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고독사랑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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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71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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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신비회(神秘會)


연암빛 유삼을 입은 미서생은 옥선(玉扇)을 흔들며 서서히 백옥상의 좌석으로 다가섰다.
그의 입술에는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허리에 찬 패옥소리가 그의 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영롱한 옥음을 뿌리는데, 주객들은 워낙 그의 헌앙한 모습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오색의 등불 아래 그의 미려하고도 관옥 같은 용모는 너무나 수려했다.
명공(名工)이 공들여 세공한 듯한 셈세한 이목구비에 그린 듯한 붉은 입술은 준미하다 못해 극미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산들산들 걷는 일풍옥수의 자태는 마치 여인과도 같았다.
"형씨, 같이 합석해도 되겠소?"
낭랑한 음성은 흡사 맑은 계류가 흐르는 듯이 부드러웠다.
"……?"
백옥상의 얼굴이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백옥상의 표정은 붉은기가 감돌았으나 한 쌍의 잿빛 동공은 음울하게 번들거렸다.
백옥상은 천천히 주위에 시선을 돌렸다.
주루는 꽉차 있었고 왁자지껄한 소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백옥상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빈잔에 술을 부었다.
"감사하오!"
유삼 미청년은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멈칫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사람이 있소!"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백옥상의 말은 비수 같은 예기(銳氣)가 담겨 있었다.
유삼청년이 앉으려고 한 좌석에는 한 쌍의 젖가락과 채워진 술잔이 놓여 있었다.
유삼청년은 흠칫 놀랐으나 곧 사과를 했다.
"실례했소! 내가 잠시 사람을 보지 못했구료."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
분명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건만 그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사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백옥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로서도 너무 의외의 대답이기 때문이었다.
유삼청년은 그의 시선에 일순 기묘한 광채를 띠었다.
'이 사람의 눈은 인간의 극한까지 가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허무의 눈빛이다. 아직 강호에서 이런 사람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백옥상의 모습에 짙은 호기심을 느꼈다.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다가 이런 자를 만나다니 헛걸음은 아니었군.'
"소생은 영호문(令狐文)이라 하오!"
"……!"
유삼청년이 자신을 소개했지만 백옥상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술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한 잔 또 한 잔 쉬지 않고 마실 뿐이었다.
유삼청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그의 신분으로 백옥상의 태도는 극히 모욕적인 것이었다.
강호에 별로 그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의 신분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침 다가온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어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백옥상의 고독한 분위기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잠시 담담한 침묵이 흘렀다.
영호문은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 계신 분은 여인이오!"
그가 빈좌석을 가리키며 묻자 백옥상은 천천히 술잔을 내려 놓았다. 이어,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품 속에서 한 조각의 은자를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약간 휘청거리는 백옥상의 신형은 불안해 보였다.
영호문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몹시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백옥상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영호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헌데, 갑자기 영호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조심하시오!"
백옥상의 신형이 두 개의 탁자를 지나는 순간 좌석에 앉아 있던 남녀가 벼락같이 비수를 뽑아 등과 가슴을 협공해 왔기 때문이었다. 영호문은 앉은 자세 그대로 퉁기듯이 날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비수는 이미 그의 등을 파고 들었다. 아니 파고드는 순간 백옥상의 신형이 환영같이 흔들거리고 한 가닥의 검광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져 버렸다.
"으악!"
"헉!"
짤막한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남녀는 탁자를 박고 허수아비처럼 나뒹굴었다.
한순간 주루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백옥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살, 살인이다!"
한 사람의 외침을 시작으로 실내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
주객들은 먼저 밖으로 나가려고 아수성을 쳤다. 영호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쓰러진 남녀의 모습을 살폈다.
'세상에…… 이렇게 빠른 쾌검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다니, 불가사의한 쾌검이었어.'
남녀는 똑같이 목줄기가 반으로 배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단 일초로 둘을 죽이는 최소한의 힘으로 떨치다니……'
그는 아연한 신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백옥상은 혼잡한 주루를 빠져나왔다.
'신비회의 인물들이 나를 쫓고 있군.'
그는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사방에서 그를 향해 모여드는 인영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묵죽통이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물건인 모양인데 어느 새 이들이 추적해온 것으로 보아 신비회의 기동력도 보통은 넘는군! 우선 거리를 빠져나가야겠다. 이곳에서 살인을 할 수는 없으니……'
백옥상은 야수에 가까운 본능으로 수 명의 인물들이 그를 포위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거리를 벗어나자 일순 백옥상의 신형이 마치 한 줄기 연기처럼 표표히 날아갔다.
"쫓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수줄기의 인영이 다급히 그를 향해 날아갔다.
갈수록 빨라지는 그의 신형은 어느 새 달빛 아래 한 개의 점으로 변해 산기슭으로 사라졌다.
"신호를 보내라!"
"놈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놈을 잡아야 한다!"
요란한 호통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숫자는 점점 많아져 갔다.

한 줄기 달빛이 교교히 숲 속을 밝혔다.
불꽃이 연신 불똥을 튕기며 타올랐다.
거대한 고목 아래 한 명의 인영이 두 다리를 세우고 앉아 무심히 모닥불을 주시했다.
창이 없는 죽렵에 한 자루의 철검(鐵劍)은 그의 어깨에 비스듬이 걸쳐져 있었다.
'올 때가 됐군.'
천천히 고개를 들고 힐끗 주위를 둘러보는 그는 백옥상이었다.
그는 품 속에서 묵죽통을 꺼내 모닥불 옆에 가만히 꽂아 놓았다. 문득,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울리고 이내 수 명의 인영이 민첩하게 그의 주위를 완전히 둘러쌌다.
대략 삼십 명 가량의 인물들 중에 섬세한 몸매의 여인들도 제법 끼여 있었다.
한 명의 인영이 앞으로 나섰다.
얼굴 전체에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는 사십대의 음침한 인물이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체격과 무거운 몸가짐은 그가 고수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모닥불 옆에 꽂혀 있는 묵죽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의 태도로 보아 우리를 유인한 것 같군.'
그는 일순 백옥상의 태도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황룡마군(黃龍魔君)이란 사람이오. 귀공은?"
백옥상은 천천히 파립을 치켜 들었다.
"그대는 신비회 황룡마단의 단주이겠군?"
"……!"
황룡천군의 낯빛이 굳어졌다.
"연판장을 보았군!"
백옥상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두 눈은 마치 어둠의 심연처럼 침침하기만 했다.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을 그냥 간직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지 않소?"
황룡마군은 그의 침착한 태도에 일순 울화가 치밀었다.
"어쩔 수 없군! 목숨만은 살려 주려고 했는데…… 잡아랏!"
두 명의 장한이 소리없이 덮쳤다.
"그렇게 느린 동작으로는 개도 잡을 수 없지!"
백옥상의 입에서 비웃음이 나오는 순간 그의 우수가 부채살처럼 뻗어나갔다.
"커억!"
"케엑!"
두 명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땅 위에 뒹구는 두 명의 목과 미간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실로 간단한 죽음, 너무도 어이 없이 죽고 말았다.
'저럴수가!'
황룡마군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들은 본회에서도 결코 약한 인물들이 아닌데……'
다른 수하들은 갑자기 주춤 물러섰다.
백옥상의 손에 다시 몇 개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제일 귀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도 그가 어떤 수법을 사용해 동료를 죽였는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더욱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백옥상은 피식 실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취옥궁이 뭐하는 곳인가?"
"그럼 무슨 이유로 우리를 적대시 하오?"
"나를 먼저 건드린 것은 그대들이지 내가 아니야!"
백옥상의 말은 완전히 하대였으나 황룡마군은 그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단지 당신을 건드린 이유 때문에?"
"나를 건드린 자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다! 설사 황제(皇帝)라도 그것은 예외가 될 수 없지!"
백옥상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싸늘했다.
황룡마군은 분노와 공포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무림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거늘, 어쩌면 태상(太上)은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는 내심 침음을 삼켰다. 허나, 그는 이내 정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수하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의 검이 무섭다고 하던데 어디 한수 가르침을 받겠소!"
백옥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의 검은 피(血)를 원할 때만 나오지! 장식용은 아니야."
황룡마군은 백옥상이 일어서자 그의 전신에서 뻗어나오는 기도에 전율을 느꼈다.
'이 자의 검법을 우선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는 수하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모두 쳐랏!"
순간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인영들이 벌떼같이 덤벼들었다.
그 순간, 백옥상의 두 눈에 잔인한 광채가 폭사되었다. 그리고, 백옥상의 신형이 허공을 날으며 철검(鐵劍)이 검광을 토했다. 백옥상의 신형이 원을 그린다 느끼는 순간, 반월 같은 검광이 현란하게 피어오르며 수십 가닥으로 퍼져나갔다.
"아악!"
"크흑!"
연속적으로 비명이 터져나오며 인영들은 손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피보라 속에 나뒹굴었다.
황룡마군은 대경실색하며 부르짖었다.
"막아랏!"
어둠 속에 백옥상의 광소가 미친 듯이 울려퍼졌다.
철검이 풍차처럼 휘돌아갔다.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오고 선혈이 튀었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었다. 바로 도륙이었다.
도(刀)가 채 들리기도 전에 미간이 뚫리고, 검(劒)을 뻗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다.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황룡마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신음성도 없고 숲 속은 그저 짙은 정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럴 수가……"
공포에 걸린 황룡마군의 얼굴 위로 경련이 일어났다.
"사, 사람도 아니다. 검신(劍神)……검귀(劍鬼)."
황룡마군은 믿을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앞에 혼백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
백옥상은 어느 새 처음과 마찬가지로 두 다리를 세우고 앉아 무표정히 불꽃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후회나 가책의 빛도 없으며 무표정한 표정에 숨결은 여전히 고르기만 했다. 황룡마군의 두 눈은 경악과 공포로 탈색되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무예……
그는 백옥상의 정체를 도저히 파악할 수 조차 없었다. 주위에는 참혹한 시체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선혈이 내를 이루며 수풀을 홍건히 적셨다.
황룡마군의 두 눈에 공포와 증오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어차피 수하들만 잃고 돌아간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그는 무인(武人)이 아닌가?
"그대의 무예가 높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결코 신비회의 복수를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을 끝내고 혼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검을 쳐냈다. 무서운 기세의 검세였다.
백옥상의 입가에 흰선이 그어지는 순간, 황룡마군은 자신의 검광을 뚫고 한 줄기 검광이 날아오른 것을 보았다.
한 줄기 환상 같은 검광이 눈앞을 가리는 순간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크흑!"
목줄기가 섬뜩해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의 끈이 끊어졌다.
백옥상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두 자루의 검이 좌우로 날아오고 한 줄기의 섬전 같은 인영이 묵죽통을 잡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백옥상은 싸늘한 냉소를 날리며 그의 우수가 흔들리고 좌수가 인영을 향해 쭉 뻗었다.
"흥! 기다리고 있었다!"
"크흑!"
"으아악!"
세 가닥의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황의를 입은 세 명의 무사들은 천월비화루에서 백옥상을 주시하던 삼 인이었다.
두 명은 어김없이 목이 잘렸고, 묵죽통을 잡아가던 무사의 미간에는 한 자루의 종잇장같이 가느다란 비도가 박혀 있었다.
철혈풍(鐵血風)!
일명, 검중제왕(劍中帝王)이라 불리우는 무적지검!
바로 그것이었다.
시신들의 부릅뜬 두 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백옥상이 슬쩍 좌수를 당기자 비도는 마치 무형의 줄이라도 달린 듯 미간에서 빠져나와 손목으로 휘감겼다.
그것은 아무런 볼품 없는 철환(鐵環)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백옥상은 신형을 세우고 천천히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구경은 끝났으니 그만들 나오시지."
"대단한 청력이로군!"
한 소리 장중한 음성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소리없이 나타나는 이 인이 있었다.
선두의 인물은 검은 묵포에 고독한 사자의 풍모를 지닌 삼십대의 장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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