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난 나쁜 놈이다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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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쁜 놈이다.
“야,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 나쁜 새끼야!”
이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사실이니까. 변멸할 거리도 없다. 난 그냥 나쁜 놈이다. 나쁜 놈이 되고 싶어서 나쁜 놈이 된 게 아니다. 내가 가진 성격적 결함은 손쉽게 제어할 수 있는 텔레비전 채널 같은 사항이 아니다.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은 내 여자 친구다. 아니 지금 이 순간부로 여자 친구가 아니다. 헤어졌으니까. 내가 “그럼, 헤어지자”라고 말했다. 여자 친구는 그 말에 화를 내고 있는 중이다.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와 여자 친구는 사귀고 난 지 300일 만에 처음으로 싸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싸우자마자 난 기다렸다는 듯이 이별선고를 했다.
이해하고 있다. 나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사실 싸운 내용이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만한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그 말을 꺼냈고, 여자 친구는 전에 없이 화를 내고 있다.
“무슨 말 좀 해봐!”
여자 친구가 말했다. 그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다. 여자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말없이 그 눈물만 쳐다보았다. 눈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
급기야 감정을 이기지 못한 여자 친구가 나에게 손바닥을 휘둘렀다. 왼손이다. 여자 친구는 왼손잡이다. 어릴 때 오른손잡이로 키워져서 젓가락도 연필도 오른손으로 잡지만 사실은 왼손잡이다. 그 손바닥을 맞았다.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 여자 친구의 왼손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내 볼을 긁은 모양이다. 화끈하다. 나와 여자 친구가 맞춘 커플링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을 여기에 써도 될까.
자기가 손을 휘둘러 놓고, 자기가 더 놀랐다.
“저, 저기. 미안해.”
여자 친구는 자기가 손찌검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여자 친구가 내미는 손을 막았다.
“이제 그만해.”
거절의 의미. 내 말에 여자 친구는 손을 되돌렸다. 고여 있던 눈물은 결국 흘러내렸다. 여자 친구는 자기 옆에 놔뒀던 핸드백을 둘러메고 자리를 피했다.
술집. 나는 테이블에 앉아 있다. 혼자 앉아 있다. 사실은 둘이었지만, 지금은 여자 친구가 없기 때문에 혼자다. 몇몇 사람들이 이곳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조금 창피했다. 내 앞에 있는 소주잔을 한 번에 비웠다. 소주는 쓰다. 이렇게 쓰고 맛이 없는데 왜 먹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먹고 나면 어지럽다. 술이 깨면 머리가 아프다. 자학을 즐기는 건가.
사실 여자 친구가 싫지는 않다. 그러나 좋지도 않다. 사랑하지 않는다. 처음 사귈 무렵에는 좀 더 애틋한 느낌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은 퇴색 되었고, 더 이상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헤어진 것이다.
200일이 되던 날. 난 여자 친구와 잤다. 일주일 동안 준비한 이벤트를 열었고, 거기에 감동한 여자 친구가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여자 친구에 대한 내 감정은 더없이 메말라버렸다.
나도 내 감정에 충격을 받았다. 열렬한 사랑은 아닐지언정,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보내자마자, 나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무언가에 타버렸을지도 모르고, 내 몸에서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내 마음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50일간 일부러 여자 친구와 더 사랑을 나눴다. 마음을 연 여자 친구는 이제 더 쉽게 마음을 열었으며, 나는 손쉽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50일간 여자 친구는 내 모습에 감동했다. 아마 내가 더 자주 만나주고, 더 애틋하게 구니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발악이었다.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감정을 찾아내기 위한 발악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내 감정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선뜻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착하고, 조신하고, 성실하다. 그런 여자 친구에게 매력을 느꼈고, 난 여자 친구에게 다가갔다. 그런 식으로 커플이 되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낸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떠나가버린 것이다.
결국 50일간 내 마음을 되찾지 못했다. 그리고 50일간 잠적했다.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가 오면 바쁘다며 핑계를 댔다. 그리고 오늘. 50일만에 여자 친구와 만났다. 여자 친구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 이제 자신이 싫어진 거냐, 질린 거냐, 다른 여자가 생긴 거냐. 취조하듯이 물었다. 난 아무런 대답도 듣지 않았다.
“무슨 말 좀 해봐!”
“그럼, 헤어지자.”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속된 말로, ‘먹고 버린’ 것이다.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내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여자 친구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뜨거운 사랑은 아니라도,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내고, 그 내 마음은 한낱 종잇조각처럼 갈가리 찢겨져버렸다.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난 진짜 개새끼구나. 내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틀렸다. 줄곧 난 내 마음에 통제당하고 있었다.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 나와 여자 친구는 술을 즐긴다. 주당은 할 정도는 아니라도 소주 한 병 정도는 거뜬히 마신다. 한 병을 마시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면 그 때부터 한 잔 한 잔 마시며 취기를 유지한다. 그러나 오늘은 빠르게 두 병을 마셔버렸다. 내 몫의 한 병과 여자 친구의 몫의 한 병을 모두 마셔버렸다.
어지럽고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정신은 차리고 있다. 난 특별히 주정이 없다. 돈을 계산했다. 이 계집애 계산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구나.
계산을 하고 술집에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감쌌다. 잊고 있었다. 오늘 장난 아니게 춥다. 술을 먹으면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이다. 감각이 무뎌져 덜 춥게 느끼는 것 뿐이다. 사실 체온이 내려가서 추운 날 음주는 위험하다. 그래도 오늘은 나쁜 짓을 했으니 이 정도의 고통은 느껴줘야 한다.
나는 개새끼다. 나름대로 엄격한 집안에서 올바른 예절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주변에서는 바른생활 사나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랑하는 여자라도 하룻밤을 보내면 질려버리는 개새끼다.
난 천천히 걸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없다.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갔다간 아마 아버지에게 밤새도록 혼날 것이다.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통금은 없어졌지만, 아버지는 음주에 대해선 여전히 엄격하다.
그냥 밖을 돌아다니며 시간이라도 때울까 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춥다. 차라리 술집에서 시간을 때울 걸 그랬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느라 일찍 나왔다. PC방이라도 갈까. 그러나 돈이 아깝다. 여자 친구에게 공을 엄청나게 들였던 그 50일간 돈을 너무 많이 썼다. 그 다음 50일간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안 만났음에도 메우기가 힘들 정도로 돈을 썼었다. 근처에 PC방이 보인다. 들어갈까. 말까.
그냥 걷자. 춥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걷다보면 추위가 많이 가실 거다. 좀 빨리 걸어서 몸을 따뜻하게 해야겠다. 그래 까짓것. 참아보자. 군대에서 이런 추위는 일상이었다. 군복무 때와 민간인 때는 추위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지만, 그래도 참아보겠다.
사람이 있고 밝은 많은 곳을 골라서 걸었다. 사람과 불빛이 있으면 그래도 덜 춥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추워 대부분 실내에 있다. 불빛만 많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계속 걸었다. 백화점이 눈에 보였다. 백화점이라도 들어갈까. 따뜻하고 돈이 없어도 오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안 들어갔다. 1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술을 두 병이나 마셨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다.
어쩐지 웃기다. 이 정도으로 예의범절을 차리는 난데. 여자에 관해선 이렇게도 나쁜 놈이라니.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아까 여자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어느 가게 앞에 남녀 한 쌍이 보였다. 여자는 아까 내 여자 친구처럼 울고 있다.
“미안해 이제 너한테 못 맞추겠어.”
여자 앞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이 개새끼야!”
여자는 급기야 욕을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말에 화도 내지 않았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내 여자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멈춰 서고 그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됐어. 이제 그만 하자.”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떠나버렸다. 저 커플, 아니 커플이었던 남녀와 나의 다른 점이다. 저쪽은 남자가 먼저 떠났다. 하지만 형태는 같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선고를 했다.
여자는 가게 앞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그 여자에게 몰려있다. 그러나 그 시선도 곧 추위에 묻혀 사라졌다.
여자는 10분이 넘도록 계속 울었다. 이따금 여자에게 향하는 시선이 있었지만, 모두 추위를 피해 사라졌다. 나만이 그 여자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추위도 잊고서 바라보고 있다.
난 저 여자를 보고 내 여자 친구를 떠올리고 있지 않다. 왜일까. 모르겠다. 정말로 이상하게도, 난 저 여자를 보고 나를 떠올렸다.
여자는 20분이 지나도록 그곳에서 울고 있다. 춥지도 않은가. 오늘 날씨는 정말로 춥다. 꽤나 두껍게 입었는데도 몸이 달달 떨린다. 그런데 저 여자는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서도 20분이나 한 자리에서 울고 있다. 슬픔은 몸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걸까. 나도 나름대로 슬프고 암울한 기분이지만, 추위를 이길 수는 없는데. 여자는 그게 되나보다.
왜 그랬을까.
난 처음 보는 여자에게 함부로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다. 세간의 평가, 예의 같은 것을 심하게 따진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은 남자로 보이는 것을 질색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 여자에게 다가가고 만 것이다.
“저기, 안 추우세요?”
내가 말을 걸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울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예뻤다. 우는 바람에 화장이 다 번지고, 눈은 팅팅 불었지만 예뻤다. 물론 예쁘기는 하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모는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미모를 가졌어도 화장이 저렇게 번지면 예쁘게 보일 리도 없었을 거다. 그런데 난 그 여자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여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넌 뭐냐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거니 경계를 할만도 하다. 여자를 꼬시러 온 사람으로 비춰졌을 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경계심을 풀어줄 필요를 느꼈다.
“저는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괜히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다. 더 이상한 사람 처럼 보인다.
“이런 말을 해서 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텐데요. 저 이상한 사람 진짜 아니에요. 저도 오늘 여자 친구랑 헤어졌거든요. 그래서 한 번 말을 걸어 봤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난 원래 말을 잘 못한다. 발표나 강의, 설명 같은 것은 잘한다.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화에는 약하다.
“그래서요?”
여자가 물었다. 그래도 다행이 여자가 나에 대한 경계를 조금은 푼 것 같다. 안도했다.
“그래서 음……. 제가 왜 말을 걸었을까요?”
근데 여자의 말에 마땅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말을 걸었는지 모르고 있다. 왜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화장이 번져 주위 거뭇거뭇한 여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뭐예요 당신? 말을 걸어놓고 왜 말을 걸었는지도 몰라요? 킥킥.”
울다가 웃을 경우 엉덩이가 미관을 해칠 수도 있을 만큼 변모한다지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여자는 더 이상 울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다리 저려.”
계속 앉아 있어서 다리가 저린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당신도 차였어요?”
“네? 아, 네.”
여자의 말에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해버렸다. 사실은 찼어요. 무자비하게요. 전 완전 개새끼입니다.
“그래서 차인 김에 다른 여자라도 꼬시려고 말 건 거예요?”
“아, 그건…….”
여자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왜 여자에게 말을 걸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꼬실 생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거짓말을 해도 될 텐데. 차였다고 거짓말을 하기까지 했으면서 이상한데서 성실하구나, 나.
“갑자기 말을 걸길래 선수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쑥맥이네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와 자고 나서 버리다시피 한 놈이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난 기본적으로 여자에 서투르다.
과정이야 어쨌든 여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상대가 선수처럼 보이면 여자는 심하게 경계를 한다. 당연하다. 선수의 목적은 뻔하니까. 누가 그런 목적으로 다가오는 남자, 혹은 여자에게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겠는가.
“차인 사람끼리 외로운 밤을 함께 보내보자 이거죠?”
“아, 뭐, 네.”
외로운 밤을 보내자는 말에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여자가 ‘그런’ 의도를 담고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파악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혹시 좋은 술집 알아요?”
여자가 물었다.
“좋은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조용한 분위기가 괜찮은 곳은 알고 있거든요. 혹시 조용한 곳 싫어하세요?”
“아니요. 조용한 곳 싫어하지 않아요. 지금은 조용한 곳에 가고 싶기도 하구요.”
여자가 쓸쓸하게 말했다. 하긴 오늘 같은 날 시끄러운 곳에 가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럼 안내해드릴게요. 그리 멀지 않거든요.”
“네.”
여자는 순순히 날 따라왔다. 골목을 몇 번 돌다보니 목적지인 그 술집이 보였다. 아보카도라는 술집이다. 은은한 조명과 조용한 분위기가 일품인 곳이다.
“와, 되게 괜찮은 곳이네요.”
“그쵸.”
여자가 이곳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나도 여기를 좋아한다. 전 여자 친구와도 자주 왔던 곳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없다.
“아, 저 잠시만 실례할게요.”
여자가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 가는 모양이다. 그렇게 울어댔으니 화장이 어떻게 됐는지 걱정이 됐을 거다. 아마 거울을 보면 충격을 먹겠지. 여자들은 아이라인에 집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남자인 나로선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 예뻐지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다.
여자가 자리를 비운 지 시간이 꽤 흘렀다. 눈화장을 복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론 그대로 떠나버린 게 아닐지 걱정이 됐다. 여자가 돌아왔다. 눈화장이 완전히 복구되었다. 아까보다 인상이 강해진 느낌이다. 우느라 부은 눈을 가리려는 의도인 것 같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오래 기다리긴 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리는 편이 더 좋았다. 오늘은 술을 조금 오버해서 마신 터라 취기가 가실 시간이 필요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혹시 뭐 시켰어요?”
“아직 안 시켰어요.”
여자를 기다렸다. 아무거나 시켰다가 제멋대로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와 함께 메뉴를 골랐다. 적당한 안주를 골랐다. 소주를 두 병 시켰다.
“술 잘 마셔요?”
여자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보통 술을 잘 마시느냐고 물을 때는 자주 마시는지 이따금 마시는지 묻는 것이다. 난 술을 그리 자주 먹지 않는다.
“그냥 가끔 마셔요. 심하게도 안 마시고. 딱 적당히 취할 정도로만 마시는 걸 좋아해요. 음……. 아가씨는 술 잘 마셔요?”
아가씨.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다가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쪽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정혜예요. 임정혜. 정혜라고 부르면 되요. 그쪽은요?”
“제 이름은 세화이에요. 김세화.”
“좀 여자 같은 이름이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학창시절엔 여자 이름 같다고 가끔 놀림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쓴 적은 없다.
“으음. 아, 주량 얘기 했었죠! 저도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저도 적당히 취하게 마시는 게 좋아요. 몸 혹사하면서는 못 마시겠어요. 헤헷.”
정혜 씨가 귀엽게 웃었다. 웃을 때 눈 모양이 초승달처럼 변한다. 입술은 도톰하고, 입이 크다. 미소가 매력적인 여자다.
“제 입술을 잡아먹을 것처럼 보시네요.”
정혜 씨가 그렇게 말했다. 난 찔끔해서 시선을 얼른 돌렸다. 내 시선을 들키니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는 새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때요, 제 입술? 예뻐요?”
……. 이 여자 날 유혹하는 건가.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여자는 원래부터 유혹적인 존재다. 그저 평범하게 했던 말이 나에게 유혹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세화 씨 얼굴 빨개졌다. 귀엽네요.”
여자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다. 여자들은 뭐든지 귀엽다고 말한다. 난 여자의 귀엽다가 대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최소한 나에게 한 귀엽다는 말이 나쁜 뜻 같지는 않다.
“세화씨 혹시 몇 살이에요?”
“25살이요.”
“그래요? 저도 25살인데. 87년생 맞죠?”
“네.”
나이 차이가 많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동갑이었다.
“동갑인데 우리 그냥 말 놔요.”
“그래, 그러자.”
“말 놓자고 하자마자 바로 말 놓네.”
“놓기로 했으니까.”
아직 어색한 느낌이다. 계속 반말을 하다보면 익숙해지겠지. 계속? 계속인가? 난 정혜 씨, 아니 정혜와 계속 만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세화 넌 그럼 아직 학생이야?”
“아직은 학생인가? 그저께부로 4학년 2학기 끝났어. 이제 졸업식만 하면 돼.”
그저께 난 대학생으로서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취직은 어떻게, 한 거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지금 한 군데 최종결과를 기다리는 곳이 있거든.”
“어디?”
정혜의 질문에 결과를 기다리는 그 회사의 이름을 말했다.
“어? 거기 꽤 괜찮은 데잖아. 거길 최종까지 간 거야? 공부 되게 잘했나보다, 그치?”
“그냥 열심히 했지, 뭐.”
솔직히 공부를 꽤 잘했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공부 잘했다고 하는 것만큼 재수없는 건 없다.
“에이, 막 겸손 떠네!”
“겸손 아니야. 근데 거기 최종 떨어지면 진짜 큰일 나.”
솔직히 말하면 그곳에 붙을 거라는 생각에 다른 곳은 준비하고 있지 않다. 만약에 떨어지면 다른 곳을 알아보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그래도 다 잘 될 거야.”
정혜가 웃으며 말해줬다. 그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고마워.”
나도 진심을 담아 고마워했다.
안주가 나왔다. 안주가 나오자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얘기하다가 잔 따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러게.”
내 말에 정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우릴 차버린 전 애인을 위하여!”
“위하여!”
정혜의 건배제의에 나도 잔을 부딪쳤다. 사실 난 차인 게 아니지만, 지금 분위기에 그런 말을 할 배짱은 없다.
“크, 쓰다.”
정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먹었다. 나도 안주를 집어먹었다.
정혜와 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정혜는 이미 직장인이다. 당연하다. 나와 동갑인 여자들은 대부분 취직을 했다. 남자는 군대 때문에 2년이 늦는다. 정혜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열심히 일을 해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나도 전 남친 별로였어.”
정혜가 자신의 전 남자 친구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이거 차여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혼자 있기 외로워서 만난 거지, 어디가 좋아서 만난 건 아니었거든. 근데 이상하게 막상 차이니까 눈물이 나더라구. 자기가 좋다고 따라다녀 놓고 차니까 억울했나?”
난 대체로 조용히 정혜의 말을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된 거 잘 됐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까웠으니까.”
“맞아, 네가 아깝더라.”
정혜는 예쁘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웃을 때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이 매력적이다. 반면 정혜의 전 남자 친구의 얼굴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찬찬히 뜯어볼 시간은 없었지만, 지금은 정혜의 전 남자 친구의 얼굴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정혜가 아까웠다.
“너 진짜 선수 아니지?”
“아니야.”
“막 아부하는데 기분이 좋은 게 일부러 나 꼬시는 거 같아.”
“절대 아니야.”
선수는커녕 스무 살 넘어서야 여자 친구를 처음 만들어본 사람이다.
“근데, 진짜 내가 더 아까워?”
정혜가 물었다. 이건 어떤 평가를 바라고 묻는 게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답을 듣길 기대하는 것이다. 난 그 기대를 저버릴 생각이 없다.
“응. 네가 더 아까워.”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 정혜는 기분이 꽤 좋았나보다. 또 특유의 눈웃음으로 나에게 보답을 해준다.
정혜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다. 얼굴이 예쁜 것도 있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얘기도 재미있게 잘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소주를 한 병씩 마셨다. 우린 소주를 두 병 더 시켰다. 한 병 더 마시면 오늘은 소주를 네 병이나 마신 게 된다. 하루에 이렇게 소주를 많이 마신 적은 처음이다. 그래도 의외로 별로 취하지 않았다. 천천히 마셔서 그런 것 같다.
그때 술집의 문이 열렸다. 저절로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다시 시선을 정혜에게로 옮겼다. 정혜와의 이야기에 다시 집중했다. 들어온 손님이 내 근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시선이 정혜에게 고정되어 있어 그저 걸어온다는 사실만 인식할 뿐이었다.
걸어오던 사람이 우리 테이블에서 멈춰 섰다. 그제야 난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였다. 여자였다.
그리고.
내 전 여자 친구였다.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여자 친구가 말했다. 여자 친구 옆에는 그녀의 친구가 함께 있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여자 친구와 만나다가 자연히 안면을 익힌 사이다. 나와 헤어지고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함께 이곳에 온 것 같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실수였다. 이곳은 여자 친구와 자주 오는 술집이었는데. 당연히 여자 친구도 이곳에 올 가능성이 높았다. 왜 그 생각을 여기 오기 전에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보여주려고! 이 나쁜 새끼야!”
여자 친구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허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나쁜 새끼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자마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술을 마시는 나쁜 새끼다. 미안.
여자 친구는 울면서 술집을 떠났다. 그 옆의 친구도 따라 떠났다. 친구는 떠나기 전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고 갔다.
“완전 나쁜 년이네. 자기가 차놓고, 화내고 욕하고. 안 그래?”
정혜가 내 여자 친구의 흉을 보고 있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찼다고 했으니까. 정혜가 보기엔 아주 불합리한 상황으로 보일 거다.
“양심이 있어야지. 같은 여자지만, 저런 여자 싫어. 자기가 차놓고 뭐하는 짓이야.”
“그만.”
정혜에게 그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듣지 못한 것 같다. 계속 여자 친구의 흉을 본다.
“뭐, 아마 내 남친도 지금 나 보면 아마 욕할 걸. 아니, 때릴 걸. 진짜 그 새끼라면 나한테 주먹 휘두를 거 같애.”
“그만…….”
“응?”
“그만해.”
“…….”
정혜는 그제야 말을 멈췄다.
“내가 여자 친구 흉보는 거 싫어?”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을 했는데, 욕까지 먹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지금까지 도리가 있는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긴 하지만.
“왜? 완전 나쁜 년이잖아. 그런데도 흉보고 싶지 않아? 욕하고 싶지 않아?”
“내가 잘못한 거야.”
“너 그 여자한테 푹 빠졌구나. 안 되겠다.”
정혜가 단정지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나쁜 놈이고, 내가 개새끼다.
“너, 나랑 그냥 확 사고 칠래?”
“뭐?”
정혜의 충격적인 발언에 순간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는 외롭고. 너는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잖아. 그런 사람끼리 외로움을 달래는 것도 괜찮지 않아?”
정혜는 그렇게 말하고 예의 그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보여주었다. 장난스러운 고양이 같은 그 미소에,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나는 또 넋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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