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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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69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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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2권 20장 바람(風)과 백룡겁(白龍劫)



바람(風)이 불었다.

천하(天下)를 경동시키는 바람 . 이름하여 백룡겁(白龍劫)이라고 하는 바람이었다. 대강남북(大江南北)을 뒤흔드는 백룡겁의 바람은 핏빛이었다.

진홍의 핏빛 혈풍(血風)이 불기 시작했다. 왜? 무엇 때문에 피바람을 일으키겠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왜냐면 혈풍의 장본인이 워낙 신비하기 때문이었다. 머리는 보이는데 꼬리를 보이지 않는 신룡인 양 그의 행적은 표흘무비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인물.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단 하나,

이름이 백룡(白龍)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불시에 나타나 살인을 하고 사라졌다. 그가 죽이는 대상은 놀랍게도 흑도백도(黑道白道)에 총망라되어 있고, 어떤 면으로 보아도 죽은 자들에게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었다.

개중에는 성인군자도 있는가 하면, 극악무도한 사마외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같은 점이 있다면 그들 중 아무도 살수의 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천하제일살수(天下第一殺手)!

대자객(大刺客)!

어느새 그에게는 이런 이름이 따라 붙었다. 그리고 그는 유유히 천하인을 비웃듯이 사라졌으며 어딘가에서 또다시 살인을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불과 5개월간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한 무림인사들의 숫자는 놀랍게도 일백인(一百人)이 넘었다. 마침내 백룡이란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흑도나 백도를 막론하고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공적(公敵)!

무림개사 이래로 공적으로 몰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백룡은 어느새 무림의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흑도 백도를 막론하고 칼을 뽑게 되었다.

무림(武林)은 지난 수십 년 이래 잔잔한 호수인 양 평온을 유지해 왔다. 그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세인들은 그 이유를 20년 전의 무림고수들의 대량실종으로 꼽았다.

20여년 전 무림인, 특히 그 중에서 마도에 속하는 인물들이 대거 실종되었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득을 본 것은 백도무림이었다.

마도인(魔道人)의 대량 실종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백도가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난 20년간 무림은 백도천하였고 그 때문에 유례없는 평화를 유지했다.

그런데 마도가 사라진 이후 문제는 도리어 백도무림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백도인들끼리의 세력다툼이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의 명문 정파를 위시하여 신흥무벌들이 각축을 벌인 것이다. 자고나면 우후죽순(雨後竹筍)인 양 신흥무벌이 나타났다.

그들은 무림명문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 야망의 기치를 세웠다. 그로 인해 무림에서는 끊임없이 시비가 일어났으나 다행히도 대량살상까지 비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다.

하루 아침에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어제까지 어깨를 으쓱이며 강호를 활보하던 무림백도세가 하루 아침에 마도에 밀려버린 것이다.

사라졌던 거마(巨魔)들이 속속 출현함과 동시에 곳곳에서 마문(魔門)이 창궐했다.

그 동안 백도는 단합보다는 분열을 계속했고 서로를 경원하게 되었는 바, 반면 마도는 일사불란한 조직과 단결로 움직여 백도를 빠르게 퇴조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도무림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쉽게도 구파일방을 위시한 백도무림은 아직도 깊은 안면에 빠져 있었다.

변화의 조짐을 눈치챈 자가 있긴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인가?


금분세수식(金盆洗手式).

금대야에 손을 씻으므로 세상일과의 은퇴를 선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림에서는 은퇴식을 일러 금분세수한다고 했다.

무림인이 은퇴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일이 아닌가. 평생 칼바람 속에서 살다 공적을 쌓은 후 연로하여 일선에서 물러나는 일, 그것은 전무림인들의 이상이자 바램이었다.

금도무적(金刀無敵) 화무비(華無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무사될 자격이 없다고 인정될 정도였다. 그만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위인도 드물기 때문이었다.

금도무적은 별호처럼 금도(金刀)를 병기로 삼아 무적(無敵)을 자랑했다. 크고 작은 수천 번의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과연 한 무림인이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맞닥뜨려지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린 일이나 무적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필생의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무적의 칭호를 받는 금도무적 화무비가 오늘 은퇴식을 갖는 것이다.

섬서성(陝西省) 태백산(太白山)의 금도산장(金刀山莊)은 금분세수를 축원하기 위해 구름같은 인파가 몰렸다. 때에 걸맞게 축제 분위기를 더하는 것은 화무비의 금분세수일이 회갑일을 겸하였기 때문이었다.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 또는 멀리 막북(莫北)에 이르기까지 무림인사들이 몰려와 하례를 청했다. 그것은 그만큼 금도무적이 인품이나 덕망에도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백도라 할 수도 없고 흑도라 칭할 수도 없는 것이 화무비에 대한 평(評)이었다. 그의 처신은 중립을 지켜 친구는 많되 적은 없었다.

그런 인물이 금분세수한다면 하객들은 당연히 엄청나게 많을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로 인해 태백산의 금도산장은 손님들을 받기에 정신이 없었다.

평생 누구보다도 많은 제자들을 둔 화무비였다. 그의 제자는 자그마치 16인이었다.

개중에는 이미 사부 못지 않은 명성을 날리는 제자도 있었다. 대제자인 무영신도(無影神刀) 궁일영(弓一影)이 바로 그러했다. 궁일영은 이미 일류고수로 손꼽히는 후기지수였다.

현재 나이 30세인 그는 사부의 진전을 승계하고 또다른 기연을 얻어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었다. 그는 과묵한 청년이면서 행동이 신중했다. 더더욱 높이 살 점은 무공광(武功狂)으로 끊임없이 무공 정진을 한다는 점이었다.

궁일영은 물밀듯이 밀려드는 하객들을 접대하면서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무례하지도 않되, 비굴하지도 않은 진중한 자세를 초연하게 유지했다.

대부분이 한 지역의 호웅들인 하객들은 그런 궁일영을 보고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금도무적은 은퇴하여도 금도산장의 명성은 이 청년으로 인해 더욱 빛나겠군."

모든 하객들의 한결같은 찬사였다.

그런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궁일영은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것같군 ."

때는 12월, 삭풍이 태백산을 휩쓰는 계절이었다.

멀리 장성(長城)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대막의 삭풍은 얇은 옷으로는 견디기 힘들 만큼 매섭고 차가운 것이었다. 만일 눈이 내린다면 태백산은 온통 은세계로 화할 것이다. 한 번 눈이 쌓이면 하절기가 될 때까지 고봉에서는 눈이 녹지 않았다.

금도산장은 태백산 중턱에 있었다. 산장으로 오르는 길은 잘 닦여져 있어 금도산장의 성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늘처럼 기쁜 날의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궁일영은 약간 당혹해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하객들이 몰렸다. 사부님께서도 뜻밖이라는 표정이셨다.'

그렇다. 금도무적의 명성이 비록 욱일승천하였다지만 은퇴식에 이렇게 많은 하객들이 몰릴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화무비는 다만 가까운 지기들과 함께 조촐한 금분세수를 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하객이 몰린 것이다. 그로 인해 그다지 넒지 않은 산장이 미어졌음은 물론이고 음식관계며 접대관계가 여간 골치 아프게 된 것이 아니었다.

궁일영은 대제자로서 모든 공무를 도맡아야 했으므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 기념일은 하루를 남겨두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몰려온 손님들은 대충 당도한 듯 싶었다. 궁일영은 한가해진 대문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거의 도착한 모양이군."

이때였다.

"방명록에 서명을 해야 합니다."

약간 높은 음성이 대문 쪽으로부터 들렸다. 궁일영은 그것이 셋째 사제 악운비(岳雲飛)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악운비의 음성에는 웬지 짜증이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이 났단 말인가?'

행여 사제가 실수하여 산장의 명예를 실추시킬까 봐 그는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향했다.

대문 앞에 매우 음침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뿌리는 12인이 서 있었다. 한결같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죽립을 눌러쓰고 일신에는 마의(麻衣)를 입은 자들이었다.

하객으로 마의를 입고 온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마의는 상복(喪服)으로 널리 통용되는 옷이 아닌가? 정문을 지키던 악운비는 그래서 화가 난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어디서 오셨느냐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궁일영은 악운비를 제지하고 나섰다. 그는 포권을 취하고 공손히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방면의 고인이신지요? 불초의 사제가 철이 없어 결례를 범했다면 저의 얼굴을 보아 용서하시고 성함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추호의 거만함도, 그렇다고 저자세도 아닌 태도였다.

"자네가 궁일영인가?"

한 명의 죽립인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만."

"흠, 소문대로 쓸 만한 제자 하나는 두었군."

악운비는 대사형 만큼 침착하거나 수양이 깊지 못했다.

"흥! 당신들은 누구요? 본장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시오?"

"익! 물론!"

"불용(不容)!"

악운비는 허리춤의 금도를 잡았다.

한참 호승심이 강한 이십대의 나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대사형 앞에서 건방진 작자의 버릇을 가르치고 위신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악운비는 제지당하고 말았다.

"진정하게, 사제."

슬쩍 잡았을 뿐인데도 악운비는 어깨까지 찌르르하여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사부님의 축수일이네. 소란을 벌이면 곤란해."

낮게 말하는 궁일영의 음성이었으나 그 말이 악운비에게는 천둥처럼 들렸다.

'기연을 만나 사형의 내공이 사부님을 능가한다더니 . 그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때 죽립인이 말했다.

"이 곳은 잔치집이 아닌가? 잔치집이란 본래 손님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관례에 따라 방명록에 서명을 하셔야 합니다."

궁일영의 담담한 말에 죽립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만 하면 된단 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이었다. 악운비는 분통이 터졌으나 억지로 참았다. 만일 궁일영이 없었다면 벌써 도를 뽑았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흐흐 . 그거야 어렵지 않지."

죽립인은 탁자에 펼쳐져 있는 방명록에 휘갈겨 썼다. 그가 휘갈겨 쓴 이름을 본 순간 악운비는 또다시 분통이 터졌다.

모일충(毛一蟲), 모이충(毛二蟲), 모삼충(毛三蟲) 계속하여 모십이충(毛十二蟲)까지 써내려 간 것이었다.

그것은 고의로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세상에 이름에 벌레충을 붙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배알도 없는지 궁일영은 정중히 포권했다.

"안으로 드십시요."

"대사형 ."

악운비가 볼멘 소리로 말하자 궁일영은 담담히 말했다.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예가 아니네. 사제."

그는 거들먹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모12충들을 안내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탕!

분통이 터져 발을 구르자 땅에 한 치 깊이의 족인이 찍혔다. 악운비는 시선을 잿빛 하늘로 향했다.

"빌어먹을 ! 마음에 들지 않아. 한창 금도산장이 뻗어나가는판에 은퇴를 하려는 사부님이나 잘난 척하는 사형이나 ."

이때였다.

휙!

무엇인가 그를 지나쳐 갔다.

"누구냐!"

재빨리 돌아섰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니?

'내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돌리던 그는 흠칫했다.

방명록에 붓대를 놀리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송충이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꼬마야,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그 말에 멋지게(?) 서명을 마친 꼬마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악운비는 움찔했다. 동그란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나이는 무척 어려 보였으나 눈에서는 쇳빛이 흘러나왔다.

"헤헤 . 나를 꼬마라고 불렀소?"

가관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까는 벌레 12마리가 날뛰더니 이번에는 꼬마놈이 함부로 맞먹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소년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평범한 눈빛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 너도 하객이냐?"

"그럼, 조객이어야 한단 말이오?"

" !"

소년은 히죽 웃었다. 웃을 때 흰 이가 드러나 무척 천진한 느낌이 들었으나 나이답지 않게 완강하게 느껴지는 성숙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헤헤헤, 들어가도 되오?"

"하지만 서명을 ."

그는 곧 아차, 싶었다. 방명록에 서명을 한 것을 보았는데도 헛소리가 나온 것이다. 소년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먹을 것은 충분한거요?"

소년은 마지막까지 그의 약을 올리고 사라졌다.

악운비는 멍청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화가 날 일이었다. 모12충에게도 당한 터에 꼬마에게 다시 한 방 얻어 맞은 것이다.

"니미럴! 짵!"

그는 침을 뱉고 방명록을 들여다 보았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앗!"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맨 아래 난에 소년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포대강(包大江)>

그러나 그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소년의 이름 바로 위에는 먹이 채 마르지도 않은 또 하나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배, 백룡(白龍)!"

한기가 등골까지 파고 들었다.

백룡겁(白龍劫)이라는 문구가 전광처럼 떠올랐다. 모12충이라는 이름과 포대강이라는 이름 사이에 쓰여져 있는 이름.

그러나 분명 모12충이 들어간 이후에 서명을 한 자는 소년 밖에 없었다.

'혹시 그 꼬마놈이 서명을 ?'

그러나 아니었다.

글씨체가 완전히 틀렸다. 포대강이란 이름은 유치하고 치졸한 서체였으나 백룡이라 서명한 서체는 활달한 기상과 유려함을 느끼게 하는 명필이었던 것이다.


오색 등룡이 걸리고 축하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하객들은 대청을 가득 메웠고 웅성거리는 소음이 시끌벅적하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금도무적의 과거 행적을 이야기하며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선배고인이라고 칭송했다.

이윽고 대청 안으로부터 북소리가 둥둥 울리더니 일단의 인물들이 걸어나왔다. 앞장 선 자는 일신에 화복(華服)을 입은 온후하게 생긴 육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군웅들은 한눈에 그가 금도무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까지 늘여진 휜 수염에 두 눈에는 정광이 이글거리는 노인이었다. 그의 뒤에는 열여섯 명의 청년들이 따르고 있었다. 역시 기도 헌앙하고 눈빛이 부리부리한 청년들로서 허리에는 똑같이 금도를 찼다.

"금도 십육영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널리 알려진 이름 그대로 금도십육영(金刀十六英)은 바로 금도무적의 16제자였다.

그의 뒤로는 두 명의 청의(靑衣) 시비가 금대야와 은쟁반을 받쳐들고 따랐다. 금대야에는 맑은 물이 담겨 있었고 은쟁반에는 보광이 찬란한 금도가 얹어져 있었다.

위풍이 당당했다.

뿐만 아니라 다시 뒤로는 일단의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었다. 중도 있었고 도인도 있었으며 또는 걸인의 모습도 보였다.

중인들은 연이어 탄성을 질렀다.

"소림의 백현대사(白玄大師)다."

"무당의 장진진인(長眞眞人)도 있소!"

"검산의 패검괴노(覇劍怪老) !"

"어디 그뿐이오? 개방의 광풍취화자(狂風醉和子)도 있소!"

장내가 시끌벅적해졌다. 대략 15, 6인을 헤아리는 인물들은 대개가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는 고인들로서 명문대파의 신분이 높은 인물들이거나 한 문파의 주인들로서 흑도에 속한 인물도 있었다.

한 마디로 다양한 신분의 쟁쟁한 위인들이 모인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과연 화대협의 교분이야말로 넓군! 저분들은 모두 축하를 하기 위해 달려온 모양이오. 평소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분들 아니오?"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화무비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길이 다른 고인들을 초청할 수 있겠는가?

"허허허 ! 보잘 것 없는 늙은이의 금분세수를 축원해 주기 위하여 험로를 마다않고 여러분께서 오실 줄은 몰랐소이다. 불초는 정말 감격할 따름이외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화무비가 나서서 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늙은 얼굴에 감개무량한 빛이 어렸다. 일세를 풍미한 고인다운 풍모였다.

"아아! 강호를 주유한 지 어언 육십 년이 흘러 회갑이 되었소이다. 헛헛 ! 쓸데없이 나이만 먹었소. 이제 여러 동도들을 대하니 불초는 새삼 여러 가지 일이 떠오르는구려."

장내는 낙엽조각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정숙해졌다.

"허 . 개중에는 아쉬운 일도 많았고 안타까웠던 일. 그리고 때때로 보람이 있었던 적도 있었소이다."

어느덧 늙은 영웅의 눈에 반짝 이슬이 어렸다.

중인들은 숙연해졌다. 회갑까지 살아온 무림고인의 감회가 전달된 때문이다. 자신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인간적인 교감이 통한 것일까.

화무비의 말은 계속되었다.

"생각해 보면 공(功)보다는 과(過)가 많고 아쉬움이 많은 세월이었소이다."

화무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탓일까, 그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여러분의 축복 속에 금분세수를 하고 야인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일 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고 일 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하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인들은 환호를 보냈다. 이어서 노 영웅에 대한 찬사와 갈채가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축하의 말과 칭송의 말이 들렸다.

화무비는 연신 손을 맞잡고 답례를 보냈으며 얼굴에는 감격스러움이 어렸다.

이윽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두 명의 청의시비 중 금대야를 받쳐든 소녀가 올라와 금대야를 탁자에 놓고 물러섰다.

장내는 숙연해졌다. 이제 화무비가 금대야의 물에 손을 씻기만 하면 그는 일세영웅(一世英雄)에서 야인(野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림에는 하나의 불문률이 있었다.

아무리 원한이 많고 적수가 많다 해도 일단 무림등도들을 모아놓고 금분세수를 한다면 더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일 불공대천의 원수이거나 그와 해결할 일이 있다면 손을 씻기 전에 나서서 결투를 신청해야 했다.

다만 이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때는 금분세수를 하는 인물의 사문이나 친우들이 대신 나서서 싸움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행사를 할 때는 가까운 지기들이 모여와 보호를 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중인들은 금도무적이 무사히 금분세수의 행사를 마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들이 보기에 지금 화무비의 지기(知己)로 와 있는 고인들을 향해 도전장을 낼 간덩이 큰 자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또 한 가지, 화무비의 평소 인품과 덕망으로 보아 생사를 도외시하고 행사를 방해할 만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듯 싶었다.

화무비가 금대야까지 다가가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무비의 눈에는 언뜻 안도의 빛이 스쳤다.

"허허 . 노부는 여러분께 고마울 따름이오"

그가 대야에 손을 담그려는 찰나였다.

"크흐흐흐 ! 화무비! 그렇게는 안 된다."

중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펑! 하는 폭음과 함께 금대야가 산산조각 나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대청의 상단부를 주시했다.

12인의 괴객.

한결같이 마의(麻衣)를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삿갓을 쓴 인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순간 잔치의 분위기는 산산이 깨어졌다.

장내는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으며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무비는 역시 노 영웅다웠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답게 이 상황에서도 별로 놀라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포권을 했다.

"귀하들은 노부에게 어떤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죽립인 하나가 코웃음쳤다.

"흥, 화가야! 금분세수를 기화로 도망을 치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화무비의 눈썹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화무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담담히 말했다.

"노부는 육순이 넘는 동안 한 번도 도망을 쳐본 적이 없소이다. 귀하들께서는 대체 어인 일로 노부를 중상하시오?"

"중상? 크흐흐흐 . 가소롭구나. 정녕 발뺌을 하겠다는 거냐?"

죽립인의 말은 갈수록 험악해졌다. 아무리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군웅들이 지켜보는 중이 아닌가. 중인들은 모두 분노를 느끼는 듯이 웅성거렸다.

화무비는 자제하며 담담히 말했다.

"노부는 일평생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파렴치한 짓을 해본 기억이 없소이다. 귀하들은 노부에게 어떤 빚이 있는지 이 자리에서 밝혀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대인다운 풍모였다. 자신을 그다지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고 기품 있는 태도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만일 노부에게 원한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떳떳이 말씀하시고 강호 관례에 따라 해결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오."

"흐흐흐 .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구나. 화가야, 너의 그 성인군자인 척하는 위선에 속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형제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였다.

"아미타불 !"

웅후한 불호성이 들리며 한 명의 황색가사를 입은 노승이 장내로 걸어왔다. 바로 소림의 달마원 소속의 고승인 백현대사였다.

"외람되이 빈승이 한 마디 하겠소이다. 시주들께서는 성함을 밝힌 후 사정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오이다. 이 자리에는 많은 무림제위들께서 계시니만큼 지나친 행동은 예의가 아닌가 하오."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깃든 충고였다. 소림의 고승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로서 백도의 정신적인 지주로 수백년간을 군림해 왔다. 비록 세속을 초월한 법문의 승들이라 해도 무림에서의 지위는 지고한 것이다.

그러나 삿갓괴인의 반응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흐흐흐 . 고작 소림의 땡중 따위를 방패로 내세워 죽음을 모면하려고 했느냐? 화가야, 방법이 너무 유치하구나!"

"아미타 불!"

백현대사도 비록 수양이 깊은 고승이었으나 이 말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합장불호를 외었는데 그의 불호성에는 사자후(獅子喉)가 실려 있었다.

"무량수불! 도우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오!"

문득 도호가 울리며 비쩍 마르고 손에는 불진을 든 한 명의 노도인이 나섰다.

그가 바로 명성이 드높은 무당의 장진진인(掌眞眞人)이라는 것을 모르는 군웅은 없었다.

무당파는 도가제일문이자 내가무학의 시조이기도 했다. 소림이 외공으로 이름을 날렸다면 무당은 내가무학의 고봉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당의 태극검법(太極劍法)은 검가의 추앙을 받고 있지 않는가?

장진진인은 현 무당파 장문인과 같은 항렬로서 무당 내에서도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마침내 죽립인들의 오만방자함을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달렸다.

"익, 이번에는 말라 비틀어진 말코도사인가? 많이도 끌어들였군!"

갈수록 가관이었다.

도대체 죽립인은 간덩이가 얼마나 크기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단 말인가? 근자 들어 비록 마도가 창궐한다고 하지만 소림 무당 양문은 백도의 양대거봉이 아니던가?

군웅들은 손에 땀을 쥐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화무비의 금분세수를 축하해 주기 위해 왔으나 무림인 특유의 호기심만은 어쩔 수 없었다.

고수들의 싸움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것이다. 일류고수들의 싸움을 관전하는 것은 무공을 정진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기에 이 기회에 안목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이었다.

이제 금분은 깨어졌고 손을 씻을 물도 없어졌다.

남은 것은 사태를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화무비는 연신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주인으로서 일이 이렇게 비화된 데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더이상 죽립인들의 방약무인함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앞으로 나섰다.

"도대체 귀하들은 노부에게 어떤 원한이 있길래 온 것이오?"

죽립인은 차갑게 말했다.

"흐흐흐, 벌써 까맣게 잊었단 말이냐? 우리 모가(毛家) 전래로 내려오는 가전지보(家傳之寶)를 훔쳐가고도 발뺌을 할 셈이냐?"

순간, 화무비의 노안에 언뜻 불길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담담히 말했다.

"금시초문이구려. 노부는 평생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소이다. 노부 비록 부자는 아니나 그 정도로 가세가 기울지는 않았소이다."

그 말에 군웅들은 박장대소 했다. 그들이 듣기에도 죽립인의 말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도무지 되지도 않는 생떼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죽립인은 계속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 가전지보가 어떤 물건인지 안다면 여러분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오."

순간 장내에 묘한 파문이 번졌다. 죽립인이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반드시 그 물건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분들은 천마삼보(天魔三寶)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것이오. 과거 장한미인이 죽은 뒤 실전되었던 세 가지 보물 말이오."

순간, 장내에는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천마삼보!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300년 전 무림을 혈해로 만들었던 장한미인이 바로 천마삼보로 인해 천하제일마녀가 되었으며,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마도에서 혈안이 되어 찾으려는 지보가 아닌가?

마도뿐만이 아니었다.

천마삼보를 얻으면 천하제일인이 된다는 말이 끈질기게 나돌면서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에도 그것을 얻으려 했다. 천마삼보를 얻으면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인물이 천하제일인으로 부상한다는 소문은 근 칠백여 년 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왔다.


-천마신경(天魔神鏡).

-구음진경(九陰眞經).

-천마신검(天魔神劍).

그 세 가지 물건을 일컬어 천마삼보라 했다.

구체적인 천마삼보에 대한 내용은 다만 소문에서 소문으로 들릴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삼보는 유구한 세월을 내려오면서 인구에 회자되어 왔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천마삼보를 얻는 자는 반드시 마도제일인이 되어 한 차례 무림을 혈해로 만든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한미인이 그러하였고 그 이전 500여년 전의 잔양천마(殘陽天魔)가 삼보를 얻은 후 마도를 통일하고 천마교(天魔敎)를 세워 한 차혜 무림을 혈세한 바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삼보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무림은 엄청난 혈풍에 휩쓸렸다. 삼보 중 하나만 출연하여도 쟁탈전이 벌어져 흑도 백도가 칼부림을 벌였다.

개중에는 한 가지 물건만을 얻은 후 무서운 고수로 화신하여 무림을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또다른 인물에 의해 살해 되었고 삼보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며 계속 주인이 바뀌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립인의 입에서 천마삼보가 거론된 것이다.

군웅들의 눈에서 경악의 빛이 흘러나왔다. 수백 쌍의 시선은 일제히 화무비에게 집중되었다. 과연 화무비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 동안 눈썹을 경련하던 화무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천마삼보라니 노부는 금시초문이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화무비는 표정에서 허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장내의 군웅들 중에서도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상 이번 금분세수의 행사에 예상 이상으로 많은 방문객이 몰린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청장을 보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 사람 모두 화무비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그들마저 이 곳으로 몰려왔던 것일까?

그것은 은밀하게 퍼진 한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그것은 금도무적 화무비가 한 가지 보물을 얻었으며 그것을 영구히 지니기 위하여 은거를 가장한다는 소문이었다. 언제 누구의 입에서 나온 소문인지는 몰랐다.

발없는 말(言)이 하루에 만 리를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으나 일단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인해 금도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이제 군웅들의 관심은 천마삼보에 쏠렸다.

인간이란 묘한 것이어서 일단 탐심이 일어나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사람들의 속성이었다.

죽립인이 금분을 깨고 잔치장을 쑥밭으로 만든 것에 분개하고 있던 군웅들도 이제는 당연한 일이라 여기게 되었다. 도리어 그들의 입에서 더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어 하게 된 것이었다.

상황이 이같이 돌변하게 되자 어두운 안색을 지었던 화무비의 입에서 일성이 터져나왔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감히 이 곳이 어디라고 그런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이냐?"

고막을 울리는 웅후한 사자후(獅子吼)였다.

군웅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같이 웅후한 진력을 지닌 사람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화무비는 정통 무공을 소유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설마 내공이 이 정도까지 이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일성의 사자후에 모두의 안색이 변해버렸다. 대청의 상단에 있던 무림고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소림의 백현과 무당의 장진 등도 크게 놀랐다.

이때 죽립인들 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했다.

"크흐흐! 이제야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화무비, 어서 물건을 내놓아라!"

화무비는 눈썹을 곤두세웠다.

"무슨 물건을 내놓으라는 것이냐?"

"천마신경!"

장내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마침내 천마삼보 중 하나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군웅들의 눈빛은 강한 열기를 띄기 시작했고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장내를 꽉 메웠다.

그때였다. 화무비는 문득 너털웃음을 쳤다.

"허헛헛헛!"

" ?"

"귀하들은 대체 어떤 방면의 고인들인가? 어찌하여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화무비의 질문에 군웅들도 궁금해졌다. 똑같은 복장의 괴인들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떤 인물인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죽립인은 차갑게 말했다.

"우리는 모십이충(毛十二蟲)이다."

군웅들은 멍해졌다. 모12충이라니?

그것은 열두 마리의 벌레들이라는 뜻이 아닌가? 세상에 그런 이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흐흐 . 본좌가 모일충!"

"내가 모이충이다!"

"나는 모삼충!"

"나는 ."

차례로 죽립인들이 나서면서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이라 어느 것이 2충이고 어느 것이 3충인지 도저히 군웅들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화무비는 이미 대제자 궁일영으로부터 그들에 관한 말을 듣고 있었으므로 놀라지 않았으나 군웅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흐흐흐 ! 화무비! 너는 우리 모가가 비장하고 있던 천마신경을 훔치기 위해 모가장(毛家莊)의 식솔 오백 명을 해치고 그것도 모자라 부녀들을 강간한 다음 달아났다. 너의 그런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뭐라고 ?"

화무비는 어이가 없었다. 일생 동안 오점을 남기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런데 도적이라는 말을 들은 것만 해도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인데 또다시 살인마에다 이번에는 색마라는 죄명까지 덮어쓴 것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그의 나이 이미 육순이 넘었다. 비록 아직 건강하다고는 하지만 여색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관심이 멀어져 있었다.

"으하핫핫핫 !"

그는 양천광고를 터뜨렸다. 그 광소에는 격분과 비분함이 어려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비장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다음 순간 화무비는 두 눈에서 전광같은 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노부는 모가성을 가진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이 나이 먹도록 십이충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그가 격분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터무니 없는 말로 노부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네놈들의 말대로 노부가 천마신경을 설혹 지니고 있다해도 그것이 어찌 너희 가문의 보물이라는 것이냐? 노부는 천마삼보가 모가의 물건이라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군웅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화무비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때를 맞추어 그들 역시 죽립인들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천마삼보가 그들 모가의 보물이라는 말도 터무니 없었다.

그렇다면 간단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보물을 얻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흐흐흐! 내 놓겠느냐, 아니면 목숨과 바꾸겠느냐?"

모일충의 살기 띤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죽립 사이로 차가운 안광을 흘리며 화무비의 뒤에서 만면에 분노의 빛을 띄고 있는 금도십육영을 가리켰다.

"저 젖비린내나는 아이들과 금도산장의 육십 명 식솔들의 목숨을 천마신경과 바꾸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늘여라."

엄청난 모욕이었다.

마치 금도산장쯤은 발끝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성미가 급한 화무비의 제자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쳐죽일 놈!"

휘익!

세 명의 금도문하가 금빛 도광을 번쩍이며 모일충을 향해 덮쳐갔다. 그들은 엄격한 스승 밑에서 도법을 닦아 나이는 어려도 도법이 웅후하고 정교했다.

쐐애액!

파공성과 함께 세 자루의 금도는 모일충의 상하 좌우로 전광석화처럼 뻗어갔다. 그런데,

"흐흐흐 이것이 금도산장의 방식인가?"

음충맞은 비웃음과 함께 모일충은 양손을 마치 파리라도 쫓듯이 휘둘렀다.

따다당!

철컥!

"크윽!"

무쇠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림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구슬프게 터져나왔다.

모일충의 손은 육 장으로 금도 세 자루를 휘어 잡았고 그대로 도를 분질러 버린 후 부러진 도를 세 명 청년의 가슴 속에 쑤셔박아 버린 것이었다.

이 일련의 동작은 너무나 빨라 안력(眼力)이 약한 인물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청의 상단부에 있는 고인들은 분명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렸다.

설사 자신들이라 해도 그런 기쾌무비한 반격을 해낼 지 의문스러운 느낌이 든 것이었다.

"크으윽!"

3인의 청년은 가슴을 부여 안고 쓰러졌다. 그들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떠져 있었다.

"크흐흐,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는 것이 금도문하의 장기였단 말이지? 흐흐 . 우리 모십이충은 그런 자들을 가장 혐오하지!"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을 살해한 모일충은 그렇게 말했다.

이쯤되면 금도산장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화무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랑하는 애제자가 한꺼번에 세 명이나 죽었다. 그것도 그의 눈앞에서 손도 쓸 사이 없이 죽은 것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많이 거둔 이유는 아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뒤늦게 본 딸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제자들을 많이 두어 금도산장의 맥을 잇게 하려 한 것이었다.

화무비의 흰 수염이 분노로 인해 푸르르 떨렸다.

"네놈들이 감히 ."

이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침착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사부님, 제자가 나서겠습니다."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황색(黃色) 의삼을 입은 청년. 나이는 30세쯤 되었을까? 얼굴은 영준한 편은 아니나 평범한 가운데 비범한 기운이 느껴지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무영신도 궁일영!"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바로 궁일영이었다.

장차 금도산장을 그가 이끌어 갈 인물답게 궁일영은 사제 세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이렇다할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군웅들 중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정력(定力)이다. 저만한 나이에 저 정도의 수양을 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시 궁일영의 무공이 도리어 사부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닐지도 ."

청출어람(靑出於籃)이라는 말은 이 경우 아주 적당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사부보다 나은 제자, 아마도 세상의 모든 사승들은 자신에게서 그런 제자가 나오기를 바랄 것이다.

"영아(影兒) ."

화무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가장 사랑할 뿐더러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제자였다. 행여나 불행한 일을 당할까 봐 화무비는 저어했다.

그러나 궁일영은 수중의 금도를 안고 예를 표했다.

"사부님, 이 곳은 금도산장입니다. 이 곳에서 무뢰배들이 마음대로 날뛰게 한다면 천하인들은 금도산장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가 어찌 대제자된 도리로서 이같은 일을 방관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사부께서 나서면 신분에 어긋나는 것이니 제자가 나가 해결하는 것이 순리인가 합니다"

궁일영은 본래 과묵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단 입을 열자 논리 정연한 말이 줄줄이 쏟아졌을 뿐 아니라 말하는 가운데 은연중 화무비의 입장을 높여 주기까지 했다.

군웅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떤 자는 부러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우리 사문에 저런 청년이 있다면 사문의 장래는 밝을 것이다.'

화무비는 궁일영의 눈에서 믿음직한 든든함을 보았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조심해야 한다."

그 말은 낮았다. 간신히 궁일영만이 들을 수 있었는데 음성에는 제자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뜨겁게 깃들어 있었다. 궁일영의 눈 속에 찰나적으로 감격의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모일충을 향해 걸어갔다.

모일충은 그가 걸어오는 것을 노려보았다. 그는 하루 전 대문에서 궁일영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흐흐, 네가 바로 무영신도라는 아이냐?"

아이라니 ?

궁일영이 비록 후배라고 해도 그의 나이 삼십이 넘었으며, 무공도 일류였다. 아이라는 칭호는 지독한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궁일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담담히 대답한 다음 똑바로 모일충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한 모금의 물은 동이로 갚고, 한 방울의 피의 빛은 목숨 하나로 갚는 것이 금도산장의 법도요. 귀하는 목숨 세 개의 빚을 졌소. 어떻게 갚을 생각이오?"

" !"

모일충의 삿갓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직선적으로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군웅들은 손에 땀이 촉촉히 배는 것을 느끼며 한시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야흐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긴장감은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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