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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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096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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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3권 제31장 밝혀진 비사 (秘事)



사당 안에는 2인이 대좌하고 있었다.


한 명은 예상대로 문사릉이었다. 가운데의 낡은 나무탁자를 사이에 두고 문사릉과 마주 앉아 있는 인물은 낡은 회색 승의를 입은 노승이었다.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이에 뚱뚱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백룡은 노승의 시선이 자신의 폐부를 꿰뚫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노승의 눈은 날카로웠다.


"부르셨습니까?"


그가 포권하자,


"어서 오게, 백 소협."


문사릉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어느덧 술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허허! 자네가 술을 좋아할 줄 알고 오래된 화설로를 구해왔네."


백룡은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대인."


그 순간 노승이 문사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의 사람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것을 노화상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네."


문사릉이 낮게 웃었다.


"대사께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


백룡은 노승의 신분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동창의 책임자인 문사릉이 노승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다니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아미타불 . 인중지룡(人中之龍)이요, 거기에다 군왕지상마저 포함되어 있는 상(相)일세."


문사릉은 흠칫했다.


"군왕지상이라니 ?"


"허허! 飁를 잘못 타고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군왕좌에 오를 뻔한 인물이네."


백룡은 노승의 말에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얼굴 한 번 보고 노승은 알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백룡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고소지었다.


"대사께서 과찬을 하시는 군요. 후배는 고작 강호의 일개 무부일 뿐입니다."


"아미타불 . 그래서 노부도 기이함을 느끼고 있다네. 어찌하여 자네에게서 황도를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단 말이네."


백룡은 담담히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미타불 . 그러기를 바랄 뿐이네."


문사릉은 화제를 돌렸다.


"백 소협을 그 일에 개입시키는 것은 대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아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허허! 이미 결정을 다 해놓고 이 늙은 중에게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이오?"


문사릉은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었다.


"어찌 감히 소인이 마음대로 결정하겠습니까? 대사의 윤허를 바랄 뿐입니다."


"아미타불. 노납은 이미 시험을 하였네. 자네가 본 대로 이 청년은 심지가 바를 뿐더러 심후한 공력을 지니고 있네. 이번 일에는 더이상의 적임자가 없을 것이라고 보네."


문사릉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で아미타불 ."


노승은 눈을 감았다. 그의 미간에는 한 가닥 검은 기운이 어렸다. 그 순간 문사릉은 고개를 돌려 백룡에게 입을 열었다.


"백 소협은 기이하다고 여길 것이네. 그러나 노부는 자네에 대해 여러 가지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네."


" ?"


"노부는 동창의 책임자로서 대내의 일을 맡고 있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대임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네."


문사릉의 입에서 드디어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대내의 일은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고 있으나 대명의 황조를 위협하는 일이 강호에서 일어나고 있네."


백룡의 안색이 자신도 모르게 변했다.


"강호에서 역모가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바로 그런 셈이네."


" !"


백룡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대로 강호인들은 황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강호에서 역모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대체 어떤 자들이 감히 그런 짓을 ?"


문사릉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는 뇌정각이란 단체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순간 백룡은 격동을 드러낼 뻔했다. 간신히 신색을 감출 수가 있었다.


"뇌정각 ?"


그가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문사릉은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뇌정각이란 단체는 무림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극비의 조직이네. 이십여 년 전 세워졌으며 마도인들을 중심으로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는 세력이네."


" ."


"그들은 이십 년 만에 은거를 파기하고 강호에 나섰네. 아직도 비밀리에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강호인들조차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라네. 바로 그들이 대명의 황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네."


문사릉의 말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노부는 동창의 비밀조직을 이용하여 오래 전부터 그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네. 뿐만 아니라 뇌정각의 수뇌부와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으므로 그 동안 뇌정각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네."


문사릉은 계속 비밀을 털어놓았다.


"동창에서 특별히 키운 금사대(金獅隊) 열두 명을 오래 전부터 뇌정각에 파견하고 있었네. 그들은 특수한 무공을 익힌 동창의 절정고수들이네. 그런데 얼마 전 그들이 뇌정각 속에서 모두 협살을 당해 죽고 말았네."


'금사대라고 ?'


불현듯 백룡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노부는 결국 그들이 뇌정각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뇌정각이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네."


문사릉은 화설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원래 그는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위인이었다. 백룡은 혼자서 술을 마셨다.


"십이 금사인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동창의 보병(寶兵) 중 하나인 금사신궁도 그들에게 탈취 당하였네. 게다가 노부가 오래도록 뿌리 내리고 있던 비밀조직들이 불과 한 달여 사이에 뇌정각 내에서 와해되고 말았네."


거기까지 듣자 백룡은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그렇다. 금사인들이란 바로 얼굴이 금빛이었던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동창이 비밀리에 뿌리내렸다는 조직인들은 내가 창궁무고에 있는 동안 의문의 피살을 당하였던 삼십인의 인물들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금사신궁이 거론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창이 뇌정각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히 증명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찌하여 그 동안 뇌정각과 동창이 이십 여 년 간이나 보이지 않는 밀접한 유대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갑자기 두 세력이 멀어지게 되었느냐는 점이었다.


그는 바로 그 비밀 어딘가에 부친 건문제의 사인(死人)이 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때 문사릉이 정색했다.


"자네는 노부가 이런 극비사항을 자네에게 말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소생에게 어떤 대임을 맡기려 함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네."


문사릉은 잠시 침묵했다.


"이 일은 간단한 것이 아닐 뿐더러 황조는 물론 천하무림의 안위를 비롯하여 억조창생의 안녕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중대한 임무일세."


" ."


"그러나 노부는 아직 자네의 진실한 정체를 모르고 있네."


문사릉의 말에 백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생은 그저 야인일 뿐입니다."


"허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동안 노부가 시험한 바에 의하면 자네의 무공은 무림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신비한 수준에 달한다는 것이었네. 일개 야인이 어찌 그런 신비막측한 무공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 ."


"노부가 자네를 이 곳으로 오게 한 것은 바로 자네의 신분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함이네."


문사릉은 고개를 노승에게로 돌렸다. 노승은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떤 난제에 대해 온 정신을 기울여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자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자네의 무공내력을 통하여 알아볼 참이네."


문사릉은 노승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분 선사께서는 바로 태조(太祖) 폐하때부터 동창의 맥을 뿌리내리게 하신 만가법사(卍伽法師)이시네."


만가법사라는 이름을 백룡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영락 이전은 물론 태조때부터 동창에 관여해 온 기인이란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노승은 바로 백련교의 장교(長敎) 중 하나가 아닐까?'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만가법사는 무림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태조 주원장이 천하를 장악할 때 백련교는 그의 힘의 원천이었다. 당시 백련교의 주역들은 대명조가 일어선 이후 도리어 주원장에 의해 척결되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한 명은 명조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만가법사였다. 불력이 뛰어난 그는 대명황권의 기틀을 세우는 데 일조를 하게 된 위인이었다.


그가 공신(功臣)의 대열에도 들지 않았던 이유는 스스로가 마다하였기 때문이었다.


만가법사는 백련교 비전의 무학을 황실에 전파했다. 특히 동창 위사들의 무학으로 승계 발전시킨 위인이었다.


이때 만가법사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신광이 빛났다.


"노납은 자네의 무공연원을 더듬어 보았으나 정말 이해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느꼈네. 자네의 내력은 매우 복잡할 뿐더러 몇차례의 환난과 기우를 만나 체내의 경맥이 일반적인 무림인과는 상이하더군. 그렇지 않은가?"


" !"


백룡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가법사는 다만 목탁을 통해 그의 내력을 격발시켰을 뿐이었다. 얼굴을 마주 하지도 않았고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내력을 정확히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 자네는 남보다 훨씬 늦게 무학에 입문했으면서도 이런 경지를 이루다니 놀라운 일일세. 더욱이 명문의 가르침을 받아 정통공부를 한 것같지도 않군."


백룡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자네의 무공의 주맥은 검도(劒道)에 있는 것같네. 상승의 검도를 익힘으로써 내가무학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있는 것같군."


백룡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생은 검도를 중심으로 익혔습니다."


만가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무학을 익혔네."


백룡은 그것이 창궁무고에서 익힌 것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특별한 사승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강호의 무공들을 눈치로 배웠을 뿐입니다."


그 순간 만가법사가 그를 쏘아보았다.


"노납에게 한 가지 무공을 펼쳐 보여 주게."


" !"


백룡은 흠칫했다. 그러나 문사릉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절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난감한 일이었다. 만가법사는 천하의 모든 종류의 무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 무학을 펼치든 그는 내력을 간파당하기 십상이었다.


'팔마나 검노, 검마의 무공을 펼치면 나의 신분이 노출될 것이다. 그렇다고 창궁무고에서 익힌 무학을 펼친다는 것은 .'


그것 역시 수백년 전의 무학이었으나 만가법사가 전혀 모른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문득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습니다."


그는 흔쾌히 대답하며 수검(手劒)을 취했다. 검도가 상승의 경지에 달하게 되면 육장(肉掌)이나 검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수검이었으나 손 끝에서는 검의 예기가 날카롭게 뻗었다.


"으음 !"


만가법사의 흰 눈썹이 곤두섰다. 그는 평생 수많은 종류의 검법을 겪어 보았으나 지금 눈앞의 청년이 펼치고 있는 검법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창궁객의 검법 미인혈(美人血)의 기수식을 펼쳐보인 것이었다.


창궁객의 최후 절초인 미인혈은 당대의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검법이었다. 삼백 년 전 장한미인의 목을 벨 때 단 한 번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런즉 그가 미인혈을 전개할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였다.


만가법사가 아무리 천하무학에 달통했다 하더라도 미인혈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츳 !


수검이 움직이자 방 안은 검기가 가득찬 듯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파동쳤다. 백룡은 손 끝을 약간 움직였다.


"아미타불 !"


돌연 만가법사는 불호를 외치며 소매를 저었다. 소매가 흔들리는 순간 방 안은 무형의 강기가 퍼졌다.


찌익 !


소매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미타불 !"


만가법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소매가 잘라진 것을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룡은 얼른 포권했다.


"선사께서 후배를 아끼시는 마음에 양보를 하셨군요."


그가 미인혈의 검식을 거두자 방 안을 메우고 있던 검기가 사라졌다.


만가법사는 멍하니 잘려진 소매 끝을 바라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검법이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그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소매 끝을 잘리고 만 것이었다. 양보를 한 것도 아니었다. 비록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만가법사의 충격은 컸다.


"아미타불 ! 그것은 무슨 검법인가?"


"미인혈이라고 합니다."


"미인혈 ?"


물론 그 이름 역시 천하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때 문사릉이 입을 열었다.


"선사께서도 알지 못하는 검법이란 말입니까?"


만가법사는 탄식했다.


"그렇네. 노납은 이제야 비로소 무학이란 바다같이 넓고 무한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네. 부끄러울 뿐이네."


"으음 ."


문사릉은 신음했다.


그는 만가법사를 무학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가조차 모르는 무학이 있다니. 더군다나 일개 청년에 불과한 백장천(白藏天)이란 인물이 만가를 패하게 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백장천. 이자의 무학이 이다지도 높으니 대임을 맡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한 위인이 아닌가?'


다만 한 가지 꺼림칙한 문제가 있다면 여전히 백장천의 내력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때였다. 백룡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대인."


" ?"


"소생은 원래 강호의 야인이었으므로 황실의 존인이신 대인과는 감히 어울릴 수 없는 천한 몸입니다."


"무슨 소린가?"


"대인께서 소생에게 어떤 의혹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나 소생은 개인적인 신상문제로 인해 대인의 의혹을 풀어드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설혹 그 일로 인해 대인의 곁에 있을 수 없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백 소협 ."


백룡은 몸을 일으켰다.


"소생은 이만 떠나겠습니다. 정처없이 강호를 떠도는 것이 저의 체질에는 더 맞는 것같습니다."


그가 포권하자 문사릉은 다급해졌다.


"잠깐만. 백 소협."


문사릉의 얼굴에는 한가닥 엄숙한 빛이 어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만가법사를 바라보았다.


"선사."


만가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노납은 알고 있네. 이 일은 백 시주보다 적임자는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에 노납 역시 동감하는 바이네."


"그럼 선사께서도?"


"아미타불 ."


만가법사는 불호를 외며 눈을 감았다.


그것은 모든 일을 문사릉에게 일임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문사릉은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백 소협. 더이상 자네의 신상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음을 약속하네. 그 대신 자네도 노부에게, 아니 천지신명께 맹세를 할 수 있겠나?"


백룡은 담담히 반문했다.


"어떤 맹세를 말입니까?"


"간단한 것이네. 대명의 황조(皇朝)를 수호하고 무림의 평화를 위하여 대의(大義)를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느냐는 것이네."


" !"


백룡은 눈을 감았다. 이제 그가 한 마디만 하면 그는 문사릉으로부터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황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부친 건문제의 한(恨)은 어찌되는가 ?


문사릉은 쉽게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장천은 몹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때 백룡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하오니, 소생 백장천은 대명의 황조를 수호하고 무림평화를 위해 대의에 미력을 다할 것을 서약하오이다."


"오오 !"


문사릉은 반가움의 탄성을 발했다.



며칠 동안 문창해는 백장천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허전한 기분을 느꼈으나 대충 짐작은 했다. 그것은 부친이 백장천에게 어떤 대임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것은 애당초 그가 원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기정 사실로 굳혀지는 듯하자 도리어 섭섭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백장천, 즉 백룡은 문창해가 짐작한 대로 문사릉으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극락사를 다녀온 이후 그는 바빠졌다.


그는 비밀리에 몇 차례나 자금성에 입성했다.


그 곳에서 백룡은 동창의 비밀위사들을 만나고 동창의 조직에 대해 익혔다. 동창의 조직은 단 한 사람, 오직 문사릉만이 관장하고 있었다.


동창에 속한 위사들은 자삼을 입고 있는 보통 위사에서 극비리에 각 부서에 퍼져 있는 밀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지니고 있었다.


백룡은 동창의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자금성에 들어섰을 때 백룡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 곳은 본래 자신이 들어가야 하는 곳이 아닌가?


부친 건문제는 남경(南京)을 황도로 했으나 이 곳 연경으로 황도를 옮긴 것은 영락제였다. 백룡은 먼 발치에서 정통제(正統帝)를 보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었으나 박동하는 가슴을 스스로 억제해야만 했다.


'내 이름은 백룡 . 백룡이다. 주(朱)씨 성은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황조와 나 백룡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문사릉 앞에서 맹세하지 않았느냐?'


스스로를 이렇게 다그쳤으나 백룡의 마음은 괴롭기 이를 데 없었다.


문사릉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대임을 맡아야 하는지 아직 이야기 하지 않았다. 다만 빠른 시일 안으로 동창의 조직을 익히고 그에 따른 연락방법, 동창위사들의 행동법 따위를 습득하게 했다.


백룡에게는 특품(特品)의 특별신분이 주어졌다.


그것은 동창의 어떤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건 그가 마음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지니는 것이었다.


오로지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문사릉 뿐이었다.


그러나 특품위를 받기는 했으나 백룡의 이름이 동창조직의 위사명단에는 오르지 않았다. 명부 외인이 된다는 것은 언제고 그가 마음대로 동창을 떠날 수 있다는 임의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그가 직접 문사릉에게 원한 청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보름여의 날짜가 안개처럼 지나갔다.



밀실(密室).


동창 내부의 밀실 안에서 문사릉과 백룡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먼저 뇌정각에 대한 비사부터 이야기해야 순서일 것으로 여겨지네."


문사릉의 첫마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뇌정각을 세운 사람은 황족이었네. 아니 그분은 과거 대명제국의 황제이셨네."


" !"


백룡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막상 문사릉으로부터 직접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왔기 때문이었다. 문사릉은 백룡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분은 세인들이 모두 당시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건문제이셨네. 당시 남경성의 황궁에서 불에 탄 시신이 건문제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었던 것이네."


" ."


"그분은 결국 불행한 황제이셨네. 지나치게 성격이 유약하셨기 때문에 영락 선황께 자리를 물리게 된 것일세."


문사릉은 한 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건문제께서는 어딘가로 잠적을 하셨네. 영락제께서는 비록 건문제의 죽음을 발표했으나 암중으로는 항상 잊지 않고 계셨다네. 언제고 건문제가 복위를 노리고 거사를 도모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네."


그것은 매우 뜻밖의 말이었다.


"선황께서는 몹시 치밀하신 분이셨네. 그리하여 한 가지 안배를 극비리에 해두셨네. 그것은 ."


영락제가 안배한 것은 실로 먼 훗날을 대비한 주도면밀한 안배였다.


그는 건문제가 거사를 한다면 필히 관과는 무관한 무림인들을 동원하리라고 점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극비리에 한 명의 인물을 강호에 파견했다.


그 인물은 수십 년을 강호에서 활동한 마교(魔敎)의 잔당이었으나 영락제의 도움을 받아 마교의 장로(長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영락제가 우려하던 일은 결국 현실로 벌어지고 말았다.


건문제는 기연을 마나 상승의 기예를 익힌 후 무림인들을 규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은밀히 마도인들을 주축으로 뇌정각이란 비밀단체를 결성했다.


그 소식은 영락제에게 낱낱이 보고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오래 전에 무림에 심어 놓은 인물이 건문제의 오른팔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건문제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를 신임하여 오른팔로 삼은 것이었다.


그가 바로 태태마존(太太魔尊)이었다.


건문제가 무서운 힘을 키우게 되자 영락제는 불안을 느꼈다. 그는 어떻게든 건문제를 제거하리라고 결심했다.


만일 뇌정각의 힘으로 거사한다면 대명의 황조도 위태롭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그는 태태마존에게 건문제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태태마존은 그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태태마존은 건문제에게 충심으로 감복한 나머지 영락제의 명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건문제가 이미 거사를 앞두고 회의(懷疑)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건문제는 뇌정각을 세운 이후에도 거사를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을 뿐더러 민심이 이미 영락에게 돌아갔음을 알았던 것이다.


결국 건문제가 거사를 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를 암살할 이유가 없다고 태태마존은 단정했다.


그러나 영락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고 건문제가 자신에게 복수할 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영락제는 냉혹하고 잔악한 황제였다. 결국 그는 또하나의 안배를 계획했다.


영락이 숨겨 둔 또 하나의 비수는 다름아닌 소녀(少女)였다. 소녀는 타고난 우물(尤物)로서 오래 전 마교(魔敎)에 입교되어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염화봉(艶花鳳)이었다.


염화봉으로 하여금 영락이 노린 것은 바로 미인계(美人計)였다. 건문제는 아직 나이가 장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영락제의 생각은 맞아 떨어지는 듯했다.


처음 건문제는 염화봉의 미색에 흔들렸다. 영락은 염화봉으로 하여금 건문제를 치마 속에 가두어 거사의 뜻을 완전히 잃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터졌다. 한 동안 염화봉에게 빠지는 듯하던 건문제가 돌연 염화봉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었다.


예측하지 않았던 엄청난 사건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였다.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힌 염화봉이 갑자기 마교의 금기로 전해지는 비전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그만 마성(魔性)에 빠진 것이었다.


하루하루 염화봉은 달라졌다. 무공이 무섭게 발전함과 동시에 심성도 몰라보게 달라진 것이었다.


결국 비극은 그녀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다.


건문제가 연공하는 연공관은 누구도 드나들지 못했다. 그러나 염화봉만은 그 동안 자유롭게 드나들었었다. 따라서 그날밤 그녀가 연공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공관 안에서 벌어진 일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 그날밤 건문제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등 뒤 명문혈에 뚜렷하게 찍힌 하나의 장인(掌印)이었다.


그러나 그 장인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뿐이었다. 태태마존만이 그 장인이 염화봉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염화봉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건문제의 죽음(死).


그것은 뇌정각의 소멸을 의미했다. 그러나 태태마존은 뇌정각의 힘이 이미 고금미증유의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뇌정각에는 아직도 건문제를 보위하는 공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양천위, 진자방, 곽릉 등이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고 뇌정각의 문창성, 천외전주, 숭양전주로 있었다.


태태마존은 그들과 상의하여 뇌정각을 유지해 왔다. 분열하려는 뇌정각을 하나의 힘으로 묶어두기 위해서는 또한 그가 각주의 자리를 대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


여기까지 이야기 한 문사릉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편 백룡은 격동을 금치 못했다.


비로소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흑막이 벗겨진 것이다. 그는 부친의 사인에 대해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문사릉에 의해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가슴이 들끓었다. 다만 자신의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내심의 격동을 초인적인 정력으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염화봉 ! 아버님을 암산한 원흉이 바로 염화봉이라고?'


그의 가슴 속에 이름 석 자가 불로 지지듯이 각인되었다.


이때 문사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뇌정각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네."


" ?"


"사라졌던 염화봉이 돌아온 것이네. 수 년 전 그녀가 다시 돌아와 뇌정각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네."


백룡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일개 소녀에 불과했다던 염화봉이 무슨 능력으로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뇌정각을 장악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문사릉은 계속 이야기했다.


"염화봉은 마교에서 금기로 전해지고 있는 무공을 익힌 후로 그녀를 상대할 적수가 없게 된 것이네. 심지어는 마교의 장로인 태태마존조차 염화봉의 삼초지적이 되지 못할 정도였네."


" !"


백룡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익힌 것은 바로 천마삼보 중 하나인 구음진경(九陰眞經)이었네."


"아!"


그 순간 백룡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구음진경을 익히게 되면 무공이 극한까지 속성으로 달하게 되나 마성에 빠지기 쉬운 단점이 있어 마교에서조차 익히기를 금지했던 것이네. 그런데 염화봉은 구음진경을 연성하여 희대의 고수가 된 것이네. 그러나 그녀 역시 마성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네."


문사릉은 무거운 어조로 계속했다.


"얼마 전 그녀는 뇌정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강호에 진출했네."


그 사실은 백룡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부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염화봉이 한 가지 중대한 착오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네."


"착오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염화봉 자신이 건문제를 죽여 놓고 건문제의 죽음이 바로 황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생각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네."


"어찌 그럴 수가 ?"


놀란 백룡이 되물었다.


"그녀는 이미 인간의 심성을 상실했을 뿐더러 판단력이 흐려져 있네. 건문제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질투에 사로잡혀 죽인 것이 그녀였네. 따라서 지금 와서 건문제를 죽인 것이 대명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무리도 아니네. 결국 염화봉은 뇌정각의 힘을 이용하여 무림을 제패한 후 다시 그 힘을 돌려 황궁을 치려는 엄청난 계획을 하고 있네."


" !"


백룡은 비로소 문사릉이 고심하고 있는 문제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동창의 힘을 동원하여 염화봉의 미치광이와 같은 일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백룡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소생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염화봉을 제거하는 것이네."


" !"


예상한 답이었으나 백룡은 전율했다. 당연히 부친의 원수인 염화봉을 죽이는 것은 그가 평생을 던지더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문사릉의 입으로부터 그녀에 관한 전말을 듣고 보니 한가닥 전율이 앞섰다.


잠시 후 그는 물었다.


"소생의 힘으로 그 마녀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까?"


문사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자네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마녀를 제거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네. 노부는 이미 방법을 생각해 두고 있네."


" ?"


"그것은 마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네."


"약점?"


"자네는 이 곳을 떠나 뇌정각 내부로 파고 들어가야 하네. 이미 치밀한 안배를 마쳐 두었네."


문사릉의 눈에서 혜광이 반짝였다.


"뇌정각은 현재 항산의 광양장이란 곳에 본거지를 두고 있네. 그 곳에는 자네를 도와줄 중요한 인물이 있네."


백룡은 문득 반문했다.


"태태마존?"


문사릉은 무릎을 쳤다.


"역시! 자네의 지혜는 감탄할 정도군! 맞았네. 그가 자네를 도와줄 것이네."


막상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자 오히려 백룡은 놀랐다.


'태태마존이 어떻게 황궁과 다시 손을 잡고 염화봉을 제거하려 한단 말인가?'


"자네는 태태마존의 도움을 받으며 광양장으로 잠입한 후 한 소녀를 손에 넣어야 하네."


그 순간 백룡은 어리둥절해졌다. 느닷없이 소녀를 취하라니?


"허허, 말하자면 미남계를 쓰라는 말이네. 그 소녀는 바로 마녀 염화봉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네."


" !"


그러나 곧 염화봉에게 딸이 있는 것이 웬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미남계를 사용하는 것도 그러하였지만 더욱이 그 대상이 마녀의 딸이라는 것은 더욱더 꺼림칙한 일이었다.


문사릉은 그의 마음을 환히 읽은 듯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아네. 하지만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은 의인의 도리일세. 잠시 감정을 접어두고 천하를 환난에서 건져내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하네."


문사릉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그렇다. 자존심이나 개인적인 감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녀를 제거하는 것은 천하를 도탄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미남계를 쓰는 것도 하나의 병법일진저 .'


그는 담담히 물었다.


"마녀의 딸이라는 소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사릉은 그가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사라(沙羅)라네."


" !"


청천벽력음이 백룡의 귓전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순간 귀가 멍멍해졌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백룡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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