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색귀천사] 제Ⅰ장 천사들의 비역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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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4,226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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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귀천사(色鬼天使)∮


제Ⅰ장 천사들의 비역질 (1) - 김 현


**(원편집자 주) 본 글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이책>에 있으며, 관련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재편집자 주) 2001년 01월에 하이텔 XDOOR에 올라왔던 소설입니다.


편의점에서 천사를 만났다. 장마비에 웬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사실이다.
나는 편의점에서 천사를 만났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자칭 천사라고 주장하는 어떤 녀석을 만난 것이다.
그는 편의점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컵라면을 빠개 먹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빠개 먹고 있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냥 라면도 아닌 컵라면을. 수프도 뿌리지 않고 그냥 라면만 부셔먹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런 이상한 행동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냥 모른 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그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은 물론이고 편의점 안에 있던 대여섯 명의 손님들 모두 그랬다.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녀석이었다. 머리는 은색으로 염색을 했고, 양쪽 귀를 모두 뚫었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귀걸이만 아홉 개였다.
손목에는 가죽 팔찌를 스무 개쯤 차고 있었고, 목에는 해골 모양의 앙크를 걸고 있었다.
사람이 포효하고 있는 듯한 그림이 프린팅된 붉은 박스 티에 갈기갈기 찢어진 헐렁한 힙합 청바지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약에 탐닉하고 있는 히피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빛은, 평생 햇볕이라곤 구경도 못 해 본 사람처럼 새하얗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다. 어쨌든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물건값을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계산을 하는 동안 그가 내 등뒤로 다가서 있는 느낌이 들어 나는 지갑이 든 뒷주머니를 손으로 힘껏 누르고 있었다.

"지갑 같은 건 훔치지 않아. 나한테 돈 따윈 무의미하니까."

그의 목소리에 놀라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계집애처럼 가는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서 있었다.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키가 컸다. 나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뭡니까?"

나는 지그시 주먹에 힘을 모으며  몸을 긴장시켰다. 여차하면 한 방 먹여버릴 심산이었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대로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냐 싶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원체 막가는 녀석들이 많은 세상 아닌가. 특히 이 녀석은 옷차림이나 생김새부터가 영 마음에 안 든다.

"나 소매치기 아니라구. 좀 전에 그런  생각 안 했어? 그리고 옷차림은, 급하게 오다 보니까 되는 대로 대충 입어서 그래.
요즘 애들 사이에서 이런 복장이 유행이라며? 아니, 이미 한 물 간 패션인가?"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나는 흠칫했다. 내 생각을 읽고 있었단 말인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그런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 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계속 나를 따라왔다. 이런 엿 같은!

나는 뛰었다. 난 소매치기가 아니라 퍽치기야. 어느 순간 녀석이 둔기로 내 머리를 후려치며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달려서 집 앞 골목 어귀까지 도착한 뒤에야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가쁜 호흡을 추슬렀다.
눈을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녀석들은 상대방 입 냄새 같은 걸 가지고도 시비를 건다잖아.

"이 봐, 날도 더운데 왜 그렇게 뛰어? 이제 집에 다 온 거야?"
 
나는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녀석이 바로 내 곁에서 씨익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것이었다.
찜통 같은 날씬데도 그는 땀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다.

"다, 당신 뭐야? 왜  자꾸 날 따라오는 거야? 나한테서 뭘 원해?"

나는 들고 있던 비닐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먹을 올려쥐었다.
잔뜩 긴장해 있는 나와는 달리 그는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 근데 어떻게 따라온 거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원하는 게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무슨 소리야? 난 당신한테서 원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
"그 부분에 대해선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 우리 일단 뭘 좀 먹는 게 어때? 나 지금 배가 무지 고프거든? 나 밥 좀 사 줘."

뭐 이런 하이에나 같은 놈이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다음 순간 나는 그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한 분식집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딱히 그가 두렵다거나,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내가 어떤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아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 때 그는 정말 배가 고파 보였고, 그에게 밥을 사 줘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뿐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분식집에서 그는 군만두 세 접시와 쫄면 두 그릇, 떡볶이 한 접시 그리고 비빔밥 한 그릇을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가공할 만한 식욕이었다.

"아, 이제야 겨우 허기를 면했네. 생 라면만 깨먹고 있으려니까 당최 뭔 맛이 나야 말이지.
이 집 음식 맛 괜찮은 거 같은데? 종종 이용해야겠어."

끄윽, 트림을 하며 그는 배를 두드렸다.

"도대체 얼마나 굶었길래 그렇게 많이 먹는 거야?"

"정확히 잘 모르겠어. 사람들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한 몇만 년쯤 되려나? 더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입을 다물고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왜? 하는 표정으로 내 시선을 되받았다. 나는 으음,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혹시 살짝 맛이 간 거 아냐?"

"나 사람 아냐. 천사야."

나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별 희한한 인간들을 다 만나봤지만 자신을 천사라고 생각하는 녀석은 또 처음이었다.
근데 그는 내 웃음이 썩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당신이 나라면 그런 말을 믿겠어?"

"왜 못 믿어? 사실인데."

"난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처럼 생긴 천사가 있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천사가 뭐 이래?
당신, 천사라는 증거 있어? 있으면 한번 보여 봐. 그럼 믿어줄게."

"증거야 많지만 지금은 보여줄 수가 없어.
여기 내려온 지 얼마 되질 않아서 아직 생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하지 않고 있거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뭐 그리 중요해? 중요한 건 믿음이라고, 믿음."

나는 그가 골수 광신도이거나 완전히 맛이 가 버린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음식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따라 나왔다.

"자, 이제 밥도 사 줬으니까 우린 이쯤에서 헤어지자구. 잘 가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어. 당분간 난 너하고 같이 지내야 돼."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당신하고 같이 지내야 돼? 당신, 자꾸 귀찮게 굴면 파출소에 신고해 버리겠어!"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우린 같이 살아야 돼. 왜냐하면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니까 말야.
싫어도 어쩔 수가 없다구."
"누가 그런 명령을 했다는 거야? 설마 하느님이 시켰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너희 인간들은 우리 보스를 그런 식으로 지칭하더군. 하느님이라고. 뭐 그 이외에도 그 양반을 부르는 이름은 숱하게 많지만 말야."

더 이상 그와 언쟁을 벌이다간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는 돌아섰다. 그때 그가 내 옆을 휙 스쳐 앞장서 나갔다.

"이 봐, 어딜 가는 거야?"
"우리 집."

미친놈, 하고 소리치며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바윗덩어리를 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욱이 그의 체온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마치 얼음처럼.

"자꾸 그렇게 저항해봐야 소용없어. 한번 정해진 일은 쉽게 바뀌지 않아. 나도 너랑 지내는 게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그렇게 해서 그는 결국 내 자취방까지 쫓아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선 뒤 그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내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포르노 잡지와 테이프 등속을 찾아냈다.

"그 동안 이런 걸 보면서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되게 조악한 것들이군, 그래."

그는 잡지와 테이프를 들어  보이며 손으로 자위행위를 하는 시늉을 했다. 달달달달, 하는 소리까지 내가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거 제자리에 내려놓지 못해?"

"너만 하는 짓도 아닌데,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괜찮아. 내가 널 찾아온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니까."

"…?"

그는 테이프를 비디오 데크에 꽂은 뒤 TV를 켰다. 이어 화면 속엔 거칠게 섹스를 벌이고 있는 두 백인 남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주시했다. 나는 다급하게 리모콘으로 TV를 껐다.
더 이상 제 집에서처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왜 그래? 한창 재미있는 장면인데…"
"당장 나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이렇게 니 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완전히 미친놈 아냐, 이거?"

그 순간 그가 내 멱살을 움켜잡으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버둥거렸다.
한동안 지긋이 나를 노려보던 그는 손등으로 내 볼을 두어 차례 툭툭 치고 난 뒤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컥컥 숨을 몰아쉬었다.

"이 봐, 친구.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난 위대한 보스 양반의 명령을 받고 네게 파견된 천사야.
아니, 호칭 따윈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우린 앞으로 같이 지내야 돼. 그러면서 넌 내게 도움을 받게 될 거야."

"도, 도대체 내게 무슨 도움을 준다는 거야?"

"네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 생각해 봐, 그게 뭔지."
"몰라. 난 그런 거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주는 거야."
"병신! 허구한 날 저런 싸구려 테이프를 보면서 딸딸이나 쳐대는 놈이 왜 자기가 원하는 걸 몰라?
네 녀석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만 않았어도 내가 널 찾아오는 일 따윈 없었을거야. 따지고 보면 네가 날 부른 거라구.
알겠냐, 이 멍청아?"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인간이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그가 내 앞에 쭈그려 앉으며 한심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아직 숫총각이라면서? 그게 사실이냐?"
"그, 그걸 어떻게…?"
"이런 갑갑한 중생을 봤나. 그 나이를 먹도록 지금까지 뭐했냐?
가랑이 사이에 그건 오줌 눌 때만 쓰라고 만들어 붙여준 건 줄 아냐? 한심한 놈. 쯔쯔!"

어린아이에게 하듯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에 대한 데이터는 대충 훑어봤어. 박우진. 25세. 2남 2녀 중 막내. 현재 K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 또 뭐가 있더라…?
아, 이거 내가 좀 게으른 성격이라서 자료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냥 내려오는 통에 말야.
뭐, 그런 건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네가 선택되었다는 점이니까."

"선택… 이라니?"
 
나는 내 신상에 대해 줄줄 꿰고 있는 그가 갑자기 두려워졌다.
게다가 그는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뇌까려대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국정원 뭐 그런 데서 파견된 녀석은 아니겠지. 내가 그런 조직하고 관련된 이유가 없잖아.

"그래, 넌 선택되었어. 뭐랄까, 일종의 실험대상이라고나 할까. 암튼 그래.
물론 보스 입장에서 보자면 나도 그 실험대상에 포함되겠지만 말야. 젠장!"

"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어. 보스는 뭐고 실험은 또 뭐야?
제발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가 줘. 난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야."

그는 하여간 인간들이란, 하고 혀를 찬 뒤 나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짐짓 진중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넌 말야, 앞으로 네가 원하기만 하면 어떤 여자든 네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거야.
말하자면 무소불위의 능력을 지닌 희대의 카사노바가 되는 거지. 어때, 흥미롭지 않아?"

카사노바라고?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나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스물 다섯이나 먹도록 연애는커녕 여자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 나였다.
그런 내가 어떤 여자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말을 믿을 턱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거야? 난 여자 앞에만 가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성격인데….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그건."
"내가 널 도와주면 돼. 말했잖아, 난 그러기 위해서 너한테 파견된 천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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