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카인..그 뒷부분...5 (펀 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673회 작성일 17-02-12 11:26

본문



류지오에게는 사도미 말고 에이꼬라는 이종 사촌이 한 명 더 있었다.

지난해에 동경대 경제학과에 원서를 냈다가 떨어져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에이꼬의 부모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도시에는 류지오에게 일러두었다.

"에이꼬가 우리 집으로 올라 온다는구나. 다른 데 가지 말고 집 지키고 있거라. 그리고 못된 장난하지 말구!"

류지오는 도시에에게 그런 명령을 받고는 종일 에이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꾸미에게 오전에 전화가 왔었다. 류지오는 자기 집에 이종 사촌이 온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는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고로히찌에게도 전화가 왔었다. 어제 저녁에 오토바이를 한대 훔쳤다는 것이다. 호유도와 같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에이꼬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류지오는 나중에 다시 전화해 주기로 했다.

열두 시쯤 되어서 에이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을 못 찾겠다는 것이다.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역에 와 있으니 나와 달라는 것이다. 류지오는 역까지 그녀를 마중하러 나갔다.

류지오는 아주 어렸을 때 그녀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어린애였고 그녀는 숙녀였었다. 유치원에 다녔던 류지오는 초등 학교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신사와 숙녀로 봤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류지오는 그녀에 대한 아주 약간의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류지오는 친가 쪽으로는 낯이 익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유우끼찌는 친척들과 잘 만나지 않았다.

도시에는 두 명의 언니만 있을 뿐 오빠나 남동생은 없었다. 사도미는 작은 이모의 딸이다. 작은 이모와는 같이 도쿄에 사는 만큼 만날 기회가 많았다. 반면 큰 이모는 고베에 살았다. 고베에 사는 이모에게는 에이꼬와 류지오보다 네 살이나 적은 사토오가 있다.

류지오는 사토오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사토오는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 그는 인생의 반을 병원에서 지내야 할 운명인지도 몰랐다. 아들의 병치레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집안은 아직까지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고 긍긍전전하는 형편이었다.

어느새 역까지 도착했다.

전화박스 앞에서 얌전하게 서 있는 숙녀가 눈에 띄었다. 갈색 외투의 어깨 위로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흰 털실 장갑을 끼고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직 에이꼬는 류지오를 알아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류지오는 설레는 마음으로 에이꼬에게 다가갔다. 에이꼬도 류지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류지오?"

류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류지오는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토요일이라 전철 안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붐볐다.

"무슨 과에 원서를 낼 거예요?"

"경영학."

"무슨 대학요?"

"동경대."

"그래요? 동경대는 원서 접수가 끝나고 오늘 본고사를 치를텐데..."

"음... 오전에 벌써... 시험을 쳤어..."

"그래요? 잘 쳤어요?"

"응."

에이꼬는 정말 잘 쳤는지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일본 최고의 명문으로 자처하고 그렇게 인정해 주는 것이 동경 대학이다. 평균 경쟁률 6대 1, 여섯 명중에 다섯 명은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에이꼬와 류지오는 그 학교로 다시 와서 이리저리 교내를 돌아다녔다.

"이제 그만 가요. 앞으로 매일 이 학교에 다니며 지겹도록 볼텐데..."

"사실 난 자신 없어..."

"그렇지도 않겠는걸요. 누나 얼굴이 자신 만만한잖아요? 합격하면 나한테도 한턱 내야 해요."

류지오는 그녀가 이 학교에 합격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에이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울해 보였다.

"우리 여기서 점심 먹고 갈까요?"

"난 배 안 고파."

"난 배고픈데..."

에이꼬는 활짝이 미소를 지으며 류지오의 손을 잡는다. 손을 잡은 쪽은 에이꼬였지만 류지오가 가는 데로 졸졸 따라갔다. 류지오는 대학교 주변의 음식점에 들어가서 점심을 해결했다. 류지오는 집으로 돌아오며 가까운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가서 비디오 테이프 두개를 빌렸다.

"비디오 본 적 없죠?"

"..."

"공부하느라고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류지오는 비디오를 틀어 주고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쥬스를 가져다주었다.

비디오만 보고 있자니 잠이 쏟아졌다.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겠지만 일어나 보니 에이꼬가 보이지 않았다.

변기통에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이꼬가 나왔다. 류지오는 여전히 자는 척했다. 에이꼬는 비디오를 보지 않고 집안 이곳 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이었다. 대부분 류지오가 미술 학원에 다니면서 그린 것들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옆벽에는 작은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이른바 케리커쳐라는 인물 풍자화였다. 몇 달 전 연립 여당의 출범과 함께 수상이 된 호소다니의 케리커쳐도 걸려 있었다. 그 중에 도시에의 케리커쳐도 있었다. 에이꼬는 그제야 이것들이 류지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꼬는 2층으로 올라가서 방문을 열어 보았다. 향긋한 냄새가 났다. 사도미의 방이었다. 에이꼬는 사도미의 방을 닫고는 다시 류지오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역시 사도미의 방에서 나는 향기가 조금 배여 있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류성 물감 냄새가 짙게 났다. 류지오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그림 한 점이 미완성 된 채 올려져 있었다. 그 그림의 여인이 누굴까 하고 에이꼬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천장의 세 명의 미의 여신과 화살통을 어깨에 맨 큐피드도 보인다.

에이꼬는 갑작스럽게 환상 속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캐비닛을 열어 봐요."

에이꼬는 천장의 신화 그림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류지오의 소리에 깜짝 놀란다.

"어머!"

"어때요? 그림이."

"이상한 세계로 온 것같아."

류지오는 에이꼬가 상당히 감상적인 여자라고 생각이 들었다.

"캐비닛 안에도 그림이 있어요."

류지오는 자물통을 열고는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류지오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은 인물화였다. 아주 세밀한 곳까지 그린 나체상이 나오자 에이꼬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물론 천장에 그린 세 명의 미의 여신들도 나체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상스러운 점이 많았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나체화의 가장자리를 둘러 가며 갖가지의 포즈를 취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계속 누드 그림만이 나왔다. 이 모든 그림은 류지오가 미술 학원에 가서 9년 간 배운 솜씨였다.

학원의 한달 수강료가 20만엔이다. 만엔 짜리 동네 학원과는 역시 질적으로 틀린 곳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적인 강사들부터, 다양한 종류의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고액의 수강료는 모두 유우끼찌가 지불했다. 류지오는 국민학교 3학년부터 얼마 전까지 9년 가까이 다녔었다. 그 덕에 천황 미술전에서도 입상한 적이 있었다.

류지오는 그 곳 학원에 다니는 원생들의 동아리인 구름천이란 곳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구름천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소규모적인 갤러리를 가졌다. 류지오는 그 갤러리에서 누드 면에서는 자기의 작품으로만 채울 정도였다.

류지오는 커다란 캐비닛의 안쪽 면에다 세워 놓은 구름 속의 여자들이란 작품을 보여 주었다. 캐비닛에다가 억지로 끼어 넣어 둔 것을 다시 꺼내느라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 앞에 자질구레한 그림들을 모두 치우고 약간 벌어진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틀의 끝 부분을 잡고 잡아당기자 캐비닛과 나무틀이 긁히는 소리에 인상이 찌그러질 정도였다. 일곱 명의 여자들이 뒤엉켜 있는 군집 누드화였다. 구름천의 아리따운 누님들이 류지오에게 특별히 배려해서 모델을 서 준 것이었다.

"아마 이건 내 최고의 작품일 거예요."

류지오가 천황 미술전에서 2위로 입상한 뒤에 구름천에서는 일대 파티가 벌어 졌었다. 류지오는 그 파티에서 군집 누드를 그려보고 싶다는 포부를 말했고 일곱 명의 여자들이 흔쾌히 승낙한 것이었다. 구름천에서는 일곱 명의 여자 외에도 류지오와 두 명의 미대 남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일곱 명의 누님들은 류지오에게만 그 기회를 주고 두 명의 남자들에게는 입실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그림이 구름천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부탁에 따라 다른 곳에 출품하지 않고 이 곳 류지오의 수집 창고에 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누나한테 자랑 좀 해도 돼요?"

에이꼬는 누드화들 때문에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음."

에이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실에 걸려 있는 것 있죠?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거요." "음. 봤어."

"작년 9월 달에 천황 미술전에서 2위로 입상한 거예요. 칭찬 좀 해 줘요!"

"그래! 정말 대단한데! 그런데 이 그림 말야... 직접 모델을 보고 그린 거니?"

"네. 그래요. 모델들이 옷 한번 벗는데 얼마씩 받는지 알아요?" "으음?"

에이꼬는 고개를 흔들었다. 류지오는 그녀가 옷 한번 벗으면 꽤나 받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을 꾸짖었다. 류지오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그녀도 싫어 할 것이다. 순결하다 못해 고귀해 보이는 여자와 옷이나 벗으러 다니는 여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류지오는 에이꼬에게 자신의 사진들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어서는 안될 사진들이 많이 있었다. 저번에 바캉스에 가서 찍은 사진들만 하더라도 그 당사자들에게 심한 협박을 받았었다. 특히 레이요는 자신의 사진들을 남에게 보여줄 경우 죽을 때까지 저주하겠다는 협박을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와의 키스 장면을 찍었었다. 그것으로서 그녀와의 게임은 싱겁게 끝났지만 영원히 간직할 추억의 유물에 한가지 더 보태진 것이다.

류지오는 사진들을 연대별로 모아 두기 때문에 최초의 1권을 에이꼬에게 보여주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기의 사진들은 그녀에게 별 흥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류지오는 아버지에게 카메라를 사 달라고 했었다. 그것도 최상품을 요구한 것이었다. 유우끼찌는 역시 류지오에게 있어선 하늘이 내려 준 아버지였다. 류지오는 그림만큼이나 사진에도 빠져들었다. 류지오에게 사진이란, 예술보다 하나의 추억을 보관하기 위한 도구였다. 에이꼬가 사진첩을 보는 동안 류지오는 다시 그림 창고를 정돈하고 있었다. 일곱 여자의 누드화를 다시 옷장 안에 끼어 넣으려고 낑낑거리며 애를 썼다.

에이꼬는 이미 다른 사진첩을 보고 있었다.

"누나. 그건 안돼요!"

그건 구름천의 누님들 사진이다. 류지오는 일곱 명의 여자들 중에 요꼬와 사시끼와 무척 친했다. 여자들의 질투심이란 남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인가 보다. 류지오가 요꼬의 사진을 조금 더 많이 찍는 것에 질투를 느꼈는지 사시끼가 엄청난 제안을 해 온 것이다. 류지오는 사시끼의 질투심에 그녀의 모든 것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요꼬는 우연히 사시끼의 미술책 속에 있는 그녀의 누드 사진을 보게 되었다. 물론 사시끼는 은근히 요꼬에게 알리고 싶어서 자기 미술책 속에 사진들을 가지고 다닌 것이었다. 그 바람에 요꼬도 류지오에게 자신의 알몸을 허락했다. 류지오는 그래서 요꼬와 사시끼의 나체 사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류지오는 에이꼬가 다시 한 장을 넘기기 전에 사진첩을 덮어 버렸다. 다행히 그녀가 요꼬와 사시끼의 나체 사진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은 뒤쪽에 있었기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류지오는 그녀들의 나체 사진을 찍으면서도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이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어요."

"미안해."

"누구랑 약속을 했걸랑요. 자기 사진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겠다고... 이해해 줘요. 이쁜 누나."

에이꼬는 자기를 이쁜 누나라고 부르자 방그레 웃어 보인다.

밑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에가 온 것이었다.

"에이꼬. 몇 시에 왔니?"

"열두 시에 도착했어요."

"시험은 잘 쳤니?"

"네."

"합격하면 우리랑 같이 살아야겠구나? 우린 환영이란다. 그렇지 류지오?"

"네. 그래요."

"어머니는 잘 계시니?"

"네. 잘 계십니다."

"이리 오너라. 여기가 이제부터 네 방이 될 거야."

도시에는 유우끼찌가 쓰던 방을 보여 주었다. 유우끼찌가 쓰던 침대와 가구들, 책상들이 그대로 있었다.

"여긴...?"

'여긴 이모부님 방이 아니에요'라고 물어 보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모가 이혼한 사실을 알고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긴 그 사람이 쓰던 방이야. 아주 넓고 좋잖니?"

"네. 좋아요."

"사도미도 좀 있으면 올텐데... 오면 참 좋아하겠구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도미가 들어왔다.

"어머! 언니!"

사도미는 에이꼬를 알아보고는 달려가 껴안는다.

"언니. 어떻게 온 거야?"

"본고사 치고 잠시 들린 거야."

"그래? 어느 대학교에?"

"동경 대학교지!"

도시에가 마치 자신의 아들이 그 학교에 들어간 만큼이나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어머! 정말이야!"

"음."

"참 좋겠다! 그럼 앞으로 여기에 와서 살겠네!"

"합격하면..."

"꼭 합격할 거야! 신이시여. 언니가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 사도미는 눈을 감고 낭랑하게 외쳤다. 하지만 자신도 붙느냐 마느냐 하는 운명의 신 앞에 잣대를 맡기고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이 꽉 차겠구나!"

네 명이서 탁자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내가 받을게요."

류지오는 자기 전화일 것 같아서 먼저 가서 받았다.

"여보세요?"

한참 뒤에 여자 음성이 들렸다.

"그 기... 류지오니?"

"네. 그렇습니다만..."

"류지오구나. 나 고베에 이모야. 그 기 에이꼬 있니?" "네. 여기 왔습니다."

"음... 엄마는 잘 있니?"

"네. 잘 계십니다. 이모님은요?"

"여기도 잘 있다. 에이꼬 좀 바꿔 주겠니?"

"네. 잠깐만요."

류지오는 무선 전화기를 들고 에이꼬에게 가져다주었다.

"누나. 집에서 전화 왔어요."

류지오가 수화기를 건네주자 에이꼬는 얌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고 거실로 갔다.

류지오는 식사를 하면서 그녀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죄송해요. 여기 며칠 있다가 갈게요."

아주 나직한 음성이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들려 왔다. 결코 집에서 온 전화를 받고 기뻐하는 음성이 아니었다.

"끊어요."

그녀는 다시 자기 의자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류지오는 얼른 자기 밥그릇을 비우고는 일어났다.

"나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니?"

"친구집에요."

"추운데... 누구 집에 갈려고?"

"그냥 바람이라도 새고 오려구요."

"알았다. 너무 늦지마."

류지오는 밖으로 나와서 고로히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류지오가 학교에 도착해 보니 고로히찌와 호유도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둘이서 낑낑거리며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

"임마! 이거 어디서 훔친 거야?"

"길가에 쓰러져 있던 걸 우리가 끌고 왔어."

"휴우...! 일단 한번 타 보자."

류지오는 세워 둔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처음 몇 번은 자꾸 시동이 꺼졌다. 고로히찌와 호유도는 류지오가 하는 것을 잘 지켜보았다.

"와! 움직인다!"

호유도가 소리쳤다. 류지오는 천천히 앞으로 몰고 나가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란 솔직히 자전거 타기 보다 쉬웠다. 자전거를 타면 사람이 직접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래서 자전거를 처음 타는 사람은 페달을 밟으며 균형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

류지오는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는 내렸다.

"재밌는데! 자 이제 너희들도 타 봐."

"고로히찌. 네가 먼저 타."

호유도가 겁을 먹고 먼저 발뺌을 한다. 류지오는 둘에게 어떻게 타는지 차근하게 설명해 준다. 그리고 고로히찌가 올라타도록 했다.

"여기 봐 지금은 기어가 안 들어가 있지?"

류지오는 오른쪽 발로 기어를 바꾸어 보였다.

"클러치를 잡은 다음 이렇게 발꿈치로 뒤로 밟으면 1단, 또 한번 하면 2단, 그리고 3단.... 반대로 발을 이렇게 올리고 앞으로 밟으면 한 단씩 내려가는 거야. 살짝이 밟아 주면 기어가 빠지게 되니까, 알아서 하라구."

고로히찌는 천천히 오른손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오토바이가 앞으로 쑥 나가 버렸다. 겁이 나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내 시동을 꺼져 버리게 하고는 넘어지려고 했다.

류지오는 어찌 되었던 고로히찌가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고 앉아서 호유도가 준 담배를 한대 피웠다. 류지오는 어제 자기와 부딪쳤던 그 폭주족들과 이 오토바이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한 여자가 와서 빨리 가자고 조르는 것을 보면 급히 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와중에 오토바이 한대가 주인 없는 신세가 된 것일지라.

오토바이에 키도 꽂혀 있었다. 분명히 싸움이 일어난 후 다른 동료가 급히 이 오토바이의 주인을 데려간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급한 상황이었으면 오토바이 키도 뽑지 않고 그냥 갔을까.

고로히찌는 조금 가다가 다시 시동이 꺼지고 꺼지고 하자 류지오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류지오는 다가가서 다시 가르쳐 주었다.

"클러치를 잡고 있으면 아무리 이걸 잡아 당겨도 안 나가." 류지오는 클러치를 꽉 움켜잡고는 오른쪽 손잡이를 감아 돌렸다.

"처음에 출발할 때 클러치를 조금 잡아 쥐고 해 봐. 자 해 봐." 류지오는 옆에 서서 고로히찌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번 실패를 하더니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오더니 어떻게 기어를 넣는지 다시 물었다. 류지오는 다시 가르쳐 주고 호유도도 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다.

류지오도 도로에서는 처음 타는 것이라 두 명을 뒤에 태우고 도로로 나오자 겁이 났다. 고로히찌의 집까지 와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일단 집에 처박아 놔야지."

"너희 부모님이 보시면 어떡할래?"

"친구 거라면서 그냥 둘러대지."

"내 이름은 대지마! 그리고 타고 나다니지마. 그 녀석들이 찾고 있을 거야. 알겠지?"

"알았어. 일단 이 오토바이는 우리 공동소유로 하자. 어때?" 고로히찌가 자기까지 끼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훔쳐다 놓은 물건에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다.

"우리 이거 팔아 버리면 어때?"

호유도가 그렇게 제안을 했다.

"임마! 안돼! 그러다간 정말 잡힌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아무데나 갔다 버려 놓는 거고. 버리기 아까우면 집에 고이 모셔다 놓았다가 다시 옷 입혀서 끌고 다니던지 해. 나중에 면허판만 새로 갈면 되잖아."

"면허판 갈려면?"

고로히찌가 물어 보았다.

"오토바이 샀다고 신고를 해야지. 그리고 면허증 따서 타고 다니던지..."

"류지오. 넌 면허증 있어?"

"짜식들. 이 형님은 자동차 면허증을 가지고 계시다." "정말?"

"못 믿겠냐?"

"왜 못 믿어? 우린 믿어!"

"류지오. 그럼 네가 이 오토바이 가져라."

고로히찌가 그렇게 말하자 류지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짜사! 내가 도둑놈이냐? 이걸 내가 가지게?"

"왜 그래? 길에 주인 없이 서 있는 이 오토바이가 우릴 유혹한 거지 우리가 처음부터 나쁜 맘먹고 한 짓은 아니잖아."

호유도가 발끈하며 화를 냈다.

"임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내가 너희들 걸 등쳐먹는 도둑놈으로 보이느냐 이말이야! 내가 면허증 어쩌고저쩌고 꺼내 놓고 그랬으니 그렇게 생각할 도리밖에 없잖아?"

"우린 그렇게 생각 안 해."

호유도는 류지오의 말에 새삼 감탄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 안하면 고맙지만 일단은 너희들 거니까, 너희 둘이서 알아서 해. 하지만 절대로 이거 팔면 안돼. 당장에 들통 날 테니까!"

"알았어."

류지오는 다시 당부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류지오는 어머니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도시에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엄마. 잘 자요."

"그래."

류지오는 자기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확인시켜 주고는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옆방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에 사도미가 노크를 하고는 들어왔다.

"류지오. 자니?"

"아니."

"내 방에 와."

"뭐 하게?"

"그냥."

류지오는 사도미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바닥에 맥주 두 병이 놓여져 있었다. 에이꼬가 류지오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다.

"류지오... 너 술 먹을 줄 아니?"

'맥주도 술인가?'

류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옆에 앉았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사도미도 자리에 앉고는 맥주를 땄다. 류지오가 먼저 잔을 들고 건배를 한다.

"에이꼬 누나의 합격을 바라며! 건배!"

"우리 모두의 합격을 바라며!"

사도미가 그렇게 소리쳤다. 에이꼬와 사도미는 기분 좋게 서로 잔을 부딪혔다. 두 여자 모두 한번에 잔을 비웠다. 사도미가 다시 나머지 병을 따서 에이꼬와 자신의 잔을 채웠다.

"누나들 술을 상당히 좋아하나 봐?"

두 여자는 피식 웃는다. 그리고 자기 잔들을 마저 비워 버린다.

"그렇게 마셔 가지고 양이 차겠어? 사도미 누나는 주량이 얼마야?"

류지오는 에이꼬가 있는 앞이라 사도미를 누나라고 불렀다. 솔직히 그녀를 누나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다. 자기보다 정신 연령이 떨어지니까 말이다.

"맥주 두 병. 에이꼬 언니는?"

"난 모르겠어. 맥주 한잔?"

"벌써 두 잔이나 마셔 놓고선."

에이꼬와 사도미는 벌써 얼굴에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누나들. 내가 오늘 한잔 사줄까?"

"류지오. 그럴 능력이라도 있니?"

사도미의 말에 류지오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원하는 되로 해줄 테니 어서 말해 봐."

"좋아! 그럼 맥주 다섯 병만 사와."

"여기서 마시면 무슨 맛이 나겠어. 우리 포장마차로 가자! 어때?" 류지오는 고로히찌와 호유도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진탕 마신 기억이 있어 그렇게 말했다.

"포장마차? 좋아. 언니는 어때?"

"음. 나도 좋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