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온라인 애정편력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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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02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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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통신 초보 9 <후편 제9회>
제 7 장. 통신 초보.

설거지가 거의 끝났다. 나는 빨리 컴퓨터를 구경하고 싶었다.
"장선생님, 컴퓨터 어딨어요?"
"아이.. 성격도 급하시긴.. 식사 하셨으니까 차 한잔 해요."
딱히 급한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녀의 제안이 적절하다고 생각되
었다. 게다가 나는 원래부터 차를 좋아하니까...
"어떤 걸로 하실래요? 커피?"
"커피 말고 다른 것도 있어요?"
"예. 작설차도 있고 일본차도 있구요. 중국차도 있어요. 립톤 홍
차도 있구요."
"야아! 차 모으는 게 취미신가보다."
"조금요. 외국 나갈 때마다 한두 개씩 사모았어요."
그러고 보니 장선생이 외국 나갔을 때의 경험담을 교무실에서 들
었던 기억이 났다. 대학시절부터 이곳저곳 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그녀는 특히 호주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여러 개의 차단지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한자로 龍井(용정)이라고 쓰여 있는 녹색 깡통이었다.
"우와... 이거 용정차네요? 항주에서 나는 거지요?"
"예. 재작년에 항주 가서 산 거에요. 맛이 괜찮아서 가끔 마셔
요."
"난 이거 마실래요."
"그래요. 그럼 저도 간만에 롱징을 마셔야지..."

용정은 중국어로 롱징이라고 한다. 용정이라고 해도 되는데 장선
생은 굳이 롱징이라고 말했다. 겉으로 튀기 좋아하는 그녀의 성품
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용정차는 색향미형사절가(色香味形四絶佳)라고 해서, 색깔, 향,
맛, 형태가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
장선생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다기를 꺼냈다. 그럴싸하게 이
쁜 이인용 다기였다.
"평소엔 잘 안쓰는 거에요. 혼자 차 끓여 마시는 거 귀찮아서요.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왔으니까..."

장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살짝 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은근슬쩍 나를 추켜 세우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 어느 남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를 싫어하겠는가. 더구나
그 여자가 장선생같은 미모의 처녀라면....
차는 정말 맛있었다.

중국 절강성 항주 서호(西湖)변의 매가오촌(梅家塢村)에서 생산된
일급 용정차의 맛은 지금까지 맛본 여느 녹차와는 품격이 다른 것이
었다.
찻물을 목구멍으로 넘긴 한참 후에 올라오는 뒷맛은 사람으로 하
여금 기분좋은 푸근함을 주었다. 황제에게 올리는 진상품 중에서도
중요한 품목이었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선생님! 매일 이렇게 좋은 차를 마시면서 살면 신선이라도 되
겠어요. 하하하!!"
"아이... 참, 선생님도..."
"누군지 장선생님과 결혼할 남자는 행복하겠어요."
"왜요?"
"이렇게 음식도 잘하구, 차도 맛있게 잘 끓이구, 게다가 이쁘시잖
아요."
"절 놀리시는 거지요? 그럼 싫어요."
"하하!! 놀리긴요. 거짓말 조금도 안 보탠 진심이에요."
"그만 하세요. 아무래도 절 놀리는 게 분명해."
"아니라니깐요. 내 말이 그렇게 믿을 수 없나?"
"그게 아니구요. 괜히 지나치게 칭찬하시니깐 그렇잖아요."
"하하!! 그럼 그 얘긴 그만합시다. 자, 그럼 컴퓨터나 볼까요?"

밥 먹고 차 마시고 하는 사이에 시계는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면 귀가가 늦어질 것 같아서 장선생을 채근했
다.
"어느 방이죠?"
"저쪽이에요."
장선생은 작은 방으로 나를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
한 향수 냄새가 났다.
여자가 사는 곳 답게 예쁘게 꾸며놓은 방이었다. 한쪽 벽에 커다
란 유화가 걸려 있고, 또 창가 쪽 벽에는 갖가지 말린 꽃이 걸려 있
었다. 그 동안 받은 꽃다발을 말려서 장식해 놓은 모양이었다.

책상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공부할 때 쓰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번에 구입한 컴퓨터용 책상이었다.
장선생의 컴퓨터는 말끔한 새것으로서 겉보기에도 매우 훌륭해 보
였다. 모니터도 17인치였다. 스피커도 내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
급품이었다.
나는 컴을 켜면서 말했다.
"부팅하는 건 알죠?"
"몰라요."
이렇게 말하는 장선생은 컴맹인 것이 확실했다.
"부팅이 뭐냐면요. 지금 제가 하는 게 바로 부팅이에요. 하하!!"
"음... 그럼 컴퓨터를 켜는 게 부팅이에요?"
"똑똑하시군요. 맞았어요. 컴퓨터를 켜서 작동시키는 것을 부팅이
라고 해요. 한마디로 전원을 켜는 거지요."

나는 뒤에 서 있는 장선생에게 의자를 가지고 와서 옆에 앉게 했
다. 장선생은 내 오른 쪽으로 바짝 다가와서 앉았다. 옆에서 플로
랄 계열의 향수 냄새가 났다. 흘깃 옆을 보니 봉긋한 그녀의 가슴
이 내 팔 옆에 있었다. 고작 십오센티나 될까 싶은 거리에서 불룩
한 가슴이 있는 것이다.

"통신을 하고 싶으시다면 바로 이곳으로 가는 거에요. 이야기프로
그램이에요. 바로 이곳."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이야기 프로그램으로 가서 더블 클릭을 했
다. 이야기에 들어가서 나는 하이텔에 접속하면서 말했다.
"자, 이렇게 하면 자동으로 전화를 걸게 되는 거에요. 다시 말하
면 컴퓨터로 통신회사에다 전화를 거는 거지요."
"아.. 그렇구나. 그럼 대화도 할 수 있나요?"
"물론! 대신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하지요. 자판을 두드려
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에요."

이때 컴퓨터에서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등록만 하면 네티즌이 되는 거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쪽에 앉아서 화면에서 하라는대로 하시면 돼요."
장선생은 컴 앞에 바짝 다가 앉았다.

화면에는 하이텔 초기화면이 떠 있었다. 이용자번호를 치라는 메
시지가 나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요? 이용자번호란 게 뭐지?"
"자기 아이디를 치라는 거에요. 아이디는 뭔지 알죠?"
"들어는 봤어요."
"장선생님은 지금 아이디가 없으니까 일단 HITEL을 치세요."
그녀는 내 말대로 하이텔을 치고 엔터를 치자 화면이 바뀌었다.
초기 화면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가입신청난의 1번 번호를 치게
했다. 이후로는 화면에 나오는 명령에 따라 입력하는 것만 남아 있
었다.
요금결제 방식이니 어쩌니 하는 것에 대한 입력이 끝나고 이용자
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장선생이 물었다.
"이건 뭐에요? 아까 나온 거쟎아요."
"이건 자기 아이디를 입력하라는 말이에요. 앞으로 통신상에서 사
용할 다른 이름을 적으란 말이에요. 예를 들어 자기 이름은 홍길동
이지만, 통신에 들어가서는 1234나 ABCD를 자기 이름으로 하는 거지
요."

"그럼 아무 숫자나 영어를 써요?"
"하하.. 물론 숫자를 써도 되고, 영어를 써도 돼요. 맘에 드는 거
아무거나 영어와 숫자를 써서 만드세요."
"음... 그럼 내 맘대로 정해도 되는 거네요?"
"그렇지요. 맘에 드는 좋은 걸로 정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번
호만 써야되는 줄 알고 전화번호나 생년월일 따위를 쓰기도 해요.
그치만 의미 있는 단어를 쓰는 게 좋지요. 자기 이름 이니셜도 좋
고..."

한 동안 생각하던 장선생은 이윽고 결심한 듯 영어로 몇 글자를
쳤다.
SENAROSE
세나로즈.
그녀의 이름이 장미선이니 장미가 들어간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앞에 나온 세나는 무슨 뜻일까?
"세나로즈?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음... 로즈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구요. 앞에 세나는 어릴
때 제 이름이에요. 엄마가 저를 세나라고 불렀거든요."
"아.. 그랬군요. 예쁜 이름이네요."
결국 장선생은 순조롭게 가입신청을 마쳤다. 또 한 명의 통신인
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그 탄생의 산파역을 한 셈이고...
장선생은 자기도 이제 피씨통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심 흡족
한 모양이었다.
연신 웃음을 지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통신을 잘 할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녀의 가입처리는 앞으로 며칠 더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기본적인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내 아이디로 다시 들어가기
로 했다.

"자, 그럼 내 아이디로 들어가볼게요. 자리를 바꿔 앉읍시다."
그녀와 내가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살짝 이마를 부딪혔다.
"앗!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장선생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프게 부딪힌 것
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이마에 손이 갔다.
"아파요?"
"아니에요. 안 아파요."
장선생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어디 봐요."

내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살펴 보려고 했다. 의외로 그녀
는 순순히 내 손에 자기의 얼굴을 맡겼다.
나는 한 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가까이 대고 입김을 불었다.
"호~~! 이젠 괜찮지요?"
장선생은 내가 하는 행동이 어이가 없었는지 아니면 귀여웠는지
그냥 웃기만 했다.
"예. 많이 나아졌어요."
"하하!! 손으로 문질러주면 더 잘 낫는데... 원래 내 손이 약손이
거든요."
"호호! 손까지는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그건 다음에 이용하도록
할게요."
"그러지요. 그럼.. 후후!!"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서 재접속을 시도했다.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접속에 성공했다. 아이디를 친 후, 초기화
면에서 엔터를 눌렀다. 나는 내 아이디의 초기화면을 rmail로 해
놓았기 때문에 저절로 수신된 편지가 나타났다.
모두 다섯 개의 편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은 내가 가입한 여러
동호회의 공지사항 따위였지만, 선경이와 민지에게서 온 것도 있었
다.

나는 내용이 궁금했지만 옆에 장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보
지 않았다.
그래서 p를 누르고 나왔다.
"장선생님, 전자메일 보내는 거 가르쳐줄게요. 이거 배운 다음에
나한테 편지 보내야 해요? 알았죠?"
장선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녜. 알겠습니다. 싸부님."
"하하. 좋아요. 장선생님은 착한 학생이 될 소질이 있어요."
"호호!!"

나는 편지쓰기의 실제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대로 간단한 메일을
작성했다.
"자, 받을 사람의 아이디를 써야겠죠?"
받을 사람으로는 재운이가 만만한 상대일 것이다.
나는 재운이의 아이디 jjback를 눌렀다.
"그 다음엔 제목을 쓰고..."

나는 간단한 내용의 본문을 작성했다. 이건 그냥 심심해서 보내
는 메일일 뿐이며 혹시나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그건 헛수고일
뿐이니 포기하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메일을 쓰는 것을 뒤에서 보고 있던 장선생이 킥킥대며 웃었
다.
거의 분당 오백타에 육박하는 내 타자 속도에 감탄을 하기도 하면
서...
나는 메일을 다 쓰고 나서 다시 채팅하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대화방에 참여했다. 일반대화
방의 와글와글한 모습에 그녀는 새삼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렇게 복잡한데 어떻게 대화가 되나요?"
그녀는 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하하!! 하다보면 다 하게 되어 있어요.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장선생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누구
나 그렇듯 익숙해지기 전에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것도 어려운 것이
다.
나는 잠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빠져 나왔다. 그리고나서
플라자란이나 성인플라자, 그리고 일반동호회, 소그룹 등의 게시판
을 차례차례 보여주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정보가 담겨 있는 곳
을 휘 둘러 보았다.

장선생은 너무나 넓은 사이버 공간의 규모에 놀란 모양이었다.
"정말 넓은 세계네요."
"그렇지요? 저도 첨엔 그랬어요. 이렇게 넓고 좋은 곳이 있다니..
하고 말이에요."
"김선생님은 통신 오래 하셨으니 다 가보셨겠네요? 그렇죠?"
"전혀요. 아직 못가본 곳이 훨씬 더 많아요. 어느 세월에 다 뒤지
고 다니겠어요. 지금 있는 곳도 다 모르는데요. 하하하!!"
"그럼 인터넷은 이곳과는 다른가요?"
"인터넷은 여기와 차원이 달라요. 그야말로 광대무변한 정보의 바
다지요. 재밌는 것도 많고..."

"김선생님은 인터넷도 하세요?"
"예. 여기서도 들어갈 수 있어요.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음... 나중에요.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벅찬걸요."
"하하.. 그러세요. 나중에 홈페이지 구축하게 되면 도와드리지
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장선생은 통신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까닭에 무척이나 신기해했
다. 나는 그녀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리고 그녀
에게 게시판에 글 올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직접 쓰게 시켰다.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삼십분 정도 이곳저곳 직접 다니게 한 뒤에 다시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갈무리하는 법과 다운받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갈무리하는 것이야 쉬운 것이었지만, 다운받는 법은 자꾸 틀렸다.
매우 간단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메는 것이었다.
제 목 : 통신 초보 10 <후편 제10회>
제 7 장. 통신 초보.

몇 번을 거듭한 후에야 그녀는 다운로드에 관한 개념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림 파일 몇 개와 한글 파일 몇 개를 다운받은 후에
접속을 끊고 나왔다. 다운받은 것을 확인시켜 주니 그녀는 탄성을
발했다.
"와아! 이런 거구나!"
"재밌죠? 통신이 정보의 바다라는 것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에요. 수많은 자료를 이렇게 다운받아서 쓸 수 있으니까요."

"예. 정말 놀랐어요."
"앞으로 통신을 잘 활용하면 근사한 남자를 만날 기회도 많을 거
에요. 하하하!!"
"남자요?"
"음.. 채팅하면서 만날 수도 있고, 동호회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
서 사귈 수도 있구요."
"오프라인 모임은 뭐에요?"

나는 그녀의 의문점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번개모임에서 정
기 모임, 그리고 채팅방에서 이루어지는 즉석번개 모임, 또 새벽에
벌어지는 새탈(새벽탈출)까지 다양한 모임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
다.
"그런 모임 나가면 재밌나요?"
"재밌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요. 그렇지만 같은 목적을 가
지고 모인 사람들이니까 의기투합하기 쉬운 면이 있어요. 저야 뭐
대개는 동호회 모임에 나가니까 거개가 아는 사람들이죠. 게시판의
글로만 만나다가 직접 얼굴을 보면 친해지기가 쉽죠. 또 대화방에
서 채팅으로 친해진 경우도 많구요."

"그럼 저도 동호회 가입해야겠네요?"
"하하! 가입하고 싶은 동호회가 있으면 가입하세요. 정보도 얻고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겠지요."
"김선생님은 그럼 동호회를 몇 개나 가입하셨어요?"
"전 좀 많은 편이지요. 한... 서른 개 정도?"
"와아!! 그 정도 가입하면 모임 참석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일일이 다 참석할 순 없죠. 몇 개만 활동하는 거에요. 나머진
가끔 자료나 살펴보러 가는 거죠."

"그렇구나..."
"장선생님도 앞으로 동호회 가입해서 활동하세요. 장선생님같은
미인이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면 인기 폭발일 거에요. 하하!"
"에이.. 설마요."
"정말이에요. 내가 장담하지요."

여자는 칭찬에 약하다. 장선생같은 미인일수록 칭찬에 약한 면
이 있다. 게다가 이 여자는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진 상태이므
로, 자기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칭찬을 한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장선생이 그랬다.
내가 노골적으로 미인이라는 칭찬을 하자 그녀의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꽤나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
다.
"그러면요. 김선생님은 주로 어느 동호회에서 활동하세요?"
아니나다를까 장선생은 내가 활동하는 무대가 어딘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가르쳐 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직장 동료에게 내가 노는 곳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썩
내키지 않는 면이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가 넓다고는 해도 알고
보면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인 좁은 세계이다. 만일 내가 주로
활동하는 곳을 장선생에게 가르쳐 준다면 나만의 익명의 세계가 직
장에 퍼질 확률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
다.
"음.. 제가 활동하는 곳은 차차 알게 될 거에요. 앞으로 자주 마
주치게 될 테니까요."
"아이.. 그러지 마시고 가르쳐 주세요. 예?"
장선생은 다시 재우쳐 물었다.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장선생이 통신을 시작한 이유가
나에 대해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말아요. 차차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장선생은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내 말에 순순히 수
긍했다. 차차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여러
가지 검색 기능을 다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
절로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장선생이 정말로 나를 알고 싶
어 한다면 통신을 통해서 많을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동안 써 놓은 게시판의 글만 보아도 충분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통신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 해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
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면 체
해요."
"네. 고맙습니다."
장선생은 싹싹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컴을 끄고 방에서 나왔다. 카페트가 깔려 있는 거실에는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고 양쪽에 두 개의 소파가 놓여 있었다.
"더우시죠? 시원한 맥주 한 잔 하실래요?"
"맥주 있어요? 좋지요."
더운 날씨였다. 창문을 열어 놓아서 바람이 가끔 불어오긴 했지
만, 그 바람조차도 후덥지근한 열기를 머금은 것이었다.

장선생은 소반에 육포와 피스타치오을 담아 내오고, 보기만 해도
시원한 찬 맥주 두 병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것
인지 아니면 평소에 마련해 두고 가끔 즐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모름지기 여자란 술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매력적인 것이
다.

"평소에 집에서 술도 마시고 그래요?"
"가끔요. 아주 가아끔.."
"아주 가아끔이란 건 얼마나 자주인가요? 후후!"
"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마시면 얼마나 마시는데요?"
장선생은 오프너로 병마개를 땄다. 뿅!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
다.

"호호! 고작 한 병이지요. 뭐."
"장선생님은 술 잘 할 거 같은데..."
"그래요? 제가 술 잘 마시게 생겼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느낌이 잘 할 거 같아요."
"아니에요. 전 술 잘 못해요. 맥주 세 병 먹고 토한 적도 있는
걸요?"
"흠.. 안 그럴 거 같은데요?"
"정말이에요."
"그럼 한 번 마셔봅시다. 정말 세 병 먹고 토하는지... 하하!"
"아이... 그럼 안돼지요. 취할 정도로 마시면 추해 보이잖아요."
"하하!! 농담이에요. 자, 건배합시다."

우린 다정한 한 쌍의 연인처럼, 아니 마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
아온 부부처럼 건배를 했다.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평소에 늘 마시던 똑같은 맥주지만 뭔가
다른 맛이 있는 것 같았다.
날씨가 더운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
었다. 아마도 미인과 함께 야릇한 분위기에서 마시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카아! 좋다!!"

내가 탄성을 발하며 입술에서 잔을 떼었다. 내 잔은 말끔히 비
워져 있었다. 장선생은 나보다 조금 시간이 더 걸렸다.
"하아! 시원하다."
장선생도 나처럼 잔을 다 비웠다.
"잘 하시네요. 정말."
"호호! 그냥 한 번 마셔봤어요. 원래는 이렇게 한꺼번에 마시지
않아요. 이런 거 첨이에요."

처음이라...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것일까? 나는 약간의 의
문이 들었다.
대개 처음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이든 의미가 있는 말이다. 처음
만난다, 처음 해봤어, 이런 기분 처음이야, 첫 남자, 첫 경험, 첫
날 밤, 첫사랑.... 어떤 것이든 크게 혹은 작게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장선생은 맥주 한 잔을 한꺼번에 다 마
셔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그 처음이라는 말이 뭔가 울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장선생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말했다.
"정말 처음이에요? 이렇게 한꺼번에 다 비운 거?"
"네."
그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제 목 : 통신 초보 11 <후편 제11회>

제 7 장. 통신 초보.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진실을 발견했다. 평소에 보던 그녀와
는 전해 색다른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었다.
이율배반(二律背反)!
어쩌면 그녀는 지금 내게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지도 모른
다.

열네 명이 함께 생활하는 좁은 제2교무실에서 하루 종일 같이 생활
하는 나로선 그녀의 평소 모습이 어떠한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평소 학교에서 보던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알게 모르게 과시하는
편이었다. 약간 새침하고 잘난 척하는, 그러면서 평균적으로 이기적
인 교사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공식적
인 업무에 관해서라든지, 아니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때
를 제외하곤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가끔 내게 말을
걸긴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지극히 사무적인 응대를 했을 뿐이다.

그녀가 입는 옷은 대개 중간을 훌쩍 넘어선 고급품이었으며 말투나
행동거지 역시 우아했다. 화장도 짙게는 하지 않았고, 향수도 뿌린
듯 뿌리지 않은 듯 모를 정도였다. 좋게 보면 여교사로서의 품위를
지녔다는 칭찬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를 가지고 대한
다면 공주병 환자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그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왠지 내게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녀는 내가 도도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가.
그녀가 혜화역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짙은 화장에 까만 선그라스
를 끼고, 헐렁한 티셔츠에 짧은 핫팬츠를 입었었다.
그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래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으려
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안되는 것은 안되는 법이다.

바로 눈앞에 마주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거의 도발적이라고 해
도 좋았다. 약간 파인 그녀의 헐렁한 티셔츠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
금했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강아지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망
울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김선생님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이런 물음은 가끔 듣는 것이다. 그래서 대답도 늘 같다.
"음... 사람같지 않은 여자요."
"네? 사람같지 않으면.... 천사?"
"거의 정답."
"그럼... 뭐에요?"
"에일리언은 아니고.... 선녀같은 여자. 후후..."
"그런 여자 만난 적 있으세요?"
"아직... 찾으려고 애를 쓰긴 하는데 아직 안 태어났나 봐요. 지금
까지 못 만난 걸 보면... 하하!!"
나는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사실 선녀같은 여자는 만난 적이 있
다.

바로 정지연!
그녀였다.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렸던 지연. 농담처럼 하
는 말 중에 내 가슴 속에는 새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용솟음쳤다.
이젠 잊어도 좋을... 아니 잊어야할 그녀가 왜 이런 순간에 뇌리에
떠 오르는 것일까?
나는 이런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매력적인 장선
생을 두고도 문득문득 이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럼 김선생님은 결혼하기 힘드시겠다. 선녀가 세상에 내려오길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런 셈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같은 여자랑은 결혼하기 싫어
요."

장선생의 눈가에 실망의 빛을 본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다소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고 그녀가 물었다.
"그런 건 운명인가요?"
"어쩌면.."
나의 대답은 약간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우수에 젖
은 듯한, 그런 분위기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럴 때에는...

장선생은 잠시 말을 잊은 듯 했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벌써 여섯 시였다.
내가 말했다.
"여섯 시네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별 의미가 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
다. 여섯 시라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러네요. 벌써 여섯 시..."
장선생이 내 말에 동조했다. 이렇게 말한 그녀 역시 별 의미가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드셔야죠."
"저녁이야... 집에 가서 먹어도 돼죠."
"아니에요. 제가 저녁 대접하기로 했잖아요."
여자들은 이렇게 쓸데없는 것을 잘 기억한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하하! 다음에요.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나는 일부러 한 번 튕겼다. 집에 가봐야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번역 원고를 정리할 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오늘 꼭
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음... 저는 가끔 혼자 밥먹기 싫은 날이 있어요. 그런 날은 굶어
요. 절 굶기실 거에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오늘 장선생은 내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그녀는 하필 내게 통신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또 왜 그녀는 필요 이상의 호의를 보이며 나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
는 것일까?

그녀는 왜 나를 유혹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장선생은 날 유혹하고 있었다. 보통 때 보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이질적인, 이율배반이라고 해도 좋을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잘해 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직장 동료로서의 호의 정도를 보인 적이 있었을까? 그 외에는
어떠한 종류의 프로포즈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왜 장미선이라는 이름의 여선생은 오늘 날 붙잡고 싶어하는가?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당신 왜 날 꼬시는 거야?' 하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일단 그녀의 의도를 따라주는 것이다.

"장선생님, 그렇다면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어때요?"
"좋아요. 그럼 우리 나가요."
장선생은 입가에 만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 목 : 통신 초보 12 <후편 제12회>
제 7 장. 통신 초보.

나는 라면을 먹어도 좋다는 생각이었지만, 대접하는 입장을 생각해
서 안심스테이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것조차도 일인분
에 사만원짜리 정식을 먹자는 그녀의 주장을 꺾어서 그렇게 된 것이
었다. 그녀는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떻게든 잘 먹
이려고 애를 썼다.

나로선 그것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굳이 비싼 것을 먹
어야할 만큼 잘한 일이 없는 내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가끔 가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나쁘진 않겠지만 말이다. 도대
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어느 정도 그녀의 기분을 맞추는 선에서 안심스테이크를 먹었
다. 비교적 많이 양보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이런 면에서
는 독단적인 내가 말이다. 대신 술값은 내가 부담하기로 합의를 보
았다.

나는 그녀를 낙산쪽 뒷길로 데려갔다. 그녀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탁자가 있고,
벽에는 지저분한 낙서로 도배되어 있다. 못생긴 개가 가끔 컹컹 짖
기도 한다. 또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가끔 출몰하기도 하는 곳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장선생이 그곳을 아주 맘에 들어할 것이라고 믿었
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BASIC ON STAGE
지하에 위치한 재즈바의 이름이었다.
우리가 구석진 자리에 나란히 앉았을 때, 마침 세 명의 주자가 연
주를 시작했다.
드럼과 기타와 피아노, 세 명이었다.
소리가 꽤 컸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재즈바 첨 와봐요?"
"예."
"여긴 두 번째 오는 곳인데, 재즈가수가 노래를 아주 잘해요. 꼭
리아같이 생겼는데... 근데 오늘은 안나오는 모양이에요."

장선생도 내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말했다.
"김선생님이 재즈를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재즈는 잘 몰라요. 그치만 이런 분위기는 좋잖아요. 어쩔 땐 흐느
적흐느적하고 어쩔 땐 강렬하고... 박자가 안 맞는 듯하면서도 나름
의 리듬이 있고... 저절로 손발이 끄덕거리며 박자를 맞추게 돼요.
하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동조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
인 것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음악의 박자를 맞추는 몸짓이기도 했
다.
내가 재즈바를 처음 가본 것은 선경을 만나서였다. 그녀는 재즈에
대해서 많이 알았고 무척 좋아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도 재즈
음반을 사모으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다. 만국 공통의 언어인 음악
앞에서는 많은 말이 필요없다. 나는 흥겨운 기분으로 다리를 흔들며
박자를 맞추었다.

중간중간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는 것을 제외하곤 다른 몸동
작이 필요 없었다. 나는 그저 술을 마시면서 가끔 담배를 피우면서
음악을 즐길 따름이었다. 옆에 앉은 장선생도 홀짝 홀짝 술을 마셨
다. 음악에 심취한 듯 그녀는 연주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뽀
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볼에 입을 맞추는 사이가
아닌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녀가 알고 내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나 자신도 깜짝 놀
랐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도 그녀는 별로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
다.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오히려 나를 바라보면서 쌩긋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 귀를 손으로 잡아 끌었다. 그녀는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도둑놈!"
도둑키스를 했으니 도둑놈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일종의 바라는 것을 얻었다는 만족감이 섞여 있었다.

보통 도둑질을 하다 잡히면 무척 속상하고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
렇지만 이번에는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비록 범죄자를 지칭하는 언
어를 구사했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그것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이왕 도둑놈이 되었으니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도둑이라면 전혀 나쁠 것이 없다. 나는 더욱 대담한 도둑놈
이 되기로 했다.

그 도둑놈이 되는 과정은 너무나 쉬웠고 간단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둑놈이 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얼굴을 기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연스럽게 입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대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예쁘기도 했지만 달았다.
달디 단 그녀의 입술은 감미로움 그 자체였다.

부드러운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오랜 가뭄에 지쳐 있다가 해갈
의 단비를 맞은 기쁨을 느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녀의 혀는 영활한 뱀처럼 감겨 들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흥겨운 리듬의 재즈음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음악은 단지 나의 은밀한 희열을 남의 시선으로부터 감춰주는
방어막 같은 것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비록 남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는 없었지만...

짧지만 긴 입맞춤이었다.
내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끝난 것을 아쉬워하며 여운을 즐기려는 것처럼 그녀의 눈썹
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미선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왠지 어색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의 임자는 지금까지 장선생
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워졌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던 그 호칭
이 지금 이 순간 '미선아!'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나와 그녀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혁명(革命)이면서 동시에 혁명(革名)이었다.
그녀는 내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바로 눈 앞에 있는 남자에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일까?

나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선아!"
그제서야 그녀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대답이 작지 않았겠지만, 나
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미처 못 들을 뻔했다. 재즈음악은 이제 소
음으로 변해 있었다.
"응!"
'응!'이었다. 내가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졌듯 그녀 역시 조
금 전까지의 과거와는 다른 용어로써 내게 대답한 것이다. 이것 역
시 혁명이다.

나는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을 확인하고 싶었
다.
"우리 시작한 거 맞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물음의 의미를 미선 역시 알아 들었
다.
그녀의 얼굴에는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음악의 열기 때문인지
모를 홍조가 배어 있었다.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처럼 미지의 세계를 알아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
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지만, 이런
종류의 시작이란 정말 마른 짚더미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
사랑은 생각지도 않게 찾아오는 불청객같은 것이라더니.... 이렇
게 또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인가?
너무 빨라서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어찌 되어도 좋다는 생각
이 들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린 느낌. 사랑의 묘약을 마셔버린 터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가볍게 안겨오는 그녀의 젖
가슴이 투실투실 탐스러웠다.
미선은 내게 착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내 등을 감싸 안
은 그녀의 뱅어같은 팔은 의외로 완강했다. 그런 그녀가 더욱 사랑
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내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 것
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근심거리 하나가 있었다.
낮부터 내내 생각했던 바로 그 의문이었다. 미선에게는 미심쩍은
부분이 몇 가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의문이 벗겨지는 순간이 진정
한 시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인 것이
다. 나는 매미의 머리처럼 반듯한 미선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
말했다.
"미선아, 나가자."
미선은 내 말을 잘 따랐다.
사실 이곳은 너무 불편한 공간인 것이다. 남의 시선도 있거니와
의자도 불편했다. 결정적으로 이곳에서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
을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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