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색귀천사] 제Ⅰ장 천사들의 비역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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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052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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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귀천사(色鬼天使)∮


제Ⅰ장 천사들의 비역질 (4) - 김 현


**(원편집자 주) 본 글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이책>에 있으며, 관련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재편집자 주) 2001년 01월에 하이텔 XDOOR에 올라왔던 소설입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심중에 있던 말을 꺼냈다.

"나… 갑자기 너한테 궁금한 게 너무 많아졌어. 너 정말 천사가 맞긴 맞아?"

"아, 이 자식이 왜 자꾸 왜 사람, 아니 천사 말을 못 믿고 이래? 지금까지 보여준 걸로도 모자란다는 거야, 뭐야?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믿겠어? 천사 노릇하기 힘들어 죽겠구만, 이거.
이러니 애들이 각박해 못 살겠다며 인간들 사는 델 안 내려오려고 하지."

그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표정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거야.
일단 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할께. 그래, 천사라고 하지 뭐.
근데 천사라면 다른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한테 찾아가기도 바쁠 텐데 어째서 나 같은 사람한테 찾아와서 이러냐는 거지.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이라는 게 좀 그렇잖아.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고맙기야 하지만 말야."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서 나도 잘 몰라. 어쨌든 보스가 널 찍었고, 난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뿐이야.
더 이상 묻지 마, 골치 아프니까. 고마우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웬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너, 하급 천사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모르는 게 많은 걸 보면…"

"쓰풀! 내가 왜 하급이야? 이래봬도 내가 보스 밑에서 일할 땐 신관 직책을 수행하던 천사야, 임마!"

자존심이 상한 듯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화내는 그의 모습이 무섭다기보다 오히려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신관이 뭐야?"

"쉽게 말하면, 소원수리 담당이라고 할 수 있지. 늬들 인간들이 우리 보스한테 바라는 게 많잖아.
하루에도 수십 억 건씩 이거 해달라, 저거 해 달라고 칭얼거리잖아.
난 그런 기도들을 총괄적으로 수렴·검토해서 관리하는 자리에 있던 천사라구.
내가 중간에서 잘라버리면 너희들이 백 날 기도해 봐야 말짱 도루묵이라는 거야. 알아듣겠냐?"

"그럼 신관이라는 그게 꽤 끝발이 있는 직책이었겠네?"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러니까 함부로 하급이니 뭐니 하는 소리 하지 말라구. 자존심 상하게시리."

"근데 그런 요직에 근무하던 사람, 아니 천사가 왜 이런 데로 쫓겨 내려온 거야? 쫓겨 내려온 거 맞지?
네 말을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아냐?"

내가 정확하게 핵심을 찌른 것 같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표정이 표나게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너무 정색을 하자 나는 괜스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어, 저… 그게 난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냐, 네 말이 맞아. 나, 쫓겨 내려온 거야."

그의 얼굴빛이 침울해졌다. 나도 모르게 실언을 했다는 생각에 나는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나름의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 담배 한 대 피울래?"

나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어 보였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넨 뒤 불을 붙여 주었다. 그가 담배를 한 모금 빨자 그것은 단숨에 절반 이상 타 들어갔다.
독(毒)이로군, 하며 그는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이런 걸 보면 인간들 능력도 참 대단하단 말야.
보스가 재미삼아서 만들어 놓은 걸 어떻게 이리도 귀신같이 찾아내서 갖고 노는지 몰라.
이러니 그 양반이 인간들을 질려하지."

"이제 좀… 괜찮아? 진정이 됐어?"
"내가 뭐 언제는 흥분했었냐? 나 괜찮아. 그냥 잠시 집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뿐이야. 괜히 혼자 짱구 굴릴 필요 없어."

두 모금만에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다시 처음의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리로 쫓겨 내려오게 된 건지 궁금해?"
"뭐,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괜히 남의 상처를 들쑤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새끼,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말해라, 말해라 그러고 있네. 누가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으씨! 제발 남의 마음 염탐하는 짓 좀 그만 둘 수 없어? 무슨 생각을 못하겠네."
"눈에 보이는 걸 어떡하냐, 임마? 알았어, 앞으론 좀 자제를 하도록 하지. 음…."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부터는 시점을 바꾸도록 하겠다. 잠시만.

그는 그 자신의  말대로 위대한 보스의 세계에서 인간의 기도를 수리하는 직책에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같은 일만 반복하다 보니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꼈다.
천사에게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게 좀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그랬다.
세상의 모든 일이라는 게 일상이 돼 버리면 권태라는 독소가 끼게 마련이다. 비단 그것이 어디 사람에게만 국한된 일이랴.

위대한 보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일종의 불량한 시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차츰 자신의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했고, 위대한 보스가 금기시하는 어둠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색(色)의 세계였다.
 
하지만 일찍이 예언가적 기질이 농후했던 작가 김성한이 자신의 소설 오분간(五分間)에 언급을 했듯이
천사에게 있어 암수의 구분 따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천사에게 성(性)이라는 건 불필요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보스가 금하고 있던 그 개념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하여 그는 어느 날부터 다른 천사들을 꼬드겨 비루한 인간 세상에서나 있음직한 은밀한 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일종의 비역질(男色)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그것은 동성끼리의 행위였음으로.

물론 그가 그런 짓을 통해 인간들처럼 어떤 성적인 쾌락을 향유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그에게 생활의 활력을 갖기 위한 취미 생활 같은 것에 불과했다.
행위를 한다는 그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그의 불경한 작태는 위대한 보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곧 신관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불사(不死)의 몸을 지닌 그에게 애초에 벌이라는 개념 자체는 의미가 없었다.
결국 위대한 보스가 택한 방법은 그를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내는 일이었다.
불교적 의미로 보자면 그것은 타의에 의한 만행(卍行)이 되는 셈이었다.

위대한 보스는 그에게 천사로서의 권능은 유지시킨 채 인간으로서의 느낄 수 있는 오욕칠정도 더불어 감내해야 하는 벌을 내렸다.
하여 백지 상태의 인간 박우진은 위대한 보스를 대신하여 그에게 그 형벌을 집행하는 대리인이 되는 셈이었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내용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겠다.

이야기를 마친 뒤 그는 헛헛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을 쫓아낸 위대한 보스를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담은 채.

"네 말대로라면, 그게 무슨 벌이 되냐? 오히려 네 소원대로 된 거 아냐?
이젠 네 마음대로 그 짓… 아니, 여자랑 그럴 수 있게 됐잖아."
"겉으로 보자면야 그렇지. 하지만 거기엔 제약이 있다구."
"제약이라니?"
"난 네가 여자랑 하는 걸 볼 때만 흥분이 된단 말야. 내 의지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물론 직접적인 행위 이외의 것은 인간들처럼 할 수 있지만 말야. 그러니 더 환장한 노릇이 아니냐? 젠장!"
"그럼… 그래서 아까 내가 그러고 있을 때 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그는 입맛을 쩝, 하고 다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 같은 이야기였지만 이제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미 그가 행한 놀라운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터였다. 세상에, 내가 천사를 만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근데… 아까 보니까 내가 하는 걸 보면서도 별로 흥분을 못 느끼는 것 같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내가 연출한 상황이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네가 그렇게 만들어 준 게 아니었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긴 했지만, 그 애의 마음이 움직인 건 자의에 의한 거였어. 난 그냥 분위기만 만들어줬을 뿐이야.
말하자면 타이밍이 맞았던 거지. 짜식, 복도 많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소영이 정신이 들고 나면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다시 그녀에게 대시해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건 그래. 단 이번 경우에 한해서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번엔 너희 둘만의 의지에 의해 치렀던 일이니까 가능하다는 소리야.
하지만 내가 정식으로 개입할 경우에 그 일은 불가능해져. 넌 한 번 한 여자와 두 번 다시 할 수 없어."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나 안 할래. 그런 걸 내 뜻대로 하지도 못하면 무슨 소용이야?"
"네 마음대로 하고 안 하고가 안 되는 일이라니까. 그리고 한 번 한 여자랑 또 하는 게 뭐 재밌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원하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여자라도 네 밑에 깔리게 해 줄 수 있다니까.
한 여자랑 여러 번 하는 것보다야 여러 여자랑 한 번씩 하는 게 더 낫지 않아?"

지극히 단순한 논리였지만 나는 그의 꼬드김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듯한 얘기였다.
차라리 선택사항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정말…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어떤 여자하고도 할 수 있는 거야?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러네. 어린놈이 웬 의심이 그렇게 많아?"
"외국 여자라도 가능해?"
"물론이지!"
"이미 죽은 여자라도 가능해? 나, 오드리 헵번 좋아하는데…."
"썩어문드러진 시체하고 하고 싶어? 그렇담 불러다 줄 수 있지."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적잖이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내가 전생에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았기에 이런 행운에 제 발로 굴러 들어왔단 말인가.

"행운이 될지 불행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뭐? 뭐라고 했지?"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딴 생각을 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정확히 듣지 못했다.

"근데 너, 다른 사람들 눈엔 보이는 거야? 그 점을 좀 명확히 해 줘. 나도 지금 무지 헷갈리고 있거든."
"내가 보여줘도 될 만한 상황이면 보여주고, 그렇지 않으면 못 봐."
"내가… 그러고 있을 땐 물론 안 보이는 거지?"

대답 대신 그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앞으로 나랑 얼마나 같이 살아야 되는 거야? 한 달? 두 달?"
"그건 나도 몰라.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평생이 될 수도 있어. 그거야 보스 양반 마음이지, 뭐. 왜, 오래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오래 있으면 나야 좋지, 뭐. 헤헤!"

그 순간 그것은 에누리없는 내 진심이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이제 궁금한 거 다 물어봤냐?"
"아, 아직 한 가지 더 있어. 음… 저, 횟수 같은 건 상관없어? 그러니까 하루에 몇 번씩도 가능하냐는 얘기야."
"네 체력이 닿는 한 가능해. 근데 이 자식 아주 노가 났구만?"

나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따라 웃었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이름? 나 이름 같은 거  없어. 우린 그런 거 필요 없거든. 그냥 생각으로 다 소통이 되니까. 왜, 이름 같은 게 꼭 필요해?"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건데, 맨날 야, 너 이렇게 부를 순 없잖아."
"그럼 네가 하나 지어 줘 봐."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손가락을 탁 퉁겼다.

"지니! 지니 어때?"
"지니? 거 알라딘과 마법램픈가, 거기에 나오는 애 말야?"
"그래, 걔! 하는 일도 너랑 비슷하잖아. 뭐, 비슷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어때? 괜찮지?"
"지니라… 지니. 지니? 으흠… 그러지, 뭐. 그럼 앞으로 지니라고 불러 줘."

오케이, 하며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와 나는 악수를 했다. 비로소 두 세계의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오늘부터 넌 내 마법의 지니가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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