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 콜라텍에서 만난 마누라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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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8,926회 작성일 17-02-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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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텍에서 만난 마누라와 딸 40대 중반의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여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라도 한탄을 하며 퇴근을 하면 술로 세월을 보냈다. 고등학교 이학년 때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신혼부부의 아내에게 동정을 빼앗긴 것부터가 여복 타령을 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이층집이었다. 본래는 모조리 부엌 하나에 방 한 칸으로 세를 놓기 위하여 전에 살던 사람이 지었으나 부모님이 그 집을 인수하고는 한참을 살다가 내가 중학교 이학년 때 집 앞으로 소방도로가 앞에 나는 바람에 골목길 안에 있던 집이 졸지에 도로변이 되었고 도로변에 있던 부엌이 딸린 방을 헐고 마당을 줄여서 가게로 만들었고 엄마가 그 가게에서 밑반찬 가게를 시작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세를 주고 있었고 이층에는 우리가 살았다. 사실 마당을 줄였다기보다는 거의 사람이 다닐 수 있을 통로만 남기고 가게로 마당을 편입을 시키는 바람에 일층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에게는 빨래를 말릴 공간이 사라졌고 그 바람에 세든 사람들은 옥상에까지 올라가서 빨래를 널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불편함을 감수하여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였다. 옥상에 올라가는 도중에 고개만 돌리면 내 방이 노출이 되는 것이다. 가게를 하기 전부터 엄마가 옥상에 갈 일을 없었다. 남향으로 난 이층 현관 앞에 빨래를 널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에 빨래가 엄청 많을 경우를 빼고는 이층에서 충분하게 공간이 있어서 건조를 다 시켰다. 일층에는 신혼부부하고 술집에 다니는 누나 노가다를 다니는 혼자 사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들을 둔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살았다. 술집에 다니는 누나는 빨래를 거의 세탁소에 맡기고 자기의 팬티나 속옷은 방안에서 말렸기에 옥상에 올라 올 일이 없었으며 노가다를 다니는 남자도 속옷은 방에서 말리거나 세탁소를 이용하였기에 올라오지 않았으며 또 맞벌이 부부의 경우 일요일에만 빨래를 하여 널었기에 일요일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으나 깔끔하게 신혼생활을 하던 신혼부부의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빨래를 하여 옥상으로 올라오는 통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요즘이야 학교에서 하교를 하고 나면 몇 군대의 학원과 태권도나 피아노 미술 등의 곳을 다녀야 하기에 밥 먹는 시간하고 잠을 자는 시간 말고는 집에서 있은 시간이 평일에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학원 한 곳만 다녀오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였다. 그런데 성적으로 사춘기를 이미 지난 나는 성적인 호기심이 무척 많았는데 새댁이 빨래를 널러 옥상으로 올라 갈 때는 스커트 내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안 보는 척 하고는 책상 앞에 숨겨둔 거울을 이용하여 새댁이 입은 팬티가 무슨 색인지 보는 게 하나의 취미가 되어버렸다. 발자국 소리만 들리기만 하면 밥을 먹다가도 방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는 척 하고 있으면서 훔쳐보는데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난 나도 모르게 피가 한 곳으로 몰리다 보니 그게 노이로제였다. 어느 날 아침 엄마아빠와 함께 아침을 먹은 도중에 이틀 후면 새댁이 이사를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오후 예외 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데 새댁이 올라갔고 난 빨간색 팬티를 보게 되었다. 빨래를 널고 내려가는가 싶더니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왜요?”새댁이란 것을 알고 현관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묻자 “비켜”하고는 나를 밀더니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더니 내 방으로 들어가지 않은가. “왜요?”가로막으며 묻자 “너 이걸로 뭘 했어?”책꽂이 속에 있던 거울을 꺼내들며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여기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새댁은 대담하게 치마를 들쳐 팬티를 보이며 물었다. “............”그렇게 나오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더 궁금해? 더 보여 줘?”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말을 더듬자 “이게 보고 싶으면 말하지?”놀랍게도 새댁은 한 손으로 치마를 들치고는 다른 손으로 팬티 앞을 당겨 안에 숨겨진 보지 털을 보이며 물었다. “............”새댁의 대담함에 난 다시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이게 여물기는 여물었어?”갑자기 나의 발기가 된 좆을 툭툭 치며 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어~제법 단단한데 어디”말릴 틈도 안 주고 새댁은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손을 넣고는 나의 좆을 움켜잡는가 싶더니 꺼내었다. “호~구실하겠는데? 해 봤니?”내 좆과 얼굴을 번갈아부며 새댁이 물었다. “아니요”하고 대답을 하자 “그래? 그럼 동정 하나 없애버려 싫니?”하고 묻기에 “뭐요?”하고 되묻자 “나랑 한 탕 할 용의가 있냐고?”좆을 계속 매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물었다. “빠구리?”하고 묻자 “그럼 내 보지 너에게 보여주었고 네 좆 이렇게 만지고 있는데 뭐 하겠니?”다시 이마를 쥐어박으며 말하기에 “정말?”하고 묻자 “바지만 벗고 눕기나 해”참 네 엄마 올라오면 곤란하겠다. 문 잠가“하기에 난 현관문을 잠그고 방으로 가 새댁이 시키는 대로 바지와 팬티만 벗고 누웠으며 새댁이 스스로 올라와 자신의 보지구멍에 내 좆을 박히게 하고는 펌프질을 하였고 어느 정도 빠구리하는 법을 알게 되자 자신이 눕더니 나더러 올라오라고 하여 내가 펌프질을 하여 새댁 보지구멍에 나의 좆 물을 쌈으로서 난생 처음으로 여자의 보조구멍에 좆 물을 싸보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여복이 없다는 거냐고? 새댁은 내가 지신의 아랫도리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이전부터 알았지만 모른 척 하였다가 이사 가기 몇 칠전에 나와 빠구리를 하였고 그리고 이사를 가 버린 것이다. 내가 여복이 많았다면 일찍 새댁하고 빠구리를 하기 시작하였을 것이지만 여복이 없다 보니 이사 가기 몇 칠전에 한 번 먹을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하였으니 여복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 후로 숫하게 많은 여자들과 빠구리를 하였지만 한두 번 하고 다시는 한 사람이 없어서 세 번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믿겠는가. 결혼도 그렇다. 32살이라는 적지도 않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첫 출근을 하였다가 집으로 왔더니 미안하다는 장문의 편지와 내가 해 준 패물들만 남기고 신부는 행방불명이었고 처갓집에 가서 알아 봤더니 내 신부가 되었다가 도망을 가버린 그년은 결혼 전에 유부남하고 불결한 관계를 가졌었는데 집에서 그걸 알고 강제로 나와 결혼을 시켰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을 잡고 살겠지 하고 생각하였으나 그 유부남을 잊지 못 하고 그 유부남하고 둘이서 도망을 간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회사도 사표를 내었다.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환은 우환을 부른다고 하였던가. 쇼크를 받은 아버지가 덜컥 앓아 누우셨고 아버지가 앓아눕자 어머니가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다 보니 반찬가게 꼴도 말이 아니었기에 내가 엄마가 하던 반찬가게를 차고 하기로 하였다. 그건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복무를 하였고 쉬는 날이면 엄마가 운영하는 반찬가게 일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결혼을 한 적은 있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탓에 법적으로는 총각인지라 총각이 운영을 하는 반찬가게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행히 손님은 늘었으며 한 번 사먹어 본 사람들은 다시 찾아왔고 또 알음알음으로 하여 오는 손님이 생기면서 반찬가게는 엄마가 할 때 보다 매출 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였지만 아버지 병수발을 들고 계시는 엄마는 불알을 찬 아들이 반찬가게를 한다는 것을 그리 탐탐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생활에 비하여 수입도 훨씬 좋고 또 시간도 자유로운 것이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거기다가 주된 고객이 여자들이다보니 인기도 많았다. 또 눈웃음을 주는 헤픈 여자들의 경우 많지는 않았지만 간혹은 가랑이를 벌려주는 여자들이 있었기에 다시 결혼이라는 것을 호기 싶은 마음이 별로 생기지도 않았다. 병석에 누웠던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자 못 하고 이 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심을 한 엄마에게 갑자기 치매가 들기 시작하였다. 어쩔 재간이 없이 나는 엄마를 보호시설에 맡겨야만 하였다. 내가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면 엄마와 내가 굶어죽을 형편이 되어버리고 엄마를 보호시설에 맡기고 돈을 벌면 엄마도 살고 나도 살기 대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며 또 주변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다. 엄마의 정신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확률은 10%도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난 이층에 있던 엄마와 아버지의 기억들을 모조리 정리를 하고 이층을 세로 주고 일층에 있건 방들 중에 가게 옆에 있던 방 두 개를 빼게 하고는 하나는 터서 가게를 늘렸고 또 방하고 가게 사이의 벽을 터서 그 방에서 기거를 하며 반찬가게를 운영하였다. 가게는 예전에 엄마가 운영을 할 때에 비하여 두 배가 커진 반면 매출을 거의 세 배 이상 올랐다. 반찬가게를 하는 분들이나 하셨던 분들 내지는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반찬가게에도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재료들이야 차에 실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들리니까 문제가 거의 없지만 만드는 것은 모조리 사람 손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배추나 무 등 김치 재료들은 하나같이 씻어서 절이는 일고 사람이 해야 하고 그리고 양념장을 속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며 배추김치나 각종 김치를 만드는 것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 하며 멸치조림 콩자반 등등 그 어떤 반찬도 사람 손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니 손이 많이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사람을 채용하여 쓰게 되면 비용이 많이 나가기에 나는 아줌마들을 전부 아르바이트로 써서 일을 시켰다. 반찬가게라고 모든 반찬이 다 맛이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반찬가게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반찬을 집중적으로 관리를 하에 되면 맛이 별로라도 맛이 있다고 하면서 사서 먹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내가 운영하는 반찬가게는 배추김치 등 김치 종류와 시래깃국과 소고깃국이 일품이라고 소문이 났다. 김치 재료들은 최고 상품을 썼으며 시래기는 강원도에서 전량 공급을 받았으며 소고기는 양지 살로 A++등급이 아니면 그날은 소고깃국을 끓이지 않았기에 손님들은 100% 내가 하는 반찬가게의 만찬을 믿고 사갔다. 대신 일요일은 가게 문을 닫았고 닫기 전 토요일 오후 여섯 시만 되면 우리 반찬가게 앞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일요일에 가게를 열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남는 반찬들을 월요일에 다시 팔지 않기 위하여 세일을 하였기에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심지어 어떤 부부는 토요일에 세일을 하는 반찬들을 사서는 냉장고에 보관을 하면서 일주일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소 3만 원 정도를 주어야 살 반찬들을 토요일 여섯 시 이후에 사면 2만 원 정도면 샀고 7시 이후까지 남은 반찬을 살 경우 만 오천 원이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7시가지 반찬이 팔리지 않고 남는 경우는 일 년에 한두 번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없어서 못 파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고 남자다. 인간이기에 이성에 관심이 많고 성욕도 있다. 돈으로 채워주지 못 하는 것이 이성 관계고 성욕이다. 물론 인간들 중에는 존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여자를 돈을 주고 사서 자신의 성욕을 푸는 사람들도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깨끗하다고는 할 수가 없는 나이지만 여자를 돈으로 사고 팔 수가 있는 물건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몰라 정신을 돈을 주고 사서 사랑을 하게 된다면 살 것이다. 하지만 좋지도 않은 남자에게 정신을 팔아가면서 사랑을 하려고 드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고 하면 그건 말 그대로 사랑을 산 것이 아니라 정략을 샀기에 정약결혼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에 정신을 산 덧이 아니라 돈을 보고 한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엔조이는 다르다. 정신적이 교감이 없더라도 육체적인 교감만 있다면 가능 한 것이 바로 엔조이다. 나와 엔조이를 가지려는 여자들은 말은 엔조이라고 강변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물론 나와 가게 옆에 달린 욕실은커녕 부엌도 없기에 뒷물질도 한 수가 없는 단칸방에서 엔조이를 한 증거물인 좆 물을 씻기 위하여서라고는 한다. 그러면서 목욕 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욕 비를 5천 내지 만 원짜리 한 장을 달랑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한 장으로 줄 수 있는 가장 큰 현금인 신사임당님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와 엔조이를 하는 여자들은 엔조이라는 명목으로 즐기고 나서는 신사임당님의 초상화가 그려진 지폐를 얻는 것도 하나의 재미로 느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즐기는 여자들이 내가 운영하는 반찬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줌마들인 것이다. 몇 몇 아줌마들과 그렇게 즐겼지만 이내 마치 그 아르바이트 아줌마들과 돈을 주고 엔조이를 한 느낌이 들기 시작ㄹ 한 것이다. 그러든 중에 누군가가 00동에 있는 00예식장 근처에 있는 콜라텍에 가면 물이 좋아서 엔조이를 할 만한 여자들이 수두룩하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거기다가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영업을 하기에 길게 놀면서 자기에 마음에 드는 상대를 구하기에 좋다고 하였다. 작년 초겨울의 어느 일요일 오후 2시경에 난 그 콜라텍으로 갔다. 겨우 오후 2시인데도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들어가자 나는 분위기를 살폈다. 처음 놀란 것은 콜라텍이라고 하여 콜라만 마시면서 춤을 즐기는 곳으로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맥주도 팔았고 심지어 양주도 판다는 사실이었다. 단, 맥주나 양주 등의 주류를 판매를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일반인들의 눈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룸에서 먹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남녀가 눈이 맞으면 룸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의 간을(마음이 통하는지 모는 것을 그렇게 표현)보고 간이 맞으며 이차로 간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저씨 한 공 땅겨요?”흥겨운 멜로디에서 은은한 멜로디로 음악이 바뀌자 많아 보았자 스무 살 적게 보면 고등학교 일이 학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애가 나에게 오더니 실실 웃어가며 물었다. 불혹의 나이를 이미 지난 나이지만 어린여자 아니 아가씨의 요청을 거절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아니 거절을 하게 될 경우 늙은 놈에게 호의를 베풀었더니 싫다고 해 하고 욕을 듣기 십상 같았기에 거절을 하지 못 하고 따라서 스테이지로 나갔다. 어린계집애 치고는 그런대로 나의 리드에 따라 춤을 추었다. 은은한 멜로디가 끝이 나는가 싶어서 스테이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끈적끈적한 음악이 나오면서 걔가 나를 스테이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품에 딱 안기더니 내가 리드하자 따라오며 춤을 추었다. “아저씨 술 사주실레요?”은근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학생 아니니?”하고 묻자 “아뇨 금년 초에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저 이래봬도 성인이어요, 성인”마치 구면인 것처럼 눈을 흘기며 대답을 하였다. “증 가지고 다니니?”아동 청소면 보호법을 잘 알기에 묻자 “호호호 그렇게 못 믿으시겠어요? 술 사주시면 보여 드릴게요”하고 말하기에 “그럼 좋아”하고 대답을 하였다. “보세요, 이제 믿으세요?”카운터에 가서 술과 안주를 시키자 카운터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자 애가 나와 걔를 룸으로 안내하였고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걔가 나에게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나에게 보이며 당당하게 말하였다. “강 정린 이름 특이한데, 아빠가 지었나?”금년에 발급을 받은 운전면허증에 적힌 이름을 말하며 묻자 “그렇대요, 지금은 같이 살지는 않지만.....”하고 말을 흐리기에 “아니 왜?”하고 운전면허증을 건네며 묻자. “바람을 피우다가 엄마에게 걸렸대요.”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기에 “아~그래 아빠가 안 보고 싶니”하고 묻자 “보고 싶지만 바람둥이라서 안 만나요”하고 씁쓸하게 웃기에 “아저씨도 리언데 들락날락하니까 바람둥이 아닐까?”장난기 어린 투로 말하자 “헤헤헤 하지만 아저씨는 우리 아빠는 아니잖아요?”하고 웃었다. 그리고 나는 정린이 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틈틈이 춤도 추었다. 정린이는 콜라텍 안에 또래의 남자애들도 많았으나 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에게서 아빠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말이다. 6시경에 콜라텍에서 나와서 나는 정린이와 함께 져녁을 먹고 헤어졌고 다음 주 일요일 다시 콜라텍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매주 일요일마다 나와 정린이는 콜라텍에서 만났다. 아니 정학하게 말하여 두 주 후부터는 콜라텍에 입장도 하지 않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가면 함께 들어갔다. 일찍 들어가 있자니 또래의 남자애들이 같이 추자고 치근덕거려서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밖에서 있다가 나와 함께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나기를 다섯 번 째 되던 날 함참을 춤을 추고 또 술을 마시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갈 시간이 되어 갈 무렵 갑자기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서 눈을 감으라고 하였다. 고마운 생각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정린이의 선물은 나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정린이의 선물을 입술이었다. 눈을 감자마자 정린이는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개더니 놀라 밀치려는 순간 두 팔로 목을 감았고 그리고 혀를 내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쩔 줄을 몰라하자 정린의의 내 입안으로 들어온 혀는 내 입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고 나도 모르는 순간부터 나는 정린이 혀를 빨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아빠 나 가지고 싶지 않아?”긴 키스 끝에 정린이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뭐! 뭐라고?”눈을 부릅뜨고 묻자 “아빠가 나 가지고 싶지 않느냐고?”다시 되물었다. 사실 세 번 째 만났을 때 정린이는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였고 정린이의 어리광이 너무나 예뻐서 딸을 하나 둔 셈을 치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그 후로는 정린이는 나더러 아바라고 부르며 예전보다 더 어리광을 피워서 나를 웃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린이를 만나는 일요일이 기다려졌다. “저......정말이니?”나는 몹시 떨고 있었다. “응 아빠라면 나를 줄 자신이 있어”단호하게 말하더니 내 허벅지 위에 앉았고 드리고 나의 목을 감고 다시 지그시 눈을 감고 키스를 하였다. 앞에 키스를 하면서도 난 키스는 받았지만 솔직리 말하여 조금음 무덤덤한 생태로 받았으며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피가 가운데 다리로 몰리지는 않았으나 막상 정린이가 자기를 나더러 가지라는 말을 듣자 정린이가 여자로 보였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이 티 안으로 들어가 브래지어 안에 숨겨진 젖가슴을 주물렀다. “정말 후회 안 하겠니?”콜라텍에서 나와 인근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갔고 여관방에 들어가서도 다시 한 번 더 다짐을 받으려 들자 “응 아빠라면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어”하고 말하더니 옷을 벗기 시작하였고 정린이가 알몸이 되는 과정을 넋을 잃고 보기 있다가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정린이가 알몸이 되어 치대 시트 속으로 몸을 숨기자 그때서야 나도 옷을 벗었다. “정말 후회 안 하지?”알몸이 되어 정린이가 들어간 시트 안으로 몸을 넣고는 정린이 몸 위로 몸을 포개며 다시 묻자 “쉿!”정린이가 손가락으로 내 입을 가리며 말하였다. 그러자 난 좆을 정린이 보지구멍에 대고 강하게 힘을 주어 쑤셔 박아버렸다. “악! 아빠 아파 잠시만 가만있어”정린이가 비명와 함께 눈에서 닭 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아니! 너...........”정린이 젖가슴을 짚고서 나의 좆이 박힌 정린이 보지를 봤다. 놀랍게도 정린이는 자신이 숫처녀였음을 증명이라고 하듯이 내 좆이 박힌 보지 틈에서 검붉은 선혈이 보였다.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아빠, 아빠가 좋아서 준 것이니”미간을 찌푸리기는 하였지만 나의 놀라는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웃어 보이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정린이와 하나가 된 이후로 일요일이면 콜라텍에 가기 전에 먼저 만나 여관으로 가서 나의 성욕을 풀었고 그리고 콜라텍으로 가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놀다가는 저녁을 먹고 다시 여관으로 가서 성욕을 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올해 초여름 어느 일요일 다시 만나서 여관으로 먼저 갔다. 내가 정린이 몸 위에 올라가 열심히 펌프질을 하는 내내 정린이는 나를 외면하고 있었고 나의 좆 물을 받아들이면서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눈물까지 보였다. 그리고 평소처럼 정린이가 먼저 씻고 나가 씻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여관방이 있어야 할 정린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침대 위에 하얀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있었다. 다급하게 꺼내 읽었다. 고맙고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자신에게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가 생겼으며 그 남자하고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았지만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자체를 자신은 용납을 할 수가 없다는 내용과 함께 앞으로 두고 생각을 하니 아빠인 나하고는 헤어지는 것이 아빠를 독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여서 물러나기로 결심을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허무하였다. 하지만 정린이가 행복 해 지기 위하여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한 나는 정린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마음을 먹고 정린이의 전화번호며 직장이름등을 모조리 지웠고 내 기억에서도 지웠다. 그리고 정린이와의 추억이 담긴 그 콜라텍과도 인연을 끊기로 하였고 홀아비의 일요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서 다른 콜라텍을 알아보았다. 가게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콜라텍이 있었다. 정린이를 만났던 콜라텍의 경우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이 반반이었는데 다시 가게 된 그 콜라텍은 대부분이 중년 이후였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내 나이와 걸맞은 곳이라는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편하였다. 두 번 째 간 날 나의 시선을 빼앗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반찬가게 손님인가 생각을 하였으나 그 여자가 나를 몰라보기에 가게 손님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다음 주에도 가서 기다렸다. 세 시가 되어서 왔다가 다섯 시만 되면 여지없이 나갔다. 그 다음 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봤을까 하는 생각만 하였을 뿐 그녀에게 접근도 하지 못 하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다시 그 다음 주 난 용기를 내어서 춤을 추자고 부탁을 하였고 그녀는 나의 청에 수줍어하면서도 응하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하였다. 여섯 시면 가능하다고 하였고 여섯 시에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장소도 정하였다. 그런데 다섯 시가 되니 나가버렸다. 뒤통수를 한 대 강하게 맞은 그런 기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약속장소인 식당으로 시간에 맞추어 나갔다. 여섯 시 정각이 되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을 하고 마누라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첫 출근을 하였던 날 도망을 간 이야기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반찬가게 일 등을 세세히 이야기를 하자 그녀도 자신의 일을 모조리 이야기 하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18살이란 어린 나이에 사대 독자에게 시집을 갔고 첫 딸을 낳고 다시 임신을 하였는데 초음파 사진을 찍은 결과 두 번째도 딸인 것이 확인이 되자 시집에서 지우라고 하며 학대를 하였으나 지우지 않고 있자 남편이란 작자하고 시누이들이 작당을 하여 못 살게 굴었고 결국 7달 만에 사산을 하자 이혼을 결심하였고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하였더니 딸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조건이면 이혼을 해 주겠다고 하여 약간의 위자료를 받고서 딸과 함게 그 집에서 나왔고 위자료로 받은 돈으로 장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하였으나 결국은 전부 말아먹고 딸도 겨우 고등학교만 졸업을 시키고 취업을 하였는데 그래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 나머지 딸이 일요일에도 이웃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다섯 시 반부터 여섯 시까지 저녁을 먹는 휴식시간이라 딸아이에게 집 밥을 먹이려고 다섯 시만 되면 집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딸아이가 평소에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처지라면서 일요일마다 콜라텍에 출입을 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였다. 40이란 나이에 혼자서 딸아이와 함께 살기가 힘이 드는데 자신과 자신의 딸이 의지를 하며 살 수 있을 남자를 만나고 싶지만 중매라고 들어오는 곳은 대부분이 시골에서 살 사람을 찾았으며 자신이 시골에서 없이 살다가 거의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가서 쫓겨났기에 다시 시골로 내려가 살기는 싫고 또 사람의 됨됨이를 직접 확인을 하고서 믿고 의지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이 가면 같이 살려고 스스로 동거를 할 사람을 물색하기 위하여 공장 식당에서 일을 하기에 공장이 쉬는 일요일에 콜라텍을 찾는다고 하였다. 서로를 알게 된 이후 그녀와 나는 콜라텍이 아닌 찻집이나 식당 아니면 술집에서 만났다. 하나씩 알아가면서 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추석을 몇 칠 앞두고 그녀는 내가 운영하는 반찬가게에 직접 왔다. 물론 나는 아르바이트 아줌마들에게는 그녀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여자인 것처럼 보이도록 대하였고 공장 식당에 자기 대신에 하루 일을 할 아르바이트를 들여 주고 그녀도 마치 반찬가게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것처럼 일을 하며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소문도 듣게 하였다(예전에 엔조이를 하던 아줌마들은 없었음) 그 다음 주 일요일 저녁을 먹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모텔로 데리고 갔으나 순순히 따라 들어왔고 관계를 하였으며 기회를 보아 살림을 합치기로 약속을 하였다. 약속을 하고는 세를 주었던 이층 사람에게 방을 빼라고 하였다. 이층에 살던 사람이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서 이사를 갔다. 이층을 완전하게 수리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 가게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그녀는 틈틈이 가게로 와서는 가게 문을 닫은 후에 가게에 딸린 골방에서 관계를 수시로 하였다. 이층이 수리가 끝나고 살림을 합칠 때가 되었을 무렵 나와 그녀가 살림을 합치게 된 사실을 그녀의 딸에게도 말하기 위하여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일요일 사전에 예약을 한 고급 식당의 룸에 앉아 먼저 가서 기다렸다.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그녀가 왔다. 딸도 함께 오기로 하였는데 편의점 주인이 급한 일이 생겨서 삼십 분 정도 늦게 오기로 하였다며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자기가 먼저 나왔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전날 밤에 딸아이에게 나와 관계를 모조리 이야기 하였다고 했다. “사모님 따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오셨는데 들여보내도 됩니까?”서빙을 하는 아가씨가 노크를 하고 들어오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그녀가 말하자 “들어오시라고 합니다.”하고 서빙을 하는 아가씨가 밖으로 보며 말하였고 “고맙습니다. 엄마 나야”하고 그녀의 딸이 들어왔고 “!”나도 눌라 얼어붙고 말았고 “!”그녀의 딸도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그녀의 딸이라고 나온 애는 처음 콜라텍에 나가서 알게 되어서 관계를 하였던 정린이였다. “인사 해 내가 말한 그분이야”그녀가 정린이를 나에게 소개를 하였고 “어서 와요 반가워요”나는 시치미를 때고 손을 내밀어 정린이에게 악수를 청하였고 “예 안녕하세요”하고 정린이도 나를 초면인 것처럼 하고 악수를 하였다. 불편하였지만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칠 즈음 그녀가 화장실로 간 틈을 이용하여 정린이가 재빨리 자기의 전화번호를 적어서 나에게 주었다. 다음 날 통화를 하였다. 엄마하고 살림을 합치기로 한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실이라고 하자 한숨을 쉬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자기를 처음 본 것으로 해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러마. 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우리 집으로 정린이와 함께 이사를 하였다. 살림을 합치고부터 정린이는 나를 자연스럽게 아빠라고 부른다. 정린이 엄마는 딸 정린이에게 정린이 아빠하고 헤어 진 것을 정린이 아빠가 바람을 피워서 했다고 했는데 남편하고 시누들이 정린이 엄마를 못 살게 굴어서 사산을 한 탓에 이혼을 하였다고 하면 혹시나 다시 정린이 아빠가 정신을 차리거나 아니면 딸을 찾게 될 경우에 부녀간에 나븐 이미지를 가지면 합치기 곤란하다는 생각에서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였다고 둘러대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 정린이에게는 남자 친구가 없다. 정린이 엄마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살기로 하였기에 법적으로는 정린이하고 나는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정린이에게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길 때까지만 정린이 엄마 모르게 아빠 노릇을 겸하여 남자 친구 역할도 해 주고 있다. 물론 그 제안은 정린이가 하였고 나도 싫지가 않아서 정린이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지만 정린이 말대로 남자 친구가 생길 때까지만 그런 관계를 계속하다가 남자 친구가 생기면 다시는 할지 안 할지는 정린이가 결정을 할 몫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린이 엄마하고 헤어지지 않는 한은 계속 유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참 한 가지 추가 할 것은 올해는 늦었지만 내년 초부터 정린이는 직장을 그만 두고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기로 하였다. 물론 학비는 내가 전부 부담을 하기로 하고 말이다. 물론 마누라인 정린이 엄마는 정린이와 나 사이가 자기보다 먼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기에 나의 그런 호의에 미안해 하지만 속으로는 뜨끔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여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든 놈이 지금은 여복이 넘쳐서 미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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