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회전그네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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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5,713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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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그녀의 마음.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다.

은하가 돌아가고,다시금 집안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준후역시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으니,다시 강회장과의 거래를 지키기 위해 학업으로 돌아가야만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오늘도 그는 독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한참을 걷던 준후는 발걸음의 속도를 줄였다.멀리서 낮익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언제나처럼 생기있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까맣고 긴 머리칼은 달빛아래에서 너무나 빛이났다.무릎밑을 덮는 롱스커트.그리고 파스텔톤의 가디건.마치 광고의 한장면처럼,너무나 청순한 눈망울을 하고서 어두운밤에도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녀는 바로 은채였다.

“괜찮은데…선배 매번 죄송해요.”

“아냐!밤거리가 얼마나 위험한데!게다가 은채너는 차도 가지고 다니질 않으니까..”

반갑게 아는척을 하려던 준후는 저도 모르게 올렸던 손을 내려버렸다.은채의 옆에는,저번에 술에 취한 은채를 바래다 주었던 그 선배라는 남자가 서있었다.감히 은채의 옆에 바싹 붙지는 못하고,반보정도 뒤쳐져서 그녀와 함꼐 걷는 형상이었다.마치 절대자를 숭배하는 신하처럼,그는 은채의 뒤에서 연신 헤벌쭉 웃으며 걷고 있었다.

‘또 저녀석인가?’

준후는 이유는 알수 없지만 급격하게 기분이 상하는것을 느낄수 있었다.한쪽에는 그 선배란 남자의 차로 보이는 조그마한 소형차가 주차되어 있었다.준후는 대충 상황을 유추할수 있었다.아마도 착한 은채는 계속해서 폐를 끼치기 싫다며 언덕길에서 내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또 술을 마신건가?’

준후는 저도 모르게 둘과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걸었다.어차피 독서실을 가려면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지만,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였다.

“선배.술도 안마셨는데..바래다 주지 않아도 되요.”

“아냐..나도 이 근처가 집인걸?”

“선배는 여기랑 거의 반대쪽에 사시잖아요.”

“아하하하!아..아냐!차로 가면 금방인걸 뭐.”

준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게 느껴졌다.누가봐도 그 선배는 은채를 좋아하는 듯하다. 게다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횡설수설 하기 까지 했다.한사코 괜찮다는 은채를 계속해서 따라가는 것 역시 준후의 맘에 들지 않았다.

“저..저기 은채야!”

갑자기 그가 은채를 불러 세우자,준후는 재빨리 옆에 있는 담장옆으로 숨어버렸다.그가 부른탓에 은채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네?”

“저기…저기 있잖아.”

그는 무슨말을 하려는지 연신 꾸물대었고,은채는 재촉하지 않고 맑은 눈망울로 그를바라보고 있었다.순간 담장에서 숨어서 그 모습을 보던 준후는,은채의 눈망울에 달빛이 가득 담기는것을 보자 가슴이 뛰는게 느껴졌다.

“저기…나와..사..사…사귀어줄수 있니?”

“네?”

순간 은채의 눈도,숨어있던 준후의 눈도 커졌다.준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빼꼼히 얼굴을 빼어 은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정말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말이에요?”

“나..진짜로 2학년때부터 너 좋아했어.고백할 타이밍을 놓..놓쳐서 그런데…사..사귀어 줄수 없을까?나랑..”

준후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왠인지 모르지만 가슴한구석이 저리다.

‘2학년때부터 봐왔다라….한학년 윗 선배인가 보군.’

어째서 자신이 그런걸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다.준후는 그 선배라는 남자보다도 더욱 초조하게,은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이 선배라는 남자를 향했고,그는 또 안절부절 못했다.은채는 살짝 미소지으며 선배에게 목례를 해보였다.

“죄송해요 선배.”

“으…응?”

“선배는 진짜 친절하고 좋은 분이에요.”

“왜..안되는 거니..사귀는 사람이 있어?”

“그렇지는 않아요.죄송해요 선배.”

그는 맥이 탁 풀린듯한 얼굴로 풀이 죽어버렸다.준후는 그가 단순히 사귀자고 하는 그 멘트 하나를 얼마나 연습했는지 알수 있을거 같았다.은채가 단순히 미인이어서가 아니다.그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왠지 그녀와는 다르게 순수하지 않은 준후도,그녀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죄를 짓고 있는 것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죄송해요 선배.저는 이제 금방 들어가니까…늦기전에 돌아가세요.”

은채는 너무나 상냥하게 거절하고 있었다.준후는 긴장감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이렇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거지?’

본인의 마음조차 알수없는 준후의 옆으로,선배라는 남자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내려가고 있었다.준후는 계속 숨어있는 채로,그가 기운없이 차문을 여는 것을 바라보았다.

준후는 끼고있던 팔짱을 풀고는,그가 사라지는것을 보고 나서야 숨어있던 담장옆에서 걸어나왔다.순간,준후의 눈망울이 커졌다.은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제서야 준후는 놀이터에 인기척이 느껴지는것을 알수 있었다.늘 텅빈 그 공터.그리고 조그마한 그네위.마치 겨울의 요정처럼 그녀가 그네위에 앉아 있었다.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던 준후는 조용히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갑자기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은채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준후를 바라보며 웃었다.

“왜 남의집 담벼락에서 나오는거니?”

“본이 아니게 훔쳐 들었어.”

“그랬구나…”

은채는 몸을 살짝 움직였고,이내 그녀를 태운 그네가 앞뒤로 움직였다.준후는 쌀쌀한 날씨에 코가 살짝 빨개진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감기 걸리는게 소원인거야?왜 집에 안가고 여기에 있어?”

“그냥…난 추워도 겨울이 좋아.그리고 여긴 내 아지트잖아.”

그녀는 괜시리 준후를 보며 웃었다.그녀의 미소에 가슴이 떨린 준후는 괜히 시선을 외면하며,은채의 선배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왜 안받아줬어?괜찮은 녀석 같던데.”

“녀석이라니…누나보다도 한살많은 형한테.”

“호칭이야 어쨌든.”

은채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삐그덕 거리는 그네위에 앉아있었다.그녀의 시선은 저 멀리 가로등을 향해있었다.너무나 새하얀 피부.순백색의 설원에 흑진주 두개가 빛나는 것처럼,그녀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어.”

“뭐…?”

준후는 자기도 모르게 당황한 표정으로 은채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무엇이 있는지 모를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준후는 이유없이 가슴이 저려오는것을 느끼며,그녀에게 물었다.

“누..누군데?”

“음…글쎄. 계속해서 내가 시선이 가게되는 사람.”

준후는 벙어리가 된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은채는 꿈을꾸는 소녀처럼 눈망울을 반짝인다.그녀의 하늘거리는치마가 겨울바람에 살짝 살랑인다.

“그 사람은…누나가 싫데?”

“아니.아직 고백도 못했어.”

“어째서?”

준후는 본이 아니게 따지듯 은채에게 묻고 있었다.은채는 살짝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그녀의 행동과 몸짓하나하나가,왠일인지 준후에게는 비수처럼 저리고 아프다.

“그 사람이랑은 이뤄질수 없거든.”

준후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았다.화가 났다.어째서? 어째서 은채같은 완벽한 아이가 다른사람에게 부족한 여자가 된단 말인가.참을수가 없다.

“그게 무슨 바보같은 말인데?니가 뭐가 부족해서?”

한층 올라간 준후의 언성에도,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내가 부족한것도 있겠지만…절대로 이뤄질수 없는 사이야.”

준후의 주먹이 살짝 떨려왔다.왜 화가나는 것일까?자신도 알지 못할 일이다.괜시리 은채가 밉다.아니,은채같은 여자의 사랑을 받는 이름모를 그자식도 미웠다.

“유부남이라도 좋아하는거야 너?”

준후의 말에 은채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대답대신 그네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떨리는 준후의 마음을 아는지,살짝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런거 아냐 바보야.어서 집까지 바래다줘.어차피 독서실 가는길 맞지?”








“휴우”

준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다.적막한 독서실안,왠지 모르게 그의 한숨은 더욱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그는 책상위 스탠드에 점등을 한채로,책도 꺼내놓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내가 왜이러지.’

알수가 없었다.또래에 비해 애늙은이 기질이 있는것은 준후 본인이 아주 잘 아는 것이었다.하지만 이상하다.지금의 이 감정은 설명할 길이 없다.마치 산소가 없는 물속에 잠겨있는것처럼,숨쉬는것도 곤란하고, 무언가에 갇혀있는것처럼 왼쪽가슴이 저리고 답답했다.

은채와 대화를 나눈이후,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준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늘상 그의 가슴속에는 특별했던 은채.준후는 어렴풋이 알수 있었다.

‘내가 누굴 좋아하는 걸까.’

어린나이에 고아라는 지독한 환경을 맛보면서,준후가 배운것은 함부로 타인을 믿거나 좋아하지 말라는 절대법칙이었다.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의 나이답지 않은 성격형성에 크게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준후는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처음 강회장을 따라 이 집에 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은채는 다른 사람과는 별도의 개념으로 자신의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거구나.’

준후는 괜시리 인정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그럴순 없다.아니,그래서는 안된다.그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없다고 한들 자신이 어떻게 해볼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준후가 아무리 지금의 세 자매와 강회장을 진짜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가족이라는 것의 사회적의미까지 부정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왠지 모르게 욕이 나왔다.속이 답답해져 오고,머릿속이 어지럽다.쉬이 떨쳐내고 싶어도,억지로 펼친 책은 마치 다른나라의 단어들인 것처럼 준후의 머리속에 겉돌기만 했다.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후우…’

준후는 독서실 후문을 열고 약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갔고,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으슥해 보이는 계단이 있어 적당한 위치에 걸터앉았다.고등학생들이 있는 학원이나 독서실에는 늘 학생들이 담배를 숨어 피울 장소가 존재했다.이 독서실도 예외가 아닌듯,많은 담배꽁초들이 떨어져 있었다.

찰칵.

준후의 입가에서,입김인지 담배연기인지 모를 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뿜어졌다.왠지 모르게 철부지 시절에 자신에게 담배를 몰래 보여준 기주가 이럴때는 미웠다.

‘일단은 냉정해지자.’

감정에 휩쓸려서 좋을것은 아무것도 없다.게다가 입시는 바로 코앞이었다.조금이라도 만족스런 결과를 강회장에게 보여주어야 했다.그래야만,준후는 경영자가 아닌 음악가의 꿈에 조금이라도 다가갈수 있는 것이었다.

“저..저기요.”

문득 들려온 소리에 준후는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어려 보이는 자신이 담배를 피우니 누군가가 한소리 하러 온것인가 했는데,앞에는 또래의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낮이 익는데..’

은수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눈망울.살짝 통통한 볼이지만,빨간 코트 밑으로는 가늘게 뻗은 다리.앙증맞은 코는 쌀쌀한 날씨로 빨개져 있는 소녀였다.

“저기..그때 저…도와주셨던..”

그제서야 준후는 아!하는 탄성을 질렀다.주차장에서 위기에 처했던 바로 그 성은영이라는 소녀였다.덧붙여,준후가 있는 독서실 칸에 바로 옆자리인 여학생이기도 했다.

“아…그때 그..”

“네.기억나세요?”

그녀는 뭐가 좋은지 싱긋 웃었다.준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은영은 살짝 준후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옆에 앉아도 되요?”

“좋을대로 해.내가 산 자리도 아닌데 뭘.”

“네!”

은영은 계단의 준후 옆으로 가서 살며시 앉았다.날씨가 쌀쌀한지 몸을 움츠린 모습이었다.

“아참!그리고 이거…”

은영은 주머니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꺼내어 준후에게 내밀었다.준후는 그것을 멀뚱히 보다가 이내 받아들었다.

“그때…감사하다는 말을 드리려구요.”

“아..그래.괜찮아.”

이내 무뚝뚝한 대답에 살짝 실망한 표정이던 은영은 다시금 준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준후는 은영이 준 커피를 살짝 들이키고 있었다.

“근데..몇학년이세요?”

“3학년.”

“아…저는 1학년이에요!”

“아 그래.”

“…”

준후는 계속해서 관심이 없다는 듯 커피를 마셔가며 흡연에 열중하고 있었다.그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계속해서 준후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잘생겼다!’

은영은 가슴이 두근거리는게 느껴졌다.처음보았을때는 그저 평범해 보이던 사람이 왜 한순간에 이렇게 멋져 보일까.어린 그녀는 알리가 없다.

“담배 맛있나요?”

“아니.”

“그럼 왜 피워요?”

“글쎄.”

“자주 피우면 폐가 썪는데요.”

“아 그래?썪기 직전에 끊으면 되겠네.”

“빨리 끊는게 낫지 않을까요?”

“나는 이 대화를 빨리 끊는게 낫다고 보는데.”

“제가 말이 너무 많아요?”

“몰라서 묻는건 아니지?”

은영은 뭐가 재밌는지 쿡쿡 거리며 웃었다.준후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앉은 은영을 바라보았다.

“왜 웃어?”

“그냥 오빠가 귀여워서요.”

“뭐?”

“저는 성은영이에요.오빠 이름은 뭐에요?”

“난…”

준후는 잠시 멈칫했다.생각해보니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에게 말하는것은 오랜만이다.그리고 아직까지는 너무 어색한…자신의 이름 앞뒤로 붙여진 두 글자역시.

“강준후.”

“아..그렇구나..”

강준후..강준후…남자다운 이름이라고 은영은 생각하며 웃었다.하지만 미소도 잠시,준후가 피우던 담배가 거의 끝까지 타들어가자,그녀는 초조해졌다.준후는 분명 저것을 끄는 순간 들어가 버릴 테니까.대화역시 끊겨 버리는 것이다.

“오..오빠!”

“왜?”

“정말 고마웠어요.그 아이들…불량스러운 애들 이었는데…정말 고마워요.”

준후는 물끄러미 은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곧 준후가 가겠거니 하는 생각에 열심히 다른 말을 찾기 시작했지만,그는 의외로 일어나지 않은채 입을 열었다.

“무슨 책이 잡혔길래 그런짓을 당한거야?짐작은 했지만.”

“그게…”

순간 은영의 두 볼은 그녀가 입은 코트처럼 붉어졌다.차마 준후에게 이야기 할수가 없었다.옷갈아입다가 찍힌것도 아니고,자신의 언니가 사용하던 바이브레이터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흠이 잡혔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꺼낼수 없었다.

“말하기 어려우면 됐어.뭔지는 대충 아니까.”

“네?아..네..”

은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남자라는 세계.그리고 그 세계의 경계에 위치한 성이라고 하는 미지의 영역. 남다른 호기심을 말하기엔 너무나 부끄럽다.게다가 상대는 자신을 설레게 하는 준후였다.

“그..근데..그 아이들 되게 불량한 애들이에요.분명 보복을 할건데.”

은영은 진심으로 준후가 걱정이 되었다.자신은 여자이고,휴대폰도 망가졌으니 다시는 해를 가할리가 없을것이지만,그 아이들이 준후를 내버려 두진 않을것 같았다.

“어.니 말대로네.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야.”

“네?”

“저기봐봐.”

은영은 준후가 가리킨곳을 바라보고는,이내 토끼처럼 눈이 커졌다.얼굴이 퉁퉁 부은 민규와 준태가 또래의 껄렁껄렁한 녀석들을 데리고 독서실 후문에 진을 치고 있는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어떻게 해요?”

“어떡하긴.도망가야지.내가 이소룡도 아니고.”

하지만 준후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없었다.은영은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그..근데..가방같은거 독서실안에 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준후는 태평한 목소리로,자신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수십명의 비행청소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은영의 귀여운 눈망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제..제가 가서 때리지 말라고 할까요?”

“니가 왜?”

“그..그거야…”

좋아하게 되어서요.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은영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번에..도와주셨으니까…”

“아서라.딱봐도 삐뚤어진 애들인데 니 말을 듣겠냐.뭐..내키진 않지만 방법이 없진 않아.”

“뭐..뭔데요?”

“몰라도 돼.그냥 이럴때 꼭 필요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네?”

“이거 잘마셨다.”

준후는 대답대신 빈캔을 은영에게 주었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들었다.아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후문이 아닌,정문쪽으로 돌아가려는듯 계단을 내려가는 준후의 뒷모습을 은영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틀림없어.드라마같은데서 보던 운명의 남자!’

한창 꿈을 꾸는 나이.그리고 한창 호기심이 많을 나이.은영은 설렘과 걱정이 교차되는 눈으로 그렇게 계속 준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끄억!”

“아따 어린노무 쉐키들이 지금 조폭 흉내내는거여?아야 똑바로 안서냐잉?”

“뜨어억!”

마치 추수철 농부의 낫질로 넘어가는 볏단처럼,일렬로 도열한 고등학생들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의 손에 픽픽 쓰러졌다.그 모습을 보며 담배를 태우던 기주는 슬쩍 준후를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게 이거밖에 없구나.”

“미안.이런걸로 불러서.”

기주는 피식웃으며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정신교육(?)을 호되게 치르는 고등학생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거냐?”

“말하자면 길어.”

“너도 어쩔수 없는 고등학생이긴 한가 보구나.시비붙어서 싸움질도 하고.”

“에휴.관두자.”

준후는 살짝 기주를 부른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별수 없었다.계속해서 독서실을 다니기 위한 가장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인것만 같았다.

“뭐..괜찮아.쟤들도 어린애들에게 저러는거 쪽팔리긴 하겠지만 별수있냐.”

“다시 말하지만.어쩔수 없는 상황이었어.”

기주는 준후의 말에 피식 웃으며 시계를 바라보았고,이내 자신의 부하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기주의 신호를 받은 사내는 살짝 목례를 하고는,험악한 인상을 구기며,눈앞에 정렬해 있는 비행청소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가서 공부들 혀라잉? 한번만 더 허튼짓하면 그냥 학교를 못다니게 해불랑게.”

“네..넵!”

민규와 준태는 당장 오줌이라도 쌀 기세였다.그들로써는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그냥 지 또래 아이 하나 혼내주는데,어째서 성인조폭이 온단 말인가?순간 청소년의 세계(?)에 침입한 이 아저씨들이 너무나 미워지는 그들이었다.

“청소해줬으니까 됐냐?”

“어.다시는 이런걸로 안부를게.”

기주는 준후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몸을 돌렸다.몇걸음 가던 기주는 다시 준후쪽을 돌아보았다.

“별일없냐?”

“뜬금없이 무슨소리야?”

“그냥…뭐…큰 사건이나 그런거 없냐고.”

준후의 고개가 갸웃했다.생전 그런 요상한 질문은 한적이 없는 기주였기에,준후의 표정은 떨떠름하기 그지 없었다.

“없어…근데 도대체 그 질문의 의도가 뭐야?”

“아무것도 아냐.공부 열심히 해라.”

어리둥절해하는 준후를 뒤로하고,기주는 손을 흔들며 부하들의 안내를 받아 차에 올라탈고 있었다.달빛이 너무나 밝은 초겨울의 밤.준후는 살짝 목을 꺾으며 다시 독서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아무래도 오늘은 뒤숭숭해서,공부를 못할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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