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102회 작성일 17-02-12 11:26

본문




乾坤一擲

제3권 제32장 대계 (大計)



소림사(少林寺).


중원오악(中原五嶽)의 중악(中嶽)인 숭산(崇山)의 소실봉(少室峯)에 자리잡은 선종불문(禪宗佛門)의 가람이다. 이 곳은 달마선사 이래로 중원무학의 비조로 군림해왔고 정통무학의 본산지였다.


장삼봉진인이 세운 무당파(武當派)와 함께 소림사는 불도(佛道)의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림사는 엄격한 계율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금의 소림장문인인 백통선사는 불도를 중시했기 때문에 소림제자들이 강호에 출입하는 것을 통제했다.


오직 불도에만 전념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재 소림사는 봉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검박하게 꾸며진 방장실.


한가운데에 백통선사가 정좌하고 있었다. 명상을 하고 있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나 굵은 백미와 한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서 고승다운 위엄과 함께 강직함이 느껴졌다.


그의 전신에서는 잔잔한 호수 위에 작은 물결을 만드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초연한 기도가 풍겼다.


창호지를 뚫고 새어들어오는 초여름의 햇살이 그의 등에 살며시 기대왔다.


문득 문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차(茶)를 끓여왔습니다. 장문인."


백통선사는 눈을 떴다.


"노납이 시키지 않았는데 어인 일인가?"


"소승이 남해 보타암(普陀庵) 특산의 염화차(閻華茶)를 얻어 왔습니다. 장문인께서 연일 불도를 추구하시는 것이 안타까워 ."


백통선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운(紫雲). 노납을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아직 건강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


"하오나 ."


"허허 . 이미 끓였다면 들여오너라. 너의 성의가 고맙구나."


자운은 백통선사보다 한 배 낮은 제자였다. 나한당(羅漢當)의 수좌제자로서 무공의 뛰어남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자운이 들어섰다.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운은 4순 가량 된 승려였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그의 머리에는 계인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단아한 용모를 지닌 그의 표정은 명경지수와도 같이 맑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다기(茶器)를 내려놓은 자운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염화차에는 정력을 증진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백통선사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


그는 양손에 찻잔을 받쳐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다음 순간,


"으음 ."


백통선사는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안색이 홱 바뀌더니 삽시에 잿빛으로 변했다.


"이 이것은 !"


백통선사는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동시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 순간 자운이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백통! 소림의 대통을 이제 놓을 때가 되었다."


백통선사는 경악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눈을 부릅떴다.


"너 너는 ."


그는 본능처럼 손을 뻗었다. 그러나 진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한 바퀴 돌아가는 느낌과 함께 그의 몸은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쿵!


백통선사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후였다. 미처 감기지 못한 그의 눈에는 강한 의혹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시신이 쭈글쭈글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것은 승복만 남은 채 핏방울로 화해 사라지고 말았다.


자운은 괴소를 흘렸다.


"천독교의 식골화혈산(蝕骨化血散)의 효험은 과연 일품이구나."


다음 순간 자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순간 그의 얼굴은 백통선사로 화하는 것이었다. 백통선사로 변한 자운이 자리에 앉아 불경을 펼쳤다.


"이제 천하의 모든 방파는 그 주인이 바뀔 것이다."


일렁이던 햇살이 방문 쪽을 향해 빠르게 달음질치고 있었다.




천하정도(天下正道)의 본산지인 숭산 소림사에서 정도의 수뇌인물 10명이 회동한 것은 전 무림을 뒤흔들 만한 엄청난 일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9파1방의 장문인들이었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더욱 경악할 일이 발생했다.


사흘 후 9파1방의 장문인의 연명으로 무림계에 포고(布告)가 나돈 것이었다.




<9파1방은 연명으로 무림성(武林城) 축성(築城)을 선포하노니 >



무림성(武林城) 축성.


금시초문의 대역사(大役事)를 백도무림의 대표자들이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열흘 후 이번에는 흑도인들의 연명으로 발표된 포고문이있다.


그것은 흑도고수 333인이 공동연명으로 역시 무림성 축성에 동조한다는 내용이었다.


무림은 온통 경악과 의혹으로 술렁댔다.




강호인들의 화제는 온통 무림성에 관한 것뿐이었다. 객점이고 주루고 할 것 없이 2인 이상만 모이면 무림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펼쳤다.


한 객점 안.


시끌벅적한 가운데 두 명의 무림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각각 황의와 흑의를 입은 두 사람은 술이 얼큰히 취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황의인이 호기심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무림성이라니? 대체 무슨 목적으로 백도무림과 흑도무림이 똑같이 그같은 성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단 말인가?"


"자네. 그것도 모르나? 무림성은 더이상의 대립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림의 대역사(大役事)란 말일세."


"대립을 종식시킨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흑의인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연명을 보게. 정도에서는 9파1방이 서명을 했고 마도에서는 대표고수 삼백삼십삼인이 서명을 했지 않은가? 그들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네."


황의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 의해 그런 엄청난 일이 추진되었단 말인가?"


그 말에 흑의인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것은 아무도 모르네. 다만 정도와 마도를 모두 움직일 수 있는 대기인(大奇人)의 제안이라는 것이네."


" ?"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림인들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의견이 분분했을 뿐 그 누구도 진상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는 이 느닷없는 폭탄선언에 크게 동요했으나 어쨌든 이 불가사의한 일은 거짓말처럼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복우산(伏牛山) 천애령(天崖嶺).


바로 그 곳에서 대역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도와 마도가 힘을 합쳐 무림의 운명과 역사를 한순간에 뒤바꾸어 놓을 엄청난 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림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촛불이 일렁이는 방장실에서 한 통의 밀지(密紙)를 읽고 있는 백통선사의 얼굴에서는 패도적인 기운이 어렸다.


밀지를 읽어나가는 그의 표정은 여러 차례 변화를 일으켰다. 두 눈에서는 괴광(怪光)이 폭사되었다.


밀지의 아래에는 실물처럼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 두 자루의 핏빛 검이 십자(十字)로 교차되어 있었다. 이윽고 밀지를 다 읽은 그는 촛불을 주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십무단(十武端)의 밀지가 날아들다니 ."


그의 표정이 음침해졌다.


"흐흐 . 일이 재미있게 되어가는군."


소름끼치도록 으시시한 음성이었다.



쏴아아아 !


거대한 폭포가 물줄기를 쏟으며 시원스런 굉음을 낸다.


승불폭(昇佛瀑).


소실봉 후면에 있는 폭포로서 그 웅장함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지 이미 오래였다. 초여름의 신록과 더불어 산뜻한 대조를 이루는 폭포는 사방에 물안개를 뿌리며 위엄을 과시했다.


휙!


폭포수 앞에 있는 거대한 암반 위에 인영이 나타났다.


초록색의 짧은 선장을 쥔 노승. 바로 백통선사였다. 활기찬 폭포의 굉음과 산새들의 노랫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표정은 음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그는 허공을 향해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 어느 고인께서 빈승을 부르셨소?"


휙!


응답이라도 하듯 한 줄기 흑영(黑影)이 나타났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그는 얼굴조차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내가 불렀소."


음성은 괴이하게도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체격은 의외로 왜소했으며 전신에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통선사는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 귀하가 십무단에서 오신 사자요?"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유가 무엇이오."


"단주께서 새로운 명을 내리셨소."


순간 백통선사의 눈빛이 괴이하게 번뜩였다.


"단주께서 말이오?"


백통선사는 갑자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 귀하가 진정 십무단의 사자라면 신물(信物)을 가지고 있겠구려."


"물론이오."


"보여주시오."


복면인은 소매 속에서 삼각형의 소기를 꺼냈다. 검은 바탕에 십자검이 붉은 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때였다.


"으하하 ! 네가 누구인지 알았다!"


위잉!


백통선사의 번개같은 취옥불장(翠玉佛杖)이 뻗었다. 가공할 경력이 복면인을 향해 쇄도해갔다. 복면인은 대경했다.


"무슨 짓이냐!"


동시에 그는 쌍장을 날렸다.


펑!


그러나 복면인은 백통선사의 엄청난 경력에 밀려 뒤로 밀리고 말았다.


"감히 본 사자에게 공격을 하다니 !"


여인처럼 가냘프기 짝이 없는 음성이 흑영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당황한 나머지 그만 본색을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흐흐흐 ! 어리석은 계집! 십무단은 이미 이름이 바뀌었음을 모르느냐?"


쐐애액!


녹광(綠光)이 뻗었다.


"학!"


복면인의 몸이 한 차례 휘청이더니 상의의 한가운데가 부욱 찢어졌다. 배꽃처럼 하얗고 소담스러운 유방이 요동을 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놀랍게도 복면인은 여인이었다.


"흐흐흐 ! 일잔향. 네가 본각을 배신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첩자가 되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백통선사는 음탕한 시선으로 일잔향의 노출된 가슴을 바라보았다.


"흐흐 ! 잘 익었구나. 노부도 네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서서히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아아 !"


복면인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뒤에는 거대한 바위가 가로놓여 있어 더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공포의 빛으로 가득찼다.


백통선사는 급기야 손가락을 뻗었다. 다섯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무시무시하게 펼쳐지며 핏빛으로 화했다.


"혈응수(血凝手)!"


파파팟!


찌익!


복면이 조각조각 흩어짐과 동시에 드디어 얼굴이 드러났다.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절륜한 미모를 지닌 여인.


바로 일잔향이었다.


백통선사의 눈에 언뜻 황홀함이 스쳤다.


"흐흐! 과연 대단한 미모다. 노부 혈천귀수(血天鬼手)가 너를 즐겁게 해주마. 그런 연후 배후를 캐겠다!"


백통선사로 변장한 자운이 혈천귀수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혈천귀수는 수십 년 전 사라졌던 마도의 고수로서 잔독한 손속과 색마(色魔)로 알려져 있었다.


일잔향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유방을 가렸다.


"흐흐흐! 굳이 가릴 것 없다. 곧 모두 벗게 될 테니 말이다."


스스슥


그의 핏빛 손가락이 하늘을 덮는 순간 10개의 갈고리가 하늘마저 찢어버릴 듯 날카롭게 솟았다.


"악 !"


일잔향의 비명이 폭포수의 굉음을 뚫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바로 그때였다. 백통선사의 귀에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 박혀 왔다.


"혈천귀수!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너의 그 못된 버릇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억?"


백통선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검마!"


하늘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한자루 검(劒)이 그를 향해 쏜살같이 내려꽂힐 뿐이었다.


혈천귀수는 다급히 쌍장을 뻗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크아아아악!"


검붉은 선혈이 피무지개를 그리며 허공에 솟았다. 검은 정확히 그의 정수리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백통선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신음하듯 내뱉았다.


"처 철무쌍 네가 ."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쩌저적!


쪽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쿵!


칼로 벤 듯 반듯하게 양단된 그의 피투성이 시신이 그대로 암반위에 쓰러졌다. 이어 그의 시신 앞에 나타나는 인영은 바로 검마 철무쌍이었다.


그와 동시에 폭포수 위에서 8인의 인영이 속속 떨어져 내렸다. 흡사 나비인 양 가볍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뛰어내리는 그들은 바로 기련팔마였다.


그들은 암반에 착지하면서 거의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철 형의 검법은 더욱 발전했구려!"


껄껄 웃던 철무쌍은 시신에서 검을 뽑으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헛헛 ! 노부의 검이 아직 녹슬지 않았나 보구려."


다음 순간 그는 고개를 들어 폭포수 옆에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서 표표히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백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을 바라보며 검마는 감탄했다.


"그러나 소주의 무공에 비하면 노부의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오."


이윽고 백의 청년이 지상에 내려섰다. 먼지 한 점 일지 않았다. 백옥처럼 흰 피부와 담담한 눈빛을 지닌 그는 바로 백룡이었다.


백룡은 시선을 돌려 바위 앞을 응시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가슴을 손으로 가리고 있던 일잔향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사람인가?


백룡이 나타난 순간 그녀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해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백룡은 그녀에게 다가가 살며시 어깨를 안았다.


"잔향. 수고했소.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얼어붙은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온하한 음성이었다.


"흑!"


그녀는 그대로 백룡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참고 참았던 그리움이 도도한 물결처럼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상관 없었다.


백룡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망향원에서 잘 지냈소?"


그녀의 볼을 타고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이 오히려 청초해 보였다.


"향경 언니께서 친자매처럼 대해주셨어요."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향경은 현숙한 여인이오. 잘 지냈다니 다행이오."


일잔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이 바다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았으나 막상 백룡이 눈앞에 나타나자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눈물만 가슴을 적시며 끊임없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백룡은 돌아서서 담담한 눈길로 백통선사, 아니 혈천귀수의 시신을 내려 보았다. 시신을 적시며 흐르던 피가 응고되고 있었다. 희멀겋게 뜨여진 눈과 양단된 몸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개를 돌린 백룡은 검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철 노인께서 수고해 주셔야 겠소이다."


검마가 껄껄 웃었다.


"팔자에 없는 땡중 노릇을 하란 말이오?"


"하하! 철 노인은 성격이 급하니 이번 기회에 불경을 읽어 두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두고 보시오, 소주. 어쩌면 이 철가가 아주 중이 될 지도 모르오."


백룡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소림은 잃어버린 무위를 찾을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오."


이어 백룡은 기련팔마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여러분께서도 수고하셔야 겠소이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의 명을 어찌 어기겠소?"


백룡은 일잔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잔향. 무당을 위시한 다른 문파의 세간(世間)들을 색출하려면 방법을 달리 해야 겠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십무단이 조직을 바꾼 것같아요. 하지만 소매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어요."


"잘 해내리라 믿소. 그럼 ."


백룡이 막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철무쌍이 앞으로 나서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헛! 소주. 여심을 그렇게 몰라 주면 장차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것을 모르시오?"


" !"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백룡은 일잔향을 돌아보았다. 일잔향이 홍당무가 된 채 얼굴을 숙였다.


백룡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잔향."


그 순간 얼굴을 이미 백통선사로 바꾼 철무쌍이 대소를 터뜨리며 기련팔마를 향해 외쳤다.


"늙은 친구들! 뭘 멍청히 서 있나? 이럴 때 우리같은 폐물들은 자리를 비키는 것일세!"


"껄껄!"


"허헛 !"


기련팔마와 가짜 백통선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를 떴다. 그들이 사라지자 일잔향은 얼굴이 더욱 홍당무가 되었다.


백룡은 쑥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철 노인은 너무 짖궂단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일잔향이 모기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 공자님."


"내게 할 말이라도 있소?"


일잔향은 황급히 고개를 다시 숙였다.


"어 없어요."


백룡은 빙긋 웃었다.


"그럼 가리다."


그는 신형을 돌렸다. 순간 일잔향은 크게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공자님!"


백룡은 걸음을 멈추고 빙글 돌아섰다.


"할 말이 없다고 했지 않소?"


순간 일잔향의 아름다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어 그녀는 갑자기 백룡의 품에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마구 쳤다.


"나, 나빠요! 흐흑!"


"하하 !"


백룡은 대소를 터뜨리며 그녀의 나긋나긋한 허리를 안았다.


"아 !"


곧이어 백룡의 두터운 입술이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을 덮었다. 뜨거운 열기가 입술을 통해 전신에 퍼져 나갔다. 일잔향의 실처럼 가느다란 속눈썹에 영롱한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남(男)과 여(女).


그들은 기나긴 입맞춤을 계속했다.


이미 옷은 흠뻑 젖었으나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얼음조차 녹여버릴 수 있는 뜨거운 정열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잔향은 온몸이 녹아드는 듯했다. 백룡은 이런 방면의 기술에 있어서는 천부적이지 않은가? 긴 입맞춤에 그녀는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황홀감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멀리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백룡은 천천히 입술을 떼며 투덜거렸다.


"늙은이들이 체신이 없단 말이야!"


그는 일잔향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잔향. 좀더 조용한 곳으로 가야 겠소. 내 그대에게 할 말도 있고 ."


일잔향은 백룡의 넓은 품에 안긴 채 눈을 감았다.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미 알았다. 그것은 결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잔향은 행복했다.


"그래요. 얼마든지 그 말을 들려 주세요. 영원히라도 좋아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조용한 산동(山洞)이었다.


마른 풀이 깔려 있는 바닥에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백룡은 서둘러 할 말을 토하기 시작했다.


웬 할 말이 그다지도 긴가? 밤이 으슥하도록 그들은 나올 줄 몰랐다. 어두운 밤하늘에 쏟아질 듯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며 박혀 있었다. 별들은 산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뜨거운 육체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