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그녀는 포르노 소설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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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181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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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포르노 소설 번역가』
제7화 이·메일(EMAIL) 러브
- 류 희 -

그녀는 스무권의 포르노 소설을 대충 훑어보며 다음 작품
선정에 고심 하였다. 이런 류의 책을 스무권씩이나 한꺼번에
보자니 정말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헉헉거리며 시작해
서 헉헉거리며 끝나는 책들이지만 읽고 있는 그녀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모두 틀에 박힌 형식들이기 때문이
다. 문학성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뚜렷한 주제조
차 없는 것이다.

하긴 표현이 좋아 성인소설이지 이것은 '포르노'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포르노에서 주제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개그
일지도 모른다. 포르노의 주제? 열심히 하자, 열심히 박자, 열
심히 싸자, 가끔은 변태스럽게 하자,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
는 어떻게 하니, 나 따라 해봐라, 요렇게... 뭐, 그 정도가 아
닐까.

겨우 두세권의 쓸만한 작품들을 선정하고 나자 이미 새벽
두 시가 지나 있었다. 야행성인 그녀는 그 시간이면 눈이 초
롱초롱해진다. 그녀는 PC통신에 들어갔다. PC 통신에 들어가
는 것은 최근 그녀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를 찾기 위
해서이다. '길위에서'라는 대화명을 가진 서른여섯의 남자말이
다. ID는 SOSIM. 그 시간에 그가 통신에 들어와 있지야 않지
만 그가 오늘도 천리안에 들렀다 나갔는가를 확인하는 것만
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설레었다.

그런데 뜻밖의 메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SOSIM. 그
에게서 온 것이었다. 메일을 열어보는 그녀의 손가락끝이 달
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황급히 옮겨 적었던 당신의 아이디가 맞길 바라면서 몇 자
띄웁니다.
먼저 당신의 작품에 대해 번역이며 후기가 시시하다고 했던
지난번의 평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난 통신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괜히 불만을 품고 심술을 부리는 소위 '폭탄'
이랍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 버릇으로 좋은 평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당신이 역자라고 하여서 몹시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그날 당신은 두 번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을 하셨던가
요. 나는 두 번째 사랑은커녕 첫 번째 사랑도 없습니다. 태어
나서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겨우 한시간 정도 사이버상에서 대화를 나눈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시작일까
두렵습니다.

간단하게 제 소개를 하자면 여기는 대전이구요, 두 딸의 아
빠이며, 건강한 아내가 있습니다. 모 기업의 과장이며 부업으
로 카페를 하고 있구요. 작가인 당신의 친구가 되기에 너무
미흡하지요?

당신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답장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S>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느낌을 그도 갖고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얼른 답장을 썼다.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실은 저도 그
후 계속 천리안을 들락거리며 당신을 찾았습니다. 전율이 이
는 것 같았던 그 느낌이 저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군요, 아내와 두 딸이 있군요. 저도 딸은 하나 있습니
다만, 남편은 없습니다. 남들이 '이혼녀'라고 하더군요. 사람들
은 곧잘 아무렇지도 않게 왜 이혼했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
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그것이지만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성격차이로 헤어졌어요."

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유로 둘러댑니다. 이 세상 부부들 가
운데 성격 잘 맞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혼사유
중에서 '성격차이'라는 걸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던 저였습
니다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핑계를 댑니다. 왜 이혼
을 하였건 그들이 알아서 내게 대체 무얼 어떻게 해주겠다는
건지 말입니다.

괜히 흥분했군요, 역시 어쩔 수 없는 약점은 약점인가 봅니
다. 이렇게 우리 메일을 시작하는 건가요? 꿈같군요.

피에스. 저는 작가가 아닙니다. 예전에 남편이 있을 때는 부
식비 벌려고 했던 일이고, 지금은 가장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일 뿐, 문학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여
자입니다. 과대평가 하지 말아 주세요. 오히려 당신의 대화상
대가 될 수 있을지 제쪽이 걱정입니다. M>

그녀는 뚜벅뚜벅 사랑이 찾아오는 예감을 온몸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느낌, 얼마나 오랜만인가... 사람에 대한 생
각으로 잠이 오지않는 이런 밤이 또다시 올 줄이야.....

다음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하여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전화가 울렸다. 출판사 사장이었다. 그
는 우리에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주 사무적인 어
투로 말하였다.

"다음 작품할 것 좀 골라 보셨습니까? 시놉시스를 팩스로 보
내실랍니까? 아, 마침 제가 오후에 그 동네 근처로 갈 일이
있는데 잠깐 들리겠습니다. 시놉시스 정리할 것 없이 만나서
대충 줄거리만 들려 주십시오."

사장은 언제나 용무가 있을 때 '아이가 있어서 외출이 힘드
실 테니까', 하는 배려로 이쪽 동네까지 와주었다. 굳이 와주
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그러죠, 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한 번 관계를 했다고 해서 더 친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렇다고 어색해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둘다 성인인 것이다.
섹스 한 번 한 것으로 마치 정부이기나 한 양, 끈적거리는 사
이가 되는 것은 그녀도 싫었다.

그렇지만 약간 꺼림칙한 느낌만은 떨칠 수 없었는데 사장의
유난히 건조한 어투에 이내 그것을 잊을 수 있었다.

약속장소는 항상 정해져 있다. 아파트 단지 길 건너에 있는
카페. 사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 여전히 별일 없었다는 얼굴
을 하고 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는 키가 큰 나무화분들이
놓여 있어서 다른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기도 하지
만, 오후 두 시가 지난 시간대 탓인지 가게에는 손님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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