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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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310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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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2권 18장 대하군방원(大河軍芳院)



쏴아아아!

와류는 물거품을 내며 소용돌이쳤다.

양가죽으로 만들어진 배는 이 지역의 사람들이 고안한 특수한 뗏목이다. 아무리 튼튼한 배도 이 곳의 급류와 와류에는 뒤집어지고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가죽을 통째로 벗겨 기름에 절인 다음, 목과 사지를 묶은 연후 공기를 불어넣으면 부력(浮力)을 지니게 된다. 그 양가죽을 연결하여 뗏목을 만들면 아무리 험한 와류나 급류에도 끄덕없는 배가 되는 것이다.

양가죽 뗏목에는 두 구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흐흐흑 !"

강아는 오열을 그칠 줄 몰랐다. 그는 하룻 사이에 누나와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었다. 포대숭도 결국은 죽었다. 혈왕에게 두 번이나 얻어맞아 늑골과 척추를 다친 데다 후왕의 악랄한 점혈에 제압당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다행이라면 죽기 직전 자연적으로 혈도가 풀려 후사(後事)를 당부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포대숭은 강아에게 단로에 남아 있는 약이 아직 있는지를 제일 먼저 물었다. 다행인 것은 후왕의 일 장에 산산조각이 났으나 고약 형태의 약이 아직 조금 밑바닥에 있었다.

포대숭은 바구니에 캐어온 약초와 그것을 이기라고 시켰다. 강아는 묵묵히 슬픔을 참고 약을 제조했다. 십여 개의 단약이 만들어졌다.

포대숭은 그것을 백룡에게 복용시켰다. 환혼신단(還魂神丹)이라는 약으로 그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인 기단이었다.

환혼신단의 약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을 복용한 지 하룻만에 백룡의 마비되었던 기억력이 회복된 것이었다. 포대숭은 백룡이 기억을 되찾자 강아를 방에서 나가게 한 후 그에게 유언을 남겼다.

포대숭이 백룡에게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강아는 알지 못했다.

다만 강아는 이를 갈고 있었다. 소박하고 행복했던 생활이 어느날 갑자기 무참하게 깨어진 것이다. 강아는 눈앞의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이럴 수는 !'

작은 주먹을 힘껏 쥐어보고 허공을 향해 휘둘러 보지만 그런다고 이미 죽어버린 누나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강아는 또 한번 까무러쳐야 했다. 누나를 잃은 그는 이번에는 다시 할아버지마저 잃어야 했던 것이다.

수장(水葬)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포대숭의 유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콰르릉 !

소용돌이 속에서 와류는 으르렁거리는 폭음을 토했다. 백룡은 먼저 포대숭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無心) 그 자체였다.

첨벙.

물방울이 퉁겨지며 포대숭의 시신은 급류 속으로 흔적없이 빨려 들어갔다. 허무한 게 사람의 인생이련가? 와류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사람의 일생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백룡은 포대봉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곱게 새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그 옷은 아끼고 아꼈던 초록빛의 비단옷으로서 언제고 그녀는 그 옷을 입고 백룡에게 보여 주려고 단단히 벼르던 옷이었다.

"안 돼 !"

강아가 울부짖으며 매달렸으나 부질없는 울음은 파도의 굉음 속으로 묻혀지고 말았다. 백룡의 손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시신도 사라지고 말았다.

"으허허엉 !"

강아는 목놓아 울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마도 개구장이 강아가 일평생 동안 흘린 눈물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양의 눈물이리라!

"그만해라. 강아."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강아의 어깨를 백룡의 손길이 가볍게 두드렸다.

"백룡 형 !"

강아는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드넓은 세상천지에는 오직 그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백룡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전의 멍청한 백룡이 아니었다. 그는 강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강아 이제부터 나와 함께 있자. 인간이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는 법이다. 봉아도 할아버지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람이었다. 다만 조금 일찍 갔을 뿐이다."

백룡의 눈에는 뽀얀 이슬이 어렸다.

그는 까마득히 손바닥 만하게 보이는 병서보검협의 틈바구니를 올려다 보았다. 한 마리의 비응(飛應)이 빙글빙글 돌며 까만 점으로 화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호아산(虎牙山).

범의 이빨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호아산은 양자강(楊子江)을 끼고 있었다. 무협(巫峽)을 급류와 와류로 질타하며 빠져나온 장강의 물은 호아산을 지나면서 서서히 도도한 대강의 흐름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중원에서도 대부분이 평원지대인 호남북(湖南北)의 일대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양자강은 중원의 젖줄기라고 할 수 있었다.

강상에 반쯤 난간을 걸치고 있어 주루(酒樓)의 창문으로 양자강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강상을 오가는 선박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주루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었다. 이곳에는 장삿군 차림의 사람들과 행려객, 또는 풍경을 감상하려고 나온 문사들이 항상 자리를 메우다시피 했다.

창가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백색 마의(麻衣)를 입은 청년과 12, 3세쯤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들은 유난히 눈길을 끄는 모습이었다. 청년의 피부는 너무도 희어 입고 있는 백색 옷이 오히려 누렇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소년은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둥근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체격은 무척 우람했다. 그러나 소년의 눈에는 짙은 그늘과 함께 비통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잠을 통 못잔 듯 충혈기가 있기도 했다.

"강아."

청년이 소년을 불렀다. 그러나 소년은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멍하니 강상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점이 없었다.

백룡은 술잔에 죽엽청을 따랐다. 그는 다시 불렀다.

"강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백룡은 술잔을 들었다.

"한 번 마셔보지 않겠느냐?"

그 말에 비로소 강아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초점 없는 눈이 멍하니 술잔을 바라보았다. 술잔 속에는 죽엽청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백룡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대장부에게 눈물은 한 번 흘리면 족하고 비통은 짧을수록 좋다."

술잔을 내려다 보고 있던 강아는 덥석 술잔을 잡았다. 한 번도 술이라고는 입에 댄 적도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비극을 겪은 이후 그의 가슴은 여지없이 찢어졌고 술 아니라 독약이라도 슬픔을 잊을 수 있다면 마시고 싶었다. 강아는 단숨에 술을 삼켰다.

"캑!"

너무 성급했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는 듯이 지지는 바람에 그는 마시자마자 토해내야만 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백룡은 담담히 말했다.

"인생은 그 술맛처럼 독한 것이다. 강아. 이제부터 너는 그보다 더 독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얼핏 들으면 비정한 말 같았으나 강아는 알 수 있었다. 백룡의 말 속에는 따뜻한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백룡 형! 나를 . 강아를 정말 버리지 않을 거지?"

느닷없이 나온 말이었으나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를 백룡은 알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어차피 나도 천하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 몸이다. 너와 더불어 넓은 천하를 주유하마."

"야아!"

강아는 자신도 모르게 환호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 비통에 잠겨 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린애는 역시 어린애였다.

강아는 한 번도 세상 구경을 해본 적이 없었다. 비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나 천하를 주유한다는 말에 기분이 들뜨는 것같았다.

백룡은 가볍게 한숨을 쉰 후 시선을 장강으로 돌렸다. 병서보검협을 지난 강물은 언제 그리도 거친 파도를 내었느냐 싶게 잔잔하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마등처럼 여러 가지 사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구한 운명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의 지난 날은 백 년을 산 것보다 더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아아 ."

그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운(時運)을 놓쳤고 . 하늘도 등을 돌렸는데 대체 어찌하란 말이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들다가 입가에 쓴 웃음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술(酒).

과거 그는 한시도 술을 입에서 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술을 다시 대한 것이 마치 수십 년 만이나 되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서서히 죽엽청을 비운 다음 그는 비로소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장삿군들을 비롯하여 여행객들, 또는 문사 차림의 손님들은 환담을 나누며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그같은 광경은 매우 평화롭게 보였다. 백룡의 눈가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세상은 변했다. 아무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저들은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평화만 깨어지지 않으면 누가 주인이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연거푸 독한 죽엽청을 석 잔 들이켰다.

한편, 강아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주루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같이 많은 사람들을 그는 처음 보았다. 그가 본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병서보검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촌락에 사는 소박한 사람들뿐이었다.

슬픔을 잊고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둘러보던 강아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도둑!'

장삿군 차림의 세 중년인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 사이를 막 지나치는 사람이 있었다. 안색이 음침하게 생긴 인물로 마른 체격에 콧날이 굽어져 있는 위인이었다.

그는 상인들을 지나치면서 빠르게 그들의 주머니를 슬쩍 훔쳐낸 것이었다. 워낙 빠르고 민첩하게 훔쳤으므로 상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같았다.

"백룡 형 ."

강아는 슬며시 불렀다. 백룡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서요!"

막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중년 사내는 움찔했다.

"나 말이냐, 꼬마야?"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두 사람에게 쏠렸다. 강아가 워낙 큰 소리로 외쳤기 때문이었다. 중년인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내 놔요."

강아는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뭘 말이냐?"

중년인의 얼굴에는 더욱 당황기가 스쳤다. 강아는 한 손을 허리에 척 걸친 채 훈계하듯 말했다.

"헤헷, 못써요. 어른이 그런 짓을 하면."

중년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난 바쁘다."

"헤헤 . 좋은 말로 할 때 내놓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때였다. 상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장사 밑천이 든 주머니가 모두 없어진 것을 알았다.

"도 도둑이야!"

장내는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몸을 일으켰으며 일제히 계단에 있는 중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비켜라! 꼬마!"

중년인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러나 강아가 어디 보통 아이인가?

"흥! 물건을 내놓고 가도 가야죠."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계단을 아예 막아 버렸다.

"이런 죽일 놈!"

휘익!

중년인은 손바닥을 칼날처럼 세워 강아의 목줄기를 후려쳤다.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이라는 악랄한 초식이었다. 그 공격에 맞으면 강아는 목이 부러지는 참변을 면치 못할 터였다.

처음에는 의협심(?)이 났으나 쇳소리를 내며 중년인이 후려치자 강아는 겁이 덜컥 났다. 어떻게 막아보려 했으나 눈앞이 번쩍할 뿐 대항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엇 저런!"

손님들은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참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모두 기겁을 했다. 눈을 가리는 자도 있었다. 이때였다. 빳빳한 손바닥이 목줄기를 꺾으려는 순간 강아는 한 가닥 힘이 자신의 손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큭!"

그 순간 의외로 비명을 지른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다. 중년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허를 찔려 소년의 주먹에 명치를 정확히 얻어맞은 것이다. 비록 위력은 없었으나 그 부분은 마침 그가 공격을 하느라 진기가 비어 있어 충격이 대단했다.

중년인은 약간의 무공을 알고 있는 자로 녹림의 도적이었다. 그런데 한낱 어린아이에게 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 이 이놈이!"

그는 이를 갈며 소매 속에서 끌이 두 갈래 갈라진 괴형비수를 꺼내더니 그대로 휘둘렀다.

"뒈져랏!"

잔랄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정광이 번뜩이며 칼은 강아의 목구멍을 찔러갔다.

'아이쿠! 이젠 꼼짝없이 죽었다.'

강아는 마지막으로 백룡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룡은 그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머리 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하하하! 나쁜 놈! 너같은 놈은 창 밖으로 날려 버리겠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강아는 큰 소리로 웃으며 외쳤다. 그 순간 기이한 힘이 팔목을 받치더니 슈욱 뻗었다.

"우악!"

중년인은 거대한 암경이 소년의 손이 닿기도 전에 자신의 비수를 날려버리고 가슴에 묵직한 힘이 적중하는 것을 느꼈다. 때를 같이하여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는 붕 뜨더니 그대로 창문을 부수며 날아갔다.

이층의 창문에서 떨어졌으니 그는 죽거나 아니면 병신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때 바닥에 세 개의 주머니가 떨어졌다. 중년인의 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헤헤헤 ! 감히 이 포대강 나리를 몰라보다니"

강아는 마치 자신이 벌인 일이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때 상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소 소 영웅! 정말 고맙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하더니 각자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 강아의 발 아래 놓았다.

"이것은 사례조로 "

강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상인들은 다시 한 번 절을 하더니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여기저기를 다니는 장삿군이므로 강아가 무림인이라고 오해해 버린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비록 은혜를 베풀기는 했어도 그로 인해 교분을 맺으면 언젠가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어쨌거나 강아는 기분이 좋았다. 마치 진짜 협객이라도 된 듯이 어깨를 들먹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헷 ."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백룡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만 고개를 지나치게 치켜들고 걷다가 의자에 다리가 걸리고 말았다.

"아이쿠!"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는 볼썽 사납게 자빠지고 말았다. 백룡은 그를 향해 술잔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영웅의 모습은 말씀이 아니었다. 강아는 다리가 너무나 아파 일어설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어왔다.

"아이구 다리야 "

주루 안의 손님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강아는 역시 웃고 있는 백룡이 얄미웠다. 그는 탁자를 짚고 일어서며 볼멘 소리로 말했다.

"술 한 잔 더 줘요!"

백룡은 빙긋 웃었다.

"강아, 너 그러다 주정뱅이가 되겠구나."

"흥! 흥! 무슨 참견이에요!"

강아는 술병을 빼앗다시피하며 병째로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통째로 마시는 그 모습에 중인들은 입을 딱 벌렸다.

'우 . 저 독한 죽엽청을 물 마시듯 하다니 !'

그때, 꽈당!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아가 술병을 입에 문 채 뒤로 벌렁 쓰러진 것이었다.

"쯧, 그렇다니깐."

백룡은 혀를 차면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강아를 등에 업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모르지. 강아. 푹 자두는 것이 좋을 거다.'

강가에 지는 석양은 피처럼 붉었다. 노을이 장강에 섬뜩한 물을 들이고 있었다. 오가는 선박들의 돛도 피에 흠뻑 젖은 것처럼 보였다.

석양을 받아 기나긴 그림자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천하 어디를 가도 나를 반길 곳은 없구나 ."

백룡은 강아를 업은 채 강가를 걸었다. 문득 등 뒤에서 강아의 음성이 들렸다.

"안 되요. 백룡 형 . 날 버리지 말아요. 강아는 갈 데도 없는 고아예요 ."

잠꼬대였다. 술에 만취된 강아가 넋두리하는 것이었다. 백룡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녀석 . 염려마라. 결코 널 버리지 않으마. 너와 나는 어쩌면 같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쯤 가니 도선장이 나타났다. 장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이 쉬어가거나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막 출발하려는 배가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배 위에서 닻을 올리고 있는 늙은 선부(船夫)가 소리를 질렀다.

"어이! 타려면 빨리 오시오!"

그 순간 백룡은 훌쩍 신형을 날렸다.

그와 배 사이의 거리는 6장이 넘었다. 그 사이에는 발판이 막 치워지고 있었다. 선부는 다시 발판을 내리기도 전에 상대가 몸을 날리자 깜짝 놀랐다.

그는 상대가 넘실거리는 푸른 물에 빠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고맙소이다."

문득 등 뒤에서 담담한 음성이 들려온 것이었다.

"아니 !"

선부는 자신이 귀신에라도 홀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대체 날개가 없고서야 어떻게 6장이나 되는 거리를 날아왔단 말인가?

"어디로 가는 배요?"

"하 하류로 가서 동해로 빠집니다요."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를 지겠소이다."


꼬박 사흘을 조른 후에야 강아는 뜻을 이루게 되었다.

백룡이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강아는 매달리다시피 하여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 것이었다. 백룡은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다.

강아가 무림인이 되는 것을 포대숭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강아는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고 위협까지 서슴치 않았다.

백룡은 그에게 기본적인 호신공부인 권각술(拳脚術) 몇 가지를 가르쳤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츰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강아는 광적으로 무공을 익히는 데 매달렸다. 거의 침식을 잃을 정도였고 틈만 나면 갑판에 올라가 손발을 날리며 권각법을 연마했다.

그는 불과 이틀도 못되어 전수받은 권각법을 능숙하게 구사해 내었다. 그런 강아를 보면서 백룡은 생각했다.

'어차피 천하를 떠돌다 보면 위험한 일을 만나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에 뛰어들지 않는다 해도 약간의 무공을 익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는 다시 서너 가지의, 이번에는 다소 익히기 어려운 장법(掌法)과 보법을 전수해 보았다. 놀랍게도 종이가 물을 먹듯이 강아의 습득 속도는 빨랐다. 뿐만 아니라 동작도 정확했다.

'놀랍다. 강아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그는 강아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크게 놀랐다.

'그렇구나. 이 녀석은 선천적으로 건강한 몸을 타고난 데다, 포대숭 노인이 어릴 적부터 갖가지 영약들을 복용시켜 경맥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혼탁하지 않다. 상승기학을 익힐 수 없을 줄 알았는데 .'

본래 수준 높은 상승의 내가무학(內家武學)은 아주 어릴 적부터 연마해야만 한다. 나이가 차게 되면 경맥이 혼탁해지고 기가 굳어 높은 수준까지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성하지 못할 바에야 무공을 익히는 것은 도리어 백해무익하다고 백룡은 판단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아는 무공에 자질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포 노인이 복용시킨 각종 영약으로 인해 내공의 진전 속도가 빨라질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결심이 서자 백룡은 선실에 틀어박혀 강아의 체질에 맞는 무공을 정리했다. 그리고 강아에게 상승무학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강아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진지하게 무공연마법을 들었다.

그는 그때부터 밤이나 낮이나 무공수련하는 데 몰두했다. 과거에 대한 슬픔도 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것을 보고 백룡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어린 강아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하나의 집념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한밤 중.

"반드시 내 손으로 해낼 거야! 꼭 !"

갑판에서 내자토납법(內家吐納法)을 연마하는 와중에 중얼거리는 강아의 주먹은 한껏 힘이 들어갔다. 무엇을 해내려는 것인지는 그의 심중만이 알 뿐이었다.


배는 하류로 순항했다.

봄은 무르익다 못해 흐드러지고 있었다. 실상 봄이라기보다는 이미 여름에 가까웠다. 강남풍(江南風)에는 후끈한 열기가 섞여 있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던 배가 잠시 닻을 내린 무창성(武昌城)에서 백룡은 하선했다.

무창성은 수륙 교통의 요지로서 강남북을 오르내리는 상인들이나 여행자 할 것 없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대도(大都)다. 무창의 고루거각과 상점들은 번화하기 그지없었다. 넘실거리는 인파 사이를 백룡과 강아는 걸었다.

"와아! 정말 대단하군요!"

강아는 환호했다.

이런 풍경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는 대도의 풍경에 잔뜩 호기심 어린 눈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며 연신 탄성을 발했다.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맞닥뜨리는 것마다 감탄스럽기만 했다. 백룡은 빙긋 웃었다.

"그만 소리 질러라. 사람들이 모두 쳐다본다."

아닌 게 아니라 웬 촌놈이냐는 듯 행인들은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강아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거리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자,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다."

"어디요?"

"가 보면 안다."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잠시 후 두 사람은 완전히 달라져 거리에 나왔다. 그들은 옷가게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백룡은 부드럽고 우아한 백색의 문사의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명주로 된 것으로 값비싼 고급품이었다. 문사건도 매었고 손에는 비단 섭선도 들었다.

그의 빼어난 용모는 옷을 갈아입자 더욱 돋보였다. 누가 보아도 명문의 귀공자 티가 물씬 났다. 그런 모습으로 거리에 나오자 지나던 사람들은 한 동안 바라보면서 탄성을 발했다. 특히 여인들은 그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아는 거북하기만 했다. 그는 차라리 투박한 마의가 편했다. 강아는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어야 하는 거죠?"

"사람들의 눈이 있지 않느냐?"

"눈이요?"

"하하 . 너도 얼마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사람들이란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든."

강아는 피식거렸다.

"쳇, 누가 뭐라면 어때요? 내 멋에 살면 되지."

백룡은 눈을 찡긋했다.

"그럼 우리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였다. 그를 바라보는 강아의 눈에 뿌연 물기가 어리는 것이 아닌가?

"강아, 왜 그러느냐?"

"정말 멋있어요. 백룡 형은 내가 보기에도 멋진 귀공자같아요."

백룡은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누나가 형의 이런 모습을 보면 좋아할 텐데 ."

" ."

강아의 둥근 눈에 기어이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백룡의 손이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강아! 대장부는 한 번 울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했지 않느냐? 자꾸 네가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나는 더이상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

그 순간 강아는 고개를 흔들며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 알았어요."

이어 싱긋 웃으며 강아는 말했다.

"헤헷!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마셔요!"

백룡도 빙긋 웃었다.

"녀석, 술맛을 알았구나"

"헤헤 . 죽엽청은 너무 독하고 여아홍(女兒紅)이 좋겠어요."

"그러자꾸나. 그럼 ."

강아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가셨다.

밤이 되었다.

얼큰히 취한 두 사람은 불빛이 휘황한 홍등가(紅燈街)를 지났다. 청루(靑樓), 홍루(紅樓)가 즐비한 환락의 거리. 사치스럽게 꾸며진 장원마다 붉고 푸른 등불이 사람들을 유혹하듯 휘황하게 밝혀져 있었다.

"어 어디로 가는거죠?"

아무래도 이상한 듯 강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따라와라. 재미있는 것이 있다."

백룡은 다만 그렇게 말해 강아의 호기심을 더했다. 백룡의 문사건은 약간 삐뚤어져 있었다. 눈동자가 취기 탓인지 몽롱하게 풀어졌고 걸음은 갈짓자였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런 모습에서 도리어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약간 뒤쳐진 강아는 백룡의 그런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걸었다.

"헤헤헤 . 이렇게 걸으면 더 멋있어지는 건가요?"

대꾸하지 않고 내쳐 걷던 백룡이 걸음을 멈춘 곳은 한 장원 앞이었다.

"우와와 !"

장원의 대문을 본 강아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것은 대문이 아니라 숫제 성문(城門)이라고 할 정도였던 것이다. 대문에 걸려 있는 금빛 편액이 눈부시도록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하군방원(大河群芳院)>

"대하군방원? 뭐하는 곳이기에 대문이 이렇게 크담?"

넋을 잃고 강아는 중얼거렸다. 도무지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때였다.

"어서 옵쇼! 두 분 공자 나으리!"

화려한 옷을 입은 하인이 두 사람에게 넙죽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절을 끝낸 하인은 아첨의 웃음을 만면에 그리며 백룡과 강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대문 안은 바닥에 청석이 깔려 있고 화원에는 백 가지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화려함의 극치였다. 어떤 건물은 기와가 유리로 되었으며 기둥에는 단청이 화사하고 회랑의 나무 난간이나 벽화 등은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강아는 너무나 놀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죠?"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입을 딱 벌렸다.

"혹시 화 황궁(皇宮)이 아니 음!"

그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룡의 섭선이 그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때 백룡의 눈썹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강아의 입에서 뜻밖에 터져나온 황궁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황궁은 북경에 있지 않느냐? 이 곳은 기원(妓院)이다."

"기 기원?"

강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사람을 홀리는 여우같은 여자들이 있는 ?"

강아에게는 기원이 잘못 인식되어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들이라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여우로 보여 기원에 가 보지도 못했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까닭이었다.

섭선의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훑었다.

"조용해라. 자꾸만 촌티를 내면 쫓겨난다."

"헤헤 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사람들이 여우라고 할까?"

강아는 눈을 반짝였다. 평생 말만 들었지 보지도 못한 기녀(妓女)가 아닌가. 그는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이 곳은 넓은 중원천지에도 두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기원이다."

강아는 눈을 반짝였다.

"두 손가락이요? 그럼 또 하나는 어디죠?"

앞장 서 안내하던 하인이 그 말을 들었는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헤헤헤 . 소 공자. 그 곳은 항주(杭州)에 있는 극락향(極樂香)이란 곳이죠."

"극락향?"

"그렇죠."

"휘이!"

강아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아늑한 별실로 안내되었다.

화려했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고 온갖 가구는 최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두 명의 청의시비(靑衣侍妃)가 향차를 가져왔다. 강아는 시비들의 얼굴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향차를 꿀꺽거리며 마시던 강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니, 이게 무슨 맛이지? 시고 떫고 ."

시비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죽여 웃자 백룡이 말했다.

"이것은 용정차(龍井茶)라는 것이다. 금릉 특산의 최고급으로 치는 것이다. 그리고 차는 그렇게 빨리 마셔버리는 것이 아니다."

"쳇! 내가 보기에는 쉰 숭늉같네."

시비들은 마침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제야 강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여자를 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는 시비들이 자신을 보며 계속해서 웃자 고개조차 못들 지경이었다.

집사(執事)가 나타나자 백룡은 주문을 한 다음 보주(寶珠) 하나를 주었다. 집사는 황송한 듯이 희색을 띠고 물러갔다.

강아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집사가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하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가지고 온 상을 본 강아는 까무라칠 지경이었다.

산해진미(山海珍味).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수십, 아니 수백 가지가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나 염려스러울 정도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강아는 닥치는 대로 손과 입을 놀렸다. 입 안에 넣으면 무엇이건 간에 꿀처럼 달았다. 슬슬 녹는 맛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주악소리가 들리는 순간 강아는 음식접시에서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다섯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들이 주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강아는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별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백룡은 의자에 기댄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강아는 불현듯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 넣었다. 그 바람에 수많은 종류의 요리를 다 맛볼 수가 없었다. 이미 절반은 커녕 열 가지 요리를 맛보기도 전에 배가 불러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백룡은 어떤 요리건 단지 한 젓갈밖에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강아는 그 광경을 보고 비로소 후회했으나 그렇다고 부른 배가 다시 고파지지는 않았다.

비파(琵琶)를 타는 기녀들은 하나같이 요염하고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백룡은 그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침내 주악이 끝나자,

"수고 했다."

백룡은 소매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던졌다. 비단 주머니는 기녀들의 앞에 떨어지며 열렸다. 그 순간 휘황찬란한 보주(寶珠)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기녀들은 탄성을 발했다. 이런 보주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뒤 물러갔다.

" ?"

강아의 눈이 토끼눈이 되고 말았다. 그가 알기에 백룡은 보주는커녕 은자도 한 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이 많은 보주를 얻었단 말인가?

"어 어디서 났죠?"

그가 의혹의 표정으로 묻자 백룡이 미소를 머금고 슬쩍 손을 움직였다.

"이렇게 했다."

" !"

강아는 멍청해졌다. 그가 흉내낸 것은 바로 호아산의 주루에서 본 도적이 훔치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훔 훔쳤던 말인가요?"

백룡은 빙긋 웃었다.

"염려마라. 뱃가죽에 기름이 끼고 양심에 털이 난 자들의 주머니를 실례했을 뿐이다."

"하지만 도둑질은 도둑질 ."

백룡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강호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도(盜)에도 협의도(俠義盜)가 있는 법이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강아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가자."

"벌써요?"

강아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기원에 와서 고작 음식을 먹고 주악을 듣는 것밖에 한 것이 없었다. 고작 이런 것이 기원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에는 가벼운 실망감이 번졌다. 그것을 모를 백룡이 아니었다.

"후후 녀석, 오늘은 이대로 가는 거다."

" ?"

뭐라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고 백룡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 강아는 허겁지겁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아는 집사와 하인들의 코가 땅에 닿는 절을 받으며 다시 혼잡한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꽤 밤이 이슥했는데도 인파가 줄어들지 않았다.

"고작 저녁 한 끼를 먹기 위해 그 많은 보주를 뿌렸단 말이에요?"

아무래도 아까운 듯이 강아는 투덜거리자 백룡이 입을 열었다.

"그런 곳에서는 돈을 물쓰듯 해야 제대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제 다음에 가면 대접이 달라질 것이다."

그 말도 강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가면 ? 그럼 또 가겠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룡 형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이야. 대체 여우에게 흘린 기분이라니까 .'

최상의 음식을 먹은 후에는 최상의 잠자리에서 자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무창에서 가장 이름난 잠자리는 바로 천보객점(天寶客店)이었다.

거침없이 백룡이 들어간 곳은 바로 천보객점이었다. 모든 것이 특급(特級)이었다. 그저 강아는 놀랄 뿐이었다. 그는 객방으로 안내되자 편안함은커녕 걱정이 앞섰다.

'이런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병서보검협의 모옥에서 강아는 딱딱한 침대 위에서 잤다. 그런데 객점의 침대는 상아로 만든 침상이었다. 이불도 감촉이 황홀할 정도로 부드러운 천축(天竺)의 비단으로 된 것이었다.

침대를 보며 주눅이 든 강아를 향해 백룡이 빙긋이 웃었다.

"오늘은 너 혼자 자거라. 나는 다녀올 때가 있다."

"어디로요?"

"돈 벌러 간다."

"넷?"

백룡은 신비한 미소를 흘렸다.

"너도 알다시피 이런 생활을 당분간 유지하려면 보통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돈을 벌러 가는 것이다."

"이 밤중에 ?"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또 도적질을 ?"

백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번에는 합법적으로 벌러간다."

"합법적?"

"합법적인 사기(詐欺)가 통하는 곳이 있다."

강아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 잘 자거라."

백룡이 밖으로 사라지자 강아는 궁금해졌다. 그러나 따라 나서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오늘 하룻동안 황당한 일을 너무나 많이 겪어서인지 호기심 많은 그도 녹초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그는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푹신한 침상은 기분 좋은 감촉을 주었다. 곧 잠에 떨어질 것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 동안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도리어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천정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천정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나 ."

눈물이 흘렀다. 어느 순간 강아는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두 눈에 광채를 품으며 부르짖었다.

"누나와 할아버지를 죽인 놈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시간 백룡은 섭선을 저으며 한 건물로 들어갔다.

그가 큰 소리를 치며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도방(賭房)이었다.

하룻밤에 억만 금을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아편(阿片) 냄새 자욱한 도박장에 뛰어든 백룡은 그날 밤 무려 은자 칠십만 냥을 땄다.


"일 주일 동안 은자 오십만 냥을 썼다고?"

사람의 음성이 아니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릴 때 나는 청아한 음향이 이러할까? 듣기만 해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옥음이었다. 웬만한 사내들이라면 다만 음성만 듣고도 간장이 녹아내릴 것이다.

아늑한 별원에 세워진 누각은 삼 층이었다. 연못에 면해 있는 누각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예술적인 품격을 간직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타는 듯한 홍화(紅花) 한 송이가 창가에 핀 듯했다. 홍의를 입고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다만 뒷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미녀인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방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녹의 소녀였다.

그녀 역시 아름다웠다. 다소 색정적인 면모를 느끼게 하는 붉고 도툼한 입술과 빛나는 눈, 몸매는 입고 있는 옷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정도로 풍만했다.

어떤 면에서는 홍의 여인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매일 찾아와 은자 십만 냥씩을 썼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술과 음식만을 들고 갔단 말이지?"

"네, 수청을 들 여자가 필요하느냐고 집사가 물었지만 주악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답니다."

홍의 여인의 고혹적인 음성이 되물었다.

"그자는 어떻게 생긴 작자더냐?"

녹의 소녀의 얼굴이 문득 홍조로 피어났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녀로서도 처음 보는 미남이었어요."

"미남이라고? 흥!"

싸늘한 코웃음이 터졌다. 이어 얼음가루가 풀풀 날리는 듯한 음성이 날아왔다.

"그런 작자는 대부분 파렴치하지."

그러나 녹의 소녀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는 매우 점잖았어요."

"점잖다고? 호호호 ! 기원에 놀러와 돈을 물쓰듯 하는 작자가 점잖다고?"

"하오나 ."

홍의 여인은 녹의 소녀의 말은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오늘밤에도 온다고 하더냐?"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네가 그를 캐보아라."

"네?"

녹의 소녀의 얼굴에 당혹과 홍조가 동시에 피었다.

"소녀가 어떻게 ?"

"아무래도 수상해. 목적이 있지 않고는 그런 행위를 할 리가 없다. 취란(翠蘭), 네가 그자를 유혹하여 정체를 알아내 보아라."

취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유 유혹을 하라고요?"

"바보! 사내들이란 계집의 유혹에 약한 법이야. 천하의 어떤 사내도 그런 것에는 약하다는 것을 모든단 말이냐?"

"하지만 전 ."

취란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그 모습을 보던 홍의 여인은 깔깔거렸다.

"호호호 ! 알고 있어. 취란, 네가 처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기에 네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취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작자는 매우 교활해. 따라서 진짜가 아니면 금방 눈치챌거야. 네가 처녀라는 것을 알면 경계심이 풀어져 안심하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을 거야."

문득 취란의 얼굴에는 슬픔이 어렸다.

"아깝다는 거냐?"

"저 저는 ."

"정조 따위는 그런 곳에 버리는 거야!"

혹독한 말이었다. 음성과 뒷모습만으로도 천하를 기울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취란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명 명을 좇겠어요."

그녀는 허리를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누각 안은 조용해졌다. 잠시 후 영롱한 음성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요즘 조용하다 했더니 ."

누각 아래는 연못이었다. 연못 속에는 금잉어가 노닐었다. 지금 두 마리의 금잉어는 위로 솟구쳐 올랐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서 였다.

미녀의 섬섬옥수가 3층 누각에서 잉어가 좋아하는 먹이를 조금씩 뿌려주고 있었다.

희다 못해 투명한 손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손이 숱한 살인(殺人)을 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아름답고 향기로운 손(手)이 어느 순간 거두어졌다.

"오늘은 너무 많이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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