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바닷가 여관방에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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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571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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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거짓말이죠?"

현지는 갑자기 낯선 방에서 한 남자와 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우진이라
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단순히 삼십 대 남자라는 것뿐이
었다. 열 아홉의 처녀와, 삼십 대의 남자가 한 방에서 잠을
잔다고 해서 반드시 섹스를 해야 된다는 법은 이 세상에 존
재하지 않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진이 가출한 아내를 찾으
러 묵도란 이 섬에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그가 이성
으로 와 닿기 시작했다.

우진은 피식 웃는 것으로 답을 했다. 현지라는 여자에게 자
신의 아픈 과거를 말해 준 것이 후회가 됐다. 엄밀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가출한 것은 자신과 아내와의 문제 일 뿐
이지 현지는 제삼자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죠?"

현지는 우진의 말이 진실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물었
다. 그건 난 이 남자에게 처녀성을 주고 싶다라는 자의식에
대한 반문이기도 했다.

"많은 여자들은, 많은 이유를 들어서 가출을 해. 그리고 난
가출한 아내를 가진 아내를 둔 많은 남자들 중의 하나일 뿐
이야."

우진은 얼굴 근육으로만 웃으며 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매가 서늘했다. 긴 머리카락 안으로 선이 고운 콧날하며 투
명한 입술, 둥그스름한 턱이 창문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여자들은 여간해서 가출을 안 해요…"

현지는 말꼬리를 흐리며 우진의 시선을 피했다. 이게 웬일
일까. 우진 앞에서 발가벗겨진 몸으로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누운 자세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마음을 진
정시킬 수 없었다.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다에서 들려
오는 파도 소리가 갑자기 숨을 멈추었는지 들려 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지. 소라 껍질 속에는 아름다운 세
상이 숨어 있는 걸까?

아랍인을 연상케 하는 우진의 얼굴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
했다. 알코올에 붉게 물든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왔다. 까칠하
게 자란 수염이 자신의 얼굴에 닿으면 따가울 것 같았다. 날
안아 줘요. 라고 다가서면 우진은 푸른 달빛이 쏟아져 내리
는 자작나무 숲에서 늑대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 두자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니…"

우진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만난 현
지라는 열 아홉의 여자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한
것은 그 놈의 바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청자빛 바다의
서늘한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현지
에게 가출한 아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분을 사랑하나요?"
"지금도?"
"네. 진한 커피 향처럼 그윽하게, 핫 케이크처럼 뜨겁게 사
랑하고 있나요?"

현지가 갈망하는 눈짓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상했다. 불
결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자꾸 우진에게 이끌리
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섹스
를 할 수 없다는 의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은 자
꾸 우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진에게서 남자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가출한 아내를 둔 우진에게 연
민의 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
에는 그녀 자신도 하루 하루의 삶이 황무지에 핀 수선화 같
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까짓 처녀성. 아이스크림처럼 차가울 때 먹지 않으
면 저절로 녹아 버리는 거야. 도대체 처녀성이라는 게 뭐야.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잖아.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
다고 해서 백마를 탄 왕자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잖아. 무엇보
다 간직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워. 난 그냥 살아가기에도 벅차,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해야 돼, 아니 나는 오늘 이 남자가 좋
아. 내일은 생각하지 말자. 어쩌면 나는 이 날을 맞기 위해
발걸음을 터미널로 향했고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탔는지도 몰
라.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생각 해 볼 여유가 없었어.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난 늘
바빴거든. 그리고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려고
했을 때, 이미 아내의 자리는 비어 있었어."

현지가 갈등하고 있을 때 우진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담
배 연기가 푸른 달빛에 영혼의 빛으로 피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창문밖에는 별들이 엎드려 있었다. 크게 한숨이라
도 내쉬면 그 많은 별들이 우수수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부인과 섹스를 할 때도 사랑한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나요?"

"섹스?"

"네."

"난 섹스를 하면서 아내를 사랑한다 생각을 해 본 적이 없
어, 그냥 아내를 보면 섹스를 하고 싶었어. 그러면 좋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 일 거야. 만약 인간의 이성이 사
랑하는 사람끼리만 섹스를 할 수 있도록 조정되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우진은 열 아홉의 이 발랑까진 아가씨가 꽤나 까다롭게 군
다는 생각에 직설적으로 말해 버렸다.

"그럼 지금 저를 사랑해 줄 수 있나요?"

현지가 불쑥 말하고 나서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규칙
적으로 잔잔하게 들려 오던 파도 소리가 갑자기 거친 해일처
럼 밀려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랑?

우진의 동공이 확대되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현
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껄껄껄 웃어 제꼈다. 갑작스러운 우진의 웃음소리에 창유리를
뚫고 들어와 방안을 비추던 푸른 달빛이 박살나고 있었다. 웃
음 끝에 마른 눈물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다시 파도가 밀려
왔다. 파도가 무너지는 소리에 아리한 아픔이 무너지고 있었
다.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가 않아. 난 그저 살아왔어.
열심히 살아왔고, 많은 날 들을 노력했어. 그러나 아내는 날
싫어했어. 인생은 낭만이 있어야 한다며 통장을 가지고 나갔
지…하지만 난 아직까지 낭만이 뭔지 몰라.

우진은 옅은 어둠 속에서 재떨이를 끌어 당겨서 담배를 눌
러 껐다. 푸른 담배 연기가 주저앉으며 그 자리를 달빛이 채
워 버렸다. 천천히 현지가 누워 있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
다. 현지가 가까이 오려는 기척을 보이자 얼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누웠다.

"농담이… 지나쳐."

우진은 이불을 끌어 당겨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우며 눈을
감고 나서, 갈대가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난 삼촌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삼촌?"

"그래요. 아저씨를 삼촌이라고 부르겠어요. 그냥 아저씨라
고 부르긴 싫어요. 그럼 내가 천박해지거든요."

"날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아. 그러나 그런 농담은
듣기가 거북해."

"난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내 가슴이 유리
로 되어 있다면, 삼촌에게 굳이 내 말이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을 거예요."

현지는 진지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우진에게 처녀성을 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처녀성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으로 변해 갔다. 마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처음에는 지나가는 생각으로 사고 싶다, 라고 생
각하다가 결국은 사지 않으면 안될 숙명 속에 사로잡히는 그
런 기분이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아니면 파도 소리 때문에 미쳐 버린 거
야?"

우진은 현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
에 화가 났다.

"물론 제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전 열아홉 살
이라고요. 세상을 볼 줄 아는 성년이란 말예요."
"넌 아직 어려."
"그만!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가만있어야 해요."

현지가 우진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우진이 뿌리치려고
하자 얼른 가슴을 밀착시켰다.

"아무 말 하지 마세요. 그냥 숨만 쉬세요. 만약에 단 한마
디라도 한다면 난 오늘 밤 바다로 뛰어 들지도 몰라요."

현지가 주술을 외우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우진은 최면에라
도 걸린 것처럼 스르르 팔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현지가 섹스를 하자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오직, 그녀가 밤
바다로 뛰어 들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밤바다!

그때 제주에서 일곱 시에 출발했으므로 제주항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제주가 한 점 붉은
점으로 사라지면서 시야에 펼쳐지는 것은 짙푸른 어둠뿐이었
다. 갑판으로 나갔다. 출렁이는 파도가 뽀얀 속살을 내 보이
며 뛰어내릴 것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아무도 보지 않으니 빨리 제 품에 안기세요. 어서요!

검은 장막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바다는 그렇게 유혹하고
있었다. 그때 아내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떠난 여행에
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뒤돌아보면 아
차 하는 순간보다 짧은 순간이었다.

우진이 외진 음지에서 자라난 보잘 것 없는 잡초였다면, 아
내는 봄바람을 타고 날아온 홀씨에서 갑자기 성장해 버린 화
려한 꽃이었다. 그 점이 우진을 좌절케 하고 분노하게 만들었
다.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것은 편리하고 유익하기도 하지만 그
렇지 않을 때도 있다. 좋지 않은 것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
려고 해도 불씨처럼 살아 있고, 좋은 점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진도 마찬가지 였다. 아내를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암담함이기도 했다. 잊어야 하는데 잊지 못하고, 세
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아내를 찾아야 하는데 찾을 길
이 없었다. 그 암담함은 설탕 맛을 본 사람이 씀바귀 뿌리를
씹으며 살아야 하는 절망이기도 했다.

"밤에는 출입 금지라는 걸 모릅니까?"

우진은 뒤에서 들려 온 승무원의 거친 목소리가 아니었다
면 밤바다의 달디단 유혹에 빠져들었을지도 몰랐다. 당혹감을
감추고 선실로 들어갔다. 2인용 선실의 상대편 침대에 누워
있던 중년 남자가 입을 쩝쩝거리며 돌아눕는 게 보였다. 비로
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가만히 있어야 해요."

현지는 우진에게 주술사처럼 감정 없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가슴에 손을 밀어 넣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에 까실한 감
촉의 털이 나있었다. 가슴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덩달아 현지의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후…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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