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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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85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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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3권 제33장 변신 (變身)



장원의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2인이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그들 사이에는 웬지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왼쪽에 있는 인물은 천리호리(千里狐狸) 동방백 (東方魄)이었다.


그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 문사로서 전신에서는 물처럼 담담한 기도가 흐르는 위인이었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백룡이었다.


백룡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동방백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역용술(易容術)의 종류는 무수히 많소이다. 더욱이 그 방면의 전문가들은 숱한 절기를 개발했소이다. 혹자는 역용고(易容膏)를 이용하거나 내력을 사용하여 근육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자는 집도술(執刀術)로 용모를 바꾸는 획기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


동방백은 말끝을 흐리며 문득 신비한 읏음을 흘렸다.


"하지만 수백 가지에 달하는 역용술에도 모두 단점은 있소이다."


백룡의 눈이 반짝였다.


"단점이라면 어떤 것이오?"


백룡은 연경을 떠나 숭산에 다녀온 후 바로 이 곳을 찾았다. 문사릉으로부터 이 곳에서 얼굴을 바꾸는 작업을 비밀리에 시행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천리호리 동방백을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백룡은 동방백을 과거 낙양의 관대부의 장원에서 부딪친 적이 있었다. 또한 그로 인해 내정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다행이랄까? 뇌정각에서 금사신궁을 맞고 병서보검협에 떨어진 이후 사실상 백룡의 용모는 크게 변해 있었다. 따라서 동방백은 그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동방백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천하의 어떤 역용술에도 단점이 있소. 그것은 진정한 고수(高手)라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오."


"허점이라면 ?"


"내공이 강한 자의 안력에는 투시성(透視性)이 있으므로 언제고 그 실체가 파악되기 마련이오."


백룡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완벽한 역용술은 어떤 것이오?"


동방백은 빙긋 웃었다.


"가장 원시적인 역용술이오."


"원시적인 것이라니 ?"


"바로 인피면구(人皮面具)요."


순간 백룡은 흠칫했다.


"그것은 3류의 인물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 아니오?"


"후후 . 그렇지만은 않소. 제대로 된 면구술을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오."


그의 눈에 자부심이 어렸다.


"노부도 그 중의 하나요."


백룡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어떤 수법이오?"


"간단하오. 살아 있는 자의 얼굴 가죽을 벗기되 열여덟 가지의 방법을 빠뜨리지 않고 지켜가면서 벗겨내면 되는 것이오."


"그렇게 복잡한 것이오?"


동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백룡을 옆 방으로 안내했다.


사면의 벽은 모두 흑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아무런 장식품도 없었다. 다만 방 한가운데 역시 검은 색의 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동방백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관뚜껑을 열었다. 순간 폐부를 찌르는 강렬한 약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관 속에는 약수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한 구의 시체가 그 약수에 잠겨 있었다.


25, 6세 정도 된 청년이었다. 제법 영준한 얼굴을 지녔으나 위로 치켜진 눈꼬리에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자는 서장(西蔣) 밀천환궁(密天幻宮)의 소궁주인 사비청이란 자요. 귀하는 바로 이자로 변장하게 될 것이오."


"사비청?"


동방백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비청은 밀천환궁 대법왕의 직전 제자로서 이번에 뇌정각과 손을 잡아 파견된 것이오."


" ."


백룡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동방백이 계속했다.


"중도에서 동창의 금사대 18인에 의해 살해되었소."


백룡은 가슴이 섬칫했다. 이미 완벽한 각본을 짜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방백은 백룡의 의중을 모르는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부는 마존으로부터 명을 받아 귀하를 사비청으로 변장시키게 될 것이오."


" ."


"이제부터 작업에 착수할 것이오."


백룡은 관 속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다소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동방백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시체의 보존은 완벽하오. 사흘 후에 면구를 뜯어낼 것이오."


그는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그 전에 귀하는 이것을 읽어야 하오."


"무엇이오?"


백룡은 책을 받으며 물었다.


"사비청의 습관과 태도, 말투 등 모든 것이 적혀 있소. 완벽하게 숙달하기 바라오."


"알겠소."


3일(三日)이란 시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 동안 백룡은 사비청의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했다.


백룡의 얼굴에 인피면구를 씌운 동방백은 다소 흥분한 음성으로 외쳤다.


"됐소. 이제 완벽한 사비청이 된 것이오."


그는 백룡에게 동경(銅鏡)을 들이댔다. 동경을 본 순간 백룡은 대경했다. 자신의 얼굴은 이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로 사비청의 얼굴로 변해 있는 것이다.


찡그리거나 웃을 때의 표정은 그대로 사비청이었다. 심지어는 혈색마저도 같았다.


"대단하지 않소? 매미날개처럼 얇아 표정변화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오."


동방백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신안(神眼)을 지닌 자라도 귀하의 얼굴이 역용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오."


동경에 얼굴을 비추어 보던 백룡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동방영주의 면구제작술은 가히 신기(神技)의 경지요."


"과찬의 말씀이오."


백룡은 정중히 포권을 했다.


"그럼, 이만 떠나겠소이다."


동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건투를 비오."


휙!


백룡은 신형을 날렸다.


잠시 후 혼자 남은 동방백은 눈을 번뜩이더니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놀라운 일이다. 설마 했는데 백장천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저자는 바로 지난날 낙양에 나타났던 주천운이 틀림없다."


결국 동방백은 백룡의 정체를 알아내고 만 것이었다.


이어 급히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한 동방백은 서신을 전서구(傳書鳩)의 발목에 묶어 날려 보내며 중얼거렸다.


"후후! 네가 다른 의도를 품고 있다 해도 결국은 발목을 잡히게 될 것이다."


전서구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동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둘기가 막 숲을 넘어갈 때였다. 돌연 무형의 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머뭇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강한 흡인력에 빨려들 듯 순식간에 숲속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비둘기는 한 사나이의 손에 잡혔다.


바로 백룡이었다. 그는 허공섭물진기(虛空攝物眞氣)로 비둘기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그는 전서구의 발목에서 서신을 끌러 읽었다.


"역시 그는 날 알아보았군. 과연 영리한 자다. 하지만 ."


백룡은 서신을 고쳐 적은 후 다시 전서구를 날렸다. 힘차게 날아오르는 전서구를 바라보며 백룡은 중얼거렸다.


"동방백. 내게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오. 그때까지만 신분이 드러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오."


휙!


다음 순간 백룡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항산(恒山)의 안문관(雁門關) 북쪽의 장성(長城)을 내려보는 북방대산이 있다. 천하무림의 운명을 손 안에 쥐고 있는 마세(魔勢)는 바로 이 곳에서 숨쉬고 있었다.


광양장(廣陽莊).


광양장은 황산의 북쪽에 있는 장원으로서 본래 북방변경의 수비대장이 거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한 곳으로 장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광대한 규모였다.


단단하게 쌓아올린 성벽은 가히 철웅성을 방불케 했고 항상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험상궂게 서 있었다. 그것은 곧 천연의 요새로도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미시(未時) 무렵.


일단의 기마인들이 광양장의 대문을 열고 달려나왔다.


두두두두 !


40여 명으로 구성된 그들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태양혈이 불룩한 것으로 보아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선두에는 청삼 노인이 달리고 있었다. 그의 바싹 마른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육순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차갑고 싸늘하게 번뜩이고 있어 어딘가 패도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박차를 가하면서 투덜거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서장무림의 최고봉인 밀천환궁의 소궁주라 해도 노부로 하여금 직접 마중하게 하다니 ."


무척이나 불만스러운 표정이 청삼 노인의 얼굴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청삼 노인은 뇌정각의 구전 중 천살전주(天煞殿主)였다. 과거 그의 외호는 천살마영(天煞魔影) 추달(秋達). 지금 그는 각주인 철혈신군 구양수의 명으로 사비청을 영접하러 나가는 중이었다.




천예루(天藝褸).


항산 아래 있는 자그마한 객점인 천예루는 지금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며칠 전 한 명의 금삼 청년이 그 곳에 투숙했기 때문이었다. 외모는 영준했으나 오만한 성격을 지닌 자로서 3일간을 머물면서 황금을 물쓰듯 마구 뿌렸다.


그로 인해 천예루의 주인인 황일(黃一)은 아예 영업을 전폐했다.


일체 손님을 받지 않고 오직 금삼 청년의 시중을 드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는 천예루의 기녀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인근의 다른 객점에 있는 기녀들까지 총집결시켜 금삼 청년의 비위를 맞추느라 온통 정신이 없었다.


따라서 천예루에는 연일 향연이 베풀어지고 주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 가운데 금삼 청년은 기녀들과 함게 밤낮을 뒹굴고 있었다.


그는 거만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단히 색(色)을 밝히는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와 하룻밤을 지낸 기녀들은 혀를 내두르며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분은 사람도 아니에요. 호호! 세상에 그렇게 정력이 셀 수가 ."


대체 금삼 청년의 정력이 어떠하길래 ?



두두두 !


40여 명의 기마인들이 천예루에 도착했다.


천살전주는 황일을 통해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잠시 후 천살전주는 별원으로 안내되었다.


별원에 들어선 순간 천살전주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술상 앞에는 한 명의 금삼 청년이 옷매무새가 잔뜩 흐트러진 채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주위에는 화려한 꽃밭을 연상시킬 만큼 수많은 기녀들이 반라의 차림으로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삼 청년은 지금 그의 앞에 누가 와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거슴츠레한 눈은 오직 기녀들의 풍만한 육체에 쏠려 있었고 술에 취한 듯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천살전주는 역겨움을 느꼈으나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실례하오! 각주께서 사 소형을 모시라는 분부가 계셨소이다."


금삼 청년은 사비청으로 변장한 백룡이었다. 그는 거만한 시선으로 천살전주를 바라보았다.


"귀하는 누구요?"


천살전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말했다.


"노부는 천살전주이다."


사비청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후후 . 소문을 들었소. 뇌정각의 구대전주의 무공이 놀랍다고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본 공자는 중원무학을 흠모해 왔기에 언제고 한 번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었소."


천살전주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중원에 오자마자 계집질이라니 . 너같은 놈은 노부의 삼초지적(三招之敵)도 되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기녀들은 사비청에게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사비청은 그녀들의 박속처럼 하얀 유방과 목덜미를 아쉬운 듯 음탕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떨치고 일어섰다.


"얘들아, 이만 헤어져야 겠다."


"아이, 공자님 ."


기녀들은 사비청에게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사비청은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휙 뿌렸다.


쫘르르!


눈부신 보주(寶珠)가 사방으로 흩어지자 기녀들은 기쁨에 찬 교성을 내지르며 앞다투어 보주를 줍기 위해 달려갔다. 어떤 기녀들은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드러낸 것도 모른 채 보주에 달려들었고, 어떤 기녀들은 수치도 모른 채 보주 다툼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하하 !"


사비청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천살전주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갑시다."



백룡은 며칠 동안 철혈신군 구양수가 베푸는 주연에 참석했다. 그는 술과 환락에 흠뻑 취해 있었다. 적어도 남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백룡은 이미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한 후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라졌다. 과거의 뇌정각에 비해 두 배 이상 힘이 증대되었다.'


그렇다. 광양장은 복마전으로 화해 있었다. 수많은 마도고수가 집결되어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구전도 재편성되었다. 천외전, 숭양전, 신공전의 전주가 교체되었다. 다만 군마전의 전주만은 그대로 였다.


백룡은 몇 차례 감리신옥을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와 인사할 때도 그저 건성으로 했을 뿐이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듯 초점이 없는 눈과 핏기없는 얼굴은 마치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같아 보였다.


백룡은 그녀의 측은한 모습을 보자 불현듯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밤하늘에 날카로운 초생달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시각.


발등을 덮을 정도로 포근하고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고 평생가도 한 번 볼까말까한 온갖 진귀한 집기들이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거소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백룡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마침내 호굴에 뛰어들었다. 아버님의 원수는 지척에 있다.'


가슴이 격동으로 끓어올랐다. 백룡은 마녀 염화봉을 떠올렸다.


'그 마녀는 어디에 있을까 ? 표면상으로 뇌정각을 관장하는 것은 철혈신군이다. 그러나 그 역시 마녀의 수하에 불과하고 보면 .'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염화봉이 어디에 있는지 소재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백룡은 사비청의 신분으로 초빙된 고수였으므로 뇌정각의 내정에는 깊이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뇌정각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전의 고수들은 빈번히 무림에 진출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고수들이 은밀히 드나드는 것을 백룡은 알았다.


'뇌정각은 이미 천하각파를 장악했다. 그들이 수십 년간 뿌리내린 외삼단이 활동을 시작해 정사무림을 거의 완벽히 장악했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림성을 축성하는 것은 염화봉이 곧 무림제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스스로 성주(城主)의 자리에 오른 후 황궁을 공격하겠다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백룡은 전율했다.


'현상태대로라면 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철 노인과 팔마가 무사히 구파일방의 가짜 장문인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장악했다는 점이다.'


그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천하는 난세다. 일촉즉발이나 다름없다. 잘못 도화선을 건드리면 혈겁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의 눈에 단호한 빛이 스쳤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룡(魔龍)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다. 머리를 잃으면 용은 힘을 쓰지 못하는 법!'


그때였다.


스스스


미세한 음향과 함께 한 줄기 빛살이 지붕과 지붕 사이에 떠올랐다. 백룡은 흠칫했다.


'기라성같은 마두들이 도사린 이 곳에 괴영(怪影)이 나타나다니 ?'


휙!


그는 신형을 날려 흑영을 미행했다. 잠시 후 흑영은 한 전각 속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저 곳은 광양각(廣陽閣). 바로 철혈신군이 있는 곳이 아닌가?'


광양각은 광양장의 중심에 있는 전각으로서 모든 명령이 집행되는 곳이었다. 3층으로 이루어진 광양각은 어둠 속에 음산한 기운을 뿌리며 솟아 있었다.


3층의 창가에 백룡은 박쥐처럼 매달렸다. 그는 숨을 죽이며 누각 안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철혈신군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귀에 익은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순간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비 빙화(氷花)!'


그는 경악했다. 분명 그것은 빙화의 음성이었다. 그는 너무도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빙화 ! 살아 있었구나!'


잠시 후 누각 안에서 예의 흑영이 쏘아져 나왔다. 흑영은 빛살같은 속도로 야천(夜天)을 날아갔다. 가히 놀라운 신법이었다. 그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흑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빙화 !'


빙화는 철혈관에서 인연을 맺은 후 그가 감리신옥과 함께 창궁무고로 나왔을 때 실종되었었다. 그런 빙화가 이 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빙화가 철혈신군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만 한 마디만은 들을 수 있었다.


'3일 후 마후(魔后)가 온다고 했다. 마후라면 .'


백룡은 가슴이 섬뜩했다.


'혹시 염화봉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안색이 변해 버렸다. 동시에 내심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빙화가 그 마녀와 함께 있단 말인가?'



3일 후 백룡은 광양각으로 향했다. 철혈신군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온 것이었다.


밀전의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전면에는 화려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상아(象牙)와 칠채보주로 장식된 침상에 한 명의 궁장 소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백룡은 전율했다.


'저 소녀가 염화봉이란 말인가?'


빙옥같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냘픈 체구였다. 긴머리는 자르르 윤기를 흘리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있었고 눈동자는 푸른 비취빛으로 빛났다.


궁장 소녀는 침상 옆의 은쟁반에서 빨갛게 익은 사과를 집어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얼음으로 조각한 듯 투명한 손가락이 작은 산새의 날개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침상 옆에는 한 명의 흑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백룡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빙화!'


바로 빙화였던 것이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飁 염화봉이 맑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자 백룡은 아찔했다.


'가공할 미염안(美艶眼)이다!'


염화봉의 비취빛 눈동자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염화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호호호 ! 오랜만이군. 비청(秘靑)."


순간 백룡은 가슴 속이 환해지는 것같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여인의 음성은 너무도 해맑아 마치 소녀의 음성같았다.


백룡은 황급히 마음을 가다듬고 포권했다.


"마후께 인사드리오."


염화봉이 웃었다.


"비청. 중원에 오더니 예의가 많이 좋아졌군 ? 그래, 법왕은 안녕하신가?"


백룡이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별래무양하시오."


"호호 . 법왕이 비청을 보낸 데는 물론 약속을 이행키 위함이겠지?"


그 순간 백룡은 당혹했다.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그저 신비한 척 웃어보이는 방법밖에 없지.'


백룡은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통한 것일까? 염화봉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혹적인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왜 대답을 않는다지? 오라! 비청은 혹 딸아이가 추녀일까 봐 망설이는 모양이구나?"


'딸 ? 그렇다면?'


이제야 확연히 깨달아졌다.


'그럼 사비청이 이 곳에 온 이유는 바로?'


염화봉의 얼굴에는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패였다. 그것은 보는이로 하여금 저절로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만큼 귀여운 것이었다. 염화봉은 비취빛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비청. 그대는 나의 모습이 어떻다고 느끼지?"


마치 어린 소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처럼 당돌하면서도 천진한 표정으로 그녀는 물었다.


백룡은 히죽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최고의 미녀시오."


염화봉이 웃었다. 물방울처럼 가볍게 튀어오르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너무도 맑고 고왔다.


"안심해, 비청. 사라는 이 어미를 닮았거든."


'사라 .'


바로 그때 무릎을 꿇고 있던 빙화가 갑자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백룡을 주시했다. 순간 그녀의 눈에 어떤 충격의 빛이 역력히 드러남과 동시에 두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것이 아닌가.


백룡은 흠칫했다.


'빙화가 ?'


염화봉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청. 너와 사라의 혼인은 중원무림과 서장무림의 화합을 뜻하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염화봉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우수수수


마치 무수한 별이 떨어지는 듯 상쾌한 음향을 내며 긴 흑발이 출렁였다. 소녀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그녀의 몸짓은 관능적인 요부를 연상케 했다.


"이제 얼마 후면 무림성이 완성된다. 그때 혼인을 거행하는 것이 적당할 거야."


찰나 염화봉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빙화가 백룡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염화봉의 눈에 언뜻 차가운 섬광이 일었다.


"빙화!"


" !"


빙화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곧 바닥에 이마를 대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후님 ."


"호호 . 비청이 마음에 드느냐?"


너무나 직선적인 물음이었다.


"저는 ."


빙화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순간 백룡은 결심했다.


'모험이다. 하지만 일단 주사위를 던져보자.'


"마후."


" ?"


백룡은 은근한 웃음을 흘렸다.


"청이 하나 있소."


"호호 ! 말해 보아라. 비청."


백룡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시다시피 ."


그의 눈에 한 가닥 탕기가 어렸다.


"비청은 한 여자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의 시선이 빙화를 향하는 순간 염화봉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녀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고약한 녀석!"


그녀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 너의 욕심은 여전하구나. 호호 ! 이 계집애가 마음에 든단 말이지?"


" ."


"호호! 밀천환궁의 제자라면 호색(好色)하는 것은 당연하지. 그러나 한 가지 약속을 해야 된다."


백룡은 의아했다.


"어떤?"


염화봉은 정색을 했다.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는 간섭하지 않겠다. 하지만 혼례를 올린 후에는 ."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이후에는 함부로 바람을 피울 수가 없을 거야."


백룡은 히죽 웃었다. 염화봉은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긴 사라의 성격도 만만치 않으니까 너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백룡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그때의 일이오."


염화봉은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와삭 베어 물며 말했다.


"빙화야. 비청을 잘 모셔라."


빙화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저 저는 ."


염화봉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너는 사라와 자매간이나 다름없으니 혼례를 올릴 때까지 비청을 모시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 ."


빙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염화봉은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백룡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한 일이다. 눈치채지 못했구나.'


그는 빙화에게 포권을 하며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 빙화 낭자. 소생 사비청이 낭자를 모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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