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연(燕) 第21章 대륙을 불태우는 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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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03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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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1 章 대륙을 불태우는 혈화

오십대 초반의 노인(老人).
그의 사자의 갈기를 보는 듯한 머리카락과 귀 밑까지 길게
늘어진 구레나룻, 코와 턱수염은 목을 덮었다. 구척 장신에 딱
벌어진 어깨하며 걸친 황금빛 장포 소맷끝으로 나온 두 주먹은
커다란 솥뚜껑을 보는 듯했다.
당금 강호에 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뿐
이다.

― 용존(龍尊) 하백(河栢)!

서천(西天)의 지배자. 중원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자가
바로 이 금포노인이다.
헌데 어인 일일까?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수백 마
리의 늑대와 홀로 싸운 한 마리 외로운 사자를 보는 것같은 그
런 착각을 가져오지 않는가?
사자의 갈기 마냥 풀어진 머리카락은 분노와 살기로 인해 빳
빳이 곤두세워져 있고, 두 눈엔 이글이글 살광이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걸친 황금빛 장포에는 자신의 피와 남의 피가 군데군데 찍혀
져 있었다.
지독한 싸움을 치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
어느 한적한 숲 속을 걷고 있던 용존 하백은 문득 어깨를 흠
칫 떨었다. 어떤 미세한 기척을 느낀 것이다.
길 우측으로는 갈대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곁에는 내(川)가
흐르고 있었다. 너른 냇가는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용존 하백은 물소리에 섞여 흐르는 미세한 호흡 소리
를 들을 수 있었다.
"후후...... 전형적인 자객들의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무영(無
影)의 살수들이군......."
용존 하백은 대번에 상대를 파악했다.

― 무영각(無影閣)!

제왕성 산하 조직 가운데 전문적인 살수 수업을 받은 자객집
단이 있으니, 바로 그곳이 무영각이다.
지금 느껴지는 이 미세하면서도 심장의 박동을 절로 긴장케
하는 살기를 뿜어내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는 무영
의 살수들이었다.
그렇다.
용궐과 제왕성의 싸움은 이미 본격화되어 있었다.
용존 하백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극도로 분노하여 전 예하
조직을 이끌고 강남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용궐의 고수들은 모
두 삼대(三隊)로 나누어 강남으로 진군했다.

제일대(第一隊).
용존 하백이 이끄는 제일대는 사천(四川)에서 강남으로 이르
는 요충지(要衝地)인 호남성(湖南省) 대용성(大庸城)으로 진군했
다.
철기보(鐵旗堡).
금장철왕(金掌鐵王) 세민호(世泯壕)가 보주인 철기보는 사천
땅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용맹무쌍한 무사들이
많은 제왕성 제일지부(第一支部)이다.
철기보가 무너진다면 곧 강남으로 이르는 길목이 터지는 것
과 같아 이곳은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다.
용존 하백은 선봉장이 되어 철기보를 쳤다.

제이대(第二隊).
용존 하백의 그림자인 혈인(血刃)이 대장이 되어 귀주(貴州)
땅에서부터 강남으로 진군하니 군마가 일으키는 먼지는 구름을
이루었다.
혈인은 만산산맥(萬山山脈)을 넘어 호남땅 남단에 위치해 있
는 제왕성의 비응방(飛鷹幇), 삼환회(三環會)를 친다.

제삼대(第三隊).
용궐 제일의 용사라는 팔비신룡(八臂神龍) 당여청(唐呂靑)이
제삼대의 대장으로 선봉에 섰다.
그는 역사가 깊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현 문주이기도 하며,
용궐의 제이인자이기도 한 초절정고수다.
그가 이끄는 제삼대는 양자강(楊子江)의 지류인 금사강(金沙
江)을 따라 뱃길을 동쪽으로 잡아 중원 중심지로 향하는 선로
(船路)를 택했다.
제일대 용존과 제이대 혈인이 호남성의 북단과 남단을 동시
에 침으로써 제왕성의 이목을 그곳으로 몰리게 한 후 기습적으
로 중원의 노른자위인 호북(湖北), 강서(江西)에 상륙, 단숨에 제
왕성의 목젖을 끊는다는 전략이다.

그 뿐만 아니다.
동맹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한매설궁에서도 용궐의 진군과 때
를 맞추어 제왕성을 기습하기로 하였다. 한매설궁은 정예고수들
을 파견, 하남(河南), 안휘(安徽)의 북단을 친다.

― 전면전(全面戰)!

하가경의 죽음은 백리빈이 의도한대로 일대혈풍을 일으켰으
니.......
그리고, 용존 하백은 어젯밤 철기보를 기습(奇襲)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의 쓰디쓴 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의 기습
공격을 미리 눈치라도 챈 듯 철기보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
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왕성의 전 조직 가운데 오할(五割)이랄
수 있는 정예 고수들이 대거 철기보에 상주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다.
용존 하백이 이끄는 제일대가 아무리 용맹무쌍하다 하여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중과부적(衆寡不敵)!
전력(戰力)과 전세(戰勢).
그 어느 면으로 보아도 그들의 상대가 아니다.
더욱이 기습이란 상대가 몰라야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법이거늘, 상대는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함정을
파고 기다렸으니 싸움이 되겠는가?
결국 용존 하백의 제일대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았다.
용존 하백은 그렇게 패배의 고배를 마시며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제이대를 이끌고 있는 혈인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길에 느껴지는 무영의 살수들이 뿌려 내는 살
기(殺氣)!
무영의 살수들은 살수 특유의 수법으로 먼 곳에서부터 포위
망을 압축해 오고 있었으니.......
쓰으으으으.......
무영의 살수들이 일으키는 살기는 순식간에 용존 하백이 나
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했다.
한줄기 음습한 바람처럼 다가서는 일단의 무리들.
일신엔 한결같이 시뻘건 혈포(血布)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들의 두 눈에선 사이한 녹광(綠光)이 인광(燐光)처럼 스물스물
피어 나왔다.
용존 하백의 입술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짐작대로...... 무영의 버러지들이군......!"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살수들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말하
지 않아도 안다.
스으으으...... 스으으으.......
그래서인지 다가선 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확인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다짜고짜 살기부터 휘둘러 왔다.
쐐애애액!
느닷없이 우측 갈대 숲에서 시퍼런 반월도(半月刀)가 번쩍 모
습을 드러내며 일섬(一閃)이 작렬하는 것을 신호로 좌측에서는
시뻘건 혈도(血刀)가 가공무비의 가세로 폭사해 오지 않는가?
'지독하군!'
용존 하백조차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완벽하고, 깨끗하며, 빠
른 기습!
슈욱!
용존 하백의 신형이 공세를 피해 허공으로 비상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하나의 시커먼 쇠사슬이 이빨을 드러
내며 독랄한 기세로 폭사해 왔다.
촤르르르르...... 츠츠츳!
쇠사슬이 그의 몸을 휘감는다 싶은 순간,
번― 쩍!
반월도(半月刀)와 혈도(血刀)가 재차 그림자처럼 따라 붙으며
전광석화처럼 찔러 왔다. 아무런 형식(形式)도, 예비 동작도 없
이 그저 최단거리로 쭉 뻗어 오는 독랄한 살인 초식(殺人招式)!
그러나 용존 하백의 몸놀림은 환상처럼 절묘했다.
파파파팟!
번개같이 그는 왼손으로 반월도를 쥔 혈포인의 정수리를 내
리쳤다.
"으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솟구쳤다. 핏줄기는 반월도를
든 자와 함께 몸을 날려왔던 혈도를 든 자에게까지 퍼져 나갔
다. 혈도를 든 자는 눈앞에 피안개가 확 퍼지는 것을 보며 흠칫
했다.
'흑......!'
바로 그 순간,
스팟!
어느새 빼앗았는지 죽은 자의 손에서 빼앗은 반월도가 혈도
를 든 자의 숨통을 끊어 놓고 있었다.
툭! 쿠쿵!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 몸뚱이는 갈대 숲에 처박혔다.
그 순간, 등 뒤에 있던 또 다른 혈포인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쇠사슬을 휘두르며 재차 공격해 왔다.
촤르르르...... 츠츠츳!
이번의 공격은 처음보다 더욱 신속했으며 독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용존 하백은 이미 피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
을 깨달은 순간 그는 다짜고짜 오른손을 뻗어 쇠사슬을 잡아갔
다. 무모하고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파아앗!
쇠사슬은 용존 하백의 손아귀를 휘감으며 활시위처럼 팽팽하
게 당겨졌다.
내력(內力)의 싸움!
용존 하백은 서서히 쇠사슬을 잡아 당겼다.
그그그...... 그그그긍.......
상대는 용존 하백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지면이 푹푹 파이며
쇠사슬 끝을 잡은 혈포인이 극히 불안한 자세로 딸려 나왔다.
번쩍! 퍽! 퍼어억......!
용존 하백은 들고 있던 쇠사슬을 상대에게 무서운 기세로 내
던짐과 동시에 왼손에 쥐고 있던 반월도로 상대의 허리를 향해
일섬을 그었다.
스――― 팟!
"우아아악!"
쿠웅...... 털썩!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과 함께 갈대 숲에 처박힌 것
은 피에 절은 인영이었다. 달빛 아래 핏물이 질펀하게 고이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정적(靜寂).
휘우우우.......
한줄기 바람이 피비린내를 씻어 갈 때 용존 하백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훗......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그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스스...... 스스슷!
주위의 갈대밭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유령처럼 솟아오른 일단의 그림자들이 보인다. 역시 시뻘건
혈포(血布), 손에는 모두 한 자루의 기형도(奇形刀)를 들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과 목상(木像)처럼 무표정한 얼굴, 그러
한 그들의 기도는 상대에게 야릇한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순간 무엇보다도 몸서리쳐지는 것은 이들이 아무
런 말도 없다는 점이다. 상대도, 용존 하백도 아무런 말이 없었
다.
그저 찌르고, 베고, 선혈이 솟구칠 뿐 어째서 싸워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피차에 단 한 마디의 말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행동은 주위의 음산한 분위기와 어울려 더할
나위 없는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다.
스스스스...... 스스슷.......
혈포인들은 주위에 자욱한 혈무(血霧)를 피워 올리며 느릿하
게 다가섰다.
처음에 그것은 안개처럼 혈포인들의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허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위를 휘돌더니 급기야는 회오리바
람처럼 엄청난 광풍을 일으키며 혈포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
휘우우우―――― 꽈르르르.......
굉렬한 회오리바람은 주위의 갈대와 나뭇가지와 심지어는 돌
멩이까지 무서운 기세로 휘감아 올렸다.
실로 굉렬한 기세였다.
한 순간 용존 하백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 자들이 지금 일으키고 있는 기세는 말로만 듣던 무영제일
의 비기(秘技) 혈야광풍멸천술(血野狂風滅天術)! 그렇다면 이 싸
움은 상당히 피곤하겠구나.......'

― 혈야광풍멸천술(血野狂風滅天術)!
무영각의 살수들이 최대의 적을 만나 사용한다는 무서운 비
기다.
이것은 일종의 격체합격술(隔體合擊術)이다.
일백 년의 내공을 지닌 열 사람 이상의 고수가 힘을 합쳐야
만 시전할 수 있다. 일단 펼쳐지면 천년(千年) 이상의 공력을 지
닌 자가 일시에 공격을 쏟아 내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따라서 이 대법(大法)이 펼쳐지면 방원 백여 장은 완전히 초
토화로 변한다. 굉렬한 회오리바람에 의해 풀 한 포기 남지 않
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일단 이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게 되면 천하의 그 어떤 고수라 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이
다.
그래서 미친 바람에 하늘도 망한다 하니.......

꽈르르르르릉! 휘우우우우웅.......
시뻘건 회오리바람은 이미 용존 하백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
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그 소용돌이는 용존 하백의 신
형을 스쳤다. 그 순간 그는 근육이 찢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굉장한 압박감이다.'
그것을 느낀 순간 이미 그의 신형은 그 가공할 소용돌이 속
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파파파팟!
수천 수만의 검화가 소용돌이 속에서 작렬하더니 용존 하백
이 입고 있던 황금빛 장포는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사위로 분
분히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캇캇캇캇! 용존이 죽었다!"
"어리석은 놈! 감히 제왕성을 건드리다니......."
일진광풍이 가라앉은 후 혈포인들은 앙천광소를 터뜨리기 시
작했다.
그러나 돌연 광소를 터뜨리던 혈포인들의 얼굴이 차갑게 굳
어진 것이다. 그리고 굳어진 얼굴 위에 떠오른 것은 당혹의 빛!
"이럴 수가......!"
그들의 앞에 바람처럼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용존 하백.
혈포인들의 보릅뜬 눈은 한결같이 경악과 불신의 빛으로 가
득 찼다.
"아니...... 저놈이 어째서......?"
"어째서냐고?"
용존 하백은 푸석푸석한 웃음을 흘려 냈다.
"이제 알겠나? 너 따위들에게 죽어 갈 용존이 아니다."
혈포인들의 안색은 썩은 돼지간처럼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크으...... 과연 명불허전! 그러나......!"
"죽여라!"
무영의 살수들은 살기찬 폭갈을 터뜨리며 일제히 검을 꼬나
잡았다. 잡았다 싶은 순간 이미 살수는 이어지고 있었다.
파파파팟!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존 하백을 향해 질풍노도처
럼 덮쳐 갔다.
파파팟!
헌데 바로 그때 그들은 문득 맞은 편에서 번뜩이는 휘황한
불꽃을 보았다. 불꽃은 용존 하백이 들고 있는 반월도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번―― 쩍!
"피...... 피하라......!"
"용존의 용린작화공(龍燐灼火功)이다!"
그러나 달려가던 신형을 멈출 능력도, 틈도 없었다.
"아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게 역겨운 피냄새를 동반한 선혈이 허공을
적셨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정적 속의 중얼거림이 조용히 그
들의 시신 위를 스쳐 지났다.
"후후...... 천하를 갖겠다고 마음먹은 본존이거늘 어찌 한낱
불나방 따위에게 목숨을 맡기겠느냐? 모야백, 네놈의 준비는 좋
았지만...... 아직 내 목숨을 가져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용존 하백은 툴툴 웃으며 신형을 돌렸다.

* * *

쾅! 콰아아앙.......
슈슈슈! 챙챙챙! 번쩍! 우르르릉......!
"으아아악......!"
"캑!"
허공을 난무하는 검광도기(劍光刀氣), 천지를 허물어뜨리는
폭멸음(爆滅音), 그리고 뒤따르는 비명(悲鳴)!
피비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시체는 얽히며 산을 이루어
갔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상대의 목을 베어 기뻐하는 순간 심장에 구멍이 나는, 그야말
로 지금은 숨을 쉬고 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 수천 명의 사람들.
그들은 바로 혈인이 이끄는 용궐의 제이대와 이에 맞서 싸우
는 제왕성의 고수들이다.
그렇다.
용존 하백이 그러했듯이 혈인의 제이대 역시 이미 기다리며
함정을 파고 있던 제왕성 사람들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혈인.
그는 한 사람과 대치해 있었다. 그는 상대방을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혈랑(血狼)이었다.
혈인은 검을 가슴 앞에 세우며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혈랑......! 용궐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혈랑이 가볍게 말을 받았다.
"용궐의 이름은 오늘 부로 강호에서 제명된다."
"미친놈!"
"강호는...... 오직 강자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강자! 흐흐흐...... 혈랑, 진정한 강자가 누구인지 오늘 가르
쳐 주마!"
슈앗―
혈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혈인을 향해 그대로 폭사해 들
었다.
혈랑의 입술 꼬리가 가볍게 씰룩였다.
"대단한 솜씨지만...... 주인을 잘못 섬긴 것이 널 죽음으로 몰
았다."
번쩍!
혈랑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크아아아!"
한 소리 참담한 비명과 함께 단 일수만에 혈인은 몸이 걸레
짝처럼 갈가리 찢긴 채 땅바닥에 쓰러져야만 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적어도 백여 초가 지나야 승패가 가늠날 줄 알았거늘,
혈인의 두 눈엔 지금의 결과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양 커다란
불신의 덩어리가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이...... 이건 꿈이다...... 어찌 혈랑의 검이 이토록 빠를 수...
... 있단 말이냐......."
혈랑은 언제 검을 뽑았냐는 양 그의 검은 여전히 검집 안에
서 잠을 자고 있었다.
"말...... 말도 안...... 컥!"
툭!
혈인의 목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혈랑은 등을 돌렸다.
"말도 안된다고......? 크크크...... 혈랑...... 너도 친구와 혈족들
의 목을 네 손으로 직접 베어 보았느냐? 아무도 모를 것이다.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지만 베어야만 하는 내 마음을...... 그러기
에 내 검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찾아와야 할 죽
음이라면...... 내 검이 빠를수록 아픔도 빨리 사라질 테니까......
그래...... 내 검은 빠른 검이 아니라 비정(非情)의 검이다......."

전세는 완전히 제왕성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기습을 노리며 강남으로 진군을 했지만 기습을 당한 쪽은 오
히려 용궐의 제이대였다.
선기를 제압당한 용궐의 세력들은 제왕성 고수들에 의해 지
리멸렬(支離滅裂), 도주하기에 바빴다. 더욱이 혈랑마저 죽음을
당하자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한낱 오합지졸로 전락하고 말았
다.
혈랑은 두 눈에 살광을 뿜어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척살하라!"

* * *

야트막한 산 정상.
정상에 서면 인간 지옥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격전장이 한눈
에 내려다 보였다.
그곳에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 눈 아래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즐거운 눈길로 즐기고 있었다.
선두에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마천루의 하후총사와 마치 부부인
양 나란히 서 있는 마화 옥인이었다. 그들 뒤로 유마신제와 팔
황독제가 우뚝 서 있었다.
그렇다면 산 정상에 웅크리고 있는 고수들은 마천루의 사람
들이란 말인가?
허나 그들 외에도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무
리들의 눈에 들어왔다.
제각각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에게서
뻗어지는 살기만큼은 마천루 사람들이 지닌 것과 아예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으니.......
그들 앞에 한 여인이 팔을 허리에 턱하니 얹고는 발 아래 격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녀(狂女) 월교(月嬌).
바로 그녀였다.
그렇다!
산 정상에 있는 자들은 마천루와 백리빈에 의해 마천루와 합
세하게 된 불귀성의 죄수들이었다.
불귀성의 죄수들은 광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자존심이다.
광무종이 없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존재가 아닌 진정한 마
천루의 지존으로 등극하게 된 하후총사.
군림사패에 의해 강금, 유배되었던 죄수들은 군림사패를 무너
뜨린다는 복수와 증오심 하나로 마천루에 몸을 의탁했지만 하
후총사의 명을 따를 수는 없었다.
하후총사가 그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백리빈이 그들을 구했
기 때문이라는 이상야릇한 변명을 늘어뜨리며 그들은 제이(第
二)의 세력(勢力)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백리빈이 없자, 이미 공식화되어 있는 그의 여자 광녀
(狂女)를 총수로 내세웠다.

― 복수전단(復讐戰團)!

그들의 삶은 군림사패의 멸망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어떤 것
도 없다.
예전에 정도를 걷던 협의지사도, 살인을 밥먹듯 하던 살인마
왕도 지금은 오직 복수전단의 한 전사(戰士)일 뿐이다.
그리고 광녀 월교는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그들이 지닌
능력을 극도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
헌데 언뜻언뜻 옆을 바라보는 광녀의 두 눈엔 짙은 질투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으니.......
눈빛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녀가 바라보는
상대자는 벌써 온몸이 걸레 마냥 갈기갈기 찢어져 죽었을 것이
다.
대체 그녀가 노려보는 상대는 누구일까?

― 임무무(林鵡鵡)!

백치미인 남궁예예가 아닌, 자기 자신을 찾아 이제는 마천루
의 공녀(公女) 마천혈후(魔天血后)라 불려지기 시작한 여인.
부친 광무종을 구해 올 때까지 피를 보길 서슴지 않겠다며
핏빛 혈의를 입기 시작한 그녀는 예전의 백치미인 남궁예예는
결코 아니다.
열살 때 철혈무존 남궁제에 의해 뇌에 금제를 당해 지금까지
지내 온 그녀였지만, 금제가 풀린 지금의 그녀는 그 뛰어난 지
혜가 유마신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지금 임무무는 유마신제 현학풍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발
아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유마신제 현학풍의 입술이 열리며 감탄이 봇물처럼 터
져 나왔다.
"과연 이종사이시오. 종이 몇 장으로 용궐을 완전히 초토화시
키고 있으니......."
임무무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그 분은 머리 하나로 용궐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무너뜨리고 있어요. 제왕성은 단지 그분의 칼 노릇을 할 뿐이지
요."
"오늘만 해도 그렇지. 용궐의 제이대가 만산산맥을 넘는다는
정보를 제왕성에 흘려줘 제왕성에서 미리 함정을 파게 했으니
...... 세력면으로나 모든 면으로 보나...... 용궐의 제이대는 결코
사천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찌 따진다면 용존 하백이 전력을 셋으로 나누어 제왕성을
친다는 전략을 북지대모와 짠 것이 잘못이지요. 북지대모가 이
미 등을 돌려 그 분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쉽
게 무너질 용궐은 결코 아니에요."
"물론 그렇지만...... 손에 얻은 기회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이
종사의 두뇌와 민첩한 행동은 노부도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
"그 분은......."
문득 임무무는 주마등처럼 스치는 백리빈의 영상에 말을 잇
지 못했다.
'대체 그분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백리빈.......
적룡세가에서 헤어진 이후 보지 못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에 대한 그리움
.......
'공자님...... 공자님은 무무를 생각하고 계시나요.......'
임무무는 가슴 한 구석이 메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그녀의 귓전으로 싸늘한 코방귀가 들려왔다.
"흥!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도 구워삶을 여우같은 놈이라니까
...... 그 놈은......."
광녀 월교는 팔짱을 낀 채 임무무 곁으로 다가왔다.
"모야백도 빙신이지...... 그 놈이 흘린 정보에 쫄다구란 쫄다
구들을 죄다 이곳으로 쓸어 넣고 있으니...... 좌우지간 잔대가리
하나는 끝내 주는 족속이라니까......."
분명 백리빈을 말함이리라.
임무무는 발끈했다.
"대체 왜 그를 그렇게 몰아 세우죠? 왜 그를 비난해요?"
광녀는 임무무를 흘겨보았다.
"알 필요 없잖아."
"있어요."
"무슨 권리로? 그놈의 여편네라도 돼?"
"그래요. 난 이미 그 분과......."
너무나도 화가 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슴 속에만 묻어 두
었던 백리빈과의 첫날밤을 그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비록
끝말을 흘리긴 했지만 영악하기가 너구리 뺨치는 광녀 월교를
어찌 속이랴.
광녀 월교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의 몸이 폭풍을 만난 갈대
마냥 와들와들 떨렸다.
"너...... 너 이제 보니 그 놈과 배꼽을 맞췄구나!"
"그게...... 그러니까......."
죄 지은 것도 없거늘 임무무는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말만 더
듬었다.
광녀 월교의 얼굴에 살기가 풀풀 날렸다.
"죽일 놈! 죽어 가는 것을 겨우 살렸더니...... 내 배는 타지 않
고 남의 배만 타고 지랄이야!"
살기는 눈 앞에 뵈는 게 없게 만든다.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이 배 저 배 옮겨 타는 것을 가만히 눈
감아 줬더니 이제는 바보 멍텅구리 배도 탔다 이거지...... 그렇
게도 배를 타고 싶었으면 날 찾으면 어디가 덧나? 내 배를 타면
노가 부러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온몸에서 뿜어지는 것은 살기였지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개새끼...... 나타나기만 해 봐라! 아무 배나 타지 못하게 노를
아예 꽁꽁 동아줄로 묶어 놓고 말겠다!"
결국은 백리빈을 옆에 두고 다른 여자에게 눈독들이지 못하
게 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 말에 유마신제는 피식 웃었다.
'복수전단주도 별 수 없는 여자였군.......'
그러나 임무무는 달랐다.
"듣자 하니 너무 하는군요. 배가 어쩌니, 노가 어쩌니...... 좀
고운 말을 쓰면 안되나요?"
"어쭈구리, 그래 놈의 노맛을 좀 봤다 이거지...... 이것봐, 임
무무. 넌 놈과 배꼽을 맞췄다는 것 하나만으로 마치 세상을 얻
은 양 으쓱이는데...... 흥! 놈은 내 손아귀에 있다고......."
"흥! 그러는 지는 배꼽이라도 맞췄나......."
"뭐, 이 망할 계집이......!"
버럭 노성을 발하며 광녀 월교가 임무무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래, 난 놈의 노 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너희 년들처럼
아무데서나 홀랑 옷을 벗고 그 짓을 하지 않는다. 난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족두리를 그가 풀어 줄 때까지 나 자신을 지킬
뿐이다. 너희들처럼 그가 노를 젓겠다고 하면 벌렁 누워 다리
벌릴 줄 알았느냐? 화냥년처럼 헤벌레 해 가지고 그가 배에 올
라오면 엉덩짝 돌릴 줄만 아는 것들이 예의 법도를 알 리 만무
하지......."
치명타였다.
"다리를 벌려...... 엉덩짝을 돌려...... 화...... 화냥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임무무는 소매를 걷어 붙였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네가 날 바라보는 눈이 곱지않아 언젠
가는 한 번 손을 봐 주려고 했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사랑에 눈이 멀면 이성의 눈도 머는 법.
부아가 치민 임무무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거친 말을 서슴
지 않으며 성난 황소 마냥 머리를 디밀었다.
막 두 여인의 손이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너 죽고 나 살
자 식으로 할퀴고, 꼬집고, 물고, 뜯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자들 싸움이 벌어지려는 순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조용히 타이르나 그 안엔 질책이 서려 있는 한 목소리가 두
여인의 귓전을 때렸다.
그와 함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마화 옥인이었다.
마화 옥인은 다소 짜증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용궐의 무리들이 뿔뿔이 도주하기 시작했어요. 모야백의 성
격상 제왕성의 무리들은 도주자라 하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거예요. 분명 혈랑은 그들을 척살하라 명할 터......."
마화 옥인은 잠시 말을 끊어 숨을 고르고는 광녀 월교를 향
해 말했다.
"단주께서는 복수전단을 이끌고 제왕성 무리들의 후미를 치
세요."
마화 옥인은 광녀 월교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르게 임무무에
게 말했다.
"마천혈후는 좌측을...... 그리고 우리는 우측을 동시에 쳐 승
리에 만취되어 있는 제왕성의 무리들을 일거에 기습 공격해야
해요."
"......."
"......."
"아마 지금쯤 사천당문의 팔비신룡 당여청이 이끄는 용궐의
제삼대는 한매설궁의 정예 고수들에 의해 수장(水葬)되었을 거예
요. 그들에게 모든 전공을 넘겨줄 생각인가요?"
"그럴 수는 없지!"
"냉교매랑 황보연. 그러고 보니 그 새끼에게 꼬리를 친 년이
또 있었지!"
임무무와 광녀 월교의 얼굴에 질투의 불이 확 피어났다.
한매설궁과 마천루, 복수전단의 뒤통수치기!
그것은 이미 짜여진 각본이었다.
용궐과 제왕성의 싸움은 불 보듯 제왕성의 승리로 끝나게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제왕성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은 자명
한 사실.
승리에 취해 있는 제왕성 무리들을 기습 공격하여 일거에 그
들의 숨통을 끊자는 전략이다.
더불어 양자강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제삼대마저 물고기 밥으
로 만들어 아예 용궐의 씨를 말리자는 무서운 전략이다.
마화 옥인은 굳어진 얼굴로 똑똑히 말을 전했다.
"만약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여 때를 놓쳤다면...... 이종사께서
두 사람을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그 분의 성격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아닌가요?"
찰나, 광녀 월교가 입술을 앙물었다.
"좋아! 일단 쓰레기 먼저 치우고 보자고......."
임무무 역시 두 눈에 독광을 풀풀 날렸다.
"흥! 누가 겁낼 줄 알고......."
팡―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무무와 광녀 월교는 동시에 제각각
이끌고 있는 무리들에게 날아갔다. 그녀들의 발빠른 경공술을
보며 마화 옥인이 피식 웃었다.
"용궐이건...... 제왕성이건 이번 싸움에선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겠군...... 두 마리 성난 암코양이 때문에......."
안봐도 뻔하다. 임무무와 광녀 월교는 더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기 위해 용궐의 패잔병과 제왕성의 무리들을 다그칠 것이
다.
그리고 훗날 백리빈 앞에서 자랑을 할 것이다.
마화 옥인은 고개를 저었다.
"사랑이 뭔지......."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두 눈
에 한 사내의 듬직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사내는 하후총사였다.
'총사.......'
마화 옥인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이 혈랑을 상대하기 전...... 내가 먼저 그를 죽일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일을 하려 하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게 마화 옥인이다.
초절정고수인 혈랑을 하후총사가 혼자 상대한다는 것은 버거
운 일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직접 혈랑을 상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사랑하는 정인이 안전하다면 그녀는 혈랑 아니라
모야백과도 일전을 불사할 것이다.
사랑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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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번 장도 오류가 있더군요.
어떤 내용인지 아실지 모르겠네여. ^^;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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