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번역 [양판소]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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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1,677회 작성일 17-02-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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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혼란의 시대. 혼란의 시대를 수습하는 것은 영웅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마왕의 강림. 마물들의 침공. 몬스터들의 습격. 언데드들의 부활. 세계는 어지럽기만 했다. 사람들이 이런 혼란에 숨이 막힐 듯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영웅을 그리면서 기다렸다. 누군가 영웅이 와서 이 혼란을 수습해주지 않을까 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이 영웅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뿐.

그리고 그들의 바람처럼 한 영웅이 나타났다. 그 출신도, 가문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놀라운 힘과 지도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그가 한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 홀로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 여러분은 모두 영웅이 될 수 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을 도와 이 혼란을 수습할 자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래로 모였다. 언데드를 물리치고 몬스터들을 돌아가게 했다. 마물들을 퇴치하였으며 마왕을 물리쳤다. 세계는 평온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래, 평온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갈 때의 마음과 돌아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혼란을 대충 수습하고나자 기존의 지배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휘하에 거느린 영웅을 질시하기 시작해버린 것이다. 영웅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에 화를 내었다. 치졸하기 그지없는 공작들과 험악한 소문이 영웅을 몰락시키기 위해 나돌아다녔다.

‘괜찮아. 이것도 평온해졌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

어느 저녁, 산 중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웅은 그렇게 말하면서 쓰게 웃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이 세계의 평화를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지 15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조용히 은거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좋겠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영웅은 진정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끝내 자신을 따라오려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출신 국가로 돌려보내고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은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지배자들이 바라던 바였다. 그래, 그가 하려던 은거가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은거하려고 했던 것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영웅은 호색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 영웅은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여자를. 그렇기에 미모와 지성, 힘을 갖춘 여자들은 이 여자에게 쏟아지는 영웅의 사랑을 질투했다. 하지만 붙잡을 길이 없다. 어찌해야 할까. 이 여성들의 냉철한 이성은 간단한 결과를 도출했다. 세계가 혼란스러워지면 된다. 그녀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이 세계에 혼란을 불러왔다.

‘이거……나 때문인가?’

세계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영웅이 한 말이라고 한다. 그 때 그의 표정은 황당함과 씁쓸함이 적당히 버무려진 것이었다고 한다.

영웅은 다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이번엔 전과 같은 혈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 세계에 저주를 걸기를 원하는 드래곤을 만났다. 드래곤은 저주를 걸기를 그만두었다. 처음에 건 저주는 취소하지 못했지만.

숲에서 나와 왕국을 세우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면서 왕국에 싸움을 건 엘프들을 만났다. 엘프의 여왕은 엘프들에게 다시 숲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영웅을 욕하는 지배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다크엘프가 있었다. 몇 개월의 추적 끝에 그녀를 만난 영웅은 그녀에게 살인을 그만두게 설득할 수 있었다. 그 후로 그 다크엘프는 그의 곁에 남았다.

신의 명령이라고 말하며 악신의 교단과 전쟁을 선포한 성녀가 있었다. 영웅은 이 성녀와 만나서 신의 명령을 다시 받아내었다. 전쟁이 아닌 교화라는 방법으로.

마법으로 각지에서 소란을 일으킨 마법사가 있었다. 영웅은 이 마법사를 만나 그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마법사는 영웅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제국의 여황제는 대륙의 통일을 외치며 군대를 일으켰다. 그 군대가 출정하기 전 여황제는 영웅을 만날 수 있었다. 여황제는 그 군대를 움직여 몬스터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웅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긴 하지만 영웅은 자신이 사랑하던 평범한 여인과 함께 이 여섯 명을 아내로 삼았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키겠다는 그녀들의 눈물 젖은 위협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제국의 황제는 7명의 아내와 49명의 첩을 두게 되었다. 물론 그녀들이 인정한 정부까지 합하면 가볍게 세자리 숫자로 넘어가기도 하겠지만 이것으로 영웅의 여자는 확정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만족할 수 있었다. 심지어 기존에 영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평범한 여인까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양판소]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1話 가출하겠습니다. 찾지 말아주세……으, 으악! 이것 놔아!
 

1.

“왜 그런지 모르겠다니. 이 인간 둔감하기로는 세계 최강이구만.”

내 이름은 진.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제국의 황태자다. 나이는 14세. 영웅인 아버지와 하이엘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행운아. 영웅이라는 이름값을 하는지 줄줄이 딸만 낳다가 겨우 태어난 아들이기도 하다. 뭐, 내가 재능이 부족하다면 딸 중에 하나를 골라서는 황위를 물려주어도 되겠지만 나에게는 불행, 아버지에게는 다행이게도 나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능이 그대로 발현되었다. 덕분에 보통 인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배우고 있음에도 천재급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중. 때문에 황위를 두고 누이들과 다투어야 할 일은 없겠지만 영웅의 아들이라는 포지션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는 인간이 나라는 사람. 진이라는 인간이다.

“뭐, 주인공이 다 그렇지 뭐.”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아버지는 이고깽. 그리고 그 이고깽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환생한 인간. 다행히도 아버지는 이고깽치고는 꽤나 개념있는 편이라 적당히 깽판치다가 은거하려고 했지만 주인공 보정으로 주어진 페로몬에 낚인 여자들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실패. 수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황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백단위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암만 이고깽이라도 그렇지 정X까지 절륜일 필요는 없잖아.’

그 이유는……뭐, 그런 거다. 게다가 테크니션.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다. 백단위라고 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은 의무방어전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하겠다. 그 이상은 황제로서 보아야 할 정무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 덕분에 최근 어머니들도 내가 얼른 어른이 되어 황위를 물려받기를 고대하는 모양이다. 이유는? 내가 꼭 입으로 말해야겠나.

어쨌거나 이계로 날아온지 40년, 황제가 된지 25년째가 다되어가는 아버지는 매일매일 나에게 찾아와서는 이런저런 지도를 해주고 사라지기 일쑤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으로 보이겠지만 대강 모든 것을 눈치챈 나에게는 ‘얼른 이 놈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나는 하렘라이프를 즐기겠다!’라고 외치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세계에 환생한 뒤로 유일하게 정을 붙이고 살고 있던 어머니도 ‘얼른얼른 커서 훌륭한 황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속이 뒤집힌다. ‘적어도 아들에 대한 따스한 배려같은 건 없는 건가요!’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

“후우.”

업무와 나에 대한 지도. 사신들의 접대. 마지막으로 아내들과의 휴식(?)으로 바쁜 아버지가 틈틈이 써놓은 자서전을 읽다가 화가 치밀어올라 책을 덮어버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는 계획이다.

“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우리 황태자님께서는.”

놀래라. 누님이구나.

“몇 번이고 말씀드리는 거지만 남자애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 좀 해주세요. 누님.”

“하지만 노크해봐야 소용없잖아. 무엇이고 집중해버리면 다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우리 진은.”

이 누님은 셋째 누님으로……아버지에게 홀딱 반한 드래곤의 딸이다. 말하자면 혼혈. 드래곤과 인간 사이에 혼혈이 태어날 수 없다는 규정을 ‘우리 남편은 이계에서 온 사람이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 세계의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꼼수로 돌파하여 낳은 아버지의 딸이다. 딸을 낳을 때에도 보면 알겠지만 계책을 짜는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분의 딸이라 이 누님도 계략에 능한 분이다. 굉장한 재능이라고 보아도 좋겠지만……아쉽게도 나를 놀린다거나 놀려먹기 좋은 11번째 누님을 놀리는데 주로 그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 흠이다. 그나저나 이름이 뭐였더라. 애칭은 분명히 린이었는데 말야.

“뭐야. 또 내 이름을 잊어버린 거야? 너무해!”

“솔직히 누님들도 서로의 이름 전부까지는 다 기억 못하잖아요.”

“나는 아니지만……하긴, 너무 많긴 해. 고생이 많구나. 진도.”

“그렇죠.”

부인이 백단위로 있다보니 딸도 백 단위. 그 많은 누이들의 이름을 다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서로 애칭을 지어주고 그 애칭으로 부르기 일쑤인데……그러다보면 서로의 이름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이건 망각하지 않는 드래곤의 혈통을 타고난 셋째 누님이라면 기억하겠지만.

“그나저나, 왜 오셨어요?”

“용건이 없으면 오지 말라는 거니? 차갑구나. 우리 진은. 어릴 적의 그 다정하고도 귀엽던 진이 이렇게 차가워져버렸어. 훌쩍.”

“아니, 그게 아니라……눈꼬리에 침 묻히지 마세요. 더러워요.”

따악.

“아니, 누님의 침은 성수처럼 성스럽습니다.”

“그렇지.”

거짓으로 눈물을 흘리는 현장을 들킨 때문인지 누님은 내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어릴 적부터 그랬지만……누님은 변명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려나가면 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다. 물론 나에게만.

“부어올라버렸네요.”

“그렇네.”

일단 영웅과 드래곤의 혼혈이라 기본적인 육체스펙이 누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셋째 누님의 꿀밤은 역시 영웅의 아들이라 보통 사람과는 다른 내구력을 가진 내 몸에도 혹을 만들어내었다.

“힐링Healing"

뭐, 이렇게 금방 치료할 수 있으니 딱히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어쨌든 왜 오셨어요?”

“아버지께서 부르신데.”

“저를요?”

어쨌거나 평소처럼 대화를 나눌 것도 없이 아버지가 부른다는 이야기에 알현실로 간다. 아버지가 불렀다니 가는 것이 자식의 도리.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로 불렀을까. 메이드복을 입고 나를 안내하는 시녀의 뒤를 따라 알현실로 들어선다. 그나저나 이고깽인 아버지가 디자인한 복장이라서 그런지 악취미구만. 하긴 귀족에게 유행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회심작을 보면 더더욱 한숨이 나오겠지만. 한숨을 쉬면서 알현실로 들어선다.

“고해 올릴까요?”

“네, 간단하게 부탁드립니다.”

알현실에서 세라복을 입은 여관女官 하나가 방긋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무심히 넘긴다. 어째서 관복이 세라복이라거나 블레이저 교복인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자. 이게 다 이고깽의 폐해다.

“위대한 대륙의 패자 세인님의 아드님이시자 아름다운 하이엘프이시자 엘프의 여왕이신 아라니엔님의 맏아들이시자 이 제국의 황태자이신 진 님께서 제국의 황제이신 세인님께 알현을 청합니다.”

아아, 오늘은 무지 짧았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인상을 쓰면서까지 ‘간략하게 해. 간략하게.’라고 협박한 효과인지 무지 짧았다. 솔직히 나라면 ‘황태자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라고 말하고 말겠지만 구습에 얽매인 이 대륙의 사람들은 여기까지 줄이는 것이 한계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하긴 과거에는 한 번 청하는데 10분 정도가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많이 줄어든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들라는 말이다.

“드시지요.”

“네, 저 종소리만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폐하께서 이 종소리를 쓰라고 하셨으니까요.”

이고깽이라서 그런가. 학교 차임벨을 신호로 쓰다니. 지겹지도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큼성큼 걸어 알현실로 들어선다. 넓고도 넓은 알현실. 그 끝에 아버지라는 작자가 앉아있다. 그 옆에는 어머니와……원래 이 제국의 여황제이셨던 분, 엘리자베스님이 앉아계셨다. 그 옆에는 다섯째 누님이 - 엘리자베스님의 딸이다 - 앉아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일단 속마음이야 어떻건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냅다 용건부터 꺼냈다.

“아들아. 너 마를렌과 결혼해라.”

“그게 누굽니까?”

일곱 살 때부터 계속되어온 정략결혼 신청(제의가 아니다. 신청이다.)에 질렸던 나는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되물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눈물을 흘리는 다섯째 누님. 아니 왜 저러나. 갑작스런 누님의 눈물에 안절부절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들아. 가끔 생각하지만 넌 나를 너무 많이 닮았구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거나.”

이 사람 보게.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만.”

순간 허공에서 나와 아버지라는 이고깽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눈싸움하려는 의지가 없는지 얼굴을 돌린 아버지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이야기한다.

“뭐, 내가 좀 심하긴 했지만. 쩝. 네 다섯째 누이 말이다. 네 다섯째 누이랑 결혼하라는 말이다.”

아, 마를렌이 다섯째 누님의 이름이셨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셨어야지.

“난 네가 누이들 이름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뭐, 그건 제 잘못이기는 합니다만.

“누님 죄송해요. 렌이라고 했으면 알아들었을텐데 어쨌거나 죄송해요.”

“훌쩍, 아냐.”

어쨌거나 눈물을 흘리던 누님에게 다가가서 달래주고 난 후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그러니까 마를렌과 결혼하라는 말은 다섯째 누님과 결혼하라는 말. 그러니까 누이와 내가 결혼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같은 배다른 남매가 결혼하라는…….

잠깐만요.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습니까! 암만 이고깽이 개념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온다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뭐, 제국의 혈통과는 관계가 없는 네가 황위에 오르면 안된다고 태클을 거는 귀족 녀석들이 많아서 말야.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때려잡기도 귀찮고 해서…….”

내 반응에 찔리는 것은 있는 듯(그나마 개념은 있는 편이니까) 손짓발짓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변명하기 시작한다. 뭐,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실대로 말하시죠. 사랑하는 딸을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기 싫으신 거라고.”

“아……뭐, 그런거지.”

마음을 알아주어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푹 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웃는다. 뭐, 황제 노릇을 오랫동안 했다고는 하지만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왜 ‘둔감한 녀석.’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내 귀에 안 들릴 리가 없거든? 나중에 수련하면서 좀 다툴까요? 응? 다툴래요?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 듣기는 싫거든?

“어쨌든 결혼해라. 너도 저 멍청한 귀족들에게 네 누이를 시집보내기는 싫을 거 아니냐.”

그렇긴 하다만.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꼭 해야 합니까?”

“응.”

“안하면 안될까요? 귀찮은 황제 노릇 하기도 싫기도 하고…….”

모두의 인상이 팍 찌그러진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즐거운 은둔 생활’이 멀어지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다섯째 누님께서는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가요……아, 황제가 되어버리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야 할 확률이 높구나.

“둔감한 녀석.”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싫습니다만.”

아들과 아버지의 눈싸움도 잠시 둘 모두 고개를 돌리고 투덜거렸다.

“네가 그렇게까지 거부하겠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잠시 씩씩대던 아버지는(아무래도 수련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붙으면 건물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까 둘 다 참는 중이다) 최후의 수단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엄포를 놓았다. 생각? 무슨 생각?

“네 알몸 사진을 네 누이들 전원에게 뿌리겠다!”

그거 이미 셋째 누님이 쫘악 돌렸거든요? 남 목욕하는 사진 찍어서 대체 뭐하려는 거야.

“그, 그렇다면 네가 5살 때 오줌을 싼 모습을 찍은 사진을!”

다섯 살 때 오줌 안 싸본 사람도 있나?

훗, 하고 웃으면서 ‘전 세계에 한 번 돌려보시죠. 누가 더 손해인가.’라고 아버지를 도발한다. 이고깽이라서 그런지 무지 유치한 방법으로 협박하려고 하다니. 실망이다. 흥.

그런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무엇인가를 생각한 듯 깨물고 있던 입술을 끌어당겨서 미소를 지은 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을 내놓았다.

“이, 이녀석 강하구나. 그렇다면 네 놈이 얼마 전에 린의 사진을 앞에 두고 자X하던 동영상을 뿌리겠다!”

뭐, 뭐라!

“TV ON!"

"서, 설마.“

갑자기 허공에서 재생되는 나의 자X 생라이브쇼. 그것에 기겁해 다섯째 누님의 눈을 재빨리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으, 으윽.’

탁탁탁.

‘내가 왜 황태자 따위로 태어난 거야. 크윽.’

탁탁탁.

‘린, 린.’

좌절한다.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 이젠 다섯째 누님은 나를 환멸할 거야. 훌쩍.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절한다면 내가 이것을 전 제국과 세력이 미치는 모든 곳에 뿌리도록 하겠다. 분명히 이렇게 된 거 배를 째겠다고 할 참이었지? 후후훗.”

“이봐요!”

그, 그것만은! 누이에게 욕정을 품은 폐륜아라는 말을 듣기는 싫다고!

사악한 미소를 지은 아버지에게 급히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한다.

“참고로 여기에 있는 세 사람에게는 사본을 나누어주도록 하지. 훗훗훗.”

져, 졌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 그것만은…….

“결혼할 거지?”

“네. 네. 훌쩍.”

제길. 치사하잖아.

2.

누워서 생각해도, 일어나서 생각해도, 엎드려서 생각해도 뭔가 분하다. 생각해보면 그게 공표되거나 말거나 내가 다섯째 누이와 결혼하는 시점에서 나는 근X상X하는 잡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 내 자X 생라이브쇼가 방송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하긴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거랑 그런 장면이 생으로 여과없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니까. 한숨을 쉬면서 침대 위에서 뒹군다. 이곳에서의 14년 인생. 이것으로 코가 꿰이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뭔가가 분하다. 게다가…….

“누이에게 욕정을 느끼는 잡놈인가. 나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혈연상으로는 누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누이들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데에 익숙해있던 나는 성숙해져가는 누이들을 보면서 분명히 욕정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 사람들의 시선과 사람들의 생각이. 그리고 후대의 평가가. 그리고 이 멈출길 없는 질풍노도 10대의 욕망이!

‘어른스럽기는 개뿔. 몸 따라 가는 것이 생각인 것 같고만.’

보통 양판소에서 환생한 인물일 경우 어릴 적부터 어른스럽기도 하고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여 꽤나 여자가 많이 꼬인다. 나름대로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설정이긴 하지만 거기에 나는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고?

주변이 모두 누이들뿐이었으니까. 누가 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으려고 할까.

억울하다. 차라리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고민은 안해도 될 텐데.

“암만 생각해도 안되겠다.”

생각의 무한 루프에 빠져서 끙끙대다가 나는 결심했다.

가출하기로!

‘최소한 가출하면 이 문제들은 덮어지겠지.’

희부옅게 터오는 동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깊이 잠들었을 이때가 가장 가출하기에 좋을 때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런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적당히 허름하게 꾸미면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볼 것이니 딱 좋으려나. 생각하면서 황급히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이럴 때 판타지 세계라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 든다. 무한마법배낭에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과 돈을 챙겨넣고, 탈출하기 전에 일단 쪽지나 남겨둘까.

‘가출합니다. 찾지 말아주세요.’

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는 무한마법배낭을 둘러매고 살금살금 비밀통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오기 시작한 시녀들이나 여관女官들의 시선을 생각해서 일단 옷은 비밀통로에서 갈아입도록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사란 인사는 다 받아주며 걷는다. 서두르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어딜가?”

하지만 셋째 누님에게 잡혔다. 뭐, 내가 가출할 거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닌 것 같고 자다 깨서 문을 나서니 내가 있었기에 잡았다는 것 같다.

“잠시 마법 시약 좀 가져오려고요.”

“응, 연구한다고 밤 샜구나. 후아아암.”

새삼 셋째 누님. 린의 옷차림에 눈길이 갔다가 황급히 시선을 떼어야 했다. 잠옷 차림이었다. 자다가 일어났기에 야무지지 못한 옷매무새 때문인지 속살이 슬쩍 보였다. 암만 남자라고는 두 사람밖에 없는 황궁이라고 하지만 옷차림은 제대로 해주세요. 가출한다는 생각을 하자 모든 것이 너그러워진 나는 그런 말을 해주려고 했다.

“오늘 결혼할 신랑이 그렇게 밤을 새면 안되는데 말야. 후아암. 잘 되었다.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어보자.”

“네?”

그러나 갑작스런 린, 셋째 누님의 말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누님의 손이 다가와 내 손을 잡고는 잡아당겼다.

“아아, 드디어 오늘 결혼하는구나. 남동생이 신랑이라니.”

“네? 네?”

뭐야 이 상황은……강한 악력으로 풀 수 없는 셋째 누님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면서도 나는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경축! 황태자 진 맥세인 아슈레이 님과 황녀님‘들’의 결혼]

라는 플랜카드를 보았다. 중간에 천을 끊어서 다시 붙였던 것인지 얼기설기 기워진 플랜카드였다. 게다가 종이로 덧붙인 것인지 ‘들’이라는 말이 굉장히 거슬렸다. 어떻게 된 거지?

“아, 그거? 어제 너랑 렌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애들이 알현실에 난입해서 말야. 그냥 간편하게 황실의 결혼을 한큐에 끝내기로 했어. 잘 되었지? 다 내가 애들을 선동한 덕분이라니까. 에헤헤.”

잠이 덜 깼는지 순순히 대답해준 셋째 누님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나랑 ‘누이들’ 모두 결혼하는 거라고?

“가, 가출할래! 이것 놔아아아!”

“결혼식날에 신랑이 없으면 안되잖아. 못 놔.”

아아, 하늘이시여. 너무하십니다.

나는 하늘을 향해 탄식하고는 셋째 누님에게 붙들려서는 식장으로 끌려들어가야 했다.

누가 나 좀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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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초보낙서쟁이입니다. 잘 봐주세요.
이 글은 명랑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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