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고독사랑3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519회 작성일 17-02-12 11:26

본문

"나의 신분은 노예(奴隸)였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노예였으니까."
백타복은 동전 두푼에 한 말들이의 통에 가득 채워주는 싸구려지만 독하기 이를 데 없는 죽엽청(竹葉淸)을 무려 다섯 동이나 사서 허름한 마차에 실었다.
그는 죽엽청 한동이를 자신의 옆 자리에 비끌어 멘 후, 바가지로 듬뿍 퍼올린후 입으로 들이켰다.
"크으! 화끈하군."
백타복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그의 눈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교설(嬌雪) 아씨....."
술을 두 바가지째 들이키는 그의 동공은 점차 풀어져 갔다.
"엎드린 낙타(駝伏)라고 태어나면서 붙여진 이름 앞에서 처음 본 교설 아씨의 모습은 선녀(仙女)....아니, 성모(聖母)님이셨어."
아련한 추억의 편린(片鱗)이 그의 뇌리를 점차 과거의 늪속으로 밀어넣었다.

타복(駝伏)이었다. 선천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꼽추인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그의 나이 스물일곱에 이르도록 그는 백씨세가의 마굿간을 벗어나보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친구이자 애인(愛人)은 오직 말(馬)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돌보던 말이 온전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그에게 오는 말은 병들거나 부상을 당해 죽어가는 폐마(閉馬)들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말들을 보살피다가 죽으면 불살라 화장시키는 일이었는데, 타복의 아버지도 평생을 했던 가업(?)을 타복이 대(代)를 이은 것이었다.
그의 부친이 있을 때엔 말들은 거의 죽었다. 그런데 타복이 그 일을 맡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처음엔 백 마리의 말 중 한 두 마리만 살아났으나, 십 년이 지난 지금엔 열 마리 중 다섯 마리 정도는 부상에서 회복되어 건간한 몸으로 그의 곁을 떠나갔다.
전투마(戰鬪馬) 한 마리의 값이 은자 칠백냥(七百兩)을 호가했으니, 타복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정식으로 가로(家奴)가 되길 바랬다.
가로가 된다는 것은 성씨를 하사받고, 세가의 하녀(下女)중 하나와 결혼도 할 수 있게 되는 막대한 특권(?)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꼽추에다가 난장이에 가까운 타복을 누구도 신경 써주는 이가 없었다.
타복의 인생에 반전(反轉)이 일어난 것은 가을(秋) 어느 날의 따사로운 오후였다.
마굿간의 햇빛이 비추는 양지에서 볏짚을 깔고 졸고 있던 그는 돌연한 발길질에 기겁을 하며 깼다.
복부에 맞은지라 내장이 터질 정도로 아팠지만 그의 본능은 아픔의 발설보다는 머리를 땅바닥에 무조건 조아리게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타복이 이제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진주가 구르는 듯한 영롱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의 음성이 들린 것은.....
"당신이 타복인가요? 죽어가는 말이라도 살려낸다는?"
자신도 모르게 타복은 목소리의 임자에게 얼핏 고개를 들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눈부신 태양의 빛을 반사시키며 서 있는 이십대 초반의 백의미녀(白衣美女)를 보는 타복의 심장은 멎어버린 듯 했다.
그가 넋을 놓고 백의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 돌연히 날아와 뱃가죽을 차는 우악스런 발길질은 그의 진짜 그의 심장이 파열되는 것만 같은 충격을 주었다.
"이 비천한 놈이 감히 어디라고 대가리를 쳐들어?"
노기띤 호위무사의 호통엔 살기마저 서려 있었다.
그 때였다. 백의미녀가 안색을 찌푸리며 다가와 오히려 호위무사를 나무란 것은.....
"철삼(鐵三)! 이게 무슨 짓이지요? 무공을 익혔다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때리다니!"
그녀의 교갈에 철삼이라 불린 위맹한 인상의 호위무사는 움찔하더니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요. 교설 아씨. 하지만 이놈은 하인보다도 비천한 노예이온데 감히 상전을 직시한다는 것은....."
"그만 두어요. 지금 나는 타복에게 부탁을 하러온 것이에요. 그대는 이만 물러가 있어요."
철삼이라는 호위무사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는 그녀의 한 마디에 돌아가고 말았다.
타복은 감격하고 말았다.
이제껏 그 어느 누가 자신을 위해주었던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죽은 부모 이외엔 어떤 사람도 그를 욕하고 때릴지언정 한 마디의 위로조차 던져준 이는 전무(全無)했던 것이다.
"아프지 않나요? 미안하군요. 괜히 나 때문에...."
"별, 별말씀입쇼. 이놈의 뱃가죽은 상당히 단련되어 있으니 그런 정도로 차여서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요."
타복은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백의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다행이군요. 사실 여기온 이유는 내 애마(愛馬)인 설아(雪兒)가 서역(西域)의 천리준마인 대완구(大脘驅)와의 사이에서 망아지를 낳았는데, 설아와 새끼가 모두 위험하여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가망이 없다던데 타복은 살려줄 수 있을 것같아 데리고 왔어요."
그녀가 데리고온 에미 말은 주인을 닮아 눈처럼 새하얀 털빛을 지닌 천하의 명마(名馬)인 백설총(白雪聰)이었다.
초산(初産)의 산고(産苦)에 극심하게 시달린 듯 늘어져 있는 백설총의 아래엔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역시 새하얗기 이를 데 없는 망아지가 보였다.
"걱정마십시오. 아씨. 반드시 살려내 보이겠습니다."
타복은 굳은 결의를 온몸으로 보였다.

"헤헷! 그놈들은 한달만에 다시 일어나 씩씩하게 뛰어다녔지. 그놈들을 보며 기뻐하던 아씨의 모습이란...."
추억의 상념에 젖은 백타복의 얼굴엔 발그레한 홍조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백씨 성을 하사받은 데다가 노예의 신분에서 면천(免賤)을 받아 정착금까지 하사하신 선녀같은 분인데 모른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암. 그렇구 말구!"
백타복은 마차를 몰고 있는 고삐를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형부(刑府)의 감옥 앞에 마차를 세운 백타복은 독한 화주(火酒)가 담긴 술동이를 안고 내려섰다.
"이놈아!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냐?"
감옥을 지키고 있던 옥졸이 대갈을 터뜨리자 백타복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헤헤! 나리들께서 수고가 많으실 것 같아 이렇게……"
"타복, 지금은 근무시간이라 곤란한데,"
옥졸의 말은 거절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그의 손은 이미 술동이를 향하고 있었다.
"헤헤! 제가 잠시 파수를 볼 테니 안에 계신 분들과 한 잔 드십시오."
옥졸은 전날도 여러 번 백타복으로부터 술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흐흐. 그럼 수고해 주게나."
옥졸은 술독을 안고 안으로 사라졌다.
"……!"
백타복은 마른 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그는 태연히 뇌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
"……!"
두 모녀는 불안한 눈길로 백타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백타복은 다짜고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아씨! 소인 놈을 모르시겠읍니까?"
그의 돌연한 행동에 중년미부는 흠칫하며 되물었다.
"그대는 혹시…타복?"
백타복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자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읍니다! 소인 놈이 바로 그 백타복입니다!"
이어, 그는 재빨리 옥문을 열었다.
"아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말은 나중에 하시고 어서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다급히 말한 백타복은 두 모녀를 부축하며 옥문을 벗어났다.

두두두두두!
"이럇! 이놈들아 빨리 달려라!"
형부를 벗어난 마차는 미친 듯이 질주해 갔다.

"……!"
백옥상은 모친의 손을 잡은 채 서 있었다. 그의 동공은 무심함으로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그때, 뿌연 먼지와 함께 달려오는 마차가 모자의 눈가로 들어왔다.
"어서 타!"
백타복의 다급한 말에 마의소부는 백옥상을 안아 올리고 마차 위로 올랐다.
"이럇!"
백타복은 추호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형부는 이른 새벽부터 벌컥 뒤집혀졌다. 아니, 개봉부 전체가 진동했다.
그리고, 개봉부의 일만 이천에 달하는 관군에게 지상 명령이 떨어졌다.

---잡아라! 무조건 그 백정놈과 백씨(白氏) 성을 가진 죄수를 잡지 못할 시에는 네놈들의 목을 치리라!

해일처럼 조양 속으로 밀려가는 군병들의 행렬……
백타복이란 존재는 일시간에 개봉부의 모든 인물들에게 회자되는 유명인물이 되었다.
죽음에의 도주는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타복, 마차를 세우게!"
미친 듯이 질주해 가던 마차는 맑은 옥음이 들리자 그 자리에 정지했다.
푸룩! 푸루룩!
벌써 세 시진이나 달린 쌍마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씨, 지금 형부에서는 모든 것을 알고 우리를 뒤쫓고 있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가야……"
백타복의 다급한 태도와는 달리 백씨부인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갈 수는 없는 일이네. 대비암이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대비암이라면 동쪽으로 일 리 정도만 가면 됩니다만, 대비암은 왜?"
"마차를 대비암으로 돌리게! 그곳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네."
"알겠습니다. 아씨!"
백타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돌렸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돌연, 은은히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진동해 오는 것이 아닌가?
"관군이 쫓아오는군!"
백타복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허나, 이미 기력이 탈진되어 있던 말들은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지면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타복! 마차를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세."
백씨부인은 뒤를 돌아보며 초조히 말했다.
백타복은 그녀의 말에 마차를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비암까지는 불과 일리이니 곧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일행은 모두 길가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저쪽이다!"
"죽일 놈들! 제놈들이 도망가 보았자지."
돌연, 살기띤 대갈성이 숲 속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벌써!"
백타복은 전신을 짓눌러오는 공포감에 신형을 부르르 떨었으나 이내 이를 악물며 앞장섰다.
"어서 갑시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잡으며 외쳤다.
그러나, 어린 소년과 세 명의 아녀자는 거친 숲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숲 길은 갈수록 울창하고 험악해지고 있었다.
백타복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대로 간다면 모조리 잡히고 만다.'
그들 모종의 결심을 굳힌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모두는 잡히고 말 것입니다."
백타복은 백씨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소인이 관군을 유인해 갈 터이니 이곳에 숨어 있다가 잠시 후 출발하도록 하십시오!"
"타복……"
백씨부인은 백타복의 말뜻을 알 수 있었으나 그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백타복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
백옥상의 무심한 동공은 잔잔한 파랑(波浪)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린 그이지만 부친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아! 혹여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너는 이 분들을 모시고 대비암으로 가도록 해라. 내말 알겠지?"
백옥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타복은 잠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신형을 돌렸다.
"여보!"
소부의 처연한 부름에 백타복은 신형을 멈칫거렸으나 이내 이를 악물며 좌측 수림으로 달려갔다.
일각이나 흘렀을까?
"백타복이 나타났다!"
"잡아랏!"
숲 속은 날카로운 병장기 끌리는 소리와 요란한 소성으로 진동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일 뿐이었다.
장내는 이내 죽음의 정적 속에 파묻히고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백타복은 오래지 않아 잡힐 것이다. 그리고 종내에는 죄인을 탈출시켰다는 죄목으로 무지한 고문 끝에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임을 여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옥상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대비암으로 가는 길은 제가 알고 있으니 따라 오십시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최초의 백옥상의 말이었다.
'이 아이는……!'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백옥상의 말이었으나 백씨부인은 그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짙은 허무(虛無)와 한(恨)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백옥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모친을 부축하며 앞서갔다.

숲 길을 빠져나오자 조그만 소로 저 너머로 하나의 전각이 보였다. 안개 속에 파묻혀 신비한 기경을 연출시키는 건물은 대비암의 전경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들이 빠져나온 뒷길로 무수한 소성이 닥쳐드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추적자들이 바로 지척까지 짓쳐들고 있음을……
"벌써?"
소부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이미 참살당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백옥상을 주시했다.
"상아야. 저 분들을 모시고 빨리 가거라. 나는 네 아버님의 뒤를 따르겠다!"
초연함마저 어려 있는 소부의 말에 백옥상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안 돼요! 어머니!"
순간, 백옥상의 뺨으로 화끈한 격타음이 울렸다.
"어머니……"
백옥상은 처연한 신색으로 마의소부를 올려다 보았다.
마의소부는 싸늘한 표정으로 백옥상을 직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너의 부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분들은 대비암으로 모시라고 했다. 비록, 인간대접도 못 받던 분이시나 이 어미는 그 분의 아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처절한 혈한마저 깃들어 있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의 편린들……
인간백정의 아내로, 금수만도 못한 삶을 영위해 온 그녀이나 지금의 여인은 성스럽기조차 했다. 그리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서려 있었다.
"어머니……"
백옥상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제껏 한없이 다정하고 순박했던 모친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백옥상은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제 아들을 부탁드립니다."
마의소부는 백씨부인을 돌아보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어,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이긴 했으나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잘못된 세대의 잘못된 인간군(人間群)끼리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틀어진 운명을 안게 되는 것이었으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