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검궁인 의 건곤일척 2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133회 작성일 17-02-12 11:26

본문




乾坤一擲

제2권 15장 운명(運命)의 내력(來歷)



짙은 어둠이 물처럼 스며든 화원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시들은 꽃잎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같았다.

주천운은 화원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내뱉았다. 낮았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었다.

"양 노인. 당신과 내가 또다른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 곳은 양몽경의 처소였으나 주위에는 적막한 고요만이 감돌 뿐 사람의 자취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주천운의 시선이 뇌정각을 향했다. 붉은 등이 사위에 음산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리는 주천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집전령의 기한은 하루 남았다. 내일 구전주는 뇌정각에 모일 것이다. 아마도 양 노인은 천외전이나 숭양전에 있을 지 모른다.'

어느새 그의 표정이 가라 앉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우선 군마전으로 가자.'

주천운은 허리춤을 더듬어 무엇인가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황검이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가슴 속으로 호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뇌정각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버님. 이제 당신께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잠혈종 감리탁마는 서신을 읽고 난 후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깡마르고 냉혹한 인상인 그의 얼굴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떻게 이런 자에게 감리신옥같은 딸이 태어났을까?'

주천운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해서 감리탁마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축 소질."

"예."

신중한 말을 하려는 듯 감리탁마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자네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가?"

주천운은 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짐짓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입니다."

감리탁마는 비수같은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서신을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비볐다. 한순간 서신은 가루가 되어 모래알처럼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서신을 없애버린 감리탁마는 광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천운을 노려보았다.

"노부는 그 누구의 협박도 받지 않는다. 설사 구양수가 딸 아이의 장래를 미끼로 협박한다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감리탁마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흐흐 . 노부가 어찌 축공표란 놈에게 딸을 맡기겠는가? 신옥을 그놈에게 주느니 차라리 개에게 시집을 보내겠다."

" !"

주천운은 경악했다. 무엇을 믿고 이토록 오만한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그러나 주천운의 심정쯤은 알 바 아니라는 듯 감리탁마의 두 눈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만일 딸아이가 축가놈에게 몸을 버렸다면 노부는 둘 다 죽였을 것이다."

주천운의 가슴이 내려 앉았다. 감리탁마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폭사되었다.

'이 이자는 대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감리탁마는 안쪽을 향해 말했다.

"옥아 나오너라."

감리탁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장이 걷혀지고 감리신옥이 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본 순간 주천운은 모든 상황을 짐작했다.

'이제 보니 그녀가 다 말해버렸구나.'

감리탁마는 주천운에게 단호한 눈빛을 던졌다.

"노부는 자네에게 한 가지 묻겠다. 만일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이 자리에서 너희 둘을 황천으로 보내겠다!"

주천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감리탁마의 써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자네는 이 아이를 영원히 버리지 않겠느냐?"

주천운은 흠칫했다. 그것은 매우 중대한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감리신옥의 장래를 의미한다는 것을 주천운은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혼인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혼인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주천운은 담담한 눈빛으로 감리신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지금 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답해야 한다."

감리탁마의 눈에 살기가 고이는 순간 주천운은 빙긋 웃었다.

"훗훗 . 혼인은 인륜대사일진대 어찌 강압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감리탁마의 안색이 홱 변했다.

"노부를 놀리는 건가?"

"소생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많소이다. 부친의 원수를 갚아야 할 뿐더러 사나이로서 할 일도 태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한가하게 혼인을 거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천운의 논리정연한 말에 감리탁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후 그는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 말은 맞다. 노부 역시 야심이 없는 놈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한 가지만 더 확인하겠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에는 딸 아이를 거둘 수 있겠느냐?"

그때서야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감리신옥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고 감리탁마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 그럼 됐네. 노부는 자네의 말을 믿겠다."

그의 안색은 지극이 온화했다.

'놀랍다. 이자는 마도인이면서 성격이 극과 극을 달린다. 금방 서슬이 퍼렇다가도 마음이 흡족하면 다시 온화해진다.'

감리탁마는 정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주천운을 바라보았다.

"노부는 교활하거나 한 입으로 두 말 하기를 가장 싫어한다.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성격이지."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가 무슨 목적으로 이 곳에 들어왔는지는 묻지 않겠다. 노부는 자네를 사위로 생각하고 자네의 일을 돕겠네."

주천운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리탁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감리신옥의 손을 끌어다가 주천운의 손을 잡게 했다. 그러자 감리신옥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으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너희들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갈라선다면 나는 둘 다 죽일 것이다."

뒤의 말은 무척이나 냉정했다. 감리신옥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주천운은 감리탁마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듯했다. 특히 그가 자신의 내력을 캐묻지 않는 것은 뜻밖이었다. 감리탁마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빙그레 웃었다.

"핫핫 . 노부가 자리를 피해 주겠다. 너희들 사이에도 할 말이 있을 테니까."

말과 동시에 감리탁마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실상 감리신옥은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콧대 높고 오만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다소곳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은 완전히 다른 여인인 것같아 생소하기까지 했다. 침묵을 견디기 어려운 듯 감리신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절 욕하시겠지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다시 고개를 떨구는 순간 주천운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당겼다.

"아 ."

그녀가 품에 안겨들자 주천운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사랑스런 여인이오. 천하의 어떤 남자가 당신을 미워하겠소?"

감리신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저 정말 ?"

그녀의 눈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고 깊었다. 주천운은 빨아들일 듯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후후 . 사실 진작 그대가 이렇게 나왔어야 했지. 왜냐면 나는 뻣뻣한 여인은 질색이거든."

다음 순간 주천운은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감리신옥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일격을 가했다.

"억! 또 ."

주천운이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자 감리신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제가 ."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주천운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 하지만 손만 뻗으면 잡히는 그런 여자는 매력이 없소."

감리신옥의 얼굴이 홍시처럼 익었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

"후후 . 신옥. 이리 가까이 오시오. 할 말이 있으니까."

감리신옥이 의아해 하면서도 그에게 다가간 순간 강철같은 주천운의 팔이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휘감았다. 감리신옥은 깜짝 놀라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정작 마음은 넓디넓은 그의 가슴에 영원히 안겨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느새 감리신옥의 꽃잎같은 입술에 불덩이같은 뜨거운 것이 와 닿았다. 주천운의 혀가 부드럽게 율동하자 감리신옥은 황홀경에 빠진 듯 몽롱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제 감리신옥은 비로소 몸과 마음을 다해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존심 따위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확연히 깨달았으므로 .


'창궁무고의 출구는 신공전의 연못 바닥과 통해 있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연못에 축조되어 있는 석탑은 무고의 출입구를 가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신공전과 연결되어 있단 말인가?'

신공전을 지나는 주천운에게 의문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구양수의 말에 의하면 신공전의 힘은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구전에 속해 있단 말인가?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자."

문득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누구요?"

주천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주천운은 빛처럼 날아가 우측의 한 측백나무를 덮쳤다. 그러나 그가 막 측백나무를 덮치려는 순간,

파파파팟!

무수한 암기가 그를 향해 폭사되는 것이 아닌가?

날아가던 주천운은 허공에서 신형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는 분노성을 터뜨렸다.

"감히 암기를 쓰다니 !"

소매를 휘젓자 암경이 빛살처럼 빠르게 뻗어나갔다. 동시에 날아들던 암기가 돌연 반대로 퉁겨졌다.

"음 !"

측백나무 뒤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들려왔다. 이어 인영 하나가 어둠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서라!"

스스스

주천운은 진기를 끌어올려 공기처럼 몸을 가볍게 띄우며 인영을 추적했다. 그와 인영의 간격은 점점 좁혀졌다. 그가 막 인영의 덜미를 잡는 순간이었다.

꽝!

돌연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무수한 쇠구슬이 비산되었다. 동시에 자욱한 화연(火煙)으로 인해 지척을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윽고 화연이 개이자 움푹 패인 땅이 드러났다. 무서운 폭발력이 땅에 구덩이를 생기게 한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주위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자리 주천운의 모습은 물론 개미새끼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숲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 폭주신망(爆珠神網)으로 날아가 버렸단 말인가?"

인영 하나가 숲에서 걸어나왔다. 이마에 둥근 반점이 있는 인물, 그는 바로 신공전주 공야홍이었다. 그런데 그가 모습을 보이는 순간 어디선가 음침한 비웃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흐흐 . 날 죽이려면 좀더 고명한 수법을 써야 할 것이오."

공야홍은 경악하며 등을 돌렸다.

" ?"

그는 경계의 눈빛으로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 십여 장 이내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신공전주께서 어찌하여 불초를 해하려 하는 것이오?"

공야홍의 안색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 있었다.

"축공표. 노부는 자네의 무공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몰랐네."

"불초 역시 전주께서 나와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겠소이다."

이번에는 좌측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공야홍의 눈이 기이하게 번쩍이며 측백나무를 응시했다.

"노부는 자네의 진실을 알고 싶었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축공표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무슨 말씀이오?"

"허헛 . 내 눈을 속이지는 못하네. 자네가 축공표가 아니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네."

그 순간 공야홍의 눈앞에서 측백나무의 껍질이 벗겨졌다. 그리고 서서히 환상처럼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다름아닌 주천운이었다. 주천운은 나무 속에서 걸어나오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오? 그럼 내가 ."

"가짜지!"

" !"

주천운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버렸다. 공야홍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자네의 진정한 신분이네."

주천운은 검의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이자는 어떻게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다만 짐작만으로?'

주천운은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여차하면 일검에 격살할 심산이었다. 공야홍은 싸늘하게 조여드는 살기를 느끼며 손을 저었다.

"분명히 밝혀둘 것은 노부가 자네를 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네."

그는 지극히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는 약간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겠나?"

" ."

직감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낀 주천운은 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좋소이다."

"그럼 따라오게. 노부가 은밀한 곳으로 안내 하겠네."


잠시 후 신공전의 연못에 도착한 공야홍은 물 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잡아 당겼다.

쏴아아아 !

다음 순간 연못의 물이 심한 요동을 치며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주천운은 경악했다. 인공적으로 호수의 물을 뺄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야홍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출입구를 아는가?"

"그건 ."

공야홍의 물음에 주천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공야홍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자네와 감리신옥이 이 곳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네."

"그 그렇다면 ."

"따라 오게."

바위처럼 굳어 있는 주천운을 향해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은 석탑으로 들어갔다. 지하비동은 본래 물이 차 있던 곳으로써 창궁무고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잠시 후 그들 앞에 지하광장이 나타났다.

주천운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전주는 본래 이 곳을 알고 있었소?"

공야홍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 이렇게 자유로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공야홍은 그의 눈을 직시했다.

"노부는 자네와 감리신옥이 이 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곧 조사했지. 자네들은 이 곳에서 음양선도를 복용하고 무공을 익혔더군."

주천운은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공야홍의 눈에서 한 가닥 매서운 광채가 뻗어나왔다.

"자네는 누구인가?"

단호하게 묻는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이 곳에서 영원히 나가지 못할 걸세."

주천운은 흠칫했으나 곧 싸늘한 냉소를 떠올렸다.

"훗 ! 전주. 그런 협박이 통하리라 믿소?"

"흐흐 . 노부를 얕보지 마라. 노부가 비록 무공에 있어서는 자네에게 뒤질지 모르나 다른 방면에서는 천하제일이지."

" ?"

공야홍은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토목기관지학(土木機關之學)은 물론 화기술(火器術)에서 노부를 따를 자는 없다."

주천운의 눈에 한 가닥 광망이 스쳤다.

"그럼 ?"

"흐흐 . 이미 기관을 작동시켜 놓았네. 얼마 후면 이 곳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말겠지."

주천운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게 무엇을 원하오?"

"진실."

공야홍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는 신중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축공표를 죽이고 그로 가장한 이유가 무엇인가?"

더이상 감출 것이 없다고 주천운은 생각했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오."

"누구의 부탁이란 말인가?"

대답대신 주천운은 공야홍을 쏘아보았다.

"이런 방식은 불공평하다고 생각치 않소?"

"불공평하다니?"

주천운의 느닷없는 불평에 공야홍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주천운이 싸늘하게 내뱉았다.

"당신과 나는 피차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어떻소? 각자 한 가지씩 묻고 한 가지씩 대답하는 것이 ?"

공야홍는 그의 제의에 어처구니없어 했으나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주천운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문창성 양몽경의 부탁을 받고 한 일이오."

공야홍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문창성이? 그가 무엇 때문에 ?"

"이젠 내가 전주께 물을 차례요."

그제야 공야홍은 표정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좋아. 물어보게."

"이 창궁무고를 전주는 어떻게 알고 있소?"

공야홍은 잠시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이 곳은 노부의 옛 주인이 발견한 곳이네. 노부는 주인을 대신하여 이 곳을 지키고 있었네."

주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하겠소. 문창성은 내게 철혈전주 구양수를 죽여 달라고 청부를 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야홍의 이마 가운데 있는 반점이 핏빛으로 화했다. 주천운이 물었다.

"전주의 주인은 누구요?"

"노부의 주인은 바로 뇌정각주일세."

"그럼 태태마군이란 말이오?"

"이번엔 자네가 답할 차례네. 양몽경과 자네는 어떤 관계인가?"

"그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오. 다만 서로를 위해 한 가지씩 일을 하기로 했을 뿐이오."

주천운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다시 질문했다.

"다시 묻겠소. 전주의 주인은 누구요? 현 각주요? 아니면 ."

주천운은 미처 말을 다 할 수 없었다. 공야홍의 얼굴에 장엄한 기색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노부의 주인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분이네. 바로 초대 뇌정각주이신 뇌환공이시네."

순간 격동의 물결이 주천운의 가슴으로 치밀어 왔다. 공야홍은 주천운의 반응에 의혹을 품었다. 그는 황급히 물었다.

"자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주천운은 잠시 말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는 뇌정각에서 한 분의 사인(死因)을 캐러 왔소이다."

순간, 공야홍은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사인? 누구의 사인을 말인가?"

주천운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뇌정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한 분 기인께서 뇌정각에서 돌아가셨소. 나는 그분의 사인을 캐고 그분과 뇌정각의 관계를 알기 위해 온 것이오."

주천운의 음성은 심하게 떨려왔다. 이미 공야홍은 주천운의 말에서 어떤 숙명의 굴레를 직감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주체하며 되물었다.

"그 그분은 자네와는 어떤 관계인가?"

주천운의 눈에 뿌연 안개가 어렸다.

"그분은 나의 아버님이시오."

"고 공자, 부친의 성함은 무엇이오?"

공야홍은 신음을 하듯 겨우 한 마디씩 말했다. 주천운의 두 눈은 이미 붉게 물들었다.

"아버님의 성함은 주(朱) 휘경(輝京)이오."

"오오 !"

외마디 탄식과 함께 공야홍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그가 바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소주라니 .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여태껏 불러보지 못한 뜨거운 한 마디가 통곡처럼 터져나왔다.

"소 소주(小主)! 소주셨군요!"

공야홍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신 공야홍 . 태자전하(太子殿下)를 알현합니다."

주천운은 경악했다.

"태, 태자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공야홍의 노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나친 격동 탓인지 그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후였다.

"전하 ! 전하는 건문제 선황께서 아버님이셨음을 모르셨습니까?"

순간 주천운의 이성을 한 줄기 벼락이 강타했다.

"무 무슨 소리요? 건문제께서는 윤문(允汶) 아버님의 함자와는 다르지 않소?"

공야홍은 안타까운 듯 부르짖었다.

"그것은 함자를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아아 ! 태자전하. 분명 전하는 선황의 일점 혈육이십니다!"

"이해할 수 없소! 나의 아버님은 뇌환공(雷奐公) . 그렇다면 뇌정각을 세우신 나의 아버님께서 사라졌던 건문제이셨단 말이오?"

주천운의 대꾸에 공야홍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쳐들었다.

"그렇습니다. 선황께서는 보위를 찬탈 당하시고 천하를 유랑하다가 이 곳에서 창궁무고를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황께서는 복위(復位)를 필새의 염(念)으로 알고 거사를 위해 뇌정각을 세우셨습니다."

주천운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일은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는 부친이 뇌정각과 깊은 관련이 있고 부친이 바로 뇌환공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뇌환공 그가 바로 건문제였다니 .

문득 그는 황검을 뽑아 휘둘렀다.

우 웅!

황검은 허공에 빛을 그리며 맑은 검명(劍鳴)을 냈다.

"이 이것이 그럼 아버님의 황검이란 말이오?"

공야홍은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그러하옵니다. 태자전하!"

주천운은 불신의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힘껏 저었다.

"믿을 수 없다. 증거 ! 증거를 대시오! 아버님은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어머님도 역시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소!"

그의 말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 순간 공야홍의 눈에 혈기가 차 올랐다.

"전하께서 선황의 친자라면 오른쪽 어깨에 북두성문(北斗星紋)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황께서 신(臣)에게 친히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아 !"

주천운은 더이상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과연 7개의 북두좌(北斗坐)를 닮은 점흔이 있었다. 운명이라면 너무도 엄청난 운명의 안배였다. 공야홍은 허공을 바라보며 격동에 찬 음성으로 외쳤다.

"하늘이 무심치 않았소이다. 주공의 후손을 보내주시다니 . 아아 !"

공야홍의 두 눈에는 기쁨과 감동이 한 데 얽혀 그 자신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한편 주천운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기쁨보다는 충격이 앞섰다. 너무나도 상상 밖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늘이여 . 대체 당신의 뜻은 무엇이오? 이 주천운이 페위된 황제의 아들이라니 .'

우우웅 !

주천운의 귀에 황검의 검명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마치 그의 질문에 회답이라도 하듯.


"아아 . 정말 꿈만 같은 일입니다. 주공의 일점 혈육을 다시 뇌정각으로 모시게 될 줄이야 !"

지하통로를 앞장 서서 걷는 공야홍의 감격에 찬 말은 통로의 암벽에 메아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주천운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공야홍은 감회에 젖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선황의 충신인 양천위, 진자방, 곽릉 등도 이 사실을 알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주천운은 놀라 물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그들을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 ?"

"바로 문창성, 천외전주, 숭양전주가 그들입니다."

비로소 주천운은 깨달았다.

'그 그랬었구나! 그들은 지난날 아버님이 보위에 계셨을 때의 신하 . 그들이 이름을 바꾸어 뇌정각에 투신한 것이구나!'

이윽고 통로가 다 끝났는지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다 왔습니다. 전하!"

동시에 공야홍은 휘익! 하고 연못의 석탑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으아아 악!"

공야홍은 몸을 솟구친 순간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가 막 신공전의 연못 위로 솟구친 순간, 금빛찬란한 광채가 그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었다.

"공야홍!"

뒤에 있던 주천운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똑똑히 보았다. 한 자루의 황금전(黃金箭)이 공야홍을 꿰뚫는 것을!

공야홍은 힘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그와 주천운의 시선이 얽혔다. 공야홍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겨우 말했다.

"저 전하 . 금사신궁(金獅神弓) 어서 피하십시오."

털썩!

물마른 바닥에 공야홍의 신형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희미하게 감겨져 있는 그의 눈에는 뿌연 안개가 어려 있었다. 주천운은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연못 주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8인의 괴인이 둘러쌌다.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얼굴도 피부도 온통 금빛이었다. 두 눈에서는 태양과 같은 안광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둥글게 서 있는 그들로 인해 연못 주위는 삽시에 한 덩이의 빛무리로 화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웅후한 음성으로 외쳤다.

"잡초일망정 뿌리째 제거하지 않으면 이듬해 다시 돋아나는 법 ! 그대는 세상에 잘못 태어났다."

주천운은 허공에 떠오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쳐라!"

예의 웅후한 음성이 일갈을 터뜨리자 8인의 금색인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쌍장을 날렸다.

꽈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일었다. 주천운은 이 무시무시한 경력에 전신이 압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혈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으으 이건 무슨 신공이기에 ?'

눈조차 뜰 수 없었다. 8개의 빛줄기는 그의 주위를 맴돌며 가공할 진을 형성하더니 곧바로 벽처럼 일어서서 한꺼번에 몰려왔다. 주천운은 붉게 충혈된 눈을 뜨고 똑바로 금빛의 진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스침과 동시에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황검을 뽑았다.

"가랏!"

그는 노호를 지르며 일학충소(一鶴沖紹)의 신법으로 금색인들의 장공을 뚫고 솟구쳤다. 그때였다.

"가거라! 하늘의 태양은 단지 하나만이 필요할 뿐이다!"

슈우욱!

빛! 태양의 무리가 주천운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것들은 하늘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듯 거대한 기세로 몰려들었다.

주천운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수중의 황검으로 본능적으로 쳐 나갔다. 투명한 검막이 부드럽게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태양광선은 그가 전개한 검막을 소리없이 뚫고 들어왔다. 순간 주천운의 복부가 화끈거렸다.

"크으윽!"

허리에서 등까지 불에 지지는 듯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어느새 그의 몸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때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의식 저편에서 마녀(魔女)의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호호 !"

뒤이어 폭음이 울리고 그는 더이상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구전(九殿)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지금 구전의 전주가 뇌정각에 모였다. 그것은 10년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집전령(集殿令)이 뇌정각주의 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굳게 닫혔던 뇌정각의 문이 열리자 구인(九人)의 전주는 뇌정각으로 들어갔다. 바야흐로 어쩌면 천하(天下)를 뒤바꾸게 될지도 모를 엄청난 역사(歷史)가 그 첫 행(行)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는가? 그로 인해 향후 대혈겁(大血劫)의 피바람이 천하(天下)를 휩쓸게 된다는 것을 ?

뇌정각으로 가장 나중에 들어간 인물은 신공전주였다.

막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어렸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은 문 안쪽에 장치된 하나의 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구구궁 .

오철(烏鐵)로 된 문은 굉음을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