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드림보트-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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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05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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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호수 가족 호텔.
프런트의 구형 팩시밀리를 빌려 힘겹게 원고를 보낸 희수는 당직 아가씨가 타 준 커피로 피로감을 씻어냈다. 가끔씩 시외에 나갈 일이 있을 때 이틀이나 사흘치 원고를 써 놓고 떠난 적은 있었어도 오늘처럼 숨막히게 팩스 신세를 진 것은 처음이었다.
동선은 그녀가 들어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실내의 불은 꺼져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희수의 무릎을 기다리고 있었어.』
희수는 어둠 속을 저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씻고 올게요.』
『괜찮아.』
그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는 오랫동안 머리를 떼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아 보였다.
『불편할 텐데 침대로 옮기세요.』
『여기도 편해. 이렇게 있으니까 썸너 해변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때도 바람소리가 거셌지?』
희수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창 밖의 바람소리를 실감했다. 바람은 웅웅 소리를 내며 호수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럼 무릎을 베세요.』
그녀가 부드럽게 몸을 빼낸 후 그의 옆에 앉았고 그를 뉘었다. 그의 머리가 무릎 위에 얹히자 문득 썸너 해변 별장의 첫 정사가 떠올랐다. 그녀는 은밀하게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 반추하고 있었다. 그때처럼 통렬하진 않았지만 입 안에서 바짝바짝 갈증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어느 새 옷 속을 파고들어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을 텐데?』
그가 갑자기 물어오자 그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채가 그의 턱에 닿았다.
『그래요,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녜요. 하지만 나 자신한테 먼저 묻고 대답을 구하는 게 순서겠죠. 뚜렷한 답이 나오면 그때 가서 여쭤 볼게요.』
『그럼 내가 희수한테 물어 볼께. 우리가 만났던 그 호수와 썸너 별장을 가끔 생각해?』
『…….』
희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가끔이 아니라 하루의 절반 가량을 되새김질하듯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그 곳에 가서 살 자신 있어? 영원히라면 너무 끔찍할 거고 한 1년쯤?』
『같이 가서 살자는 얘긴가요?』
『물론이지. 그 썸너 별장에서 말야.』
『거기서 뭘 하고 살죠?』
『뭘 하고 사느냐보다는 함께 있을 수 있느냐는 뜻이 중요한 거야.』
그의 손이 등허리에서 옆구리로 돌아나오면서 스멀스멀 가슴으로 향했다.
그녀는 하마터면 그의 제의에 허물어질 뻔했다. 더도 덜도 아니고 1년쯤이라면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화법은 늘 난해한 것이어서 정확한 분석이 필요했다. 그의 제의는 간단한 거였지만, 희수에겐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일단 뉴질랜드에 가서 함께 살자고 했을 땐, 결혼이나 동거를 신청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제가 예스라고 대답하면요?』
『당장 떠나고 싶어.』
『아무 준비도 없이 말예요?』
『썸너 별장에 주거시설 갖춰 놓은 거 못 봤어?』
『1년이라는 단서는 뭘 의미하죠?』
『서로를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기간이지.』
『그 1년 후에는 어떻게 되죠?』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고.』
『그러니까 계약동거인 셈이네요?』
『굳이 말을 붙이자면 그렇게 되겠지.』
『처녀 입장에선 참 결정하기 곤란한 제안이에요. 너무 엉뚱하잖아요.』
『조건을 따지자면 끝이 없지. 나는 무조건의 느낌을 원해.』
『무조건이라는 것도 조건의 하나에 속해요. 그 말이 얼마나 많은 조건을 상대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감안하셔야죠.』
『나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게 아냐. 정희수에게 다시 묻겠어. 예스와 노 두 가지 중 하나만 대답해. 나랑 썸너 해변에서 살아 보겠어?』
『저도 말장난하고 있는 거 아녜요. 저를 함께 살고 싶은 파트너로 인정했다면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제의를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방금 제의한 게 진지하고 구체적인 전부야.』
『그렇다면 대답은 노예요.』
『확실해서 좋군. 알겠어, 그럼 없던 걸로 하자고.』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을 동그랗게 찝고 나서 손을 뺐다. 그리고 다시 침묵했다.
그녀도 날이 새도록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그가 다시 묻는다 해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입에서 그런 제안이 튀어나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거였다. 이 희대의 플레이보이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동거를 청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절대 현혹되면 안 돼. 같이 떠나자는 말조차 너의 마음을 떠보려는 미끼인지도 모르니까.』
상미의 충고는 단호했다.
『떠나자는 말은 사실로 느껴졌어. 단지 난 무조건 훌쩍 떠나자는 제의가 부담스러웠어. 하고 있는 일이나 내 주변에 얽힌 인간관계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그래서 거부한 거야.』
『니 말엔 아직도 그 사람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 사람 뭐가 그렇게 맘에 드니? 어떤 사람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러니까 너한테 상의하는 거 아니니.』
『어쨌든 거부했으니 다행이다. 나도 사랑에 실패한 인생이지만 그런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그 사람은 절대 안 돼. 난 내 유일한 친구가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
해우소를 찾아온 첫 손님들을 위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일권이 잠시 후 오므라이스 세 접시를 내왔다.
『점심시간이라 만들어 봤어. 차는 이걸 먹어도 되겠지?』
희수가 접시를 받아 내려놓으면서 눈을 흘겼다.
『커피를 주문했는데 웬 성찬이에요? 이렇게 경영해서 수지가 맞는 건가요?』
『대주주께서 찾아오셨는데 뭔들 못 내오겠어?』
『피이, 다른 손님들한테도 인심 후하기로 소문났던데요, 뭐.』
『응, 개시 손님한테만 특별히 한 끼 특식을 바치고 있어. 나도 먹을 겸.』
희수와 일권이 설전을 벌이는 사이, 상미는 벌써 몇 수저 이상 오므라이스를 떠먹고 있었다.
『꿀맛인데요. 소스 맛이 독특해요.』
『밥을 볶을 때 케첩과 비장의 소스를 첨가하죠. 해우소의 특별 메뉴예요. 참, 모시조개국도 끓여 놨는데.』
일권은 재빨리 주방으로 가 국그릇을 내왔다.
『근데 상미 씨, 뭐가 절대 안 된다는 거죠? 희수가 어떤 잘못을 했길래?』
『글쎄, 그 남자가 희수랑 같이 살자 그랬대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상미가 희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희수는 오히려 차분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해우소에 온 이유도 일권과 그런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일권은 잠자코 밥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우리의 언어습관에는 조심해야 할 것들이 더러 있어요. 절대라든가 영원히라는 말을 곧잘 쓰잖아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쓸 때 듣기 좋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나 영원이라는 것이 그처럼 흔히 널려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인생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변하고 달라지기에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 절대라는 단어 하나에 삶의 가변성을 가둬 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상미가 수저를 놓았다.
『그럼 일권 씬 생각이 다른가요? 희수가 그 남자의 마수에 넘어가길 바라는 거예요?』
『희수가 거부했다잖습니까.』
『얜 정신 못 차리고 있어요. 아직 끝난 게 아니란 말예요.』
『희수가 직접 말해 봐. 뭐가 널 괴롭게 하는지.』
일권이 정색하고 희수를 보았다.
희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 안에 있는 내가 문제지 뭐. 내 문제를 주변사람들에게 벌여 놓고 엄살 피우고 싶진 않아요. 헌데 솔직히 남자의 존재가 뭔지 모르겠어요.』
『하긴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을 어떻게 알겠어.』
『그러면서도 남을 아는 체해 온 지난 날이 얼마나 창피한지 모르겠어요.』
그랬다. 희수의 갈등은 거기 있었다. 어느 날 다가온 남자가 성문을 열고 들어와 스물여섯 해 동안 쌓아 올린 가치관을 약탈해 간 거였다. 그 이후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잊혀질 만하면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또 한 차례 뒤흔들어 놓고 사라지는 남자, 그는 그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희수는 두 친구 앞에서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최근에 겪었던 가슴앓이를 털어놓았다.
『언덕만 넘으면 이대 앞이야. 그 동네로 가서 한잔 할까? 노래를 부르는 곳도 괜찮고.』
희수의 말이 끝나자, 일권이 가게를 정리하며 두 여자에게 말했다.
『노래방은 요 앞에도 많아요. 왜 하필 이대 앞까지.』
『울적할 때는 군중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서는 것도 좋은 치료가 되지. 어떤 사람이든 근심 하나씩은 가슴에 품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거든.』
『경험 철학 같은데요?』
『물론이지.』
『근데 가게를 비워도 되는 건가요?』
희수가 묻자 그는 손을 저었다.
『낮엔 손님이 드무니까 괜찮아. 해가 떨어져야 주당들이 몰려들지.』

노래방을 나왔을 땐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반대로 희수의 표정은 아까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댔던지 목이 따끔따끔해. 그래도 정말 후련한데?』
『후후, 살풀이가 됐나 보지? 2차는 뭘로 할까?』
『형, 빨리 해우소로 가서 문이나 열어요. 손님들이 왔다가 문 닫은 줄 알고 발 끊으면 어쩌려구.』
『지금 그깟 손님이 문제야? 우리 대주주님의 심기가 불편하시다는데.』
『이제 됐어요. 대주주 명령이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내요.』
『어디로 갈 거야?』
『여기서 택시를 타고 갈게요. 며칠 동안 잠을 설쳤더니 찌뿌둥해서…….』
희수가 쌩하니 택시를 잡아 타고 떠난 자리에 남은 일권과 상미가 눈을 마주쳤다.
『상미 씨는?』
『차를 해우소 뒷골목에 세워 놓았어요. 어차피 해우소로 가실 거 아닌가요?』
『그렇기 한데…… 시간이 애매해서.』
일권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갸웃했다.
『전 상관없어요. 좋은 데 있으면 같이 가요.』
그가 길 건너편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상미가 고개를 돌렸다. 네거리 모퉁이에 미라보 호텔이 보였다.
상미의 입 언저리에 미소가 감돌았다.
호텔이라니!
여태껏 숱한 정사를 치렀지만 그가 직접 리드해서 끌고간 적은 없었다.
『호텔은 싱겁잖아요. 저쪽으로 내려가요.』
상미는 그의 팔짱을 끼고 이대역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한 동양인 사내가 노천 카페에 앉아 있는데 금발의 미녀가 다가와 말을 건다. 동양인은 여자의 미모에 넋이 나가 커피가 식는 것도 잊어버린다.
미녀가 능란한 화술로 그의 얼을 빼놓는다.
동양인 사내의 시선은 그녀의 육감적인 입술과 반쯤 노출된 젖가슴, 포개어진 각선미를 번갈아 훑는다.
미녀가 사내의 욕망을 간파하고 야릇한 미소로 유혹한다.
그녀가 일어서자, 동양인이 뒤를 따른다.
카페에서 한 블록 들어가니 음침한 슬럼가가 펼쳐진다. 미녀가 골목의 빈터로 걸어가서 굳게 닫힌 창고의 철문에 등을 기댄다.
동양인은 조심스럽게 사위를 살피고 나서 흥정을 건다. 가격이 얼마냐고 묻자 미녀가 고개를 젓는다. 자기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저 당신의 매력에 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의아해하자 미녀가 그의 목에 매달려 키스 세례를 퍼붓는다. 그녀의 열정적인 공세에 그도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둘은 입맞춤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거추장스런 하의를 벗기 시작한다. 미녀의 밴드 스타킹과 그물무늬 팬티가 발목에 걸린다. 그가 격하게 미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진입을 시도하자 그녀의 금발이 출렁거린다. 그의 동작 하나 하나에 미녀의 신음이 박자를 맞춘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동양 남자의 대시는 다부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동작이 빨라지고 반사적으로 미녀의 숨소리도 절정으로 치닫는다.
창고의 육중한 철문을 짚고 있던 사내의 두 손이 활짝 펼쳐지고 힘줄이 꿈틀거린다. 사내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미녀의 손가락도 동시에 경련을 일으킨다.
이내 미녀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질펀한 노천 섹스를 끝내고 여자가 주섬주섬 속옷과 스타킹을 걸쳐 입는다. 그리고 사내에게 수고했다는 손짓을 보여 준 뒤 길 건너편을 가리킨다.
미녀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어둠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어두운 담장 위에 사람의 얼굴이 숨어 있었다. 한결같이 쭈글쭈글한 영감들의 얼굴이었다.
동양인은 사색이 되어 하의의 자크를 올린다.
미녀는 대수롭지 않게 영감들 쪽으로 걸어가 손을 내민다. 그러자 영감들이 손에 쥐고 있던 달러를 내민다. 미녀는 능숙한 솜씨로 돈을 낚아채어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간다.

영화는 프롤로그부터 그렇게 선정적이었다.
일권은 영화의 제목도 알지 못했다. 상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녀는 비디오방이라는 곳으로 그를 이끌고 왔을 뿐이었다.
지하건물의 비디오방은 노래방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일권은 처음이었다.
『노래방을 갔으니 다음은 비디오방이 제격일 것 같아요. 나도 말로만 들었지, 와 본 적은 없어요.』
『영화를 보려면 차라리 극장이 낫지 않아요?』
『극장하고는 또 분위기가 달라요. 극장은 일방적으로 관객이 쫓아가야 하지만 여기선 관객이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거든요.』
눈치 빠르게 생겨먹은 주인은 그들을 구석진 끝방으로 안내했다. 상미는 프로그램 선택권마저 주인에게 일임했다.
이렇게 해서 둘은 관음증을 소재로 한 명작 비디오를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타이틀이 소개될 때 상미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그거 한 지도 오래 됐네요?』
그거 한 지도?
섹스를 지칭하는 불완전대명사겠지만 교양 있는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일권 씨가 호텔을 가리켰을 때 깜짝 놀랐어요. 한 번도 먼저 얘기한 적 없잖아요?』
『…….』
『그 동안 내 몸 많이 생각했었나요?』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도 야하기 짝이 없었다.
일권은 상미가 영화 속의 금발미녀를 흉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러는 사이 상미가 짙은 향기로 밀착해 왔다. 모니터에서는 또 한 차례 화끈한 정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화 속의 금발미녀처럼 상미도 화끈하게 도발해 왔다.
일권은 마음이 급해졌다. 시각과 청각, 촉각과 후각을 조여오는 한 평 공간 욕망의 방에서 거리낌없이 폭발하고 싶었다. 그러나 뇌관이 작동하지 않았다. 상미가 아무리 공을 들여도 수그러들기만 했다.
그녀의 손바닥은 진땀으로 끈적거렸다. 그는 민망함을 페팅으로 위장했다. 그녀를 자극하다 보면 그놈이 어느 샌가 발끈 일어설지도 모르는 거였다.
그의 역공세에 상미의 몸이 경직됐다.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는 하복부의 교란을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빨리!』
그녀가 하체를 연신 비틀며 애원했다. 십자가를 움켜쥐고 기도하듯 그녀는 그의 심벌에 매달려 절규하는 거였다.
그는 울고 싶었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그놈은 주인을 철저히 배반하고 있었다.
『미안해.』
그는 그녀의 손을 밀쳐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그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그는 참혹한 심정으로 그녀의 심벌을 핥기 시작했다.

W-net의 작가실.
조재봉 PD는 희수와 독대한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수첩을 열었다. 수첩의 뒷장 비닐 갈피에서 한 묶음의 서류를 끄집어내며 그는 무척이나 뜸을 들였다.
『저번에 희수 씨가 관심을 보였던 아이템 있죠? 획기적인 자료가 보강됐는데 집필을 맡아 보시겠습니까?』
『어떤 자료인데요?』
『약속을 먼저 해주십시오. 이 자료는 우리 팀들도 맘대로 열람할 수 없는 대외비거든요.』
『카사노바 사건 말인가요?』
희수는 딴청을 부리며 조재봉의 흥정을 뿌리쳤다.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용건을 짐작하고 있었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라디오 프로그램만 놔두고 TV쪽 일은 가급적 맡지 않았다. 기획부터 제작 회의, 구성안과 편집 대본, 녹음 대본을 작성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나 덩치 큰 드라마를 소화해내기엔 너무 마음이 심란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조 PD의 전화에는 자력 같은 게 있었다. 바쁘다고 누누이 핑계를 댔는데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의 근성이 달갑지는 않았으나 그가 다루는 소재에는 관심이 많았다.
『송창식 검사의 방에 갔다가 이걸 빼냈어요. 뭔 줄 아세요? 카사노바를 다뤘던 사건기록이에요. 여기에 백여 명의 명단이 나와 있지요. 그 작자와 놀아난 여자들 말예요.』
『대단하군요, 봐도 될까요?』
『보세요. 하지만 그 서류를 보는 순간 우리는 한 팀이 되는 겁니다!』
희수는 피식 웃어 보이고 나서 그가 내민 사건기록을 들춰보았다. 천천히 정독을 하던 희수가 어느 대목에서 갸우뚱했다.
『피해자가 없는 사건이었군요.』
『그래요. 사건의 발단이 황당하죠. 그 카사노바가 화곡동 우장산에서 데이트를 즐기다 강도를 당했는데 그 패거리들이 카사노바의 약점을 잡고 돈을 요구했다는 거예요. 돈을 건네받는 자리에서 강도들이 붙잡혔고, 심문과정에서 카사노바의 반윤리적인 행각이 포착된 겁니다. 참 재수 더럽게 없는 친구죠. 거기서 강도를 당하지만 않았어도 화려한 엽색행각을 계속 즐겼을 테고 세상 사람들도 전혀 몰랐을 거 아닙니까.』
『그렇군요. 엉뚱한 데서 날아온 돌멩이를 맞은 셈이네요.』
그녀는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서류에는 이동선이라는 이름 석자가 명료하게 박혀 있었다.
이동선의 파렴치한 죄상에 치를 떨면서도 그녀는 은연중에 자꾸 그의 편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서류에는 검사와 이동선의 심문내용까지 담겨져 있었다. 검사의 질문도 추상 같았지만 이동선의 반론도 제 나름으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주장을 보면, 역시 문제는 그와 놀아난 여자들의 도덕관에 있는 듯싶기도 했다.
『정말 그 사람을 탓할 수만도 없겠네요. 손뼉도 짝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고 그 사람을 단죄하려면 공범인 여자들도 함께 죄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무혐의로 내보낸 거지요. 사실 이동선이 카사노바로 욕을 먹긴 하지만, 이 시대 남성들 그 어느 누구도 욕할 자격이 없을 거예요. 여기저기 널린 게 성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프로그램도 흑백론으로 가서는 안 돼요. 냉정하게 요즘 여성들의 성의식과 가치관을 조명해야 하는 겁니다. 뒤쪽을 보세요. 여자들의 연락처가 명시되어 있죠? 시간 나는 대로 그 여자들을 만나 보는 게 어때요? 우리 같이 험한 남자보다 희수 씨가 인터뷰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아무래도 그 여자들의 경계심도 덜할 테고 하니까요.』
『그 여자들이 만나 줄까요?』
『그건 희수 씨 수완에 달렸죠, 재미있는 일 아닌가요? 방송작가는 사람을 많이 만나 두는 게 재산입니다.』
『언제까지 시간을 주실 건가요?』
『희수 씨 스케줄을 존중하겠습니다. 물론 빠르면 좋고요. 연말특집으로 편성할 수도 있으니까.』
『해보겠어요.』
『고맙습니다. 출장비 바로 끊어 드릴 테니까 경리과에서 수령해 가십시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저를 호출하시고요..』
조재봉이 자리로 돌아가 뭔가를 서둘러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희수는 여자들의 명단을 방송 수첩에 적고 있었다.
여자들의 직업은 천태만상이었다. 여대생의 비율도 상당했지만 전문직 여성들이 압도적이었다. 희수는 그 여자들의 이름을 적으면서 자꾸 소름이 끼쳐 손바닥을 비볐다.
나와 함께 썸너에서 살 수 있겠어?
동선의 속삭임이 귓전에 스멀스멀 맴돌았다.
이 여자들한테도 그런 말을 했을까?
여자들의 이름은 모두 126명이었다. 그토록 많은 여성과 상대한 이력도 화려했지만, 그 여자들의 신원을 용의주도하게 꿰어찬 검찰의 수사력도 알아 줄 만했다.
126번째 여자의 이름을 적고 난 후 희수는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검찰의 수사가 계속됐다면 자신의 이름도 그 뒤칸에 적혀 있었으리라. 그럼 127번? 아니면 130번대?
그녀는 부질없이 자신의 번호를 매겨 보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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