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드림보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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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388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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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 8일.
새벽부터 태백산맥 일대에 폭설이 내렸고 대관령을 넘는 영동고속도로가 반나절 동안 마비되었다. 군부대까지 동원된 제설작업은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서울과 강릉을 잇는 대동맥의 숨통을 터놓았다. 그러자 오후부터 스키 캐리어를 지붕에 장착한 승용차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제설작업을 완료하고 귀대를 하던 공병대원들이 잔뜩 볼이 부어 한 마디씩 던졌다.
『씨팔, 언놈들은 눈 치우느라 뺑이치는데 언놈들은 미끄럼 타고 좋겠다.』
『아니꼬우면 탈영하려무나.』
『저 자식들이 우리가 애쓴 걸 알아 주기나 할까?』
『알긴 뭘 알까! 우리보고 재수 없다고 침이나 뱉지 않으면 다행이지.』
『네미럴, 스키장 가는 비탈길에서 대형사고나 터져 버려라. 몇 놈쯤 길 아래 개천에 처박혀 봐야 눈길 무서운 걸 알 텐데.』
대원들은 듣기에도 섬뜩한 저주를 늘어놓으며 길게 늘어선 승용차의 행렬을 쏘아보았다.
그날 밤 22시 무렵.
횡계에서 용평 스키장으로 가는 중간 지점의 커브길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흰색 아카디아 한 대가 과속으로 황태덕장의 모퉁이 길을 돌다 5m 아래 개천에 추락해 버린 것이었다.
차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의 남녀는 즉사했다. 에어백이 큼직하게 부풀어 있었지만 차가 거꾸로 처박히는 통에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폭설주의보와 함께 비상대기중이던 경찰은 사건현장에 신속히 출동했다. 사고의 여파로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부터 스키장까지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었다. 스키장 가는 길이 금세 막혔기 때문에 대형 견인차까지 동원되었다.
가까스로 차 안의 사람을 밖으로 빼낸 구조반들은 혹시나 싶어 사체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망자들의 상태가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남녀 모두 큰 외상은 당하지 않은 듯싶었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외상보다 내출혈과 쇼크에 의한 심리적인 충격이 위험한 법이었다.
『어, 여기 좀 보세요. 라이트 이쪽으로 비춰 봐.』
남자의 시체를 검사하던 경찰이 동료들을 다급하게 불러 모았다. 그가 시체의 어딘가를 가리켰고, 동료들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 곳을 바라보았다.
『다 괜찮은데 성기가 없어.』
『그럴 리가 있나?』
『보라고, 날카로운 것에 의해 싹둑 잘린 흔적이 있잖아.』
그의 말대로 시체의 하복부엔 있어야 할 남성의 심벌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심벌의 뿌리만 피투성이로 얼룩져 있을 뿐이었다.
『차 안을 샅샅이 뒤져 봐.』
지휘자가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차 안은 물론 사건현장 어디에도 사망자의 성기는 없었다.
『이거 예사롭지 않은데? 혹시 위장살인 아닐까?』
한참 동안 성기 수색을 하다 지친 경찰관 한 사람이 제 나름으로 추리를 했다.
『누군가가 남자의 성기를 거세하고 차를 굴려 버렸다는 얘긴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스키장 오는 치들 중에 성관계 복잡한 친구들이 수두룩할 테니 말야.』
『일리가 있군.』
그러나 그들은 끝내 사체의 일부(?)를 찾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애타게 찾던 시체의 한 조각은 횡성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발견되었다. 『어, 입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함께 타고 있던 여자의 시체를 검진하던 의사가 여자의 입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그는 굳어 버린 여자의 하악골을 완력으로 당긴 후 가까스로 열린 입 안에 핀셋을 집어넣었다.
『이게 뭐야, 남자의 물건 아닌가!』
의사는 어이없는 얼굴로 핀셋에 걸린 살점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의 수수께끼는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남자가 운전을 하는 동안 여자가 엎드린 상태로 오럴섹스를 시도했던 거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했을 때, 핸들을 잡고 있던 남자가 몇 초 동안 아찔한 무중력 상태에 빠졌고, 그 길의 위험을 망각해 버린 게 분명했다. 여자의 입 속에서 상당량의 정액이 검출된 것도 그 같은 결론을 도출하는 데 증거가 되고 있었다.

블루맥주 홍보팀은 그룹 총수의 교통사고 사건을 접하고 초비상이 걸렸다. 다른 부서보다 홍보팀에 먼저 비상이 걸린 건 보안유지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론사와 담당 경찰들을 쫓아다니며 사건 확대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총무과에서도 무제한으로 로비 자금을 지원했다.
2선으로 물러나 있던 그룹의 창시자 최재국 회장은 본사 상황실에 대책본부를 마련하고 연일 밤을 새웠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는 사고의 동기를 은폐하는 게 급선무였다. 경찰의 조사결과가 여과 없이 그대로 세상에 밝혀지는 날이면 블루맥주는 끝장이었다.
최재국 회장이 평생을 바쳐 우뚝 세워 놓은 금자탑이 한 순간에 사상누각으로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
그는 남들이 문어발식 기업 확장에 혈안이 되어 움질일 때도 오직 맥주업 한 길에만 전력투구한 장인형 기업인이었다. 그런 소신이 블루맥주를 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아들 최종명에게 회사를 물려줄 때도 그는 신신당부를 했다.

맥주업은 기업 이미지가 곧 생명이다.
적자를 보더라도 이미지는 꼭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개망나니였다. 아직 거웃도 덜 자란 고1 때 영어담당 가정교사 여대생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는 과감성을 보이더니, 재수생 시절엔 아버지의 회사까지 들락거리면서 여사원들과 추문을 연출하곤 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더니 더 가관이었다. 수시로 여자를 바꿔 동거를 하는가 하면 도박과 약물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였다.
최 회장은 서둘러 아들을 귀국시켰다. 그리고 협박과 애원을 섞어 가며 경영교육을 직접 담당했고, 혹여 일을 맡기면 깨닫지 않을까 싶어 중책에 임명한 뒤 많은 업무를 맡겨 보았다. 그랬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다. 최종명이 경영인의 자질을 과시하며 맡은 일을 척척 해내는 것을 보고 최회장은 흐뭇했다.
누가 뭐래도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 법이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때마침 맥주회사끼리 치열한 시장점유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천성이 도전적인 최종명은 그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나서 불같은 투지를 품게 된 거였다. 아들은 매사에 과감하고 혁신적이었다. 보수적인 최 회장이 회사 로고를 바꾼 것도 아들이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최종명이 사장에 오르자 블루맥주의 주가와 매출액이 동반상승했다. 경제계에서도 블루맥주의 경영권 승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증거였다.
그랬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토록 다부지게 일하던 아들이 죽다니, 그것도 여자와 희한한 해프닝을 벌이다 변고를 당했다니!
최재국 회장은 아들이 앉았던 의자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아들의 체취가 묻은 팔걸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 비서실장이 들어와 보고했다.
『회장님, 여자의 프로필을 확인했습니다. 하수지라는 여류 조각가였습니다.』
『처녀였나?』
『그렇습니다.』
『집안은?』
『파주의 한 초등학교 교감의 딸로 밝혀졌습니다.』
『연락은 취해 봤나?』
『지금 이쪽으로 모셔오는 중입니다.』
『잘했네. 언론에는 약혼자 사이로 알리게.』
『알겠습니다.』
최종명의 장례식은 결혼식과 함께 치러졌다. 함께 사망한 하수지와의 영혼 결혼식이었다.
매스컴은 그 비운의 현장을 담담하게 세상에 소개했다. 시민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 실업가와 여류조각가의 슬픈 사랑에 혀를 찼다.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오랜만이군.』
희수는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밤 두 시에 그가 전화를 걸어올 줄은 미처 몰랐었다. 전화번호를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방송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바뀐 전화번호를 알려 줘야 한다는 번거로움 때문에 차일피일 미룬 채 자동응답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가끔 심야에는 무심결에 수화기를 들곤 했었다. 상미가 자주 밤늦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벨 공포증은 순전히 이동선으로 인해 얻은 병이었다. 그 원인 제공자와 덜컥 맞부딪혀 버렸으니 희수가 놀란 건 당연했다.
『만나기 힘들군.』
『좀 바빴어요.』
『내가 몇 번 메시지를 남겨 놓았었는데.』
『확인했어요.』
『근데 왜 연락하지 않았지?』
『…….』
『무척 보고 싶었어.』
희수는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저도 그랬어요.』
경원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녀의 모든 감각에 존재하고 있는 남자가 바로 동선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엉겁결에 대답해 놓고 자신의 이중성에 전율했다.
『지금 유리창을 열어 봐.』
그녀는 창으로 다가가서 천천히 창을 열었다. 오피스텔 바로 아래 그가 서 있었다. 핸드폰을 든 채 가로등 불빛 속에 동그마니 서 있는 사람.
그의 음성이 다시 날아왔다.
『그냥 희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멀리서라도 얼굴을 봤으니 만족해.』
『기다리세요, 내려갈게요.』
『내려오지 마. 나 지금 서울을 벗어나려는 중이야.』
『어쨌든 거기 잠깐만 계세요.』
희수는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겉옷을 걸쳤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는 다시 옷매무새와 머릿결을 가다듬었다.

차가 시내를 빠져나올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지판에 의정부와 포천이 적혀 있는 걸로 미루어 차는 북쪽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아서스패스 생각이 나는군.』
그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입을 열었다.
희수는 대답 대신 창 밖을 보았다. 그가 부른 지명 하나가 그녀의 잔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땐 크라이스트처치를 향해 달렸었는데, 오늘은 목적지가 어딘가요?』
『핸들이 이끄는 대로. 물이 있는 곳이면 좋겠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곳처럼.』
그제사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표정이 어두워 보여요.』
『친했던 친구가 죽었어.』
『어머, 안됐네요. 어쩌다가 그런…….』
『교통사고! 엊그제 대관령에 많은 눈이 내렸잖아. 여자랑 스키장에 가다가 개천으로 추락했어.』
『세상에!』
『오늘 장례식을 치렀어. 그 여자와 영혼 결혼식도 겸해서.』
『혹시 친구라는 분이 블루맥주의 최종명 사장 아니에요?』
『알고 있었군.』
『오늘 뉴스를 봤어요. 근데 동선 씨와 친구 사인 줄은 몰랐어요. 그분 정말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약혼 여행길에 그런 변을 당하다니.』
『약혼?』
『뉴스에 약혼녀라고 보도됐었어요.』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야. 그 친구가 지금쯤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코웃음을 칠걸.』
『무슨 뜻이죠?』
『살아 있는 동안 한시도 자유로워 본 적이 없던 친구였지. 죽어서나마 제 갈 길 가려나 했더니 혼령마저 꽁꽁 묶여 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영혼 결혼식이 잘못됐다는 얘긴가요?』
『무의미한 거야. 그 여잔 만난 지 두 번밖에 안 된 여자였어. 가족들은 그를 위로한답시고 법석을 떨었지만 알고 보면 자신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작극에 불과해. 이래 저래 쓴맛만 보고 떠난 그 친구만 불쌍한 거지.』
『…….』
『장례식에서 돌아왔는데 빈 방이 싫더라구.』
그래서 나를 찾아왔단 말일까?
희수는 그의 심중을 읽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가 그 시간에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같은 시간에 자신의 내면에서도 그를 그리워하는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만남과 그리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말 난해한 방정식이었다.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죠, 서울로?』
『…….』
『새벽에 방송이 있어서 그래요.』
『희수야말로 시간의 포로야. 가끔 그 감옥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생각 해본 적 없어?』
『감옥이 아니라 일터예요.』
『오늘 밤에는 어떤 것에도 속박 받지 않고 희수와 함께 있고 싶어.』
『미안해요. 방송은 여러 사람이 약속을 통해 만들어내는 작업이에요.』
『알았어, 그냥 해본 소리야. 몇 시까지 원고를 보내면 되지?』
『방송 삼십 분 전까지는 MC 테이블에 도착해야 해요.』
『원고 쓰는 시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두 시간 남짓?』
『얼마 남지 않았군.』
그가 시계를 보더니 액셀러레이터를 세차게 밟아 댔다.
희수는 불안한 눈으로 창 밖을 보았다. 시간이 없다는데 서울 반대쪽으로 달려가는 그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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