는
인삼과 녹용이 그야말로 선약 같은 효험을 드러냈다. 최주부는 하루바삐 이 고통
에서 벗어나려고 이해타산도 모조리 잊어버렸다. 제 돈을 들여 닭마리도 사서 고
아 먹이게 하고 나중에는 제 집 쌀까지 가져오래서 밥을 지어 먹이도록 했다. 환
자의 회복은 하루가 다르고 한시가 달랐다. 열흘이 되자 기동도 맘대로 하게 되
고 뼈만 남았던 몸에 살까지 부옇게 찌게 되었다.
마지막 날 새벽에 잠을 깨어 보니 제 옆에 누웠던 환자의 아내가 없었다. 옆
방에서 그들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참 이젠 가슴도 두룩하시구려." 아내는 남편의 가슴을 만져 보는 모양이다.
"오늘이라도 농사일을 하겠는데, 허허."
"아직 안돼요. 조리를 더 하셔야지 또 병환이 더치시면 어떡해." 아내는 질색
을 한다.
"이제 다시는 병이 안 날 테야. 두 주먹 쥐고 벌지. 그래도 안되면 도적질이라
도 할 테야. 안 굶으면 병이 안 나겠지." 잠시 말이 끊긴 것을 보니 젊은 내외가
으스러지게 포옹하는 모양이다.
"임자를 안고 나니 두 팔에 기운이 더 붙는 듯한데. 내일부터 임자를 업고 다
니면 더 힘이 나겠지."
"별소리를 다 하시는구려. 그래 조금도 꺼림칙하지 않으셔요?"
"뭣이 꺼림칙하단말이오?"
"제가 남의 남자하고 같이 잤는데도."
"백 날을 같이 자면 무슨 일이 있나. 나 때문에 임자에게 귀찮은 노릇을 겪게
한 게 미안할 뿐이지."
그들의 수작은 아침에 재잘거리는 새들 모양으로 명랑했다.
내외는 또 끌어안는 모양이다. 그때 개똥이가 자다말고 무엇에 놀란 듯 삐하
고 운다.
그날 아침 최주부는 풀려났다. 환자는 개똥이를 안고 문밖까지나와 전송했다.
최주부는 얼마쯤 걷다가 고개를 돌이켰다. 때마침 떠오르는 햇발에 의좋게 서 있
는 내외의 얼굴엔 광명과 행복이 영롱하게 번쩍이는 듯했다.
"저런 것들은 정조도 모르고 질투도 모르는 모양이지!"
최주부는 눈이 부신 듯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끝)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