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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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71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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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2권 17장 참극(慘劇)



포대봉은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어떻게 백룡이 안전하게 구해주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분명 그녀는 사해소(四海沼)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백룡이 무슨 재주로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품에 안겨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었을 뿐이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백룡을 대하는 태도가 더 은근해졌다. 함부로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만이 전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포대봉은 강가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시(午時)가 다 되어 약실에서 약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할아버지의 식사를 해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룡, 기다려요. 점심을 지어 가지고 오겠어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백룡에게 눈을 찡긋한 후 그녀는 달려갔다.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얌전한 걸음걸이로 모퉁이를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강아가 팔짝팔짝 뛰며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기쁨에 차 들떠 있었다.

"누나! 이것 보라구! 헤헤 !"

강아가 들어 보이는 물건을 본 포대봉은 의아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그가 갖고 싶어했던 새 작살과 물 속에 들어갈 때 입는 수달피의 가죽으로 된 옷이었다. 그것은 값이 매우 비싸 감히 살 엄두를 내지 못하던 물건들이었다.

"그걸 어디서 났지?"

"헤헤헤 . 재수가 좋았다구! 어떤 멍청한 사람들이 이 곳의 지리를 가르쳐 준 댓가로 이걸 사주었거든."

" ?"

포대봉은 어리둥절했다. 길을 가르쳐 준 댓가로 그런 것을 사주다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뭐라고 더 묻기도 전에 강아는 이미 저만큼 지나가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죽옷과 작살을 시험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곳의 지리를 물었다고?'

포대봉은 웬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병서보검협에 들어와 살게 된 지 꽤나 오래 된 것으로 기억했다.

할아버지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병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가까운 인근의 어부들이 다쳤을 때도 병을 고쳐주지 않았다. 그들 3인이 사는 모옥은 병서보검협의 은밀한 곳에 있어 그 곳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이 곳의 지리를 묻는 사람이 있었다고?'

강아에 비해 몇 살 더 먹은 탓인지 그녀는 다소 생각이 깊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이 곳에 파묻혀 사는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다.

'할아버지에게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지.'

걸음이 빨라졌다. 모퉁이를 일곱 번 돌자 모옥의 지붕이 보였다. 그러나 웬지 가까이 갈수록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할아버지!"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한낮의 정적은 무서울 정도의 적요상태였다. 태양만이 마당에 널어놓은 약재에 떨어져 아지랑이를 피워올릴 뿐이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꽝!

다급하게 약실의 문을 열어 제쳤다. 순간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없었다. 의당 단로 앞에서 풍로를 돌리고 있어야 할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 할아버지 ."

포대봉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약실을 나와 집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할아버지 포대숭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침내 포대봉은 마당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할아버지 . 대체 어디 계세요?"

이때였다. 문득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는 손이 있었다.

"악!"


강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옷을 홀랑 벗고 수달피 가죽으로 된 옷을 입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이 기분이 매우 좋았다.

"헤헤! 어때, 백룡아? 멋있지?"

백룡은 낚싯대 앞에 앉아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으나 눈빛은 부드러웠다.

강아는 으쓱거리며 이번에는 작살을 안고 자세를 취했다. 작살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오래 전부터 강아가 갖고 싶어하던 것이었다.

"자, 보라구! 곧 이 작살로 큰 물고기 한 마릴 잡을 거야!"

첨벙!

강아는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위로 하여 급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헤엄을 치는 데는 이미 도사였다.

백룡은 묵묵히 낚싯대의 찌를 바라보았다. 희다 못해 창백하게 보이는 얼굴에 눈썹은 붓으로 그린 듯 진해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문득 찌가 물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낚싯대가 반월처럼 휘어졌다.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물 속으로 이리저리 끌려갔다.

그러나 백룡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낚시를 하는 데 익숙해진 듯 서두르지 않고 고기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낚싯대를 조종했다.

고기를 낚는 것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낚싯대의 탄성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힘으로 끌어올리려 들면 줄이 끊어지거나 낚싯대가 부러지기 십상이다.

촤아아!

물살이 갈라지며 문득 황금빛이 비쳤다.

백룡의 눈에 반짝 빛이 솟아났다. 큰 놈이었다. 언뜻 보아도 능히 다섯 자가 넘어 보이는 놈이었다. 낚싯대를 옆으로 당기자 놈은 반항을 하며 다시 물 속으로 사라졌다. 백룡은 다시 늦추어 주며 이리저리 조종했다.

대충 이각쯤이나 씨름을 하였을까? 서서히 힘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백룡은 낚싯대를 당겼다.

잉어였다. 좀체로 보기 드문 금린어(金鱗魚)라고 불리는 놈이었다. 비늘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놈의 피는 보혈(寶血)로 알려져 산후의 여인들에게 좋은 약으로 알려져 있는 물고기였다. 백룡은 무사히 금린어를 끌어올렸다.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강아는 신이 난듯 물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지쳤다.

"배고파! 누나가 왜 오지 않는 거지?"

그의 작살에는 겨우 팔목까지 밖에 되지 않는 물고기가 한 마리 꿰어 있었다. 강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 번에는 큰 놈을 잡을 거야. 헤헤 어형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갔다구!"

강아는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이가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의 체격은 건장했다.

너무나 설친 탓인지 강아는 배가 고팠다. 이때쯤이면 포대봉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 함께 먹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 말이 없이 백룡은 묵묵히 새로운 미끼를 바늘에 꿰었다. 그때였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괴성이 들려왔다.

카아아!

그 괴성을 들은 순간 백룡의 눈에서 기광이 흘러 나왔다.


같은 시각.

포대봉은 마구 할아버지의 가슴을 두드렸다.

"몰라요! 놀랐잖아요 !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봉아는 정말 무슨 일이 났는 줄 알았다고요!"

포대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포대봉은 말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공연한 짓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저나 할아버지는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포대숭은 너털웃음을 쳤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약전(藥田)에 가서 약초 두어 뿌리를 캐어 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옆구리에는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고 바구니 속에는 약초가 잔뜩 들어 있었다. 포대봉은 자신이 공연히 방정맞은 생각을 했다고 여겼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빨리 밥을 지을께요!"

언제 그랬느냐 싶게 그녀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포대숭은 봉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녀석 . 이제 어른이 다 되었어.'

그는 약실을 향해 걸어갔다. 벌써 약초를 달인지 보름이 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캔 약초만 가미한다면 그가 원하는 단약은 완성되는 것이었다.

"헉!"

약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한 걸음 들여넣던 포대숭은 숨막히는 신음을 질렀다. 약실 안 단로 앞에 한 명의 괴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인반수(半人半獸).

한 마디로 그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형태로 보이는 괴인이었다. 키는 중키였으나 얼굴과 손에는 털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눈알은 횃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팔이 유난히 길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황색의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장삼으로 최대한 몸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신에 털이 나 있다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후왕(糅王)!"

포대숭의 입에서 공포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흐흐흐 . 오랜만이군. 포대숭, 십 년 만인가?"

후왕의 음성은 괴이했다. 혀가 짧은 듯 발음이 다소 부정확 했다. 그는 눈알을 디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포대숭은 잠시 뒷걸음질 쳤으나 그는 더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문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다면 후왕이 결코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왕의 잔혹성!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더욱이 모옥에는 사랑하는 손녀가 있지 않은가? 후왕의 성격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뻔한 일이었다.

"어 어떻게 이 곳을?"

의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왕을 피해 이 곳 병서보검협에 숨어 살아온 지 어언 십 년이 넘지 않았는가? 갑자기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은신지를 찾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호호 . 자네는 똑똑한 손자를 두었더군. 그 아이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더군."

"강아! 너 너 강아에게 손을 댔느냐?"

포대숭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후왕은 여유만만이었다. 그는 약로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중얼거렸다.

"자네의 의술은 천하제일이지. 흐흐 . 이번에는 어떤 약을 만들고 있지?"

펑!

그의 손이 한 번 번뜩하자 단로가 박살이 났다.

불꽃과 약이 사방으로 퉁겨 약실 안은 약 냄새로 가득 찼다. 단로는 무쇠로 만든 것으로 높이가 다섯 척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그것을 한 주먹에 박살내는 후왕의 힘은 가히 전율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백룡에게 먹일 약은 그가 한 번 휘두른 주먹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흐흐흐 . 한 마디만 하겠다. 포대숭. 따라 가겠느냐? 아니면 거절하겠느냐?"

포대숭의 안색이 십여 차례나 변했다.

그는 후왕을 피해 십 년이나 숨어 지냈다. 그러나 마침내 꼬리를 잡힌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분은 지금이라도 네가 돌아와 준다면 과거의 일은 더이상 묻지 않으신다고 했다. 어서 결정해라. 노부는 참을성이 없다."

"으으 ."

포대숭의 이마에 진땀이 배었다. 그러나 죽으면 죽었지 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만일 그에게 손자 손녀가 없었다면 머리를 벽에 부딪쳐 죽는 한이 있어도 후왕의 말을 따르지 않았으리라.

'지금 다시 그 곳으로 갈 수는 없다. 아아 . 인간지옥(人間地獄)! 나의 약으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이제 또다시 그 일을 할 수는 없다!'

그의 얼굴에 비장한 빛이 어렸다. 후왕은 그를 노려보다가 문득 괴소를 흘렸다.

"클클클 . 천약귀수, 마음을 굳힌 것같군. 그런가?"

"그 그렇다. 노부는 이 곳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악마에게 양심을 팔 수는 없다."

바로 이때였다.

"아아악!"

포대봉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포대숭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무 무슨 짓을 한거냐?"

그는 신형을 날렸다. 평소에는 등이 구부정하여 도저히 그런 날렵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던 그가 일단 신형을 날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날아갔다.


해가 기울었다.

강아는 혀를 길게 빼물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마침내 벌떡 일어났다.

"백룡아, 일어나. 누나가 우리를 골탕 먹이고 있어!"

그는 포대봉이 일부러 점심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들리던 괴성은 일각째 들리지 않았으나 백룡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마침내 강아는 서둘러 도구를 챙기고 앞장 섰다.

"틀림없다구, 누나는 내가 이 물건들을 얻은 것이 샘이 난 거야."

백룡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모옥으로 가려면 일곱 번의 모퉁이를 돌아야 했다. 그들이 다섯 번째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흐흐흐 !"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바위 위로 흑영 다섯이 솟아올랐다. 일신에 먹빛처럼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빛이 음험하고 인상이 험악한 중년인들이었다.

강아는 깜짝 놀라더니 반색을 했다.

"어? 아저씨들 . 여기를 찾아 왔군요? 헤헤 . 이 곳을 아는 사람은 없죠. 여기는 고기가 무척 많거든요. 두고 봐요. 이것을 사준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게 될 거예요."

강아는 가죽옷과 작살을 들어 보였다. 그것은 바로 눈앞의 흑의인들에게 얻은 것이었다.

"후후후 . 물론이다. 꼬마야, 우리는 물건을 사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가운데 이마에 동전 만한 흉터가 있는 자가 말했다.

"헤헤 . 그럼요. 이제 곧 본전을 뽑게 될 거예요."

"꼬마야, 우리는 이미 본전을 뽑았다."

강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고기를 잡았나요?"

"후후 . 그렇다. 너를 포함하면 오늘의 수확은 이자까지 쳐서 대단한 수확인 셈이지."

순간 강아는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요? 헤헤헤 . 하긴 나만한 고기라면 꽤 비싸요."

강아의 손은 어느새 작살을 꼬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꼬마야, 허튼 짓 하지 말아라!"

위잉!

두 명의 흑의인이 덮쳤다. 그들의 신법은 놀랄 정도로 빨라 막 작살을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강아의 좌우에 떨어진 후였다. 한 명은 강아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고, 한 명은 강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놔욧!"

강아는 작살을 휘둘렀다. 꼬마라고 하지만 그의 완력은 대단했다. 흑의인들은 설마 꼬마의 힘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멱살을 잡으려던 중년인은 눈앞이 번쩍 하는 순간 가슴에 격통을 느꼈다.

"억! 이놈이 ."

어느새 작살이 반 치 정도 파고 들었다 그는 왼손을 뻗었다.

펑!

강아는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였다.

더욱이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이가 어찌 내가고수의 장력을 감당하겠는가? 실이 끊어진 연인 양 강아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입과 코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중년인도 무사하지 못했다. 강아가 장력을 얻어맞는 순간 작살이 깊숙이 쑤셔 들어온 것이다.

"크으으!"

비틀거리다가 그는 푹 거꾸러졌다.

한편, 저만큼 날아가던 강아는 날카로운 바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대로 떨어지면 머리가 깨져 즉사를 면치 못할 순간 한 가닥 인영이 신형을 날리면서 강아를 낚아챘다.

백룡이었다. 백룡의 품에 안긴 강아는 피투성이였다. 여린 가슴에는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고 그 부분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백 백룡 . 누나와 할아버지를 ."

강아는 더이상 말하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백룡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흐흐흐 . 알고 보니 이곳에 고인이 있었군!"

음침한 음성이 백룡의 등 뒤에서 들렸다. 4인의 흑의인은 그를 포위한 채 호시탐탐 살의를 드러냈다.

그들은 방금 전 백룡이 펼친 신법이 고명한 것을 보고 결코 그가 무명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흐흐흐 . 어서 그 꼬마놈을 내놓아라. 네가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를 건드리지 않겠다."

강아를 안고 있는 백룡의 눈은 여전히 몽롱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때 예의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인이 눈치를 챘다.

"저놈은 백치다. 어서 공격해라!"

위이잉!

네 명이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청마응조공(靑魔鷹鳥功)으로 공격했다. 청마응조공은 마도의 수법으로 갈고리같은 손가락에 걸리면 바위라도 으깨어지는 무서운 외공이었다.

쌔애액!

손가락에서 날카로운 경기가 뻗었다. 그러나 그들의 손가락이 막 닿으려는 찰나, 백룡의 왼손이 한 바퀴 원을 그리며 투명한 백옥빛을 발했다.

으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피가 사방으로 분수처럼 퍼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인의 흑의인은 손목이 칼로 끊긴 듯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백룡의 손과 부딪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으으으 . 너는 누구냐?"

우두머리 중년인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의 빛이 어린 채 경련이 일어났다. 나머지 3인도 손목이 무참하게 끊긴 채 부들부들 떨었다.

"우 우리는 너와는 감정이 없다. 그런데 왜 ?"

백룡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표정할 뿐이었다. 그는 강아를 안고 걸음을 옮겼다. 흑의인들의 존재 따위는 아예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 순간 눈짓을 주고 받은 흑의인들이 백룡의 뒤로 접근했다.

"쳐라!"

위이이잉!

어느새 남아 있는 다른 한 손으로 도(刀)를 뽑아든 4인은 일제히 백룡의 등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그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백룡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4인의 도가 막 등을 난도하려는 찰나 다시 왼손을 슬쩍 뒤를 향해 내저었을 뿐이었다.

따다당!

금속성이 귀청을 찢었다. 네 자루의 도가 부러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4인은 눈을 크게 뜨고 벌렁 뒤로 쓰러졌다. 그들의 가슴은 쩍 벌어져 있었다. 마치 예리한 검으로 그은 듯이 피가 콸콸 찢어진 가슴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백룡은 강아를 안고 모퉁이를 돌아갔다. 여전히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털투성이의 손이 가는 허리를 덥석 움켜쥐었다. 또 하나의 손은 치마를 부욱 뜯어냈다.

"아악!"

포대봉은 기절을 할 듯 놀라 부르짖었다. 부엌에 언뜻 그림자가 스며들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녀는 봉변을 당했다.

금모 성성이였다.

얼마 전 절벽에서 본 흉측한 괴물이 들어온 것이다 키가 일 장이 넘는 거대한 괴수는 입맛을 다시면서 포대봉을 아래 위로 훑었다. 시뻘건 눈에서 뿜어지는 혈광에 그녀는 심장이 오그라 붙는 듯 했다.

크르르 !

괴수의 포효에 그녀는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허리는 괴수의 손에 우악스럽게 잡혀 있어 꼼짝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만 정신이 가물거렸다.

괴수는 손을 움직였다.

찌이익!

이번에는 가슴의 옷이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탐스러운 가슴이 출렁거리며 드러났다.

"아악!"

괴수의 징그러운 손이 가슴을 덥석 움켜쥐는 바람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괴수는 순식간에 그녀의 옷을 뜯어냈다. 날카로운 발톱이 몇 번 긋자 여지없이 걸레 조각으로 화해 버린 것이다. 적나라한 나신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포대봉은 원래 남달리 체격이 큰 편이었다. 열일곱의 나이로는 생각되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몸뚱이는 괴수에 의해 번쩍 들려 밖으로 옮겨졌다. 바로 그때였다.

"안 돼!"

분노에 찬 노성이 들림과 동시에 약실로부터 인영이 쏘아나왔다.

펑!

"흑!"

포대숭은 혼신의 힘을 다해 금모 성성이의 머리통을 가격했으나 도리어 손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퉁겨 나갔다.

"흐흐흐 . 포대숭, 금모혈왕(金毛血王)의 성질을 잘 알면서 어리석은 짓을 할 셈인가?"

순간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후왕의 혈안에서 번뜩 굉광이 어렸다. 금모혈왕이 안고 있는 소녀를 본 때문이었다.

"호오 . 이제 보니 손녀가 꽤 쓸 만하군?"

그의 얼굴에 음탕한 기운이 어렸다. 원래 후왕은 색을 밝히는 위인이었다. 그는 대설산(大雪山) 출신으로 반인반수(半人半獸)에 가까운 위인이었다. 금모 성성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일종의 혼혈잡종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음탕하여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고 범한후에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금모혈왕이 안고 있는 벌거벗은 소녀를 본 순간 크게 음심이 일어났다. 포대봉의 좀체로 볼 수 없는 큰 체격의 나신을 보자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안 된다! 으으 봉아만은 ."

포대숭의 팔은 아래로 축 쳐졌다. 그러나 손녀가 벌거숭이가 된 상황을 본 그는 역부족인 것을 알면서도 재차 달려 들었다.

크르르!

금모혈왕은 귀찮다는 듯이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바위도 가루로 만드는 괴력에 포대숭은 그만 늑골이 으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저만큼 나가 떨어졌다.

이때 후왕이 음침하게 말했다.

"흐흐흐 . 혈왕은 계집을 아주 좋아한다네. 자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흐흐 ."

후왕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혈왕은 기쁜 듯 괴성을 지르더니 이미 혼절해 있는 포대봉의 알몸을 거꾸로 치켜드는 것이 아닌가?

혈왕은 음성(淫性)이 강한 괴수였다. 포대봉의 두 다리를 양손으로 잡더니 쫙 벌렸다. 실로 기괴한 자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포대봉은 거꾸로 매달린 채 활짝 다리가 벌려졌다. 그녀의 아직 성숙하지 않은 비문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카아악!

혈왕은 침을 흘리며 그녀의 두 다리를 잡고 자신의 허리로 갖다대려 했다.

"이놈! 네가 인간이냐?"

저만치 나가 떨어졌던 포대숭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이번에는 후왕을 향해 덤볐다. 비록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그가 지닌 의술에 비한다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흐흐 . 권주는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니."

후왕의 기다란 팔이 움직였다.

펑!

포대숭은 가슴에 격통을 느끼며 다시 한 번 날아갔다. 이번에는 충격이 거세어 한 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혈왕은 꽥꽥거리며 이미 성이 날 대로 난 자신의 그것을 포대봉의 다리 사이로 집어 넣으려 했다. 소녀의 순결이 무참히 유린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문득 후왕이 소리 질렀다. 혈왕은 움찔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 혈왕의 눈에는 불만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비록 후왕은 그의 주인이었으나 이미 음성이 오를 대로 오른 혈왕은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카아아!

혈왕은 으르렁거리더니 갑자기 포대봉을 안고 거대한 신형을 날리는 것이었다.

"아니, 저놈이!"

후왕은 발을 굴렀으나 뽀족한 수가 없었다. 종종 혈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인간을 겁간(劫姦)할 때였다.

어떤 면에서 후왕과 혈왕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음성이 강한 것이 그러했고, 포대봉같이 체격이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 취향도 같았다.

후왕은 노성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곧 무엇을 생각했는지 급히 돌아왔다. 그는 한 쪽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는 포대숭을 덥석 잡아 올렸다.

"빌어먹을 ! 그 다섯 쓸모없는 놈들은 무엇하는 거지!"

욕설을 내뱉는 후왕의 얼굴에는 아쉬운 빛이 역력했다.


여섯번째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백룡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에서 찰나적으로 이상한 광채가 번쩍였다. 괴성은 우측의 가파른 절벽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백룡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강아를 바위 틈에 내려놓고 신형을 날렸다. 그가 날리는 곳은 발을 붙일 곳도 없는 절벽이었다.

병서보검협의 협곡은 대부분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천험지세로써 인간은 다닐 길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이 곳에 사는 원숭이들도 가끔 실족하여 떨어지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휙!

백룡은 스치듯이 가파른 절벽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래로는 아찔한 낭떠러지로 죽음의 소용돌이가 굉음을 내며 흘러갔다.

"아악!"

백룡은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처절하기 그지없는 비명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하마터면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그러나 발끝으로 자신의 발등을 걷어차듯 찍자 위로 쏜살같이 솟구쳤다. 아마도 그의 그런 신법을 본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으리라!

몇 차례 솟구치자 뽀족하게 돌출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공중에서 두 바퀴를 회전한 다음 바위 위에 내려 선 백룡의 눈이 번쩍 빛났다.

바위 뒤로 동굴이 나 있었다. 동굴 입구에는 다섯 마리의 원숭이가 무참히 찢겨 죽어 있었다.

카아!

동굴 안쪽에서 괴성이 들렸다. 이어 기진한 소녀의 신음이 간간이 무한한 고통을 느끼는 듯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백룡의 눈썹이 거꾸로 섰다. 다음 순간 그는 지체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동굴 안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무비한 것이었다. 백룡의 몸은 입구에서 석상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일 장이 넘는 거대한 체격의 금빛 성성이가 소녀를 강간하고 있었다. 성성이는 소녀의 하반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악스럽게 소녀를 바위에 눕혀 놓고 강간을 계속하고 있었다.

크르르 !

희열을 느끼는 듯 성성이는 움직일 때마다 야릇한 신음을 발했다. 알몸의 소녀는 이미 몇 차례나 유린을 당한 듯 전신이 멍투성이었다. 게다가 눈동자는 위로 돌아가 천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성성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의 체격이 보통 여인이었다면 벌써 모든 것이 파괴되어 횡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윽고 또다시 한 차례 진저리를 치듯 경련한 혈왕은 만족한 듯이 휘익 포대봉의 나신을 던져 버리고 돌아섰다.

순간 혈왕은 움찔했다.

동굴 입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있어 그가 누구인지 볼 수 없었으나 혈왕은 영성(靈性)이 있는 괴수였다.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듯 뒤로 두 걸음 물러나더니 기다란 팔을 들고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쳤다.

캬아아!

백룡의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광채가 뻗어 나왔다. 그의 눈은 한 쪽에 걸레 조각처럼 팽개쳐져 있는 포대봉에게 멎었다.

"으으 . 으 ."

그의 입에서 짐승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영감이 통한 것일까?

"으으 봉 봉아 ."

그의 입에서는 알아 듣기 힘든 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포대봉에게 다가갔다. 포대봉은 사지를 아무렇게나 벌린 채 늘어져 있었다.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그녀의 하문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봉아 . 봉 ."

이때였다.

콰앙!

백룡의 몸이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입과 코로 피를 뿜으며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바위도 한 주먹에 으깨어 버리는 엄청난 괴력을 지닌 혈왕의 주먹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크르르 !

혈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돌아섰다. 백룡이 한 주먹에 죽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갑자기 혈왕은 우뚝 멈추었다. 이어 그의 시뻘건 눈알이 굳어졌다. 순간 그의 거대한 몸이 진저리를 치며 흔들렸다.

등 한복판.

백룡의 손이 어느새 그의 등을 뚫고 깊숙이 팔뚝까지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혈왕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회의의 빛을 띠었다.

혈왕의 가죽은 철판처럼 두터웠고, 특히 금빛 털은 어떤 병기로도 상처를 내지 못하는 보물이었다. 그런데 한낱 인간의 육장(肉掌)이 자신의 등을 뚫다니?

카아아악!

혈왕은 괴성을 지르며 돌아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백룡의 허리를 잡았다. 백룡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만 허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혈왕이 힘만 주면 아무리 절세신공을 지녔다고 해도 그의 허리를 두 동강 나고 마는 것이었다.

"카악!"

문득 혈왕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새어나옴과 동시에 그의 거대한 몸뚱아리가 뒤로 벌렁 쓰러졌다. 백룡의 손에는 솥단지 만한 시뻘건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왕의 심장(心臟)이었다. 등을 관통하고 들어간 손이 혈황의 심장을 뽑아버린 것이었다.

혈왕은 즉사하고 말았다. 시뻘건 눈알이 튀어 나와 더욱 끔찍한 모습이었다. 손에 든 붉은 심장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백룡이 손가락을 오무렸다.

퍽.

심장이 그의 손 안에서 터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우우 ."

백룡은 이상한 발음을 토하며 쓰러져 있는 포대봉을 안아 들었다. 포대봉은 그 순간 눈을 떴다.

"백 백룡가가(白龍哥哥) ."

처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가가라는 호칭이 나왔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가 섞인 피눈물이었다.

"이런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 이런 것이 ."

포대봉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은 뺨을 타고 두 줄의 혈선을 그렸다.

"가가에게 . 언젠가 드리려고 했는데 ."

백룡은 그저 멍청히 넋 빠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포대봉의 더듬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별이 점멸했을 때 . 이럴 줄 알았어요. 흐흑 . 봉아는 가가를 ."

점점 음성이 희미해졌다. 숨결 또한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팔이 힘겹게 올라와 백룡의 목을 끌어 안았다.

"안아 줘요 . 마지막으로 백룡가가의 품에 ."

"으으 ."

백룡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역시 피눈물이었다. 얼굴에 튄 혈왕의 피가 섞인 눈물이 굵은 혈선을 그렸다.

"사랑 했어요 . 백룡가 ."

툭!

꽃이 지는가? 별이 사라졌는가? 한 인간의 채 피지도 못한 생명 하나가 귀의하는가? 포대봉의 눈은 감기지 못했다. 삶은 그녀로 하여금 미련을 남기게 했다. 미련은 한(恨)이 되어 그녀는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만 것이다.

뒤로 꺾인 고개를 받쳐들지도 못한 채 백룡은 넋을 잃었다. 그는 문득 포대봉의 시신을 안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우우우 !"

처절한 장소와 함께 그의 신형은 절벽을 뛰어 내렸다.


후왕은 짜증이 났다.

혈왕에게 탐스러운 먹이를 가로채인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가 이 곳으로 올 때는 다섯 명의 방수(幇手)를 대동하고 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멍청한 놈들 . 그깟 어린애 하나를 처리하는데 왜 이렇게 꾸물거린단 말인가?"

포대숭은 혈도를 찍힌 채 혼절해 있었다. 후왕은 오만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보았다.

"흐흐 포가야., 진작 말을 들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 아니냐? 그 계집애는 지금쯤 ."

그는 침을 삼켰다. 혈왕이 포대봉을 어떻게 하였으리라는 것이 환했다. 놓친 고기는 더욱 큰 법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웠다.

"흐흐 . 그만한 물건도 드문데."

햇살이 기울어가며 황혼이 마당으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후왕은 눈알을 굴렸다.

'어쨌든 성과가 있다. 이 늙은이를 데리고 가면 상(賞)을 받는다. 히히 . 이번에는 실컷 회포를 풀어야지.'

그의 머리 속에는 늘씬하고 풍염한 몸매를 가진 여인들의 나체가 떠올랐다. 육림(肉林)을 헤매는 것은 그의 꿈이었다.

후왕은 잔혹하고 음탕한 반면 머리를 쓰는 데는 조금 모자랐다. 그가 인간과 성성이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타고난 신력으로 무공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익힌 무공은 주로 외공(外功)으로 그의 전신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맨손으로는 서너 자루의 병기를 부러뜨릴 수가 있었다. 문득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이놈! 어서 이리 나와라!"

후왕은 둔중한 소리로 미루어 혈왕이 나타난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대뜸 뛰어나갔다. 화가 치밀어 먼저 한 대 먹일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책문을 나서자 우뚝 서 있는 거구의 금모 성성이가 보였다.

"이놈! 그 계집애는 어디다 두었 "

후왕은 입을 딱 벌렸다. 혈왕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혈왕의 눈알은 둘 다 튀어나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신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너 ?"

이때였다. 돌연 혈왕이 기다란 털투성이의 팔로 그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후왕은 깜짝 놀라 장력을 날렸다.

퍼엉!

가죽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혈왕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거구의 체격을 날려 버린 장력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후왕은 비로소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혈왕이 있던 자리에는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청년의 옷도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품에는 축 늘어진 나신의 소녀가 안겨 있었다. 청년은 바로 백룡이었다.

"으으, 네놈이 혈왕을 죽였느냐?"

후왕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혈왕의 피는 그의 몸 속에도 흐르고 있었다. 같은 모계(母系)에서 태어난 혈왕의 죽음은 그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쓰러져 있는 혈왕의 등 한복판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봉아 . 봉아 ."

백룡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후왕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백룡을 덮쳤다. 솥뚜껑만한 손바닥에서 엄청난 경격이 노도처럼 쏟아져 나와 일 장에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듯했다.

백룡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몽롱하던 그의 눈에 한 쪽에 쓰러져 있는 포대숭의 피투성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음 순간 그의 발이 움직였다.

쾅!

땅바닥이 움푹 패였으나 이미 그 자리에 백룡은 없었다. 후왕은 땅을 내려친 것이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미세한 파공성이 울렸다.

"헉!"

다급한 신음을 발한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았다. 체격에 비해 동작은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쌕!

날카로운 한 자루의 목검이 그의 미간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목검의 검봉만이 허공에 뜬 채 따라붙고 있었다.

후왕의 경공술은 원숭이의 동작을 딴 것으로 무림에서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홉 차례나 몸을 날렸다. 그러나 목검은 여전히 그의 미간에서 한 치의 간격을 둔 채 따라왔다.

"으으 ! 이 이건 무슨 사술이냐?"

후왕은 쌍장을 날렸다. 그러나 쌍장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그때마다 목검은 감쪽같이 사라졌다가는 또다시 등 뒤에서 쏘아왔다.

"으으으 사, 사람이냐, 귀신이냐?"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등이 목책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목검이 그의 미간으로 파고 들었다.

"크아악!"

여지없이 목검은 미간으로 깊숙이 쑤셔 박혔다. 후왕은 덧없이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젓다가 마침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다. 회의와 불신으로 가득한 눈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슥 .

환영인 듯 목검이 미간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백룡의 손에 들린 것은 목검이 아닌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 끝으로 붉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툭!

나뭇가지는 땅으로 떨어졌다.

"봉아 . 봉아 !"

그는 여전히 품에 안고 있는 포대봉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악! 백룡 !"

그 순간 뒤 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백룡은 고개를 돌렸다. 강아가 다가오다가 마당 안에 벌어져 있는 참극을 보고 놀라 부르짖은 것이었다.

"누나 !"

강아는 미친 듯이 놀라 부르짖으며 달려오더니 빼앗듯이 포대봉을 안았다.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포대봉은 눈을 뜨지 않았다.

강아와 포대봉은 친 남매간이었고 정으로 말하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두터웠다. 그녀의 죽음은 강아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침내 강아는 한 모금의 피를 토해낸 뒤 혼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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