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젊음, 그 열기 속으로 17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556회 작성일 17-02-12 11:26

본문

젊음, 그 열기 속으로 17부

은하의 대답을 듣고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은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분명 의미를 가지고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 약혼... 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것 같았는데...?"
은하의 마지막 편지를 받고서 1년정도 지났을 때인가... 휴가나와서 부산에서 만난 한 친구녀석이 지나가는 말로 그랬던것이 기억났다.
"... 알고있었구나...? 약혼하고 얼마 안되서 파혼했어..."
그렇게 얘기하는 은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은하의 시선은 분명 테이블을 향하고 있었지만 딱히 어디에 초첨이 맞추어져있는 것은 아닌것 같았다.
갈증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앞에 놓여있는 잔을 보자마자 단숨에 들이마시고 말았다.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음에도 은하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여기있지만 의식은 저 너머의 어딘가에 놓여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은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밖에는 없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대개 거의 비슷비슷하기에 은하에게 일어난 일도 그저 그런 일들 가운데 하나이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나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해... 긍정... 체념... 분노...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잘 되지않았다.
겨우 불붙인 담배를 입가에 가져가 몇모금 빨았다. 담배를 쥔 손가락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것이다.
-그래,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잘 될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떤 일이 있었던가는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잖아...
-...
-하... 그럼, 그럴려고 내게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거야...?
-단순히 편지 한 장 던져주면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갈것이라고 생각한거야...?
-그래... 네 생각대로 나라는 놈은 그렇게 용기있는 놈은 아니지... 그래서 너한테 말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물러서 버리고 말았던것이고...
-그럼... 내가 겪었던 것은 뭐지...?
-무엇때문에 고참하고 싸웠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했던거야...?
-지금 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왜 그렇게 힘들어해야만 했던거지...?
-그렇게 날 차버렸으면 지금 보란듯이 잘 살아야 하잖아...!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되는것 아냐...?
-아니, 나한테는 그런 표정을 보여줘야 하잖아...
-적어도 난 그런 표정을 볼 자격이 있잖아...
-그런데... 그런데, 지금 네가 보이고있는 얼굴은 뭐야...?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그런 네 얼굴을 보면서 내가 무슨 얘기를 해주길 원하는거야...?
-나한테서 위로를 바라는거야...? 무슨 위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어느 사이엔가 필터까지 따들어가서 피부를 짓무르고 있었지만 아무런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난 아무런 감각도 못느끼는데 은하는 무슨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은하가 내 손에서 담배를 빼 재털이에 비벼껐다.
손에서 담배가 빠져나가자 내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 더위에 추위를 느끼기라도 하는것처럼... 떨리는 손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물체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은하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는 죽기보다 싫었기에 어떻게든 힘을 줘 손을 테이블 밑으로 끌어내렸다.
짧은 시간동안 익숙하지않는 감정들이 휘몰아쳤고, 또 무수한 말들이 내 입속을 맴돌았지만 입밖으로는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소리라도 지르면서 은하를 추궁하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댔지만 애써 눌렀다. 내 감정의 우물이 말라버렸을 때조차도 나를 지탱해주던 단하나의 그것, '자존심'이 겨우 겨우 내 입을 막고있었던 것이다.
"파... 혼... 힘... 들었... 겠군..."
내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이 내 입술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않는 내 목소리에서는 감탄사 이상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목소리는 부분 부분 끊어졌고, 탁하기까지 했다.
흠칫...
내 목소리가 이상했던 것인지... 지금까지 미동조차 하지않던 은하의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은하의 눈이 서서히 들렸고... 이윽고 내 시선과 마주쳤다.
은하의 두 눈에 촉촉히 물기가 맺히는것 같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설마...
-무슨...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아무런 말도 하지않기를 바랬다. 지금 은하가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가까스로 막고있는 내 감정이 터져버리고 말것만 같았다. 하지만...
"... 너한텐... 미안했어... 그 말밖에는..."
은하의 목소리는 겨우 들릴락말락하는 정도였지만 내 귀에는 뇌우처럼 들렸다. 일병때 내가 근무하던 외곽초소를 때렸던 그 벼락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그걸 느낄 수는 없었다.
-제길... 제기랄... 그런 말을 왜 나한테 하는거야?
-왜! 지금에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날 놀리는거야? 그럼, 난 뭐가 되는거야?
-날 그렇게까지 놀리고 싶은거야?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니?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다 받아줄꺼라고 생각하는거야?
-얼마나 더 날 바보로 만들고 싶은거야?
-그 정도면 이미 충분하지 않아?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거야?
-내가 무슨 말을하길 원하는거야?
-이익... 이...
그 때였다.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삐리릭..."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바지 속에 넣어두었던 삐삐덕분이었다. 아마도 그 소리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참고 참아왔던 것이 터져버렸을 것이다. 간신히 날 지탱해주던 자존심이 떨어져나가기 직전이었으니까...
겨우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필요없다고, 그리고 귀찮게만 여기고있던 삐삐가 고마워지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은하 역시 그 소리에 적잖이 놀란것 같았지만, 무언가 터질듯한 분위기를 넘길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건 나와 별반 다른것같지 않았다.
"... 전화 좀..."
억눌린듯한 신음처럼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몸속의 힘이란 힘은 테일블을 쥐고일어서는 두 손에 몽땅 들어가있는듯 다리에 힘이 없었다.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어깨가 뻐근한것이 마치 한여름 공사판에서 막일이라도 하다가 나온듯했다.
"뚜우우~ 뚜우우~"
"여보세요? 오빠야? 오빠지!"
"으응..."
"왜 안와? 지금까지 전화도 없구!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빨리 와!"
미나의 목소리가 쉴새없이 흘러나와 귓청을 때렸다. 재잘거리는 미나의 목소리는 은하의 목소리에 익숙해져있던 내 귀에 시원하게 들렸다. 미나의 목소리가 그렇게 들릴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지금 어디 있는데?"
"학교 앞."
"학교 앞 어디? 정문에 있어? 까페야?"
"아니, 술 집인데."
"뭐? 대낮부터 술 퍼? 누구랑 있는데? 아는 사람도 없다며?"
"친구...랑 있어."
은하를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내 목소리에서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린듯 미나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 여자야?"
"..."
미나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않았다. 한동안 미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것 같았지만, 얼마안가 다시 원래의 밝은 미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에~~ 옛 애인이라도 만났어?"
"..."
"뭐야...? 진짜 그렇기라도 한거야?"
"... 아무튼 오늘은 좀 어렵겠다. 지금 꽤 마셔서 그런지 취한것 같기도 하고."
"... 좋아! 뭐, 옛 애인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니까 그리로 갈께!"
미나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기에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훗... 네가 올만한 자리가 아니야. 그러니까 괜한 소리 하지마."
"뭐, 어때? 내가 보면 안되는 여자야? 설마 꼼보는 아니겠지? 꼼보 맞아? 맞구나!"
-푸훗... 꼼보라니, 언제적 단어를 쓰는거야?
진지함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어려운 미나의 목소를 들으면서 실없이 웃고말았다. 장난기가 다분했지만, 왠만큼해서는 물러서지도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은하가 미나를 본다면 무슨 얘기를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 그래. 네 맘대로 하세요."
"어딘데?"
"정문에서 첫번째 골목으로 쭉 들어오면 허수아비라는 집이 있어. 거기야."
"허수아비? 거기 동동주 파는 곳 아냐?"
"맞아. 거기 방에 있으니까 알아서 와라."
"하이구... 지나가는 말이라도 마중 나온다는 말은 안해요. 숙녀를 초대하면서 그런 에티켙도 몰라?"
"네가 뭔 숙녀냐?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와서 옷이나 훌렁훌렁 벗어대는 주제에!"
"꺄악!! 또 그소리! 어디가서 그런 말 하기만 해봐! 가만 안둘테야!"
"좌우간, 못나가니까 네가 알아서 오든지 말든지 해."
"알았어. 딴데로 새지말고 꼼짝말고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멍하니 수화기를 내려다 보면서 어느새 유쾌해져있는 내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언제 내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를지경이었다.
기분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곧바로 들어가기란 쉽지않았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불붙여 물었다. 창 밖으로 빨려나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후우욱... 내가 왜 화를 낸거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직까지 은하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거야?
-무슨 미련? 다시 시작하기라도 할꺼야?
-다시 시작하다니, 뭘?
-설혹,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건 아니잖아.
-아니, 은하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파르스름한 담배연기는 내 입에서 벗어나자마자 창문 밖으로 빨려나갔다. 그 연기를 보면서 혼자서 묻고 대답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래... 그냥 이대로 두고 보기로 하는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방으로 돌아오자, 내가 나갈때 그모습 그대로 앉아있는 은하가 보였다. 어느새 술이 비어있었다. 전화하는 동안에도 은하는 계속 마셨나보다. 다시 술 한통을 더 주문하고서 은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은하의 고개가 들렸다. 밝으스레한 볼은 술 때문일까... 은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전화하는 소리 다 들리던데...?"
"..."
"오는 사람이 있는거야?"
"응."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니..."
-물어보고 싶은게 그거야? 아니잖아! 왜, 자신있게 못 물어보는 거야?
"... 여자... 야?"
"... 그래."
"그렇구나..."
다시 은하의 고개가 숙여졌고, 한동안 방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마치 무슨 대단한 의식인것처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1분? 2분? 어색함을 더이상 참을 수 없을정도가 되자 다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 갈까...?"
-그걸 왜 물어보는거지? 갈 생각이라면 그냥 일어서면 되잖아. 그게 아니라면 아무 말도 하지말고 있으면 되는거고.
"그럴 필요없어."
-내 대답을 은하는 뭐라고 생각한 것일까...?
-지금 오고있는 미나를 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사귀...는 사람이니...?"
-그래, 그걸 묻고싶은 거였지?
-뭐라고 대답해야 되는거지...?
딱히 뭐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사귀는 사람이 아닌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 그런 사람이 없는게 더 이상하지..."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는 내 모습을 자신의 물음에 대한 긍정이라고 생각한 듯인지 은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굳이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다. 은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냥 그대로 놔두고 싶었다.
"예쁘니...?"
"있다가 오면 봐."
"훗... 예쁜 모양이구나...?"
미나와 은하... 은하는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스타일이라면, 미나는 늘씬한 키에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어느 누가 더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둘을 비교해본적도 없었고...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미나가 들어섰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있는지 미나의 어깨와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
은하의 고개가 돌아가고, 미나와 은하의 두 눈이 마주쳤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