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현월 야우 (운검장)-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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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하보주와 운검장 노장주와의 회담이 예정된 그날의 이른 아침, 우문걸은 흑하보주 장대운의 부름을 받고 흑하보주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흑하보주의 전갈을 전해준 사람은 낭아검(狼牙劍)이었는데 그도 평소와는 다른 장대운의 명을 받고 조금 곤혹스러운 모습이었다.
지난 이십여년간 장대운이 해부주 우문걸을 독대하거나 따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말이다.
흑하보주의 집무실 앞에 선 우문걸은 벽고영이 말한바 대로 진행된다는 생각을 하며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무사에게 자신이 도착한 것을 장대운에게 알리라고 명했다.
미리 언질을 받은 듯 수문위사가 문을 열어준다.
널찍한 집무실 안에는 장대운이 서탁(書卓)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그 뒤로는 낭아검이 호위를 하며 서 있었다.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보주님.”
“오 해부주! 어서오게. 내가 자네하고 긴히 상의할말이 있어서 불렀네..”
말을 끝마친 장대운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허~ 거참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군..나도 늙었나?..허허”
기억이 날 리가 없다.
어제 벽고영의 최면에 걸려, 고영의 암시대로 아침에 녹영의 방에서 눈을 뜨자마자 낭아검에게 우문걸을 불러오라고 지시했을 뿐이다.
벽고영의 말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한 우문걸이 그 다음 촉발(觸發)언어를 말하며, 장대운을 위협하듯 허리에 비끌어 맨, 검의 손잡이를 잡고 그가 앉은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하하하! 그럴수도 있지요..하하하..조금 지나면 모두 기.억.이 나실 겁니다. 저도 아침에 낭.아.검. 이.명(狼牙劍 李溟) 대협이 부르러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하”
낭아검 이명... 기억....
우문걸이 힘주어 뚝뚝 끊어지는 발음으로 말한 두 단어를 들은 장대운의 눈빛이 흐릿해지면서 지난밤에 꾸었던 꿈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특히 낭아검이 자신의 애자(愛子) 장인교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장면과 우문걸이 그 칼을 막는 장면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순간적인 분노의 불길이 장대운의 이성을 덮어버리고 낭아검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감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뒤편에 있는 낭아검을 돌아본다.
그때 낭아검은 평소 장대운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판단하고 있던 우문걸이 보주를 위협하는 듯한 몸짓을 보이자 장대운 호위무사로서의 반사적 행동으로 검을 반쯤 뽑아든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장대운의 눈가에 불길이 일면서 쌍장을 휘둘러 낭아검을 쳐간다.
“네이놈~.”
“크으윽~”
불시에 생각지도 못한 장대운의 공격을 받은 낭아검이 가슴에 쌍장을 허용하고 비로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그리고 동시에 우문걸의 신형이 낭아검을 덮친다.
“감히 보주님을 암습하다니..죽어라 이놈~”
“크윽~ 그게 무슨...크아악~”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낭아검은 우문걸의 검에 목이 꿰뚫려 절명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장대운이 낭아검을 돌아보고, 쌍장을 휘두르고, 우문걸의 검에 목이 꿰뚫릴 때까지 불과 숨을 두어번 쉴 짧은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멍하니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장대운을 일깨운 것은 우문걸이다.
“보주님! 곧 있으면 수하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올 겁니다. 낭아검이 보주님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은 숨겨야 합니다. 그 배후를 밝혀야 하니까요. 일단 다른 암습자가 보주님을 공격하는 것을 낭아검과 제가 막아내고 낭아검은 암습자의 칼에 맞아 숨진 것으로 해야 합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우문걸이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창문을 부수며 소리친다.
“저놈 잡아라!..보주님을 암습한 놈이 창문을 부수고 도망친다. 어서 잡아라~”
부서진 보주 집무실 창문 밖 아래로 주강의 물줄기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우문걸을 보고있는 장대운의 머리속으로
“해부주 우문걸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라는 어젯밤 꿈속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역시 우문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장대운의 마음속으로 스며들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잠시 후 흑하보의 좌, 우호법이 소란을 듣고 집무실로 들이닥치고 그들을 보는 장대운의 눈가에는 싸늘한 한기(寒氣)가 흐른다.
벽고영의 각본대로 된 것이다.
모든 소란이 가라앉은 후 장대운은 우문걸을 따로이 불러 긴 시간 독대를 했고 우문걸이 독대를 끝내고 나온 뒤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그리고 해부소속 우문걸의 심복무사 한명은 성고산에 있는 흑하특무대의 장원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전서구에는 장하운에게 보내는 춘절이 지나기 전에는 광주로 돌아오지 말라는 내용의 서찰이 다리에 매달려 있었고, 해부소속 무사의 품에도 당분간 특무대 전원을 이끌고 잠적해서 힘을 기르고 우문걸을 통해 연락을 취하라는 장명운에게 보내는 친서가 있었다.
어젯밤 최면으로, 두 동생들이 패가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고 믿게 된 흑하보주가 두 아우를 살리기 위해 우문걸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장하운, 장명운은 이미 북망천을 건너가 있었다.
장하운에게 보내는 전서구는 텁석부리 선장 임무열이 처리할 것이고, 해부소속 무사는 성고산 장원을 한 바퀴 돈 뒤 서찰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전달했노라고 보고할 것이다.
그리고 장대운은 우문걸을 흑하보의 부보주(部堡主)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전격 발표 했다.
이모든 일들은 회담이 예정된 날의 오전시간에 두시진 동안 급박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정오 무렵, 화려하게 치장된 혜화루 3층의 특실에는 5인의 인물들이 모여 있다.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이들은 운검장의 운현과 벽고영, 그리고 흑하보의 장대운과 우문걸, 녹수 산장에서 나온 패검(覇劍) 이 건학(李建鶴)이다.
이건학은 패검(覇劍)이라는 별호(別號)와는 어울리지 않는 48세의 청수한 외모를 가진 학자타입의 잘생긴 중년인이다.
가끔씩 발하는 날카로운 안광이 없다면 서책을 읽는 서생으로 볼 것이다.
그는 특실에 들어와서 인사만 나눈 뒤 별말 없이 회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회담의 주제가 운검장과 흑하보의 연중 일회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업무회의이기 때문이다.
장대운은 이건학이 조금 거북스러운지 아까부터 불편한 얼굴이지만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저희 운검장에서 생산되는 곡식들과 목화등은 내년에도 전량 흑하보의 선박을 이용해 내륙으로 운송하는 걸로 하지요..”
“저희 흑하보에서도, 바다에서 올라오는 생선류와 해산물의 광주 판매권을 운검장에게 일임하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작년과 틀려진 것이 없는 운현과 장대운의 말이었고 작년과 다를 것이 없는 계약내용이었다.
“수결을 하시지요”
장대운이 미리 준비해온 같은 내용의 계약서 두부를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허허~..올해부터 운검장의 대외업무는 벽고영 소장주가 맞기로 했습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장대운과 이건학을 둘러보면서 말을 했던 운현이 고영을 돌아보고 말을 잇는다.
“고영아! 오늘부터는 대외업무 서류도 네가 수결토록 하여라.”
“하하하..운 노장주님은 이제 마음이 편하시겠군요. 이렇게 늠름한 소장주가 업무를 도와주시고 계시니..앞으로 잘 부탁하겠네..소장주!..하하”
흑하보주가 치하의 말을 건넨다.
“저도 잘 부탁 드립니다. 보주님! 그런데 오늘은 어째 호법님들과 아우님들이 동행을 안 하시고 우문걸 해부주님께서 동행을 하셨군요? 하하하”
계약서에 수결을 끝마치고 수결한 계약서를 서로 주고받으며 벽고영이 묻는다.
“허허허..오늘부로 우문걸 해부주가 흑하보 부보주직을 겸임하게 되었네. 앞으로 우문걸 부보주님을 많이 도와주시게..”
이건학과 운현의 눈에 놀라는 기색이 떠오른다.
“어이쿠! 잘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우문걸 부보주님.”
“축하하오. 우 부보주”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노장주님 그리고 창천대주님, 특히 소장주님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동안 치하의 말과 겸양의 말이 오가는 중에 벽고영과 우문걸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흑하보주께 드릴말이 있소이다.”
운검장과 흑하보의 공식 업무가 끝나자 이건학이 드디어 말문을 열고, 장대운이 긴장된 눈빛을 한다.
“말씀하시지요. 창천대주님”
“흑하보가 요즘 남천패가(南天覇家)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것 같다는 세작들의 보고에 저희 장주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계십니다. 당장 흑하보의 좌우호법만 하더라도 패가 출신이 아닙니까? 보주께서는 이일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이건학이 초장부터 강한 어조로 핵심을 찔러온다.
“거기에 대해서는 저희 부보주가 말씀을 드릴 겁니다.”
긴장된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장대운이 우문걸에게 주도권을 넘긴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에 관해 보주님과 깊은 논의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패가출신의 호법들을 존속시키는 대신 저희 장인교 소보주님을 무공연마도 할 겸 세상이치도 배우게 할 겸해서 산장으로 보내드리기로 했습니다. 물론 귀장(貴裝)측에서 반대하지 않으신다면요...저희 흑하보의 엄정중립을 위한 조치이니 대주님께서 부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우문걸이 말을 마치고 일어서서 이건학에게 포권을 한다.
흑하보 소보주를 인질로 녹수산장측에 준다는데 반대할 턱이 없었다.
우문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이건학이 밝게 웃으며 마주 포권을 하고 회담은 화기애애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보주님! 저희 운검장의 총관이 운자경 아가씨로 바뀌었습니다. 전 총관 장하생은 일신상의 이유로 고향인 해남도로 낙향한다고 하더군요..”
장대운과 인사를 나누며 돌아서던 벽고영이 던진 마지막말에 장하운과 총관과의 행위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던 장대운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이미 장하운과 장명운 그리고 운검장 총관의 시신은 화골산으로 녹이고, 남은 뼈마디는 백운산 기슭에 묻은지 하루가 지난 상태였다.
그 사실을 우문걸은 알지만 장대운은 모른다.
앞으로도 장대운은 모르는, 우문걸만이 아는 흑하보내의 일들은 점점 많아 질것이다.
장인교의 건으로 패검은 녹수산장에 돌아가서 큰소리칠 명분을 얻게 된 것이고 흑하보는 산장과 패가, 중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모든 것이 벽고영의 머리속에서 나왔다.
어제 우문걸(宇文傑)과의 회동에서 제일 신경 썼던 부분이 이 부분이고, 최면과정에서도 패가쪽에 대한 장대운의 불신감을 심어주려고 최대한 노력한 결과이다.
벽고영이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오늘아침 우문걸과 장대운과의 독대에서, 우문걸이 요청한 장인교를 산장으로 보내자는 강력한 요구에 장대운이 동의를 표한 것이다.
남천패가 쪽에서 장인교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장대운의 최면술에 의해 각인된 걱정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어젯밤에 장인교를 살려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제 장대운은 남천패가의 가주와 계속 밀서를 주고받기는 하겠지만 의심이 늘어갈 것이다.
그리고 벽고영을 몇 차례 더 만나서 최면으로 각인된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나면 적당한 시기에 스스로 밀서의 내용과 존재를 밝히고 고영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우문걸은 장대운의 혼란을 틈타 흑하보를 내부에서부터 장악해 나갈 것이다.
여기까지가 벽고영이 서찰을 접하고 계획한 일차계획이었다.
이건학은 자신과 대동했던 창천대 수하들과 장인교를 심천(深圳)에 소재한 녹수산장(綠水山莊) 본(本莊)으로 돌려보내고 벽고영등과 함께 운검장으로 함께 와서 자신의 딸인 이지련(李志蓮)을 오랜만에 만나 부녀간의 정을 나누었다.
후문으로는 장인교가 녹수산장에 안 가겠노라고 버티다가 장대운에게 얻어맞아 기절당한채로, 창천대 대원들에게 끌려갔다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건학이 운검장에서 머무는 사흘 동안 벽고영은 그에게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했고 이지련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 챈 이건학에게 호의 섞인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지련의 적극적인 도움이 큰 효과를 발휘했고, 당시 원(元)이 물러간지 얼마되지 않는 시기여서 유목민족의 전래관습인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함께 사는 혼인제도)이 남아 있던 때라 이건학으로서는 벽고영을 두 번째 사윗감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건학은 사흘간 머물다가 심천으로 돌아갔고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도 얼지 않는 광주의 서늘하기만 한 겨울은 깊어갔다.
춘절을 이십일 앞두고 운현노장주의 부고가 광동성의 유수문파에 알려졌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죽음이어서인지 조객(弔客)들이 많이 슬퍼하지 않았던, 칠일간 진행된 장례에는 광동성내의 중소문파 조문객들과 녹수산장과 남천패가는 물론이고 철련의 조문객도 다녀갔다.
철련에서는 오년전 강서성에서 자신들의 작전실패로 인해 아들과 손자두명 그리고 손자사위와 일대 제자들을 백여명이나 한꺼번에 잃었던 노장주의 죽음을 모른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형식적이나마 철련 본련의 대주급 인사 두 명을 보내 벽고영을 위로하고 갔다.
별채의 세여인은 많이 슬퍼했는데, 고아가 되어버린 운자경의 눈물이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장례후 벽고영은 장주로 어서 취임하라는 장 내외 여러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정식장주 취임을 미루고 여전히 소장주로 불리며 운검장의 모든 업무를 해 나갔다.
그리고 춘절을 칠일 앞둔 어두운 밤에 벽고영은 혜화루의 삼층 별실에서 녹수산장의 이건학과 흑하보의 우문걸을 마주하고 있었다.
춘절..칠일 전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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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 <운검장>이 거의 끝나가는 군요..
1~2회 정도만 더 쓰면 도입부인 <운검장>이 끝나고
새로운 챕터가 시작될겁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방대해 질까봐 걱정입니다.
많이 읽어주시고 댓글좀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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