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경천행 제20장 신은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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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153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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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신은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가요?"
음성!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여인의 음성이다.
일검향 나란소. 자신의 애검을 움켜잡고 한창 검법에 몰두해 있던
그녀는 자신의 앞에 불쑥 나타나 정신없이 늘어놓은 사월령의 말에
은근하게 놀랐다.
사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에요."
"그럴 리가?"
나란소는 망연히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 천향신수라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니? 그리고 나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 해괴한 짓을 일삼던 그가 다름아닌 신검대인 고신만해의 아
들이라니?

놀라운 일은 또 있다. 지옥수사 염우!
과거 그녀가 만세야 자천룡에게 도전했을 때,
자천룡의 앞을 가로막았던 염우가 다름아닌 그였다니.......
나란소는 한동안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야 했다.
백표랑이라고 알려진 인물. 도대체 그의 신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
다. 천향신수, 지옥수사 염우, 백표랑, 화림의 림주인 백야.
살아온 이날까지, 나란소는 한 사람이 이렇듯 많은 신분을 지녔다
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사경을 헤맨단다.
'언젠가 그 사내의 미소가 눈부시다고 생각했었지. 또 그의 어깨
에 서린 고독은 웃음과는 달리 살인적이었다.'
너무 특별한 존재이기에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사내.
나란소는 사월령을 바라보며 감정없이 말했다.
"그래서 나의 몸을 요구한다는 말이군요."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예요."
"그가 그것을 요구하던가요?"
"그는 지금 의식불명이에요."
나란소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무림이라는 이질세계에 몸을 담고부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
"인간의 죽음 또한 인간의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어요."
명백한 거절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란소의 가슴 가장 깊숙한 심부에서 치밀어오르는 차가운 단절
의 기운은?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했던 나란소는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냉혹하게 기른 여자가 나란소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백표랑이라는 인간을
만나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적이 있다. 그 사내가 죽
어간다. 죽음이라는 것은 어느 인간에게나 존재하는 것.
죽어가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백표랑이라는 인물이기에 나란소의
마음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사랑이라는 지순한 개념은 접어두고라도,
무림을 위해서도 그는 존재해야 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은인이다.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사월령은 볼 수 있었다.
나란소의 냉막한 얼굴에 넘실거리는 한 가닥의 고뇌를.
"부탁이에요."
사월령은 그녀답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란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월령의 입가에 잠시나마 안도의 기색이 서렸다.
그녀는 바쁜 사람처럼 신형을 돌렸다.
"그 분은 지금 신강의 불사곡이라는 곳에 있어요."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사월령은 행여 나란소가 무슨 말을 할까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휘이잉!
바람이 분다.
불어오는 바람은 나란소의 검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나란소는 한동안 무거운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 * *

백표랑!
그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다.
삼엽선단을 복용하고 순음지기를 지닌 세 명의 여인과 교접을 가
짐으로써 살아날 수 있다.
삼 일째 되는 날, 사월령은 불사곡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절망에 차 있었다.
백표랑이 누워 있는 침실로 다가선 사월령.
은소소는 투명한 음색으로 물었다.
"일이 잘 안된 모양이군요."
"......."
"하기야, 순음지기를 지닌 세 명의 여인을 구한다는 것은 삼엽선
단을 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에요."
삼갑자에 이른 순음지기 여인.
아마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은
소소가 흘러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앞으로 한 시진이 흐르면 이 사람은 죽어요."
"한 시진...... 삼엽선단의 효능으로도 이 분을 살릴 수 없다는 말
인가?"
"그래요."
"......."
"활인대법의 최후단계는 음양교합이에요. 저는 음양교합을 위해
이미 이 사람의 몸에 음양춘산(陰陽春散)이라는 강력한 춘약을 복용
시켰어요."
"음양춘산을?"
"설혹, 부상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한 시진이 흐르면 음양춘산의
약효 때문에 전신의 혈백이 터지고 말아요."
"으음!"
사월령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백표랑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몰랐지만, 이미 사월령의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백표랑을 위해 채워져 있었다.

―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과거!
그 얼마나 고독한 세월이었던가?
여자의 몸으로 검을 잡고 피를 즐겨야 했던 시간들.
그래도 살인이라는 죄악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곁
에 백표랑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사월령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
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 분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발악적으로 몸을 일으킨 사월령.
그녀는 다짐했다.

― 그 분이 죽는다면 나는 죽음까지 같이 할 것이다.

은소소!
사월령의 행위를 바라보는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사랑과 모성애라는 것이 이리도 가혹한 것인가?'
그녀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림주!'
방 안에 혼자 남은 사월령.
그녀는 백표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한동안 침상 위에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
워있는 백표랑의 얼굴을 넋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절실한 슬픔으로 다가오리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는데,
'림주! 안됩니다.'
사월령은 무너지듯 백표랑의 싸늘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평소의 사월령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렇게 얼마나 백표랑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을까?
이어, 한없이 슬픈 얼굴로 사월령은 일어섰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월령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남
을 사랑하는 부피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노을이 짙게 깔리는 방 안에서, 사월령은 천천히 자신의 의복을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 말 많은 인간들이 어찌 내 운명을 이해할 것인가? 이
렇게 해서라도 림주를 살리고 싶은 것이 이 사월령의 마음이다.'
스륵! 사월령은 자신의 옷을 벗어내렸다.

* * *

'허억!'
새하얀 육체의 현란한 조형과, 탐스러운 풍만함과 아름다움을 함
께 지니고 있는 눈부신 각선미.
둥그런 호선으로 이어지는 갸름한 어깨선과, 한 줌이면 능히 손
안에 거머쥘 수 있는 잘록한 허리,
우윳빛 젖가슴은 너무 풍요로웠으며, 방초가 우거진 여인의 음부
는 생명의 숨결이 뜨겁게 담겨져 있다.
여인 사월령.
그녀는 이 순간만은 살수 사월령이 아니다.

아름답고 청순한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고통을 겪고 있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언젠가는 사내의 힘에 의해 필연적으
로 겪어야 하는 고통,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월령의 나신, 참
으로 기이한 자세다.
사내는 죽은 사람처럼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고,
눈부신 육체를 지닌 알몸의 여자는 그 사내의 몸 위에서 육체를
달군다.
서서히.......
사월령은 자신의 몸이 이상스럽게 젖어드는 것을 느낀다.
욕구에 몸을 내던진 과거를 지닌 적도 없건만,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섭리이기에, 사월령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몸이 육체의 향연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낀다.
출렁거리는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 새하얀 둔부가 사내의 몸 위에
서 들썩거린다.
"으음!"
성숙한 여인이 되기 위함인가?
사월령의 고운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는 까닭도 없이 울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사내를 받아들이는
여인은 모두가 눈물을 흘린다는 속성 때문인가?
주르르!
눈물이리라. 서러움에 겨운 율동으로 꺼져가는 사내의 생명을 안
타깝게 부르고 있는 사월령의 눈으로 한 줄기 아픔의 응혈이 맺혔
다.

어차피 여자의 숙명을 벗어버릴 수 없는 것,
언젠가는 한 사내의 건장한 사랑을 벌거벗은 알몸뚱이로 받아들
여야 할 숙명이라면, 한 사내의 생명을 위해 나의 몸을 바치는 것도
성숙한 여자에게 하나의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겠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어요.

이 몸으로 뜨겁게 전해오는, 당신의 숨결만으로 이 여인의 지금
고통은 충분히 위안 받을 수 있어요.
당신의 따뜻한 포옹이 없더라도,
이 순간의 이 절박한 행위를 그냥 기쁨으로 간직하렵니다.

* * *

사월령은 초조했다.
그녀가 백표랑과의 정사를 마치고 그의 방을 나온 지 어언 한 시
진이 되었다.
만약, 이 시점에서 나란소가 나타나주지 않는다면 백표랑은 영원
히 죽음을 부둥켜 안아야한다.
사월령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란소가 설혹 오더라도 단지 두 사람 뿐이다.'
무서운 절망감이 사월령을 휘감았다.
'하늘이시여! 정녕 그 분의 죽음을 원하십니까?'
사월령은 하늘을 힐끔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오늘따라 밤하늘의 별은 왜 저리 초롱한가?
사월령은 느리게 아름다운 눈을 내리감았다.
지금도 그녀의 전신은 저리어 온다.
하복부로는 움직일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해 왔다.
그때였다.
획! 그녀의 앞으로 한 사람이 회오리를 몰고 나타났다.
사월령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은 나란소!"
나란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월령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요?"
사월령은 눈으로 백표랑이 있는 방을 가리켰다.
사월령이 무슨 말인가를 꺼내기도 전에,
나란소는 이미 백표랑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월령은 잠시 후에 있을 일을 생각했다.

― 아마 그녀는 림주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나를 죽이
려 할 것이다.

그렇다. 여자는 두 명이다.
그러나 은소소는 세 명의 여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사월령은 그런 사실을 나란소에게 말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밀로 하고 싶었다.

― 어쩌면 두 사람만으로도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얼마나 바보같은 염원인가?
그러나 사월령은 기적이 도래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 * *

나란소!
그녀는 막 백표랑의 나신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으윽!'
그녀는 침상을 내려서려다 갑자기 아미를 질끈 찌푸리며 온몸을
하얗게 떨었다.
하복부로 전해지는 극단의 고통!
산고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순간 나란소는 태어나 처음
으로 당하는 고통에 몸을 떨어야 했다.
상실의 고통이 이렇게 무섭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란소는 거의 입술을 악물고 벗은 의복을 하나씩 하나씩 걸쳤다.
어느 날이었던가?
그는 바람처럼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야 한다니.......

―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나는 자라면서 한 번도
내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나란소는 여인이 되었다.
그것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내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
을 인연의 희생물로 삼아야 했다.
어떻게 자신의 옷을 다 걸쳤는지 모른다.
풀어 헤쳐진 머릿결을 쓰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백표랑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란소의 냉막한 눈동자에 한 가닥 우수가 서렸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의 인연이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당
신과의 인연을 뿌리쳤을 거예요.'
나란소는 쓴 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여자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완전한 결합을 원하기 때문
이에요.'
후회도 해보았다. 그러나 후회하는 마음보다는 백표랑을 살리고
싶은 본능이 나란소의 가슴을 짓눌러왔다.
백표랑을 바라보는 나란소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이제 당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는 백표랑과의 관계를 훌훌 떨쳐버리고 떠
날 수 있노라고.
'안녕!'
나란소는 백표랑의 얼굴을 새겨두려는 듯 바라보았다.
주르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창백한 볼을 적신다.
이미 여자라는 개념을 상실했던 나란소.
그러나 이 순간만은 아주 순종하는 여인의 본성으로 잠시 돌아왔
다.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무엇을 감추기라도 하
듯, 나란소는 거칠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 *

나란소가 떠난 후, 사월령은 백표랑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혹시, 방 안에서 무슨 반응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 시진이 지나도 백표랑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
었다.
'앞으로 반 시진만 더 지난다면 림주는 음양춘산의 약효 때문에라도
죽고만다.'
사월령은 자신의 앞에 성큼 다가온 절망의 모습을 보았다.
운명이란 되돌릴 수 없는 것, 사월령이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백
표랑의 죽음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월령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다.
창백한 절망이 그녀의 얼굴에 서렸다.
'이렇게 가실 것이었다면 차라리 만나지나 말았어야 했는데.......'
사랑을 알아버린 여인, 사랑을 떠나 살아갈 수 없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언제부터인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사월령의 얼음장 같은 마음 속
에는 백표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때였다.
스륵!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은소소, 그녀가 사월령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월령은 초조한 음성으로 은소소에게 물었다.
"정말... 이 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
은소소는 사월령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백표랑의 앞으로
다가갔다.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는 백표랑의 몸.
음양춘산의 약효가 극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여자는 세 명이에요."
"......."
"이대로 반 시진만 더 흐른다면 이 사람은 본래의 부상 이외에
음양춘산의 약효 때문에 전신의 혈맥이 파열돼 죽게돼요."
은소소는 남의 일처럼 무의미하게 말했다.
사월령은 은소소의 그런 무감정에 오싹함이 느껴졌다.
은소소는 사월령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 사람을 사랑하나요?"
사월령은 쓴 웃음을 지었다.
웃음이라고는 하지만, 그 웃음은 기뻐서 웃은 웃음이 아니라 무엇
인가 가슴 속에 서려있는 비련의 찌꺼기를 털어내려는 모순된 웃음
이다.
"앞으로 만약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랑하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렸나요?"
"나의 숙명이라고 여겼으니까."
"만약 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사월령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명백하게 다가오는 백표랑의 죽음,
이제 그녀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그것 또한 우리 두 사람의 숙명이겠지."
은소소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투명하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
가 떠오르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청순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사월령을 향해 말했다.
"좀 나가주시겠어요."
"......?"
사월령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은소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소소는 대답 대신 자신의 상의를 벗어갔다.
"아무래도 신은 이 사람의 죽음을 원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
"이 은소소로 하여금 이 사람을 위해 옷을 벗게 만드니 말이에
요."
사월령의 얼굴이 파르르 경련에 떨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은소소는 투명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세 명의 여자 중 한 사람의 자격을 지녔다면
믿겠어요?"
사월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은소소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은소소의 행동이 지금까지도 믿어지지 않았다.
은소소는 짜증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취미 중에 남녀관계를 옆에서 지켜보는 취미도 있었나
요?"
사월령은 정신을 차렸다.
은소소는 지금 빨리 나가줄 것을 원하고 있다.
탁! 황급히 방문을 닫고 나오는 사월령.
그녀의 얼굴은 절망을 털어버리고 있었다.

* * *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백표랑의 몸.
그 몸을 바라보는 은소소의 눈빛, 여인의 눈빛은 야릇한 정광을
머금었다.
아마 여자의 본능 때문이리라.
언제나 투명하던 은소소의 얼굴, 그녀의 얼굴에 서린 투명함이 백
표랑의 나신을 바라보는 순간 서서히 발그레한 홍조를 담아갔다.
보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찌 성숙한 여자의 몸으로 이런
광경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가?
그렇게 백표랑을 얼마나 지켜보았을까?
은소소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속옷들을 벗어 내렸다.
'내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당신을 위해 이런 희생을 치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늘 일로 인해 당신은 나의 희생못지
않은 값어치를 치르게 될 거예요.'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지만,
젖가리개를 향한 그녀의 손 끝은 못내 떨리고 말았다.
.......
여인의 몸은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 순교자가 만약 은소소의 나
신을 보았다면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확신했을 것이다.
익을대로 익은 천도(天桃)처럼 탄력이 느껴지는 두 개의 젖무덤,
짙은 자주빛을 발하는 두 알의 유실, 잘록한 허리에서 기름진 아랫
배로 물결치듯 이어지는 오묘한 호선.
아름한 둔덕 밑으로,
부끄러운 체모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바로 그곳에 열정의 뜨거운 샘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여인 은소소! 황촉불이 가물거리는 가운데 그녀는 느리게 자신의
눈부신 나신을 백표랑의 변질된 몸 위에 실어갔다.

* * *

"윽!"
막 백표랑의 몸 위에 올라선 은소소.
그녀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한 차례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여
리고 부끄러운 여인의 깊은 비밀 속으로, 사내의 불기둥처럼 치솟은
힘을 받아들이자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왔다.
"으으!"
은소소는 아미를 찌푸리며 백표랑을 더 깊이 받아들여야 했다.
새로운 고통으로 얻어지는 이 뜨거운 체험.
일생에 걸쳐 단 한 번은 꼭 경험해야 할 여자의 고통을 은소소는
가슴을 절상해 내는 아픔으로 느낀다.
자신의 가장 비밀스런 곳이, 사내의 일부분으로 인해 채워지고,
받아들이는 아픔과 상실의 고통 속에 은소소의 영명하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그리고 자신은 느낄 수 없었지만, 은소소의 몸은 흐느끼고 있었
다.
이제는 과거처럼 새로워질 수 없다는 잃어버린 비통함과 그리고,
무엇인가를 한 사내에게 주었다는 감격에 겨워 여인 은소소의 몸은
가증스런 유동으로 흐느끼고 있다.
"으음!"
그녀는 춤을 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사내의 변질된 몸 위에서 바람난 화냥년처럼 몸을 사른다.
이미 무정에 달관했던 과거를 잃어버리고, 은소소는 한 줄기 애증
에 서린 눈물로 창백한 볼을 적신다.
저리도 단홍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순결한 여인이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자학 때문일 게다.
얼마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을까?
아픔의 어수룩한 뒤켠에서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하는 기이한 쾌
락에 은소소는 온 몸의 창들이 활짝 열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새, 은소소는 굳어있는 백표랑의 육체와 혼연일체가
되어 연한 발성을 토해낸다.
"아아아학!"
그것은 투쟁이다. 죽음과의 투쟁이었으며, 닫혀진 그녀의 이성과
의 투쟁이었다.
욕망과의 투쟁이었으며, 아픔과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과, 무엇인가를 분류하고 싶
은 욕구의 투쟁 속으로 점차 혼미하게 빠져든다.
"아학!"
은소소의 풍만한 엉덩이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혼신의 발열이리라. 정신은 하늘로 높이 치솟고, 동면하던 애욕들
은 전신의 실핏줄에서 움터 나온다.
이렇게 뜨거운 갈망이 있었던가?
은소소는 터질 것 같은 이성을 억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젖가슴을
억세게 움켜 잡았다.
그녀의 행위는 발악과도 같았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육체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녀는 백
표랑의 몸 위에서 바람난 암코양이처럼 헐떡인다.
그러던 한 순간,
"하하하학!"
은소소의 나신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그녀는 발정난 암캐처럼 백표랑의 몸 위에서 숨을 멈추고 헐떡이
더니 이내 무력하게 그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전신의 기운이 모두 밖으로 분출되어 버리고,
그녀의 육체는 발성을 내지르며 여진을 음미한다.
은소소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했던 무한한 힘들은 자신의 얼음장같이 식
어있던 여자의 속성을 새롭게 일구어 낸 힘이었노라고.
오늘이 지나면, 이에 또 다르게 변해버린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은소소는 오늘의 뜨겁고 아팠던 기억만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 * *

은소소는 허전한 시선으로 백표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표랑의 얼굴.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얼굴엔 은은한 화색이 돌고 있었으며 전
신을 뒤덮고 있는 상처도 거짓말처럼 아물어 갔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손. 은소소의 섬섬옥수는 조심스럽게 백표랑의 얼굴을 쓰다듬었
다. 가늘게 떨리는 옥수의 파랑이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대신해
주고 있다.
아무리 무정으로 전신을 치장하더라도, 여자의 순수성을 한 남자
에게 바쳐버린 본능을 억제할 수 없기에 은소소는 또 한 방울의 눈
물을 흘려 낸다.
'모르겠어요. 당신이 만약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리면 나는 어떤 모
습으로 당신의 앞에서 슬픔을 감추게 될지.'
은소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에게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당신이 내 곁에 남아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기대는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너무 크고 멀리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은소소는 되도록 오래오래 백표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살아있다는 것,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축복은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모든 불가능
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죽음의 유혹을 벗어났다.
인간이라 불리기에는 너무 뛰어난 인물이, 자칫 죽음으로 빠져들
숙명을 뿌리치고 다시 일어선 것이다.
여인들의 지고한 희생의 대가로 일어선 백표랑.
검. 검의 이름은 원앙쌍검!
그는 두 자루의 검을 말없이 닦아 내렸다.
어둡고 참담한 죽음의 굴레 속에서 여인들의 희생으로 다시 광명
을 되찾은 그는 일어서는 순간에 검을 닦았다.
파파팟!
남빛 검광을 발산하는 원앙쌍검의 검신을 바라보는 백표랑의 손
은 덩달아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천룡!'
새로운 생명을 가졌기에 시작도 새로운 것인가?
그의 얼굴에 서린 고뇌가 깊어 갈수록 백표랑의 눈빛은 침유하게
가라앉았다.
사실, 백표랑은 전화위복을 맛보았다.
삼엽선단!
무림인이라면 꿈에라도 그리는 삼엽선단을 복용했다.
그로 인해, 백표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력이 일 갑자가 증
진되었다.
원래, 백표랑이 터득한 무학들은 모두가 패도적이고 심오한 무학
들이다. 그런 무학들을 자유자재로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심
한 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고수와의 대결에서, 백표랑은 가끔 내력의 부족함을 느꼈다. 그러
나 이제는 다르다. 어떤 무학이든 그는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다.
'자천룡의 파천혈세가 무서운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
라면 결코 그의 십 초식에 패하지는 않는다.'
그는 장담했다. 자신의 내력은 이제 천하제일이라고,
거기에, 그의 몸은 금사보의가 보호를 해준다.
그때였다.
"사월령입니다."
밖으로부터 사월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라."
사월령은 조심스럽게 백표랑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까지는 백표랑의 눈치를 살피느라 상당
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몸은 어떠신지?"
"좋은 편이다."
"불편한 곳이라도?"
"없다."
백표랑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문득, 사월령의 아름다운 봉목에 허전함이 깃들었다.
자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백표랑이라는 인간에 의해 달라져
있건만, 백표랑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처럼 자신을 단지 수하로만 생각하고 있다.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천마혈성의 고수들이 이곳으로 향
하고 있답니다."
뚝! 백표랑의 손이 멈춰졌다.
살기! 그의 전신에서 몸서리 쳐지는 살기가 파동쳤다.
그 살기가 얼마나 짙었는지 사월령까지 백표랑의 몸에서 뿜어지
는 살기에 의해 전신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천마혈성에서......."
"그렇습니다."
백표랑의 입가에 비정한 미소가 서렸다.
예전의 미소가 실없는 웃음이었다면 지금의 미소는 사람의 피를
말리게 만드는 섬뜩한 죽음의 조소 같았다.
"자천룡은 약속에는 철저한 인간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표랑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이어, 그는 다시 수중의 검을 닦아갔다.
검을 닦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신뇌 백추공으로부터 전수
받은 백팔신계(百八神計)가 빠르게 스쳐갔다.

― 너의 장점으로 상대의 단점을 이겨라. 무중유생(無中有生), 무
(無) 속에서 유(有)를 만들어라. 크고 작은 거짓으로 너의 참모습을
숨기고 적을 유인하는 것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백표랑은 백팔신계 중에서 오십사계(五十四計)를 이용하기로 했
다. 나의 장점으로 상대의 단점을 이긴다. 백표랑은 담담한 음성으
로 말했다.
"한 사람의 시체를 구해오라."
"시체를?"
"천마혈성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의 시체라면 더 좋다. 한 가지 유
의할 사항은 나와 비슷한 체격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사월령은 두 눈을 빛냈다.
백표랑은 지금 무슨 심오한 계략을 마련 중이다.
그러나 사월령은 백표랑의 의중을 모른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사월령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방문을 닫기
도 전에, 과묵한 백표랑의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사월령!"
사월령은 백표랑을 향해 신형을 돌렸다.
백표랑은 여전히 원앙쌍검의 검신에 자신의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슨 하명하실 분부라도?"
처음으로, 백표랑은 사월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월령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백표랑의 얼굴에 예전과 같은
한 가닥 미소가 흐릿하게 번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오늘 밤은 너와 함께 있고 싶다. 술이라도 한 잔 나눌 수 있다
면 더욱 좋겠지.

부르르! 사월령은 하얗게 몸을 떨었다.
백표랑의 말.
무심하게 뱉아낸 말이기는 하지만 사월령은 백표랑의 말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녀의 가슴은 벌써 두근거렸다.
그녀는 다짐했다. 천하를 뒤집어서라도, 오늘밤은 백표랑을 위해
천하에서 가장 향기 좋은 술로 그의 가슴에 서린 고뇌를 씻어 내리
겠노라고.......

은소소!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방 안에 들어선 백표랑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불쑥 자신을 찾아온 백표랑.
이런 해괴한 일이 있는가?
그냥 백표랑 혼자서 자신의 처소를 찾아왔다면 아마 은소소는 눈
물을 흘리며 백표랑의 품에 안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심각하다.
시체!
백표랑은 한 사람의 시체를 은소소의 앞에 놓았다.
아닌 밤중에 사람의 시신을 들고 나타나다니.
은소소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이제보니 당신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었군요."
백표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렇게나 생각하시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요?"
"......."
"설마 이번에는 숨까지 끊어진 이따위 시체를 당신처럼 살려내라
는 미치광이 같은 부탁은 하지 않겠지요?"
백표랑은 담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은소소는 사내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오."
"그럼 무엇을 원하나요?"
말을 하면서도 은소소의 시선은 백표랑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
다.

― 내 얼굴과 똑같은 인피면구를 만들어 이 사람의 얼굴에 맞추
시오. 되도록이면 당신까지 몰라볼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었으면 하
오.

"인피면구를?"
백표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면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오."
은소소는 피식 웃었다.
"당신은 나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은소소는 등을 돌렸다.
사내의 이런 명령조의 부탁이 싫었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이라면 나
이 다섯 살 때부터 사부인 불사신옹에게 배워온 수법이다.
"그런 일이라면 날이 밝기 전에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은소소의 냉담한 거절. 그러나 백표랑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자를 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은소소의 등 뒤로 다가간 백표랑.
돌연, 그가 은소소를 뒤에서 끌어 안았다.
은소소는 깜짝 놀랐다.
"무슨 짓이예....... 읍!"
은소소의 목소리가 답답한 신음성으로 뒤바뀌었다.
보라. 은소소를 억세게 끌어 안은 백표랑이 은소소의 입술을 그대
로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은소소는 앙탈했다.
앙탈이 없는 여자는 매력이 없는 여자라던가?
그러나 그녀는 결코 백표랑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거칠게 그녀의 입 안으로 밀려드는 사내의 숨결과 매끄러운 혀.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슥! 백표랑의 손이 은소소의 앞섶을 헤치고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
을 덮쳐왔다.
은소소는 전신의 기운이 소리없이 빠져드는 나른함을 느꼈다.
그녀는 녹아들고 있었다.
사내의 입술과 손에 의해 무력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사내의 입술
이 이렇게 달콤하다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백표랑의 입술이 은소
소의 입 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은소소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손등을 거쳐 어깨를
더듬어 올라가며 목을 간지럽혔다.
실로 노련한 바람둥이들만이 쓰는 애무였다.
은소소는 전신의 구석구석이 황홀해지고 있었다.
백표랑은 천천히 여인의 치마를 벗겨내렸다.
그 순간에도 그의 입술은 은소소의 목덜미와 귓불을 정신차릴 수
없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은소소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백표랑의 손길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곳을 더듬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뽀얀 무릎과 탱탱한 허벅지, 꼭 붙인 두 다리 위에 완만하게 솟아
있는 열정의 삼각지.
백표랑의 입술이 그녀의 무릎을 향했다.
혀로 감아올리는 은소소의 살결은 매끄럽고 탄력이 있었다.
"아아!"
은소소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어느새 가녀린 신음성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 한 구석이 한정없이 젖어드는 것을 깨달았다.
백표랑의 입술이 상의자락을 헤치고 불쑥 솟아오른 그녀의 젖가슴
과 유실을 깨물어가고 있었다.
은소소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백표랑은 여자의 엉덩이를 치켜 올렸다.
순간, 부끄러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녀의 몸 속으로 사내의 거
대한 일부분이 깊이 파고들었다.
온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하악!"
그녀는 왜 많은 여자들이 사내의 품에 안겨있을 때 알음거리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표랑은 둔중하게 움직였다. 느린가 하면 빨랐으며,
얕은가 하면 아주 깊고 뜨겁게 움직였다.
은소소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그녀는 알음알음 울음을 터뜨리며 몇 번인가 정상을 넘나들었
다.
백표랑은 무한한 힘과 기교로 은소소를 옭아매고 있다.
은소소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상실 이후 얻은 새로운 환희였다.
.......
두 사람의 정사가 끝나고, 막 옷깃을 여미는 은소소에게 백표랑은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은소소는 이제 백표랑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맡겼다. 은
소소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일어선 백표랑. 그는 아직도 방 안에 놓
여진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은소소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푸후훗! 아마 당신의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할 것이라 생각하오."
웃음과 함께 그는 방문을 나갔다.
.......
은소소는 백표랑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백표랑의 의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은소소와 관계를 가짐으로해서 은소소가 자신의 청을 거부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은소소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나쁜 사람!

무엇이 나쁘다는 것인가?
그런 은소소의 얼굴에는 환희의 미소가 가득하다.

* * *

<고 고신표랑지묘 애지애자 은소소 읍립(愛之愛子殷素素泣立).>

불사곡의 후미진 계곡.
하나의 무덤이 생겨났다.
아직도 벌건 황토흙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것만 보더라도 이 무
덤이 세워진 것은 얼마되지 않은 듯,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고신표랑이라고 쓰여진 무덤.
이는 바로 백표랑의 무덤이 아닌가?
무덤 앞에 한 여인,
새하얀 소복을 입은 그녀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서려있다.
은소소!
백표랑의 무덤가에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은소소가 아닌가?
모든 것이 의문이다. 어찌하여 백표랑의 무덤이 세워졌으며, 은소
소가 망부의 모습으로 이곳에 앉아있단 말인가?
스물...... 스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는 불사곡의 입구.
스으으!
늦가을의 햇살을 가르고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맨 앞.
청의에 문사건을 두른 청수한 인물의 손 안에는 벽옥선이 들려져
있다.
십절마제 두철기!
그의 뒤로는 십절궁의 수하 오백여 명이 숨소리 하나 흘리지 않
고 두철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철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뒤에 있는 간사한 얼굴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분명 그가 이곳에 있다고 했느냐?"
"헤헤헤! 그렇습니다."
두철기는 쾌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자는 성주와의 대결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그가 아무리 정심
한 무학을 지녔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목을 손쉽
게 얻으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천마혈성의 인물들이, 백표랑의 목을 얻기 위해 혈안
이 되어 있는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두철기는 행운이 따라주는 인간이다.
"가자."
두철기는 서슴없이 불사곡으로 들어갔다.
환상의 꽃세계.
그들의 앞에는 환상의 꽃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몰랐었군. 그 자가 불사곡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니.......'
환상의 꽃세계를 얼마나 걸었을까!
돌연 두철기의 걸음이 멈춰졌다.
뒤를 따르던 십절궁의 수하들도 걸음을 멈추고 두철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백여 장 떨어진 곳,
불사곡의 후미진 곳에 하나의 무덤이 세워져 있었으며,
무덤가에는 소복을 입은 한 명의 여인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제가 가서 알아볼까요?"
간사한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자 두철기는 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잠시 지켜 보도록 하자."
두철기는 소복여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얼마나 넋놓고 통곡을 흘렸던가?
문득, 여인의 한서린 음성이 들려왔다.
"표랑! 이제 편안하게 잠드세요. 당신의 복수는 어떠한 일이 있어
도 이 은소소가 갚겠어요."
백표랑의 복수를 다짐하는 은소소.
그녀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인 고수들은 똑똑하
게 들을 수 있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하늘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자
천룡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거예요."
말을 마친 은소소!
그녀는 무덤을 향해 천천히 구배(九拜)를 올렸다.
구배가 끝나고 은소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토흙의 무덤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오호호홋!"
폭풍같은 교소를 흘려낸 은소소!
그녀의 몸이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두철기의 시야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두철기는 쾌심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였군."
그는 백표랑의 죽음을 단정했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라면, 백표
랑에게는 은소소라는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철기는 느리게 무덤을 향했다.

* * *

무덤 앞에 다다른 두철기.
그는 묘비에 쓰여진 고신표랑의 이름을 발견하고 웃었다.
"이렇게 되면 가장 골치 아픈 인물이 제거된 셈인가?"
두철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덤을 파라."
자천룡은 두철기에게 백표랑의 목을 원하지 않았던가?
한 명의 청의인이 무덤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다짜고짜 무덤을 향해 쌍장을 쭉 내뻗었다.
우우우우웅!
대기를 말아올리는 진공음에 이어, 핏빛 같은 강기가 그대로 백표
랑의 무덤을 휩쓸어 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파팟!
강기가 작렬한 곳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무덤이 파헤쳐졌다. 하
나의 관이 무덤 속에 놓여 있었다.
두철기는 관 앞으로 다가왔다.
"관을 열어라."
끼이익! 지체없이 청의인의 손에 의해 관이 열렸다.
그와 함께 드러난 시신,
관 속에 드러누워 있는 시신은 다름아닌 백표랑이 아닌가? 얼굴
의 윤곽이라든가 신체가 틀림없는 백표랑의 모습이다. 두철기는 만
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시체를 본성으로 운반한다."
무덤 속에서 관이 끌어내지고, 두 사람에 의해 관은 옮겨지고 있
었다.
두철기는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후계자 계승 싸움이다. 염우가 사라진 지금 가장
염려했던 적이 사라졌다. 이렇게 되면 마희 향음아를 회유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천마혈성의 후계자 계승 싸움!
두철기는 이미 그 싸움의 승자가 자신이 되리라고 믿었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라면 구마왕이나 삼천제 중에서 자신을 능
가할 사람은 없다.

* * *

휘이이잉! 찬바람이 불어오는 산정!
언제부터인가 세 사람이 불사곡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산정에
서서 불사곡을 빠져 가는 두철기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표랑을 비롯한 두 여인.
소복 차림의 은소소와 사월령이었다.
"......."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두철기가 불사곡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백표랑은 아무런 말
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철기 일행이 불사곡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백표랑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이 백표랑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
진 존재가 된 셈이군. 재미있는 일이야."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백표랑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 백표랑을 두 명의 여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기쁜 모양이군요?"
"푸후훗! 물론이오."
"......."
"한 사람의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죽음
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오?"
사월령은 백표랑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
다. 오히려 그런 백표랑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인가요?"
사월령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상이 나를 잊을 때까지 아무래도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과 오
랜만에 단꿈에 취해 세상을 잊고 싶소."
백표랑은 두 여인을 와락 끌어 안았다.
"......."
두 여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백표랑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녀들이 백표랑의 속마음을 알랴.
두 미녀를 가슴에 안고 있었지만,
백표랑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결심이 굳어졌다.

― 이번 기회에 자천룡의 파천혈세에 대해 깊이 연구를 해야 한
다. 필요하다면 파천혈세를 익히겠다.

이미 자천룡에게 한 번 패했던 백표랑이다.
그는 두 번에 걸쳐 똑같은 패배를 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표랑의 가슴에 안겨 있는 두 여인은 마냥 행복한 모습이다.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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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권만 남았군요.
하지만 6월달이 되어서 오히려 줄어드는 시간들...
과연 4일에 한 번 올릴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뭐... 내일 일은 내일 닥쳐봐야 알겠지요.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은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엄살이라구요? 엄살이 아니라 그냥 최악의 경우일 뿐입니다.
최악의 경우 일주일에 한 편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의 답글 하나가 저에게는 박카스라는... ㅡ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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