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고독사랑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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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513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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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알 수 없는 심유한 분지였다.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분지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죽음 같은 정적과 지옥의 유계와도 같은 귀기스러움마저 풍기는 곳이었다.
귀무(鬼霧) 사이로 일렁이는 핏빛의 문자가 보였다.

<마천루(魔天樓)>

마천루!
이곳이 천중제일비문이라 일컬어지는 마천루였던 말인가?
그렇다. 그 가공할 정보망과 금력으로 천하를 유린시키는 신비문파였다. 만일 그들이 힘만 있다면?
그 후는 상상치도 말아야 할 것이다.
한 대의 마차가 귀무를 뚫고 조용히 사라진 것은 하루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천루는 뭔가 모르게 환하게 밝아졌다. 마차에 탓던 여인으로부터……

실내는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비취와 홍옥, 진주, 금강석등 장방형의 내실은 이 지상의 모든 보석을 이용하여 치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보석만큼이나 아름다운 미녀는 화선지를 앞에 놓고 있었다.
"……!"
붓을 든 소수가 파르르 떨렸다.
"죽일 테야! 처절하게 살려달라 애원할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지옥에서도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여인의 봉목에서 폭사해 나오는 한광(寒光)은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모란서시 상관약연이었다. 상관약연은 비쾌하게 손을 움직였다. 유려하게 흐르는 붓끝, 화선지에는 하나의 초상화가 완성되어 갔다.
회색의 허무로운 동공에 입가에 걸린 잔혹한 살소를 지닌, 전체적으로는 환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야성미가 풍기는 준수미려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초상화는 한 인간을 완벽하게 재생시켰다.
백옥상!
바로 그의 모든 것을……
"……!"
상관약연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저주의 불꽃과는 이율배반적으로 환상(幻想)처럼 투영된 열락의 환희,
상관약연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씨. 천녀 소홍이옵니다. 밖에 웬 분이 아씨를 찾아오셨읍니다만,"
여린 소녀의 음성이 상관약연의 상념을 깨뜨렸다.
상관약연은 봉목을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들라 해라!"
"예."
예의 여린 음성이 멀어져 갔다.
그리고,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삼가 소군주를 뵈오이다!"
한 소리 차갑고도 고저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삼십 세쯤 되었을까?
칠 척에 달하는 훤칠한 키에 고독한 사자지왕을 보는 듯한 강의한 얼굴의 장년인이었다.
방 안은 암흑의 장막으로 뒤덮여진 듯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대가 철사자인가요? 철사대제 사조님의 모든 진전을 이었다는 무적제일룡(無敵第一龍)이?"
"그렇습니다, 소군주!"
철사자라 불리운 장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을 치달리며 포효하는 고독한 사자……

철사자!

기억해야 될 이름이었다.
문득, 철사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
상관약연은 말없이 서찰을 펼쳤다.

<연아야. 너의 부탁대로 철사자를 보낸다. 그는 이 시각부터 모든 것에 우선하여 너의 명령만을 따를 것이다. 그리고, 전일 네가 보내준 것은 잘 받았다.
……中略……
앞으로도 계속 부탁한다.>

'아버님은 아직도 이 딸을 이용하시려는군요.'
서찰에서 눈을 떼는 상관약연의 눈빛은 더욱 서늘해져 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서찰을 추스리며 시선을 돌렸다.
"철사자! 그대는 지금부터 누구의 명령보다 본녀의 말에 우선권을 두어야 해요!"
"……!"
철사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물을 보세요!"
상관약연은 초상화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초연(超然)! 이 자는 인간한계의 사령심관(死靈心關)을 넘은 자다!'
초상화를 일별한 철사자의 안면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초상화는 냉혹하며 허무로운 인상이었으나 철사자는 그 내면에 감춰진 엄청난 잠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는 이내 청정을 되찾으며 시선을 올렸다.
"그대가 할 일은 그 사내를 찾는 것이예요! 사문도 성도 이름도 몰라요. 하지만……"
상관약연은 초상화를 주시하며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를 찾아요! 그 비용은 무한대! 그리고……"
그녀는 철사자를 직시하며 다짐하듯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은 얘기는 비밀이에요! 그대와 나, 둘이서만의!"
"이 자를 찾은 후에는?"
철사자는 고저 없는 억양을 발했다.
"……!"
철사자의 말에 상관약연은 움찔했다. 허나, 그녀는 이내 차가운 신색으로 뱉듯이 중얼거렸다.
"일단은 그를 찾아요! 연후, 나의 명령을 받으면 돼요!"
"알겠소이다, 소군주!"
철사자는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신형을 돌렸다. 이어, 그의 몸은 꺼지듯 실내에서 사라졌다.
초상화와 함께……

백옥상은 몰랐다.
마천루의 가공할 정보망과 함몰했던 무적군벌이 재정비되어 탄생시킨 철사자라는 고독한 사자가 그의 뒤를 밟고 있음을……


초동(初冬), 대지(大地)는 초겨울의 북풍(北風)에 떨고……

<대비암(大悲庵).>

대비암은 이 년 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싸늘한 한풍은 더욱 매섭게 대기를 휘몰아치는데 매서운 강풍을 뚫고 대비암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파립을 뒤집어쓴 흑삼인은 보폭은 항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천천히, 죽음의 사신(死神)처럼……

대비신니는 일천 냥짜리 전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미타불! 시주의 말씀대로 열반한 중생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빈니가 바빠서 그러하니 양해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그렇다. 대비암은 향객은 받지만 그 외의 모든 불사가 하는 일은 받지 않고 있었다. 헌데, 난데없이 그 불문율을 깨뜨리다니……
흑삼인은 조용히 파립을 벗고는 무심한 동공으로 대비신니를 직시했다.
"나의 이름은 백옥상! 부모님의 사십구일제는 당신의 손으로 해야 하오!"
순간, 대비신니의 짙은 백미(白眉)가 꿈틀거렸다.
"시주! 그 짓은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백옥상은 그의 말을 잘랐다.
"이유는 필요 없소! 오늘부터 이 일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대비암은 혈불암(血佛庵)이 될 것이오!"
잔잔하게 흘러가는 말이었다. 허나, 그의 말엔 폭발할 듯한 증오의 혈한이 내재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 흑!"
일순, 대비신니는 헛바람을 삼켰다.
소리도 없이 검집째 한 자루 철검이 그의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비신니(大悲神尼)!

십대정류(十大正流)인 십정무맹(十鼎武盟) 중 중원의 승인들로 이루어진 대천불맹(大天佛盟)의 태상호법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는 대비신니였다.
금강천령대혈인(金剛天靈大血印)!
거치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강기파해 전문의 불가무적기공이었다. 대비신니는 바로 금강천령대혈인을 극성까지 익힌 초극고수자였다. 헌데, 그런 대비신니조차 눈앞의 파립인의 손이 움직였다고 느꼈을 뿐, 그가 언제 검을 뻗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니……

"당신은 수양이 깊은 고매한 비구니라 생사를 가볍게 여길지 모르나 이곳에 몸담고 있는 수백여 비구니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오."
스산하게 중얼거리는 백옥상의 시선은 대비신니의 노안을 직시하고 있었다.
"……!"
대비신니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만일, 다른 자가 그에게 이런 소리를 했다면 코웃음쳤으리라. 그러나, 이 눈앞의 파립인이 한 말은 그의 가슴을 한 꺼풀씩 찢어발기고 있었다.
소리없는 공포가 그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시주!"
대비신니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백옥상은 천천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또 한 가지. 이 년 전 이곳으로 도주했던 모녀의 행방을 알고 싶소!"
"……!"
백옥상의 난데없는 질문에 대비신니는 흠칫했다.
"시주께서 어찌 그 분들을?"
그의 시선에는 짙은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백옥상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아미타불! 시주가 바로 그 도부수의 아들이라던?"
대비신니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백옥상의 표정에는 하등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소! 생명의 희생을 무릅 쓰고 목숨을 구해 주었으나 비천한 도부수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냉대만 받았던 놈이 바로 나요!"
"……!"
대비신니의 노안으로 경악의 빛이 스침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미타불. 시주. 당시 백씨부인은 시주를 찾으셨으나."
"나는 그들의 행방만을 알고 싶을 따름이오!"
백옥상은 철검(鐵劍)을 시위하듯 흔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할 수 없군! 아미타불……!'
대비신니는 내심 불호를 되뇌이며 가볍게 탄식을 흘렸다.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벽 아페 대한 거부는 대비암의 멸망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기에 대비신니는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그 분들은 취옥궁에 있소이다."
"취옥궁!"
짓씹듯 중얼거리는 백옥상의 입꼬리로 희미한 냉소가 스쳐갔다. 이어,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이다, 신니! 그럼 제(祭)를 부탁하오!"
백옥상은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이어, 백옥상은 순식간에 까마득히 한 개의 점으로 화해 날아갔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이 일로 인해 또다시 전란(戰亂)의 도화선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
대비신니는 지그시 두 눈을 내리감으며 불호를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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