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랑(狼) 第29章 개코와 늑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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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552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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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9 章 개코와 늑대코

끼아악―!
허공 저 먼 일각으로부터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던 조하림은 갑자기 들려온 새 울음소리에
한 사람의 이름을 머리에 떠올렸다.
'혹시 오령신마(烏靈神魔)? 아니겠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새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 순간 조하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앗! 저 새는 흑오(黑烏)! 역시 오령신마다!'
어찌나 놀랐는지 조하림은 그만 진기의 흐름을 놓쳐 버려 멈
칫! 걸음이 멈추어지고 말았다.

― 오령신마(烏靈神魔)!

흑마성 팔대천마 중 일인인 그는 괴인(怪人)이다. 그는 장님이
요, 귀머거리요, 벙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말을 한다.
그것은 항상 그림자처럼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검은 까마귀의
눈을 통해 그는 보고, 귀를 통해 들으며, 까마귀의 입을 통해 그
는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짐승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통령전심술(通靈傳
心術)이라는 불가사의한 밀법(密法)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다.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들에게 받은 수모와 치욕, 그리고
세상을 증오하는 마음이 마공을 익힘으로써 더욱 짙어져 살인마
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대마왕.
지금 그의 분신과도 같은 검은 까마귀가 하늘에 떠 있었다.
까아악―!

* * *

"죽여 버리고 말거야!"
구미호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금 그녀는 다 부서진 침상 위에 발가벗은 몸으로 앉아 있었
다. 그녀의 온몸은 피멍으로 꽃이 피어 있었다.
그러나 그 피멍은 격렬했고, 뜨거웠으며, 하늘을 날을 것만 같
은 황홀감을 주었던 광란의 정사가 남긴 멍꽃이었다.
당한 것이다. 야랑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지만 혈후 때문에 그에
게 잡혀 이번에는 반 죽다시피 야랑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만약 오령신마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를 알리기 위해 조하림이
방으로 뛰어 들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새벽닭이 올 때까
지 야랑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빠드득! 짐승! 놈은 인간도 아냐!"
구미호리는 서리서리 살기 충만한 안광을 뿜어내다가 몸을 일
으켰다. 그러나 곧 그녀는 풀썩 침상에 다시 주저앉았다.
"아...... 아파!"
두 손으로 아랫도리를 감싼 채 얼굴을 찡그리는 그녀의 입에
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헌데 왜인가? 기를 쓰고 죽이려한 야랑이기에 그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절로 전율이 일지만 그가 남기고 간 이 처절한 고
통의 흔적에 피가 끓는 이유는 뭔가?
구미호리는 열린 방문을 노려본다.
"놈, 오령신마 손에 죽기만 해봐라 내 허락없이 죽어버리면 내
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넌 내 손에 죽어야 해! 그것도 특별한
방법으로!"
살기를 씹으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떠올랐다.

* * *

"못 가!"
야랑은 소롯길 옆의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조하림은 초조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수십 마리의
검은 까마귀가 하늘을 빙빙 선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급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야랑, 나중에 설명해 드린다고 했잖아요. 어서 일어나요."
끄으응!
야랑은 검미를 잔뜩 찌푸렸다.
그는 조하림의 어둡고 조바심 난 얼굴이 싫었다. 그녀가 걸음
을 재촉하며 쨍알거리는 잔소리가 싫었고, 자꾸 하늘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거리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러가 가장 싫은 것은, 구미호리와 짝짓기를 하고 있는데 느
닷없이 뛰어들어와 더 싫었다.
"가요, 제발......."
끼잉!
"야랑, 부탁이에요. 여기서 어물쩡거렸다가는...... 그래요, 그럼
채총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약란!"
채약란이란 말에 야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딨어, 약란!"
크게 외쳤지만 갑자기 야랑은 슬금슬금 조하림의 눈치를 보았
다. 약란 어딨어 이 말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면 조하림이 눈을
흘기며 쨍알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조하림은 하늘과 야랑을 번갈아 보았다.
"그럴지도 몰라요. 오령신마가 나타났다면 그가 상대해야할 만
큼 강한 적이 있다는 것이니...... 청해 땅에 그만한 고수는 그리
흔치 않아요.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드니 어서
길을 서둘러요."
"오(烏) 뭔 신발?"
"오령신마, 흑마성 팔대천마 중 한 사람이죠."
"끄응?"
"잘 못 알아듣겠어요? 그냥 그런 게 있구나, 채약란이 위험하
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편해요."
"약란!"
"그래요, 당신이 유일하게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 채약란,
그녀가 위험해요. 위험하다는 것은...... 음...... 죽어요."
"약란 죽어?"
야랑의 눈이 부릅떠졌다.
"약란, 안 죽어!"
그는 덥석 조하림의 손을 잡았다.
"가! 약란한테......!"
"가요."
이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야랑을 바라보며 조하
림은 길을 재촉하려 했다. 헌데 돌연 야랑이 으르렁거렸다.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의 행동에 조하림도 경각심을
일으켰다.
'혹시 오령신마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 직후, 과연 폭풍처럼 장내를 향해 몰아닥치는 그림자가 하
나 있었다.
슈파앗!
그는 평범한 얼굴을 지닌 중년인으로 마치 칼장수 같이 양손
에 검을 들고 등, 허리, 손목, 허벅지에도 칼자루가 있어 빽빽이
검이며 도가 꽂혀져 있었다.
"하하하! 조곡주, 오랜만이외다."
나타난 자는 조하림을 향해 반갑게 웃어 보였다.
조하림 역시 온 얼굴에 반가운 빛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천인살사(千刃殺士) 검대협(劍大俠)!"

― 천인살사(千刃殺士)!

야랑과 조하림 앞에 나타난 자는 천인살사였다.
천인살사는 껄껄 웃으며 조하림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몰랐소이다. 이곳에서 조곡주를 뵐 줄은...... 못만난 사이 더
예뻐지셨소이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혹시 국수 먹는 일은
아니겠지?"
조하림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여전히 짓궂으시군요."
한편, 야랑은 천인살사를 힐끗 일견한 후 조하림이 얼굴까지
붉히며 몸을 배배 꼬자 한껏 못마땅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터뜨
렸다.
킁!
천인살사는 시선을 돌려 야랑을 보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아우님도 계셨구먼...... 그래, 오늘도 내 손이 무안하
게 악수도 안하고 도망칠 생각은 아니시겠지?"
천인살사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헌데 이건 또 뭔가? 갑자기 야랑이 크르렁거리며 경계태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싸움? 좋아!"
천인살사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
야랑은 싸늘하게 웃으며 마치 개를 부르듯 손짓으로 오라, 오
라 했다.
"허허...... 악수하자고 손을 내민 게 아우님께 그렇게도 큰 죄
인가? 저번에도 악수하자니까 화를 내며 떠나더니 이번에는 싸
우자네?"
천인살사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 순간 아찔해지도록 당황한 것은 조하림이었다. 그녀는 야
랑을 말리기 앞서 천인살사를 이해시키기로 했다.
"그러지 마세요. 검대협님, 이 사람은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덤비는 것으로 알고......."
"덤비다니?"
"그러니까 그는 우리말을 잘 못알아 듣고 또......."
그때 야랑이 소리치며 조하림의 말을 막았다.
"하림, 사정하지마, 야랑, 이겨!"
"야랑, 그게 아니에요. 악수라는 것은 인사예요.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도 강호에는 여러 가지 인사가 있어요. 포권 아시죠? 포
권?"
조하림은 허둥거리며 두 주먹을 맞잡아 포권의 자세를 취해
보였다.
순간 야랑이 눈을 부라린다.
"하림, 나도냐?"
"에엥? 이...... 이건......."
조하림은 주먹을 급히 풀며 얼버무렸다.
"주먹을 쥔 건 싸우자는 게 아니고...... 난 몰라......."
조하림은 울먹거렸다.
그러나 야랑은 아랑곳 않고 얼굴까지 시뻘개졌다.

― 나쁜 암컷! 칼 많은 수컷이 나타나 싱글거릴 때부터 알아봤
다. 니네들 서로 배꼽 맞춘 사이지? 그러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
도 내게 꼬리를 살랑치던 하림이 갑자기 주먹질부터 하려고 하고,
저 칼 많은 놈 다짜고짜 싸우자고 손부터 내밀은 게 틀림없다.
치사한 것들, 그런다고 내가 니네들에게 당할 줄 아느냐?

"야랑...... 제발......."
조하림은 울먹이듯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르......
"덤벼!"
"자꾸 이러면 나 화내요!"
"나도 화나."
"야랑이 왜 화가 나요? 화를 낼 사람은 우리인데, 어쩜 인사도
못 알아 봐요, 인사도......."
그러다가 조하림은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야랑을 만난 은주성에서부터 종남산 난화곡까지 갈 때 그들은
사람이 없는 길을 택했고, 난화곡에서도 야랑은 혼자 지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소개시켜 준 일이 있어야 인사를 가르
쳐 줬을 텐데 만난 사람이 없다.
"이런 실수를...... 이 사람 인사법 몰라......."
조하림이 탄식을 터뜨릴 때 한쪽에서 천인살사는 그녀와 야랑
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인사를 몰라? 이거 재미있는데, 먼저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
인지 그것부터 듣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다.'
생각을 정리하고 난 그는 조하림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조곡주, 난 화도 나지 않았고, 저 친구에겐 나쁜 감정이 없다
오. 난 저 친구를 아우로 삼고 싶을 정도인데 어찌 악감정이 있
겠소."
그 말에 조하림은 한시름을 놓았다.
말이 안 통하는 야랑을 붙잡고 시름하느니 말이 통하는 그를
이해시키는 게 더 빠르니까.
이윽고 조하림은 야랑이 옆에서 지랄발광을 떨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천인살사에게 야랑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허나 그녀는 야랑과 자신이 몸을 섞은 얘기는 살짝 빼놓았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천인살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그냥 뭔가 땡기는 것이 있
어 아우로 삼을까 싶었는데 이젠 세상 무너져도 진짜 아우로 삼
아야겠는데."
이때 돌연 야랑이 흥분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싸우자고?"
"야랑!"
조하림은 순간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야랑은 분노의 시선을 이글거리며 날벼락처럼 고함쳤다.
"말리지 마!"
조하림은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다.
"이 바보야!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흑마성과 팔황겁 놈들과 싸
워! 눈에 띄는 족족 사람 패고 다니지 말고!"
바로 그때다. 홀연 저만큼 아득한 밤하늘로부터 두 줄기의 그
림자가 뽀얀 먼지바람에 싸인 채 장내를 향해 날아왔다.
파라라락!
조하림은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생각대로였어! 저들은 천지쌍선이야."
천인살사의 얼굴 역시 굳어진다.
하지만 야랑만이 적의로 불타 올랐다.
"또냐? 다 덤벼!"

* * *

팟!
천지쌍선이 장내에 내려서자 야랑이 눈을 부라렸다.
크르릉......

― 저 늙은이들 나 안다! 저 늙은이들은 약란과 같이 있었다.
저것들을 족치면 약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천룡도제와 지라검후를 본 순간 야랑은 물불 가리지 않고 다
그쳐 묻기 바빴다.
"약란, 어딨어?"
주위의 공기를 웅웅 파동시키는 쩌렁한 외침이었지만 천지쌍
선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박혀 있는 곳은 천인살사였다.
"자네는 천인살사?"
"오랜만에 두 분을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천룡도제가 검미를 곤두세웠다.
"안녕하시지 못하네."
"그 무슨 농담을......."
"내가 자네 같은 후배와 농담이나 하는 실없는 늙은이로 보이
나!"
"그런 뜻은 아니고......."
"아니면 됐네. 미안하지만 자리를 좀 비켜 줄 수 없겠나. 본
성의 일로 조곡주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천인살사는 껄껄 웃었다.
"사해가 친구요, 하늘을 이불 삼아 땅을 요 삼아 다니는 후배
입니다만 백의성과는 친구라 생각해오고 있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습니다. 보아하니 강적이 나타난 듯싶은데 후배
도 돕겠습니다."
그러나, 천룡도제는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에겐 천인살사란 이름이 겁을 줄 수 있을지 몰라
도 우리에겐 통하지 않는다. 갈 텐가, 아니면 명을 재초갈 텐가?"
헌데 이때였다. 야랑이 돌연 천지쌍선의 앞으로 불쑥 나서며
당당하게 외쳤다.
"약란, 내놔!"
천지쌍선은 어리둥절하여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이 일시 말을 잇지 못하자 야랑은 기세등등하여 눈을 부
라렸다.
"덤벼! 패면 말하게 돼!"
점입가경(漸入佳境), 천지쌍선의 눈이 순간 길게 찢어졌다.
"호랑이간을 씹어먹은 놈이로구나! 그렇지 않아도 전에 결말을
못본 싸움이 마음에 걸렸는데 너 잘 걸렸다!"
천룡도제의 신형이 노한 용(龍)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천룡화뢰도강(天龍火雷刀 )!"
콰우우우우―!
쏟아지는 도의 불기둥! 말 그대로 천번지복(天飜地覆)의 위력
이 품어져 있는 절대거력의 도강이 눈부시게 터져나왔다.
야랑은 상대의 무공이 자신이 지금까지 겨루었던 자들과는 판
이하다는 것을 즉각 깨달았다. 그는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양손
을 빠르게 휘저었다.
쐐애애―――― 쐐애액!
천룡도제는 가볍게 놀랐다.
'놈의 무공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배는 고강하다.'
그는 놀랐다. 자신의 자랑인 천룡화뢰도강의 그 무서운 공세
속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마주 공격해 오는 야랑의 손날은 날
카롭기 짝이 없었다.
콰앙! 콰르릉―!
하늘과 땅이 격돌한 듯한 굉음과 함께 천룡도제는 항거할 수
없는 일진의 진력(盡力)이 자신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드는 기
분을 느끼고 말았다.
"윽......!"
짤막한 신음을 터뜨리며 천룡도제의 신형은 바람맞은 가랑잎
처럼 십여 장이나 날려갔다.
노련한 실전경험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만은 간신히 면하고 신
형을 멈춰 세운 그의 눈엔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의 빛이
마구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옆에서 이를 관망하던 지라검후와 천인살사는 물론 그
의 무예를 수차 경험해본 바 있는 조하림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일이다. 저 사람의 무공은 싸울수록 강해지는 것 같아.
설마하니 무공을 감추었다가 조금씩 펼쳐내는 것도 아닐 텐데...
...?'
야랑은 싱긋 웃으며 파리라도 날렸다는 듯 손을 가볍게 털고
있었다.
"둘. 덤벼!"
천룡도제는 다시 분기탱천하여 이를 으드득 갈았다.
"노부가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고 말겠다."
"성(性) 왜 갈아? 영감, 야랑, 똑같은 고추, 고추 좋아."
"뭐...... 뭐시라고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분통이 터지지 않는 게 없다. 천룡도제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머리가 왜 쾅하
고 터지지 않는 건지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침내 그의 몸이 필생의 공력을 다해 짓쳐 나가려는 순간, 지
라검후가 그를 말렸다.
"그만해 두어요. 영감, 그 아이가 그랬잖아요, 상대는 짐승이나
진배없어요. 싸우면 우리만 창피한 일이에요."
"하지만 마누라......."
"참으세요, 당신 개하고 싸워요?"
"내가 미쳤어?"
"그럼 됐어요. 말 안 통하는 개랑 싸우지 말아요."
지라검후의 말에 천룡도제는 칼을 내렸다.
"그렇군, 개였군."
야랑이 졸지에 개가 되었다. 하지만 쬐금이지만 말도 할 줄 알
고 들을 줄 아는 개였다.
"영감, 안 싸우면 성 간다. 고추 떼!"
"으드득!"

지라검후는 조하림에게 말했다.
"조곡주 혼자 뿐인가?"
"무슨?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일입니까?"
"음...... 어쩔 수 없군. 우리라도 찾아 나서는 수밖에."
뜬금 없는 말을 흘린 지라검후는 천인살사에게 말했다.
"자네 손을 좀 빌리세."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말하겠네."
지라검후는 심호흡을 하여 가슴을 진정시킨 후 말했다.
"흑마성의 오령신마와 팔황겁의 고수들과 싸우는 사이...... 백
의성모께서 납치 당하셨네."
"에엣!"
"그럴 리가! 대체 어떤 고수가 나타났기에 백의성모께서 납치
를 당한단 말입니까?"
조하림과 천인살사는 불신에 찬 눈으로 지라검후를 응시했다.
냉정하기로 유명한 지라검후는 두 눈에 분노의 불꽃을 피워냈
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한 마리 망둥이일세. 율보고!
놈이 혼전의 틈을 타 미약(媚藥)을 썼네. 우린 놈을 쫓으려고 했
지만 오령신마 등이 막는 바람에...... 겨우 놈들을 처치하고 이
곳까지 추적해 온 것일세."
순간 조하림이 소리쳤다.
"그럼 서둘러야 해요. 만일 채총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
이 나요."
"물론 큰일이 나지."
"당장 큰일이 난다고요. 이크! 야...... 야랑!"
조하림은 얘기하다 말고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이 순간 야랑이 얼굴 가득 부글부글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며
성큼성큼 지라검후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란...... 어...... 딨...... 어......!"
당장 말을 하지 않으면 팰 태세자 조하림이 급히 그의 앞을
막았다.
"야랑! 내가 말할께요."
"말해!"
"약란...... 나쁜 놈이 훔쳤어요."
"누가?"
"율보고! 나쁜 놈이에요."
"어딨어?"
"몰라요, 찾아야 해요. 찾는다, 알죠?"
"야랑, 약란 찾는다!"
야랑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우―― 우―― 우――
순간이다.
우―― 우―― 우―――
하늘 저편에서부터 역시 짐승의 포효가 들려오더니 이내 장내
에 일인일수(一人一獸)가 나타났다. 혈후가 혈랑의 등에 턱하니
올라탄 채 나타난 것이다.
야랑은 혈랑을 향해 으르릉거렸다.
크르릉......

― 어떤 죽지 못해 환장한 놈이 약란을 훔쳐갔다. 혈왕, 찾아라!
네 코면 능히 약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 크르릉, 약란을 훔친 놈은 죽여야 해! 헌데 야랑아, 아무리 내
가 늑대라 하지만 약란 냄새 맡은 게 벌써 일 년이 가까워지는
데 그걸 기억해낼 수 있겠느냐? 그건 개코 할아비도 못하는 일
이다.

― 죽고 싶으면 깽알거려! 무조건 찾아!

― 눈깔 뒤집혀 앞 뒤 안 가리고 방방 뜨는 건 누군데 저 난리지.
난 암컷 도망가면 안 찾아. 미쳤냐, 그 순간부터 해방인데.
하나 이해한다. 나하고 넌 다르니까.

― 주둥아리 뽑아 버린다! 빨리 냄새 맡아!

― 가만있어 봐, 냄새부터 구분해야 할 것 아냐!
그럼 약란이랑 같이 있었던 사람은? 으음? 저 쉰내 나는 암컷
이 좋겠군.

혈랑은 붉은 눈알을 부라리며 야랑을 한 번 째려보고는 갑자
기 어슬렁거리며 지라검후에게 걸어왔다.
지라검후는 바싹 긴장한 얼굴로 혈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약 허튼 수작을 한다면 그 즉시 손을 쓸 태세인 듯 그녀의
손은 검의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윽고 지라검후 가까이 다가온 혈랑이 코를 킁킁거렸다.

― 큭! 쉰내! 좌우간 늑대건, 이간이건 암컷들은 왜 늙으면 쉰내
가 날까? 젊었을 때는 죽이는 향기가 나는데 그참 신기해.

그때 야랑의 발이 혈랑의 옆구리에 냅다 꽂혔다.
퍽! 깽!

― 아이구 갈빗대야! 왜 때려 짜쌰!

―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냄새 맡아! 약란 죽으면 너도 죽는다!

― 그럼 지가 맡지? 지도 이 정도는 할 줄 알면서 나만 나쁜 냄
새 맡으래.

― 꼬우면 니가 대장해!

― 꼽다! 크르릉!

혈랑은 이를 갈면서도 코를 킁킁거렸다.
지라검후는 어이도 없고, 기가 차 말문이 열리지 않는지 그저
멍하니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있는 혈랑만 바라볼 뿐이
다.
한 순간 혈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 우―― 우――

― 찾았다!

찰나 야랑이 냅다 혈랑의 옆구리를 향해 발을 찼다.
"앞장 서!"
그러나 야랑의 발은 헛발질만 하고 말았다.
혈랑이 벌써 저만치 달려나가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 내가 개냐? 때린다고 맞게?

* * *

백호를 앞에 두고 병풍처럼 빙 둘러싼 객랍마산(喀拉瑪山).
그 후미진 곳은 숲이 우거져 있어 한적하고 은밀한 곳이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곳에서 아름답지만 날카
로운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율보고, 이 손을 놓지 못해!"
뒤이어 젊은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후! 네년이 백의성모로 분장해 우릴 가지고 놀았겠다? 그
대가로 네년 속살 맛을 본 다음 내 부하들에게 돌려버리겠다."
청년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말 또한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여인의 음성은 여전히 날카롭기만 했다.
"웃기는 소리 마라! 네놈은 절대 날 어쩌지 못한다!"
그러자 음흉한 웃음이 뒤이었다.
"흐흐흐! 과연 그럴까?"
"......!"
"천지쌍선이 강하다 하나 결코 오령신마 등을 모두 처치할 수
없다. 행여 그랬다 해도 날 찾지는 못한다. 그들이 개코가 아닌
이상 어떻게 여기까지 날 찾아오겠느냐? 믿지 않는 게 나을 것
이다."
"천만에, 그분들은 분명 이곳으로 오실 것이다."
"죽지 않았고, 개코라면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그 확률은 희
박하다."
"비열한 놈, 치사하게 미약을 쓴 주제에......."
"싸움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비열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 승리가 패배보다 낫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백
번 좋으니까."
이때였다.
스스슥......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비스듬히 날아가는 인영이 있었다.
얼굴은 십 오륙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지만 풍채는 건
장한 청년을 방불케 한다. 몸에 꽉 조이는 흑의를 걸치고 딱 벌
어진 어깨에 검은 피부, 부리부리한 눈을 지닌 이 소년은 바로
철무숭이었다.

― 철무숭(鐵武崇)!

호로호 속에서 청랑부(靑狼府)의 진전 중 양극진력(兩極眞力)
을 익혀 절정고수로 탈바꿈한 소년영웅.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은하여왕을 핍박하던 팔황
겁과 새외의 고수들이었고, 설상가상. 팔황마제의 등장과 태양광
선강에 호로호 일대는 초토화가 되었다.
당시 은하여왕을 보호하며 도망을 쳤던 철무숭이었지만 그 후
그는 흩어진 성해궁 사람들을 재결합하여 노도처럼 새외무림을
휩쓸기 시작하니.

― 철혈낭왕(鐵血狼王)!

근래에 들어 새외에 풍운을 일으키고 있는 철혈낭왕이 바로
철무숭이었다.
그는 장춘보로 낭왕군을 이끌고 떠났다가 행방불명이 된 혜성
신녀 금시방의 뒤를 수색하다가 이곳까지 오게된 것이다.

철무숭은 한 그루 송목(松木)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숲 속에 한 쌍의 남녀가 마주보고 있었다. 백의(白衣)를 입은
절세미녀와 어딘가 모르게 음사한 기운을 지닌 미청년(美靑年)이
었다.
철무숭은 이미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갔다.
'저 자가 바로 흑마대제의 아들인 망나니 초혼흑룡 율보고겠
군. 그리고 저 여인은 백의성모의 제자인 채약란!'
철무숭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백의성모가 새외에 왔다는 소문은 채약란이 퍼뜨린
것이군. 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이 때였다. 백의여인, 즉 채약란이 앙칼진 음성으로 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날 풀어 줘라. 그럼 오늘 일은 없었던 것
으로 묻어 주겠다."
그 말에 율보고는 영준한 얼굴에 한 가닥 음침한 기운을 띄웠
다.
"여전히 입은 살아 나풀거리군. 그럴 힘이 있다면 잠시 후 내
배 밑에서 맘껏 힘좀 써 봐라."
율보고는 돌연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번쩍 손을 뻗쳤다.
"앗! 이 파렴치한!"
채약란은 느닷없는 그의 기습에 깜짝 놀랐으나 간발의 차이로
그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녀의 앞가슴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가고 말았다.
율보고는 파렴치한 수법으로 일부러 여인의 가슴 부위를 노렸
던 것이었다.
"앗!"
채약란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옷이 찢겨나가는 바람에 소중한
젖무덤 부위가 노출되었던 것이었다.
"이...... 치한......."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앞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후후...... 이 율보고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오. 오늘 네
년을 건드려 백의성모가 까무라치는 꼴을 보고 말겠다."
슈슈슉!
율보고는 재차 공격했다. 그의 초식은 흑룡성의 독문절예이므
로 쾌속하기 그지없었다. 채약란은 비록 전력을 다해 맞섰으나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아아......."
그녀는 풀 위에 쓰러지자 절망의 신음을 발했다.
"흐흐흐흐......."
그녀의 위로 덮치며 율보고는 음소를 흘렸다. 그는 이미 색욕
에 눈이 먼 짐승에 불과했다. 그는 대뜸 채약란의 젖가슴으로 손
을 가져갔다.
"아악! 이 치한!"
찌지직!
그녀의 옷은 율보고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찢겨졌다. 드러나는
그녀의 육체는 너무도 희고 고결하여 감히 범접지 못할 성스러움
을 풍겼다.
티 한 점 없이 맑고 윤기있는 피부, 탄력있고 모양 좋은 두 개
의 젖가슴 위의 작고 앙증맞은 열매......
그녀의 반나를 본 율보고는 터질 듯한 욕정으로 눈이 뒤집혔다.
그는 무자비하게 그녀의 몸에 덮쳐들었고 그녀는 안간힘을 쓰
며 그의 힘에 대항했다. 하지만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저항일 뿐,
사내의 거친 힘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흐흐흐...... 앙탈을 부리는 것도 감칠맛이 나는구나."
율보고는 한 손으로 채약란의 두 팔을 잡아 바닥을 찍어눌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치마와 고의를 한꺼번에 우악스럽
게 움켜잡았다.
"아악! 안돼!"
필사적인 반항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치마와 고의가 한꺼번에
찢겨 내려졌다.
그러자 그녀의 풍만한 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불룩한 아랫배와 풍성한 둔부, 그 전면의 미묘한 허벅지 사이에
는 아주 살찐 둔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둔덕은 무성한 방초로
새까맣게 덮혀 있었다.
채약란은 사력을 다해 허벅지를 밀착시켜 그곳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내의 욕정을 더욱 부채질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었다.
율보고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동그란 무릎을 두 손으
로 움켜쥐어 좌우로 벌리자 채약란은 수치와 치욕으로 입술을 악
물었다.
사내의 우악스런 손길에 채약란의 허벅지는 천천히 좌우로 벌
려졌다.
그와 함께 허벅지 사이의 은밀한 계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방초 무성한 둔덕 아래로는 급경사진 계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은 둔덕의 윗부분보다 방초가 듬성듬성 나 있었는데 그 사이
로는 깊게 파인 계곡이 보였다.
"흐흐! 고것......!"
율보고가 침을 꿀꺽 삼키며 채약란의 그곳을 노려보았다.
그는 벌려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고 들어가 자신의
하체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사내의 검붉은 흉기!
"하악."
그것을 본 채약란은 숨막힐 듯한 충격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채약란은 겁탈 당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율보
고의 귓전에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정말 못 봐주겠군!"
율보고의 욕망이 천리 만리나 달아나고 있었다.
"누구냐?"
그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액!
그는 자기 가슴으로 밀려드는 무서운 강경을 보았다. 그는 눈
을 멀건히 뜨고 있을 뿐 그 초식을 어떻게 막아야할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으아아악!"
그는 가슴이 산산이 부서진다고 느낀 순간 처절한 비명을 질
렀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그가 당한 무공은 바로 새외제일의 무공
을 자랑하는 청랑부의 청랑참(靑狼斬)이란 수법임을.
철무숭은 율보고의 악행에 분노한 나머지 사정없이 살수를 뻗
은 것이었다.
철무숭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짐승같은 사내의 배 밑에서 엉덩이를 돌리며 미친 듯 발광하
고, 희열에 달뜬 교성을 발하던 은하여왕의 그 몸짓을.
자신의 우상이자, 가슴에 품었던 연모의 여인이 암컷처럼 발광
하던 그 처절한 기억이 철무숭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 그
는 강제로 여인을 범하려 하는 자를 그 누구보다 더 증오한다.
한편, 그에게 일장을 맞은 율보고 역시 절정고수임은 틀림없었
다.
그는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이었다.
"으윽! 네놈은...... 누구냐?"
삼 장 밖으로 나가떨어진 율보고는 눈을 부릅뜨며 더듬더듬
물었다.
철무숭은 그를 내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바로 철혈낭왕이시다."
"철혈낭왕!"
율보고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철무숭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
려 쓰러진 채약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채약란은 황급히 일어나 얼굴을 붉히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고마워요."
철무숭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소. 당신 역시 중원인, 어찌 따지면 나에겐
적일 뿐이오. 단지 난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을 보고도 못본 척할
수 없기에 도왔을 뿐, 후에는 적이 되어 만날 것이오."
"......!"
채약란은 그의 싸늘한 음성에 내심 투덜거렸다.
'그래, 너 잘났다. 나도 어쩔 수 없어 너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아직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꼬맹이가 어른입네 척하는 꼬
라지를 두 눈 뜨고 못 본다. 핑!'
철무숭의 냉랭함에 무안을 당하자 채약란은 화가 났다.
'이게 다 율보고 저 망나니 때문이야!'
그녀는 율보고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율보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워낙 중상을 입었
기에 운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율보고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떠올랐다. 자신을 노려보는
채약란의 눈빛에 살기가 떠도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채낭자, 나는......."
그 순간 그의 눈은 한껏 크게 확대되었다.
"으아악!"
그는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채약란의 손가락이 그의 미간(眉間)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었
다. 그의 미심혈에 손가락 만한 구멍이 뚫렸다.
촤아......!
피가 분수처럼 뻗어 나왔다.
흑마성의 후계자로 당금무림의 흑도 후기제일인이라던 율보고
의 죽음은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종지부를 찍고만 것이었다.
"네놈은 여인을 꺾는 취미를 가진 악인! 죽어 마땅하다. 네놈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부디 지옥에 가서라도 참회하기를 바란다.
율보고."
채약란은 율보고를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철무
숭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되었건 은혜를 한 번 입었으니 꼭 갚겠어요."
"그럴 필요 없소."
여전히 찬바람이 풀풀 날리는 어조였다.
'흥! 잘났어 정말!'
채약란이 코방귀를 뀌며 이제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다.
갑자기 철무숭의 눈에서 긴장이 스쳤다.
의아해진 채약란은 귀를 기울이다가 숲 건너편에서 쏜살같이
달려드는 기척을 발견했다.
'혹시 적(敵)이......!'
그녀 역시 긴장하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 * *

"야랑!"
채약란은 숲을 헤치며 튀어나오는 일인일수(一人一獸)를 보고
는 기뻐 소리쳤다.
나타난 자는 야랑과 혈랑이었다.
"약란!"
크앙!
야랑과 혈랑이 동시에 반가운 외침을 발했다.
"야랑!"
나비가 날 듯 채약란은 야랑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야랑은 그녀를 보듬어 안고는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괜찮아?"
"으응? 아무 일 없어, 진짜야. 내가 누군데 감히 날 건드리겠
어."
앙큼스러운 여우, 여자는 모두 저런가? 분명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발가벗은 몸을 율보고에게 죄다 보여 놓고, 그것도 모자
라 율보고가 맨살을 만졌는데도 시치미를 뚝 놓는 모습이란.
더욱이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고 있다.
하나 야랑은 달랐다.
킁! 킁!
갑자기 야랑이 코를 벌름거렸다.
"냄새 나, 수컷!"
채약란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무슨 소리야. 수컷? 아하! 바보, 자기 냄새잖아? 나랑 이렇게
꼭 붙어 있는데 자기 냄새가 안 나면 그게 이상하지."
"아냐!"
갑자기 야랑이 눈을 부라리며 품 안의 채약란을 밀쳐냈다.
그 순간 채약란의 뒤쪽에 서 있던 철무숭의 모습이 비로소 야
랑의 눈에 들어왔다.
"수컷! 너, 율보고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방은 분명 인간 수컷이고, 조금
전까지 채약란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야랑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
다.
더욱이 채약란의 헝클어진 머리며, 찢겨진 옷은 또 무엇이랴.
"죽어!"
야랑은 분노하여 다짜고짜 철무숭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이 순간 철무숭의 검미 역시 팔자로 모아지고 있었다.
"네놈은 그때 그 짐승!"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은하여왕이 야랑에게 당할 당시 야랑은 머리가 치렁치렁한 장
발에 옷이라고는 걸치지 않고 다니던, 그야말로 야만인 그 자체
때가 아니던가.
그런 야랑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다가 옷을 입고 머리가 단정
히 빗은 야랑의 변한 모습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
리였다. 하지만 바뀔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기질(氣質)!
야랑만이 갖는 야성(野性)이다.

쾅! 콰콰콰쾅!
채약란을 납치한 율보고는 분명 죽었건만 야랑은 철무숭을 율
보고로 착각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은하여왕을 겁탈한 야랑을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바득
바득 갈던 철무숭이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성난 두 사내는 상대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살심(殺心)을 불태
우며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결전을 바라보며 채약란은 속으
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야랑이 내 위기를 보고 여기까지 뛰어와 철혈낭왕과 싸운다.
분명 오해인데 왜 막고 싶지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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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狼) 연재가 끝나고 한 달 정도 쉴 것 같습니다.
좀더 빨리 돌아올 수도 있지만...
뭐... 예정이니 변경가능입니다.
그럼 다들 재미있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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