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경천행 제6장 地獄修士 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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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109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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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地獄修士 염우

천마각!
하늘 없는 땅,
천마혈성에서 가장 절대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聖殿).
달리,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천마혈성의 제일인자 만세야
자천룡이 기거 하는 곳.
고독한 절대자!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인간!
만세야 자천룡은 언제나처럼 태사의에 깊숙하게 몸을 묻고
있었다.
무슨 상념이 저리 깊은 것인가?
태사의에 몸을 묻은 만세야 자천룡의 전신에서는 이 순간 음
울한 고뇌가 숨막히게 서려 있다.
"인간은 어차피 긴 영생의 시간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
져가는 안타까운 세월 속의 부산물들, 굳이 인간의 마음을 정
(正)이나 마(魔)로 갈라놓고 피를 뿌려야 하는 것인가?"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나직한 음성,
자천룡은 조용히 눈을 떴다.
정광을 뿜어내던 고리눈에 서린 살인적인 고뇌,
자천룡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 거울 속에 투영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 자천룡은 어떤 인간인가?"
자천룡은 무엇인가를 회상하듯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사람들은 이 자천룡이 어떤 인간인가를 모른다. 그들은
모두가 단지 이 자천룡이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며, 천마
혈성의 성주라는 사실만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
이 어찌 한 인간이 지니지 않으면 안될 고독한 운명을 알랴.

만세야 자천룡!
그는 과연 어떤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자천룡이 살인적인 고뇌에 잠겨 있을 때다.
천마각 밖에서 좌초백의 공경한 음성이 들려왔다.
"성주님! 백화궁주(百花宮主)께서 당도해 계십니다."
자천룡은 거울 앞에서 신형을 돌렸다.
돌아서는 순간 그의 전신에 서려 있던 고뇌는 씻은 듯 사라
졌다.
서리서리 뿜어지는 패도적인 기상!
그는 어느덧 만세야 자천룡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 *

여인이다.
푸른 물이 베어날 듯한 옷을 입은 여인.
질끈 동여맨 허리의 잘록한 곡선과, 풍만한 젖가슴이 잘 발
달된 모습이어서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이다.
이 여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여인의 피부가 분
같이 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인가?
언젠가 불타는 신검거를 바라보며 백표랑의 뒤를 따르던 양
산을 쓴 문제의 여인이 아닌가?
여인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속하 백화궁주 백옥마(白玉魔) 소설리가 성주님을 뵈옵니
다."
놀라운 이름!

백화궁주(百花宮主) 백옥마(白玉魔) 소설리!

천마혈성의 실질적인 세력이라고 말하는 구천마궁 중 백화궁
의 궁주,
연약해 보이는 이 여인이 구마왕 중 한 사람인 백옥마 소설
리다.
언제나 봉황은산(鳳凰銀傘)을 쓰고 다니는 여인,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일단 손을 쓰면 가장 철저
하고 깨끗하게 상대를 죽이는 손속으로 이름높다.
천마혈성에서도 가장 신비한 여인이다.
"알아보라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자천룡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백표랑이 우내사성의 진전을 이어받고 중원무림에 출도한
것은 벌써 석달째입니다."
백표랑!
소설리의 입에서 거론되는 사람은 백표랑이다.
그때부터 소설리가 보고하는 내용들.
실로 놀라웠다.
소설리는 백표랑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천룡
에게 보고했다.

― 남군왕부의 주용화를 이용해 금사보의를 빼낸 백표랑은
장안에 천향의림을 세웠습니다. 본성의 염공아를 구한 사람도
바로 백표랑입니다. 또한 그는 북망산의 화림을 천향의림으로
은밀하게 옮겨 본성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재정비하고 있습니
다.

소설리의 정보는 정확했다.
백표랑이 지금까지 행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보
고되었다.
"역시 신검거의 후예답군."
웃는가?
자천룡의 얼굴에 거짓말 같은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우내사성은 한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다."
백표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다.
"일검향 나란소에 대해서는 알아 보았느냐?"
소설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중원에 나타난 것은 백표랑과 거의 같은 시기였습니
다. 그는 중원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부터 본성의 제자들을 무
자비하게 살해하고 있습니다."
자천룡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젯밤에는 강소지부의 지부장인 적혈귀리와 그의 아우들인
귀면쌍마가 나란소의 손에 죽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는......."
자천룡은 소설리의 말을 잘랐다.
"신경쓸 것 없다."
소설리의 얼굴에 짧은 경악이 서렸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는 지금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 복수심만을 앞세운 인간
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소설리는 말끝을 흐렸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자천룡이 너무 태연하기 때문이다.
자천룡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작은 것을 버릴 줄은 아는 사람만이 큰 것을 얻을 수 있고
지키는 법이다."
"나란소가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나 자천룡이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나는 순간 천하인은 다시 상기하게 될 것이다. 천하
의 어떤 힘이나 초인적인 능력으로도 천마혈성과 이 자천룡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소설리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 아아! 당신은 신의 잘못으로 태어난 분이십니다.

인간 자천룡!
그는 그런 인간이다.
자천룡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천하라도 버릴 수 있는 인
간이다.

* * *

― 지옥수사 염우는 극히 호방한 인간입니다.
― 천마혈성의 삼천제 중 한 사람이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
의 흠모를 받고 있는 마도무림에서 보기 힘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만세야 자천룡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 바로 염우입니다.
― 그의 지옥사검(地獄死劍)은 총 십삼식(十三式)으로 이루어
졌으며,
지금까지 오식(五式) 이상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 그에게는 염공아라는 딸이 있으며, 아내와는 오 년 전에
사별하고 현재는 장검산장(藏劍山莊)에서 염공아와 단둘이 기
거하고 있습니다.
― 놀라운 일은 삼천제 중 한 사람인 야황(夜皇) 연사미(燕
思美)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수사 염우!
그에 대한 모든 것이 백표랑에게 보고되기까지는 꼬박 석달
이 걸렸다.
모든 것이 치밀했으며, 실낱 같은 허점도 없었다.
백표랑은 무슨 생각으로 염우에게 이리 깊게 집착하는 것인
가?

탁.
백표랑은 술잔을 내려 놓았다.
지금 그의 시선은 수북하게 쌓인 각종 서찰에 머물러 있다.
사월령이 굳어진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무려 한 시진,
백표랑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보고된 서찰을 수십 번 살필
뿐 사월령에게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또 한 잔의 술을 마신 백표랑,
그가 흘러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염우의 지옥십삼검을 견식하기에는 아무래도 달밝은 십일월
보름날 밤이 좋겠군."
사월령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염우의 지옥십삼검을 견식하시겠다 하시면......?"
백표랑은 고독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넘어야할 산이다. 내가 특히 염우를 지목
했던 것은 그의 신분이 흥미를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삼천제
중 한 사람인 야황 연사미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면 이
용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방법이 너무 위험합니다."
백표랑은 빈잔에 술을 채웠다.
쪼르르!
한 잔의 술은 고뇌처럼 옥배를 채웠다.
"그가 강한 인간인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내가 신이 선택한 인간이라면 결코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자신이 선택한 인간에게 고난은 안겨 주지
만 쉽게 버리지는 않는 법이다."
사월령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백표랑의 인간됨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
그가 한번 마음을 먹은 일이라면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
사월령은 그런 자신이 안타까웠다.
한 사내의 일에 이렇게 가슴조였던 일은 기억에도 없다.
그때였다.
"한 잔 받아라."
불쑥 사월령의 앞으로 내밀어진 술잔.
사월령은 주저하다가 부지중에 술잔을 받았다.
백표랑은 사월령의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느냐?"
사월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이 사월령은 죽어가면서까지도 그런 생각을 지닐 수
없을 겁니다."
사월령은 술잔을 들었다.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 서린 한 가닥 애환(哀
歡)의 빛은 무엇인가?
백표랑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까지 나를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명예(名譽)없이 죽었
다. 어쩌면 너 또한 나를 만나 그런 비극(悲劇)을 자초할지 모
른다."
사월령은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술이란 음식을 처음으로 입에 댄 사월령이었다.
독하고 쓰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한 잔 드릴까요?"
백표랑은 말없이 술잔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
다. 나에게 자신의 생명을 준 그들이었지만 말이다."
"그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
"그 사람들이 나에게 원했던 것은 눈물이 아니라 강해지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백표랑의 몸에서 살인적인 고독이 서렸다.
그러다 문득,
백표랑은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푸후훗!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다. 자신의 운명마저도 인위적
으로 꾸며놓고 살아가는 나에게 고뇌란 너무 사치스럽다."
사월령은 백표랑의 얼굴을 정시했다.
그는 불쑥 엉뚱한 말을 꺼냈다.
"만약 내가 염우에게 패한다면......."
사월령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림주님."
"푸후훗,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이
천향의림을 없애고 화림을 해체시켜라."
사월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백표랑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을 만나보고 오겠다."
"누구를 이 밤중에?"
"일검향 나란소."
일검향 나란소!
백표랑은 사월령을 남겨놓은 채 방안에서 나갔다.
창백한 달빛이 어깨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 * *

"크윽!"
한 사람이 답답한 신음성을 토하며 몸을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다.
잔인음독하게 생긴 오십대의 인물.
아무리 보아도 세상을 참되게 살아가는 인간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다.
그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마도(魔刀) 궁무일(弓武一)!
천마혈성의 서열 백이십팔위에 오른 인물.
이미 삼십 년 전부터 중원무림에서 악명을 떨쳐온 인물이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내가 어찌 너 같은 애송이에게......."
궁무일은 어이없다는 듯 욕설을 뱉아냈다.
그의 가슴을 타고 선홍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틀거리는 궁무일의 앞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
몸에는 푸른빛이 금방이라도 배어 날 것 같은 청의를 걸쳤
다.
일검향 나란소가 아닌가?
천마혈성을 향해서 고독한 복수의 검을 치켜들고 있는 인물.
"빌어먹을, 천하에 이렇게 빠른 검이 있다니......."
푹! 궁무일의 무릎이 꺾였다.
나란소는 창백한 검신을 바라보며 한서린 음성을 토했다.
"일검류(一劍流), 나는 일검류를 익히기 위해서 인간성을 거
부했다."
나란소의 검신에 방울져 있는 궁무일의 피.
휙!
나란소는 검을 휘둘러 검신에 묻은 피를 지면에 뿌렸다.
"일검류, 그렇다면....... 너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궁무일의 얼굴이 푸르르 진동했다.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는가 했더니 온몸이 빠르게 경직
되고, 급기야 그의 몸은 지면에 쓰러져 다시는 움직일 줄 몰랐
다.
나란소는 궁무일의 죽음 앞에 등을 돌렸다.
'어머님! 지하에서나마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나란소는 하늘을 본다.
한 사람의 가슴에 복수의 검을 박을 때마다 나란소는 하늘을
보았다.
그때였다.
"일검류! 이제보니 그대는 해남검문의 후예였군."
불현듯 나란소의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 하나.
나란소의 고개가 느리게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언제 나타났는가?
창백한 월광이 부서지는 곳.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
었던 사람처럼 한 사람이 궁무일의 주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
는 것이 아닌가?
백표랑! 그의 등장이었다.

* * *

나란소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흔들렸다.
창백한 월광이 부서지는 아래 눈부신 백의를 걸치고 있는 저
사내.
안개 속에 서 있는 백학처럼 고고한 모습이다.
그러나 나란소가 놀랐던 것은 백표랑의 모습이 고고하거나
준영해서가 아니다.
'무서운 인물이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니.'
만약 상대가 암습했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나란소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언제나 마찬가지이지만 나란소의 음성은 가늘고 맑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였을까?
백표랑의 얼굴에 흐릿한 웃음이 서렸다.
"푸후훗! 천마혈성의 인물들에게 지옥사신(地獄死神)이라고
불리는 일검향 나란소가 이렇게 아름다운 음성을 지녔다니 믿
어지지 않는군."
"......."
"푸후훗! 내가 가장 아름답게 느끼던 추국(秋菊)이라는 기생
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이 있어."
다분히 조롱섞인 백표랑의 음성.
슥!
나란소의 우수가 기척도 없이 검을 잡아갔다.
번쩍!
대기를 갈라내는 창백한 일섬광채.
마치 벼락이 거꾸로 작렬하는 것 같은 기세로 백표랑을 갈라
오는 그 검세는 최단(最短)의 거리를 갈라오는 극쾌의 빠름을
지니고 있었다.
나란소의 우수가 검을 잡아갔다고 느낀 순간에 이미 그의 검
은 백표랑의 목어림을 휩쓸어 오고 있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스으으!
백표랑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려지며 나란소의 시야에서 사라
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잠영미종(潛影彌縱)!
광천제 향오는 이 신법으로 천하의 고수들을 우롱했다.
싸악!
대기가 터지는 소음과 함께 나란소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나란소의 얼굴이 무겁게 변했다.
'비록 일검류를 칠성으로 펼쳤다고는 하나 이렇게 간단하게
나의 검을 피해내다니.'
백표랑은 여전히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었다.
"푸후훗! 그대의 나쁜 성미 중 하나가 검을 함부로 뽑는다는
것이군. 함부로 뽑은 검은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해."
나란소의 손이 주춤거렸다.
자신이 설혹 일검류를 다시 펼친다고 해도 상대를 쓰러뜨린
다는 자신이 없었다.
평온함에 서린 저 고절함.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고 했다.
나란소는 한눈에 백표랑이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
을 알았다.
'한 번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다. 만약 이 자까지 나
의 적이라면 나는 또 한 명의 무서운 적을 만난 셈이다.'
나란소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백표랑은 흐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나란소의 앞으로 다가왔
다.
"푸후훗! 그렇게 긴장하니 꼭 여자같군."
나란소는 백표랑이 자신의 일 장 앞까지 다가왔지만 검을 움
직이지 않았다.
"천마혈성의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들과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
나란소는 뚫어지게 백표랑을 응시했다.
유들거리는 백표랑의 모습이지만 그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한 가지 충고를 할까."
나란소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충고를 한다고 지껄이는 사람은 없었다.
백표랑은 파리한 광채를 뿌리는 나란소의 검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남검문의 일검류가 대단한 것은 인정하지만, 만세야 자천
룡을 상대하기는 무리다."
나란소의 눈빛이 번뜩였다.
해남검문의 자존심이 백표랑의 삼촌설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푸후훗! 목숨을 아끼라는 말을 하고 싶군."
"......."
"그대는 지금 광적인 복수심으로 날뛰고 있다. 그대가 진정
으로 뛰어난 인간이라면 복수심을 앞세우기 전에 자신을 정립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고마운 충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란소의 갸름한 얼굴에 서린 분노는
무엇인가?
백표랑은 정색했다.
"한을 지닌 사람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을 버려라. 만약 그
대가 한만을 앞세운다면 해남검문은 옛 영화(榮華)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자천룡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나란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만약 자신의 앞에서 이런 말을 지껄였다면 그는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이다.
"나에게 그런 말을 전해주는 이유는?"
백표랑은 나란소의 얼굴을 정시했다.
또 다시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서렸다.
"푸후훗! 같은 운명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굳이 또
다른 이유를 대라면 그대가 나의 운명에 중요한 사람이 되리라
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친 소리군."
나란소는 검을 거두었다.
애써 백표랑의 시선을 외면했지만 그의 말에 분노가 사라진
것은 왜인가?
백표랑은 한 동안 나란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허
공으로 번쩍 몸을 날렸다.
쉬아아앙!
공간(空間)과 공간을 일직선으로 갈라가는 백표랑의 신형.
'무서운 경공이다.'
나란소의 눈빛이 무겁게 변했다.
그 때, 백표랑이 사라진 허공에서 나란소의 귓전을 파고드는
쾌활한 음성.
"후훗, 나는 아무래도 인간의 체질학에 대해서 심각한 연구
를 해야할 것 같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
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거든."
음성의 여운은 나란소의 귓전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다.
일검향 나란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백표랑이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절제를 잃고 있다.

* * *

지옥수사 염우!
올해 나이 오십 이 살.
염우는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검을 잡았다.
그가 처음 검을 잡은 것은 부모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난세(亂世)에 태어난 그는 다섯 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하늘이 그의 운명을 도왔는가?
염우의 나이 열 여섯 살 때, 그는 대파산(大巴山)의 한 동굴
에서 우연하게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지옥검경(地獄劍經)을 얻
었다.
총 십삼식(十三式)으로 이루어진 지옥사검!
그 패도적인 위력은 그가 무림에 출도하며 일대 회오리를 일
으켰다.
내노라 하는 마도거효와 무림명숙(武林名宿)들이 그의 지옥
사검 아래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천마혈성에 몸을 담은 지 십 년.
그는 천마혈성의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신
분인 삼천제(三天帝)의 권좌에 올랐다.
마도인으로서는 보기 힘든 호방한 기상과 관용을 지닌 인물,
그로인해 그는 자천룡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로 지목받았다.

* * *

강심에 죽간을 드리운 채 염우의 무심한 시선은 강물을 향
해 있다.
맑은 강물이 흐르는 서능협의 하류에는 그와 또 한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죽립을 무겁게 눌러쓴 백의인,
그도 염우와 똑같이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염우는 고개를 들어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시간이건만, 오늘은 한 마리도 낚지를
못했다.
염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녀석이 팔팔 뛰겠군."
딸인 염공아는 비단잉어를 잡아 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
다.
"번번이 큰소리를 치는 날이면 이 모양이군."
염우는 죽간을 거두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딸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해서
다.
그때였다.
파드드득!
백의 죽립인이 죽간을 힘있게 잡아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염우는 무심코 시선을 백의죽립인에게 돌렸다.
파들거리는 죽간에 이끌려 나오는 것은 무려 석 자는 되는
거대한 비단잉어가 아닌가?
'굉장한 놈이다.'
염우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백의죽립인을 향하고 있었
다.
백의죽립인은 비단잉어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으나 능숙한
솜씨로 비단잉어를 바구니에 담았다.
염우가 백의죽립인 앞으로 다가갔을 때,
백의죽립인은 만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루를 허비한 보람이 있군. 이렇게 큰 놈은 처음이다."
염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 공아에게 저것을 보인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염우는 욕심이 생겼다.
물욕(物慾)이 아니라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긴 욕심이다.
염우는 조심스럽게 백의죽립인에게 말했다.
"그것을 본인에게 팔면 어떻겠소. 가격은 원하는 대로 지불
할 용의가 있소."
백의죽립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죽립 끝으로 염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말 후회 않겠소?"
누구나에게 친근감있게 들리는 음성이지만 힘이 있었다.
"그렇네."
백의죽립인은 허리를 폈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원한다 해도 말이오?"
염우의 눈빛이 번쩍이는 기광(奇光)을 뿜어냈다.

― 당신의 목숨을 원한다 해도 말이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세상에 죽을려고 작정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염우를 앞
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염우는 피식 웃었다.
"농담이 꽤나 지나치군."
백의죽립인은 잘라 말했다.
"천하에 천마혈성의 삼천제 중 한 사람인 지옥수사 염우의
목숨을 걸고 농담을 즐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염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보니 그대는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을 했군."
"이제 목숨을 주실 수 있겠소?"
"그대는 누구인가?"
염우는 상대가 궁금해졌다.
서슴없이 이런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요구하는 인물에 대해
왠지 호기심이 일었다.
백의죽립인은 서서히 죽립을 벗어 올렸다.
죽립 속에 가려져 있던 백의인의 얼굴이 염우의 눈에 환하게
드러났다.
시원한 이마와 반백의 머릿결,
눈가에 잡힌 잔주름과, 웅비한 콧날의 선은 강인한 인상을
준다.
육식동물의 번뜩이는 눈빛에 사각의 턱!
이 사람의 얼굴에는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잘 조화되어 있다.
천하에 이런 모습을 지닌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염우의 얼굴이 아니고 무엇이랴.
실로 어이없는 일,
염우의 앞에 또 다른 염우가 나타난 것이다.

"으음!"
염우는 나직한 신음성을 흘려냈다.
상대는 이미 철저한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순간의 흔들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염우는 평정을 되찾
았다.
"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대는
누구인가?"
백의인은 아무런 감정없이 말했다.
"두 사람의 지옥수사 염우가 존재할 수 없기에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이오."
"나를 죽이겠다는 말이군."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오."
염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천마혈성을 집어 삼키든가 아니면, 나로 변신해 천마
혈성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당신의 신분을 빌린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염우는 말없이 상대를 응시했다.
평온함과 고요함 속에 서린 고절한 기풍!
깊이를 알 수 없이 가라앉은 눈빛에 서린 차가운 이지(理智)!

우우웅!
신검(神劍)이 용출하는가?
단순히 검을 뽑아 들었지만 그의 주위는 일순간 염우의 검에
서 뿜어지는 검세에 의해 거대한 장막이 형성되었다.
'과연 마도제일검(魔道第一劍)이라 불릴만 하다.'
백의죽립인의 얼굴에 일말의 긴장감이 서렸다.
염우는 검을 중천세(中天勢)로 가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의 지옥십삼검은 지금까지 일흔 아홉 번을 싸워 단 한 번
의 패배도 없었네."
"지금까지 오초 이상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소."
"나를 이길 자신이 있는가?"
염우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으며 백의죽립인을 응시했다.
백의죽립인은 느리게 검을 뽑아 들었다.
쿠웅!
허공에서 검봉(劍鋒)을 빙글 회전시킨 백의죽립인이 검봉을
지면을 향해 고정시키며 굳어진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지옥십삼검을 견식하겠소."

* * *

지옥십삼검!
총 십삼식으로 이루어진 지옥십삼검의 위력은 가히 무서웠
다.
패도(覇道)적인 살인검학(殺人劍學)!
지옥십삼검은 생명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괴멸시키는 끔찍한 위력을 지니고 있
었다.

콰우우우!
한 무더기의 빛무리가 찬란한 폭발을 일으켰다.
수천 개의 벼락이 한꺼번에 작렬하듯 백의죽립인을 향해 무
더기로 쏟아지는 죽음의 광선들,
실로 살인적인 검학이다.
지옥십삼검이 작렬하는 곳은 지면이 뒤집히고 진동했다.
눈깜빡할 순간에 염우는 무려 삼십 초를 펼쳐냈다.
폭산되어 퍼지는 검광!
백의죽립인은 염우의 검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광천제 향오의 잠영미종이 없었다면 벌써 난도질을 당했겠
다.'
광천제 향오의 잠영미종!
그렇다면 백의죽립인은 다름아닌 백표랑이라는 말,
위기의 와중에도 백표랑의 신형은 눈부시게 움직였다.
살벌한 지옥십삼검을 피해내는가 하면 그의 검은 날카롭게
염우에게 반격을 가했다.
"으음!"
백표랑은 지옥십삼검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르르 일
장 가량 물러났다.
"역시 지옥십삼검이군."
백표랑은 검을 고쳐잡았다.
그런 백표랑을 바라보는 염우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무섭군. 나의 지옥십삼검을 삼십 초나 받아내다니.......'
중원에 출도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콰우우우!
염우의 검이 굉렬한 음향과 함께 번쩍 허공을 갈랐다.
천라지망처럼 백표랑을 향해 쏟아지는 가공할 검초(劍招)들!
피할 구석이란 어디를 봐도 없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맞받는 것 뿐,
"챠앗!"
백표랑의 신형이 회오리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촤라라랏!
상하전후좌우(上下前後左右) 각 십팔검(十八劍)씩!
일순간에 백팔검을 숨가쁘게 펼쳐낸 백표랑!
검의 움직임은 한동작이었지만, 그 순간에 이미 백팔검이 펼
쳐졌다면 과연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깡! 까아아― 앙!
불꽃이 유성(流星)처럼 떨어져 내렸다.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공간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쏘아
갈 때보다 더 무섭게 제자리로 튕겨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으윽!"
"음!"
일 장 가량 밀려난 채 비틀거리는 사람은 백표랑.
그러나 염우도 충격을 받은 듯, 발목 아래는 지면에 박혀들
었고, 그의 안면은 파르르 떨렸다.
염우는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너덜거리는 염우의 옷자락!
그의 가슴에는 가느다란 자상(刺傷)이 생겼으며, 실낱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 중원무림에 저런 인물이 있다니.......'
염우는 백표랑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의 모습은 변
한 것이 없었다.
"방금 그대가 펼친 검법은 검마(劍魔) 호동파(湖東巴)
의 파천일식(破天一式)이 아닌가?"
백표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았소."
"이제보니 호동파가 중원에 전인(傳人)을 남겼군."
"그 분은 죽기 전에 당신의 지옥십삼검을 꺾으라고 부탁했
소."
"호동파라면 그럴 자격이 있지."
스사삭!
염우의 검이 서서히 움직였다.
백표랑의 인중을 향해 딱 정지한 염우의 검,
우우우웅!
검이 울부짖는가?
백표랑의 인중을 향한 염우의 검봉이 파르르 떨리며 섬뜩한
음향이 일어났다.
폭산하듯 일어나는 암청색 검강!
백표랑의 눈빛이 미미하게 떨렸다.
'지옥사검의 마지막 초식인 생사탈혼(生死奪魂)이다.'
생사탈혼!
지옥사검의 최후초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던 생사탈혼이 끔찍한 위
력을 드러낼 순간이다.

* * *

콰우우우!
급기야 펼쳐지고 말았다.
펼쳐지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생사탈혼!
석양은 암청색 검강에 가리워지고 말았다.
악마의 이빨같이 섬뜩한 검강이 휘오리치며 백표랑을 휩쓰는
그 광경은 저주의 울부짖음과 같다.
동시,
파파팟! 갈고리처럼 오므라진 염우의 좌수오지(左手五指)가
벼락같이 튕겨졌다.
음혈독지(陰血毒指)!
스치기만 해도 삼 일 이내에 한줌의 혈수(血水)로 변해 버린
다는 염우의 독문지법,
염우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학이 동시에 펼쳐졌다.
백표랑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번쩍!
하검식을 취하고 있던 백표랑의 검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허공에 빛을 뿌리며 암청색의 검강을 가르고 실뱀처럼 염우의
사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츳! 츠츠츠― 츳!
두 가지의 상이한 검세가 허공에서 요란하게 뒤엉키며 불꽃
이 일었다.
덩달아,
파파팟!
그의 우수가 염우를 향해 요란하게 휘저어졌다.
그러자 보라!
쑤욱! 쏴쏴쏴!
휘저어진 백표랑의 우수에서 살촉과도 같은 은빛 광채가 폭
우처럼 염우를 향해 폭사해 가는 것이 아닌가?
'헉!'
염우는 다급히 헛바람을 들이켰다.
자신의 검강을 뚫고 화살처럼 파고드는 서른 여섯 가닥의 광
선!
염우는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깡!
허공을 울리는 굉렬한 음향과 함께 염우를 향해 쏘아가던 광
선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백표랑의 신형이 주르르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우욱!"
염우 또한 비틀거리며 신음성을 토했다.
간신히 서른 두 가닥의 광선을 쳐냈지만 나머지 네 가닥의
광선은 이미 염우의 가슴에 뿌리 내리듯 박혀들었다.
염우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공작(孔雀)의 날개 형상을 한 은색의 철환(鐵環)!
염우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것은 옥관음(玉觀音) 구야홍(具夜紅)의 공작철우(孔雀鐵
羽)가 아닌가?"
공작철우!
그것이 무엇이기에 염우의 얼굴이 이렇게 무참하게 변하는
것인가?
백표랑은 자신의 검에 몸을 의지한 채 희미하게 웃었다.
"푸후훗! 당신은 억울해 하지 않아도 되오. 당신은 단신의 힘
으로 우내사성과 대결을 펼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오."
염우는 소리가 나도록 온몸을 떨었다.
우내사성의 공동전인!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자신이 아무리 마도무림의 신화적인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우
내사성을 단신으로 상대해 이길 수는 없다.
푹!
비틀거리던 염우의 무릎이 꺾여졌다.
"그러나 너는 우내사성을 합해놓은 것보다 더 강하다."
"그들은 나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키웠소."
"좋다....... 매우 좋다."
염우는 전신의 기력이 갑자기 쇄잔되는 것 같았다.
유들거리는 백표랑의 얼굴이 자꾸 흐려진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백표랑은 천천히 염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말해 보시오."
염우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내 딸아이만은... 손대지 마라....... 그 아이는 천마혈성과 아
무런 관계가 없는 아이......."
염우의 음성은 간절했다.
백표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딸의 목숨을 한 번 구했던 본인이오. 죽일 생각을 지
니고 있었다면 딸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오."
염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차례 창백한 전율이 그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너는 천향의림의 천향신수......."
염공아는 염우에게 말했다.
자신이 화림의 사월령의 암습을 받아 죽어갈 때, 천향의림의
천향신수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 염우는 딸의 눈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평소 사내를 눈 아래로 흘기던 딸이 천향신수를 말할 때 만
큼은 호감을 내비쳤다는 것을.
백표랑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또한 화림의 림주인 백야 또한 나의 분신이오."
"그럴 리가......?"
염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천향신수와 백야!
중원무림은 이 두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소문이 무성하다.
신의 의술을 지녔다는 천향신수!
신화적인 살수로 사람의 목숨을 심판한다는 화림의 살수 백
야!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니.......
"믿어지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군."
"믿을지 모르지만, 당신의 지옥십삼검도 이미 완벽하게 터득
했소. 당신의 지옥십삼검이 십일성의 경지라면 나는 이미 지옥
십삼검을 십이성으로 완성했소."
닫혀가던 염우의 눈빛이 백표랑의 얼굴에 멈춰졌다.
그러던 한 순간,
"크!"
염우는 고통스런 웃음을 흘려냈다.
그가 웃자 가슴에서 더운 피가 확 솟구쳐 올랐다.
"그 말...... 사실이냐?"
백표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기를 바란다면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소."
염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죽
어가는 내 운명이 생각보다는 초라하지 않군. 염우는 죽지 않
았으니까."
"아마 그럴 것이오."
염우의 고개가 비단잉어가 담겨 있는 바구니로 향했다.
"저 비단잉어를...... 딸아이에게 줄 수 있겠나? 그리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 주게......."
말을 마친 염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창백한 전율이 그의 전신을 휩쓸기를 얼마,
푹! 염우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꺾여졌다.
죽음(死)!
천마혈성의 삼천제 중 한 사람인 지옥수사 염우의 허무한 죽
음이었다.

백표랑은 염우의 시선을 제거했다.
일에 있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백표랑이다.
그는 염우가 남긴 한 자루 검 암흑마검(暗黑魔劍)을 갈무리
하고 서능협을 떠났다.

* * *

휘이이잉!
바람이 불고 있다.
서능협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정(山頂)!
백표랑은 몰랐지만, 한 사람이 불어오는 바람에 백의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며 서능협에서 사라지고 있는 백표랑의 모습을
오래 전부터 바라보고 있었다.

― 만세야 자천룡!

오오!
장검산장을 향하고 있는 백표랑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다
름아닌 만세야 자천룡이 아닌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백표랑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거짓말처럼 아무런 감
정도 없다.
"천마혈성에 한 차례 회오리가 일어나겠군."
남의 일을 말하듯 무심한 자천룡!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수하의 죽음에 어떤
감정이라도 나타내련만 자천룡은 말없이 염우의 죽음을 바라보
고 있다.
"염우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수하의 죽음을 필연으로 받아들인 자천룡!
"역사(歷史)가 흘러가면 영웅(英雄)도 새롭게 태어나는 법이
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내사성은 이 자천룡의 훌륭한 적을
만들어냈군."
자천룡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자천룡은 조용히 신형을 돌렸다.
"백표랑! 신검대인 고신만해의 아들답게 그는 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자천룡은 이미 백표랑이 고신만해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알
고 있다.
석양을 한몸에 받으며,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자천룡의 어깨 너머로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분간은 고독해 하지 않아도 되겠군."
석양은 말이 없다.
또 하나의 거대한 위기가 백표랑을 향해 움터오고 있는 것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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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겨우 오늘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시간이려니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올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4일 주기가 계속되고 또 되어야 하겠지만
설혹 올라오지 않는 일이 있어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인간이랍니다. ㅡㅡ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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