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경천행 제22장 진정한 영웅은 강한 적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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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08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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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장 진정한 영웅은 강한 적을 키워야 한다

찻잔에서는 용정향의 담백한 향기가 우러나오고 있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자천룡과 아다약은 말없이 차의 향기를 음
미하듯 바라보며 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만 지켰다.
아다약의 생각은 빠르게 이어졌다.
우선 자천룡이 불쑥 자신을 찾아온 의도를 모른다.
천마혈성의 서주로 소림을 찾아온 자천룡!
그가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운명은 달
라지게 된다.
얼마 동안의 침묵이 흘렀을까?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아다약이 시선을 들어 자천룡의 감정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영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성주께서 찾아오신 목적을 알고 싶습니다만......?"
아다약의 음성은 긴장하고 있었다.
자천룡은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흘렸다.
"천지회를 위해서라면 믿겠소?"
아다약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의 말씀을 믿고 싶어지는군요."
자천룡은 천천히 한 모금의 차를 음미했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오."
"......."
"어떤 방향이든 흘러가는 것이지 멈춰있는 것은 아니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의 힘으로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만은 막을 수 없소."
"무슨 말씀이시온지?"
"역사에 순응이오."
"그럼?"
"천지회는 아직 천마혈성을 상대할 수 없소."
지극히 단정적인 말.
평소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아다약이었지만 지금 자천룡의 말에
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성주께서는?"
"소림과 팔대문파는 하루 아침에 괴멸될 것이오."
서슴없이 흘려낸 자천룡의 말.
천하에 누가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가?
만세야 자천룡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아다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천룡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이 소림을 쓸어버릴 수 있
소."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평범한 인간들이 하는 방법이오."
"......."
"진정한 영웅이라면 강한 상대를 키울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평
상시 나의 지론이오."
"......."
"만약 나의 시대에 정도무림의 태양이었던 신검대인 고신만해라
는 영웅이 없었다면 나는 전대성주처럼 그저 흘러간 역사 속의 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오. 그러나 강한 적이 있었기에 후세의 사람
들도 이 자천룡을 기억할 것이오."
"결국 천지회가 강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성주 자신을 위해서군
요."
자천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약의 얼굴이 변했다.

― 아아! 그는 진정한 거인이다.

진정한 거인!
아다약은 지금까지 진정한 거인의 인간상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
다.
그러나 지금은 알 것 같다.
자천룡이야말로 진정한 거인이다.
'하늘은 이 아다약에게 너무 무서운 상대를 내려 보냈구나.'
자천룡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마혈성은 머지않아 무서운 피의 회오리가 불게 되오."
"......."
"천지회는 자칫 그 순간이 기회라고 생각해 천마혈성에 도전한
다면 천지회의 운명은 끝장이오."
"으음!"
"마도인들의 속성이라면 한 사람의 명령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
는 맹종에 있다는 사실을 회주는 명심하셔야 하오."
말은 간단하다.
자신의 명령 한 마디면 십만에 달하는 마도무림의 거효들이 일
시에 천지회를 괴멸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자천룡은 굳어진 아다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소?"
아다약은 한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의 한 마디에 천지회의 운명이 좌우된다.
천마혈성과 무모한 싸움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자천룡의 치욕적인 제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생각은 길지 않았다.
수백 년을 참아온 그들이 아닌가?
"성주께서는 얼마동안 천지회를 암흑 속에 가두어 놓을 셈인가
요?"
자천룡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서렸다.
"일 년이면 충분하오."
"일 년?"
"그때쯤이면 아마 구마왕과 삼천제의 싸움은 끝날 것이오."
"성주께서는 오늘 하신 약속을 지킬 수 있나요?"
자천룡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 자천룡의 목숨을 걸면 되겠소?"
아다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현명한 판단이오."
자천룡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그는 아다약의 얼굴을 정시하며 말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천지회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소."
"......."
"회주와 구대장로의 능력이라면 아마 일 년 후의 천지회는 지금
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질 테니까."
"아마 그럴거예요."
"그러나 본인과 천마혈성을 무너뜨린다고 속단하지 마시오. 사
실 나라는 인간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강해져 버렸소."
우스갯 소리는 아니다.
아다약은 이미 피부로 자천룡이 얼마나 강한 인간인가를 느끼고
있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그를 뛰어넘을 수 없을지 모른다.'
아다약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어두운 아다약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천룡은 느릿하게 대전의 문
을 빠져 나왔다.
"회주의 환대는 마음 속에 담아주겠소."
아다약은 침울한 음색으로 말했다.
"배웅은 구대장로들이 대신할 것입니다."
"허허헛! 배웅까지......."
너털웃음과 함께 자천룡은 어둠 속으로 휘감기고 있었다.

아다약!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천마혈성과 자천룡! 그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지 모른다.'

* * *

세월은 간다.
한량없는 인간의 넋두리 속에서도, 님을 잃은 여인의 한숨 속에
서도 무정한 세월은 흐르는 법이다.
혹독한 추위를 휘몰고 왔던 겨울이 지나더니, 중원무림에는 언
제나 변함없는 봄의 훈풍이 십팔만리 산야를 파릇파릇하게 생기를
머금게 만들었다.
백표랑!
그는 나이 다섯 살 때 처음으로 검을 잡았다.
그 날부터,
백표랑은 검마 호동파의 철저한 지도하에 하루의 반을 검과 씨
름했다.
뼈를 깎아내는 무수한 고련 속에 지금은 스물 네 살의 나이이니
검을 잡아온 세월만도 어언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
지금 그의 검학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그 자신은 모르거니와
타고난 오만은 그에게 노력이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게 만들었다.
당연한 결론으로 그는 자천룡에게 패해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도
망쳐 나왔다.
굴욕감도 없었다.
일단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가 자천룡 앞에 무릎을 꿇은 것
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개가 되어도 좋았다.
일단은 목숨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는 자천룡의 발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난 겨울 백표랑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중원이 자신을 잊을 때까지, 그는 세상을 등지고 그 동안 소홀했
던 검에만 몰두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기련산의 험지.

다시 그는 마음을 고쳐 먹고 검학에 정진하였다.

그의 검학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모든 검법을 자유자재로 변용해 운용할 수 있으며,
가장 염두에 둔 검학은 바로 자천룡의 파천혈세였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펼칠 수 없다는 이론상의 검학.
천하에 자천룡이 아니라면 설혹 검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완
성할 수 없다는 파천혈세에 무섭게 집착했다.

콰우우우!
이름도 없는 폭포수가 작렬하는 곳.
백표랑은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앞에 검을
세웠다.
츠와와왓!
갑자기 원앙쌍검에서 무서운 검세가 발출되었다.
투명한 검막!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투명한 광막이
검에서 한 자나 뻗어나는 것이 아닌가?
오오! 놀라운 일!
이는 바로 검강탄기의 수준에 올라있는 경지가 아닌가?
검도 최후단계라는 검강탄기!
단지 검강만으로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검의 경지
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던 한 순간이다.
"뇌화혼!"
백표랑의 입술 사이로 지극히 과묵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가슴 앞에 세워진 원앙쌍검이 시퍼런 검강을 토해
냈다. 극쾌한 빛을 휘몰고 폭포수를 쏘아가는 검강!
설마, 떨어지는 폭포수를 갈라내겠다는 생각은 아닐 텐데?

* * *

은소소와 사월령.
그녀들의 얼굴에는 웃음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들의 성격 또한 무섭게 변했다.
어차피 여자라는 단순한 동물은 남자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평소, 말수가 적고 냉막했던 사월령과 은소소.
그녀들은 이제 한시도 재잘거리거나 웃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들에게는 이런 세월이 꿈처럼 여겨졌다.
두 여인은 무심코 백표랑이 있는 폭포수로 다가오다 실로 기막
힌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섭게 작렬하던 폭포수!
오오! 저럴 수가 있는 것인가?
백표랑의 검을 떠나 검강이 이 순간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를 쏘
아가자 믿을 수 없게도 폭포수는 잠시동안 반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비록 그것이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
이었지만, 두 여인은 분명 폭포수가 갈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사
월령은 경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힘이 어찌 대자연을 능가할 수 있
다는 말인가?"
검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을 지닌 사월령이다.
그러나 자신의 눈조차도 아찔하게 만드는 이런 검학은 처음이
다.
"그 투명한 검강은 분명히 검강탄기였다."
뭐랄까? 사월령은 이 순간 검도의 새로운 경지를 보고 있는 듯
자신마저 황홀경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아마도 과다한 내력을 소모해서일 게다.
원앙쌍검을 늘어뜨린 백표랑의 안색은 다소 창백하게 변했다.
더욱이, 지난 몇 달 동안 백표랑은 햇빛도 없는 동굴 속에서 검법
에만 몰두했다.
그래서 더욱 창백하게 느껴지는 얼굴.
백표랑의 앞으로 은소소와 사월령이 다가왔다.
사월령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진정한 검도가 어떤 것인가를 알았어요."
은소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마 신은 당신을 태어나게 만들고 많은 시간을 후회했을 거예
요. 당신처럼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백표랑은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푸후훗! 너무 높이 올라가는군."
"아니예요."
"......."
"만약 중원에 이름깨나 알려진 검의 대가들이 지금 당신이 펼친
검 앞에 서 있었다면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예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는 것은 항상 두려운 거예요."
"그대들의 보살핌이 컸소."
백표랑은 두 여인을 한꺼번에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저항없이 안겨드는 사월령과 은소소.
그녀들의 얼굴은 마냥 행복하다. 은소소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
가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백표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아마 중원무림이 나를 잊었을 것이오. 어차피 인간이란
망각에 길들여진 동물들이기에......."
"중원으로 돌아가실 생각인가요?"
백표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 편안한 안주를 원하지 않소."
"......."
"천마혈성을 무너뜨리고 자천룡을 죽이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행복은 없소. 나는 그 자를 제거하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얻을
것이오."
두 여인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이제 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피와 죽음이 아우성치는 중원.
그들은 잠시동안 현실의 세계를 벗어난 아름다운 꿈 속에서 살
아왔다.
은소소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 과연 그가 자천룡을 이길 수 있을까?

만세야 자천룡!
그가 천하제일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인간은 이 세
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가 헛소리를 하더라도, 만세야 자천룡은 천하제일인이다.
과거, 백표랑은 만세야 자천룡에게 패해 죽음 직전에 빠져 들지
않았던가?
은소소는 그런 어두운 생각들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그녀는 백표랑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어요."
"무엇이오?"
"언제까지 백씨 성을 쓰실 건가요? 이제는 가문의 성씨를 써야되
지 않나요?"
"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고신표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오. 이제 그 누구에게도 나를 숨길 이유는 없어졌소."
백표랑, 아니 이제부터는 고신표랑으로 불러야 할 그.
"앞으로의 계획은 잡혀 있나요?"
백표랑은 잠시 두 여인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역력했다.
"소림으로 갈 것이오."
"소림으로?"
"그 곳에 있는 천지회의 회주를 만나 앞으로의 일을 한 가지 숙
의할 것이오."
말을 하는 백표랑의 눈빛은 여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여인의 입이 삐쭉거렸다.
"이제 보니 당신?"
"천지회의 회주인 아다약을 만나기 위해서......."
두 여인이 한 입이 되어 외쳤다.
백표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내가 언제부터 여자의 치마 폭에서 꼼짝을 못하는 인
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모르겠군.'
백표랑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라보는 두 여인은 까르르 웃었다.
"설마,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을 떼어놓고 혼자 아다약을 찾아갈
생각은 아니시죠?"
"그럴 리야?"
은소소는 밝게 웃었다.
"좋아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웃으면서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월령인들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럼 나는 소림에서 아다약의 침실만 잘 감시해야겠군. 워낙 바
람기가 다분하니 마음을 놓을 수 있어야지."
"오호호홋!"
"푸후훗!"
봄날의 훈풍에 실려 남녀의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울려퍼지고 있
는 이곳은 기련산이다.

* * *

대소림사!
불문의 성지(聖地)인 이곳은 지금 뜻하지 않은 사건을 맞고 있었
다.
한 여인이 소림사를 찾아온 것이다.

― 천지회의 회주인 아다약을 불러라. 만약 나의 청을 거절한다
면 목숨을 걸고 소림과 천지회를 피로 씻어 버릴 것이다.

난데없이 나타나 살벌한 말을 내뱉은 여인.
바로 일검향 나란소가 아닌가?
그녀가 왜 소림사를 찾아와 난동인가?
항마법사는 고심 끝에 아다약에게 이 사실을 밝혔다.
아다약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분
명 천지회에 무슨 일이 있기에 해남검문의 나란소가 자신을 찾아
온 것이리라.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다약이 이국의 아름다움과 풍만함을 물씬
풍기는 모습이라면, 나란소는 냉엄하면서도 차가운 아름다움을 보
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한 아다약과 나란소.
나란소의 눈빛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아다약은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란소에
게 물었다.
"대체 소저는 무슨 일이 있기에 소란을 피우는 건가요?"
매우 불쾌하다는 아다약의 음성이다.
"흥!"
나란소는 싸늘한 코웃음을 흘렸다.
"정파라고 자처하는 천지회와 소림의 제자들은 여자의 몸이나
엿보고 음욕을 품는 인간들이더군."
"무슨 말인가요?"
"당신은 천지회의 회주이니 역무명(易無名)이라는 자를 모르지
는 않겠지?"
"역무명?"
아다약은 기억을 되새겼다. 역무명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았다. 자
질이 매우 뛰어난 천지회의 제자다.
단 한 가지 결점이 있다면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항상 가까이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 일이 그렇게 된 모양이다.
역무명이 술기운에 나란소에게 음욕을 품었던 모양이다.
아다약은 조용하게 물었다.
"그가 무슨 짓이라도?"
"그 자는 뻔뻔스럽게 나를 겁탈하려 했다."
"겁간을?"
아다약은 물론이요 이곳에 모인 구대장로들까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었던 그가 끝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어디 있나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어요."
나란소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내 손에 죽었다."
나란소의 한 마디에 주위의 공기는 싸늘하게 응결되어 버렸다.
아무리 역무명의 잘못이라고는 하지만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다약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당신과 할 말이 없군요. 그의 잘못은 죽음으
로 대신했으니 말이에요."
아다약은 등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바람처럼 몸을 날린 나란소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 가지 약속을 해야한다."
"무슨 약속을 말인가요?"
"앞으로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경우 수하를 잘못 가르친
대가로 당신이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아다약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거절을 한다면요?"
나란소는 싸늘하게 웃었다.
"할 수 없지. 천지회의 회주인 당신의 무학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내가 직접 시험할 수밖에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아다약이다.
"당신이 어쩔 수 없이 내가 검을 뽑도록 만드는군요."

* * *

두 사람이 격전장으로 몸을 날렸을 때,
스으으!
소리없이 수림을 스며드는 인물들이 있었다.
세 사람, 그들은 바로 고신표랑과 두 명의 여인들이 아닌가?
멀리 거대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는 고신표랑의 눈살이 찌푸려
졌다.
'저 두 사람은 아다약과 나란소가 아닌가?'
한눈에 알 수 있는 여인들.
'그런데 왜 저 여인들이 싸우는 것일까?'
은소소와 사월령도 두 여인의 싸움을 알 수 없다는 듯 고신표랑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신표랑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대들은 종종 나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 나도 평범한 인간이야... 모르는 것도 있을 수 있지."
고신표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곳이면 좋겠군."
고신표랑이 가리킨 곳은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다.
"구경만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은소소의 물음에 고신표랑은,
"여자들의 싸움에 남자가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오. 사연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오."
세 사람은 은밀하게 몸을 숨겼다.
촤라라랏!
번쩍! 두 사람의 대결은 현란하게 이어졌다.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그녀들은 이미 평범한 여자들이 아
니었다. 천하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녀버린 여자들이
다.
일검향 나란소, 그녀의 검은 빠름과 정확함에 있었다.
오로지 복수의 일념만으로 검을 잡아온 그녀이기에 그녀의 검법
에는 상대의 치명적인 사혈만을 노리는 잔인성이 있었다.
반면에 아다약, 여의성체를 타고난 여인.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무학은 장엄하고 우아하다.
손놀림은 가볍고 섬세했으며 때로는 거중(巨重)의 힘이 실려있
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란소는 점점 자신의 손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다약의 몸에서 쉴 새 없이 뿜어지는 거중의 힘.
나란소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장엄하게 그녀를 휘감아왔
다. 나란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러설 수 없다.'
상대가 아다약이기에 더욱 물러설 수 없는 나란소다.
그런 생각은 아다약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여자라는 공통점이 두 여인의 마음을 적대감으로 충족시
켜 놓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윽!"
나란소의 입술 사이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주르르 일 장 가량을 물러선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현의무복의 군데군데가 아다약의 검에 의해 잘려져 너풀거리고
있다. 그녀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나란소는 발악적으로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지금까지 그녀가 펼쳤던 검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세였다.
파천일식!
이 검법은 바로 고신표랑이 그녀에게 전수해주지 않았던가?
이 검법을 전수받기 위해,
나란소는 얼마나 값비싼 희생과 고련을 치르었던가?
검마 호동파의 성명절학, 실추된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나란소
는 지금 파천일식을 펼쳐낼 기세다.
'심상치 않다.'
아다약은 나란소의 자세를 보며 아미를 찡그렸다.
지금까지의 검법이 패도적이고 잔인한 검법이었지만 지금 준비
하고 있는 검세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최후의 일초!
주위에 늘어선 구대장로들의 안색도 변했다.
아다약도 자만할 수 없었다.
그는 항마법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 * *

'잘못하면 두 사람 모두 죽게 된다.'
아다약과 나란소가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자 멀리서 두 사
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고신표랑은 긴장감에 전신이 억눌렸
다.
굳이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두 사람 모두가 온전할 것 같지 않
았다.
그때, 고신표랑의 시선 속으로 나란소의 검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미미하게 떨리는 아다약의 신형, 그런 가늘게 떨리는 아다약의
신형은 더욱 침착하게 가라앉아 갔다.
만약, 나란소가 섣불리 검을 펼친다면 아다약은 지체없이 반격
을 가할 자세다.
기(氣), 서로가 대치를 한 채,
두 자루의 검에서 발해진 검기와 살기가 더욱 가공하게 피어 올
랐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막는다는 말인가?
아다약과 나란소는 천하가 인정하는 고수들이다.
두 사람의 대결을 막아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짓이다.
고신표랑으로서는 불행한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
고신표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그런 고신표랑을 발견한 은소소와 사월령의 얼굴에 당혹
감이 물들었다. 은소소가 만류했다.
"무슨 짓이에요. 설마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 생각은 아니겠죠?"
고신표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말려야 하오."
"......."
"불행한 희생은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오. 이 싸움은 서
로의 불행을 막는 상태에서 끝나야 하오."
"미쳤군요?"
은소소가 고신표랑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고신표랑은 은소소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너무 온전해서 탈이오."
그때 나란소의 가슴 앞에 세워진 그녀의 검이 환상처럼 허공을
갈라내는 것이 고신표랑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우우우우웅!
아다약의 검이 용음을 토하더니, 그녀의 검에서 장엄한 불타의
기운 같은 검세가 천지를 뒤덮어 버렸다.

번쩍! 살아 움직이는 혜성처럼,
극쾌한 빛을 휘몰고 아다약의 몸을 휩쓸어가는 검막은 벼락과
같은 기세다.
기이하게도 나란소의 그 검막이 대기를 가르자 마치 얄팍한 면
도날이 아다약의 전신을 난도질할 기세로 쏘아가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의 검세가 막 허공에서 뒤엉킬 순간,
"물러서시오."
두 사람이 격돌해가는 허공으로 섬전인 양 한 명의 인영이 쏘아
옴과 동시에,
파파팟! 그는 쌍장을 각기 두 여인을 향해 내뻗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저런?"
"위험하다."
이것은 자살행위다.
아다약이나 나란소가 검을 거두어 들이기에는 너무도 그들의 출
수가 빨랐으며,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반비례하여, 두 사람을 막아선 인물도 번개처럼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든 것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구대장로는 한결같이 경악성을 토해냈
다.
어디 죽을 곳이 없어서 두 사람의 대결장으로 뛰어든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고오오!
해일처럼 고신표랑의 쌍수에서 일어나는 서기!
하늘과 땅을 뒤덮는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서기가 발산되었고,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두 사람과 삼십여 장이나 떨어
진 구대장로들까지 그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했을 정
도다.
"윽!"
"으음!"
나란소와 아다약은 미약한 신음성을 흘리며 원래의 자리로 밀려
났다.
그녀들은 물러서면서도 자신들의 대결을 막아선 사람의 얼굴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먼지가 가라앉자,
한 사람의 얼굴이 모든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부르르! 아다약은 물론이요,
구대장로와 나란소의 몸에서도 창백한 전율이 일어났다.
"당신은 고신표랑!"

* * *

고신표랑!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여자들의 싸움에 잘못 말려들면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더니......."
두 여인, 그녀들은 각기 복잡한 시선으로 고신표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인가?
두 여인은 모두 고신표랑에게 자신의 몸을 허락한 과거를 지니
고 있는 여인들이다.
그리고 똑같이, 고신표랑의 죽음이 중원무림에 알려졌을 때,
아다약은 독한 술을 마셨으며, 나란소는 미친 여자처럼 검을 들
고 천마혈성의 인물들을 베어 넘겼다.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한 사내를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
했다는 결과만은 똑같이 지닌 여인들이다.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비교적 쾌활한 아다약이다.
"당신... 살아 있었군요?"
고신표랑이 툴툴거리고 있을 때, 은소소와 사월령이 모습을 드
러냈다.
그녀들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신표랑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다약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이제보니 공자님께서는 그동안 아름다운 미녀와 세상을 잊고
있었군요."
묘한 질시가 그녀의 가슴에 생성되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고신표랑의 옆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
게 무서운 분노를 일으키게 할 줄은 몰랐다.
"푸후후훗! 아마 그랬을 것이오."
백표랑은 나란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란소는 고신표랑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선을 외면
해 버렸다. 아마, 가슴 속에 서린 참담한 무엇인가를 감추려는 행
위인 듯.
"오랜만이오."
나란소는 시선을 외면한 채 냉랭하게 말했다.
"왜 우리들의 일에 끼어 들었나요?"
나란소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달리 그런 말을 해버린 자신이 미워졌다.
그러나 고신표랑은 탓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가 안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소. 무모하기는 했
지만 그래도 목적을 이룰 수는 있었소."
나란소는 아다약을 가리켰다.
"저 여자 때문이었나요?"
매우 직선적인 질문이다. 여자란 이렇게 단조롭다는 것을 고신
표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요."
"우리 모두?"
"우리는 어차피 한 가지 목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오. 누
구 한 사람 다친다면 서로가 상처를 입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최
소한 천마혈성을 이 땅에서 무너뜨릴 때까지는 말이오."
"그것이 이유의 전부인가요?"
고신표랑은 웃었다.
"또 있소."
"......."
"그대들같이 아름다운 미인들이 다친다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
라 천하의 남자들에게 비극이오. 나는 아무래도 그 비극을 보고 있
을 수 없었던 것 같소."
실없이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고신표랑,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항마법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아무리 보아도 좋은 사람이야. 회주가 저 사람을 얻
을 수 있었다는 것도 불존의 보살핌이 닿았기 때문이야.'
문득, 항마법사는 웃고 싶어졌다.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천하의 운명.
그런 고신표랑이라는 인물이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항마
법사는 천하의 운명은 앞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
다.
고신표랑은 아다약에게 말했다.
"술을 한 잔 대접받고 싶소만......."
말을 하면서 고신표랑은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이 어디인가?
불문의 성지라는 대소림이다.
대소림에서 술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항마법사는 모른 채 신형을 돌려버렸다.
"아미타불! 불문에서는 술을 멀리 하오."
"......."
"정히 원하신다면 곡차(穀茶)를 준비해 보겠소."
고신표랑은 흐릿하게 웃었다.
"푸푸훗! 법사님의 환대를 기억해 두겠습니다."
고신표랑은 안다.
항마법사가 곡차라고 지적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들어가죠?"
아다약은 먼저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은소소와 사월령이 따랐다.
남은 사람은 나란소.
그녀는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고신표랑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입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고신표랑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소저! 오늘 밤, 긴히 상의할 문제가 있소. 술자리가 끝난 다음...
...."
그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전음으로 말을 주고 받은 모양
이다.
무슨 말을 했는가?
나란소의 얼굴이 붉어지며 고신표랑의 뒤를 따라 아다약의 처소
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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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앞으로도 주말에만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한 편 올라온다는 말이지요.
에고~ 4일 간격이 깨지다니...
그래도 3권 완결은 꼭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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