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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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15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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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2권 19장 내 이름(名)은 방탕아(放蕩兒)



여드렛째 날.

백룡은 여느 때와 같이 대하군방원을 찾았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상이 들어오고 주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곱게 단장한 무희들이 나긋나긋한 세류요(細柳腰)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무희들이 꽃잎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백룡을 향해 고혹적인 몸짓으로 다가오곤 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동작 하나에 간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백룡은 일신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백삼(白衫)을 걸쳤다. 그것은 하얀 피부와 더불어 그의 매력을 더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는 이따금 섭선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무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가 어려 있었으나 눈에는 물처럼 담담한 기운이 흘렀다.

밤이 깊어감과 동시에 기녀들 특유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환락의 소음처럼 들려왔다.

강아는 요즘 신이 났다. 매일 기원에 드나드는 동안 제법 그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지금 그는 화원에서 자기 또래의 기녀와 장난을 하고 있었다. 비록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이었으나 일신에 걸친 청삼이 썩 잘 어울렸다.

"하하하 !"

"호호호 !"

앳되어 보이는 기녀가 연못 주위를 돌면서 잡아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강아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외쳤다.

"내가 못잡을 줄 알고 ? 어디!"

강아의 손이 급기야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하하하. 어때, 이래도 도망갈 거야?"

기녀는 살짝 눈을 흘기며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아얏!"

강아는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하 !"

"호호호!"

그들은 무엇이 우스운지 배꼽을 쥐고 웃어댔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붉은 홍등과 함께 화원에 붉은 빛을 뿌리는 듯했다. 백룡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강아 녀석. 이젠 제법이란 말야."

이윽고 백룡은 무희들에게 언제나처럼 보화를 던져주며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무희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백룡을 바라보며 조용히 사라졌다. 백룡이 막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그의 앞으로 대하군방원의 집사가 나타났다. 돼지처럼 피둥피둥 살찐 몸에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의 기름진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어렸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공자님."

집사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은근히 말했다.

" ?"

"헤헤 . 그 동안 본원의 귀빈으로서 소인은 공자께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읍죠."

백룡은 빙긋 웃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헤헤 . 공자께서 후한 인심을 쓰시는 바람에 아이들이 무척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웃음을 흘린 집사는 곧 뒤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너라. 취란."

패옥(貝玉)이 부딪치는 영롱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방 안이 환해지는 듯했다. 전신에 녹색 궁장을 입은 미녀였다.

깎아빚은 듯 선명하면서도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미녀의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깔려 있었다. 특히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어려 있는 신비한 미소는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알맞게 솟고 패인 몸매를 감싼 녹색 궁장은 그녀의 백옥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날아갈 듯 가볍게 절을 했다.

"귀빈께 소녀 취란, 인사드립니다."

그야말로 은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고 낭랑한 음성이었다. 백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는데?"

집사는 손을 비비며 빙그레 웃었다.

"헤헤 . 이번에는 본원이 특별히 공자께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보답이라고?"

집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취란을 바라보았다.

"헤헤 . 보시다시피 취란은 대하군방원에서 일급의 미녀입니다. 오늘밤 공자를 모시게 될 것입니다."

집사는 깊숙이 허리를 구부리며 밤인사를 했다.

"소 공자님께는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이 되시기를 빌겠습니다."

집사는 재빠른 동작으로 방을 나갔다. 집사가 사라진 후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백룡은 취란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백룡은 마치 방 안에 혼자 있는 듯 골똘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취란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가끔 살며시 눈을 들어 백룡의 얼굴을 훔쳐보곤 했다. 그녀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고고한 학인 양 기품 있고 영준했기 때문이었다.

'아아 . 저분의 품에 한 번 안길 수 있다면 .'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마음일 뿐 백룡은 바위처럼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다.

취란은 거북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수 냄새가 온 방 안을 은은히 적셨으나 백룡은 역시 무반응이었다. 취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공께서는 소녀 취란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다음 순간 백룡은 취란을 힐끗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그의 싸늘한 대꾸에 취란은 당황했다. 그러나 이미 결심한 일.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하오나 소녀 스스로 자원한 것이옵니다."

"무엇 때문에?"

백룡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취란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소녀 먼 발치에서 상공을 뵈옵고 마음에 두었사옵니다."

백룡은 웃고 말았다.

"후후 ! 우습군. 고작 얼굴 한 번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냐?"

"소녀를 천한 계집이라고 비웃으시는 건가요?"

취란이 자존심이 상한 듯 살짝 아미를 찌푸렸다.

"아무튼 나는 관심없다."

백룡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잡았다. 취란이 재빨리 말했다.

"소녀가 따르겠사옵니다."

취란의 섬세한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이며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술잔에 술이 가득 채워지자 취란은 살며시 백룡의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향긋한 지분 냄새가 백룡의 코에 스며드는 순간 백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속(俗)한 냄새가 나는구나."

취란은 그의 어깨에서 몸을 떼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상공께서 싫어하신다면 ."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어 그녀는 술병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대고 부었다. 호박빛 술이 언뜻 그녀의 얼굴에 주홍빛 노을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백룡은 놀라며 물었다.

"무엇을 하는가?"

"화장을 지우겠습니다."

야무진 취란의 대답이었다. 취란의 얼굴은 술에 흠뻑 젖어 반짝반짝 윤이 났다. 마치 비가 온 다음날 맑게 개인 푸른 하늘 아래에서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있는 싱싱한 나뭇잎처럼 그녀의 얼굴은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백룡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술을 마셨다. 취란은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들리던 흥겨운 주악의 소리도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취란은 분홍색 휘장이 쳐진 침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 자리에 드셔야지요."

"후후 . 이 곳이나 저 곳이나 기방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럼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 켜 둔 홍등 아래에서 녹색장의는 거의 보랏빛으로 보여 한층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옷고름에 손을 갖다 대는 그녀의 섬섬옥수가 가늘게 떨렸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입술을 깨문 취란은 과감하게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놀랍게도 상의 속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뽀얀 유방과 오디같이 알맞게 익은 유실이 고개를 내밀었다. 만지면 그대로 터져버릴 듯 위태로울 정도로 팽팽한 과육이었다.

백룡이 무표정한 얼굴로 취란의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취란은 부끄러운 듯 모기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을 꺼도 될까요?"

"나는 밝은 것이 좋다."

일 순간 취란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마음을 바꾸었다.

'기왕지사 나선 몸 .'

이렇게 자신을 타일렀으나 내심 이가 갈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본능적인 모험심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사르르륵 .

상의가 흘러내리면서 우유빛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동그란 어깨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렵한 팔, 한껏 부풀어 오른 유방이 잘록한 세류요 위에서 고혹적으로 흔들렸다.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는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는 수줍음 때문인지 바르르 떨었다.

백룡은 반쯤 감은 눈으로 그녀의 상체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욕정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그 눈길은 취란에게 충분히 모욕감을 주고도 남을 만큼 오만했다. 한순간의 수치심과 부끄러움 때문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유방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유방은 너무도 커 그녀의 희디흰 손을 비집고 삐죽이 빠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단호한 빛이 스쳤다. 즉시 취란은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이어 서서히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이 치마의 끈을 풀었다.

스르르륵 .

비단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는 상의와 마찬가지로 하의 속에도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고 있었다. 만월처럼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둔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가는 허리와 하얗게 반짝이는 능선을 지나 움푹 패여 있는 배꼽이 있었다.

이를 앙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취란은 치마 끝으로 부드러운 방초를 살짝 드러낸 채 마지막 손을 놓지 못했다. 결국 취란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상공. 이제는 ."

거의 애원조였다. 그러나 백룡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취란, 기왕 나섰다면 어찌하여 망설이느냐? 후후! 너의 가상한 용기에 축배를 올려주마."

백룡은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순간 취란은 질끈 눈을 감고서는 손을 놓아버렸다. 방초를 가리고 있던 치맛자락이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곧게 뻗은 옥주(玉柱)는 만지면 깨질 듯 투명하게 빛나고 한가운데 자리잡은 수림(樹林)은 열기를 담은 채 솟아 있었다.

그런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취란의 배꼽과 치모 사이에 난 붉은 홍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나신에 기묘한 매력을 주는 요소였다.

완전히 드러난 여체는 사나이의 혼백을 앗아버릴 듯 아름다웠다. 만약 그녀의 몸을 보고 그냥 있는 남자라면 필시 그는 장님이거나 머리가 돌아버린 자이리라.

그런데도 백룡의 시선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취란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자신의 육체를 돌멩이처럼 바라보는 백룡에게 심한 모멸감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더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흐흑 ."

취란은 그만 바닥에 쓰러지며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물. 미녀의 눈물이라면 철석간담의 사나이도 녹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백룡은 그 점에서도 예외였다. 그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대로 쓸 만한 몸이군."

취란의 어깨가 물결치듯 심하게 흔들렸다.

눈물이 아랫배를 타고 은밀하게 깔려 있는 삼각비역 속으로까지 흘러들고 있었다. 팽팽한 유방은 항의라고 하듯 출렁거렸다.

아무리 목적을 품고 왔어도 여인만의 자존심이 있는 법. 취란은 백룡의 무심함에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백룡의 조롱섞인 음성이 들렸다.

"이리와서 술을 따르겠느냐?"

" !"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비정하다 해도 이렇게 가혹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취란은 들은 적이 없었다. 취란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상공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취란은 무릎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나신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수치감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더욱이 백룡의 시선이 닿는 곳은 바늘로 찌르는 듯 따갑기만 했다.

그에게 술을 따르는 취란의 팔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자 백룡이 중얼거렸다.

"좋군."

그 한마디를 내뱉고 백룡은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는 술잔을 취란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너도 한 잔 하겠느냐?"

" ."

취란은 잔을 받았다.

백룡이 그녀에게 술을 따르자 취란은 백룡이 하듯 단숨에 들이켰다. 썼다. 지금의 자신의 쓰라린 가슴처럼 술은 쓰고 독했다. 취란의 굳은 얼굴에 냉소가 떠오르더니 그것은 곧 자조의 웃음으로 변했다.

"호홋 ! 상공께서는 정말 이 취란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보군요?"

취란의 돌변한 태도에도 백룡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당돌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백룡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음식을 감별하고 품평하는 미식가(美食家)가 있듯이 내 눈은 여체를 감식하는 심미안(審美眼)을 지니고 있지."

" ?"

백룡은 다시 한 번 취란의 몸을 훑어보았다.

"너의 몸은 그런 대로 쓸 만하다만 ."

백룡은 잠시 말을 멈추고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몇 군데 아쉬운 곳이 있다."

취란이 물었다.

"어디가 부족한가요?"

취란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예 그의 어깨에 나신을 기댔다. 이어 살짝 무릎까지 벌리는 것이 아닌가. 향긋한 육향이 방 안에 가득찼다.

백룡은 폭발적인 유혹을 내뿜는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유방이 너무 크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균형이 맞지 않는다."

"또 ?"

취란의 눈꼬리에 한 가닥 냉소가 떠올랐다.

"후후 둔부도 크다. 허벅지는 너무 굵고 그에 비하면 허리는 너무 가늘지."

백룡의 품평회(?)는 계속되었다.

"그런 몸을 가진 계집은 남자를 피곤하게 한다."

"어째서죠?"

"훗! 장차 끊임없이 요구할 뿐더러 음욕이 강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음심을 채우려 들기 때문이다."

엄청난 모욕의 말이었다. 취란은 눈을 부릅뜨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 제가 탕부같단 말씀인가요?"

백룡은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 ?"

"선천적으로 타고난 탕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 방면으로 빠질 지 모른다는 말이다."

취란은 코웃음을 쳤다.

"상공께서는 이 취란을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백룡이 기소를 흘렸다.

"후후후 ! 너는 아직도 처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냐?"

" !"

백룡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 꽃이라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빛깔이 고운 모란은 향기가 없고 향기가 진한 장미는 천박한 법이다."

취란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소녀는 ?"

"장미."

순간 취란의 옥용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흑!"

취란은 방에서 뛰쳐나갔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짓뭉개진 것이었다. 그녀가 뛰쳐나간 후, 잔을 드는 백룡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을 텐데, 일잔향(一殘香) ."


3층 누각의 창문에서 하얗게 빛나는 달조각이 연못 위에 둥실 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연못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에서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매력이 느껴졌다. 일신에는 타는 듯 붉은 홍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여인의 뒤에는 취란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부복해 있었다.

"실패했다고?"

취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홍의 여인의 옥음은 차디찬 얼음을 베어문 듯 날카롭고 싸늘했다.

취란은 지금 흡사 잠자다 일어난 여자같이 흐트러진 채 아무렇게나 옷을 걸친 상태였다. 마치 눈만 살아 있는 듯 그녀의 두 눈에는 짙은 원독이 서려 있었다.

홍의 여인이 다시 입을 떼었다.

"그자가 뭐라더냐?"

"저를 천박하다고 했어요."

취란이 생각할수록 분하다는 듯 이를 갈자 홍의 여인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호호호홋!"

이윽고 웃음을 멈춘 그녀는 다시 입을 떼었다.

"천박하다고?"

취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꽃이라고 다 꽃은 아니라고 . 빛깔 고운 모란에는 향기가 없고 향기 진한 장미는 천박하다고 . 그리고 저를 장미라고 했어요."

홍의 여인은 다시 깔깔거렸다.

"그럼 너를 높이 평가한 거구나."

"옛?"

취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가씨마저 ."

"호호 . 이 바보야. 네가 과연 몸을 함부로 굴렸단 말이냐?"

취란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적이 ."

"그러기 때문에 그가 너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만큼 네가 아름답다는 뜻이지."

" ."

취란은 가슴이 쓰렸다. 처음에는 백룡의 모습에 연모지정을 느꼈다. 그러나 거듭되는 모욕으로 마침내 이를 갈게 된 것이었다.

한(恨). 여인의 한은 무섭다. 사랑과 미움이 백지 한 장의 차이이듯 취란도 자신을 난도질하듯 짓밟은 사내 백룡에게 원한을 품게 된 것이었다.

홍의 여인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자가 오늘도 올까?"

취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쩌면 오겠죠."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취란의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흥! 그자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수십만 냥을 뿌린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후후 그렇다. 그자에게서는 냄새가 나."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홍의 여인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어쩌면 나를 겨냥했는지도 모르지."

취란은 눈을 번뜩였다.

"차라리 그를 심문하는 것이 어떨까요?"

"유치해."

홍의 여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취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적어도 내가 쓰기에는 유치한 방법이다."

취란의 얼굴이 급격히 흐려졌다.

"아가씨 ."

"호호호 ! 미끼를 던진 자는 고기가 바늘을 물기를 기다리지만 나는 반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겠어."

홍의 여인의 대담한 말에 취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서히 연못 속에 있던 달이 뿌연 먹구름에 가리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혼자시군요, 공자."

대하군방원을 들어서는 백룡을 보고는 집사는 반색을 했다. 백룡은 섭선을 저었다.

"아우는 거리 구경을 나갔지."

바로 강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백룡은 오늘로써 아홉 번째 대하군방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입구에서부터 은자를 뿌리기 시작하며 별실로 향했다.

하인들은 그를 볼 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그들이 허리를 펴기도 전에 땅에는 영락없이 은자덩이가 놓여 있었다.

별실에는 변함없이 산해진미와 주악이 준비되어 있었다. 백룡은 술을 마시고 흥겨운 표정으로 주악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일잔향. 살인을 할 때마다 향기(香氣)를 남기는 여인. 그런 풍류살수는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이지. 이제 서서히 냄새를 뿌릴 때가 되었다."

이경(二更) 무렵이 되어 악사들이 물러가고 혼자 남게 되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허탕인가?'

그가 막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달빛처럼 은은한 비파음이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비파음은 절묘한 화음(和音)을 이루고 있었다. 기교가 뛰어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만이 탄주해 낼 수 있는 곡이었다.

백룡은 본래 음(音)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모친에게 음을 배웠고 한 자루의 철적(鐵笛)을 한때 신물처럼 지니고 다녔지 않았던가?

비파음은 여인이 하소연을 하듯 느리고 서글픈 음률을 자아냈다. 어느 순간 비탄하듯 무겁고 날카로워지던 비파음이 다시 부드럽게 풀려 봄날의 훈풍처럼 화사한 음률을 내는 것이었다.

실로 사람의 마음을 뜻대로 바꾸는 절묘한 기교였다. 이제 비파음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로 바뀌고 있었다. 한순간 비파음에 도취해 눈이 몽롱하게 풀렸던 백룡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천정에 매달린 비단끈을 당겼다.

얼마 있지 않아 집사가 별실 앞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집사는 비굴헤 뵈는 웃음을 띄며 말했다.

"이 비파는 누가 타는 것인가?"

집사의 가느다란 눈에 한 가닥 기광이 스쳤다.

"헤헤 .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렇네."

집사는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만은 곤란합니다."

"어째서?"

집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설사 억만 금을 준다 해도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상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백룡은 웃었다.

"훗! 그만큼 도도하다는 건가?"

집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홍애 낭자(紅崖娘子)는 본원의 다른 기녀와 틀립니다."

"어떤 계집인데?"

백룡은 짐짓 궁금한 표정을 짓자 집사는 입을 떼었다.

"본 기원 소속이 아닙니다. 스스로 들어와 머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곳의 규칙과는 무관한 낭자입죠."

"흠, 더욱 구미가 당기는 군. 안내하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백룡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촉하자 집사는 당황했다.

"하, 하오나 ."

백룡은 손을 품속에 넣었다.

"이거면 되나?"

휙!

용안만한 보주가 집사의 손에 떨어졌다. 그것은 은자 3천 냥은 족히 되는 엄청난 보물이었다. 집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지만 ."

"그 곳까지만 안내하게. 그 이후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집사는 단념한 듯 꾸벅 절을 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회랑과 두어 채의 전각을 지나 월동문(月洞門)에 이르렀다. 그 곳은 낮은 담장이 있는 곳으로 독립된 별원이었다. 월동문을 가리키며 집사가 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곳입니다요."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게."

집사는 머뭇거리며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잘 안 될 것입니다."

백룡은 히죽 웃었다.

"걱정 말게."

집사는 불안한 얼굴로 사라졌다.

백룡은 월동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안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빠끔 열리며 귀엽게 생긴 소비(少妃)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나리?"

"홍애를 만나러 왔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백룡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소비가 피식 웃었다.

"헛수고예요. 아가씨는 아무나 만나는 기녀가 아니에요."

소비는 톡 쏘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은 닫혀지지 않았다. 백룡이 문고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소비는 당황했다.

"무슨 짓이에요!"

백룡은 담담하게 말했다.

"일단 전하기나 해라. 만나고 싶다고."

소비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있고 없고는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꼬마야."

꼬마라니? 심히 모욕적인 말이었다. 소비는 앙칼진 음성으로 외쳤다.

"말조심 하세요!"

"하하! 내 입은 조금 거칠다. 어서 전해라. 계집애야."

" !"

소비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그녀는 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문을 탕! 닫고 사라졌다. 잠시 후 문도 열지 않은 채 안에서 소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다. 밖에 있는 놈팡이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백룡은 피식 웃었다.

"경청하마, 꼬마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신다. 꼭 만나고 싶다면 아가씨를 탄복시킬 재주를 보이라고 하셨다."

백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법이군.'

그는 빙긋 웃었다.

"좋다. 그럼 한 가지 물건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느냐?"

"무엇이냐?"

소비는 계속 반말로 대꾸했다. 백룡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 피리가 있느냐?"

백룡의 의외의 말에 안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백룡이 다시 입을 떼었다.

"있다면 가져다 다오. 음(音)으로 홍애를 움직여 보겠다."

소비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네놈이 미쳤구나.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다니!"

소비가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담 밖으로 푸른 빛이 날아왔다. 백룡은 얼른 그것을 받았다. 은은한 청담빛의 옥소였다. 백룡은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며 쓰다듬어 보았다. 그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귀한 것이군. 안남산(安南産)의 비취옥으로 만든 진품이야."

"흥! 보는 눈은 있구나. 아가씨께서 갖고 계시는 것 중 진품(珍品)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소비가 참새처럼 쫑알거리자 백룡은 빙그레 웃었다.

"알았다, 꼬마. 시끄러우니 그만 물러가라."

소비는 코방귀를 뀌며 사라졌다. 백룡은 내심 생각했다.

'음(音)을 아는 여인이다. 음에는 음으로 .'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 그는 옥소를 불기 시작했다. 청옥소에서 한 가닥 부드럽고 잔잔한 음이 흘러나왔다.

삘릴릴릴리

환상의 무릉도원이 펼쳐지며 봄날의 춘몽을 연상케 하는 음률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지그시 눈을 감은 백룡의 전신에서는 온화하면서도 신비한 기운이 어렸다.

그가 불고 있는 곡은 다름아닌 다정무한지곡(多情無限之曲)이었다. 창궁무고에서 얻은 비파혈경(琵琶血經) 속의 악보 중 제 1곡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구름 속에 가리워졌던 달이 솟아나와 물끄러미 백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삼라만상이 그의 음률에 도취되어 움직임을 멈춘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원의 안쪽에서 은은한 비파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피리음에 맞추어 합주(合奏)를 하는 것이었다. 두 가닥의 음률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절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추는 듯 고고하고 선녀가 지상으로 하강하는 듯 가벼우며 물이 흐르듯 동(動)적이면서도 유연하게 흐르는 음률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듯했다.

대하군방원에 있던 기녀들은 일제히 방에서 나와 이 신비로운 음률을 몽롱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마치 넋을 잃은 듯 그녀들의 얼굴에 황홀함이 어렸다.

백룡이 입에서 청옥소를 뗌과 동시에 비파음도 그쳤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소비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가씨께서 공자님을 뵙고자 하세요."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는 소비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아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룡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야릇하기까지 했다.

백룡은 빙긋 웃었다.

"어떠냐? 꼬마 아가씨?"

소비는 생긋 웃었다.

"무슨 마술(魔術)을 썼나요?"

"마술?"

"호호! 아가씨께서 미소 지었어요."

"미소를 지었다고?"

소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미소 지은 것을 소녀 아경(阿京)은 처음 봤어요."

백룡은 싱긋 웃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다."

아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백룡은 웃음을 머금은 채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 안으로 들어선 순간 백룡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 송이 붉은 꽃이 창가에 환상적인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꽃은 바로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일신에 홍의를 걸친 여인. 바람이 불면 가볍게 흔들릴 듯 가냘프면서도 인간이 아닌 듯 신비로운 자태로 서 있는 여인이었다.

백룡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을 흔들리게 하다니 .'

그 순간 홍의 여인이 영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룡. 백 공자이신가요?"

백룡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렇소."

"음(音)의 솜씨가 놀랍더군요."

"과찬의 말씀이오, 오히려 낭자야말로 대단한 솜씨를 지니고 있소이다."

"고마워요."

홍애는 과찬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수긍했다. 곧이어 홍애는 낭낭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저를 보고 싶어 하셨나요?"

"그렇소."

"이유가 뭐죠?"

백룡은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후후. 기원에 오는 목적이 무엇이겠소?"

" ?"

"꽃을 따러 오는 일이 아니면 무엇하러 오겠소?"

홍애의 어깨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손만 뻗으면 아무 꽃이나 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백룡은 어깨를 한 차례 들썩였다.

"유감스럽게도 이제까지는 그래 왔소."

"호호 ! 자신만만하시군요."

백룡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고급 장식품들이 조화를 이루며 놓여 있으되 그것은 결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섬세하고 고결한 여인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분위기였다.

다음 순간 백룡은 홍의 여인을 바라보며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항상 고기밥을 직접 주고 있소?"

홍의 여인의 어깨가 일순간 경직되었다.

"고기밥을 주는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오. 한 번도 본적이 없소."

"그럼 ?"

"냄새가 나오. 잉어가 좋아하는 꽃가루 냄새가."

홍의 여인은 비웃음이 담긴 어조로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후각이 예민하시군요. 마치 ."

백룡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말을 앞질렀다.

"후후! 개코처럼이다 그 말이오?"

" ."

문득 백룡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또다른 냄새가 나는군."

" ?"

백룡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향긋하되 피비린내같은 냄새가 나오."

그 순간 홍의 여인, 즉 홍애의 어깨가 바위처럼 굳는 것을 백룡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홍애는 다소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뜻이죠?"

"아무 뜻도 아니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교교한 달빛이 사위에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긴장이 흘렀다.

답답한 침묵을 깨듯 홍애는 깊은 산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맑고 은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얼굴을 보고 싶으신가요?"

백룡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니오."

"그럼?"

백룡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 얼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오."

홍애는 차가운 음성으로 응수했다.

"입을 함부로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아시나요?"

백룡은 빙그레 웃었다.

"입도 사용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소. 화(禍)를 부를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미녀를 녹게 할 수도 있는 것이오."

홍애의 선연하게 흘러내린 어깨선이 한 차례 격심하게 떨렸다. 그녀는 상대방의 당당한 태도에 저으기 놀라는 한편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어떤 작자길래 이렇게 유들유들 하단 말인가?'

홍애는 생각과 동시에 서서히 몸을 돌렸다.

" !"

그들의 시선이 부딪친 순간 두 사람은 똑같이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두 사람은 상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홍애의 촉촉하게 젖은 눈은 청순하면서도 아련한 애수의 빛을 띄고 있었다. 게다가 다소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 느껴지는 완강한 고집이 더할 수 없이 인상적이었다.

섬세하게 흘러내린 코의 선을 타고 자리잡은 입술은 또 어떠한가? 그것은 마치 햇살 아래 무르익은 신선한 열매인 양 붉게 타오르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백 배나 아름다운 미녀다.'

백룡은 내심 탄식과도 같은 부르짖음을 토해냈다.

홍애 역시 백룡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넋나간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영준하되 속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면서 깊은 마력이 깃들어 있는 사람이다 .'

홍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의 얼굴로 만족하지 못하셨나요?"

다소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홍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럼 무엇을 더 보고 싶나요?"

백룡은 은은한 색기(色氣)가 느껴지는 시선으로 홍애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몸매는 버들잎처럼 부드럽고 가냘펐으나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샘물처럼 그녀의 전신에서는 알 수 없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백룡은 홍애를 똑바로 주시했다.

"전부를 보고 싶소."

"전부를 ?"

"다 말이오. 모든 것을 가질 생각이오."

홍애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내, 내가 이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다니 .'

백룡의 야릇한 시선에 홍애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자신이 있나요?"

"그대는 자신이 있소?"

" ?"

느닷없는 반문에 홍애가 의아해하자 백룡이 말했다.

"자신을 지킬 자신 말이요."

홍애는 코웃음을 쳤다.

"미끼를 던지고 있군요. 나를 자극시키려는 ."

"그대는 그물을 던지고 있잖소!"

순간적으로 홍애는 전율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표정을 지우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 이 홍애는 세상에 나를 탄복시킬 남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아요."

그녀의 두 눈에 이상한 불꽃이 일어났다.

"당신을 홍애의 발 아래서 기게 만들겠어요!"

홍애의 오만방자한 말에 백룡은 한 동안 껄껄거렸다.

"그것 참 재미 있겠군."

홍애는 백룡을 노려보며 휘장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비단 옷깃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룡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홍애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삼단같은 흑발은 허리까지 내려와 폭포처럼 출렁거렸고 전신에는 연홍빛 나삼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백룡을 향해 걸어왔다. 모든 삼라만상의 움직임을 다 모아 놓은 듯 신비한 조화경을 이루며 그녀의 몸이 율동하고 있었다.

나삼 안으로 은은히 비치는 선광과 곧게 뻗어내린 옥주 사이의 비림은 숨막히는 열정을 간직한 채 그를 향해 손짓했다. 폭발적인 염기(艶氣)였다.

백룡의 단전에 불길이 화르르 일었다.

취란의 풍만한 여체를 돌보듯 하던 그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엷은 나삼 속으로 보이는 홍애의 나신은 극도로 유혹적인 것이었다.

여체의 아름다움이란 묘한 것이어서 완전히 벗었을 때보다 은은히 비칠 때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제 홍애는 바로 그의 지척에까지 와 있었다. 섬섬옥수에 기다란 비단천을 들고 있는 그녀의 눈은 몽롱하게 잠겨 있었다.

서서히 그녀의 몸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디흰 손이 환상처럼 허공을 휘젓고 가냘픈 어깨가 부서져 내리는 달빛처럼 화려하게 율동하기 시작했다.

춤(舞)이었다.

백룡은 일찌기 이토록 아름답고 요염한 춤은 본적이 없었다.

물이 흐르듯 유연하게 움직이는 세류요는 미풍에조차 흔들릴듯 가냘프고 잠자리 날개같은 나삼이 들쳐질 때마다 백옥같은 피부가 드러나곤 했다.

간간이 동작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눈빛은 백룡을 향했다. 희미한 듯 하면서도 언뜻 보면 강렬하게 부딪쳐 오는 기이한 눈빛이었다.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쾌한 음향과 함께 폭포수같은 머리칼이 만개하는 꽃잎처럼 활짝 펼쳐졌다.

화려한 비단천이 홍애의 몸을 스치듯이 감쌌다가 다시 느슨하게 풀어주곤 했는데 자세히 보면 그것은 남녀의 관능을 묘사한 것이었다.

백룡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춤은 이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홍애의 둔부가 묘하게 흔들리더니 활처럼 허리가 휘었다. 그녀의 뽀얀 목덜미가 뒤로 젖혀지고 붉은 입술에서는 묘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춤은 결코 음탕하거나 속(俗)되지 않았다. 동작도 천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룡의 내부로부터는 뜨거운 불길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의 몸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렸다.

'마무(魔舞)다! 혼백을 흡수하고 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춤은 더욱 격렬해졌다. 홍애의 얼굴은 이제 도화빛으로 물들었고 몸은 본능으로 움직이는 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율동했다.

"호호호 !"

홍애의 교소에 백룡의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천마소혼음(天魔消魂音)!"

그것은 마도비문의 신공으로서 웃음이나 음성으로 상대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었다.

백룡의 눈빛이 몽롱하게 흐려졌다. 그는 넋을 잃은 얼굴로 홍애를 주시했다. 홍애는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호호 . 네가 오래 버틸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방이 출렁거리며 야릇한 육향을 자아냈다. 백룡에게 다가간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무릎을 꿇어라."

그런데 다음 순간 백룡은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그게 전부요?"

" !"

홍애의 도화빛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너 너 !"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자 백룡은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내 눈에 낭자의 행위가 무엇으로 비치는지 아시오?"

" ."

"돼지가 뒤뚱거리는 것같소."

" !"

홍애는 여지껏 자신이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와르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같은 패배감을 맛보았다. 이제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죽엇!"

쐐액!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비단천이 칼날처럼 빳빳하게 세워져 백룡을 향해 날아왔다.

"하하 ! 이제야 마각을 드러내는군."

스스

갑자기 그의 몸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는 어느새 홍애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 없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알고 있소?"

"닥쳐!"

파파팟 !

비단천이 한 차례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더니 수십 개의 환영으로 갈라졌다. 이어 칼날같은 강기가 백룡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러나 백룡은 여유 있게 신형을 움직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후후 . 냄새나는 더러운 몸뚱이에 스스로 취해 남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 데서나 옷벗는 그런 계집이지. 후훗! 홍애 그대 역시 별 수 없군."

"주, 죽일 놈!"

홍애는 이를 갈며 비단천을 휘둘렀다.

위이잉!

비단천이 더욱 위세를 떨쳤다. 이어 비단이 펼쳐지며 가공할 경기가 쇄도했다. 백룡은 빙긋 웃었다.

"하하! 무공이란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

그는 손가락으로 홍애의 몸을 살짝 건드렸다.

찌익!

"학!"

홍애는 얼른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았다.

칼로 자른 듯 정교하게 잘라진 나삼 사이로 뽀얀 젖무덤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백룡은 또다시 나삼을 그었다.

찌직!

이번에는 어깨 부분이 찢어졌다. 홍애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백룡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그녀의 나삼을 찢었다. 나삼은 조각조각 잘려나갔다.

"그, 그만!"

마침내 홍애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덧 그녀의 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갈가리 베어진 천 몇 개 만이 간신히 옥체에 걸려 있을 뿐이었다.

백룡은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체념한 듯 멍한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백룡은 담담하게 말했다.

"강한 것은 꺾이기 마련이지."

백룡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홍애는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여자는 온순해야 사랑을 받는 법이거든."

백룡의 신비한 눈이 홍애의 눈과 마주쳤다. 다음 순간 홍애는 몸을 떨었다. 빨려들 듯 깊숙한 동공 속에 자신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백룡은 홍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가 손을 뻗는 데도 가만히 있었다. 백룡은 그녀의 어지럽게 흩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대는 아름다워, 이 상태로도 충분하오. 다만 "

홍애는 초조한 얼굴을 들었다.

"다만, 무엇인가요?"

이제 백룡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가련하기조차 했다. 백룡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살인의 향기가 없다면 ."

" !"

홍애의 눈동자가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알, 알고 있었군요?"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일잔향. 뇌정각 3대 외단(外壇)중 십무단(十武壇) 소속의 일급살수가 아니오?"

홍애, 아니 일잔향의 얼굴이 그 순간 창백해졌다.

"다, 당신은 누구죠?"

백룡은 장삼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내 이름은 백룡이오."

"백, 백룡. 당신의 정체는 대체 ."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를 얼만큼 안다고 생각하시오?"

" ?"

백룡의 입가에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대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그대가 나를 알게 하겠소?"

다음 순간 일잔향의 얼굴이 흐려졌다. 백룡은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고 싶소. 그대를."

순간적으로 일잔향은 전신이 녹아드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희미하게나마 갈등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백룡의 강렬한 눈빛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일잔향의 얼굴 위로 백룡의 뜨거운 입김이 쏟아지는 찰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누비기 시작했다.

꽃잎이 벌어지면서 어깨에 걸쳐 있던 장삼이 스르르 발치께로 떨어졌다. 그녀는 이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약간이나마 힘을 주고 잡으면 그대로 휘어질 듯한 가냘픈 어깨와 신선한 내음을 풍기는 과육이 탐스럽게 드러났다. 희디흰 능선을 지나 두 개의 옥주를 뿌리삼아 무성하게 솟아 있는 나뭇잎들은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백룡의 손끝이 일잔향의 몸에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백룡의 손이 닿을 때마다 가냘픈 교구를 바르르 떨곤 했다. 수줍게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의 꽃잎을 한 잎 한 잎 따는 듯 백룡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과감하게 그녀의 몸을 향해 진격해 갔다.


강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있는 백룡을 바라보았다.

"그만 마셔요. 백룡 형!"

탁자 위에는 술병 수십 개가 놓여져 있었다.

문사건을 매는 둥 마는 둥 마구 헝클어져 있는 머리에 한 손을 쑤셔넣은 채 백룡은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눈은 취기로 인해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녀석, 괜찮다."

백룡은 강아의 얼굴에 바싹 자신의 입을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강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휘유 ! 냄새 ."

그는 코를 감싸며 따지듯 물었다.

"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폭음을 하는 거예요?"

"폭음? 후훗! 내 주량에는 끝이 없다."

강아는 별 수 없이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는 객점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형님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강아가 나간 후 백룡은 입가에 자조의 미소를 떠올렸다.

"후후. 고민? 단순한 고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술을 병째 들이켰다. 턱밑으로는 까칠한 수염이 그대로 돋아나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해 있다는 것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일순 그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푸르던 창공에는 어느새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 어두운 하늘 위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걷던 고독한 영웅 .

"아버님 . 당신의 한을 이 아들이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낮게 중얼거리던 백룡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이 버렸고 민심마저 돌아섰습니다. 아버님, 그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 순간 그는 주먹을 쥐었다. 찰나적으로 그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뇌정각은 사라졌다. 수동(水洞)이 폐쇄되었고 집전령이 떨어진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른다.'

백룡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양몽경 . 그의 생사조차 불투명하다. 대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 순간 백룡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천하(天下)는 너무도 넓고 내가 할 일은 너무 힘든 것이다.'

백룡은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일을 과연 해야 옳은가?'

그의 눈에 핏빛 고뇌가 스쳤다.

'그것을 모르기에 괴롭다.'

그는 다시 술병째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고, 공자님!"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 ?"

작은 인영 하나가 그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바로 아경이었다. 공포의 빛으로 가득차 있는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구, 구해주세요!"

백룡은 취한 눈을 들었다.

"누구를 말이냐? 아경."

일잔향의 시녀인 아경은 신음처럼 내뱉았다.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

순간적으로 백룡은 아연해 했다.

"어떻게 되었느냐?"

"납치되었어요!"

팍!

그의 손에 있던 술병이 박살났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아경은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곳은 ."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음침한 기운이 어려 있는 방.

사방은 온통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온갖 고문 도구로 가득차 있었다. 한가운데 천정에 묶인 채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여인의 머리는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전라(全裸)의 육체에는 뱀이 기어간 듯한 무수한 채찍 자국이 나 있었다.

일잔향이었다.

그녀의 봉목은 공포로 인해 잔뜩 부릅떠져 있었다. 수치를 느끼기에는 공포가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푸시시 !

불에 벌겋게 단 인두를 물에 넣자 푸른 연기가 솟았다.

"흐흐 ! 너의 그 고운 몸뚱이를 이것으로 눌러주면 어떻게 될 것같으냐?"

회색인간(恢色人間). 옷도 얼굴도 온통 회색인 그는 퀭한 눈으로 일잔향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전신에서는 섬칫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회색인간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인두를 쳐들었다. 인두는 시뻘겋게 이글거렸다.

"흐윽!"

"일잔향. 며칠 전만 해도 너는 십무단의 유수한 자객(刺客)이었다."

회색인간은 입을 씰룩였다.

"그러나 지금은 배신자에 불과하다."

인두를 든 채 일잔향에게 다가가는 회색인의 퀭한 눈동자가 기광을 발했다.

"백룡이라고 했나? 그놈으로 인해 너 자신을 포기할 셈이냐?"

회색인간은 일잔향의 머리에 인두를 갖다 댔다.

파시식 !

그녀의 머리칼 몇 올이 인두의 열기에 녹아버리는 순간 일잔향은 공포에 질려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회색인간은 조소를 떠올리며 섬뜩할 정도로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후후 . 이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고문술은 끝이 없다. 너는 어차피 죽을 몸이니까 일찍 불수록 좋다."

비정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에는 미녀의 알몸조차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끔찍한 웃음을 흘렀다.

"흐흐 . 노부는 전륜단(轉輪壇)에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꼽힌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영원히 그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무수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순간 일잔향은 모든 것을 각오한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

회색인간의 눈이 음산한 빛으로 번뜩였다.

"곧 생각이 바뀔 것이다."

치직!

인두가 일잔향의 오른쪽 유방을 눌렀다.

"아악!"

열기가 채 닿기도 전에 가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일잔향은 자신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친구! 자네가 고문의 전문가라면 나는 그런 작자를 처리하는데 전문가라네."

낭랑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음성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천정이 쩍 갈라지며 빛이 뿜어졌다.

"크악!"

회색인간이 빛을 본 것과 그의 손이 잘려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인두를 움켜쥔 손이 어느새 허공으로 솟았다. 때를 같이하여 회색인간의 얼굴은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때 공중에 떠올랐던 시뻘건 인두가 쏜살같이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빨라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다.

"으아악!"

인두가 회색인간의 미간에 깊숙이 박혔다.

푸지지직 !

매캐한 냄새와 함께 살타는 노린내가 났다. 머리가 시커멓게 타들어 간 채 쓰러져 있는 회색인간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어렸다.

"사 상공!"

울음섞인 일잔향의 외침이 방 안을 울렸다. 그 순간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있었다. 바로 백룡이었다. 그는 그녀를 천정에서 풀어내렸다.

"흐윽!"

일잔향은 복받쳐 오르는 설움과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 백룡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상처를 바라보며 등을 토닥였다.

"고생했군."

그 한 마디. 그것은 천만 마디보다 더한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그의 따뜻한 말에 모든 원망과 한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더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그녀가 당한 고통과 그 이유를 모두 말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장삼을 벗어 그녀에게 입힌 백룡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눈치를 챘군."

일잔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제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백룡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제 천하 어디를 가도 추적당할 거예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룡이 입을 열었다.

"한 곳을 소개하겠소."

" ?"

"낙양 만향원(晩香院)으로 가시오."

일잔향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떤 곳인가요?"

"기원이오."

순간 일잔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룡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계속했다.

"유향경이란 여인에게 말하면 의탁할 수 있을 것이오."

그녀의 눈에 초조한 빛이 어렸다.

"뭐,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백룡은 쓴 웃음을 지었다.

"한 마디면 되오. 방탕아가 보냈다고."

"방 탕아?"

백룡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잔향. 이제 그대는 자객도 그 무엇도 아니오. 앞으로는 다르게 살아야 할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에 또다시 이슬이 맺혔다.

"저도 이젠 지쳤어요. 살인은 언제나 무서웠어요."

백룡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일잔향이 살인이 무섭다?"

그녀의 눈에 맺혔던 이슬이 반짝 빛을 발하며 떨어져 내렸다.

"언제나 무서웠어요. 그러나 살인을 해야만 저는 살 수 있었어요."

백룡은 일잔향의 머리칼을 쓰다 듬었다.

"이제 그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되오."

일잔향은 그의 품에 안겼다. 넓은 백룡의 가슴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이제 그녀의 모습은 과거의 일잔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온순한 것이었다. 그녀는 영롱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백룡은 담담하게 말했다.

"인연이 닿는다면 ."

그의 말은 웬지 쓸쓸하게 들렸다. 이윽고 백룡은 그녀를 안고 창 밖으로 쏘아갔다. 한 줄기 빛이 밤하늘에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강아는 숨이 턱에 차서 외쳤다.

"어디로 가는 거죠?"

"발길 닿는 대로."

강아는 퉁명스레 말했다.

"쳇!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목적지도 없단 말이에요."

"없다. 갈 곳이 없으니까 떠나는 것이다."

붉은 석양이 무창성을 떠나는 두 사람의 어깨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아는 뛰어가고 백룡은 석양을 등에 진 채 갈짓자로 유유히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보기에는 느렸으나 강아가 쫓아가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강아는 고함을 쳤다.

"같이 가요!"

땅거미가 몰려오는 가운데 무창성은 야등(夜燈)으로 휘황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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