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펀글]온라인 애정편력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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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90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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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사이버 섹스 8 <제31회>

제 4 장. 사이버 섹스. (8)

아마 그녀는 내가 자기의 비밀번호를 해킹한 것을 전혀 알 수 없으
리라. 나는 이 일을 어찌 해야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은희에게 내가 해킹한 사실을 숨겨야 옳은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
야 옳은지...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어떠한 권리도 갖고 있지 않은 상
황에서 이런 비밀을 까발겨야 하는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은희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응.. 은희구나."
"네."
"은희야, 오빠가 네게 고백할 것이 있는데... 오늘 우연히 네 아
이디로 통신에 들어갔었거든?"
"엑!!! 어떻게 알았어요?"
"응.. 그냥 그럴듯한 것으로 눌러봤지. 근데 거기에 김재진이란 사
람에게서 온 편지도 있더라."
"힉!!"

은희는 깜짝 놀랐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어떻게 된 거니?"
은희는 대답을 못했다.
통신에서와는 달리 그녀는 늘 이렇게 음성언어가 안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번에 걸쳐서 추궁을 했지만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은희야!"
"네"
"대답을 못하겠으면 통신으로 만날까?"
"네."
"그래 그럼 조금후에 보자."
나는 전화를 끊고 통신에 접속했다.
접속해서 비공개 대화방을 만든 후에 그녀를 초청했다.

## 지은희(Cgirl ) 님이 입장하였습니다. ##

김민성(taoist ) 어서와라.
지은희(Cgirl ) 흑! 용서해줘요. -.-;
김민성(taoist ) 용서는 무슨... 다 내가 부덕한 탓이지...
지은희(Cgirl ) 아니여요. 죽여줘요. 앙앙...
김민성(taoist ) 그래? 이리와! 죽어라. 죽어!!
지은희(Cgirl ) 엉엉...
김민성(taoist ) 은희야, 널 보면 정말 끝장내고 싶지만... 아...
지은희(Cgirl ) 오빠 난 왜 그럴까?
김민성(taoist ) 뭐가?
지은희(Cgirl ) 응. 난 한 남자로 만족을 못하나봐.
김민성(taoist ) 그런가보지.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도 있지?
지은희(Cgirl ) 아니에요. 지금은 없어요.
지은희(Cgirl ) 응. 죽여조...엉엉...

(나는 이 시점에서 꼴사납게 질투를 하느니 은희에 대한 아집을 버
리기로 했다. 추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은희(Cgirl ) 죽여주세요.
김민성(taoist ) 아니... 난 너에 대해서 모든 욕심을 버렸어. 이
시점에서...
지은희(Cgirl ) 오빠가 그런 말 하니까 무섭당...
김민성(taoist ) 너 무서우라고 하는 얘기 아니야. 걱정마.

(나는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왜 갑자기 배가 고픈 것일까? 밥 먹
은 지 겨우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문득 그 며칠 전에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은희는 원래 생리주기
가 변화무쌍한데, 벌써 한달이 넘게 생리를 안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은희에게 임신진단 시약으로 임신여부를 확인해보라는 얘
기를 했었다. 그 결과가 궁금했다.)

김민성(taoist ) 임신진단 시약 해봤더니 어떻게 나왔어?
김민성(taoist ) 아니라고 하지?
지은희(Cgirl ) 응...ㅤ됐데..
김민성(taoist ) 임신이 됐데?
김민성(taoist ) 됐다는 거야, 안됐다는 거야?
지은희(Cgirl ) 응...기말시험 끝나면 병원 갈려구..
김민성(taoist ) 그게 무슨 말이야?
김민성(taoist ) 정말이야?
김민성(taoist ) 푸하하하.. 거짓말이지?
지은희(Cgirl ) 오빠도 안 원하는 것 같아서..
김민성(taoist ) 음.. 믿을 수 없군.
김민성(taoist ) 아무래도 거짓말 같오.
지은희(Cgirl ) 음..저래서 애아버지가 될려나..
김민성(taoist ) 넌 날 너무나 잘 놀려먹으니까..
김민성(taoist ) 마지막으로 물을께.
지은희(Cgirl ) 응..
김민성(taoist ) 정말 임신이래?
지은희(Cgirl ) 응...
김민성(taoist ) 음... 그럼 할 수 없군.
지은희(Cgirl ) 태몽이 맞나봐..
김민성(taoist ) 우리 결혼하자. 애를 죽일 순 없잖아.
김민성(taoist ) 거북이 태몽은 좋은 건데.. 훌륭한 애가 태어날
거야.

(은희는 어제 거북이가 자기 품에 안기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래
서 그 얘기를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태몽일까.. 개꿈일
까...?'라는 제목으로...)

지은희(Cgirl ) 공부는 어떡하고....
김민성(taoist ) 공부야 모.. 나중에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아.
김민성(taoist ) 애 낳고 다시 대학원 다니면 돼지. 모..
지은희(Cgirl ) 안그래도 요즘 돌탱이가 되어가고 있는것 같은
데..
김민성(taoist ) 너만 그런 거 아냐. 다 그래.
지은희(Cgirl ) 애는 누가 보구..말도 안돼..
김민성(taoist ) 음... 할 수 없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군.
지은희(Cgirl ) 우리엄마한테 나 마자죽어.. -.-;
김민성(taoist ) 그게 문제냐?
지은희(Cgirl ) 다리를 부룰꺼야...
김민성(taoist ) 하하.. 다리야 깁스하면 돼.
지은희(Cgirl ) 근데 오빠..
김민성(taoist ) 응
지은희(Cgirl ) 진짜 믿오..?
지은희(Cgirl ) 케케케..
김민성(taoist ) 또 거짓말 했지? 으으으.. 부르르~~~
지은희(Cgirl ) 잼있당..
지은희(Cgirl ) 한번 떠봤오..안 원하는 것 같아서..
김민성(taoist ) 음... 하긴 원하는 것은 아니지.
지은희(Cgirl ) 봐..
김민성(taoist )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야.
지은희(Cgirl ) 응... 당연하징..흐..
김민성(taoist ) 너 공부도 있고 나도 아직 준비가 안되었구...
김민성(taoist ) 그치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회피할 생각은 없어.
지은희(Cgirl ) 으응...맘을 알았으니... 한결낫군...
김민성(taoist ) 근데 은희야.
지은희(Cgirl ) 응..
김민성(taoist ) 너 내가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랬을 땐...
지은희(Cgirl ) 응........
김민성(taoist ) 진실을 말하라 그 얘긴데...
지은희(Cgirl ) 흐흐흐..
김민성(taoist ) 그래도 거짓말이 술술 나오냐?
지은희(Cgirl ) 웃느라고 혼났당..흐흐..
김민성(taoist ) 흑흑~ 첩이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니...
지은희( Cgirl ) 그래도 얼마 몬가자노..
김민성(taoist ) 오래가면 사람이니?
지은희(Cgirl ) 흐흐... 나는 사람이고 싶지 않오...
김민성(taoist ) 으이구... 한대 쥐어박고 싶다.
지은희(Cgirl ) 내 친구는 내가 외계인이래..흐흐..
김민성(taoist ) 여드름 많이 났을 땐 그럴지도 모르지.. 히히..

(요즘 들어 갑자기 은희는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났다. 그것도 큼
직큼직하게 나서 이런 추세로 간다면 머지 않아 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목 : 사이버 섹스 9 <제32회>

제 4 장. 사이버 섹스. (9)

은희는 오늘도 아빠가 오셨다는 다급한 말을 남기고 인사도 없이 갑
자기 방을 나가버렸다. 은희가 퇴장한 것이 아빠 탓이라고 믿기는 어
려웠다. 시간이 늦기도 했지만, 꼭 이런 시점에서 엄마나 아빠가 등장
하는 그녀의 행태로 보아 핑계를 댔다고 보아야 했다.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은희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마음까지 평상
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요물이라더니 바람 피운
얘기를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 은희가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
다. 마치 자신은 당연하게도 다른 남자를 사귈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따져보면 은희의 말은 맞는 얘기이다. 내가 다른 여자를 사
귈 수 있는 것처럼 그녀 또한 나 외의 다른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또 그 남자와 밤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조금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것인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내 힘
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고 나는 또 나대로의 생을 살아가면 될 뿐이다. 다만 그녀와
나의 일체감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어차피 인생독행도(人生獨行道), 즉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다. 누구
나 예외는 없다. 나도 은희도 그 외의 누구도 홀로 가야하는 길이 인
생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더 이상 은희에 대해서 질투심
이나 아쉬움이 남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 통신에서 은희를 만나더라도 이런 생각을 견지하기만 한다면
난 결코 그녀 때문에 상심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술 한잔이 하고 싶어졌다.
인생에 아무리 달관을 한다 해도 앙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
다. 그 앙금을 술로 씻어내고 싶어졌다. 시간은 늦었지만 같이 술을
마셔줄 친구는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이 술 한잔을 같이 할 사람이 누가 있던가. 나는 수첩을 뒤
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장재운, 즉 죄백의 이름이었다. 죄없
는 죄백은, 아니 죄많은 죄백은 바쁜 중에도 술 한 잔 하자는 내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이번엔 또 누구야?"
죄백이 내게 물었다.
"응, 아마 너도 알거야. 한사모에 내가 자주 만나던 애 있잖아. 은
희라고..."
"걔 나이가 어리다면서...."
"어리긴... 스물 넷이 뭐가 어려. 알거 다 알만한 나이지."
"하긴... 스물 넷이면 한창 남자를 알아갈 때지."
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도 여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무수
히 많은 녀석이라 내 심정을 잘 이해했다.

내 슬픈 사연을 끝까지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친구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 죄백은 그런 친구였다. 죄백이 다시 내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긴... 새로운 여자를 사귀어야지."
나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을 했다.
"하기야 나라도 그렇겠다만... 그럼 은희는 어떡할 건데...?"
"걔야 뭐... 자기 갈 길을 가겠지. 이젠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하니
까, 은희를 넓은 바다로 놓아주고 싶어.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인 것
같고..."
"흘~! 말은 좋다. 솔직히 말하지 그래? 이젠 싫증 났다고..."
"하하! 싫증 난 것이 아니고 배신당한 거야. 임마. 말은 바로 하자
구."

여자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여자를 조금 모르는 사람이고 여자를 나
쁘게 말하는 사람은 여자를 아주 모르는 사람이라는 루부랑의 말처럼
우린 정말 여자를 아주 모르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백과
나는 시종일관 여자를 헐뜯었다. 진실로 못믿을 존재는 여자라는 듯
이...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여자는 진리보다 애정에 사니 야릇한 존재
인 것이다. 그 애정이라는 것도 지극히 가벼운 애정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진정 여자란 내게 있어 못믿을 존재였다. 적어도 지금은...
"그나저나 너도 이젠 정착할 때가 되잖았냐? 이제 맘 잡고 한 여자
잡아서 결혼도 하고 그럼 좋잖아?"
죄백은 내게 충고하듯 말했다.
"넌 지영씨랑 사는 게 좋으냐?"
"물론 좋지. 행복해서 까무라칠 지경이다."

두 사람은 내가 봐도 환상적인 커플이었다. 지영씨도 여성 포르노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완벽한 부부화합이라고 할 것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보기 드문 한 쌍이
었다. 죄백의 마누라 지영씨의 소설도 꽤 잘 팔리는 모양이었다. 특
히 '빨간 피 천하를 적시다'라는 첫 작품에 이어 두 번째 작품 '색마들
의 행진'은 벌써 오만 부를 넘어선 히트작이었다.

출판사 사장의 입장에서는 요즘같은 불황에 그런 히트작을 써내는
이 부부가 이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특별 보너스로 오백만원이
라는 거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죄백의 얘기를 듣고 나도 포르노 소설
이나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애들 가르치는 선생 체면에 포르노 소설을 쓴다는 것도 이상
한 일이고 해서 참기로 했다.
죄백과 나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결국 새벽 네 시까지 술을 퍼
마셨다. 그러면서 늘 그랬듯이 우린 세상 여자들의 내숭과 음란함을
성토했다. 일종의 울분을 달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울분일 때가 있다. 나는 여자
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그런 울분을 느끼곤 한다. 그 울분은 벌써 여
러번 느꼈었다. 지금처럼...
언제나 그런 울분을 느끼지 않고 살 날이 올 것인가. 어쩌면 그런
날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지금같다면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늙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제 목 : 비디오방의 열정 1 <제33회>
<제33회>

제 5 장. 비디오방의 열정. (1)

넉 달이 흘렀다. 그 사이에 해가 바뀌어 나는 서른한 살이 되었고,
신학기가 시작된지 한 달이 흘러 있었다. 넉 달 동안 나는 세 번의
선을 보았고(어머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은희를 두 번 만났다.
은희는 가끔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었는데 서로의 시간이 맞아 떨어질
때가 두 번이었다.

은희를 만나서는 예전과 같이 섹스를 했지만, 예전의 그 애틋한 열
정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나도
은희도 짐승같은 욕정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서로의 육체를 탐했다.
우린 만나서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여관에 가서 성교를 했다. 서로
를 미워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 외에 서로 집에 있을 때에는 가끔 통신상에서 은희를 만날 수 있
었다. 은희는 대화방에서 나를 만날 때면 자신이 만나는 남자들의 얘
기를 스스럼없이 내게 했다. 나는 그때마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은희는 점점 섹스 중독증에 빠지는 것 같았다. 도무지 한 남자에 만
족하지 못하고 이놈 저놈의 품에 안겨 여우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은희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끼기도 했지만, 내 손
으로 어쩔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은희는 자기나름의 윤리와 도덕에 충실할 뿐이고, 나
역시 나만의 정의를 고수하는 독선과 아집의 덩어리일 뿐이다. 거기
에 조금의 가감도 있을 수 없다. 내 인생이 나의 것이듯, 은희의 인
생 역시 그녀의 손에 달려 있을 테니까.

오늘은 토요일이다. 평일과는 다른 활기가 교무실 내에 넘쳐났다.
주임선생은 낚시를 간다고 아침부터 들떠 있었고, 옆자리의 수학선생
은 약혼녀를 만나서 놀러가기로 했다며 자랑하였다. 정치경제를 가르
치는 미모의 처녀교사인 장선생도 데이트가 있는 모양으로 수업이 끝
나자마자 얼굴에 화장품을 찍어 바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 역시 약속이 있었다. 특별히 누구를 만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지
만, 참석하기로 한 모임이었다.
얼마 전에 새로 가입한 통신동호회의 번개모임이었다. 신입회원은
회비를 면제해 주는 넉넉한 곳으로 이름은 '국악사랑회'였다. 평소에
거문고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있던 차에 우연히 이곳에 가입했는데,
이번에 게시판에 번개공고가 나서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메일을 보냈었
다.
서둘러 일과를 마치고 신촌으로 향했다.
한다방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중에 열 명 남짓
모인 국악사랑회 멤버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통신모임은 묘
한 점이 있다.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 않았어도 막상 만나보
면 저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번개모임에 나가봐도 그
렇고, 정기모임에 나가봐도 마찬가지이다.

여섯 명의 멤버 중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도 두 명이 있었다. 고전
적인 한복이 아닌 개량한복이었다. 한다방은 지하 일층에 위치한 전
통차를 파는 찻집이지만, 일층에서는 질경이우리옷이라는 상표의 개량
한복을 파는 상점도 겸하고 있다. 귀신머리 모양의 벽조목(霹棗木: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사기를 좇는 효과가 있다고 함)으로 만든 열쇠고
리를 팔기도 한다.

나는 거침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저... 국악사랑회 모임 맞지요?"
"맞습니다. 어서오세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중년남자가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민성이라고 하구요, 아이디는 따오이스트
(taoist)입니다."
"아... 도사님이시군요? 전 이선경입니다."
이십대로 보이는 여성회원이 나를 반겨주었다. 상당히 도도하고 고
고해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아이디까지 기억하면서 나를 반겨주
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미모
의 여성이라면...

내 아이디 taoist는 도사(道士)라는 뜻의 영어표기이다. tao가 道
의 영어식 표기이니 taoist는 말그대로 도사라는 의미이다. 솔잎을
먹으면서 양생술을 터득하여 도를 닦으면서 살고 싶어하는 내 마음의
지향을 표현한 아이디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인사한 이선경이라는 여성회원은 며칠전에 대화방에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는 도가의 무위자연이 정확하
게 어떤 뜻이냐고 내게 물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바 있다.
"아하! 한문선생님이시군요!! 이거 귀한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8988 이종민입니다."
스스로를 이종민으로 밝힌 다른 사람 하나가 날 또 아는 체하며 악
수를 청했다. 역시 전에 대화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으로 국립국
악원에서 대금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이 사람은 공상과학만화를 좋아해서 이런 아이디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세의 아마게돈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인류를 만든 컴퓨터의
코드네임이 8988이라는 것에서 자기 아이디를 생각해냈을 정도였다.

나는 모든 회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내 뒤로도 세 명의 회원이 더 오고서야 자리정리가 끝났다. 올 사
람이 다 온 뒤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늘 하는대로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전 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김민성입니다. 악기는 단소를
조금 배운 정도구요. 장차 거문고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가입
했습니다."

내 다음 차례는 이선경의 순서였다.
"전 일본어 번역일을 하고 있는 이선경입니다. 아이디는 sky0517입
니다. 국악과 재즈를 좋아하구요. 접속은 새벽 두시에서 세시 사이에
합니다. 저랑 대화를 하고 싶으신 분은 그때 절 불러 주세요."
예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는 선경은 사자갈기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얼굴은 그야말로 조그맣고 여성스러운데 퍼머를 한 머리칼을
풀어헤쳐서 야성미가 듬뿍 배어나오고 있었다. 특히 조그맣고 얇은
입술이 특징적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차가운 인상에 매끄러운 피
부가 돋보였다. 이지적이면서도 여성스러움을 간직한 미녀였다.

선경의 소개가 끝난 다음에 다시 몇 명의 소개가 끝나고 한과를 먹
으면서 차를 마셨다. 나는 세작을 마셨다. 우전차의 향이 그윽한 것
이 아주 좋았다.
나는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사람들의 얘기를 세이경청(洗耳敬聽)했
다. 나의 장점 중에 하나는 여러 사람 틈에 있을 때에 자중할 줄 안다
는 것이다.

나는 섣불리 대화에 끼어 들어서 가벼워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만약 꼭 할 말이 있으면 되도록 짧게 핵심을 짚어서 얘기를 할 뿐, 세
세한 부분까지 아는 척하면서 잘난 체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중요
한 처세술 중의 하나로서 이렇게 하면 저도 모르게 범접하지 못할 사
람이라는 인식을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여자에게는 효과적
인 자기 어필의 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차를 모두 마시고 나서 우리는 이차를 갔다.
신촌의 좋은 점이란 워낙 술집이 많기 때문에 술집을 찾으러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린 근처의 맥주집에서 오랜 동안 술을
마시고 삼차로 노래방에 갔다.
내가 이승철의 '그대가 나에게'를 열창하고, 선경이 장필순의 '어느
새'를 감칠맛나게 부르고, 김종민이 복제인간의 '꿍따리샤바라'를 부
르는 사이에 시간은 열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회원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이미 마신 것에 더
해 노래방에서 마신 맥주의 양도 상당했으므로 우린 모두 취해 있었
다.

특히 김종민은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다 되어서 우린 밖으로 나왔다. 사월초의 밤바람은
꽤 싸늘했다. 두 사람이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와 선경, 그리고 김종민이었다.
김종민은 굳이 술 한잔 더하자며 나의 소매를 끌었다. 나는 술을
꽤 먹었지만 그렇다고 한잔 더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사람의 상대가 되어줄 정도는 아니었
다.

"민성님! 민성님? 나랑 술 한잔 더 해요. 예? 내가 사겠습니다."
김종민은 술에 취해 호기를 부리는 것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술
살 돈이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종민님!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다음에 내가 술 한잔 살게요.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갑시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김종민에게 나는 일찍 집에 들어가라는 말을
했다. 아까부터 자꾸 날 붙잡고 치근대는 통에 한 대 때리고 싶은 마
음이 들었지만 술 취한 사람을 팰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성질을 많
이 죽여야만 했다.
"아닙니다. 오늘 꼭 제가 술 한잔 사고 싶습니다. 꺼억! 오늘 정말
반가운 사람 만나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제 맘 이해하시죠?
꺽!"

거의 맛이 간 상태의 종민님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는 듯 아까부터 술만 들이키더니 내게 뭔가 하고싶
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그닥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니, 누군들 고민이
야 없겠는가만은 내가 생전 처음보는 사람의 넋두리를 한없이 들어주
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고보면, 김종민의 요구는 내게 있어서 부당
한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제 목 : 비디오방의 열정 2 <제34회>
<제34회>

제 5 장. 비디오방의 열정. (2)

그래서 나는 다시 완곡하게 거부했다.
"종민님! 나도 종민님과 술 한잔 더 하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
고, 나도 일찍 들어가봐야 하고... 그러니 다음에 다시 만나서 한잔
합시다."
김종민은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기어이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선경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미치겠네!"
미치겠네?
나는 선경이 왜 미치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같은 통신동호회
회원일 뿐인 사람이 술에 취해 길에 쓰러졌는데 왜 이 여자는 미치겠
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해졌다.
"선경님! 종민님이 원래 술버릇이 이래요?"
"아니요. 전에는 안그랬는데 오늘은 이상하네요."
"음..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이대로 두면 얼어죽
을 지도 모르는데..."

사월초의 밤기온은 차갑다. 그대로 두면 정말로 얼어죽을는지도 모
른다. 얼어죽든지 말든지 나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
난 것도 인연인데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되고보
니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이 야속하게도 느껴졌다. 마치 짐을 떠맡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가장 좋긴 한데... "
선경은 말꼬리를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마치 내가 집까지 김종
민을 데려다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선경의 눈짓을 모른
체하면서 말했다.
"어차피 집까지 데려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여관에 재웁시다. 선
경님은 가방을 들어주세요. 내가 업을 테니..."

졸지에 술취한 놈을 업고 노가다를 하게 된 나는 선경이에게 가방을
들리고 여관을 찾았다. 그러나 토요일은 방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 많은 신촌의 여관이 이미 꽉 들어차서 빈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
기였다. 여자와 함께 자려는 것도 아니고 술취한 놈 재우려고 하는
일인데, 방구하기마저 쉽지 않으니 너무나 짜증이 났다.
세 군데의 여관을 전전한 끝에 김종민을 여관방에 눕히는 데 성공했
다. 그나마 술취한 놈을 받지 않으려는 여관 주인에게 웃돈을 얹어 주
어야만했다. 간신히 김종민을 여관방 바닥에 쓰러뜨린 후에 나와 선
경은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시원했다.

어려운 일을 함께 끝낸 동지적 우애가 생겨난 탓일까.
선경의 갸름한 얼굴이 이뻐 보였다. 아니 실제로 이쁜 얼굴이었다.
아까는 애써 외면하려는 심리가 나도 모르게 있어서 그닥 얼굴에 신경
을 쓰지 않았었는데 지금 보니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이다.
특히 선경은 하체가 발달하여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키
는 아마 167이나 168 정도..?

열 두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신촌 거리는 아직도 활기가 넘
쳐 흘렀다.
"휴유~~ 애쓰셨어요."
선경은 나의 노고를 치하했다. 나는 짐짓 겸손한 척 말을 받았다.
"별 말씀을... 저야 괜찮지만 선경님이 정말 애쓰셨지요. 늦은 시
간에..."
본의 아니게 차 시간을 놓친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집에 가야할 시간
이 되었다. 그러나 어차피 늦은 것. 조금 더 늦어도 상관은 없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스무살도 안되었을 듯
한 삐끼가 다가왔다.

"형님! 간단하게 소주 한잔 하시려면 절 따라오세요. 밤늦게까지
하는 포장마차가 있습니다."
삐끼의 말을 선경이도 들었다.
"선경님. 어차피 늦은 거 소주나 한잔 더하고 갑시다."
"음... 좋아요!"
일초 동안 생각하고나서 선경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삐끼를 따라가니 지하에 자리잡은 넓은 술집이 나왔다. 시장 분위
기가 나는 포장마차 스타일의 술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신촌
에 언제 이런 곳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안주의 메뉴는 그야말로 포장
마차였다.

소주 한 병에 멍게를 시켜 놓고 우린 잔을 기울였다.
"일본어 번역일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예. 그냥 놀자니 뭐하고 해서 아르바이트 하는 거에요."
"주로 어떤 책을 번역하세요?"
"하하! 책은 아니구요. 신문기사를 번역해요. 주로 경제신문이요.
매일 일거리가 팩스로 오거든요. 그걸 번역해서 메일로 보내주는 거지
요."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게 돈이 되나요?"
"음... 그냥 용돈 정도 되는 거에요. 많이는 못벌어요."
"그렇군요. 저도 번역을 해본 적이 있는데, 번역은 정말 힘든 일이
에요. 완벽하게 잘할 수도 없고..."
"후후.. 에고 쑥스러워라. 전 그냥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하는 거에
요. 남에게 백수라고 말하기가 챙피해서 번역한다고는 하지만..."

선경은 정말로 쑥스러워했다.
조그맣고 얇은 입술이 벌여지며 나오는 그녀의 음성이 감미롭게 들
렸다. 내가 취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녀가 이쁜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을 점검해보았다. 나는 정말로 취한 것일까?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눈을 깜빡이면서 주위의 사물을 찬
찬히 둘러 보았다. 내 몸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주위의 사물도 다
잘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은 만취한 상태가 아니다.
나는 다시 선경이를 보았다. 머리칼을 뒤로 넘긴 선경이의 얼굴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선경은 매미의 이마를 닮은 반듯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눈썹이
약간 희미한데 그것을 화장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눈은 상당히 큰 편
이었다. 큰 눈을 가진 여자는 겁이 많다고 하는데 선경은 지금 전혀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열두시 반, 아니 그새 시간이 흘러 벌써 한시 오분전이었다. 이 시
간까지 남자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전혀 겁
을 내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이럴 때엔 내 직업이 조금은 도움이 되
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선경의 얼굴을 살펴 보았다.
코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서
마늘쪽같은 코는 선경의 얼굴을 귀엽게 보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선명한 인중에 이어 작고 얇은 입술은 선경의 얼굴을 특징지워주고
있었다. 여성적이면서 주위의 강한 권유에 쉽게 이끌리는 성격을 가
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내 얼굴이 이상한가요?"
선경은 내가 찬찬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뻐서요. 하하~! 아무래도 내가 취한 모양이군."
"하하!! 민성님. 혹시 응큼한 사람 아니에요?"
"후후! 선경님, 그렇게 물으면 내가 스스로 응큼한 사람이라고 하겠
어요?"
"물론 당연히 아니시겠지요. 그러나..."
선경은 장난스럽게 내 모습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시늉을 했다. 그리
고는 이렇게 말했다.
"음.. 얼굴을 보니 호색한!! 이렇게 써 있구요. 손을 보면 섬세한
성격으로 여자를 잘 꼬시겠네요. 하하~!"
"아니! 그렇게 정확할 수가..?"
"하하하!!"
우린 같이 웃었다.
웃음!

웃음처럼 자리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우린
어느새 서로에게 친근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선경님,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나는 내심 선경이가 나보다 서너 살은 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서른 살이에요. 민성님은요?"
선경은 겉보기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와 불과 한 살 터울이었다.
나는 선경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래요? 생일은?"
"1월 1일이요. 민성님은요?"
"난 12월 31일이니까... 선경님과는 하루 차이네요. 우와!!"
나도 놀랐지만 선경은 나보다 훨씬 더 놀랐다.
"정말이에요? 이런 경우는 첨이야. 어쩜..."

여자의 속성 중에 하나가 사소한 것에 감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태어나는 나라에서 같은 날도 아니고 하루 차이
로 태어난 것이 무어 대단할 것이 있겠는가만 선경은 그런 사실이 못
내 감동적인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선경은 내가 태어난 시간까지 물어왔다.
"몇 시에 태어났어요?"
"자시(子時). 정확하게는 열한시 45분에 태어났데요. 선경님은요?"
"전 한낮에 태어났데요. 열두시쯤에요."
"그럼 대략 열두시간 차이군요."
"그렇네요."

우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나이차는 한 살, 태어난 시간 차이는 열두시간밖에 안되는 두 남녀
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다.
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선경에게 말했다.
"선경님! 오뉴월 뙤약볕이 하루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아요?"
"흥! 하루차이도 아니고 열두시간 차인데두..?"
선경이는 어느새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말을 받아 대꾸했다.
"열 두시간이 얼마나 큰 지 아직 모르는구나. 그 열두시간이 서른
살과 서른 한 살의 차이라구요."
"에!!! 별 걸 다 유세하시네."
야유하듯 장난스레 말하는 선경의 모습이 귀여웠다.
"하하! 선경님. 우린 나이는 다르지만 실제론 동갑도 이런 동갑이
없으니 이제부터 말을 놓고 지냅시다."
선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턴 친구로 지내요."

선경은 조금도 스스럼이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꼭 쥐고 흔들었다. 피아노와 타자를 잘 칠 것 같
은... 가늘지만 힘이 느껴지는 그런 손.
이렇게 해서 나는 동갑내기 여자친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손목시계의 시침은 한시를 향해 있었다. 소주병의 술이 다 비워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홀짝
홀짝 마신 술이 내 혈관 속을 흐르며 내 몸을 적시고 있었다.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술이 그렇고 따뜻한 말이 그렇고, 해맑은 미소
가 그렇다.
선경의 목소리는 취기와 함께 내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선경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선경아! 늦었다. 나가자!"
선경은 내가 불쑥 반말을 하자 멈칫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수긍하더니 역시 반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좋아! 나가자!"
밖에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새벽 한시의 신
촌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대개는 우산이 없이 걸
어가는 사람들 속에 우린 서 있었다.
마치 안개와도 같은 가는 비가 가로등의 불빛을 부옇게 흐려놓고 있
었다. 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불빛을 바라보았다.
저 불빛 속으로 아스라한 얼굴이 보였다.
누구더라...? 저 얼굴...! 낯설지 않은, 그러나 아주 먼 곳에 있
는 사람의 얼굴...!

나는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불빛 속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내 옆에는 선경이가 있었
다.
그녀는 내 얼굴을 취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더
니 내 얼굴에 뭔가 묻은 것처럼 손을 내밀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너... 참... 좋다."
내가 전율을 느낄 정도로 도발적인 말이었다.
제 목 : 비디오방의 열정 3 <제35회>


제 5 장. 비디오방의 열정. (3)

소슬하게 내리는 밤비가 그녀를 대담하게 만든 것일까. 나와 선경
이의 관계를 상정해볼 때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할 정도는 결코 아니
다. 술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
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는 선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착시현상일까.

선경이 우는 것 같았다.
"너 울고 있니?"
"아니. 그냥 감동적이야. 니가... 그래서 그래. 우는 거 아니야."
그러나 말과는 달리 선경은 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
뜨릴 듯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하고서 자신은 울지 않는다고 했다. 나
의 무엇이 선경이를 감동시켰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감동적인 사람이라니... 우린 참 묘하다."
"후후! 나 이상하지? 첨 만난 사람에게..."
"응. 조금. 그치만 괜찮아. 누구나 첫만남으로 시작하는 거니까. 앞
으로 날 만나게 되면 아마 나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걸?"
"그래? 그럼 기대해 봐야겠네."

선경은 어느새 명랑함을 되찾았다.
웃음을 머금으면서 내게 말했다.
"너 재즈 좋아하니?"
"글쎄.. 별로 들어보진 않았어."
"지금 영업하는 재즈바가 있거든. 같이 갈래?"
"그래? 어딘데?"
"가까워. 이대앞."
"좋아! 가자."

우린 손을 잡고 걸었다. 선경의 손이 따뜻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
에 비해서 전체 손은 살집이 많고 부드러웠다. 수상학적으로 손이 따
뜻한 사람은 마음도 따뜻하다고 한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선경이
의 마음도 따뜻할 것이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보편적 의미의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조금 걸으니 차도가 나왔다. 차들이 어느 정도 속도를 내면서 달리
고 있었다.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사람들이 길을 건너가는 것이 보였
다.

나는 선경의 손을 잡고 뛰었다. 조금 빨리 가면 이번 신호에 길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푸른 신호등이 깜빡거리면서 사람들을 재촉
하고 있었다.
우린 급히 뛰다시피 길을 건넜지만 우리가 겨우 반 정도 건넜을 때
이미 빨간 불로 바뀌어버렸다. 성질 급한 택시가 우리 앞을 부웅! 소
리를 내면서 지나갔다. 우린 급히 멈추어야만 했다. 뒤로 물러나려고
해도 이미 차들이 속도를 내고 있었다.

우린 꼼짝없이 길 한가운데에 갇히고 말았다.
"칫! 나쁜 놈들."
내가 볼멘 소리를 내뱉었다.
선경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민성아!"
선경이 날 불렀다. 내가 고개를 돌려 선경을 바라보자 선경은 잡았
던 손을 풀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 목 뒤로 두 팔을 두르더니
내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등을 감
싸안을 수밖에 없었다. 얇고 긴 그녀의 혀가 내 구강안을 종횡무진 휩
쓸고 지나갔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는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물결 가는대로 내맡겨진 뗏
목처럼 내버려 둘밖에는...
빠아앙!!
지나가던 승용차의 크락숀 소리가 귀를 때렸다. 대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키스신에 질투가 난 어느 운전자일 것이다. 운전자 뿐
이랴. 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이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경은 그런 것에는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을 더 있은 후에야 선경은 나를 놓아주었다.

"후우!"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선경은 그런 나를 장난꾸러기처럼 바라보
고 있었다. 어느새 신호등은 다시 파란불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우릴 신기한 짐승 보듯 하면서 지나치고 있었다. 이대로
주저하다간 다시 길 가운데에 갇힐 지도 몰랐다.
우린 서둘러 길을 건넜다. 걸으면서 내가 물었다.
"너 원래 그렇게 대담하니?"
내가 물었다.
"아니. 이래본 건 처음이야."
순결한 소녀의 웃음을 지으면서 선경은 대답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순진무구해서 잠시 어린 소녀를 보는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YELLOW JARKET
우리가 도착한 재즈바의 이름이었다. 대로변에 위치한 옐로우자켓
은 재즈바로서의 분위기는 별로였다. 소파도 다방 분위기를 내고 있
었고 실내장식도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손님은 북적북
적 많았다.

시끄러운 재즈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밀착했다. 선경이 내 귀에 입
을 대고 말했다.
"이게 Chet Baker의 My funny valentine이야."
난 쳇 베이커가 누군지도 모르고 마이 파니 발렌타인이 어떤 노래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경의 얘기로는 무척이나 유명한 사람의 유명
한 노래라고 했다. 또한 쳇 베이커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뮤지션들
이 이 노래를 연주했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듣고 보니 어디선가 들
어본 노래같기도 했다.
우린 발렌타인 데이에 만난 연인처럼 깊고 긴 키스를 했다. 재즈바
라는 곳은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만드는 곳이다. 난생 처음 재즈바를
와봤는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하지 않았다. 늘상 다니던 곳에 온 것처
럼 난 편한 마음이 되었다.
우린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서로
를 감싸안았다.

나도 모르게 선경의 가슴을 만졌다. 선경은 잠깐 움찔했지만 특별
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 손이 가는대로 내버려 둘 뿐이었다.
선경의 가슴은 보기보단 컸다. 손바닥 가득히 볼륨있는 유방이 꽉
들어왔다.
"너 생각보다 가슴이 크다."
선경의 귓불을 빨면서 나는 말했다.
"왜 내 가슴이 작다고 생각했을까? 안작은데..."
자신의 가슴이 작다고 말하는 내가 못내 이상한 모양이었다. 아니
면 결코 작지 않은 자신의 가슴을 평가절하한 내가 못마땅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선경의 가슴은 생고무와 같은 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선경에게 말했다.
"나랑 그거 할래?"
선경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반문했다.
"그거? 섹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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