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난 나쁜 놈이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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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7,737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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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더 나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 이미 나도 한계다. 거기가 부풀 만큼 부풀었다. 만지기만해도 사정할 정도로 극도로 흥분하고 있다.
아, 콘돔. 콘돔을 잊고 있었다. 난 침대 옆에 있는 서랍을 뒤졌다. 다행히 콘돔이 들어있다. 보통은 한 개만 놔두는데 여기는 비싼 곳이라 그런지 아예 통째로 들어있다. 상자를 열어 콘돔을 꺼냈다. 봉지를 뜯어 콘돔을 꺼냈다.
콘돔을 끼울 때만큼 꼴사나울 때가 없는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고 한껏 그곳에 신경을 집중하는 모습이 아무리 생각해도 멋대가리 없다. 그렇다고 몸을 돌리는 건 더더욱 꼴사납다. 겨우 콘돔을 다 끼웠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준 게 창피해서 흥분이 식었다. 정혜에게 입맞춤을 했다. 혀와 혀가 만나자 다시 흥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가슴을 애무하고, 한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그곳에 손이 닿았다. 그곳을 애무하려는 게 아니다. 키스에 집중하면서는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손이 있는 위치에 천천히 나를 들이밀었다.
“하, 아아아…….”
그녀가 뜨거운 숨을 몰아쉰다. 그녀의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처음 입구를 뚫을 때는 막히는 느낌이 있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부드럽게 미끄러져들어간다. 그녀의 몸 가장 깊은 곳. 가장 뜨거운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 얇은 고무가 완전한 접촉을 막고 있긴 하지만 충분히 그 뜨거움이 느껴진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흐! 아아!”
오랜 애무로 충분히 흥분했고, 애액도 많아서 그런지 아파하는 기색은 없었다. 전 여자 친구는 애액이 많지 않아서 충분히 애무를 한 다음 삽입을 해도 아파하는 일이 많았다. 천천히 움직이며 애액이 분비되길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빨리 움직일 생각은 없다. 섹스를 할 때 내가 좋은 것보다 여자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걸 더 좋아한다.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전 여자 친구 덕분에 서두르지 않는 습관이 생긴 것도 지금의 여유에 한몫을 할 거다.
“학! 하아. 음! 음! 으음!”
정혜가 억눌린 소리를 낸다. 소리를 내는 게 부끄러운 걸까. 입을 앙 다물고 입 안에서만 소리를 내고 있다. 불만스러웠다. 난 여자가 신음을 부끄러워하며 막는 게 싫다. 전 여자 친구도 늘 그게 불만이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정혜의 입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핥았다. 그러나 입을 앙 다물고 있다. 혀가 나올 생각이 없다. 이 상황에 혀를 거부할 생각일 리가 없다. 그렇게 소리 내는 게 부끄러운 걸까.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혀를 만나기 위해 작업을 계속했다. 내 혀가 계속 그녀의 이에 부딪쳤다. 정혜는 그마저도 막기 위해 입술에 힘을 줬다 .그러나 내 혀가 더 세다.
계속 그녀를 공격했다. 결국 그녀가 패배를 시인했다. 입을 열고 혀를 내밀어온다. 이때를 기다렸다. 난 허리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꺅! 아! 항! 아아아! 아아!”
갑자기 빨라진 움직임에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었다.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닫으려고 한다. 그러나 내 혀 때문에 입을 닫지 못한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빼려고 하자 아예 내가 입술로 그녀의 고개를 눌러버렸다. 정혜는 이미 침대에 뒤통수가 닿아서 더 이상 머리를 뒤로 빼지 못한다. 이번엔 고개를 돌리려고? 양손으로 정혜의 고개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키스를 계속했다. 이제 내 혀를 잘라버리지 않는 한 입을 다물 수 없다고.
“아! 아! 아아! 후웅! 웁!”
이제 그녀의 목소리를 막는 것은 내 입밖에 없다. 스스로 자기의 입을 막을 수가 없다. 허리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내 치골이 그녀의 엉덩이에 부딪쳐 외설스러운 소리를 냈다. 더 이상 부딪치지 않도록 움직임을 조절했다. 이게 할 때는 모르는데 계속 부딪치다 보면 나중에 아프다.
계속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가 내 등을 끌어안았다. 쾌감이 어느 정도 고도에 올랐나보다. 난 키스를 멈췄다. 더 이상 신음을 참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지금 정혜는 쾌감에 집중하느라 키스를 할 정신이 없다. 그녀가 다리를 벌리더니 내 허리를 싸맸다.
정혜가 더 이상 내가 허리를 움직이지 못할 만큼의 힘으로 다리를 조였다.
느꼈다.
날 끌어안고 있는 두 팔에도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그녀의 질이 요동치며 내 것을 조이고 있다.
“하아, 하아, 하아.”
정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쾌락의 여운을 느끼고 있다.
“나 느꼈어.”
“그래?”
“응.”
정혜가 나른하게 웃는다. 어느새 정혜의 얼굴엔 땀이 가득하다. 몸도 젖었다. 땀 때문에 머리카락 수십 가닥이 얼굴에 붙어있다. 난 정혜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 주었다.
“너 내 전 남친보다 나한테 잘해주는 거 알아?”
“그래?”
“어. 전 남친은 그냥 애무도 없이 바로 시작해. 그리고 지 혼자 좋고는 그냥 끝내. 그리고 숨 헉헉 몰아쉬면서 좋았어? 하고 물어본다고. 정말 최악이야.”
정혜가 전 남자 친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좋았어? 여자가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후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고 한다. 기분이 좋다가도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식어버린단다.
그래서 난 잠자리를 가진 후 좋았어? 라거나 그런 뉘앙스를 가진 말을 일체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는 식으로 좋냐는 식의 대화는 한다. 연구를 해야 더 즐거운 섹스를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런 말을 하는 남자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얼마나 좋아했느냐는 남자의 능력의 척도다. 남자의 능력을 증명 받고 싶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나도 능력을 증명 받고 싶은 평범한 남자다. 여자가 싫어한다니까 안 하는 것뿐이다.
“좋았어?”
내가 물었다. 장난이다.
“뭐야! 그런 말 하지 마!”
내 장난에 정혜가 웃었다. 난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아앙! 갑자기, 학, 움직이면, 앙! 안 돼!”
“알아.”
정혜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앙! 장난 하고 있아아!”
잠시 잡담을 나누느라 흥분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아까만큼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느꼈기 때문에 금방 올라갈 것이다. 이제 정혜는 입을 다물어 신음을 억누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마음껏 소리를 내고 있다.
“아! 아! 나 키스해줘. 학!”
정혜가 키스를 요구했다. 키스를 사랑하는 난 당연히 거부하지 않는다.
섹스는 계속 되었다. 정혜는 절정을 몇 번이나 맞이했다. 정혜는 감도가 좋다. 축복 받은 여자다. 될 수 있으면 이 여자가 더욱 기분이 좋아지길 바란다.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정혜는 또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아, 오빠!”
절정의 끝에서 처음 듣는 호칭이 나왔다. 전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 애도 절정의 무렵에 오빠하고 크게 외치곤 했다. 그러나 정혜와 난 동갑이다. 오빠라는 호칭이 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는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불렀다는 거겠지.
“아, 학! 미안해.”
정혜가 나에게 사과했다. 아직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멍하게 풀린 눈으로 억지로 정신을 차려 사과를 하는 모습이 에로틱했다. 그러나 한창 타오르던 마음이 식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누가 잠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찾는데 기분이 좋을까.
정혜는 오늘 처음 만난 여자다. 그냥 외로움을 달래려고 나와 자는 거다. 그러니까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도 그다지 상관없다. 그런 식으로 자기암시를 시도했지만, 역시 안 된다.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이 부분에서 내가 또 나쁜 놈이란 것을 확인했다. 내가 정혜와 무슨 사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독점욕을 발휘한단 말인가.
이제 슬슬 끝내야 할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나 이제 쌀게.”
“으, 응.”
정혜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지루다. 보통 지루증이라 하면 ‘오래 하니까 부럽다’라는 인식이 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제때 싸지 못하니까 스트레스도 받고, 너무 오래하면 여자도 지쳐서 나중에 아프다. 그래서 지루인 사람은 나중엔 성생활을 기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나 난 지루인 것에 큰 불만이 없다. 내가 좋은 것보다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게 더 좋다. 그래서 지루인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자보다 먼저 가는 일이 없으니가. 그러다가 사정을 못 해서 쌓일 때가 있지만 그럴 땐 그냥 자위로 배출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자위를 하는 게 섹스보다 더 기분이 좋다.
내 고민은 다른 곳에 있다. 사정을 안 하니까 끝낼 수가 없다는 것. 그냥 도중에 끝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내가 상관이 없지 여자가 상관없는 게 아니다. 남자가 사정을 안 한 채 끝내면 여자도 찝찝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 이거다. 사정한 척 하기. 이제 곧 끝낸다고 말하고 빠르게 움직이다가 동작을 멈추면 된다.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소리를 내주면 더 완벽하다. 어차피 콘돔을 끼웠기 때문에 못 속일 것도 없다. 콘돔만 빼서 여자가 보지 못 하는 사이에 처리하면 증거인멸 완료다. 쓰레기통을 뒤지면서까지 내가 사정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내가 ‘사정 연기’에 집중하는 동안 정혜는 또 절정의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김에 정혜에게 마지막 절정을 선물해주고 연기를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움직였다. 또 퍽퍽 소리가 나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절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움직였다.
정혜가 절정에 들어섰다. 그래도 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만큼 흥분이 고조되었으니까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루인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여자는 오르가즘 위에 또 오르가즘이 있다는 것. 우리가 오르가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느꼈을 때, 멈추지 않고 남자가 움직이면 여자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다. 충분히 흥분하지 않으면 안 되고, 편안한 환경, 좋은 컨디션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술을 먹으면 감이 둔해지기 때문에 느끼기 쉽지 않은데 정혜가 세긴 센가보다.
“아아! 아아! 아아!”
정혜의 목소리가 점점 하이톤으로 변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내는 소리였지만, 지금은 쾌감을 주체 못하고 저절로 나오는 소리다. 정혜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기도 하고, 허리를 뒤로 확 펼치기도 하고, 다리로 내 허리를 조였다 풀었다 하기도 하면서 쾌감에 몰두하고 있다.
여자는 과연 오르가즘 시에 얼마나 느낄까? 궁금하다. 이런 반응을 보면 남자가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 같다.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내가 저렇게 쾌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까뒤집으면 부끄러워서 죽을 거다.
“윽, 나온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내 연기도 클라이막스를 맞았다. 내 것을 정혜의 안으로 콱 찔러 넣은 다음 전신에 힘을 주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잊지 앉았다. 어차피 정혜는 정혜대로 다른 세상에 가 있어 지금 내 표정에 신경 쓸 정신이 없을 거다. 하지만 하도 연기를 자주해서 이제는 자동으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연기를 마치고 난 정혜의 위로 쓰러졌다. 열심히 움직여댄 터라 사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힘이 없다. 정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풀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산발이 된 정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침대시트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도 떼 주었다. 숨은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가슴이 급박하게 상하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정혜도 정신을 차리고 있다. 호흡도 점차 돌아오고 있다. 다만 나른한 표정과 풀린 눈은 여전하다. 이제 지친 것 같다.
“나 너무 느꼈나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아, 목말라. 물 좀 마셔야겠어.”
냉장고가 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정혜가 침대에서 내려가려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하하! 나 지금 다리 풀려서 못 걷겠어.”
“으이구.”
난 일어나서 정혜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마실 건 내가 가지고 올게.”
냉장고로 가려다가 이불을 집어 굳이 내 하체를 감쌌다. 여기까지 와서 부끄럽냐고 묻는다면, 안 부끄럽다. 여기까지 왔는데 새삼 거길 보이는 게 부끄러울 리는 없다.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짓이다. 알다시피 난 사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거기는 죽지 않고 서 있다. 사정하는 연기까지 해가면서 주접을 떨었는데 아직도 부풀어 있는 그곳과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콘돔을 보여줄 생각은 없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정혜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목이 말라 음료수를 하나 마셨다. 비싼 곳이라 음료수도 괜찮은 걸 넣어두는구나. 다 마시거나 갈 때 몰래 다 챙겨가야겠다.
“아, 나 완전히 지쳤어.”
“나도.”
정혜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지쳤다.
“으, 춥다.”
난 얼른 침대로 올라가 정혜의 뒤로 갔다. 하체를 가리고 있던 이불을 풀어 정혜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잽싸게 콘돔을 빼서 침대 옆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나 또 샤워해야 되겠다.”
정혜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격렬하게 움직이느라 땀이 많이 났다.
“근데 자고 일어나서 할래. 너무 피곤해.”
그렇게 말하고 정혜가 침대에 누웠다. 하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니 샤워하러 가기도 싫겠지.
“아, 축축해. 이거 치워야겠다.”
정혜가 침대에 깔려 있는 목욕가운을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생각해보니 체위조차 바꾸지 않고 가운 위에서 섹스를 계속했다. 정혜가 땀을 많이 흘렸지만 가운이 흡수해준 덕분에 침대시트는 별로 젖지 않았다.
나도 계속 알몸으로 있으려니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이불을 들추고 정혜의 옆으로 들어갔다. 정혜가 살갑게 나에게 다가온다. 정혜의 부드러운 살결이 내 몸에 닿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정혜는 몸에 열이 많구나. 따뜻하다.
“아, 피곤해. 눈 감으면 바로 잘 것 같애.”
“나도 졸려.”
정혜가 한껏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게슴츠레한 눈매. 이건 졸리고 피곤한 게 아니라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유혹에 기꺼이 넘어갔다.
섹스 후의 딥키스 또한 그 느낌이 색다르다. 감미로운 키스가 끝나고, 살짝 떨어져 정혜의 표정을 살폈다. 입가에 한껏 미소를 달고 귀여운 눈웃음을 보인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볼에도 입을 맞췄다.
“너 진짜 키스 좋아하는 구나.”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정혜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본다. 이 눈을 전에 본 적이 있다. 그리 옛날의 일도 아니다. 겨우 한 두 달이나 되었을까. 이런 눈을 매일매일 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 상대도 그러길 바라는 눈.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런 눈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건가. 섹스를 하다가 오르가즘을 느꼈던 것 정도로?
내 눈이 착각이길 빌어야겠다. 그저 자의식과잉이길 바라야겠다. 정혜는 그저 웃으며 날 쳐다볼 뿐 사랑은 조금도 느끼지 않길 바란다.
왜냐면 난 지금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있으니까.
사랑. 애틋함. 그에 준하는 따뜻한 어떤 것도 나는 지금 느끼고 있지 않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 허기. 피로. 허탈함. 그리고 혐오. 나에 대한 혐오. 내가 저 여자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고 났을 때 느꼈던 그 감정. 내가 나에 대해 깨닫게 된 감정. 잠시 있고 있었다. 내가 아주 나쁜 놈이란 사실을.
키스를 할 때 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난 키스를 좋아한다. 키스를 사랑한다. 그런 마음은 상대에게도 전해져, 상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건 착각에 불과하다. 난 그저 키스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잘 가.”
“응.”
정혜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정혜와 난 가볍게 입을 맞추고 헤어졌다. 길거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정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내 핸드폰에 찍혀 있는 낯선 번호를 바라보았다. 정혜의 핸드폰 번호다. 자고 있는 사이 정혜는 내 핸드폰으로 자기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송수신목록에 그 번호가 남아 있다. 정혜가 내 핸드폰에 손을 대는 건 잠결에 느끼고 있었다.
내게 번호를 알려주기 위한 수단인지, 내 번호를 알기 위핸 수단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것이 목적이든 간에 정혜는 나와 또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게 과연 나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단순하게 저장된 여자 번호가 늘었다는 사실을 좋아해야 하는 걸까.
결국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조용했다. 평일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일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주무시는 것 같다.
대학교 4학년이지만, 그끄저께를 마지막으로 모든 수업이 끝났다. 취직하려는 곳은 최종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 본의 아니게 백수인 상태다. 올해는 1년간 취직준비와 연애로 아주 바빴다. 연애를 하면서도 취직준비에 소홀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더더욱 바빴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했다.
컴퓨터를 켜서 목적 없이 인터넷 서핑을 했다. 올해는 컴퓨터로 취직에 필요한 자료나 과제를 위한 자료를 찾았던 기억밖에 없다. 오히려 할 일이 없으니 막막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결국 컴퓨터를 꺼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온다. 호텔에서 잠을 충분히 자긴 했지만 역시 집에서 자지 않으면 마음 편히 잘 수가 없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잠이라도 자야지.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알아서 깨워주실 거다.
오늘 난 오후가 늦도록 잠만 잤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어머니도 약속이 있어서 나가계셨던 것이다. 깨울 사람이 없으니 계속 잠만 잤고 저녁 6시쯤 되어서야 허기가 져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너무 잤더니 머리가 멍하고 몸이 나른하다. 목이 말라서 냉장고에서 물을 마셨다. 갈증이 심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보니 1.5리터짜리 병이 절반이나 비었다.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찬이 없다. 그 흔한 계란도 없다. 싱크대 위 찬장을 열었는데 라면도 없다. 늘 이곳에 라면을 넣어둔다. 혹시나 해서 다른 곳도 열어봤지만 역시 라면이 없다. 먹을 것도 없다.
나가서 라면을 사와야겠다. 방으로 돌아가 옷을 껴입었다. 12월은 춥다.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다. 집에 도착 하자마자 자고 이제야 일어났으니 당연하다. 어차피 보여줄 사람도 없다. 그냥 이 상태로 위에 점퍼만 입었다.
2분 정도 걸어가면 슈퍼가 있다. 슈퍼가 보인다. 슈퍼에 들어가서 다섯 개 묶음으로 파는 라면을 골랐다. 계산하고 슈퍼를 나왔다. 괜히 오래 있으면 쓸데없는 것까지 사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면 바로 나와야 한다.
집에 도착할 즈음 핸드폰에서 문자가 왔다는 알림이 왔다. 핸드폰을 꺼내며 대문을 열었다. 마당을 지나가며 문자를 확인했다. 대학 동기인 이문태에게서 온 문자다. 왜 종강총회에 오지 않냐는 문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2학기 종강총회가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문태에게 온 전화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야, 왜 안 와?』
전화를 받자마자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다.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려놓길 잘했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말고, 얼른 나와라.』
“시간 오래 걸릴 텐데.”
『20분이면 학교에 도착하는 놈이 퍽이나 오래 걸리겠다.』
말 그대로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버스를 타면 학교에 도착하는데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술집까지는 가는 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거기 버스가 없잖아.”
『지랄하지 마. 학교에서 걸어서 10분이거든.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는 거 보니까 몸 괜찮은가보네 얼른 와.』
얼른 끊었어야 하는데 통화가 길어지니까 거짓말을 들켰다.
어쩔 수가 없다. 나갈 수밖에. 얼른 씻고 옷 갈아입고 출발해야겠다. 늦으면 또 그 놈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아, 배고파.”
문태 녀석 때문에 급하게 오느라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술집으로 향했다. 어제 밤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까 이대로 24시간을 채울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술집에 들어서자 나를 알아본 후배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몇 없는 내 선배도 보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새꺄, 왜 이리 늦어.”
“미안.”
문태 녀석 톡 쏘았다. 순순히 사과했다. 그나저나 이 자리에 선배가 둘밖에 없다. 신입생으로 여기에 입학했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 기분이 묘하다.
“늦었으니까 마셔라.”
난 자리에 앉자마자 문태 녀석이 권하는 잔을 원샷했다. 문태 녀석을 따라서 앉는 게 아니었다. 후배들 있는 자리에 앉아야 안주만 집어먹으면서 배를 채울 텐데. 최소한 문태 녀석만 없었어도 괜찮았을 것을.
문태 녀석은 내 동기다. 그러나 나와 달리 내년에 졸업하지 않는다. 1년간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아마 이제 슬슬 취직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너 결과 나왔냐?”
“결과 나올 때까지 6일 남았다.”
문태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제부터 좀 정신없는 일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최종결과가 나오는 날까지 잊고 있진 않았다. 진짜 이거 안 되면 또 다른 곳을 알아보러 다녀야 한다. 그리고 시기상 졸업식을 마치고 나서도 취직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되든 일시적인 백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 안 된다.
오늘 술자리를 마지막으로 집에서 혹시나 모를 다른 취직자리를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넌 아마 될 거야.”
“고맙다.”
문태의 응원에 감사했다. 전 여자 친구도 이런 식으로 날 응원해줬다. 뭐야, 이게. 내가 나 차 놓고 계속 떠올리다니. 그리워하는 것 같잖아.
“야, 근데 혜미는 오늘 안 왔냐?”
“오늘 뭐 급한 일 생겼다던데?”
“걔가 이런 거 빠질 애가 아닌데 집안에 큰일이라도 있나?”
옆자리에서 후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름에 내 의식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야, 맞다. 진짜 혜미는 어디 갔냐? 뭔 일 있어?”
문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질문했다. 옆에 있는 다른 녀석들도 내가 할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당연하다. 한혜미. 그 이름. 내 전 여자 친구의 이름이다. 혜미는 내 2년 후배이자, 여자 친구, 즉 우린 CC였다. 캠퍼스 커플.
“나도 잘 모르겠어.”
난 솔직히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헤어졌다거나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그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아마 이 자리에서 최고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연애라는 것을 단순히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전락시킬 녀석들에게 결코 사실을 말해주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 남의 시선을 잘 못 느끼는 편인데 지금의 시선은 너무나 따가웠다. 날 노려보는 시선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 시선의 의도도 눈치챘다.
김승희. 내 2년 후배이자, 과에서 가장 예쁜 얼굴을 자랑하는 미인. 그리고 아직 남자 친구가 없어 우리 과를 비롯한 타과의 남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인기녀.
그리고, 내 전 여자 친구, 혜미의 절친한 친구.
나를 저렇게 노려보더라도 할 말이 없다.
무표정한 얼굴이 계속 날 쏘아보고 있다. 다른 사람이 쉽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친구와 대화도 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나를 계속 바라본다. 내가 과민반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노려본다고 하기엔 그렇게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나를 쳐다보는 빈도수가 높다.
“야, 승희가 계속 이쪽 쳐다보는 것 같은데.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글쎄다.”
옆자리에 있던 김진호가 슬쩍 물었다. 이 녀석도 승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남자들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 관심이 있단다. 네가 바라는 그런 관심과는 종류가 아주 다르지만 말이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렇게 말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승희의 시선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희를 힐끗 바라보자 승희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난 화장실로 향하는 척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다들 술 마시고 이야기 하는 것에 관심이 쏠려있다. 화장실에 가는 사람을 신경 쓸 사람은 없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승희가 따라나왔다. 승희가 나온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옮겼다. 술집 밖에 있으면 술 취한 후배나 동기 녀석들이 바람을 쐬러 나온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은 없다. 승희도 말없이 날 따라오고 있다.
술집에서 적당히 거리를 벌린 후 골목길을 찾아 그곳으로 들어갔다. 남의 시선을 끌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오빠. 물어볼게 있어요.”
승희가 말했다.
“혜미랑 헤어진 거 맞아요?”
난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오빠가 찬 거예요?”
그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는 내 말에 화가 났는지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혜미가 얼마나 오빠를 좋아하는지 알면서!”
승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나도 알고 있다. 혜미가 얼마나 날 사랑해주었는지. 단순한 연애의 관계를 뛰어넘어 혜미는 진심을 담아 나를 만났다. 혜미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다. 나 때문에 헤어진 거지. 그러나 이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지금 승희에겐 그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사실을 말한단 말인가.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감정이 식었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을 거다. 이미 이런 감정이 피어난 시점에서 인간쓰레기지만.
“지금 혜미 연락도 안 받고 자취방에 찾아가도 문을 안 열어줘요. 문에 귀를 대보면 흐느끼는 소리만 들린다고요.”
“미안.”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이 아니잖아요! 혜미한테 미안해해야지!”
“미안.”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다. 그러자 승희도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혜미한테 다시 찾아가요. 가서 사과하고, 혜미랑 다시 만나요. 오빠도 어차피 진심은 아니었죠?”
“미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왜요? 오빠도 혜미 좋아했잖아요! 겨우 취직준비가 힘들다고 여자를 차는 거예요?”
승희가 어찌나 감정이 격해졌는지 얼굴이 새빨갛다. 승희는 내가 취직준비 때문에 힘들어서 혜미와 헤어졌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 나와 혜미는 사이가 아주 좋았다. 옆에서 보기에 깨가 쏟아지는 닭살 커플이었던 것이다. 그런 커플이 헤어졌으니 외적인 요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나 잘못 짚었다.
취직준비 힘들어서 헤어진 게 아니야.
라는 말이 나오려다 말았다.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간에 넌 네가 바라는 대로 날 바라볼 거잖아. 진심이 아니었냐고? 나한테는 진심이 없어! 나한테는 처음부터 진심이란 게 없었다고!
이 모든 말은 내 마음속에서만 끓어오를 뿐이었다.
“오빠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요. 얼른 혜미한테 가요.”
승희가 내 손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그러나 난 그 손의 이끌림에 따라가지 않았다.
“미안. 안 돼.”
“오빠!”
내가 지금에 와서 혜미에게 찾아간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난 혜미를 찼다. 먹고 버렸다. 내 안의 감정은 혜미와 하룻밤을 보낸 뒤 이미 사그라들었다. 지금 혜미를 만난다고 사라졌던 감정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만 하자. 이제 나랑 혜미는 끝났어.”
“누구 맘대로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희가 나를 공격했다.
“그건 누구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오빠는 오빠 마음대로 다 했잖아요!”
“미안해.”
“나한테 미안해할게 아니잖아요!”
알고 있다. 내가 사과해야 할 대상은 승희가 아니라 혜미다. 그러나 그곳에 찾아갈 수 없다. 찾아갈 용기가 없다. 내가 아무리 나쁜 새끼라지만 부끄러운 줄은 안다. 혜미를 볼 면목이 없다.
“미안. 너한테도 미안하고, 혜미한테도 미안해. 하지만 혜미한테 가진 못하겠다.”
제멋대로 말하곤 자리에서 벗어났다. 승희는 날 잡지 않았다. 승희가 잡을 여지를 주지 않고 재빨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기분으로 술집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자리에 돌아오지 않자 문태에게 문자와 전화가 쇄도했다. 그러나 답장도 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다음날.
난 방을 청소했다. 정말 할 일이 없다보니까 청소도 재미있었다. 오랫동안 방구석들 돌아다니던 쓰레기를 버리고, 아무렇게 책이 꽂혀있는 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는 잡동사니도 모두 처리했다. 30분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1시간이나 걸렸다.
자발적으로 집 청소도 했다. 어머니가 웬일이냐는 듯 날 쳐다본다.
“그냥 요즘 바쁘다고 집안일 못 도와드렸잖아요.”
“그래? 그럼 그 김에 쓰레기 좀 버리고 와라.”
엄마가 옳다구나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쓰레기가 꽤 많다. 쓰레기를 버리러 여러 번 왔다갔다 해야겠다.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고, 쓰레기 봉투도 버렸다. 겨울이라 냄새 별로 안 난다고 쓰레기를 많이도 쌓아두셨다. 매일 공부와 취직준비로 한동안 방에서만 살다보니 이렇게 쓰레기가 쌓이는 것도 몰랐다. 두 번이나 쓰레기를 버리고 왔는데 아직도 남았다. 이번 것만 버리면 끝날 것 같다.
마지막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승희한테 전화가 왔다. 원래 승희와는 연락을 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아니다. 아마 혜미 때문이겠지.
“여보세요.”
『오빠, 저예요. 승희. 지금 어디 있어요?』
“나 지금 집.”
정확히는 쓰레기를 버리러 잠시 밖에 나와 있지만, 그렇다고 밖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
『잘 됐네요. 지금 저 오빠 집 앞인데 잠시 나와 볼래요?』
조금 당황했다. 그냥 다시 혜미를 만나러 가라고 말하는 전화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우리 집 앞까지 찾아올 줄이야.
“나 지금 잠시 쓰레기 버리고 집에 가는 길이야. 집에 다 왔어. 아, 나 보이냐?”
멀리 승희가 보인다. 승희가 통화를 끊고 핸드백에 핸드폰을 넣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쩐 일이야?”
“혜미 만나라고 말하려고요.”
그런 말을 하러 우리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너, 내 집이 어딘지 어떻게 안 거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혜미가 중요하지.”
말문이 막혔다.
“야, 네가 뭘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헤어졌어. 끝났어.”
“누구 맘대로요?”
“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사실은 내 마음이 날 마음대로 조종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구차한 변명이다. 술 먹고 사람 때린 다음 술이 그랬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어차피 오빠가 혜미를 만나러 가지 않을 걸 알고 있었어요. 오늘은 돌아갈게요.”
오늘은? 그럼 다음에도 온다는 뜻인가?
“오빠가 혜미를 만날 생각이 들 때까지 매일 찾아올 거예요.”
묻지도 않았는데 승희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내 표정이 밖으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그럼 오빠 내일 봐요.”
승희는 그렇게 돌아갔다. 자기 멋대로 와서 자기 멋대로 사라졌다.
누구 마음대로라니……. 정말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건 승희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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