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 집안 이야기, 그 전(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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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15,263회 작성일 17-02-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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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이야기, 그 전>

 

  2003년에 쓴 「집안이야기(1부)」 말미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그 다음 이야기를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은 후속 이야기를 쓸 만큼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집안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집안이야기」의 후속편, 즉 2부가 아니라 말하자면 그 전편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시간적으로 본다면 「집안이야기」의 훨씬 이전 시대에 속하는 이야기이므로 이 이야기의 제목은 「집안이야기 그 전」이라고 붙였다. 그러나 나중이 되면 "집안이야기"와 연결이 되므로 그 전이 된다.  

 

 <1>

 

 6.25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인 1950년대 초 중반 무렵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아니 경인고속도로가 뚫린 1969년 전까지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나가는 길이란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경인선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그 옆의 경인 국도를 타고 오류동으로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등포에서 오류동으로 나가는 길목에 작은 고개가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개봉동을 지나면서 오류동 사이에 위치한 오류IC 근처인데 이 고개 이름은 ‘덧고개’였다. 그런데 이 고개를 지나노라면 오른쪽으로 근처의 낙하산 점프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낙하 점프 훈련장으로서 유명했던 2325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공군 20 특무전대 정보학교」 또는 줄여서 ‘공군 정보학교’라고 불렀다. 본래 이 부대는 한국전쟁 때 참전한 미군의 극동 공군 6006부대가 1954년 9월 일본으로 철수하면서부터 후속 업무를 한국 공군 20 특무전대가 맡게 되는데, 이 부대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대북공작활동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서해상의 많은 섬들이 공군 관할로 넘어오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실미도이며, 그럼으로 나중 벌어지는 실미도 사건은 이 부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된다.

 

  이들은 나중에 주로 실미도 등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이북으로 침투하는 특수부대 정보원으로서 임무를 띠고 훈련을 받았는데, 태권도를 비롯하여 유도, 칼쓰는 법, 사격술, 낙하 훈련 등을 비롯한 특공무술과 함께 생존 유격 훈련 및 침투 훈련을 받았다. 이 특수 부대원들의 일반적인 군사 훈련과 특공 무술 훈련은 한국군이 담당하였지만 비행기를 타고 낙하산에 의지하여 지상으로 떨어지는 공수 훈련만큼은 그 당시 장비가 없었던 한국군으로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므로 미군의 일부였던 6006 네코 부대에서 약간의 병력이 남아 그 일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공군 20 특무전대에서는 대북 작전에 필요한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오류동과 바로 인접한 서울의 서북부와 경기도와 경계하고 있는 야트막한 산간 지역에 아무도 모르는 여러 곳의 안가(安家- 안전가옥)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 서부의 한적한 오류동이나 소사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부천 지역은 오늘날과 같이 개발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인근의 야산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인적이 드물었고,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곳을 무서워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이런 곳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공군 20 특무전대 소속의 안가(安家)를 운영하던 군속(軍屬)이었다. 그는 당시 어린아이였던 터라 자기 아버지의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이 부대에서 아주 특별한 임무를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보통사람과는 달리 이미 1.4후퇴 이전에 이북에서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그 때 그는 부인과 함께 단 둘이 월남하였는데, 월남할 때 이미 30대 중반이었으므로, 군대 일만 했다면 국군에 입대하여 아마 계속 장교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쩐 일인지 군대에 속하지는 않았고, 그냥 군대 주변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월남하고 난 지 몇 년이 지난 그 땐 겨우 일곱, 여덟 살의 어린 아이에 불과 하였지만 그 시절을 똑똑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집,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가 기거하던 공군 정보학교의 안가(安家)는 오류역에서 직선거리로는 서북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경기도 부천의 둔덕산 기슭에 있었다. 사람들은 이 산이 밋밋하다고 해서 혹은 산이 아닌 작은 둔덕만큼 밖에 안된다고 해서 둔덕산이라 불렀겠지만, 이 산을 수 천 번도 더 넘게 오르내리면서 주변 산의 형상을 빠짐없이 기억하며 느낀 그는 이곳이 마치 여성의 생식기 위에 불두덩처럼 도도록하게 도드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산이 마치 여자의 씹 두덩처럼 생겼으므로 둔덕산으로 불리웠다면 당연히 여자의 샘물과도 같은 지형이 있게 마련인데, 바로 그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는 지점에 안가(安家)가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당연히 작은 계곡을 이루고 있었는데, 계곡의 바깥에서 보면 그곳이 뭐하는 곳인지, 인가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곳이었고, 또 안가의 바깥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다가 ‘접근금지 - 비 인가자 출입시 발포함’이란 정보 부대장 명의의 무시무시한 경고판이 붙어 있기에 일반인들은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당시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에 군의 위세가 매우 당당하였고,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의 가족들도 인근 주민들과 어울릴 수 없는 아웃사이더로 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나중에 성장한 후로는 조금 달라졌지만 ---

 

  안가(安家)의 구조는 살림집으로 약 서른 평 정도의 시멘트 블럭집이 한 채가 있었으며(허름한 판잣집이 많았던 당시의 실정으로 보면 시멘트 블록집만 해도 굉장히 잘 지어진 좋은 집이었음) 별채로서 역시 시멘트 블록으로 만들어진 군대 막사 비슷한 오, 육십평 규모의 건물이 한 채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약 백평에 가까울 정도의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만들어진 양철집 퀀셋형 가건물 안에 군용 지프를 넣도록 만들어진 창고 겸 차고가 있었다.

 

  살림집에는 그를 비롯하여 그의 예쁜 엄마와 월남하여 태어난 그보다 세 살 어린 누이 동생 등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군용막사처럼 생긴 별채에는 많은 군인들이 들락날락 거렸는데, 어떨 때는 열 명이나 스무 명이 한꺼번에 기거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 며칠에 지나지 않았고, 보통 때에는 제이콥이라고 부르는 미군 한 명과 김 중사라고 불리는 나이든 병사 한명 등 두 명만 있었다.

 

  제이콥은 미국에서 ‘럿거스’라는 꽤 이름 있는 동부의 주립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에 지원해 온 엘리트 병사였다. 이들은 모두 평상복을 입고 출퇴근하므로 그 계급을 알 수 없었는데, 그는 독자적인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아 초급 장교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였다.

 

  제이콥은 그가 초등학교 들어가던 일곱, 여덟 살 무렵부터 그의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제이콥은 미국 뉴욕 아래 있는 뉴저지의 럿거스(Rutgers)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전기공학 쪽 보다는 어린 그에게 미국말을 가르쳐 주고, 그와 같이 산에 오르며 함께 운동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제이콥과 함께 산에 오르고 내리던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날래고 튼튼한 몸을 가질 수 있었고, 보통 나이 또래보다 훨씬 덩치가 커 제이콥은 그에게 실전적이며 전투적인 싸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이콥은 공수특전단에 속한 미군을 상대로 한 실전 전투 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었으므로 제이콥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제이콥도 어린 그를 매우 좋아하여 결국 미국인인 제이콥과 그는 아주 친밀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제이콥으로부터 동부 엘리트가 사용하는 미국어를 어려서부터 배우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총명하여 한 번 가르쳐 주면 잊지 않고 써먹으려고 노력하여 어떨 땐 그의 엄마가 미국말을 하는 그에게 당황한 적도 있게 되었다.

 

  이런 그와 제이콥이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한 사건이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님) 입학하기 전 둔덕산에서 벌어졌다. 둔덕산이 있는 아래 마을은 벌응절리(伐應節里)였다. 벌응절리란 마을 이름은 ‘벌판 언저리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벌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벌골’이라고 불렀고, 절이 있어서 ‘절골’이라고도 불렸다.

 

  하여튼 이 둔덕산에는 아카시아 나무와 함께 싸리나무 등 밀원(蜜源)의 근거가 될 각종 잡화와 나무들이 무성했고 군데, 군데 땃벌이 둥지 틀고 있었는데, 어렸던 탓에 이런 것을 잘 몰랐다. 이곳에 절이 생긴 것은 조선시대 말기라고 한다. 당시는 정확한 절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몇몇 스님들이 유교 국가로서 주변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토굴을 파고 밭갈이를 하며 조그만 불당을 지어놓고 기도를 드리던 곳으로서 인근의 주민들이 이 절에 오르내리며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절골이라 불리워졌다.

  그 후 1920년대 기와장과 불상이 발견되면서 절을 지었으나 번창하지는 못하고 조그마한 절로 유지되어 오다가 육십년 대가 훨씬 지나 무슨 고산인지 소산인지 하는 화상이 주위의 땅을 매입하고 절을 중창하여 석왕사라 이름 지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둔덕산의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어린 그는 그 당시 아이들이 여름만 되면 입었던 군복을 잘라 만든 허름한 반바지에 런닝 한 장만 걸치고 평소와 같이 제이콥과 함께 산에 올라가는데, 그날따라 많은 벌들이 우리 주변을 윙윙거리고 날아다녔다. 한 무리의 땃벌 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이 여왕벌이 분가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여튼 신기한 그 모습을 보고 쫒아가다가 그만 풀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벌집을 밟고 말았다. 순간 어른 손가락만한 말벌들이 그가 입은 반바지 사이를 꿰뚫고 올라오다가 그만 그 반바지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자 불에 데인듯한 통증이 아래로부터 밀려오면서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린 그가 겪었던 것은 수많은 말벌들이 일시에 아랫도리에 독침을 놓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왔던 것이었다. 곁에 있던 제이콥이 어린 그를 안고 집으로 내려가 마침 차고에 있던 찝차를 이용해 군 부대 의무관실로 재빨리 이동하여 응급치료를 받고나서야 살아날 수 있었지, 그렇지 않고 그냥 방치해 두었다면 말벌에 쏘인 어린 그는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오전 나절에 그 일이 있은 후 그날 저녁 때나 돼서야 군 의무관 실 침대에서 눈을 뜨자 홀랑 벗겨진 몸으로 여전히 통증과 함께 후끈후끈한 열감이 있는 아랫도리를 보아야 했다. 말벌이 정통으로 쏘아 댄 곳은 그의 오줌 자루와 불알 주변이었다.

  그의 어린 좆 몽둥이는 퉁퉁 부풀어 오른 것이 마치 야구 방망이처럼 솟아 올라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고, 불알은 마치 부대 자루에 바람을 넣은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 사건으로 벌들을 무지하게 증오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이 그에게 있어서 그냥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은 조금 더 커서 성인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김 중사는 말이 없는 무뚝뚝한 사내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무조건 순종하고 따랐다. 그 때 김 중사는 그의 아버지에 비해 약 열 살 정도 아래인 스무 예닐곱살 정도 였는데, 몸집이 단단하고 얼굴은 몸과 마찬가지로 날렵한 인상을 띄고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김 중사는 그의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은율군의 구월산 부근 후배로서 아버지와 같이 월남하면서 키우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어느날 제이콥은 부대에서 미군 부대에서 쓰다가 일본으로 철수할 때 버리고 간 침상용 매트리스를 트럭으로 한 차 가득 싣고 오더니 지프를 넣어두던 차고로 쓰여지던 가건물에 쌓아 두었다가 날을 잡아 아버지와 함께 차고(車庫)를 도장(道場)으로 개조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제이콥, 그리고 김 중사는 열심히 차고를 보수하고 수리하였다. 그들은 차고 바닥을 정갈하고 고르고 둥글고 커다랗게 생긴 바닥 다짐용 도르래를 가져와 바닥을 며칠이고 평평하게 다졌다. 그리고 부대에서 가져온 시멘트로 방수처리를 한 뒤 매트레스를 두 겹씩 깔아 꽤 괜찮은 도장을 만들었다. 그 해 한 여름 동안 세 남자는 도장(道場) 만드는데 거의 모든 일상을 소모하였다. 여름이 끝날 무렵 도장이 완성되자 공군 정보학교의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찾아와 무슨 잔치를 열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군 정보학교의 부대장이 들러 격려해 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가끔 씩이지만 그곳에서는 몸집이 좋은 많은 사람들이 격렬한 격투기를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되곤 하였다.

 

  제이콥은 여덟 살밖에 안된 그를 아침 일찍 깨워 운동하라고 부추겼다. 같은 집에 살던 제이콥은 일찍 일어나 부대에 출근하기 전 정용과 함께 둔덕산에 오르는 것이 일과였다. 어린 정용은 제이콥이 깨우는 것이 싫지도 않은지 그와 함께 둔덕산에 올라 아침 공기를 마셨다.

 

  어려서부터 그는 흥미 반, 강제 반으로 제이콥으로부터 군대에서 필요한 특수 무술을 기초부터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그의 아버지가 제이콥에게 무언 중 부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운동들은 어린 그에게 매우 흥미를 끌었는데, 아주 어려서부터 배운 이 특공 무술들로 인해 나중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고수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제이콥으로 받은 이점은 아주 어려서부터 그에게 미국말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뉴욕 중심부의 생활 영어로서 이 또한 높은 수준까지 이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열 살 되던 무렵 1960년대 초반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 때 겨우 이십대 후반에 불과했던 그의 새파란 젊은 엄마도 몰랐었다.

  그런데 정보특전단에서 단장이란 부대장이 집에 와서 그의 어머니에게 그들이 그 집에 그냥 살도록 조치를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나서야 그의 아버지의 실종이 부대의 무슨 일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후 이들의 삶을 지탱해 주던 그의 아버지의 봉급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부대 부대장이란 사람은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의 엄마가 부대에 출입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부대의 급식을 담당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을 엄마가 떠맡아야 했다.

  이렇게 열 살 무렵부터는 그는 제이콥이 근무하는 군대 사무실에 놀러가곤 하였다. 그곳에 가면 사무실 주변에 미군 GI들이 보던 펜트하우스, 플레이보이, 혹은 허슬러나 체리와 같은 미국 성인 잡지가 널려 있었다. 이미 열 살 무렵부터 성(性)이 무엇인지 눈에 뜨기 시작한 그는 제이콥의 허락을 얻어 이런 잡지를 얼마든지 갖고 올 수 있었지만 어쩐지 창피해서 정작 갖고 나오지는 못했고, 곁눈으로 슬쩍 슬쩍 넘겨보곤 하였다.

 

  어느날, 그가 그 잡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눈치 챈 제이콥은 지난 것은 가지고 가도 좋다고 넌지시 허락을 해 주었다. 그는 그 속의 홀딱 벗은 젊고 예쁜 금발의 아가씨들의 육체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는 집에 와서 다락방에 그 책들을 꽁꽁 숨겨 놓은 채 한동안 그 책들에 푹 빠져 지냈다. 물론 제이콥 덕분으로 미국말을 잘 알게 된 그는 곧 잡지에 실린 그런 저런 소설이나 레터도 곧잘 읽게 되었는데, 그런 책들이 영어 실력을 크게 늘려 주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영어를 듣고 쓰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은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제이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사무실 근무가 끝나면 지프를 몰고 와서 김 중사와 함께 퀀셋 막사 도장에서 운동하는데 전념하였다. 나중에 그도 제이콥으로부터 들어서 알았지만 김 중사는 무술에 있어서 만큼은 제이콥보다 고수였다.

  그는 이 무렵 미국 성인 잡지를 통해 섹스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눈을 뜨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제이콥과 김 중사 아저씨와 함께 퀀셋 막사 도장에서 운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당시 국민학교 4학년치고는 덩치가 웬만한 중학생보다 더 컸다.

  그것은 본래 아버지가 당당한 체격이어서 유전적인 요인도 있었겠지만, 그 때만해도 춘궁기(春窮期)가 있던 시절이라 제대로 못 먹고 살았으므로 아이들이 덩치가 작았지만,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기름진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던 그는 발육적 측면에서 한국의 보통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또한 제이콥의 지도로 영어는 웬만한 중학교 영어 선생님들보다 훨씬 더 잘하는 수준이었고(나중에 알고 보니) 기초적인 국어나 산수 등의 일반 과목은 설렁설렁 공부해도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이런 것은 아마 모두 제이콥의 덕분이라고 해도 좋았다.

 

  제이콥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마치면 럿거스 대학교에서 가까운 프린스턴 대학교로 무슨 박사과정인지, 포스닥인지 하여튼 새로운 공부를 하러 가기로 약속되었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한국에서 장교로서의 군복무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경력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여튼 그 때만 하더라도 그는 프린스턴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잘 몰랐다. 하여튼 제이콥은 어린 아이에 불과한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고, 공부하는 방법과 운동하는 법과 미국 생활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또 아주 중요한 것 비록 책이지만 각종 잡지를 통해 ‘섹스’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해 약 6년 가까이 살던 한국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제이콤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매우 서운해 하였다. 제이콥은 친구요, 선생이요, 무술 사부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 사병들이 보는 성인 잡지를 통해 섹스가 뭔지도 알게 해 주었다. 아직 여자에 대한 실전 경험은 없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겨우 국민학교 6학년 남자 녀석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 건 다 아는 진짜 까진 녀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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