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도수무형-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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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302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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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혈모(血母)의 침실(寢室)


이십 년 전, 사자원주 철사대제 종리단은 그야말로 희비가 엇갈린 큰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아야만 했다.
먼저 경사는 그가 뒤늦게 바라던 아들을 본 것이었다.
그가 오십이 넘어 본 귀한 핏줄이었다. 아들의 이름은 종리사후(鐘里獅吼)라 붙여졌다.
종리사후는 태어날 때부터 특징적으로 등에 하나의 붉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아명(兒名)을
홍룡(紅龍)이라 지었다.
철사대제의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던 사자원의 가신들은 종리사후의 탄생에 기뻐 어쩔 줄 몰
라했다.
하나, 종리사후의 탄생은 또 하나의 큰 슬픔을 대동했다.

-사모(獅母) 주궁혜(朱宮慧)!

철사대제의 부인이자 사자원의 안주인인 그녀가 종리사후를 출산하고 난 후 곧바로 사망해
버린 것이었다.
나이 사십이 넘어 종리사후를 낳은 주궁혜의 죽음은 난산으로 인한 결과였다.
철사대제를 비롯한 사자원의 가신은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하나, 언제까지나 슬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사자원은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 때문에 한시도 안주인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일이었
다.
곧 철사대제의 후실이 결정되었다.
그 여인이 다름아닌 당시 사자원의 내궁총관을 맡고 있던 도화부인(桃花婦人) 온유향이었다.
한데, 철사대제와 온유향의 혼례전 날, 예기치 못한 변란이 일어났다.
종리사후(鍾里獅吼), 미래 철혈사후서의 성주가 될 그가 돌연 실종된 것이었다.
사자원이 벌컥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철사대제와 도화부인 온유향의 혼례가 무산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종리사후가 실종된 직후, 한 통의 서찰이 철사대제에게 날아왔다.
서찰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들을 살아서 만나려면 사자원을 해산하고 대파산(大巴山)으로 오라!>

그 내용을 본 것은 철사대제와 온유향 뿐이었다. 하여 철사대제는 그 즉시 대파산으로 향했
다. 온유향에게 만일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자원을 관외(關外)로 옮기라는 말을 남긴
채……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대파산으로 떠난 철사대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온유향은 철사대제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자원의 일부 정예들을 관외로 옮긴 후 나머지 가신들을 해산시켰다.
이화신모(離火神母) 등은 바로 온유향이 해산시킨 사자원 가신들 중의 일부였다.

'대파산(大巴山)이라면 천면자(千面子) 할아버지께서 신비마곡(神秘魔谷)을 발견한 그곳이
아닌가?'
무영은 눈을 빛냈다.
이십여년전, 천면자는 대파산에서 일단의 신비한 절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숨어들었다가 제
왕건을 얻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십수년간 끊임없는 추격을 받아야했고....!
'역시 신비마곡이 혈왕문(血王門)의 총단이었구나!'
무영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온유향이 우수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철사대제께서는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분이세요. 그 분이 음모 따위로 쓰러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 속에는 강렬한 신념이 빛나고 있었다.
-철혈경(鐵血經)!
철사대제가 장래 며느리인 벽하공주(碧霞公主)에게 준 비급이다. 하지만 그것은 철사대제의
본래 절기에 비하면 일 할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철사대제 종리단은 그만큼 막강한 인물이었다.
온유향은 수심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천녀가 걱정하는 것은 실종되신 소성주님이에요. 그 분에게는 등에 난 붉은 점 외에는 신
분을 밝혀줄 아무런 단서도 없어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무영을 주시했다.
"……!"
무영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붉은 점…!'
자신의 등에도 온유향이 말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다만 우연이란 말인가?'
그는 곤혹한 심정이었다.
하나 그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훗 일개 소매치기에 불과하던 내가 사자원의 후계자일 리가 없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는 파리한 안색의 온유향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분이 자살하려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자원의 안주인이던 온유향이 음세황에게 당한 치욕스런 난행 때문
에 삶을 포기하려 것을.
무영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온유향은 창백한 안색으로 무영을 올려다 보았다.
"무엇인가요? 이 천한 계집에게는 소종사에게 드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무영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림주는 아주 큰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고마와요"
온유향은 힘없이 미소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미소는 이내 무영의 말에 의해 불신과 흥분으로 굳어졌다.
"소자의… 어머님이 되어 주십시오!"
무영이 힘 주어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 * *

팔황마전의 내분은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평정되었다.
마마천황(魔魔天皇) 음세황의 개인적인 추종자들은 아수마황 좌무기 등에 의해 소리없이 제
거되었다.
그 외에 팔황마전에 잠입해 있던 월영혈막의 살수들은 무영을 새로운 막주로 인정하고 그에
게 복종을 맹세했다.
표면상 팔황마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이 보였다.
하나 그 내부의 변화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쾌활림(快活林)은 다시 재건되었으며 쾌활림주 욕망부인 즉, 도화부인 온유향은 사실상 팔황
마전의 제일실력자로 부상했다.
그것은 그녀가 무영의 의모(義母)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으로서 가장 치욕스런 수모를 겪은 그녀는 대신 신임 팔황마전주를 양자로 얻어 가장
행복한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리고 무영은 음세황(陰世皇)의 역할까지도 수행하여 팔황마전을 완벽하게 제압시켰다.
단지 한 가지 우려가 있다면 무영에게 수모를 당하고 떠난 나찰여황 교옥진이 말썽이었다.
하나 의외로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여름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 * *

존궁(尊宮)의 밀실.
여러 명의 인물들이 혈인마정(血印魔鼎)의 주위에 둘러 서 있었다. 아수마황(阿修魔皇)과 귀
종(鬼宗)을 비롯한 몇 명의 노인들, 그리고 무영이 그들이었다.
노인들은 팔황마전 내에서도 특히 독공(毒功)과 사법(邪法)에 능통한 달인들이었다.
"……!"
"……!"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혈인마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무영 역시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닫고 있었다.
문득 무거운 침묵을 깨고 귀종(鬼宗)이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전주! 최선을 다했으나 파멸혈인대법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무영에게 송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중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혈인마정 내부에는 마서시 환사나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 동안 귀종(鬼宗)과 노마종(老魔宗)들은 전력을 다해 환사나에게 시술된 파멸혈인대법을
해체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만 것이다.
다만 환사나가 파멸마녀가 되는 속도를 현저하게 늦추었을 뿐이었다.
무영은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약 백일(百日) 정도입니다. 그 안에 손을 쓰지 않으면…!"
귀종은 대답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깨울 수는 있소?"
무영의 물음에 귀종은 흠칫했다.
"깨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주아가씨께서는 거의 마녀경(魔女境)에 이르러 있어 이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깨운 자의 지시대로 무슨 짓이든 하게 됩니다."
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깨울 준비를 하시오! 시술자는… 본좌가 되겠소!"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아수마황이 우려의 표정으로 무영을 바라보았다. 무영은 뭔가 마음에 결정이 선 듯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혈궁(血宮)에… 사매를 대동하여 가보겠소. 그곳에 가면 사매를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
오!"
"그것은 위험……!"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반대하려던 아수마황과 귀종은 하나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영의 눈
빛에서 이미 결연하게 굳어진 결심을 본 것이었다.
무영은 아수마황 등을 둘러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본좌가 음세황으로 환사하여 혈궁(血宮)으로 갈 것이오! 이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해야만 하
오. 특히……!"
그는 말을 끊으며 중인들에게 주지시켰다.
"어머님에게는 더욱 알려서는 안 되오! 그 분이 아시면 결코 본좌가 가는 것을 허락지 않을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
아수마황과 귀종 등은 깊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무영의 두 눈이 휘황하게 빛을 발했다.
'혈왕(血王) 나백(羅伯)! 조만간 당신과 만나게 될 것 같군!'
그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 * *

대파산(大巴山).
사천성(四川省)의 동북방을 이천여리에 걸쳐 에워싸고 있는 광대한 험산준령이다.
황혼 무렵,
"……!"
휘…… 이잉!
휘몰아치는 강렬한 산풍(山風)에 옷깃을 펄럭이며 높은 산봉 위에 일남일녀가 우뚝 서 있었
다.
눈빛이 싸늘한 중년의 문사와 아담한 체격의 미소녀였다.
미소녀의 용모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희고 반듯한 이마에는 선명한
핏빛 점이 섬뜩하게 떠올라 있었으며 아름다운 두 눈빛은 초점이 없었다.
마서시(魔西施) 환사나!
미소녀는 바로 팔황신마 환극의 손녀인 환사나였다.
중년문사는 물론 마마천황 음세황으로 환신한 무영이었다.
'천면할아버지가 남긴 기록대로라면 이 주위가 분명한데...!'
무영은 형형한 눈으로 주위사방의 험산준령들을 훑어보았다.
바로 그 때였다.
"막주(幕主)! 오느라 수고했네!"
그의 등 뒤에서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
무영은 움찔하며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의 이목에 감지되지 않고 접근한 자가 있는 것이다.
언제 나타났을까?

무영과 환사나의 삼 장 뒤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모발과 수염이 온통 피를 칠
한 듯 시뻘건 괴노인이었다.
츠으…!
그는 끔찍하게 눈까지도 붉은 핏빛이었다.
그를 본 순간,
'적발…마존(赤髮魔尊)!'
무영은 내심 격동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적발노인은 무영이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적발미존(赤髮魔尊) 사사역!

그자는 바로 오 년 전, 천면자(千面子)를 추적하여 북망산에 나타났던 혈왕문(血王門)의 초
고수 적발마존이었다. 무영이 보기에 그자는 결코 팔황신마 환극의 아래가 아니었다.
'이 원수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무영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적발마존! 무영이 어찌 그자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천면자와 고독원(孤獨院)의 형제들
을 무참히 죽인 철천지 원수가 아닌가?
무영의 가슴은 격렬한 분노로 격탕되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좌호법(左護法)!"
그는 적발마존을 향해 태연히 포권했다. 이어 옆의 환사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혈왕(血王) 저하께서 명하신대로 파멸마녀 환사나를 데려 왔소이다!"
적발겁황존은 눈길을 환사나에게 돌렸다.
"흠! 이 아이가 환극의 손녀로군."
그는 섬뜩한 핏빛 눈을 번득이며 환사나를 주시했다.
무영은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짐짓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환사나를 호법께 안내했으니 후배는 그만 돌아가 보겠소이다!"
그 말에 적발마존은 손을 내저으며 껄껄 웃었다.
"그냥 돌아가다니…… 먼 길 오느라 수고했는데 대접도 없이 보낸다면 예의가 아니지!"
이어, 그는 무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자, 함께 궁(宮)으로 가서 여독이나 풀고 가게. 이번에 상당히 괜찮은 아이들이 들어왔으니
한두 명 보내 주겠네!"
스읏!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몸을 움직여 곧장 남서쪽으로 날아갔다.
"……!"
무영은 적발마존의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환사나에게 손짓을 함과 동시에 그도 몸을 날렸다. 그는 적발마존과 나란히 몸을
날리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혈왕 저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적발마존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궁주께서는 요즘 두 명의 절대혈인(絶代血人)을 완성시키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
네."
"절대혈인(絶代血人)?"
무영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하하! 자네가 만든 저 파멸마녀(破滅魔女) 만큼 무서운 마력(魔力)을 지닌 마물(魔物)들이
지. 다만 틀린 것은 그 자들은 파멸마녀 같은 소모품이 아니라 불사(不死)의 능력을 지닌 살
아 있는 살인기계들이라는 점일세."
적발마존은 득의의 음성으로 설명해 주었다.
'절대혈인!'
무영은 섬뜩한 오한을 느꼈다.
'파멸마녀보다 더 무서운 마물(魔物)들이 혈궁(血宮) 내에서 만들어지고 있단 말인가?'
그는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어, 힐끗 적발마존의 눈치를 살피며 그에게 더 자세히 탐색
하려 했다.
한데 그때,
"다 왔네……!"
슥!
적발마존이 몸을 멈추며 말했다.
그들이 멈춘 곳은 운무가 자욱한 곡구(谷口)였다.
"……!"
무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쪽은 온통 백사 같은 운무가 뒤엉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운중생사로(雲中生死路)!
이것이 계곡의 이름이었다.
뚜벅……
삼인(三人)은 적발마존을 선두로 운무 속을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아무런 방어시설이나 사람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주위에는 온통
숨통을 조일 듯한 흉흉한 살기가 가득함을 무영은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일단 유사시에 안개의 통로는 천군만마도 거꾸러뜨릴 수 있는 지옥으로 돌변할 것이다.
무영은 걸음을 옮기며 내심 중얼거렸다.
'혈궁(血宮)을 무너뜨리려면 이 안개의 계곡부터 무너뜨려야 하겠군!'
그는 스산한 눈길로 마(魔)의 운무를 뿜어내고 있는 통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삼백 장을 걸어 들어 갔을까?
돌연, 자욱하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현란한 노을이 눈을 찔러왔다.
순간,
"아……!"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그의 눈 앞에는 광활한 대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대파산 중에 그런 대분지가 존재하리라고
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신비마곡(神秘魔谷)!
천면자가 말한 신비마곡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신비마곡 내에는 분지를 가득 메우고 웅장한 핏빛 성채가 우뚝 서 있었다.
검붉은 혈강석(血鋼石)으로 쌓아 만든 거대한 석성(石城)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대
한 규모였다.
전체규모는 팔황마전과 비슷한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하지만 그 신비마성(神秘魔城)에는 천 년의 장엄함과 괴괴한 분위기가 있었다.

<혈궁(血宮)!>

핏빛의 궁! 삼무신(三武神) 중 혈마(血魔), 즉 혈마지존(血魔至尊)의 후예들이 세운 혈왕지문
(血王之門)의 총단이 바로 이곳이었다.
천년무림의 모든 겁란과 혼란을 배후조정한 난세의 발원지, 달리 신비마성(神秘魔城), 혈왕
성궁(血王聖宮)이라고도 불리는 천년마역이 바로 무영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적발마존이 핏빛 눈으로 무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얼 그리 놀라는가, 전에도 와 보고?"
츳!
그의 혈안(血眼)은 찌를 듯이 예리하게 무영의 전신을 스쳤다.
무영은 순간 흠칫했으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성궁의 이 장엄한 위용은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으니 후배가 어찌하겠습니까?"
"하하! 난 또!"
무영의 말에 의아해 하던 적발마존의 눈빛이 비로소 풀어졌다.
"하긴 천면자란 늙은이를 추격하느라 천하를 뒤집고 다녀본 노부조차도 매번 성궁을 볼 때
마다 압도당하곤 했지! 하여간 그만 놀라고 어서가세나. 신선부(神仙府)에 가서 새로 들어
온 계집들이나 함께 골라보세나!"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
무영 역시 아무 말없이 환사나를 대동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곧 삼인(三人)은 핏빛 광휘를 뿌리고 있는 혈궁(血宮) 속으로 사라졌다.
괴괴한 적막이 사라지는 그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신선부(神仙府).

혈궁(血宮)의 깊은 곳에 자리한 환락굴.
그곳에 있는 여인들을 일컬어 선요(仙妖)라 한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외부에서 납치당해 와
창녀가 된 여인들이었다.
간혹 혈궁(血宮) 내에서 죄를 지은 여인들이 사내들에게 제공되기도 했다. 혈궁을 방문한 자
들은 신선부에서 어느 여인이나 지명하여 동침이 가능했다.

삼경(三更),
거대한 혈궁이 자리한 신비마곡(神秘魔谷) 위로 은빛 월광(月光)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만월의 밤,
스---- 윽!
밝은 달빛을 아랑곳 하지 않는 듯 하나의 은밀한 그림자가 신선부(神仙府)에서 소리없이 빠
져나왔다.
신선부를 빠져나온 그림자는 곧장 흐르듯 혈궁의 깊은 곳으로 날아 들어갔다.
검은 야행복 차림에 검은 몽면을 한 인물은 바로 무영이었다.
"……!"
스---- 윽!
무영은 한 채의 고각(高閣) 위에 우뚝 멈추어 서서 신비마곡의 전역을 내려다 보았다.
'의심가는 곳은 두 곳이다!'
그는 눈을 빛내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의 전면 삼사 마장 앞, 하나의 거대한 구층(九層)의 석탑이 보였다.

-혈마구중천(血魔九重天).

그것이 탑의 이름이었다.
그 탑은 혈궁의 제일금지였다. 혈마구중천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은 궁주(宮主)밖에는 없기 때
문이었다.
무영은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혈마구중천을 주시했다.
'가장 의심가는 곳은 저 혈마구중천이다. 환사나를 마녀(魔女)로 진행시키고 있는 파멸혈인
대법의 비밀은 저곳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심 그렇게 추측했다.
이어, 이번에는 시선을 신비마곡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벽이 음침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지옥마벽(地獄魔壁)!

혈궁의 인물들은 그 석벽을 그렇게 불렀다.
그곳에는 악명높은 혈궁의 뇌옥(牢獄)이 있었다. 이름하여 지옥뇌(地獄牢)라 하여, 한 번 그
곳에 끌려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무영은 눈을 빛내며 내심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의외로 파멸혈인대법이나 혈왕이 만들고 있다는 절대혈인(絶代血人)은 저곳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묵묵히 지옥마벽을 주시했다.
그 때였다.
번쩍!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줄기 불빛이 비쳤다.
'……!'
무영은 흠칫하며 불빛이 인 곳을 주시했다.
불빛이라곤 한 점도 없이 괴괴한 혈궁(血宮), 그 혈궁의 깊은 곳에 위치한 한 채의 전각에서
불빛이 비쳐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묘하게 무영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의아함과 함께 호기심이 발동했다.
'누가 이 깊은 밤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일까?'
다음 순간,
스윽----!
그는 불을 보고 끌려드는 불나방같이 그 전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혈모응향각(血母凝香閣).

이것이 불이 밝혀진 전각의 이름이었다.
혈모응향각은 신비마궁의 내궁 중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극히 화려한 전각이나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고독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전각이었다.
슥……
전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목 위로 날아오른 무영의 두 눈이 일순 크게 치떠졌다.
'으헉!'
전각을 내려다 보던 그는 하마터면 고목에서 떨어질 뻔했다.
혈모응향각 내부의 한 칸의 침실은 일견하여 여인의 침실인 듯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침실의 열려진 창문가로 하나의 침상이 놓여져 있었다.
스으…… 스으!
눈부신 월광이 그 침상 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데, 실로 충격적이고도 아찔한 모습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침상 위, 한 명의 여인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모습으로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 가량 되었을까?
십전(十全)!
그 말 외에는 도저히 달리 표현할 수가 없는 절대완벽의 미인(美人)이었다.
옥으로 빚은 듯 섬세하고 단아한 용모, 허벅지까지 이르는 길고 탐스러운 모발, 적당히 살이
오른 풍만한 몸매는 특히 우유빛 피부의 아름다움이 합쳐져 탐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인간으로서 이처럼 완벽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있었다니…!
단순히 아름답기로 따지면 무영도 일찍이 이 여인에 필적할 미녀를 보지 못했다. 저 천하제
일미인이라는 소수낭낭 능희연조차도 이 전라의 미인에게는 부족함이 있었다.
게다가 이 전라의 미녀는 단지 아름다운 것뿐만이 아니었다. 뇌살적인 염기를 지녔으면서도
또한 고결한 기품을 함께 지닌 여인이었다.
"……!"
무영은 침상 위의 여인을 내려다 보는 순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여인은 아름다
왔다.
지금, 전라여인은 침상 위에 기묘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섬섬옥수는 풍만한 젖무덤 위에 사뿐히 얹어 합장하고 있었으며, 옥으로 빚은 듯 미끈한 두
다리는 약간 세워 살짝 벌리고 있었다. 벌려진 여인의 다리 사이로 은빛 월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얄궂게도 그녀는 창문쪽을 향해 다리를 벌린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 때문에 무영은 본의아
니게 여인의 비밀스런 부위를 조목조목 들여다 보고 말았다.
백옥같이 새하얀 한쌍 옥주 사이의 그 깊고 어두운 계곡은 무영의 심장을 멎게 할 뻔했다.
한데, 지금 그 전라 여인의 몸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으…… 스으!
다리를 벌려세워 들어낸 여인의 은밀한 곳에 비친 월광은 흡사 솜에 스며드는 물같이 여인
의 그 비밀스런 부부을 통해 여인의 내부로 빨려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와 함께, 신비롭게도 여체 위로 서기로운 달무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광경은 실로 신비롭고 황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라미인은 아마도 어떤 기문내공(奇門內功)을 연마하는 중인 듯했다.
무영은 그 광경을 주시하며 눈을 번뜩 빛냈다.
'그렇군! 저것은 전설 속의 초마공… 아황월인천강이다!'

-아황월인천강(娥皇月印天剛)!

여인이 익힐 수 있는 최강의 강기신공으로 알려진 무공이다. 그것은 천지간의 음기(陰氣)가
가장 강한 만월(滿月)의 밤에만 연성할 수 있는 제약이 따른다.
하지만 일단 완성하면 가히 무적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는 공격보다 수비전형의 기공이라 할 수 있다. 몸 주위에서 일어나는 달무리 같은 강기의
노을에 부딪치면 금강지체라 할지라도 한줌 모래로 스러지고 만다.
한데, 놀랍게도 그 전설 속의 초극마공을 신비미부(神秘美婦)는 거의 완성단계까지 연성한
것이 아닌가!
'놀랍군! 아황월인천강이 절전되지 않고 지금껏 전해오다니…!'
무영은 놀람을 금치 못하며 경이의 표정으로 여인을 주시했다.
한데, 그 때였다.
파르르……!
돌연 여인의 몸에 격렬한 경련이 일었다.
달이 중천으로 떠오르며 고목 위에 은신하고 있던 무영의 그림자가 여인의 몸 위로 이동한
것이었다.
무영은 순간 움찔했다.
'아차! 들켰다!'
이때,
스으……
"으……!"
여인의 입에서 한 줄기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눈부신 나신 위로 흐르던 신비로운 달무리가 급격히 사그라드는 것이 아닌
가?
여인은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음을 감지하자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주화입마에 든
것이다.
무영은 그 모습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이것 낭팬데! 저대로 두면 위험한 지경에 이를 텐데…'
그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손을 비볐다.
어쨌든 이는 자신으로 인한 사고가 아닌가?
'어떻게 하지? 들어가서 도와주어야 하나? 하지만 난 지금 혈궁을 염탐 중인데....!'
무영은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전전긍긍해 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후후훗! 벌거벗고 주무시다니… 고상한 취미십니다 형수(兄嫂)님!"
돌연 한 소리 음침한 음성과 함께 한 명의 인물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21장
지옥뇌(地獄牢)의 기연(奇緣)


순간,
'저…… 자는!'
여인의 침실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자를 본 무영은 안색이 홱 변했다.
'혈왕(血王) 나백!'
그는 하마터면 신음을 토할 뻔했다.
그렇다.
혈왕(血王) 나백(羅伯)!
돌연 침실로 들어선 자는 바로 그였다.
금릉교외의 폐찰에서 마황자 패엽혼과 금시천붕 붕천리를 살해했던 혈궁(血宮)의 지존(至
尊)! 바로 그 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무영은 내심 침음하며 중얼거렸다.
'형수라니…! 그럼 저 여인이 전대 혈왕 나뢰(羅雷)의 애처 혈모(血母) 설리향(雪離香)이란
말인가?'
그는 다시 한 번 놀람을 금치 못하며 전라 여인을 주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품
고 있는 혈왕잠(血王簪)을 어루만졌다.

-혈모(血母) 설리향(雪離香)!

그렇다! 전라로 누워 있는 여인은 바로 나백에게 암살당한 전대 혈왕 나뢰의 부인인 혈모
설리향이었다.
나뢰의 유언대로라면 나백은 형수 설리향의 미모를 탐해 친형을 암살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설리향은 충분히 그런 일을 가능케 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가…… 주(家主)! 이게 무슨 짓이에요!"
혈모 설리향은 눈을 치뜨며 앙칼진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주화입마에 들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백은 그런 설리향의 모습을 바라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하하! 오해하지 마십시오. 형수님께서 성급하게 아황월인천강을 연마하시려다 위험에 빠지
실 것 같아 돌봐주러 온 것 뿐입니다!"
이어, 그는 적나라하게 시야에 드러난 설리향의 나신을 탐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리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설리향은 수치와 당혹을 금치 못했다.
"필요 없어요! 나가요, 당장!"
그녀는 옥용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날카롭게 교갈을 터뜨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남이 들
을까 저어하여 나직했다.
나백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여유있게 바라보며 태연히 말했다.
"하하 사양하지 마십시오! 형수님의 주화입마를 치료해 주는 것은 소제의 도리가 아니겠습
니까!"
이어 그는 주저없이 설리향의 침상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탐욕이 번득이는 눈길로 풍만하
고 아름다운 형수 설리향의 몸매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욕정에 물든 시선은 형수인 혈모의
알몸을 구석구석 핥아내렸다.
"……!"
나백의 시선을 온몸에 느끼며 설리향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참을 수 없
는 치욕과 분노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몸이 굳어져 치부를 감출 수 없는 것이 한이었
다.
나백은 능글맞게 웃으며 선심을 쓰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를 치료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니까."
이어 그는 음탕하게 웃으며 슬쩍 설리향의 풍만한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흐---- 윽!"
설리향은 신음을 발하며 전율했다.
나백은 냉혹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내려다 보며 손을 움직여 교묘히 나신을 주무르기 시작
했다. 설리향의 무르익은 여체는 나백의 음탕한 손길에 제멋대로 주물러졌다.
'아아! 안 돼!'
설리향은 내심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하나 어찌하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몸은 급격히 뜨거워졌다.
남편인 나뢰가 실종된 지 벌써 십여 년, 길고 긴 금욕은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있어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랜 갈증에 지쳐있는 설리향의 육신은 사내의 손길이 닿자 금방 비를 만난 것처럼 생기로
불타올랐다.
비록 그것이 불륜의 손길임을 알지만 그녀의 몸 깊숙이 잠들었던 본능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었다.
나백은 득의의 미소를 베어물며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후훗! 이런 기회가 오기를 학수고대 해 왔는데…… 정말 너무 쉽게 형수님을 안을 기회가
왔구료!"
그의 능숙한 손길은 점점 설리향의 하체를 더듬어 내려갔다. 미끈한 복부를 거쳐 두 다리를
쓰다듬던 나백의 손길이 마침내 무성한 방초를 헤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으흑!"
설리향은 나백의 손길이 자신의 예민한 몸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또
한, 급격한 흥분이 태울 듯이 전신을 휘감아 왔다. 그녀의 내밀한 분홍꽃잎들은 이미 이슬로
촉촉히 젖어들고 있었다.
"흐흐……!"
나백의 입가에 음탕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역시 흥분을 참지 못하는 듯 이미 눈빛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손을 움직여 설리향의 깊은 곳으로 진입해 들었다. 그곳은 이미 뜨거운 감로수
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헌데 나백이 막 설리향의 내밀한 속살을 탐험하려 할 때였다.
피---- 잉!
돌연 경미한 파공성이 나백의 배심으로 날아들었다.
'……!'
나백은 흠칫하며 설리향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스---- 팟!
그의 손은 벼락같이 뒤로 휘둘러져 암격해온 물체를 잡아챘다.
순간,
'나뭇잎……!'
그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수중에 들어온 물체는 다름아닌 한 장의 나뭇잎이
었다.
직후,
슥……
나백은 신형을 유령같이 움직여 침실 밖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주위는 괴괴한 적막으로 뒤덮여 있을 뿐 아무런 흔적조차 엿볼 수가 없었다.
'놓쳤군!'
나백은 일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 환우최강자라 자부해 왔다.
사실 그는 당대제일인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나백의 이목으로도 암습자의 종적조차 찾지
못했으니……
나백은 재빨리 염두를 굴렸다.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는 혈마구중천(血魔九重天)의 전대노물 십여 명밖에 없다!'
그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불안감이 갚戮 전신을 휩쓸었다.
'분하지만…… 포기해야 겠다! 아직 늙어 죽지 못한 그 늙은이들과 충돌할 수는 없으니……
'
그는 애석한 표정으로 힐끗 고개를 돌려 려전히 침상 위에 전라로 누워있는 설리향을 주시
했다.
'빌어먹을…! 입 안에 다 들어온 고기였는데……'
그는 안면을 이지러뜨리며 입맛을 다셨다.
하나 다음 순간,
스…… 윽!
그는 유령같이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흐윽…!"
나백이 사라진 혈모응향각 내에서는 수치와 분노에 숨죽여 흐느끼는 가엾은 여인의 울음소
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혈모(血母) 설리향(雪離香)!
이것이 비운의 여인의 이름이었다.

* * *

'후훗, 혈왕(血王)! 간담이 서늘해졌겠지!'
무영은 히죽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스---- 윽!
그는 유령같이 몸을 날려 지옥마벽을 향해 날아갔다.
'우선 지옥뇌(地獄牢)란 곳부터 살펴보자!'
그는 눈을 번뜩이며 삽시에 지옥마벽 앞으로 날아 내렸다.
지옥마벽 아래, 그곳에는 지옥의 입구같이 시커먼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지옥뇌(地獄牢).

동굴 위에는 이끼낀 고전체의 글로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지옥뇌의 주위에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괴괴한 적막과 살기만이 목을 조일 듯 사위에 팽
배해 있을 뿐이었다.
무영은 눈을 빛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감시병을 세우지 않은 것은…… 저 안의 기관함정이 극히 흉험하다는 뜻이겠군!'
그는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 때문에 경을 칠걸세, 혈왕의 졸개들……!'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다음 순간,
슥……
무영은 마치 무게 없는 깃털처럼 지옥뇌로 스며들었다.

* * *

무영(無影)은 지옥뇌 안의 뇌옥 앞을 지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군!"
그의 입에서는 둔중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끝이 없이 길게 이어진 쇠창살의 뇌옥안에는 처참한 형상의 수인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
들에게는 모진 고문과 학대가 가해진 듯 제대로 인간의 형상을 갖춘 자들이 없었다. 실로
끔찍하고도 참혹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외부에서 납치되어온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에서 신비하게 실종된
명숙들이 대부분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은 지옥뇌의 뇌옥 안에 짐승만도 못한 형색으로 수감되어 있는 것이었
다.
"……!"
"……!"
수인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으나 개중 깨어 있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그들은 이미 모든
감정을 상실한 듯 그저 텅 비어 공허한 눈길로 지나가는 무영을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영은 이 처참한 형상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계속 뇌옥들을 지났다.
한데 ,
"크! 너…… 너는 누구냐? 누군데… 나의 유령천익을 지니고 있느냐?"
돌연 한 칸의 뇌옥에서 끊어질 듯 쇠약한 음성이 들려왔다.
"……!"
무영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한 명의 장발인물이 쇠창살을 움켜쥔 채 무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네놈이 어떻게 내 아내 유령서시(幽靈西施)가 갖고 있어야 할 유령천익을 갖고 있느냐
고 물었다!"
그 인물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형상이었다. 안면이 무참하게 으스러져
형상조차 분명치 않을 뿐더러 두 다리 마저 허벅지에서 끊어져 나간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형상조차 분명치 않은 그를 무영은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령궁의 유령제군(幽靈帝君) 유마공(維摩公)이시오?"
그는 괴인 앞에 마주앉으며 신음하듯 물었다.
"그…그렇다! 본좌가 유령일맥의 전인 유령제군 유마흔(維摩痕)이다!"
괴인은 무영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사람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무영은 경악과함께 기이한 감흥을 느꼈다.

-유령제군(幽靈帝君) 유마흔(維摩痕)!

그렇다! 괴인은 바로 유령궁의 젊은 궁주인 유령제군 유마흔이었다.
오 년 전, 그는 북망산(北邙山)에서 무림인들에게 쫓기며 지존제오마결과 유령쌍보를 무영의
은신처에 숨겨놓았었다.
한데, 그가 처참한 형색으로 지옥뇌에 갖혀 있는 것이다.
"너…… 는 누구냐?"
유령제군는 퀭한 두 눈에 살광을 폭사하며 무영을 노려보았다.
"나는 무영(無影)이라 합니다!"
무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오 년 전 자신이 우연히 유령쌍보와 지존마결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유령제군는 비로소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큿! 그…그렇게 된 일이군!"
그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 주었다.
"본좌는 분하게도…… 혈궁의 조무라기들에게 제압 당했었네. 그 놈들은… 지존마결을 내놓
으라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본좌는 결코 그 놈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자부의 미소가 떠올랐다.
또한, 지존마결(至尊魔訣)과 유령쌍보(幽靈雙寶)가 혈왕(血王)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에 대한 안도감도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무영은 몸을 일으켰다.
"물러 서십시오! 그곳에서 꺼내 드리겠습니다!"
그는 유령제군를 향해 마주서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유령제군는 움직이지 않았
다.
"그럴 필요 없네! 혈왕의 졸개들은 정말 무섭고…… 본좌가 있으면 그대에게 거추장스러운
짐만 될 것이네!"
"유마공(維摩公)……!"
무영이 무어라 대꾸하려 하자 유령제군는 고개를 흔들어 저지했다. 그리고 그는 엉뚱한 말
을 꺼냈다.
"내 아내… 유령서시는… 아직 젊고… 또 정말 아름답네!"
"……?"
갑작스런 그의 말에 무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령제군는 말을 이었다.
"내 아내가… 독수공방 한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네. 유령쌍보와 지존마결
을…… 그대에게 줄 테니… 내 아내를 내 대신 사랑해 주게!"
말을 끝냄과 동시에,
퍽!
그는 돌연 몸을 날려 석벽에 머리를 받아 버렸다.
역한 피비린내와 함께 허연 뇌수와 피가 온통 벽면을 물들였다. 이것은 실로 그것은 찰나간
에 벌어진 돌발적인 사태였다.
무영이 손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다.
"유마공……!"
무영은 아연실색하며 그 자리에 굳어졌다.
흥건한 핏물 속에 쓰러진 유령제군의 얼굴에는 안온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무영이 자신으로 인해 망설일까 봐 자살해 버린 것이었다.
무영은 한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약속 드립니다! 유령마궁과 어부인(御夫人) 유령서시님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의 목숨
을 걸고……!"
그는 쇠창살을 쥐고 잠시 묵도를 올렸다.

* * *

그그긍!
하나의 철문(鐵門)이 서서히 굉음과 함께 열렸다.
문이 열리자 나타난 곳은 하나의 넓은 석실이었다.
한데,
부글부글…… 츠으!
역겨운 내음과 함께 검푸른 수증기가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석실 내에는 십여 개의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 있었는데 예의 그 증기는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억!"
"너는…… 누구냐?"
무쇠솥에 열심히 무엇인가 끓이고 있던 십여 명의 인물들은 경악의 표정으로 철문을 주시했
다. 열려진 철문으로 한 명의 흑의몽면인이 들어서는 것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
"침....침입자다!"
"캇!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난입하느냐?"
다음순간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제각기 무기를 집어들려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피---- 잉!
흑의몽면인 무영의 손 끝에서 열 개의 암기가 벼락같이 격출되며 괴인들의 목을 관통했다.
"커억……!'
"켁!"
쿵…… 쿵……!
괴인들은 일제히 비명과 함께 나무토막같이 나뒹굴었다.
피리리링----!
스슥……
괴인들의 목을 꿰뚫은 암기들은 크게 호선을 그리며 다시 무영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
들은 한 쌍의 날개가 달린 얇은 나비 모양의 비표였다.
-호접사망표(蝴蝶死亡杓)!
그것은 천수화왕(千手火王) 혁련태사가 남긴 십대암기(十大暗器) 중 하나였다. 어떤 호신강
기도 파해하며 일단 발출되었다가도 반드시 수중으로 되돌아오는 신묘한 암기였다.
"이 자들은……!"
괴인들의 시신을 살피던 무영은 흠칫했다.
그 자들은 전신에 얼룩얼룩한 문신을 새긴 자들이었다.
무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남황(南荒)의 전설적인 독문(毒門) 남황독인마종(南荒毒人魔種)의 독인(毒人)들이 아닌가?"

-남황(南荒) 독인마종(毒人魔種)!
남만의 밀림 속에 자리한다는 공포적인 독문(毒門)이다. 그들은 독천존(毒天尊) 서래음의 독
황부(毒皇府)와 함께 독문이종(毒門二種)이라 알려진 단체다.
한데 그 남황독인마종의 문하들이 혈궁(血宮)에 있는 것이다.

석실의 주위를 훑어보던 무영은 경악하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끔찍하군……!"
그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할 뻔했다.
석실의 벽에는 끔찍하게도 인간의 시체들이 정육점의 고깃덩어리같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남황독인마종의 독인들이 끓이고 있던 무쇠솥에는 가공스럽게도 토막
쳐진 인육들이 여러 가지 독물(毒物)들과 함께 끓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천인공노하게도 그 자들은 인간의 시신으로 독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영은 이 끔찍가공할 광경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남황독인마종! 용서 못할 무리들이군!"
그는 살기띤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석실 끝에 하나의 석함이 놓여져 있음을 발견했다.
무영은 내심 긴장과 함께 기대감에 잠겼다.
'제발 저 안에 환사나를 구할 비책이 있기를……!'
그는 다가가 조심스럽게 석함을 집어 들었다.
끼---- 익!
그는 망설임 없이 석함을 열었다.
석함 안에는 한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한 권의 빛바랜 양피지로 된 고경(古經)이
었다.
고경(古經)의 겉장에는 다 문드러져 가는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제왕독경(帝王毒經).>

무영의 두 눈이 크게 흡떠졌다.
"제…… 제왕독경!"
그는 경악했다.

제왕독경!
그것이 무엇인가? 저 독문(毒門)의 영원한 제왕 만독조종(萬毒祖宗)이 남긴 두 권의중 하나
가 아닌가?
만독조종의 두 권 독경 중 하나인 멸신독마경(滅神毒魔經)은 무영이 오 년 전 독천존 서래
음에게서 훔쳐냈었다.
한데, 그 나머지 한 권이자 멸신독마경보다 더욱 무섭다고 알려진 제왕독경이 석함 안에 들
어 있는 것이었다.

무영은 경악과 함께 희열을 금치 못했다.
"만…만독조종의 제왕독경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그는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제왕독경을 집어 들었다.
그 때였다.
"호홋! 그렇게도 기쁜가, 애송이?"
돌연 무영의 등 뒤에서 극히 사악한 여인의 교갈이 들려왔다.
"……!"
무영은 흠칫하며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을까?
철문 앞에 한 명의 여인이 오연히 버티고 서 있었다.
나이는 이십오륙 세 정도로 요사하고 잔혹한 눈빛을 지닌 남만(南蠻)여인이었다.
그녀는 풍만하게 무르익은 몸매에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있었다. 대신, 한 마리의 황
금빛 독사가 그녀의 치부와 가슴을 휘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끔찍하고도 기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황금독망(黃金毒網)!
그것이 뱀의 이름이었다.
사중사왕(蛇中蛇王)이라 일컬어지는 독물(毒物).
그 황금독망을 몸에 휘감고 있는 여인은 황금독망과 똑같은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무영은 여인과 마주 서며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남황 독인마종의 지존인가?"
여인은 무영의 침착하고 담담한 태도에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섬뜩하도록 차갑고 사악한 교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호홋! 남황 독인마종의 종주는 혈궁(血宮)의 태상호법이기도 한 본녀의 오라버니 남황독종
(南荒毒宗)이시다. 본녀는 혈궁의 우호법(右護法)인 사모(蛇母) 사모고(蛇毛姑)다!"
무영은 그녀의 말에 불신의 눈빛을 지었다.
'이 계집이 혈궁의 좌호법(左護法)인 적발마존과 같은 항렬의 고수자란 말인가?'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여인의 어느 구석을 살펴도 적발마존 만큼 강해 보이는 면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영은 침중한 안색으로 다시 물었다.
"제왕독경이 어떻게 너희를 남황 독인마종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여인, 사모 사모고는 사악한 교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호호! 곧 죽을 놈이니 가르쳐 주마. 제왕독경은 혈왕저하께서 우리 남매에게 주신 것이다!"
"혈왕이?"
"그렇다! 그 덕분에 오라버니는 독종지경에 이르게 되어 만독조종 만큼 강해졌다. 그 분이
폐관에서 나오게 되면…… 호홋! 혈왕이라도 오라버니 남황독종(南荒毒宗)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사모(蛇母) 사모고는 득의의 표정으로 신이 난 듯 묻지 않은 것까지 떠들어댔다.
"호홋!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 대담한 도둑놈!"
이어,
슥……
그녀는 마치 날렵한 뱀처럼 무영에게로 다가섰다.
무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왜 본인이 죽어야만 하지? 죽는 것은 그대일 수도 있는데!"
그 말에 사모고는 비웃음의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네 오른 손을 보거라!"
"……!"
무심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본 무영의 안색이 일변했다. 제왕독경을 쥔 무영의 오른손은
어느 새 팔뚝까지 새카맣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영은 내심 낭패함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런! 제왕독경에 독을 묻혀 놓았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모고는 득의의 표정으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 이제 알았느냐? 왜 죽어야만 하는지?"
"……!"
"제왕독경을 알아 보았으니… 그 독의 이름도 알겠지? 바로 천년부시장독(千年腐屍臟毒)이
란 것이다!"
순간,
"천년… 부시장독!"
무영은 나직한 신음성을 발하며 신형을 휘청했다.

천년부시장독(千年腐屍臟毒)!
고금삼대극독(古今三大極毒) 중 하나로 시신이 천 년 동안 썩어 생기는 가공할 시독(屍毒)
이다.
그것은 전대 혈왕 나뢰를 죽게 만든 무형지독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무영은 그제서야 번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 이제 알겠군. 전대혈왕 나뢰(羅雷)를 중독시킨 것이 바로 너희들이었군!"
그는 고통스러운 듯 신형을 다시 한 번 휘청했다.
"엇! 네가 어떻게 나뢰가 중독 되어 죽은 것을 아느냐?"
사모고는 무영의 말에 흠칫 놀라운 기색이었다.
그 순간,
"죽어랏!"
스---- 팟!
무영은 전력을 다해 왼팔을 벼락같이 그어냈다.
그의 왼손 소매 속에서 한 자루의 핏빛 월도(月刀)가 확 튀어나오며 사모고의 가슴을 그어
낸 것은 그야말로 섬전일순이었다.
-월영무흔비폭류(月影無痕飛爆流)!
월영혈막 최후최강의 살인도식이 펼쳐진 것이었다.
한 순간,
"악!"
퍼---- 억!
한 소리 날카로운 비명과 함게 피분수가 섬뜩하게 솟구쳐 올랐다.
사모 사모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황금독망과 함께 싹뚝 베어져 버린 것이었다.
가슴이 둘러 갈라져 버린 사모고는 경악과 불신이 뒤엉킨 눈으로 무영을 노려보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쿵……!
그녀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썩은 짚단처럼……
"크윽……!"
무영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신형을 휘청거렸다.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천년부시장독이 삽시에 어깨까지 퍼져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크! 어, 어서 혈궁을 빠져나가야 한다. 사모(蛇母)의 죽음이 발견되기 전에……"
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힘겹게 석실을 걸어나갔다.
스으……
그가 떠난 석실 안에는 역겨운 피비린내만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혈모응향각(血母凝香閣),

혈모(血母) 설리향은 창가에 앉아 서천(西天)으로 기우는 만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구해 준 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신에는 정결하고 새하얀 백삼을 걸쳤으며 치렁한 흑발은 어때 너머로 탐스럽게 드리우고
있었다.
교수로 턱을 괴고 고뇌의 표정으로 창가에 앉아 있는 설리향의 모습은 마치 하강한 선녀와
도 같이 아름다왔다.
그녀의 자수정같이 맑고 아름다운 두 눈에 원한의 빛이 스쳤다.
'나백……!'
그녀는 혈왕 나백을 떠올리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가 오래 전부터 내게 눈독을 들여온 것은 알았지만… 그런 파렴치한 짓까지 할 정도
로 대담해졌는지는 미처 몰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분노와 수치의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나백에게 당한 모욕적인 행위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그녀의 기억 속에 남겨 놓
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 깊은 곳까지 이르렀던 나백의 손길이 다시 살아나 치를 떨었다.
'빨리 아황월인천강(娥皇月印天剛)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내 손으로 나백을 응징
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옥용에 굳은 결의의 표정이 떠올랐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삐---- 익!
한 소리 날카로운 호적소리가 밤의 정적을 찢어 발겼다.
그 호적소리는 지옥뇌쪽에서 들려왔다.
호적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혈궁의 전체는 삽시에 불이 밝혀졌고 수많은 그림자가 분분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리향은 아미를 상큼 치켜올렸다.
'무슨 일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 때였다.
"크으…!"
한 소리 괴로운 신음성이 설리향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설리향은 홱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눈에 한 인물이 들어왔다.
문간에 기대선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흑의몽면인을 발견한 것이었다.
'흐윽!'
설리향은 터지려는 신음을 간신히 손을 막아 삼켰다.
흑의몽면인은 바로 지옥뇌를 빠져나온 무영이었다.
그는 이미 얼굴까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천년부시장독의 독기(毒氣)가 이미 전신으로
퍼진 것이었다.
무영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설리향을 바라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혈…혈모(血母)! 도…도와 주시오!"
쿠---- 웅!
설리향에게 무엇인가를 내밀며 몇 걸음 다가서던 무영은 마침내 인내력의 한계에 다달한 듯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설리향은 아미를 모으며 쓰러진 무영을 바라보았다.
'이 자가 지옥뇌에 침입했던 모양이군.'
그녀는 빠르게 침착을 되찾았다.
그와 함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을 닫고 있었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이 자는 혈궁(血宮) 나가(羅家)의 적(敵)인 것이 분명한데……"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무영의 주위를 오가면 서성거렸다.
한데 ,
"저…… 저것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설리향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 무영이 그녀에게 보여 주려고 내밀던 물건이 있었다.
비녀(簪), 그것은 한 자루의 핏빛 비녀(簪)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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