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드림보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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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41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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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et 공개홀.
정희수는 2번 카메라 뒤쪽에서 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생방송 토크쇼가 진행중이었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조재봉 PD가 기획한 <남자의 성, 여자의 성>이란 프로그램이었다. 애당초 조 PD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아이템은 <카사노바 사건을 해부한다>였으나 취재가 부실해 긴급 대체한 거였다.
희수는 조 PD의 강권에 못 이겨 토크쇼의 원고를 맡았다.
패널로 출연한 영화감독과 산부인과 의사, 여성의 전화 대표, 패션모델들은 주어진 대본에 따라 무난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감독 최민재가 마릴린 먼로를 들먹일 때부터 희수는 바싹 긴장했다. 거기서부터는 대본에 없는 자유발언으로 진행되는 코너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작가와 사전에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상의하긴 했지만 막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면 출연자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희수는 손바닥에 배인 진땀을 바지에 문지르며 최민재 감독을 주시했다. 최 감독은 멜러물의 거장답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힘 없이 풀어 나가고 있었다.
『영화 <7년만의 바람 피우기>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렇게 남자들을 유혹합니다. ‘나는 여기에 있어요. 단순하고 순진하며 부드럽고 자극적이죠. 나를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결혼도, 늘 함께 있는 것도, 책임도, 돈도 모두 필요 없어요. 나는 당신이 뭘 해도 겁내지 않아요. 그것이 섹스라 해도.’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남자의 에로틱한 공상을 몸으로 나타내는 여자는 욕망에서 책임이라는 부분을 제거해 버립니다. 즉 쾌락에 대한 윤리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점을 눈여겨보면 남자의 에로티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그리는 사랑의 꿈은 사랑의 지속성에 있다고 봅니다. 물론 성적 쾌락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것은 애정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선물이죠. 여자에게 사랑의 기쁨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기쁨일 겁니다. 그러나 남자의 에로티시즘은 단속적인 성적 쾌락이 핵을 이룹니다. 이런 쾌락에 윤리적인 존엄성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지요. 윤리는 타인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절대로 수단으로는 생각하지 않잖습니까. 하지만 남자의 성적 욕망의 대상은 음식이나 물, 혹은 잠자기 위한 침대와 마찬가지여서 수단으로 인식됩니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죠. 그런고로 남자의 에로티시즘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위한 이기적인 갈망이라고 단언합니다. 예컨대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 섹스를 한 경우, 그것은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서라거나 어떤 책임·의무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단지 섹스를 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관계를 한 거 아니겠습니까? 쾌락은 어떠한 의무도, 속박도 없는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그것은 선택을 피하고, 저항이 작은 선에서 사리분별 없이 따라가는 것이죠.
여자들이 계속성, 친밀함, 함께 사는 생활을 꿈꾸는 데 반해 남자들은 그런 것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회피하려고 합니다. 어찌됐건 쾌락은 향유하되 자유는 확보하려는 이기적인 속성, 그게 남자의 에로티시즘, 그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민재의 장황한 논리에 MC가 제동을 걸었다.
『아주 흥미로운 분석이군요. 남자인 최민재 감독님이 남자의 성에 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신 것 같습니다.』
최 감독은 MC의 말에 손을 저으며 보충설명을 했다.
『부정적인 게 아니라 현상을 말한 거지요. 남자의 꿈과 여자의 꿈, 그 차이가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성의 갈등, 성범죄의 원인이라 규정하고 싶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즉흥성과 계속성?
희수는 최 감독의 웅변을 곰곰이 뇌까려 보며 스튜디오를 걸어나왔다. 최 감독의 애드립이 무사히 결론을 맺었으니 이제 가슴 조일 대목은 없었다. 녹화는 저 상태로 무난하게 끝날 거였다.
W-net의 편성국 사무실은 썰렁했다. 생방송 제작팀을 제외하고 모든 직원들은 벌써 퇴근한 모양이었다.
희수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텅빈 작가실로 들어갔다.
작가들의 책상마다 조그만 선물 박스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W-net의 사장이 주는 성탄절 기념 선물이었다.
그녀는 선물을 열어 보지도 않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대본에 대한 검증이 끝났고 이미 방송까지 끝나 가는 상태이므로 그녀가 더 이상 방송국에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로 걸어나오는 그녀의 걸음은 무거웠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성탄 전야의 거리는 깜박이 장식 전구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오피스텔로 걸어가는 길에 이동선을 생각했다.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우수 짙은 표정 뒤로 그 동안 만났던 여자들의 얼굴들이 깜박이는 장식 전구처럼 명멸했다.

검문소를 통과한 동선은 유리창을 올림과 동시에 오디오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비틀었다. 검문 받을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레너드 코헨이 다시 살아나 절규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무선전화기와 호출기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레너드 코헨의 비가(悲歌)에 묻혀 그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차창에는 제부도로 향한 물길이 꿈처럼 아스라히 펼쳐 있었다. 동선의 지프가 여기까지 달려온 시각은 물길의 데드 라인이었다. 어둠과 함께 밀려온 검은 바다는 곧 제부도의 물길을 삼켜 버릴 거였다.
섬 쪽에서 나오는 차량들이 야간 열차처럼 불빛의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제부도까지 달려온 연인들의 차량이리라.
물길은 오늘따라 유난히 길어 보였다. 그 길을 건너가는 순간 되돌아 나오는 길은 잠길 것이다. 제부도로 뻗은 제방길은 그래서 비장하다.
그는 여기 올 때마다 저속 기어에 고정시켜 놓고 일정한 속도로 이 길을 달렸다. 제부도의 모든 것은 그 길에 있었으므로.

병사들이 막 바리케이드를 내리려는 순간, 뉴그랜저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완장을 찬 병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통제시간인데요.』
『죄송하지만 통과시켜 주세요.』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상미가 애원을 했다.
『물때도 모르고 여길 오셨습니까?』
『몰랐어요, 초행이라서.』
『길이 곧 잠기게 됩니다.』
『아직은 보이는데요! 방금 지프 한 대도 들어갔잖아요. 사정 좀 봐 주세요. 바로 앞에 들어간 지프가 남편 차거든요.』
병사들은 그녀의 말에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부부가 왜 따로따로 오셨습니까?』
『그이는 대전에서 출발했고 저는 서울에서 출발했거든요. 그이 직장이 대전이라서.』
『아,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여기서 약속하셨나 보죠? 멋지군요. 한 번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가운데는 벌써 밀물이 차올랐을지도 모르니까 급히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병사가 바리케이드를 올리며 엄포를 놓았다. 그 말에 상미는 반사적으로 급출발했다. 어둠 속에서 병사들이 킬킬킬 흰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바짝 쫄았겠지? 팬티에 찔끔 저렸을 거야.』
그들은 순진한 도회지 여자를 골탕먹인 걸 즐기고 있었다. 통제시간은 늘 밀물시간보다 조금 앞당기는 것이어서 아직도 십여 분 가량 여유가 있다는 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도 속은 건 마찬가지였다. 대전에서 출발했다는 지프의 차량 번호판이 서울 번호였다는 것을.

헤드라이트에 드러난 제방 길은 젖어 있었다. 길 양편으로 시커먼 파도가 곧 집어삼킬 기세로 혀를 내밀고 있었고, 파도의 포말은 바람에 매달려 제방 길을 적시고 있었다.
상미는 공포에 질려 연신 가속페달을 밟았다.
멀리 앞서가던 지프의 후미등이 가깝게 다가오자 그녀는 비로소 안도했다. 지프 속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는 속도를 줄이고 여유를 되찾았다.
세상에 땅끝까지 오게 될 줄이야!
그녀는 꼭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경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 나올 때만 해도 그녀는 여유만만했었다. 남편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주도로 떠날 것이 확실했으므로 이틀간의 시간을 벌어 둔 터였고, 또 동선이 서울을 벗어나 봤자 얼마나 가랴 싶었던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단숨에 수원까지 치달린 그의 지프가 고속도로를 빠져 나오더니 줄기차게 서쪽으로 달리는 거였다.
그를 뒤쫓는 도중에 그녀는 몇 번이고 유턴하고 싶은 충동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의 지프 뒷 유리창을 살필 때마다 그런 충동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같은 날, 천하의 바람둥이 사내가 어째서 이 먼 길을 홀로 달려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 여정의 끝에 어떤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화성 땅 남양만까지 달려오면서 상미는 경기도의 면적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스럽게 확인하곤 했다.

제부도의 횟집 상가가 밀집하고 있는 포구에 차를 세워 놓고 동선은 가장 가까운 횟집으로 들어갔다.
상미는 그 횟집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시트를 젖혔다. 비스듬히 누워 그를 관찰할 요량이었다.
그는 창쪽 자리에 앉아 무슨 탕 같은 걸 주문해 먹기 시작했다. 소주도 곁들이는 것 같았다.
그 지루한 시간 동안 차에 앉아 지켜보면서도 그녀는 시장기를 느끼지 못했다. 이 허허로운 고립무원의 섬에 들어와 혼자서 저녁을 먹는 사내,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의 영상이 너무도 경이로운 까닭이었다.
마침내 식사를 끝낸 동선은 지프를 몰고 남쪽 순환도로로 빠져나갔다. 상미는 보조 라이트만 켠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섬의 규모는 아담했다. 포구의 뒤편으로 몇 마지기의 전답과 마을이 있었고 그 너머에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해수욕장의 끄트머리에 검은 그림자가 우뚝 솟아 있었다.
상미는 언뜻 스치는 표지판을 통해 그 곳에 매봉이라는 기암이 있는 걸 알았다.
밀물이 되면 저 바다 한가운데서 장승처럼 외로이 떠 있고, 썰물이 되면 제부도와 연결된다는 매봉은 제부도의 유일한 명소였다. 그 아래에 천연 굴밭이 깔려 있어서, 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아무 때나 석화를 따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밤인데도 매봉 주변에는 아베크족들이 많았다. 주변의 둑길에도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짝이 없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프는 사람들을 피해 둑길을 벗어났고, 바다 쪽으로 계속 달려갔다. 상미는 둑길에서 차를 세웠다. 개펄로 들어간 지프의 뒤를 쫓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개펄 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지프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밖에는 어둠과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우소엔 영화 서편제의 테마 뮤직이 가득했다.
굴레방다리 일대의 예배당들이 경쟁하듯 찬송가를 울려 대고 거리의 레코드 가게에서 캐럴송을 비무장지대의 대남 방송처럼 틀어대는 마당에 허름한 건물 2층의 조그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국악의 음률은 분명 이단의 소리였다.
일권은 유일하게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극진한 서비스를 바치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은 한 쌍의 남녀는 업주의 과잉친절에 적잖이 당황하는 표정들이었다. 커피 두 잔을 시켰을 뿐인데 샴페인과 계란말이 안주가 나오고 뒤이어 맥주와 독일식 백소세지까지 줄줄 따라나오자, 혹시 주문에 착오가 생긴 건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일권은 그 테이블에 접시를 내놓을 때마다 서비스라는 걸 주지시켰다.
『메리 크리스마스, 복 받으세요.』
그 한 마디 말이 그들을 안심시켰다. 남녀는 오래오래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일권은 주방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조명 대신 밝혀 놓은 사과 모양의 촛불을 바라보며 남녀는 다시 둘만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일권도 촛불 아래서 읽다 만 책의 갈피를 다시 찾았다.
이상하게도 성탄 전야엔 손님이 오질 않았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씩 가난한 연인들이 숨바꼭질하듯 들어와 커피 두 잔을 마시고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럴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오늘 안주거리를 다른 날보다 든든하게 준비했었다. 언제 어떤 팀들이 우르르 몰려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홉 시가 넘어가도록 해우소는 적막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예약손님이 아니고 이 곳을 찾는 손님이라면 필시 가난한 연인들이 대부분일 거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들떠 있는 날, 아현동 고갯마루 후미진 골목의 허름한 카페를 일부러 찾아올 손님이라면 주머니 사정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커플의 외관도 일권의 눈엔 가난하게 보였다. 더부룩한 수염에 철 지난 얇은 오버코트를 걸친 사내, 회색 스웨터에 뒷머리를 한 가닥으로 질끈 동여맨 여자. 촛불이 꺼질세라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그들의 정경에 일권은 막연한 연민을 보내고 있었다.
혹시 저들은 불륜의 연인이 아닐까?
문득 일권은 그런 상상을 했다. 가진 것도 없고 게다가 희망마저 보이지 않는 빈자들의 불륜. 일권은 그런 생각을 하다 괜히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는 책을 덮고 또 과일 안주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불행한 연인들을 위해 뭐든지 주고 싶어서였다.
그때 현관문 위쪽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딸랑거렸다.
단감을 깎다 말고 문 쪽을 돌아본 일권의 눈망울이 휘둥그래 커졌다.
『어, 화숙 씨가 여길 어떻게?』
가슴에 케이크 상자를 안고 어깨로 힘겹게 문을 밀고 들어온 여자는 뜻밖에도 장화숙이었다.
『찾느라고 혼났어요.』
『근처에서 전화를 하시지 그랬어요.』
『그럼 신선한 맛이 없잖아요. 여기 케이크 하나 사 왔어요. 외로운 사람들끼리 성탄을 자축하기 위해.』
『우와, 제 생전 케이크 받아 보긴 처음입니다.』
『일권 씨 드리는 게 아녜요. 저와 함께 나눠 먹자는 거니까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앉으세요, 우선.』
일권은 그녀를 가스 난로가 가까운 멍석으로 안내했다.
가져온 초를 있는 대로 다 꽂아 놓은 크림 케이크는 난로보다도 환한 빛을 발했다.
일권은 테이블의 연인들을 불러 함께 케이크를 잘랐다. 그가 칼질을 하는 동안 여자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다.
네 사람은 그대로 그 자리에 퍼질러앉아 오래 사귄 친구들처럼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 왜 저는 잔이 없죠?』
따라 주는 술을 단숨에 털어넣고서 화숙은 턱수염을 기른 남자에게 다시 건네 주며 시종일관 그를 닥달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사정이 있는 듯 술을 아껴 마시고 있었다.
『운전 때문에 그러세요? 까짓것 차 세워 두고 택시 타고 가면 되잖아요. 고요하고 거룩한 밤인데 누가 견인해 가겠어요?』
『천천히 권하세요. 이분, 술 때문에 지옥 구경하고 나온 주당이에요.』
스웨터의 여자가 보다못해 끼여들었다.
화숙과 일권이 무슨 소린가 싶어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턱수염이 아랫배 쪽을 쓸며 말했다.
『한때 무지하게 마셔댔죠. 내가 술을 마신 건지, 술이 나를 마신 건지 분간도 못 할 정도로요. 언젠가 잘 마시다 잠이 들었는데 병원에 있더라구요. 거기서 창자를 한 뼘쯤 잘라냈죠. 지금 나 쥐약을 먹고 있는 겁니다, 날이 날인지라 피할 수가 없어서.』
『어이구, 그럼 잔 내려 놓으세요. 음료수를 갖다 드릴게요.』
일권이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서며 사내의 잔을 빼앗으려 하자 그는 재빨리 피하며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수염에 묻은 술방울을 훔치며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 아시죠? 그는 당대의 주선(酒仙)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매긴 주당의 단수(段手)가 있는데요, 무려 열여덟 단계로 나눠지죠.』
턱수염은 대뜸 호주머니에서 사인펜을 꺼내더니 바닥에 내려놓은 케이크 박스에 일필휘지로 어려운 한자들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1. 불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지는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겁내는 사람.
3.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혼자 마시는 사람.
5. 상주(商酒) : 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마시는 사람.
6.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
7.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8. 반주(飯酒) : 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9. 학주(學酒) : 술의 참맛을 배우는 사람.
10. 애주(愛酒) :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11. 기주(嗜酒) : 술의 미에 반한 사람.
12.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13.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14.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15.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16.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17. 관주(關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18. 폐주(廢酒) :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그가 18 단계의 주당을 써내려 갈 때 다른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필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당의 종류가 저리 많은가 싶은 호기심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도 그의 한자 휘갈기는 손맵시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18등급 폐주까지 갔다가 관주로 강등당한 놈이지요. 하지만 오늘 밤은 15등급 석주 선에서 즐길 생각이니 권치도 말고 말리지도 말고 그냥 자작 자음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시범을 보이겠다는 듯 스스로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옆에 앉은 스웨터의 여자가 금세 울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턱수염은 정말 술맛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화숙이 빙긋 웃더니 턱수염에게 건배를 청했다.
『10단계 애주부터 진정한 주단(酒段)이 주어지죠. 애주는 1단 주도(酒道), 기주는 2단 주객(酒客), 탐주는 3단 주호(酒豪), 폭주는 4단 주광(酒狂), 장주는 5단 주선(酒仙), 석주는 6단 주현(酒賢), 낙주는 7단 주성(酒聖), 관주는 8단 주종(酒宗), 폐주는 9단이므로 입신(入神)이라 일컬어야겠죠? 어때요, 이 정도면 술상대로 인정해 주실 만하잖아요?』
화숙도 사내가 적어 놓은 18단계의 한자 명칭 옆에 또박또박 9단의 단위를 덧붙이며 장단을 맞추었다.
턱수염은 불의의 일격을 맞은 사람처럼 경악했다. 일권도 그녀의 재치에 놀라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화숙은 태연했다. 화류계 생활이 몇 년인데 그 정도의 한담(閑談)은 전공필수 과목으로 이수한 지 오래라는 표정이었다. 『저도 따지자면 아마 4, 5단쯤은 되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오늘은 폐주의 경지를 구경해 보고 싶네요. 사는 게 너무너무 즐거워서 말예요. 자 건배해요,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우리들의 사랑을 위해서!』
화숙이 일권에게도 건배를 청했다. 일권은 그녀의 오버 액션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건배하세요, 은비 언니와의 재회를 위해서.』
그녀가 부른 이름에 일권은 화들짝 놀랐다.
은비와의 재회를 위하여?
그의 눈빛이 반짝했다. 그렇다면 일단 건배하고 볼 일이었다.

바다는 소리 없이 섬의 가장자리를 삼키며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의 지프는 백사장과 개펄의 경계에 아슬하게 놓여 있었다. 거기가 바닷물을 밀어내는 섬의 마지노선이었다.
지프 옆에 돔형 텐트를 쳐놓고 그는 그 안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중이었고, 그의 시선과 같은 방향으로 낚싯대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상미는 백사장의 둑길 그늘에 숨어 그를 계속 지켜보는 중이었다.
바닷가의 미행은 고역이었다. 코트를 걸쳤는데도 바닷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언제까지 저 사람을 엿볼 것인가.
그녀는 철수 시점을 선뜻 정하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이동하는 상태라면 언제까지라도 뒤를 쫓겠지만 턱하니 자리를 잡고 돌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는데 하염없이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한 마리라도 낚으면 돌아서는 거야.
그녀는 스스로 시한을 정했다.
그가 낚싯대를 꺼내는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었다. 그의 긴 여행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밤낚시였다니 참으로 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지프가 해변을 헤쳐 갈 때만 해도 저 백사장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을 줄 알았었다. 밤낮으로 여자 없이는 못 사는 저 사내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뜬금없이 밤낚시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어쨌거나 텐트까지 설치해 놓고 낚싯대를 드리워 놓았으니 그는 꼬박 밤을 샐 심산인 거였다.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올나이트는커녕 한 시간도 그렇게 버틸 체력이 없었다. 그래서 더도 말고 한 마리만 낚는 걸 보면 자리를 뜰 작정이었다. 해수욕장 주변의 민박집 하나를 잡아 뜨끈한 아랫목에서 한숨 붙이고 나와도 그는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거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의 낚싯대엔 망둥어 새끼 한 마리도 기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쯤 시간을 허비했으면 포인트를 옮겨 본다거나 미끼를 확인해 볼 만도 하거늘 그는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 했다.
차로 돌아온 그녀는 시동을 걸고 히터를 가동시켰다. 통풍구에서는 바깥 공기보다 더 찬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민박촌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몇 안 되는 민박집은 이미 방마다 만원이었다. 대문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나오는 연인들을 보며 상미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벌써 일주일 전에 예약이 끝나 버리쥬.』
걱정했던 대로 어디에도 빈 방은 없었다. 웃돈을 얹어 준대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모든 민박집을 차례로 돌고 나서 다시 매봉 해변으로 빠져나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매봉 주변의 아베크족들은 죄다 승용차 속으로 숨어들었다. 승용차들마다 꼬리에서 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긴 히터를 켜지 않고 이 칼날 같은 추위를 견디기는 힘들 거였다.
그녀도 차의 사방문을 걸어 잠그고 운전석에 길게 누웠다. 차안은 금세 온기로 덥혀졌고 유리창엔 뿌옇게 물안개가 서렸다. 물안개의 장막 속에서 그녀는 노곤한 가면상태에 빠졌다. 물먹은 솜처럼 묵직한 육체에서 스르르 의식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잠들면 안 돼!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세웠다. 히터를 켜 놓은 채 잠들면 몇 시간 후 질식해서 죽고 말 테니까.
그녀는 간신히 수면의 유혹에서 벗어나 차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다시 이동선의 텐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전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그의 지프 뒷전까지 접근해 그의 동태를 살폈다.
차체는 바람을 막는 데 유용한 구실을 해주었다. 지프의 범퍼 뒤에 숨어 고개를 내밀자 그의 옆얼굴이 부각되었다.
얼어붙은 듯한 납빛 얼굴. 텐트 폴대에 매달아 놓은 랜턴 불빛이 푸르스름한 까닭도 있겠지만 겨울 바다에 나앉은 사내의 분위기는 황량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 지켜보면서 그녀는 그가 낚시에 몰두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앉은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었다. 낚싯대는 꿈을 낚기 위한 도구처럼 보였다. 마치 호흡마저 정지된 동상 같았다.
상미는 문득 그의 시선 앞으로 걸어나가 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 서 있어도 그가 보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부린 왼발이 저려왔다. 차의 범퍼를 짚고 천천히 몸을 세운 뒤 마비된 왼발을 끌고 뒤쪽으로 몸을 숨기려는데 그만 발자국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부스스한 얼굴로 지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시선보다 한 발 먼저 지프의 그늘로 숨었다. 그리고 지프의 장식품처럼 바싹 달라붙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연화! 차 뒤에 숨어 있는 거 알고 있어. 왜 이런 곳까지 따라왔지?』
그의 음성이 날아오자 상미는 등골이 오싹해 굳어졌다.
어떡하나?
이미 술래에게 은신처를 들켜 버린 이상 그 자리에 계속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상태이므로 백사장으로 도주를 결행하여 난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발이 천근처럼 무거워 떼어지지 않았다. 『바보같이 왜 숨어 있는 거야. 어서 나오지 못해.』
낮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재차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 음성에 낚인 것처럼 지프의 전면을 돌아 텐트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동선은 허깨비라도 본 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상미 씨가 여길 어떻게?!』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동선 씨 따라오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아세요?』
『절 왜 따라오셨죠?』
『…….』
상미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그는 즉각 질문을 철회했다.
『추울 텐데 일단 텐트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가 일어나 그녀를 인도했다.
텐트 안은 생각보다 훨씬 아늑했다. 바닥에 방수 매트리스와 담요가 깔려 있어 구두를 벗은 맨발임에도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얼어붙은 다리에 담요를 덮어 주고 그는 다시 입구로 나가 원래의 자세로 주저앉았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몇 차례 뒤돌아보았으나 그녀가 왜 이 멀고 험한 제부도까지 뒤쫓아왔는지, 왜 숨어서 지켜보았는지 시시콜콜 묻지 않았다. 그녀도 구질구질하게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희수가 해우소에 들어섰을 때, 일권은 낯선 여자와 케이크를 앞에 두고 대작중이었다. 멍석 위에 펼쳐진 술상은 어지러웠다. 아마 두어 명의 손님이 함께 마시다 떠난 것 같았다.
『여어, 정희수! 그래도 날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구나. 앉자.』
일권이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맞아 주었다. 낯선 여자도 따라 일어나 목례를 건넸다.
『인사들 하지, 이쪽은 이 카페의 대주주 정희수 씨. 내 후원자이자 유일한 친구죠. 이쪽은 장화숙 씨. 은비를 찾는 데 함께 마음을 써 준 고마운 분이셔.』
희수가 빈자리에 앉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래도 이 시간까지 해우소를 찾아온 손님이 계셨네요. 난 또 혼자 궁상맞게 빈 카페를 지키고 있을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위로해 줄 작정으로 온 거구나? 오려면 좀더 일찍 올 것이지.』
『방송이 있었어요.』
『그래 어쨌든 잘 왔다. 너만은 꼭 와 줄 줄 알았다.』
일권이 서둘러 희수의 술잔을 내왔다.
『마시자! 고요하고 거룩한 밤을 기리며.』
희수는 얼떨떨한 얼굴로 술잔을 받으며 주위를 살폈다. 멍석 바닥에 빈 소주병이 무수하게 세워져 있었다.
『이 많은 술을 대체 누가 다 마신 거예요?』
『음, 오늘 주선과 주태백이 대결을 했다. 여기 계신 선녀분이 바로 주선이야. 이 선녀와 맞잔 때리던 주태백은 방금 전에 들것에 실려 하산했지.』
그가 화숙을 다시 한 번 소개했다. 화숙은 씽긋 웃으며 희수의 턱앞에 술잔을 내밀었다.
『말씀을 들어 이름은 알고 있었어요. 만나 뵈니 기가 죽네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일권 형이 제 말을 했었나요?』
『그럼요. 여태 희수 씨 얘기를 안주 삼아 이 술을 다 마신 거예요.』
『나한테 무슨 얘깃거리가 있다고…….』
『천만에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사건까지 다 들었는데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눈물겹기도 했고요.』
희수는 뭐 그런 말까지 했느냐며 일권을 흘겨보았다. 일권은 그녀의 힐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작년 그 일을 회상했다.
『세상에 너 같은 아이가 어디 있겠냐. 이건 결코 취중에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성모 마리아의 현신을 체험했어. 너는 이 표현을 과장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내 더러운 욕정을 보다못해 남자 손목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네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니?』
희수는 대답 대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랬었다. 작년 성탄절도 오늘처럼 우울하고 외롭고 허전한 밤을 보냈었다. 술에 취한 형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욕망의 언어들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쏟아냈었다.
그 선연한 솔직함은 상대에게 동정을 구하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가슴에 응어리져 곰팡이가 낀 인간의 욕망을 그는 각혈하듯 처절하게 토해냈던 거였다.
그땐 정말 도와 주고 싶었다. 결코 동정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아니 동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형을 위로해 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저라도 가져가요!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인사치레로 건넨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사내의 손길 한 번 탄 적 없는 순결한 몸이었지만 그의 처절한 통증 앞에서 그런 걸 계산할 겨를이 없었다. 정말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그의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도와 주고 싶을 뿐이었다. 저라도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한테 이성의 감정을 느낀 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므로 섹스를 치른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일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수는 그의 진통제가 되어 줄 것을 결심했던 거였다.
『그날 네 말을 듣고 반쯤은 미쳐 버렸었다. 너의 순수한 사랑에 쇼크를 먹었고, 나의 추악한 욕망에 분노가 치밀어 온 거리를 돌아다녔었다. 한강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면 아마 풍덩 뛰어들고 말았을 거야. 새벽까지 불맞은 짐승처럼 길길이 뛰어다니다가 바로 이 멍석에 돌아와 잠이 들었었지. 그때 너도 이 자리에 앉아 있었어. 내가 잠들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 줄 아니? 죽는 날까지 정희수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어. 너의 상냥한 마음과 따뜻한 내면의 빛, 난 그걸 오래오래 지켜 주는 노예이고 싶었어. 자, 이제 어서 마셔라, 내 마음의 주인이시여!』
일권의 고백은 다분히 신파조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파의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절제 없는 마음의 직설이었다.
화숙은 두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예요. 옆에는 희수 씨처럼 맑은 사람이 있고 앞으로는 은비 언니 같은 영원한 사랑이 있고, 저는 천상 뒤쪽에서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걸로 만족해야겠네요.』
일권이 그녀의 말에 감탄했다.
『맞습니다,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입니다.』
그가 또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서 희수에게 말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너한테 큰 은혜를 받았었는데 올해는 이분 장화숙 씨가 또 큰 선물을 가져다 주셨다. 은비의 소식을 가져왔거든.』
『네에,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고. 은비가 일본에 있대. 모레 일본 비자신청을 할거다. 당일로 발급된다니까 글피면 출국할 수 있겠지. 일본 열도 구석구석을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은비를 찾고 말 거다.』
『축하해요, 형』
『갔다와서 네 복수를 해줄게.』
『제 복수라구요?』
『이동선, 그 바람둥이 자식 있잖아. 내 그 동안 말은 안 했어도 칼을 갈고 있었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를 울린 사기꾼을 그냥 방치할 수 없지.』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사람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천만에, 네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야. 그냥 잊고 마는 것 외에는.』
일권은 두고 보란 듯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희수는 그 문제를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적당한 술기운이 그의 의협심을 자극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먼 곳에서 아련하게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상미는 그 소리로 새벽을 짐작했다. 그러나 어둠은 여전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움직여 텐트 안을 살폈다.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견고하게 여미어진 텐트의 출입문을 열었다.
지퍼가 열리자 바로 사내의 등이 보였다. 그는 낚시의자에 앉은 채 여전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랜턴 불에 비친 바다는 희끄무레 빛나고 있었다. 그건 바닷물이 아니라 등을 드러낸 개펄이었다. 바다는 썰물이었다. 낚싯대 스무 개를 이어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까지 이미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집스럽게 낚싯대 앞에 앉아 있었다.
『춥지 않으세요?』
상미는 텐트 밖으로 나와 그의 곁에 앉았다. 그가 마른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희수 말이 맞군요. 뉴질랜드에서 묘한 낚시꾼을 만났었대요. 호숫가에서 조우했는데 밤새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찌만 보더래나요? 희수는 참 별난 사람이다 생각하고 그냥 혼자 잠들었다더군요. 근데 저는 텐트 안에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그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휘네스 한 개비를 꺼내 물고 긴 연기를 토할 뿐이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어요. 그래도 제가 여기까지 왜 따라왔는지 한 번쯤은 더 물어 볼 줄 알았는데…….』
그가 또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녀도 피식 웃고 말았다.
『계속 듣고만 계실 거면 저도 말하지 않겠어요. 저만 바보 같잖아요.』
『할말 있으면 해요.』
『제가 낚시를 방해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오, 낚시는 진작 끝이 났어요. 바다가 저렇게 도망쳐 버렸는데.』
상미는 다시 한 번 바다를 돌아보았다. 멀어진 바다 저 켠에 통통배 한 척이 어두운 수평선을 가르고 있었다.
『희수를 돕고 싶었어요. 나한테는 피붙이 자매보다 가까운 친구거든요. 동선 씨 알게 된 이후로 걘 사람이 달라져 버렸어요. 언제나 쾌활하고 적극적이던 애가 몽유병자처럼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는 거예요. 물론 똑똑한 친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거뜬히 이겨내겠지만 지금 무척 힘들어 보이더군요. 제가 희수를 돕고자 여기까지 나선 마당이니까 한 가지 여쭤 볼게요. 동선 씨는 도대체 희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죠?』
『좋은 여자예요. 표현하자면 산소나 물, 땅 같은 여자…….』
『그 말을……오래 같이 있고 싶은 상대로 해석해도 되나요?』
『정답에 가깝겠군요.』
『희수도 동선 씨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어떡하실 거죠?』
『고마운 일이죠.』
『지금 이런 자리에서 가당찮게 결혼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를 그리워한다 해도 저는 희수와 동선 씨의 교제를 반대하는 입장이니까요. 서로 스쳐가는 인연인데 마음의 전극이 서로 잡아당겨 불꽃을 튀긴 건 누구라도 말릴 수 없는 일이죠. 그렇지만 한 캡슐에 나란히 꽂혀 에너지가 소진할 때까지 함께 할 운명이 아니라면 불꽃은 한두 번으로 끝내는 게 순리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 생각을 했죠?』
『두 사람 배터리의 용량이 다르니까요.』
『재미있군, 배터리의 용량이라?』
그가 모래밭에 담배를 꽂아 껐다.
『뿐만 아니라 용도도 다르고요.』
상미는 단정적으로 말한 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머리를 기울여 양 무릎에 기댔다.
『왜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관계하면서도 혼자 살고 계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
그녀의 기습적인 도발에 그는 움찔했다. 그러나 과히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의 대꾸가 없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희수도 당신의 화려한 사생활에 대해서 알 만큼 알고 있어요. 그 사실을 당신은 모르셨겠지만 말예요. 걔가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시죠?』
『…….』
『아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이 거쳐간 여자들을 차례차례 만나고 있는 중이죠. 이쯤 되면 피차 신비감은 사라진 거 아닌가요? 이제부터라도 희수를 풀어 주셔야 해요.』
『내가 그녀를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해요?』
『동선 씨의 존재 자체가 올가미예요. 걔가 스스로 얽매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죠.』
『듣기 섭섭하군. 난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묶어 본 적이 없어.』
그가 정색하고 말했다. 계속해 오던 존댓말의 어미를 생략한 걸 보면 몹시 불쾌한 모양이었다. 상미는 내친 김에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였다.
『그건 테크닉이라고 봐야겠죠. 교묘하게 구속을 벗어나면서 목적은 충족하는 플레이보이의 철학! 저는 지금 당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희수와 당신의 불균형을 꼬집으려는 의도 외에는 없다고요.』
『당신은 희수와 나 사이를 가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군.』
『죄송해요. 하지만 희수를 위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잖아요?』
『여자들의 우정이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여기서 알았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군요.』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이런 대자연에 달랑 둘이서만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가 다른 사람 이야기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건 좀 억울하지 않아?』
『……?』
둘의 눈빛이 부딪쳤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덤덤한 눈길에 감춰져 있는 위험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 절 유혹하는 건가요?』
『…….』
『전 희수 친구예요.』
『…….』
『결혼을 한 유부녀구요.』
『…….』
눈빛이 강렬한 쪽은 상미였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말을 더 많이 한 것도 그녀 쪽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승부 따위는 무의미한 거였다.
『나를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눈빛이야. 이제 곧 날이 밝아 오겠군.』
그가 바다 쪽을 바라보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곧 날이 밝아 오겠군.
그녀는 텐트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그가 한 말뜻을 되뇌고 있었다.
그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입구의 휘장을 젖힌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잠깐 동안 망설이다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남녀가 돌연히 사라진 백사장에 바람이 달려들었다. 바람의 입김에 텐트가 흔들렸다.
아아!
바람소리에 여자의 흐느낌이 묻혔다.

텐트의 입구에 여명이 비쳤을 때야 그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십대의 소녀들이 우상을 향해 내지르는 갈망의 괴성이라 해도 좋았다.
이 묵직한 통증을 그녀는 무척이나 갈구했었다. 이 찬란한 쾌감의 뇌관을 폭발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도화선을 찾아다녔었다.
그의 손길은 집요했다.
섹스는 정(精)과 기(氣)를 나눠 갖는 거지.
그는 전희를 베풀면서 그렇게 속삭였다.
여기, 여기, 또 여기 이런 곳에 그대의 정(精)이 고여 있어. 여기에 불을 지피면 기(氣)를 화하는 거야.
그녀는 온몸 구석구석을 자극하는 그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맞았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그가 말하고 만지는 곳 모두 화약고였다. 화약고에 붙은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가 진화되고, 그 숯덩이에서 다시 불씨가 살아나 폭발하고 다시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실제로 예상하지 않았던 곳에서 엑스터시를 경험했다. 그의 손길이 어쩌다 팔의 안쪽과 겨드랑이를 쓰다듬었는데 아찔한 정점까지 쾌감의 바늘이 튀었던 거였다.
거기뿐만이 아니었다. 입과 콧날, 목과 어깨, 귀와 머릿결, 무릎과 종아리, 두 다리의 예각 사이에 진 그늘 전체. 모든 피부 조직이 섬세하게 바늘을 튕겨 올렸다.
이런 적은 결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놀라고 있었다. 그는 정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정과 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 같았다. 그는 그걸 더 확실하게 인식시키려는 듯 이따금씩 토를 달았다.
기는 곧 에너지야. 그대가 마시는 호흡은 자연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그대 안에 축적된 에너지에 정념이 가해지면 힘으로 나타나게 돼. 꼭 덩치가 크다고 힘이 센 건 아니잖아? 정력과 기력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거지. 기를 모아 봐. 모은다는 생각만 해도 기가 움직이게 마련인 법이라고.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섹스를 치르면서 물리강의를 듣는데 왜 성감이 더 달아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달콤한 밀어보다도 그런 강의들이 몇 배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절도와 탄력 넘치는 공세로 그녀를 코너에 몰아 세워놓고 경고했다.
여기서 정신을 차려야 해. 둘이 동시에 터뜨리지 못하면 안 돼. 먼저 터지는 쪽이 치명적으로 기를 상대에게 빼앗기게 되니까.
잔인한 말이었다.
상미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도대체 언제 작열할 것인가.
그러나 그의 사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세살바기 소녀가 바지에 오줌을 저리듯, 참다참다못해 스스로 폭발하고 말았다.
아, 이래서 기를 빼앗기는 건가?
그녀는 아득해지는 의식을 애써 붙잡지 않았다. 체내의 모든 기를 탈취당해 빈 껍데기 허물만 남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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