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경천행 제11장 小室을 얻으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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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195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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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小室을 얻으러 왔소

아다약의 부상은 엄중했다.
옆구리와 어깨에는 허연 뼈가 드러나보일 정도로 깊은 자상(刺傷)
을 입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음혈독지!
격중되는 한 어떤 영약으로도 해독할 수 없다는 죽음의 독.
비록 아다약이 신이 내린 여의성체를 타고 태어난 존재지만 음혈
독지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의식은 이미 무너졌으며,
이제 음혈독지의 독기는 심장으로 번지고 있었다.

― 천년빙련(千年氷蓮).
― 복사혈액(復蛇血液).
― 속명신단(屬命神丹).
― 삼엽선단(三葉仙丹).

이름도 들어보기 힘든 천하의 명약들을 음혈독기를 해독하기 위
해 모두 복용시켰다.
뿐이랴.
약황(藥皇)을 비롯한, 정도무림의 이름있는 명의(名醫)들이 모두
아다약을 구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하나로 모았다.
그러나 불가능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아다약의 몸에 잠재된 음혈독기는 무섭게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 하늘이 어찌하여 정도무림(正道武林)을 버리는가?

삼 일째 되던 날.
천지회의 수뇌부들은 하늘을 원망했다.
허탈과 절망에 휩싸인 정도무림과 천지회.
하늘은 과연 그들을 버릴 것인가?

* * *

한 사람.
몸에는 홍의가사를 걸쳤다.
길게 늘어진 백염과 귀 밑까지 치뻗은 백미(白眉)만 보더라도 고
승의 풍도를 지니고 있다.

― 항마법사!

전대 소림의 장문인임과 동시에, 천지회의 수석장로인 이 노승은 지
금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깊은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다.
'아미타불! 염우가 그렇게 강한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항마법사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설산성녀 아다약이 염우에게 패한 사실이.......
항마법사는 뼈저린 후회를 했다.
고신옥정을 구한다고 했을 때 끝까지 아다약의 발길을 막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불행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주를 죽게한 사람은 바로 나다.'
항마법사의 얼굴에 짙은 회오가 서렸다.
절망이었다.
아다약이 죽게된다면, 이제 누가 검을 들어 저 악마의 무리들과
대결을 벌인단 말인가?
'아미타불!'
천지회는 너무 천마혈성의 존재를 가볍게 여겼다.
천마혈성, 그들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천마혈성의 모든 것을 파악
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달랐다.
특히 염우는,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천지회는 이런 결과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회주인 아다약이 패한다는 생각을 누가 했을까?

― 회주의 적은 오로지 만세야 자천룡 뿐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아미타불! 천마혈성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정도무림의 뿌리는 이대로 끝나는가?'
음혈독지를 해독할 방법은 없다.
이제 아다약의 죽음은 기정화되었다.
누구도 기적을 바라는 어리석은 인간은 없었다.
'불존이시여! 어찌하여 소승에게 이런 시련을.......'
항마법사의 백염이 가늘게 떨렸다.
절망과 허탈감으로.......

* * *

밤은 먹물을 뿌려놓은 것 같이 어두웠다.
아다약의 죽음을 슬퍼하려는가?
하늘에서는 청승맞은 가랑비가 지척거리고 있다.
항마법사는 먹물 같은 하늘을 응시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얼굴에 와 닿는 차가운 기운 뿐이다.
그는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미타불! 회주, 우리 천지회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회주의 숭고
한 뜻을 받들어 목숨을 던질 것이오."
항마법사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얼마 후면 아다약은 죽는다.
아다약이 죽은 이후의 천지회를 생각해야 할 때다.
생각하기 싫었던 결과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때였다.
막 아다약의 처소로 들어서려던 항마법사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졌다.
"아미타불! 뉘신지?"
항마법사는 어둠의 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 장쯤 떨어진 곳.
언제부터였는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 사람이 고요하게 서 있다.
일신에 선명한 백의를 걸친 인물.
백의인은 항마법사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의 앞으로 한
걸음을 다가왔다.
항마법사의 눈이 미미하게 떨렸다.
'고수다.'
항마법사는 백의인을 뚜렷이 응시했다.
자신과의 거리는 불과 일장.
아무리 정신을 흐트리고 있었다지만 상대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
에까지 접근하도록 아무런 낌새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이 어디인가?
천지회의 총단. 밖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경계가
펼쳐져 있다.
그럼에도 지금 눈 앞의 백의인은 자신의 앞에 태연하게 나타나
있으니.
"수고스럽지만 저를 회주라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겠
소?"
정중하게 물어온 음성.
맑고 정기가 충만한 음성이다.
"자네는 누구인가?"
백의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천향의림의 천향신수라고 불러 주시오."

* * *

백표랑!
천지회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난 그는 어둠의 화신인 양 당
당했다.
흔들리는 것은 항마법사다.
'천향신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신의 의술을 지녔다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
'그 유명한 천향신수가 이렇게 젊은 청년이라니.'
항마법사는 눈 앞의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은 아니다.

― 음혈독기는 천하의 어떤 영약이나 명의의 의술로 해독하지 못
한다. 음혈독기는 해약이 없다.

천향신수가 비록 뛰어난 의원이라고는 하지만 아다약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빠른 판단을 내린 항마법사다.
"아미타불! 뜻은 고마우나 돌아가 주시오."
"무슨 이유요?"
"명의의 손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소."
"의원은 환자를 두고 몸을 돌리지 않소."
항마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미타불! 우리는 이미 최후를 생각하고 있네."
"회주의 죽음을 방관하겠다는 말이오?"
"하늘의 뜻이지."
항마법사는 말을 할 기력조차 없었다.
오히려 백표랑의 존재가 귀찮았다.
백표랑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음혈독기가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소."
항마법사는 자신도 모르게 백표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혈독기!
상대는 이미 아다약이 음혈독기에 중독된 것도 알고 있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
"그러나 때로는 많이 알아서 해가 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네. 알아
서는 안될 일을 알아 버렸네."
"내가 중시하는 것은 회주를 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오."
백표랑은 항마법사를 이해시키려는 듯 말을 이었다.

― 음혈독기의 해약은 없소.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음혈독
기와 극성인 염천화기로 회주의 몸 속에 잠재된 음혈독기를 제거한
다면 가능성은 절망보다 더 많아지오.

항마법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염천화기!
백표랑의 말은 현실성이 있었다.
"아미타불! 그것이 사실인가?"
백표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
"염천화기를 소유한 사람이 이기탈환대법(以氣奪幻大法)으로 체
내의 음혈독기를 제거하면 됩니다."
"이기탈환대법이라 했는가?"
"그렇소."
희망의 빛이 떠올랐던 항마법사의 얼굴은 다시 어둡게 변했다.

― 이기탈환대법(以氣奪幻大法).

역천(逆天)의 사술(邪術)이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사람의 시체에 혼을 불어넣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움직이는 이른바 강시술에 적용된 사술.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인술(仁術)
이나 정술(正術)과는 거리가 멀어 사람들이 배척했다.
천 년 전!
이 땅에 사공이학(邪功異學)을 창시해 천하를 놀라게 했던 신도사
환(神度思幻)이 창시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그의 모든 무학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 이기탈혼대법을 백표랑이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항마법사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아마 수양이 낮았다면 백표랑을 죽이겠다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아미타불! 그것 역시 불가능한 것들이군."
"......."
"염천화기를 지닌 사람을 찾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거니와, 신
도사환의 이기탈환대법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더
불가능한 것이네."
백표랑은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무슨 말인가?"
"염천화기나 이기탈환대법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잡기에 비한다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오."
항마법사의 얼굴에 놀람이 서렸다.
"자네가 말인가?"
백표랑은 담담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어둠의 한 곳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자연히 항마법사의 시선이 백표랑의 손이 뻗어진 곳을 향하는데,
푸지지지지치!
거대한 청동향로.
두께가 무려 세 치나 되는 청동향로가 푸른 연기와 함께 녹아내
리는 것이 아닌가?
무림의 최고 배분을 지닌 항마법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공포
의 신기였다.
항마법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럴수가?'
항마법사는 백표랑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잘해야 고작 약관의 나이, 그러나 그가 간단하게 보여준 일련의
동작은 결코 자신이 가장 위대하게 느꼈던 설산성녀 아다약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천하에 이런 고수가 있었다니.......'
백표랑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제 저를 회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겠소."
항마법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승을 따라오시오."

* * *

화려한 내전.
이곳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침상 위에는 아다약이 미동도 않은 채 누워 있고,
그 앞에는 천지회의 장로들이 앉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
어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히 아다약의 죽음을 기다리는 천지회의 수뇌들.
백표랑이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항마법사와 함께 아다약의 처소로 들어선 백표랑.

― 저 젊은이는 누구란 말인가?

수뇌들은 백표랑과 항마법사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나 항마법사는 수뇌들의 의문을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백표랑을 아다약의 침상 앞으로 안내하며,
"아미타불! 방법이 있겠소?"
말을 하는 순간까지 항마법사의 시선은 백표랑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몰랐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희망이다.
백표랑은 조용히 아다약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백표랑의 지금 심정은 기묘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염우로 변신해 아다약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아다약의 앞에 서 있다.
만약 이 사실을 천지회의 수뇌들이 안다면 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훗훗! 아마 온전하게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백표랑의 표정은 엄중했다.
백표랑은 세심하게 아다약을 살폈다.
아다약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설같던 살결은 이미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눈자위까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아름다움을 잃어 버린 모습이다.
'생명을 잃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변하는 것이지.'
백표랑은 아다약의 눈을 뒤집어 보고, 진맥도 해 보았다.
'음혈독기가 무섭군. 만약 아다약이 정심한 내력을 지니지 않았다
면 이미 이틀 전에 죽었다.'
항마법사는 초조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소?"
백표랑은 항마법사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음혈독기를 해독하기 위해 회주에게 복용시킨 영약들이 오히려
음혈독기의 독성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소."
"그럴리가?"
"영약의 기운이 한 순간은 음혈독기의 기운을 제어해 줄 수 있지
만 일단 약효가 약해지면 음혈독기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오.
일종의 반등심리인 것이오."
"그럼 가망이 없다는 말이오?"
백표랑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서슴없이 말했다.
"조건이 있소."
"조건?"
항마법사의 안면이 좁혀졌다.
상대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조건이라는 말이오?"
"어려운 것이오."
백표랑은 항마법사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 회주를 살리는 대신, 그녀를 나의 소실(小室)로 보내 주는 것
이오.

"뭣이!"
"소실이라고?"
장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항마법사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무당의 전대장문인인 송
백도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며, 개방 장문인 취선 주일비는 호
로병을 내던지고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백표랑을 응시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항마법사가 조용히 참견했다.
"아미타불... 자중하시길."
장로들은 본노를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정작 백표랑은 태연했다.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감히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 앞에서
이런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항마법사는 진중하게 물었다.
"그것이 시주가 원하는 조건이오?"
백표랑은 주저없이 말했다.
"그렇소."
"그 분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아시오?"
백표랑은 흐트러진 미소를 지었다.
"여의성체를 타고 태어나 무량천동의 무학을 연성하고, 천지회를
이끄는 회주라는 사실까지."
"그렇다면 시주의 조건이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
소?"
말은 그렇게 정중하게 했지만,
항마법사의 말뜻을 어찌 백표랑이 모르랴.

― 너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천하에 그녀를 차지할 수 있
는 자격을 갖춘 남자는 없다.

백표랑은 흐트러진 웃음을 머금었다.
"나의 소실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 그러나 그녀는 좀 특별한
존재이니 소실로 맞이하기로 결심했소."
항마법사는 물론이요, 장로들은 어이가 없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굴러 들어와서.......'
'대체 저 놈이 누구야?'
백표랑은 그런 장로들의 표정을 외면했다.
"어떻게 하시겠소?"
항마법사는 백표랑의 눈을 정시했다.
무저의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눈빛은 신비했다.
흐트러진 웃음과 엄정한 기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 앞에서도 당당한 기개.

― 이런 인물은 매우 다루기가 곤란한 인물이다.

항마법사는 잠시 주저했다.
이제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다약이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다.
"시주는 회주를 살릴 수 있다고 장담하오?"
"물론이오."
"만약 실패한다면?"
"당신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겠소. 원래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 용기가 있어야 하니까."
실없는 사람처럼 주절거리는 백표랑.
항마법사의 얼굴에 어떤 결단의 빛이 떠올랐다.
"아미타불! 시주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장로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 얼마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가?

― 회주를 저놈의 소실로, 이것은 말도 안된다.

장백 장문인 도룡검객 진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법사! 이 일은 신중을 기하는 것이......."
항마법사는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그는 분노한 장로들을 한 사람씩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소승이 아닌 누구라도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진청은 입을 다물었다.
항마법사의 말대로 자신이 항마법사의 처지였어도 결론은 하나였
을 것이다.
'빌어먹을.'
진청은 한동안 백표랑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무당장문인 송백도장. 그
의 몸이 환상처럼 움직였다.
스사사삭!
몸도 빨랐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은 그의 검이었다.
송백도장의 깡마른 우수가 허리의 검을 잡아갔다고 느낀 순간, 서
슬이 시퍼런 한 자루의 검이 들려졌고,
번쩍!
누가 만류할 촌각의 여유도 없이 송백도장의 검은 백표랑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폭사해 갔다.
돌연 백표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아니,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기에는 그의 목덜미에 닿아 있는
섬뜩하고 차가운 기운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송백도장의 검.
파리한 검광을 발하는 송백도장의 검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백표
랑의 목덜미에 정확하게 닿아 있었다.
송백도장은 무심하게 말했다.
"만약 회주님을 살리지 못할 때는 이 검이 너의 목을 벨 것이다."
백표랑은 지극히 과묵한 웃음을 머금었다.
"푸후훗! 무당의 검법이 대단하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이렇게
몸으로 체험하고 보니 정말 대단하오. 방금의 그 초식은 무당의 최
고검학이라는 통천태극검(通天太極劍)의 마지막 초식인 태극천붕(太
極天崩)이군."
송백도장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너의 목숨쯤은......."
"죽일 수 있다는 말이구려."
"네놈의 목적은?"
"이미 말한대로 당신의 회주를 내 소실로 삼겠다는......."
툴툴거리던 백표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벌이 그의 목덜미를 쏜 것 같은 따끔한 느낌과 더불어 한 방울의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송백도장의 검이 백표랑의 목덜미에 검상을 낸 것이다.
송백도장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천하의 누구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나다. 더욱 이 정도무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백표랑은 여유있게 웃었다.
"푸후훗! 나를 죽이면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회주를 죽이는 것이
나 다름이 없소. 왜냐하면 당신의 회주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
에 오직 나 뿐이기 때문이오."
너무 자신만만한 백표랑의 태도.
송백도장은 한동안 타는 눈동자로 백표랑을 응시했다.
이어 조용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좋아. 만약 회주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때는 이 검으로 너를 베고
나 또한 죽도록 하지. 삶에는 미련이 많지 않으니까."
"푸후훗! 매우 기분좋은 말이오."
딱딱하게 굳어진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백표랑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아다약에게 시선을 돌렸다.

* * *

― 천마혈성을 상대함에 있어 천지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집단
이다. 그들의 힘이 충분히 발휘된다면 천마혈성의 세력 중 삼할을
감당할 수 있다. 천지회에서 아다약의 존재는 신(神)과 같다.
아다약이 무너지면 천지회도 무너진다.
다만, 아다약은 자천룡의 무서움을 모른다. 이번 기회에 그녀가
천마혈성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야 한다.
물론, 아름다운 여자를 소유하는 내 욕심을 채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목적이다.

백표랑은 아다약을 일으켜 세워 앉혔다.
이어, 그는 아다약의 등과 한 자 가량의 거리를 두고 가부좌를 취
했다.
아다약의 명문혈(命門穴)을 향해 쭉 뻗어진 백표랑의 쌍수.
우우웅!
그의 손이 아다약의 명문혈에 닿은 순간 거대한 진공음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천지회의 전대장문인들의 안
색이 급변을 일으켰다.
경악이다.
'엄청난 내력이다.'
'젊은 나이에 믿어지지 않을 일이군.'
전대장문인들은 백표랑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때서야, 이 자리에 모인 장문인들은 백표랑의 비범함에 놀랐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백표랑.
그의 쌍수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불덩이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그의 쌍수는 얼마의 시
간이 지나지 않아 자하의 서기를 발했다.
항마법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염천화기가 극성에 이르렀다.'
극(極)!
그 의미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어느 방면의 첨단에 도달한다는 것은 웬만한 인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던가?
또 한 가지, 백표랑의 행동이다.
천지회의 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슴없이 내력을 사용해 상대를 치료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시점에서 백표랑에게 손을 쓴다면 꼼짝없이 당
하고 말 처지.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를 믿는 것인가?'
항마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백표랑이라는 인물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다.
항마법사의 시선은 백표랑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우우웅!
대전을 진동시키는 진공음.
그와 함께 자하의 서기 같은 강기가 백표랑과 아다약의 몸을 은
은하게 감쌌다.
'우욱!'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은 황급히 뒤로 일 장씩 물러섰다. 열
기, 대전을 태워 버릴 것 같은 열기가 백표랑의 몸에서 퍼져 나왔다.
지금까지 기세가 등등하던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의 얼굴이 한
결같이 굳어졌다.
'절대 우리의 아래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지 모른다.'
'대체 중원무림에 저런 고수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누가 저 괴물같은 인간을 길러냈다는 말인가?'
전대장문인들의 놀람과는 달리,
항마법사의 얼굴은 굳어졌다.
'만약, 저 자까지 우리의 적이라면.......'
항마법사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그의 노안은 어두워졌다.
천마혈성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지금, 신분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백표랑까지 자신들의 적이라면 정도무림을 수호할 수 있는 확률은
전무(全無)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백표랑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문혈에 머물러 있던 그의 쌍수가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빠르게
짚어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백표랑의 손은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까지
알아볼 수 없도록 움직였다.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아다약의 혈도를 짚어간
백표랑의 손이 점점 심장 쪽으로 향했다.
그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상대는 여자다.
천지회의 회주라는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 있는 여자다.
그러나, 백표랑은 다만 한 여자를 대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환자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회음혈과 음부!
여인의 중요한 부분도 거침없이 백표랑의 손이 짚어가고 있었다.
'으음!'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서서히.......
아다약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붉게 죽어 있던 피부가 회생의 빛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항마법사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깨어나고 있다!'
항마법사는 자신이 지금 기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신화(神話)를 보고 있다.
우우우웅!
대전을 휘감은 진공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맹렬해졌다.
이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눈조차 바로 뜰 수 없었다.
요동치는 열기와 서기.
그렇게 또다시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파파팟!
백표랑의 쌍수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아다약의 풍만한 젖가슴을
연달아 두들기고 짚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다약은 모른다.
지금 자신의 풍만한 젖가슴이 사내의 손에 마음대로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
"우홱! 홱―!"
지금까지 죽은 듯 미동도 않던 아다약의 몸이 심하게 비틀거리며
연달아 피를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검게 죽어 있는 피.
'음혈독기다.'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은 경악과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중독되는 한 해독제가 없으며,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치유할 수 없
다는 음혈독기가 치유되고 있는 순간이다.
백표랑은 마지막 치료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슥! 스슥!
그는 아다약의 젖가슴을 힘있게 문질렀다.
풍만한 두 개의 융기가 백표랑의 손에 의해 문지러질 때마다 아
다약은 검붉은 피를 쏟아냈다.
'빌어먹을.......'
취선 주일비는 나직하게 투덜거리며 호로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필이면 그곳을 문질러야 치료가 된다는 말인가?'
아다약의 풍만한 젖가슴.
백표랑은 지금까지 그곳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다약은 천지회의 신과 같은 몸이다.
그런 아다약의 젖가슴이 지금 이름도 모르는 청년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주물러지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
다.
.......
백표랑의 손이 멈춰짐과 동시에 아다약의 각혈도 멈춰졌다. 그리
고, 두 사람을 감쌌던 서기가 걷히고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다약의 모습은 변하고 있었다.
죽어 있던 피부가 본래의 혈색을 찾아가고, 끊어질 것 같은 호흡
이 다시 원기를 찾아 산소를 공급하고 있었다.
백표랑은 아다약의 맥문을 잡았다.
몸의 기능이 완전히 정상을 회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만큼 백표랑의 내력은 소진된 상태,
'으음... 내가 시전했지만 음혈독기의 독성은 의외로 지독하군.'
백표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파일방의 전대장문인들이 자신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든 말
든 백표랑은 그들을 향해 흐릿한 미소를 보냈다.
"회주는 앞으로 한 시진 후면 본래의 원기를 회복할 것이오."
백표랑의 시선이 송백도장을 향했다.
"다행히 도장의 검에 죽지 않게 되었소."
송백도장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그의 속마음으로는 경악과 불신이 함께 뒤엉켜 있었다.
'놈은 상상 이상의 고수다.'
어쩔 수 없는 대상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백도장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했다.
백표랑의 눈동자는 투명했으며, 그 속 그늘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한 적이 없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색의 눈빛!
백표랑의 눈빛은 무색(無色)의 침유가 흐르고 있었다.
송백도장은 전신의 피가 조여드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백표랑은 낮게 투덜거렸다.
"천지회의 인심이 이렇게 야박할 줄은 미처 몰랐군. 좋은 인사는
그만 두고라도 값싼 백갈이라도 한 잔 권할 만도 한데......."
백표랑의 말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취선 주일비였다.
"크! 이제야 인생의 참맛을 아는 놈을 만났군. 그래, 술을 마셔야
만 술의 참맛을 알게 되지. 술이란 놈은 정직하면서도 변덕장이거
든."
주일비는 백표랑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려놓았다.
술냄새가 푹푹 풍기는 손이다.
"가자! 오늘은 네놈과 한 번 취해 보겠다."
백표랑은 거절하지 않았다.
"푸후후...... 술과 미인을 알아야 영웅이라고 했겠다."
백표랑은 거리낌없이 주일비와 함께 대전에서 사라져 갔다.
항마법사!
주일비와 백표랑이 술 때문에 가까워진 것을 본 그는 끝내 웃고
말았다.
'허허허....... 이럴 때는 술을 입에 댈 수 없는 불제자의 몸이라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군.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청년인데...
....'

* * *

주일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눈과 귀, 정신이 모두 놀랐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의술에만 능통하려니 생각했던 주일비.
그러나 백표랑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의술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學文)과 무학(武學)에도 막힘이 없었
다.
뿐이랴.
기문진식(奇門陣式)과 역학(易學), 그리고 성복술(星卜術)에도 타
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이로 알고 있었다.
주일비가 가장 놀랐던 것은, 역시, 백표랑의 좌도방문(左道房門)
이다.

―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황실의 황녀라도 내 앞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벌리게 만들 자신이 있소.

백표랑이 서슴없이 늘어 놓은 말.
백표랑은 자신의 전력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 놓았다.
가히, 수십 명에 달하는 여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주일비가 알만한 여자도 있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감숙성주의 애첩과 놀아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감숙성주의 애첩, 주일비도 익히 아는 여자다.
몸가짐이 정숙하고, 예의가 바르기로 소문난 여자다.
그럴 리가 없다고 주일비가 고개를 흔들었을 때, 백표랑은 주일비
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 정숙하고 틀에 박혀있는 여자일 수록 부정한 관계에 빠져들기
쉬운 법이오. 그 예로 아무렇게나 굴러먹은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삼 년은 수절하지만, 정숙했던 여자일 수록 무덤 앞에서 부채질을
하는 법이오.

"왜 하필이면 무덤가에서 부채질이냐?"
"푸후훗! 흙이 빨리 말라야 다른 남자 품에 안길 것 아니오."
"뭐야? 그럼 감숙성주의 애첩도......?"
"푸후훗! 아마 내가 원한다고만 하면 오늘 밤에라도 보따리 싸들
고 이곳으로 나를 찾아 달려오게 될 것이오."
주일비는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그렇게라도 해야 놀람을 가라앉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쓱 문지른 주일비.
"그래, 후사(後事)를 볼 여자는 정해두었나?"
백표랑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웃었다.
"정해는 두었지만 걱정이 있소."
"무슨 걱정인데?"
"씨를 뿌려 후사를 얻기는 얻어야 하는데 어느 여자의 몸에 씨를
뿌려야 할지 그것이 걱정이오. 한둘이라야 고민을 않지."
주일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게 많나?"
"이제 당신들의 회주까지 소실로 삼았으니 한 오십 명쯤 될 것이
오."
"오십 명이나?"
주일비는 다물어진 입을 벌리지 못했다.
'빌어먹을! 생긴 것을 보니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하기야
저만한 인물이라면 내가 여자였어도 아랫도리가 근질거렸겠지.'
주일비는 또 술을 마셨다.
자신이 갑자기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래, 그러면 내게도 한 명쯤 쓸만한 여자가 걸리지 않을까?'
주일비는 눈을 빛내며 백표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친구로 사귀면 어떨까?"
백표랑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 주일비를
바라보았다.
"친구? 당신과 내가......?"
주일비는 열을 올렸다.
"그래, 우리는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당신같이 바싹 늙은 사람하고 나같이 팽팽한 사람이 친구란 말
이오?"
"진정한 친구는 나이를 초월하는 법이다."
백표랑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손해보는 장사군."
"손해를 보다니, 손해가 있다면 응당 내가 손해지. 나이를 손해보
아도 족히 육십은 손해보고 들어가는데."
"그렇지만 당신의 회주가 내 소실이 된다면 당신은 나와 친구가
아니라 발바닥까지 받들어야 할 처지가 되어야 할텐데."
주일비의 안색이 싹 굳어졌다.
사실이다.
만약, 백표랑이 약속대로 아다약을 소실로 삼아 버린다면, 천지회
의 장로들은 모두가 백표랑을 섣불리 대할 수 없다.
'빌어먹을! 놈에게는 도대체 허점이 보이지를 않아. 어쩐지 불길
한 예감이 든단 말이야.'
불길한 예감!
그것은 아다약이 정말 백표랑의 소실로 들어갈 것 같은 생각 때
문이다.

* * *

아다약이 의식을 회복한 것은 해시(亥時) 무렵이었다.
원래, 음혈독지에 당한 것을 제외한다면, 염우 즉 백표랑과의 대
결에서 그리 엄중한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다.
아다약의 앞에는 항마법사가 굳은 듯 서 있었다.
항마법사는 아다약의 눈치를 살피느라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다약은 공막한 시선을 창가가로 던졌다.
하늘에는 초롱한 별빛.
초롱한 군성들을 바라보는 아다약의 암갈색 눈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다.
염우와의 무리한 대결.
자만심이 지나쳐 가볍게 본 염우에게 치명적인 암수를 당했다. 죽
음의 기로에서 며칠을 헤맸는지 모른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제 이의 생을 보장 받았다.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아다약은 항마법사가 들려
준 말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 아미타불! 용서하십시오, 회주! 저희 장로들은 천향신수의 제
의를 받아 들이고 말았습니다.
― 천향신수라는 자의 제의가 무엇이었나요?
― 회주님을 자신의 소실로 삼겠다는 제안을 했었습니다.
― 나를 소실로?
― 아미타불.......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회주님을
살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다약은 항마법사의 말에 어떤 절망감을 느꼈다.
아무리 천지회의 회주라는 몸이지만 여인의 몸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여자에게 순결보다 소중한 것이 있던가?
항마법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다약은 가슴 속의 심정을 감춘 채 감정없이 말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나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다약은 항마법사의 얼굴이 비장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미타불! 소승이 계율을 범하고 평생면벽을 각오한다면 한 가지
길은 있습니다."
아다약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를 죽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회주님과 무림을 위한 일이라면 소승이 살계(殺戒)를 열겠습니
다."
아다약의 얼굴이 굳어졌다.
"법사의 말을 빌리면 그의 무학은 상상할 수 없다는데 그를 제거
할 수 있다고 판단하세요?"
항마법사는 잠시 주저했다.
상대는 신비 투성이의 인물이다.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이나 실
력은 항마법사가 쉽사리 단정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인물이 아니
던가?
'섣불리 상대했다가 천지회는 자천룡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한 명의
적수를 스스로 만들게 된다.'
항마법사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아미타불! 그러나 문제인 것은, 일이 잘못되어 그와 적이 된다면
천지회의 목적은 그만큼 멀어지게 됩니다."
"그 자가 그렇게 강하게 느껴졌단 말인가요?"
"아미타불!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소승이 지금까지 보아온 인물 중
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신검대인 고신만해가 그 나이였
을 때도 이루지 못한 성취를 소승은 보았습니다."
"으음!"
아다약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선택의 여지란 없다. 자신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
니, 이름도 모르는 사내의 소실이 되는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이 모르게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그 이후의 일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아다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자의 진정한 신분은 알아 보았나요?"
항마법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개방의 정보망을 총동원했지만 우리가 알아낼 수 있었
던 것은 그가 천향의림의 천향신수라는 사실 하나 뿐이었습니다."
아다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가 있다. 그런 인물이 단순하게 사람의 병이나 고치고 살아
갈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우선 그 자에 대한 것을 알아보
아야 한다.'
아다약은 대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미타불! 개방의 주장로가 예빈당(禮賓堂)으로 안내했다는 전갈
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자를 만나 보겠어요."
"......."
"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는 그때 결정하겠어요."

* * *

아다약!
예빈당으로 막 들어선 그녀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화려하면서도 검박하게 꾸며진 널찍한 실내의 중앙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
술잔을 받쳐든 채, 먼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저 사내의 옆
얼굴이 저리 눈부신가?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면서도, 어찌보면, 인간의 감정이란 아예
결여된 사람의 모습이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상반된 모습을.......'
서서히 걸음을 옮겨 백표랑의 앞으로 다가서는 아다약.
발길을 옮기고 있는 그녀의 가슴은 억세고 부연할 수 없는 강렬
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녀가 백표랑의 일 장 앞까지 다가왔을 때, 백표랑은 술잔을 받
쳐든 자세 그대로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항마법사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아다약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백표랑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푸후훗! 그러나 나는 항마법사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소. 나같은 인간에게 그대같이 고귀한 여자를 소실로 보낸다는 것은
치욕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아마 내가 그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겠지."
아다약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심중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역시 항마법사의 말이 사실이었군.'
아다약은 백표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먼저 해야 할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백표랑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의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비웃음인지 실소인지 모를 미소.
"푸후훗! 나라는 인간은 본능에 민감하도록 키워졌지."
"......."
"특히 위기본능을 감지하는 수단은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자부하
오. 그런 내가 회주가 들어서기 전부터 살기를 느꼈다면 경우에 따
라서는 나를 죽일 생각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말을 마친 백표랑은 아다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오!
세상에 저런 사내가 있단 말인가?
얼굴의 선이 너무 섬세하고 뚜렷해 차라리 이질감을 안겨줄 정도
로 멋들어진 모습이다.
아다약은 사내의 얼굴에서 귀품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백표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잔을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채,
"회주는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백표랑의 얼굴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아다약은 백표랑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를 보면서 마음이 무
거워졌다.
아다약은 간단하게 말했다.
"천지회의 힘이라면 아무리 공자가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에요."
"그런가?"
백표랑은 희미하게 웃었다.
상대에게 긴장감을 안겨 주는 웃음이다.
"푸후훗!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말을 하더군."
"......."
"그러나 내가 어떻게 길러졌고,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겠지."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푸후훗! 나를 지옥수사 염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럼?"
"염우는 내 적수가 될 수 없지. 만세야 자천룡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광오한 인간이 있는가?
지옥수사 염우를 안중에도 두지 않다니.......
아다약은 실소를 머금었다.
비록 여인이지만 그녀는 무림인이다.
상대방의 말에 호승심이 절로 일었다.
"그 말씀이 사실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한 수 시험
하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군요?"
"푸후훗! 얼마든지?"
아다약의 눈빛이 생글거렸다.
그녀는 믿는 바가 있었다.

― 신풍십절(神風十絶)! 그들이라면 이 자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해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신풍십절!
천지회주 설산성녀 아다약이 직접 길러낸 열 명의 그림자들이다.
열 가지의 병기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열 명의 인물들.
사실, 아다약이 염우에게 패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자만한
나머지 신풍십절을 대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풍십절이 곁에 있었다면 최소한 그런 중상을 입지는 않았을 것
이다.
아다약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손에서 울리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
가 예빈당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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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을러지기 전에 올립니다.
하지만...
과연 이번에도 4일 간격이 지켜질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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