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색귀천사] 제Ⅰ장 천사들의 비역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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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07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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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귀천사(色鬼天使)∮


제Ⅰ장 천사들의 비역질 (5) - 김 현


**(원편집자 주) 본 글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이책>에 있으며, 관련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재편집자 주) 2001년 01월에 하이텔 XDOOR에 올라왔던 소설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니와 나는 그 날부터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개념은 아니었다.
함께 지내긴 했지만 그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나 혼자 살고 있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나에게만 보일 뿐이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그의 배려 때문일 터였다.
 
유일하게 그의 존재가 드러날 때는 밥을 먹을 때였다.
만나는 첫 날 대충 짐작한 바였지만 그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식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이틀에 걸쳐 먹을 음식을 단 한 끼에 작살냈다.
나는, 천사라는 작자가 무슨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냐고 타박을 주자 그는 인간의 몸에 적응하기 위한 한 과정이라고 해명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그가 하루에 한 끼밖에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영은 지니의 말처럼 나와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대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지니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실패를 우려할 필요 없이 말이다. 울라라!
 
하지만 나는 일단 그녀를 보류해두기로 했다.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나는 그녀를 한 번 안았다.
이미 한번 접촉을 가진 그녀가 가장 후 순위로 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우선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우리 과 후배인 진류희였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를 좋아한다거나 호감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녀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거의 모델 수준의 늘씬한 몸매에 얼굴은 남자의 정복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깜찍하게 생겼다.
한 마디 쭉쭉빵빵 섹시녀인 것이다.

하지만 그 계집애만 떠올리면 나는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이가 갈린다.
평소 사람 좋기로 소문난(?) 내가 그녀에게 이런 악감정을 품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내가 학교에 복학을 한 뒤 신·복학생 상견례를 겸한 M.T에서였다.
그 때 내가 의도치 않게 조장을 맡게 되었는데 그녀가 우리 조로 편성돼 있었다.
물론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나는 심장이 간잔지런해질 정도로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나 역시 피끓는 청춘이었으니 섹시한 여자를 보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하는 행동을 보니 완전히 아니올시다였다.
조원끼리 힘을 합쳐 장기 자랑을 하는 코너를 회의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협조를 하지 않은 채 겉돌고 있었다.
자기가 왜 그런 걸 해야 하느냐는 식이었다.
열심히 준비하는 조원들을 버려둔 채 그녀는 다른 조를 기웃거리며 남자애들과 시시덕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그녀를 불러 주의를 주고 협조를 요구했지만 그녀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 때도 나는 평소 버릇대로 그녀 앞에서 몹시 말을 더듬었다. 그런 모습이 그녀에게 무척 같잖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내 말을 싹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안하무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후 학교에서 여러 번 마주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인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볼 때마다 자기보다 몇 급수쯤 낮은 하찮은 존재를 대하듯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을 통해 그녀가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싸가지 없이 행동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격분했다.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여자 앞에만 서면 사시나무로 변해버리는 내 주제에 어떻게 해 볼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이제야 내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나는 지니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완전히 뭉개버릴 작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원래 그런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이 일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말야…."

이게 웬 다 된 밥에 코 푸는 소리란 말인가. 지니는 내 설명을 듣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왜 안 되냐고 다그치자 그는 마음이 없이 욕망만 전제된 상태로 여자를 취할 경우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트러블이 일어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여자가 일을 치르는 중간에 제정신이 들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무척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겠어?"
"그럼 어떻게 해? 정말 안 되는 거야? 이건 꼭 해야 되는 일이란 말야. 안 그럼 내 가슴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지도 몰라."
"자식, 그런 일로 무슨 천추의 한까지… 정말 꼭 하고 싶어?"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껏 애원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절실한 내 마음을 읽은 탓인지 그는 결국 어렵사리 승낙을 했다.

"대신 중간에 이상한 기미가 느껴진다 싶으면 무조건 냅다 튀어. 알았지?"

다음 날 지니와 나는 함께 등교했다. 그 때 그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복장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너 다른 옷으로 좀 바꿔 입으면 안 되냐?"
"내 복장이 뭐가 어때서 그래?"

"사람들이 자꾸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도대체 어떤 사람이 널 학생으로 보겠냐?
생양아치도 너보다는 조신하게 옷을 입고 다니겠다."

"아, 그 자식 정말 여러 가지로 귀찮게 구네. 지금 어디 가서 옷을 바꿔 입고 오란 말야? 오늘은 그냥 참아.
다음에 한 번 생각해 볼께. 이제 겨우 이 스타일에 적응해 가고 있는데,
왜 남의 패션을 가지고 감 놔라 대추 놔라 난린지 모르겠네. 누가 범생이 아니랄까봐."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그와 나는 학교로 들어갔다.
내가 수업을 하는 동안 그는 학교 구경이나 하겠다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건 마지막 강의 시간 때였다.
그는 소리도 없이 강의실로 들어와 내 곁에 앉았다.

"야, 여길 들어오면 어떡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떡하려고?"
"걱정 마. 지금은 볼 수 없도록 해놨으니까.
오늘 하루 종일 사람들이 어찌나 눈에 빨간 등을 켜고 쳐다보는지 나도 신경쓰여 죽는 줄 알았어."
"그게 네 몰골의 현실이야. 꼬라지가 백발마귀 같은데 누군들 안 쳐다보겠냐?"
"백발마귀가 아니라 은발천사야. 임마. 호칭을 똑바로 하라구."

그때 몇몇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내가 혼자 비 맞은 중처럼 웅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그 때 지니는 강의실 안을 휘휘 둘러보며 으음,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그냥 이 강의실 안의 물이 어떤지 확인한 거라고 말했다.
말투까지도 양아치 스타일이었다. 강의실엔 여학생이 절반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 네 눈엔 물 수준이 어떻게 보여?"
"그럭저럭 3급수 수준은 유지하고 있는 것 같군."
"3급수라니? 이래봬도 우리 과가 우리 학교에선 최고로 물이 좋은 과라고 소문이 나 있는데. 괜히 질투 나서 그러는 거 아냐?"
"얌마, 눈 좀 높여.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아."

그러면서 그는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물이 3급수인 이유는 보기보다 불순물이 많이 끼여 있어서 그런 거야.
겉으로 보기에 깨끗해 보인다고 다 먹을 수 있는 물은 아니잖아?"
"불순물이 끼여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여기 있는 애들 중에 처녀가 몇 명이나 될 것 같냐?"
"…!"

나는 떨떨한 기분으로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20여 명의 여학생들 중 대부분은 3학년이었고 더러 4학년도 끼여 있었다.
고학년이긴 하지만 아직 남자를 알기엔 어린 나이였다.
물론 성 개방이다 뭐다 해서 개중에 일찍 깬 애들은 벌써 경험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수가 많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80퍼센트, 하고 말했다.

"80퍼센트?"
"그래, 8할이 이미 깨졌어. 나머지 2할도 완전히 깨끗하다고
보긴 어렵고."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8할이라니.

"그게 작금 너희 인간들의 현실이야. 하지만 그렇게 쇼크먹은 표정 지을 거 없어. 가볍게 생각해.
어차피 깨먹으라고 우리 보스가 만들어 붙여준 거 아니냐. 앞으로는 너도 그 일에 일조를 하게 될 거고. 안 그래?"

"그게 지금 위로라고 하는 소리냐? 너 정말 천사 맞아? 너 혹시 천사를 빙자한 악마 아니냐? 왠지 속고 있는 기분이야."
"쟤네들을 네가 다 데리고 살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비감스러워 해? 그리고, 천사와 악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야.
아직도 그걸 몰랐어?"

의미를 가늠하기 힘든 표정으로 그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쩐지 썩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네가 타깃으로 정하고 있다는 애가 누구냐? 여기 있어?"
"아니, 없어. 걘 2학년이야. 지금쯤 아마 아래층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거야.
같은 시간에 마치니까 이따가 보게 되겠지, 뭐."
"야,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기운 내.
앞으로 이 나라, 아니 온 세계를 주름잡을 돈 카사노바 씨가 될 사람이 그만한 일로 기가 죽어서야 쓰나?
넌 앞으로 좀더 타락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렇게 소심해서 어디 거사를 제대로 치르겠냐?"

천사가 인간에게 타락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지만 그것에 또한 지금의 내 현실이었다.
그래, 이미 물 잔은 엎질러진 것이다. 나는 다음을 다잡았다.

수업을 마친 뒤 나는 지니와  함께 강의실 건물 밖에서 류희를 기다렸다.
얼마 후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학생들 틈으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동기생 두 명과 함께였다.
하늘색 나시 티에서 진 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물찬 제비처럼 날렵해 보였다.
저 외모에 성격만 좀 받쳐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텐데. 나는 잠시 그런 헛된 생각을 했다.

"바로 쟤야."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지니와 나는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잠시 그녀를 살펴보던 그는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로군. 아주 새빨간 장미. 당연히 가시가 많을 수밖에 없지."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이따가 내가 옆에 있는 애들을 떨궈내 줄 테니까 쟤가 혼자가 됐을 때 접근해.
그리고 사람이 많은 데서 쟤 뺨을 있는 힘껏 한 대 후려쳐. 그 다음엔 네가 내키는 대로 해. 그럼 돼."
"뭐? 지금 그걸 작전이라고 내놓은 거야? 그러다 고소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라고?"
"얌마, 내가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알았냐?"
"그냥… 가서 한 대 때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그러면 돼. 그러고 나서 쟤가 무슨 반응을 보이면 네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만 하면 돼.
간단하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곁엔 악마보다도 더 사악한 천사 지니가 있지 않은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그녀의 뒤를 좇으려고 하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왜? 또 뭐가 남았냐?"
"저… 이건 그냥 노파심에  묻는 말인데 말야… 류희 쟤도 그 8할에 속하겠지, 물론? 그래, 그럴 거야.
저렇게 생긴 애가 아직 처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그렇지?"

그러자 지니가 빙긋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뭐야? 긍정이야, 아님 부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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