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레시피매거진C 왈츠와 강강술래 - 음악이 있는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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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823회 작성일 16-02-18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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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가득한 ‘비엔나커피’는 정작 비엔나에서는 ‘아인슈패너(Einspanner Coffee)’ 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라는 뜻이다. 비엔나의 추운 겨울 밤, 한 손엔 고삐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커피를 들어야 했던 마부들을 위해 뜨겁고 쓴 커피 위에 차고 달콤한 휘핑크림을 뚜껑처럼 얹어주었던 것. 왈츠의 고장 비엔나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 강소천 선생의 유작 중엔, 240여 편에 달하는 동시가 있다. 지난 한 시절 동안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는 온통 그의 노래가 가득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는 병아리 닭’부터, ‘코가 손이라 과자를 주면 코로 받는 코끼리 아저씨’, 그리고 ‘눕지 못해 다리가 아플 게 분명한 나무들’ (‘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중)까지 얼핏 생각나는 동요란 동요는 하나같이 그가 작사한 작품이었다.



“나무는 제 나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한 살 씩 나이를 먹을 때마다 동그라미를 그려둔대요. 나는 동그라미를 그리는 대신 일기장 하나씩을 남겨놓지요.”

일기 쓰기 싫어하던 아이를 꾈 때, 도란도란 읊어주기 좋았던 참 예쁜 시도 있었다. 이 시를 읊어줄 때마다, 한편으론 가만히 ‘동그라미’에 대해 생각했다. 일기장 대신 그리는 나이테 동그라미… 팔을 뻗어 모나지 않고 동그랗게 삶을 그려가며 한 해를 채우려고 애쓰는 우리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곤 했다.

동그라미, 처음 크레파스를 쥔 어린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글동글 비뚤비뚤 ‘원’을 즐겨 그린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얼굴, 아빠 얼굴, 맛난 과자, 예쁜 꽃, 모두 동그라미다. 해님도 달님도 강아지 눈망울도 비눗방울도 하나같이 동그랗고 사랑스런 존재들이 아닌가.

아이나 어른이나 둘 이상이 모이면 마주 보거나 둥글게 서고, 반갑고 흥이 나면 손을 잡고 빙글 돌기도 한다. 요즈음은 셀카봉을 높이 들고 함께 신나게 빙글 도는 광경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저 일기를 쓰는 것처럼 이일 저일 재미난 사연을 엮어 추억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다정하게 굴기에는 ‘둥글게 둥글게’ 만한 것이 없지 않을까 한다.

서양 음악의 본고장, 악성 베토벤이 생의 많은 부분을 보냈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태어난 도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는, 해마다 첫날,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신년음악회가 열린다. 1939년, 전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시작된 이 신년음악회는 70여 년의 세월 동안 비엔나와 세계 음악애호가들에게 근사한 새해를 열어주었다. 신년음악회의 가장 빛나는 레퍼토리는 ‘왈츠’다. 둘이서 마주 안고 둥글게 원을 그리고, 또 그렇게 원을 그리는 이들이 섞여 여기 저기 동그라미들이 겹겹이 모이고 흩어지는 유럽판 ‘둥글게 둥글게’ 인 셈이다.

사교춤을 위한 반주일 뿐이던 왈츠음악이 예술음악의 한 장르로 우뚝 선 데에는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의 역할이 컸다. ‘왈츠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스트라우스 1세가 세운 왈츠의 왕국 위에 아들 요한 스트라우스 2세는 170여 편에 이르는 주옥 같은 왈츠들을 남김으로써 왈츠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왈츠는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으로 시작되는 새해 첫날은, 대부분 아버지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막을 내린다 하니, 비엔나 사람들의 각별한 왈츠 사랑, 스트라우스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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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비엔나의 새해가 있다면, 우리들의 새해, 그리고 새해를 맞아 첫달이 그득히 차오르는 대보름날에는 또 다른 동그라미 그리기, ‘강강술래’가 있다.

예로부터 달의 운행 원리에 맞추어 자연과 호흡하던 우리의 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척 중요했으니, 강강술래는 원시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이며 노래하고 춤추던 것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 여겨진다. 삶이 녹아 있는 노랫말과 반복되는 후렴구, 흥을 돋우는 리듬과 변화무쌍한 변주… 강강술래의 ‘원’에는 세월을 더한 무형 문화유산의 고귀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임진왜란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여인들에게 병사 옷을 입혀 전라도 해남의 옥매산을 빙글빙글 돌게 했다는 이순신 장군의 용병술 이야기는 또 얼마나 처연하고 먹먹한 강강술래의 사연인가.

비엔나 왈츠와 강강술래, 어찌 보면 커피와 찹쌀떡만큼의 생소한 어울림, 굽이굽이 생각의 고리를 찾아가다보니, 말 그대로 비엔나커피와 보름에 먹는 달콤한 원소병에 생각이 머문다.

마침 많은 화제와 여운을 뒤로하고 며칠 전 방영을 마친 드라마 ‘응답하라 1998’에서 만난, 크림 가득한 추억의 비엔나커피는 얼마나 설레고 달콤하고 반갑던지. 어느 대보름날에 맘먹고 동그랗게 빚어보던 색색 찹쌀 원소병은 달을 닮아 또 얼마나 어여뻤는지.

왈츠로 그리는 새해 첫날의 동그라미, 강강술래를 추는 넉넉하고 둥근 달밤, 나무가 정성껏 남기는 원, 일기를 쓰듯 그려가는 나이테, 손을 뻗어 최선을 다해 그리는 원, 그리고 그 원의 바깥세상…. 올 설맞이, 달맞이 때엔 주문을 외울 참이다.

어린 시절 일기를 쓰듯 정성껏 나이테를 그리며 또 한 해를 채워가기를, 그리고 종종 내가 그린 원 밖의 세상도 따뜻하게 끌어안아 보기를. 가끔은 찹쌀로 떡을 빚듯 정성껏 식탁을 차리고, 또 가끔은 향긋한 비엔나커피에 근사한 왈츠 한 곡을 즐기는 호사스런 시간도 누릴 수 있기를. 고운 달 앞에서 그렇게 주문을 외울 참이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어느 날 딸아이의 책꽂이에서 발견한 원태연 시인의 [사랑시]다. 그들의 시(詩)처럼 따뜻한 겨울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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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요리
유승연(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수학했다. 여럿이 나누는 요리, 함께하는 실내악, 사연이 있는 식탁을좋아한다. 콰르텟디오 단원으로 활동했고,종종 매체에 음악 이야기를 기고한다. 무엇보다 엄마이자 아내이고, 주부다.


사진
박태신



발행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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