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숙의추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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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573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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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처녀의 신입생 환영회 2>>>>>
-죽여버릴 꺼야! 란이, 란이 널 오늘 갖고 말겠어!
-아악, 이러지 마세요! 선배님, 전 숙이라고요!
석의 얼굴은 드러난 숙의 앞가슴의 맨살 위로 다시금 내려꽂히듯이 파묻히고 있
었다. 그의 뺨과 입술은, 정신없이 브래지어만으로 가려진 숙의 유방 위를 유린
하고 있었다. 숙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틀어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기가 막혔
다. 남자의 완력이란 이다지도 강한 것이었단 말인가. 숙은 죽여버린다는 그의
외침에 겁이 더럭 났다.
-거짓말하지 마, 난 정말, 널 갖고 싶어...!
-거짓말이 아녜요, 아흑, 전 숙이란 말에요, 선배님!
숙은 너무나 두려운 이 상황에 더럭 겁이 났다. 안돼! 이럼 안돼요! 그녀는 태어
나서 처음 남자의 완력을 당해보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앗!
그러나 그녀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지, 석의 힘은 더욱 강하게 그녀의 몸을 타누
르며, 두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놀란 숙은 고토을 채 느낄 수
도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
면 브래지어까지 뜯겨져나갈 판국이었다.
-선배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전 언니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녀의 저항에는 아랑곳없이, 역한 술냄새를 풍기는 석의 입술은 이제 거의 밖으
로 삐져나오기 일보직전인 숙의 유방 위를 더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악다
구니에 정신이 들었던 것일까, 갑자기 그의 하체가 조금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그 틈을 타 숙은 재빨리 석의 허벅지에 눌려있던 팔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상체를 밀쳐내려한 것도 잠시, 숙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께를 타누르던 석의 하체가 일순 그녀의 허벅지께
로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숙의 치마는 그의 양손에 의해 확
들쳐올려져 끌어올려진 것이다.
-어머낫, 뭐하시는 거에요! 악, 안돼!
숙의 손이 자유로워져 그를 채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치마자락을 남김없이 올
린 석의 손은, 무방비로 드러난 숙의 하체 위로 옮겨져 그녀의 팬티스타킹을 끌
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넌, 넌 내 꺼야!
-무슨 짓이야! 선배! 선배님!
스타킹의 얇은 올들이 쭈욱,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은 다급하게 한손으
로 석의 상체를 밀어내며 다른 한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선배님!
그녀는 최대한 허리를 틀며 빠져나오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다잡아쥔 석의 손아
귀는 이제 숫제 그녀의 팬티마저 스타킹과 함께 붙잡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말
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숙의 하얀 팬티는 어느새 허벅지께까지 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숙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그의 손을 제지하려 했지만, 불가항력적
인 그의 손길에 어느새 숙의 팬티는 자꾸만 벗겨지고 있었다.
-너의 이곳, 이곳을 가질 거야!
-아악, 안돼요! 석이 선배님!
숙의 팬티 끝자락이 내려져, 어둠 속에서 허연 아랫배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
다. 거의 그녀의 음모가 노출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녀의 뽀얀 하복부의 듬성하
게 짙은 수풀이 언뜻 드러나고 있었다. 숙의 부끄러운 부분이 유린당하기 일보직
전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숙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숙의 사타구니가 거의 절
반 이상 드러나자, 만취상태의 석은 이미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한 모양인
지,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하복부에 고개를 처박았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막 드
러난 숙의 곱슬한 음모에 비벼지기 시작한 무렵, 그녀에게는 유일한 기회가 생겼
던 것이다. 다름아니라, 석의 입술이 그녀의 샅을 점령하기 위해 숙여진 순간,
숙의 버둥대던 다리를 누르고 있던 그의 하체가 다소 헐거워진 것니다.
숙은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재빨리 다리를 들어올려, 석의 어
깨를 자신의 발과 손으로 최대한 힘을 주어 밀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막 목적지까지의 한치도 못되는 수풀까지 도달했던 석의 입은, 이 순식간의
반격에 억,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숙의 죽을 힘을 다한 필사의 노력은, 그의
몸을 거의 허공에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 쿵, 소리와 함께 석의 몸은 완전
히 뒤로 제껴진 채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이후의 일은 너무나도 경황이 없어, 숙에게도 정신 없던 순간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옷가지를 챙기고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여관
을 빠져나와 몇십분인가를 정신없이 도망쳤다. 석이 쫓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
다.
그렇게 족히 1킬로미터는 달렸던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있건 없건,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10여분쯤 달렸을까. 도저히 숨이 턱에
받혀 주저앉을 정도가 되서야, 숙은 길가의 전봇대를 짚고서 숨을 돌릴 수 있었
다. 마치 숨을 안쉬고 달려온 것만 같았다. 허리를 굽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시야에, 그제서야 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먼저 자기의 다리가 보였다. 아직도 후들거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다행
히도, 구두는 신고 있었다. 대신 스타킹은 거의 종아리부터 허벅지에 걸쳐 올이
나가 있었다. 그제서야 숙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큰 길가여서,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구멍가게나,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간간
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숙은 그 모두가 문제가 아니었다. 소리내어 엉엉 울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뿐이었다. 닭똥같은 눈물이 여기저기 긁힌 구두 발치에 뚝
뚝 떨어졌다.
기가 막혔다. 아니 기가 막힌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차라리 허
허 웃고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도 학교에 처음 신입생으
로 들어간 첫날, 다른 사람도 아닌 선배의 남자친구에 의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따질 수도 없었다. 숙은 그
렇게 한참동안을 길거리에서 울었다.
어쨌든 집으로는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도망쳐온 쪽은 집으로 가는 방
향이었다. 한동안 울다가 허리를 들고 옷가지들을 살폈다. 절반 이상 뜯겨진 스
타킹이야 그렇다고 쳐도, 입학축하 선물로 엄마가 사준 정장과 블라우스는 엉망
이었다. 구겨진 것은 둘째치고, 우선 블라우스 단추가 반이상 뜯겨지고 없었다.
윗도리 자켓의 단추도 두개중 하나가 행방불명이었다.
옷 뿐만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저항했던 탓에, 갑자기 긴장이 풀린 몸의 구석구
석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사방이 멍투성이인 것 같았다.
이런 상황으로 택시를 타거나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조금 먼길이기는 했어도,
차라리 눈에 안띄는 어둑한 길가를 걷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가끔식 마주쳐 지
나는 행인들이 흘끔흘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오늘 아까 여관방에서 당
한 수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절뚝거리며 걷는 동안에도, 쉼 없이 숙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다행히 보
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당한 일이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얼굴도 못들고
학교를 다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이 가까워오자, 숙은 골목 모퉁이에서 한참을 쉬었다. 이렇게 엉망이 된 모습
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눈물도 잠시 동안은 - 그녀의 방에 들
어가기 전까지는 - 거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매무새를 부모님께 들킬 수
는 없었다.
우선, 사람이 안보는 곳에서 살짝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스타킹을 벗어 쓰레기
통에 버렸다. 아마 아무리 여자인 어머니도 자기 딸이 스타킹을 신었었는지 벗었
었는지까진 기억을 못할 것이란 기대였다. 상의는 대충 옷자락을 당겨 뜯겨진 단
추부근을 가렸다. 그리고 손으로 앞자락을 부여잡고 들어선다면, 아마 아무도 알
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가만히 보니 치마속이 엉망이었는데, 숙이 입고있던 팬티
는 꼭 화장실에서 제대로 안올리고 온 사람모양 자신의 엉덩이 절반께까지 끌어
내려진 채 간신히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랴. 그곳은 최소한 겉으
로 드러나는 부분은 아니었다.
숙은 다시 한번 눈물자국을 잘 닦은 뒤 쉼호흡을 했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는
척해야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들통이 난다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질
것은 뻔했다. 그렇게되면 아무리 둘러댄다고 하여도, 더 큰 엄청난 거짓말을, 현
재의 그녀로서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드리자마자 곧장 방에 들어
오기까지, 그 두방망이질치는 몇십초가 숙에게는 수십 수백년처럼 길게 느껴졌
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긴 이후였다.
-저녀석,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지금이 몇신데.
-아이고, 내버려둬요. 그랬잖아요, 오늘 신입생 환영회 한다구...
아마 아버지는 아직 잠들지 않고 그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안
방에 불려가 한바탕 난리를 치르며 훈계를 받았을 테지만, 다행히도 어머니가 막
아주고 있었다. 숙은 그날따라 그토록 엄마가 고마울 수 없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집안은 곧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숙은 방문을 잠그고 실컷 울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당혹스럽고, 또 치욕스러웠다. 사실 육체적인 의
미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었지만, 숙에게는 처음 겪어본 남자의 완
력이었고, 또한 일생 처음 겪을 뻔 했던 남자의 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 깨닫게 된 것이다. 얼추 책과 호기심으로 남자란, 아니 남자의 성욕
이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몸소 겪을 수 있던 경험은 오늘 밤이 최초
였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주간지에서나 들어본 남녀관계 - 그것도 여자 선배와
그 남자친구를 통해 - 를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일단 그녀가 울음이 잦아들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밤새 뜯어졌던 옷단추를 달아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 옷장 안에 걸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겨진 부
분을 보이지 않도록 다림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끝난 다음에야, 숙
은 씻을 생각도 못한 채 지쳐 잠이 들어 버렸다
숙이 눈을 떴을 때, 이미 창가에는 밝은 봄 햇빛이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한동
안 기분이 멍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갑자기 후다닥, 침대 위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다행이다, 내 방이구나.
그렇게 익숙한 방인데도, 숙은 왠지 새삼스레 자신이 자기 방에 있다는 것이 정
말 안심이 되었다. 찬찬히, 방을 둘러 보았다. 침대 발치의 옷걸이에, 어제 그녀
가 입고 나갔던 새옷, 그러나 밤새 그토록 수난을 당했던 바로 그 옷이 걸려 있
었다.
그래... 옷, 그제서야 숙은 지난 밤의 끔찍한 경험이 떠올라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여관 방, 석이 선배, 란이 언니... 그리고... 그녀는 일어나 어머니가 그
토록 이뻐 보인다던 그 양장 옷을 살펴 보았다. 대충 밤사이 다림질을 했지만,
군데 군데가 구겨진 티가 났다. 숙은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겉옷의 단추 하나
가 떨어져 있다.
그 떨어져나간 단추자리가, 그녀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다. 어제 밤 찢겨질뻔한
옷가지, 울면서 돌아오던 집앞 골목길... 잠든 사이 잊고 있던 악몽같은 그 경험
이 다시 숙의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숙아, 일어났니?
문 밖에서 엄마가 부른다.
-예, 예!
그녀는 화들짝 놀라 황급한 대답이 튀어 나왔다. 행여라도, 이 방에 들어올까,
그래서 엄마에게 이 옷들을 들킬까, 숙은 더럭 겁이 났다.
-얼른 나와 밥 먹어, 원 애도... 왜 그렇게 늦잠이야...!
다행히 숙의 어머니는 부엌께에서 목소리만을 내신다. 서두르자. 그녀는 우선 거
울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실 거야. 그럼... 최대한  눈치채이
지 말아야해. 얼굴은 엉망이다. 채 세수도 못했는데, 더군다나 어제의 사건들로
인한 눈물자국이 아직도 숙의 눈가에 말라붙어 있다. 또 한번 눈물이 핑도는 느
낌이었다.
그냥, 그냥 내겐, 아무 일 없었던 거야. 부모님이 뭐라고 하든, 난 어제 그 신입
생 환영회에서 술을 좀 많이 마셨다고 둘러대야해.
얼굴과 옷매무새를 대충 다듬고, 그녀는 헝클어진 침대를 정리하기 위해 몸을 돌
렸다. 밤새 시달린 악몽 탓일까... 베개며 이불은 한참 어지럽혀 있었다. 베개,
그녀의 그것은 아직도 눈물로 베개잇이 젖어 있었다. 그 베개를 집어든 숙의 뇌
리에 한가지 기억이 들고 있었다.
석이 선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시계를 보니 벌써 늦은 아침이다. 그 여
관방에서 아직 자고 있을까, 아니면 깨어나 돌아갔을까. 그리고... 그리고... 어
제 일들을 기억할까?
그 생각이 미치자, 소름이 숙의 몸에 쫘악 끼쳐왔다. 그, 그 선배가 지난 밤의
사고를 기억한다면...? 그는 내가 란이 언니인줄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란이
언니에게 물을 것이고... 그녀는 대답을 할 것이다 - 그럼 어떻게 되는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석이 선배가, 지난 밤 자기를 여관 방에 데
려다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안다면...! 숙은 너무나 큰 당혹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아아, 그 선배가 모두 기억이 난다면, 아니 기억이 나지 않아도, 어쨌든
자기를 그 여관방에 눕혀놓은 것이 누군지는 캐물을테고 - 그렇다면 적어도 란이
언니와 석이 선배 그 둘은 숙이 여관방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다.
아랫입술이 깨물어졌다. 수치심이 그녀의 온 몸을 떨게 만들었다. 난 몰라, 어떻
게 그 사람들 얼굴을 다시 보지?
-얘, 아침 안 먹을거야? 숙아!
펄쩍 뛰듯 다급한 대답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예, 가, 갈께요...!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뭘 어째야 할지, 갈피는 커녕 낭패감만이 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오늘이 토요일인 탓에 월요일까지는 학교에서 란이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 하나 외에는.
그날, 그리고 일요일까지, 숙은 집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막막했다. 집안 식구들이 이상한 눈
초리를 보내고, 고등학교 친구 여자애들이 연락을 해왔지만, 그녀는 오로지 몸이
안좋다는 핑계만으로 자기 방 방밖으로도 미처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해답은 없
었다. 무얼 어쩔 것인가. 당장 내일은 학교를 가야하고, 그것도 대학 입학 후 첫
등교인데.
그래, 기억 못할 거야. 기억을 한다 해도, 란이 언니에게 세세하게 말할 수는 없
겠지. 분명 둘이 사귄다고 했으니까, 쉽사리 여자 후배가 여관방까지 같이 데려
다 줬다는 사실은, 십중팔구 못할 거야. 그리고... 란 선배가 뭐라 해도, 나 역
시 시치미를 뚝 떼는 거야. 하여간, 그날 진짜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사고도 그 석이란 선배가 술 취한 비몽사몽 간에 일어난 착각 탓이니까.
내겐, 내겐 잘못 없는 거야 - 이틀동안, 곱씹어 만들어낸 숙의 위안이었다.
어쨌든 월요일이 되어, 숙은 학교에 갔다. 수강신청이니, 교재 구입이니,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바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별반 다른 것에 채 신경을 쓸 필
요가 없었다. 당연히, 그 란이 언니도 그녀는 한나절 내내 마주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오후가 될 무렵 숙은 피곤을 느꼈다. 하지만 동기들 - 신입생 친구
들은, 벌써 끼리끼리 친한 티를 내며 삼삼오오 학교 주변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냥, 집에나 가야지... 그녀는 왠지 호기심이 그다지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
리고, 그냥 그렇게 그녀는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머, 숙아!
막 교문 앞을 지날 무렵이었다. 누군가의 손바닥이 숙의 어깨를 갑자기 치고 있
었다. 놀라 뒤돌아본 그녀의 뒤에는, 그날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인물 - 그
언니가 서있었다.
-아, 란, 란이 언니...!
낭패였다. 란, 그녀가 날씬한 자태로 반가운 척 미소까지 띠며 그녀를 불러세우
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 벌써 집에 가니?
-예, 예 언니...
어쩐담? 오늘 하루는 무사히 지날 줄 알았는데...
-후훗, 착한 학생이구나! 참, 그런데... 너 지금 바쁘니?
최대한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침착함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숙이인데, 란은 뭔가
곤란한 상황을 연출하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저, 조, 조금, 아, 아니요...
-그래, 그럼 잘됐다. 잠깐 언니랑 얘기좀 하지 않을래? 내가 차 한잔 살께.
아아, 가장 우려했던 사태에 근접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그날,
그날 밤 일을 물으려는 건 아닐까? 석이 선배, 그 사람이랑 무슨 일이 있었냐고
- 정말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뛰어 도망칠 수도 없는
데.
란은 이미 그녀를 뒤세우고 근처의 까페로 앞장 서고 있었다. 숙의 입술이 깨물
어졌다. 최대한, 최대한 해명해야 돼. 아니, 변명이라도 해야 돼. 내게 잘못이
있던 것은 아니야...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으로, 까페 문을 들어서
는 숙의 다짐이었다.
그러나 까페에 들어서자, 란은 우선 가장 으슥한 구석자리로 그녀를 앉히고 있었
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자기가 아는 얼굴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는 눈치였다.
-왜, 왜 그러세요...?
그래, 이왕 맞을 매라면 먼저 맞자. 숙은 당혹감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선수를 치
기로 했다.
-으으, 저... 그게, 숙아...
의외였다. 이상하게도 란이 먼저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선배도 그런 오해받을
문제를 얘기 꺼내기 힘든 것일까. 숙은 눈을 질끈 감는 심정으로 자기가 고백하
기로 마음 먹을 찰라였다.
-저, 어, 언니... 혹시 석이, 석이 선배 일이라면...
그러나, 란은 정반대였다. 마치 숙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 고맙기라도 한 듯한
말투로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응, 그래... 너도 알고 있구나, 고마워... 그래, 그것 땜에... 미안하다...
고맙다니? 석이 선배 데려다줘서? 미안하다니? 석이 선배가 자기인줄 알고 날 겁
탈하려던 것이? 숙의 마음 속에선 덜컥, 올 것이 왔다는 긴장감이 들고 있었다.
-진짜 고맙다, 얘... 니가 먼저 얘기해주니...
응? 잔뜩 곤란한 숙의 귓가에, 그러나 란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 외의 대답이 나
오고 있었다.
                       
-그래, 니가 말 안한 것 같더라. 그 때, 난 석이 형이 나 약속 있다는 얘기 들은
줄 알았거든... 아니면 니가 그 형 바래다 주면서 얘기한줄 알구 얼마나 걱정했
는데...
란의 얘기는 전혀 뜻밖이었다. 숙은, 자기가 석이 선배와 여관방에 갔던 사건,
그걸 얘기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얘기란 말인가? 그녀는 적어도 오해를 살
일 때문에 추궁을 당하거나 - 아니면 차라리 아까 미안하고 고맙다는 이 언니의
말처럼, 석이 선배가 추행하려던 것을 다안다, 그래서 미안하다 - 내지는, 석이
선배랑 여관 간 것 알고 있다, 그래서 데려가 재워준 것이 고맙다 - 이런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석이 형, 술만 마시면 얼마나 날 찾아대는지... 그래서 그날도, 숙이 니가 나
딴 약속 있다고 사실대로 대답한 줄 알고...
아아, 그제서야 숙의 뇌리에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헝클어진 옷매
무새로 나오던 이 언니, 그 안에 같이 들어가 바지춤을 부여잡고 실랑이를 벌이
던 한 남자, 약속 있다며 사귄다는 석이 선배도 팽개치고 다급히 사라지던... 그
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그 화장실의 남자 손에 이끌려 여관을 들어서던 그 모습.
..!
이제 이 란이 얘기하는 실마리를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그렇다면, 그
날 택시 안에서 우연히 숙이 목격한 란의 밀회장면은 사실이란 말인가. 양 다리
삼각관계 - 그것도 상당히 노골적인, 숙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까지 보이는
이 여자 선배의 비밀스런 남자관계, 그걸 지금 말하는 것 아닌가. 그 차가운 인
상의 란은 이제 다소 호들갑스런 면까지 보이고 있었다.
-고마워, 숙아. 언니가 언제 술 한잔 살께. 훗, 알지? 언니 얘기 비밀인 거...!
란은 숫제 그녀에게 눈마저 찡끗하고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란이 언니는 자기가
다른 남자 만난 걸 들켰을까봐, 내가 약속 있다고 발설했을까봐, 그게 문제였구
나.
휴우...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숙은 불안했다. 그렇다고 하면 과연 그
석이 선배는 그날 여관방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기회였다. 란이 안
심하는 동안에 석과의 그날 사건을 확인해야했다.
-그, 그럼 석이 선배는... 그날 잘 들어가셨대요, 언니...?
유도심문이었다. 어쨌든 그날 란이 사라진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봐서, 숙
과의 일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에는 차라리, 그가 기억하지 못한
다는 말이 더 다행이었다. 그래, 그냥 그 석이 형도 하마터면 내 옷을 벗길뻔 했
던 그 일을 모른다면 좋겠는데...
그런데, 란의 대답은 또 한번 예상 외의 엄청난 반전이었다.
-아, 맞다, 그날... 응, 그래 고마워. 잘 들어갔다던데? 니가 집 앞까지 태워줬
다며...?
뭐라고? 집 앞에 태워다 줬다고? 숙은 귀를 의심했다. 아냐, 난 여관방으로 데리
고 갔는데...!
-서, 석이 선배가 그, 그래요...?
그러나 란은 천연덕스런 표정이었다.
-그래, 그날 너 고생시켰다구, 미안하다더라. 택시비 안 모자랐냐고 그러면서...
-그, 그래서요...?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인가. 석이 그럼 런에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뭐, 그냥, 집에 들어가서 잠만 쿨쿨 잘 잤다던데... 어머, 숙이 너 걱정했구나.
아하, 그렇구나. 하기야 낯모른 처음 본 후배와 여관까지 갔었단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 그렇지만, 어쨌든 자기가 여관방에서 널브러졌었으니, 그 사실은 기
억할텐데... 그럼 내가 여관에 데려다준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란에게 그 사실까지 물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고맙다, 얘. 석이 형이 엠티가면 너한테 잘해주겠다고 벼르던걸...? 참,
엠티 때 그 사람 만나도 오늘 얘기, 하면 안되는 거 알지? 부탁해...!
까페를 나서며, 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당부였다. 그러나 숙에겐 그 비밀
지키기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엠티... 엠티 날짜는 이미 주가 바뀌어 다음 주로
다가서고 있었다. 조인트 엠티... 그 때에 석이를 다시 마주치게 된다 - 그렇다
면 석은 뭐라고 얘기할까? 그날 그 여관방에서 자기가 한 행동을 기억하고 있을
까? 내... 옷을 벗기고, 란이 언니를 찾으며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갔었던 그 일
을... 집으로 돌아오는 숙의 머리 속에선 이런 생각들이 꽉차고 있었다.
숙의 그런 생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첫 수업이다, 개강파티다, 이런 것들
로 당장 다음날부터 바빠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가슴 설레는 경험들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첫 시작은 그런 법이고, 더군다나 엄한 집안 분위기에 주눅 들었
던 여고시절과는 달리, 어느 정도 풀어지고 자유로운 대학시절 신입생이 바로 그
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소 서먹하리라 걱정했던 란과의 관계도 잘 풀어진 편이었다. 물론 그것
이 우연찮게 발생된 그들 사이의 작은 비밀 탓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학교 안에
서도 그녀는 숙에게 퍽 친절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숙도 어느 정도는 안도할 수
있었다. 비록 엠티 날짜가 가까워옴에 다라, 다시 마주칠 석이 선배와의 일이 마
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일단은 몇년동안 학교를 같이 다닐 란과의 사이가 편해지
는 것이 더 나았다. 더군다나 란은 모종의 신세를 숙에게 진 것이 아닌가.
-조심해야 돼. 아무 데서나 자지 말구... 술도 조금만 먹어라...
-여보, 그만 좀 하세요. 여학생들만 가는 것도 아니고, 남자애들하고 같이 간다
잖아요.
-허허, 그러니까 더 걱정이지! 어디 다 큰 기집애가, 남자들 쫓아 여행 간다는데
마음이 놓여, 당신은?
-아이고... 숙이가 어디 사내애랑 단 둘이 간데요? 당신도 참 걱정이구랴...
숙이 엠티를 떠나는 날, 집 앞 대문에서 나누는 부모님들의 이야기였다. 공무원
이란 직업탓인지, 고루한 그녀 아버지의 말씀은, 끝끝내 술 마시지 마라, 술 마
시는 남자 곁에 가지 마라, 남자 놈들 믿지 말아라... 이런 일장 훈시로 끝나고
있었다.
-핏, 그러는 아빠도 남자잖아요, 뭐...
대문을 나서며 이렇게라도 대꾸하고 싶은 숙이었지만, 꾸욱 참아두는 수 밖에 없
었다. 엠티 간다고 말할 적부터 인상을 찌푸린 아버지인데, 행여 허락하지 않을
까 조마조마했던 그녀였던 것이다.
약속장소인 학교에 모여서, 다시 기차역을 향한 그녀들 같은 과 일행은, 1학년부
터 4학년까지 모였기에 꽤 인원 수가 많았다. 게다가 기차역에서 조인트 상대인
OO대 남학생들까지 합류를 하니, 그 인원은 총 백여명 가까이나 되게 되었다. 숙
은,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여학생들 틈에 섞여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일까. 석이 선배의 얼굴도 언뜻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간단한 출발 전 점검이 있고, 인원 수를 확인한 뒤, 드디어 그들은 출발을 하였
다. 이른 봄 서해를 향하는 기차였기 때문에, 열차 안은 그녀들과 남학생 인원을
제외하면 그다지 다른 승객들이 보이지 않았고, 해서 모두는 얼마 간의 여유를
두고 옹기종기 나름대로 무리를 주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기차여행이 대부분 그렇지만, 여기 이 조인트 엠티를 떠나는 남녀들도 제각각 신
바람을 내고 있었다. 재미를 부린답시고, 주최측 주동학생들은 일부러 표를 마구
뒤섞어서 그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마침 요행인지 아닌지, 란과 나란히 앉는 자
리를 구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까르르 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여 짝을
맞춘 무리도 있고, 어느 상대편에 의해 둘러싸인 남학생이나 여학생 하나뿐인 좌
석도 있었다.
숙은 다행스럽게 여겼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해서면 몰라도, 지금 열차 안에서부
터 낯선 남자들과 있기보다는, 란이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게 느껴졌다. 이미 차
안의 일행들은 성급히 맥주 캔을 따는 쪽, 끼리끼리 게임등으로 분위기를 내는
쪽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숙의 좌석 주변에도 몇몇 여학생들이 모여들어, 수다와
게임을 벌이며 손목을 때린다 노래를 시킨다 법석을 떨고 있었고, 숙 역시 자연
스레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
-여어, 란이 너 여기 있었구나!
갑자기 통로 쪽으로 앉은 숙의 귓가에 한 사내가 고개를 쑥 들이밀고 있었다.
-야, 놀면 뭐하냐, 맥주 마실래?
석이었다. 숙은 갑작스런 마주침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이미 한 손에 캔맥주
두어개를 들고 있었다.
-뭐야, 석이 형! 벌써 술이야?
분위기가 무르익은 덕분인지, 속으로 뜨끔한 숙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
의 끼어듬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럼, 간단하게 몸푸는 거지!
그렇게 은근슬쩍 석은 그녀들 사이로 기어들고 있었다. 하기야 다른 쪽 일행들도
매한가지 상황이었기에, 그것이 불편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나도 하나 줘. 참, 숙이 너 마실래?
석에게서 건네받은 맥주 캔 하나가 불쑥 숙에게 들이밀어졌다.
-어, 숙이구나! 난 누군가 했네.
석은 그제서야 짐짓 그녀에게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 그날 집에 잘들어갔니? 미안하다, 내가 바래다줘야 했는데...
얼레, 이게 무슨 얘기인가. 석은 시치미를 싹 떼고 있었다. 란이 곁에 있기 때문
인 모양이었다. 그는 다소 놀란 숙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천연덕스럽게 굴
고 있었다. 당황스런 그녀였지만, 어쩌랴. 숙 그녀도 이 상황에선 맞장구를 쳐야
만 했다.
-예, 자, 잘 들어갔어요...
뻔뻔한 얼굴의 석이었다. 그래도 눈짓 한번 않고서 태연한 척 굴다니...
-어유, 그러니까 형은 왜 그렇게 술을 마셔! 후배한테 신세까지 지면서...
란은 그런 그들 사이에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 저 석이 선배
가 내게 무슨 신세를 진 것인지 저 언니가 안다면...
그 때 차 끝쪽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그들 곁을 지나쳐 다음 열차칸으로 가고
있었다. 숙이나 누가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우연치않게 석의
시야를 피하려던 숙의 시선에 언뜻 들어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 남자였다. 맞아!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동안 분명 란의 눈이 남들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그도 이 열차 안에 타고 있는 것이다. 란의 손목을 끌고 여관문
으로 사라지던 그 뒷모습의 사내가.
                      
숙은 처음에 란의 눈초리가 수상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
나 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 날의 술집 화장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란 그녀와 서있던... 바로
그 남학생이었다.
사실이었다. 일전 까페에서 란의 고맙다는 인사, 그것이 뜻한 의미, 바로 저 사
람인 것이다. 같은 과의 두 남자와 동시에 염문을 뿌리는 여자, 란!
-뭐야, 안 마실거니?
순간 석의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아뇨... 주, 주세요!
건네받은 캔맥주를 마시는둥 마는둥, 숙의 머리 속에선 이 복잡한 여행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분주해지고 있었다. 석이를 속이고 있는 란, 란을 속이고 있는 석,
그리고 그 둘의 비밀을 가지고 시치미를 떼야만 하는 숙... 모든 상황이 지금 한
열차를 타고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뒷모습의 사내가 지나각지 얼마 후에 란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나 잠깐 화장실! 맥주 마시니까 금방 마렵네...?
그러나 숙은 알고 있었다. 이 열차의 화장실은 그 사내가 사라진 쪽, 그리고 란
이 쫓아간 쪽과 반대편에 있었다. 물론 한칸 건너의 화장실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볼일을 위해 반대편 다른 칸으로 가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숙은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기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란은 돌아오고 있었고, 또 얼마 뒤, 그 남학생 - 차마 얼굴을 쳐다볼 엄두는 내
지 못했다 - 역시 란이 온 방향에서 돌아와 뒤편의 자기 일행에 합류하고 있었
다.
주변 사람들은 다시금 어울리고 있었다. 심지어 낯빛을 속인 석과 란도 포함하여
모두는, 물론 그녀의 이 혼잡한 기분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더 어색함을 떨치기
위함인지, 석과 란은 서로의 친밀함까지 과시하고 있었다. 란, 란이 언니. 저 언
니와 그 남자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그리고 저 석이 선배는?
그런 꼬리를 무는 의문 속에서, 숙은 겉으로는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마음 속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그날 저녁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서해안의 한 해수욕장에 도착한 일행은, 바닷가에 연한 제법 큰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민박집은 그들을 위해 꽤 널찍한 방 여러
개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들 중 한방에 가방과 짐 따위를 몰아놓고,
그들은 곧 조를 짠다 식사를 준비한다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한편, 여학생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남학생들은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식사시간과 자유시간이 끝나자, 숙과 엠티 일행은 우르르 해변으로 몰려 나갔다.
듣기로는 아까 남학생들이 캠프 파이어를 준비했다는 모양이었다. 이미 초저녁은
훌쩍 지나있었고, 아직 비수기인 해수욕장의 민박촌은 퍽 한산했다. 곧이어 미리
준비해둔 모닥불이 지펴지자, 어두워진 모래사장의 군데군데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기타가 등장하고, 자기소개, 노래자랑, 그리고 으레 끼워지기 마련인 술까지 마
련되자 - 그제서야 모래 위에 쪼그려 앉은 숙은 자기가 여행을 떠나온 기분을 약
간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자유감, 얼마만에 느끼는 것인가.
그녀는 조금씩 젖어드는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막걸리니 소주니
술이 한순배씩 돌며 지펴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볼 때까지는.
-저... 숙아.
등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문득 돌아본 숙의 뒤에 캠프 파
이어 불빛에 불그레해진 석이 허리를 굽히고 서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나좀 잠깐 보자.
뭐지? 숙은 망설여졌다. 뭔가 반갑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했다.
지난 주에 옷까지 찢겨지며 봉변을 당했던 그녀 아닌가.
-저... 왜요...? 사람들 다 모여 있는데...
-어... 잠깐 얘기 좀 하려구...
얘기? 그녀는 흠칫 놀랐다. 사람들이 모인 장소를 피해서 얘기를 하자니?
-괜찮아. 다른 사람들 많으니까... 잠시 빠져도 돼.
석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 서서 해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숙으로서도 잠자코 그의 뒤를 쫓을 수 밖에 없었다.
해변가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다. 석은 그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쪽이라
면, 모닥불을 피운 일행에게서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왠지 겁이 나
는 숙이었지만, 뭔가 짐작되는 것이 있기에, 그녀는 다가갔다.
바위는 해변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한 파도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오고 있
었다. 이것이 데이트라면, 꽤 분위기를 낼만한 으슥한 장소였다.
-앉아라...!
석은 그 앞 바위턱에 주저앉아 있었다. 잔뜩 긴장한 숙이 주저하며 그의 옆에 자
리를 잡자, 그는 잠바 주머니에서 주섬거리며 뭔가를 끄집어냈다. 소주병과 안주
거리였다.
-마실래?
매너 없게 그는 병째로 그녀에게 소주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먼저
다른 병을 이빨로 뜯고는 마치 맥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왠지 술이라도 없으면 쑥스러울 것 같아서 말야...
쑥스럽다고? 숙은 석의 말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선배님, 저... 무슨 말을 하시려고...
-으응... 그게...
석 역시 나름대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병나발을 불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야, 선배님이라고 하지 마라. 그냥... 오빠라고 불러...!
숙은 어색했다. 집에서도 친오빠가 없는 그녀 아닌가. 그런데 오빠라고 부르라
니... 란이 언니도 형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이것 때문에...
그는 바지 춤에서 뭔가를 꺼내어 숙에게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 그게 뭔데요... 오... 오빠...
조심스레 벌린 그녀의 손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름아닌 단추였다. 단추 - 숙은
어스름한 불빛에 그것을 비춰 보았다. 아뿔사 이건!
바로 여관방에서 석의 손에 의해 무참히 뜯겨나간 그녀 정장 옷의 단추였던 것이
다. 단추를 쥔 숙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이걸 이 사람이 갖고 있다니.
-그것... 니꺼 맞지?
당혹스러웠다. 그럼 석은 이걸 그 여관방에서 발견해 주워왔단 말인가.
-맞을 거야...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나 혼자 자고 있었구... 그것 하나만 떨어
져 있었으니까. 분명 남자 옷 단추는 아니구 말야.
-사실, 난 그날 많이 취해서 거의 필름이 끊겼었다. 누군가와 같이 여관에 들어
간 것은 기억이 나는데... 난 틀림없이 그게 란이인줄 알았는데... 정신을 잃었
지. 다음 날 란이가 전화해서야 알았어. 날 데리고 간 게 숙이 너란 걸 말야. 푸
훗, 하마터면 너랑 여관 갔다는 걸 들킬 뻔했지만.
숙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이 단추로 인해, 석은 그날 밤 같이 있던 것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아닌가. 단추만 아니었으면, 필름이 끊겼다는 이 선배,
아니 자칭 오빠라는 남자는 모를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말이지...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참, 쑥스럽구만... 다 지나서 이런
일을 물어보려니... 그렇기는 해도, 저어... 오해는 말고...
숙은 눈을 감았다. 낯뜨거운 것은 그녀였다. 뭘 묻겠다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된
이상, 자기가 란이 언니인줄 오해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뭘 더 말하려는
것일까. 주저하듯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날... 말이야, 내가 너랑... 어디까지 갔냐...?
어디까지 가다니? 오빠는 여관방, 난 집으로 갔잖아요... 그러나 석의 의미는 숙
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내가... 너 건드렸냐...?
뭐야! 숙은 그제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숙은 어이가 없어, 다물었던 입이 떡 벌어질 판국이었다.
-숙이 너랑... 잤냐, 내가...?
-무, 무슨 말씀 하시는 거에요...!
기가 막혔다. 그럼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기 옷을 벗기려 했단 말인가.
-아니 난 그저... 그, 그걸 했니...? 그것...
숙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황당함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왔다. 이럴
수가, 내가 술 취한 남자를 끌고 들어가 유혹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것'이라니..
. 목놓아 통곡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어, 수, 숙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그녀를 보고, 석은 당황한 모양이
었다. 그는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고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흑, 어, 어떻게 그, 그런 말을...!
-미,미안... 내,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미웠다. 이 석이라는 선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술 취한 놈을 여관까지 데려다 주고도 봉변까지 당한게 누군데...
몸서리가 쳐지는 그녀였다.
-아녜요, 아니란 말이에요! 흐흑, 절 뭘로 보고...
-아, 알아... 나도 일어나보니까 아닌 건 알았지만, 그,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이젠 석이 다급한 차례였다. 이 인적 드문 바닷가 모래사장에 여자 울음소리가
들리고, 그 곁에 자기가 있었다... 상황만으로도 낭패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허둥대며 숙의 등을 어루만지고 달래기 시작했다.
-숙아, 우, 울지 마라... 오빠가 잘못했어, 응...?
그러나 숙의 눈물은 쉽게 그칠 수 없었다. 정말로 억울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날
밤 철면피같은 행동을 벌이고도 자기를 의심하다니,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노릇
이었다.
-야, 미안하다, 정말... 그 놈의 술만 아니었어도...
거의 그는 숙을 얼싸 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한참 동안을 달랜 후에야, 간신히 숙의 눈물
이 잦아들고 있었다.
-우, 우리 없던 일로 하자, 응? 숙아, 오빠도 아무 말 안할께... 맹세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빈 후에야, 숙은 어색한 자세로 감싼 석을 짐짓 밀쳐내었다.
-알... 았어요... 그만... 하세요...
그제서야 석도 한숨을 돌렸는지, 물러나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 사실... 너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란이랑... 사이가 안좋거든..
. 알고 있니? 나랑 란이랑 사귀던 거...
숙은 대답대신 수그린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너희 과에도 소문이 났을 테니까... 근데... 요즘 그 기집애가 딴 놈을
마나는 것 같애... 그래서...
아직 완전히 눈물이 사그러든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속이 뜨끔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 같은 과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구나.
-물론 란이는 겉으로는 멀쩡하게 굴지만... 아무래도 양다리를 걸친 것 같아서
말야, 술만 마시면 속이 상해 퍼붓게 되고... 또...
이 사람은 알까? 그 짐작하고 있는 다른 남자가 자기 과의, 어저면 자기 친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 남자와 란 언니는 이미 그렇고 그런 - 여관방
까지 들락거리는 - 사이라는 걸.
-그렇기 땜에... 내가 널 란이로 착각했다면... 사고라도 쳤을까봐...
사고? 숙은 미뤄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석, 이 사람은 란 그녀를 억
지로라도 점령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강제로 옷을 벗기며 죽이겠다고 한
거로구나.
숙은 이제 다소나마 그날 밤의 사건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결국 이 남자는
의심스런 행동 - 사실이라는 것은 숙이만 안다 - 을 하는 란을 다급한 마음에 강
제로라도 가지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대상이 취중에 숙이가 된 사
실을 몰랐던 것이다.
-푸후후... 별 얘기를 다하는구나. 숙이 너한테...
이제야 비로소 숙은 가지런해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석은 소주병을 들
어 다시 벌컥거리며 들이키고 있었다.
-씹X, 망할 기집애...!
빈병을 바닷가로 집어 던지는 석은, 꽤 기분이 착잡한 모양이었다. 착한 숙은,
이제 오히려 그가 더 불쌍해 보였다. 그리고 덩달아 자기 마음이 울적해지고 있
었다.
-안 마실 거니? 그럼 이리 줘.
석은 그녀에게 주었던 술병마저 비워낼 심산인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숙은 그에게 소주병을 건네기 전에 자기가 먼저 병나발로 한모금을 들이켰다. 그
녀의 마음처럼 쓰라린 알콜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석은 취기어
린 웃음을 터뜨렸다.
-푸후, 녀석... 제법인걸... 어쨌든 미안하다, 너한테...
그는 건네받은 병으로 나발을 불고, 숙도 다시 그 병을 건네받아 마셨다. 그렇게
너댓번을 돌자마자, 나머지 한병의 소주병도 바닥을 드러냈다.
-젠장, 내 꼴이 뭔지...!
-일어나요, 석이 오빠... 다들 기다릴텐데...
숙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레 오빠란 호칭을 그에게 붙여주고 있었다. 아쉬운
듯, 엉거주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 석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가서 술이나 마시자. 젠장할...!
이미 캠프 파이어의 모닥불은 꺼져 있었다. 모두들 민박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
다. 아마도 일행들은 방안에서 본격적인 술판을 벌이고 있으리라. 그곳으로 향하
는 석의 발길은 어느새 비척거리고 있었다. 병째 물 마시듯 들이킨 술이 이제 올
라오는 것일 터였고, 숙도 한바탕 울고 난 후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알딸딸한 기
분이 들고 있었다.
-란이 그 년, 들키면 가만 안둘꺼야...! 나 좋다고 쫓아다닐 땐 언제고...
방들은 이미 남학생과 여학생이 가득가득 뒤엉켜 있었다. 구석구석 모여앉은 그
들은 게임이다, 술이다, 정신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석을 먼저 들여보내고 나서,
숙은 잠시 쉼호흡을 하고 얼굴을 매만졌다. 혹시라도 아까의 눈물자국을 사람들
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란이 구석에서 부르고 있었다.
-숙아, 이리 와! 어디 가 있었니? 아까부터 안보이던데...
-아 예, 저, 잠깐 바람좀...
사람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들 있었다. 벌써 몇몇은 남녀 구분 없이 쓰러
져 자고있는 것도 보였다.
-자, 이것 마셔.
란은 호탕하게 잔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나 숙은 선뜻 그 잔을 받기가 어려웠다.
바깥에서 마신 술도 있거니와, 그도 난생 처음 병나발을 불어본 탓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 머리가 아파서...
-그래? 그럼 일찍 잘래...?
차라리 그게 나을 성 싶었다. 아까 석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왠지 흥이 날 것
같지도 않거니와, 밤새워 술을 마셔본 경험도 없는 그녀였다.
-예... 좀 잤으면...
-그럼 어쩌지...? 아프다는데 여긴 너무 시끄럽네...
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석이란 남자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여자인 이
란이 언니가, 자기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얼굴로 걱정을 해주고 있다니. 그녀는
왠지 모를 비애감을 느끼며 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 때였다. 숙을 위해 방안을 둘러보던 란은 조금 전에 들어온 석을 발견한 모양
이었다.
-석이 형, 언제 들어온 거니?
숙은 흠칫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했다.
-바, 방금 들어오던데요...
-그래?
란의 눈썹이 꿈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자, 숙아. 너 잘 곳 마련해줄께.
그녀는 서두르며 숙을 잡아 끌었다. 숙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란 언니는 뭣
땜에 석의 눈치를 보는 걸까?
그 해답은, 민박집 밖에 있었다. 민박집 마당 건너편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있었
다. 란은 재빨리 그 쪽을 향해 눈짓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구나. 저 어둠
속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미지의 남자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까부터 석이 선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석이 돌아왔으니, 란이와 저 남자는 이제 어두운 해변가로 사라질 게다.
란은 숙을 옆 방으로 안내했다. 아까 일행들의 짐과 가방 따위가 들어찬 방이었
다.
-여기서 자면 될 꺼야. 필요한 짐은 다 큰방들로 옮겨놨으니까, 누가 들어오지도
않을 거구...
이렇게 되면 숙이 란에게 그 모두들 모여있는 방에서 빠져나올 빌미를 제공한 셈
이었다. 누가 란을 찾는다 하여도, 그들을 본 사람은 숙이랑 자러갔다고 내지는
숙을 재워주러 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저 마당 건너편의 사내, 못
이기는 척 여관까지 따라가준 사내와 밀회를 즐길 것이다.
-참, 누가 나 찾으면, 여기서 자다가 방금 나갔다고 해줘, 알았지?
쪽방에 숙을 혼자 남겨두고 사라지는, 란의 신신당부였다. 석이 오빠 때문에 그
렇겠지... 그 오빠가 찾으면, 방안 사람들은 나랑 나갔다고 해줄테고, 나를 찾으
면, 난 자다가 방금 어디 갔다고 할테고, 그렇게 끝끝내 찾다가 발견해도, 그녀
는 그저 잠깐 바람좀 쐬고 왔다 - 이러면 그만인 것이다.
영악했다. 방바닥에 엉거주춤 누우며, 숙은 비록 선배고 언니지만 정말 당찬 여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울려 나온 엠티에서까지 저런 기회를 만들어 아
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다니...
아무렇게나 놓인 가방 하나를 머리맡에 괸 숙은, 피곤한 머리 속에 여러가지 상
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 저 남자, 란 언니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언니와
석이 선배의 일을 알면서도 관계를 맺는단 걸까. 아니면 석이 선배는 정신적 관
계, 그 남학생은 육체적 관계? 숙은 정말 우연찮게 끼어든 남의 일들로 자기 머
리 속마저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아냐, 신경쓰지 말자. 그건 그 사람들 일이야... 석이 오빠가 불상하기는 해도..
그러다 깜빡 잠이 든 걸까, 비몽사몽 간에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어디, 여긴 아무도 없지?
-응, 가방만 있으니까, 여기다 눕혀.
-에이 참, 형, 정신차려요...!
워낙 피곤한 탓일까. 숙은 그 소리를 듣고도 잠에 취해 채 눈도 뜨지 못했다. 그
때였다. 무거운 짐 하나가 바닥에 털썩, 놓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문도
닫히고 그 목소리들의 주인공도 사라져 갔다.
그렇게 비몽사몽 간의 잠결인 숙에게, 갑자기 들려온 것은, 누군가의 말소리였
다.
-죽이겠어... 죽여 버릴 꺼야...!
감았던 숙의 눈이, 비벼지며 떠졌다. 아아... 누구지...? 누가 또 잠자러 들어왔
나?
그 때였다. 어두운 방 안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의 시야에, 뭔가 덩치 큰 그림자
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너... 넌 내 꺼야! 내 꺼란 말이야!
뭐야, 누구야?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와락, 그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그 갑작스런 돌출에, 숙은 너무나 놀라 숨이 멎는 것만 같아, 잠결에 비
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널 갖겠어, 널 가질 꺼야!
너무나 갑작스런 기습이었다. 그 육중한 덩치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숙을
덮쳐 누르는 그 힘은, 결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어멋, 누, 누구... !
철썩!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가에 불똥이 튀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다 방
바닥에 나뒹굴 정도로 엎어진 숙은, 그제야 자기의 한쪽 뺨이 고통으로 떨어져나
갈 정도였다.
-반항하지마, 죽여 버릴꺼야!
제일 먼저 그녀의 입이 억센 손아귀에 의해 틀어막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
시에, 그녀의 티셔츠가 부욱,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소리치면 죽어, 알았어!
공포와 고통에 질려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그녀의 귓가에, 더운 입김과 함
께 훅, 하고 역겨운 술냄새가 끼쳐왔다. 숙의 온몸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낮게
윽박지르는 음성이었다.
사람살려, 살려 주세요! 이런 다급한 비명이 목구멍까지 밀고 나왔지만, 솥뚜껑
같은 덩치의 손아귀는 그 모두를 막고 있었다.
-넌 내꺼라구... 뺏기지 않을 꺼야...
그 그림자의 손아귀가, 이번에는 숙의 청바지 앞섶마저 잡아채고 있었다. 그녀는
꽉낀 청바지를 입는 통에 허리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숙은 최대한 몸을 틀며
저항했다.
-조용히 해... 씨X, 안그러면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이 목소리, 이 목소리는!
석이였다. 바로 얼마전 여관방 안에서 들었던 그 무서운 목소리, 석이였던 것이
다 -
-란이, 란이 널 이번엔 꼭 가질꺼야, 이번엔 꼭!
아, 안돼, 안돼요, 오빠! 전, 숙이란 말여요! 숙은 최대한 고개를 돌려대며 소리
를 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의 힘에 눌려, 방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그의 거친 숨
소리 뿐이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억센 손이 거칠게 찢겨진 옷자락을 헤치며 숙의 맨살을 다루고 있었다. 숙
은 두 팔로 온힘을 다해 석을 밀어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엉망으로 취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뇌리 속에 술 취한 사람의 힘이 더 세진다는 기억이 스쳐 지
나갔다. 그녀의 브래지어가 순식간에 뜯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럼 안돼요, 오빠, 오빠! 그 때였다. 그의 손길이 잠시 느슨해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녀를 놓아준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반대쪽 뺨에 뜨거운 불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 구타와 함께, 숙은
정신을 잃었다.
-아아... 안돼요... 석이 오빠... 제발...
그녀는 비몽사몽 간에 헛소리마저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악몽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다만 시커먼 그림자
만이 어렴풋이 그녀의 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앗! 아악!
그 때였다. 기절했던 그녀를 깨어나게 한 것은, 그녀를 기덜 속으로 몰아넣은 것
과 마찬가지의 고통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 그것은 훨씬 아래쪽에서 일
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 고통은, 아까 따귀 맞은 것을 몽둥이에 비교한다면, 이번엔 분명 칼로
쑤시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숙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온몸을 버둥거리며 뒤척였다. 그 모든 상황을 느낀 것
은 그 때였다. 앞가슴은 이미 무언가 육중한 물건에 짓눌려져 있는 상태였고, 다
리 - 허벅지와 종아리에는 선뜻한 공기가 맨살에 닿고 있었다. 쉽게 말해 그녀
는, 이미 남김없이 거의 발가벗기워져 있는 것이다!
말도 안돼! 그럼, 그럼 이 아래쪽의 고통은 - 지금 막 굵은 막대기같은 무엇이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찢어지는 고통,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
의 허전한 가랑이 사이 국부로 침입하고 있었다.
-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최소한 소리없는 비명이었을 것이다.
안돼! 다음 상황은 마치 정지화면처럼 기억되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
숙의 몸 전체가 자기 위의 몸뚱아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무언가가 들어서다 말고 황급히 그녀의 몸 속에서 빠져 나갔다.
두가지 액체가 그녀 몸 위에 흘렀다. 한 곳은 그녀의 사타구니,
그리고 다른 한 곳은 그녀의 하복부와 허벅지 사이에 걸쳐 길게.
나동그라진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는 욱, 하는 소리와 함께 방바닥에 구토
를 시작했다. 숙은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가야 했지만, 그 전에 필사적인 노력으로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기가 해야할 일을 완수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렸을 때엔, 아니 정지화면이 다시 연속화면으로 돌아왔을 때 - 숙은 민
박집의 화장실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자기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화장
실의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는 사실도 그녀의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윗도리와, 핏자국 - 그녀의 증거 - 가 얼룩진 팬티만을 입고 있었
다. 청바지는 어느샌가 구겨진 채로 한손에 꼭 쥐어 들려 있었다. 그것이 도망쳐
나오기 전에 숙이 해야할 일을 완수한 셈이었다.
미끌거리는 액체가 하복부와 허벅지 사이에 튀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그녀의 몸에 묻어난 정액이었다.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
았다. 어차피 간밤의 일 모두가 태어나서 처음 겪은 것이니까.
다시 멍한 기억의 끊김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돌아온 그녀의 기억은
돌아오는 열차 안이었다.
그녀의 뒷자리에서 수군거리는 대화가 들려왔다.
-어머, 그래서?
-그래서는 뭘... 대판 란이랑 그 석이란 사람이랑 싸운 거지 뭐.
-그래서 그렇게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술을 퍼마신 거야?
-그런가봐. 남자애들이 짐있던 방으로 업어다 놨는데, 아침에 보니까 장난이 아
니었대. 푸훗...
숙은 두 눈이 질끈 감겨졌다. 귀를 막고 싶었다.
-근데 왜 웃어?
-글쎄, 아침에 보니까, 혼자서 얼마나 난리를 쳤던지, 옷도 다 벗고 활개치고 자
더래...!
-어멋, 왠 일이니, 호홋!
어찌어찌해서 숙은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왔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아무도 그
녀에게 벌어진 사건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옷솔기가 뜯겨져 있던 것도, 심지어
는 그녀가 그 방에 있었다는 사실도.
-그럼 왜 병원에 데리고 간 거야? 남자들 술 먹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아닌가봐... 방에다 오바이트 해놓구, 피도 흘렸더래...
-피? 무슨 피...?
-몰라, 뭐 하도 오바이트하니까 목구멍에서 나온 거겠지, 뭐...!
숙은 다시는 석을 보지 못했다. 그 날 밤이 되서야 응급실에서 나온 그는, 후배
들의 부축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 학기가 채 끝나지도 않아 영장을 내고
입대를 했다. 그리고 그가 군대를 가기 전까지는, 숙 역시 다시는 그 OO대학과의
조인트 자리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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