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경험담 지금도 생각나는 술집 여자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685회 작성일 17-02-08 15:24

본문

나는 젊었을 때 소위 화류계 세계에서 아주 많은 여자들을 사귀
었는데 그 중에는 지금까지 생각나는 여자들이 적지 않다.

젊었을 때 (20, 30대는 말할 것도 없고 40대까지), 끓어오르는 성
욕을 달래는 일은 심각한 문제였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자위
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펑펑 솟아오르는
정액을 하루에도 여러 번 쏟아내야 했다. 결혼 후에도 사정은 크
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내의 성욕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나의
성욕을 10분의 1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사랑을 요구하면 언제
나 샤워를 하고 오라는데 나는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데 아내는 술 냄새를 질색했
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성욕을 줄이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군대 시절에 지급되
던 당시 필터가 없는 화랑담배 한 갑에 성욕을 감퇴시키는 담배
가 한 개피씩 들어있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
짓인지 지금도 확인할 수 없지만, 나는 결혼 전과 결혼 후 2번
약국에 가서 정력을 감퇴시키는 약이 있는지 물었다. 약사들은
나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책에서 절간에 중들이 성욕을 감퇴시키기 위해 고사
리와 도라지를 많이 먹는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
인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아내에게 도라지 무침과 고사리 나물 반
찬을 자주 요청했다. 사실 나는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약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먹었다. [아내는 지금도 내가 그런 음
식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도라지와 고사리를 아무리
먹어도 나의 타고난 성욕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젊었을 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용돈이 궁해본 적
도 없었다. 내게는 언제나 단골 술집 3개, 뛰어난 안마사가 있는
단골 이발소 3개, 좋은 콜걸을 소개해주는 단골 여관이 3개 정도
있었다.

블랙스톤이라는 까페가 있었다. 말이 까페지 3류 술집이었다. 인
삼을 썰어 넣은 포천 막걸리와 소주를 주로 마셨다.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인 여자가 주인이었는데,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런대로 괜찮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 후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낳고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그녀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
교에 다니는 딸에게 서빙을 시켰다. [지금 같으면 당장에 영업정
지지만 당시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끔 가출한 소녀들
이 봉급은 따로 없고 거기서 먹고 자는 조건으로 일을 해주었다.
그중 한 여자애(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수생이라고 했다.)는 저녁
내내 손님들과 합석해서 술과 담배를 피웠다. (한 시간에 한 갑
정도 피웠다. 그러다 한 손님과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
오곤 했다. 얼마 후 또 다른 손님과 좌석을 비웠다. 그녀가 받는
화대는 놀라울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다.

그곳에는 커텐으로 칸막이를 한 방이 두 개있었다. 술이 취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내 옆자리에도 앉지 않았다. 그러나 술이 취하
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 몸을 사정없이 주물렀다. 한번은
내 옷을 벗겨놓고 주무르다 그녀의 아들에게 들킨 적이 있다. 갑
자기 흥분한 아들은 맥주병을 깨서 자신의 팔목을 찔렀다. 그런
데 다음날 가보니까 그 아들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녀만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남녀 모두)을
보지 못했다. 둘이서 막걸리 5되를 마신 적도 있고, 양주 한 병을
칵테일해서 마신 적도 있었지만 다음 날 여전히 또 술을 마셨다.

당시 나는 오후 4시 반쯤에 퇴근하는 직장에 다녔다. 그 시간에
그 술집에 가면 그녀는 혼자 작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안에서
문을 잠그었지만, 내 목소리를 들으면 열어준다. 정신이 말짱할
때는 손목도 못 잡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술 마시기를 거
절한 적이 없다. 술이 취하면 그녀는, "오빠, 이제 자러 가."하고
졸랐다.

"장사 안 할거야?"

"잠자고 술이 깨야 영업을 하지."

우리는 근처 여관으로 가서 그녀 말대로 한잠자고, 나는 집으로
가고, 그녀는 자기 술집으로 간다.

그녀는 여러 면에서 괴짜였다. 어느 여름날 오후 5시쯤에 (밝은
대낮이었다) 그녀의 집이며 영업장소인 까페에 갔다. 뜻밖에 문
이 잠겨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놀래주려고 소리를 내지 않고,
그녀가 자는 작은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이 조금 열려져 있었다.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그녀와 아들이 좁은 방에 함께 누워있었
다. 그런데 아들은 상반신이 알몸이었다. 놀랜 나는 다시 살그머
니 밖으로 나갔다.

그 뒤 3년쯤 후, 그녀는 까페를 내놓고 종적을 감추었다.

(에구, 벌써 2쪽이네! 오징어 좀 먹고 쓰자. 냠냠, 쩝쩝. 아무래도
오늘은 술집 이야기만 써야겠다.)

40대 초반에 한 단골 술집에서 동갑내기 여자를 만났다. 남편과
헤어진 후, 오갈 때가 없어서 이곳에서 먹고 자고 일해주는 여자
였다. 당시만 해도 젊은 여자들이 흔했기 때문에 늙고 잘 생기지
도 않은 그녀를 부르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주로 안주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혼자 그곳에 가서 그녀와
술을 마셨다. 나는 아직 그녀만큼 착한 여자를 본적이 없다. 그녀
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거절해본 적이 없었다. handplay와
blowjob은 기본이고 밀실에서 팬츠 벗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
녀는 거의 긴자꼬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게 고추를 흡입하고 세게
조였다.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만원권 한 장을 팁으로 주었다. 당
시 내가 그곳에서 먹은 술과 안주 값과 거의 비슷한 금액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펄쩍 뛰며 거절했지만 나중엔 습관이 되었다.)

그 술집에서 먹고 자는 그녀는 언제라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5시쯤 퇴근하자마자 그 술집에 갔다. 물론 아무도
없고 그녀 혼자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기뻐했다. 나도 자주 생각이 날 정도로 그녀가 좋아졌다. 예쁘지
는 않았지만 너무나 착한 여자였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검정색
긴치마를 입었고 노팬티인 때가 많았다. 팬티를 입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입으면 무척 답답하다고 했다. 마침 굉장히 단단
해진 내 고추는 요란하게 투정을 부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
의 치마를 올리고 그녀의 몸속으로 뜨거운 정액을 내뿜었다. 아
무도 없는 곳에서 그녀는 요란한 비명소리를 냈다. 사랑을 나누
고 나자 술맛이 더 좋았다. 헤어질 때 우리는 밀실에서 또 한번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 둘은 이런 사랑에 맛이 들렸다. 거의 1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사랑을 많이 나누었다. 그 동안 나는 다른 여자와
거의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없었다. 술집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녀의
남편이 찾아와서 그녀를 시골로 데려갔다고 했다.

(오늘은 이상입니다. 이제 이것으로 나의 봉사 의무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쓰고 싶은 사건들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없을 뿐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