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번역 德厚の野望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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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1,356회 작성일 17-02-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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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가장 각문 밖으로 휘적휘적 나온 덕후는 우뚝 정지했다. 저 편에서 호위 둘과 품에 한 아름 무언가를 진 시종 둘을 거느리고 오는 소녀를 본 탓이었다. 잡티 없는 이목구비와 벽옥색 치마가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백양목처럼 하얀 분위기를 주는 소녀였다. 다만 야무지게 다문 입매와 서늘한 눈빛이 차가운 생기를 전했다.

소녀 측에서도 덕후를 발견했는지, 지척거리에서 멈칫했다. 염미홍이 함께 있더라면 자연스럽게 달라 붙었겠지만 가장 낯설은 소월하와 대면하자 딱히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지나치기는 뭐해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소 군사님 아니신가.”

생판 남처럼 인사를 하는 덕후를 소월하는 말갛게 보았다. 겉만 보면 군자처럼 보여도 야밤의 도적처럼 자신의 몸을 취한 남자다. 내 소유물이라는 듯이 끈적끈적하게 달라 붙지는 않았지만, 그 날은 마치 너만의 꿈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는 태도에는 묘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파랑은 짧은 틈으로 가라앉았다.

“주 집사님이시군요. 어디로 행차하시는가요.”
“종일 장내莊內에만 있어서 곰팡이가 슬 것 같소이다. 햇볕 쬐러 가는 길이라오.”

덕후는 팔을 쫙 펼치며 활달하게 말했다. 원래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만사태평인 모습을 대하자 소월하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한가하시군요. 누구들은 바쁜데 말입니다.”
“아, 그게. 다음 작에 대한 구상이랄까. 영감을 얻기 위해서 말이오.”

군색하게 변명하는 덕후는 잘 되었다는 듯 은근히 권했다.

“점심을 안 드셨다면 이참에 끼니 좀 때우면? 겸사겸사 상의 좀 할 것도 있고.”

소월하는 거절할까, 하다가 덕후가 속내를 짚은 듯 앞질러 말하는 바람에 고개를 끄떡였다. 시종들에게 안으로 가 대신 인계하라고 이르고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호위도 자신의 별채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전했다. 호위들이 난색을 표하는 듯하자, 소월하는 얼굴빛을 싸늘하게 굳히며 경고했다.

“윗사람의 심기도 파악할 줄 모르는 자들은 필요 없어요.”

할아버님들이 자신의 신상을 염려해서 특별히 붙여준 이들이지만, 자신은 유람을 나온 게 아니다. 하극상의 풍토와 조직 생리를 태생적으로 겪으며 자라난지라, 상명하복에 거스르는 모습에 대해선 대해 유독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오히려 난색을 표한 쪽은 덕후였다.

“호위까지 떼어놓고 올 필요 까지는.”
“주 집사님이 제게 따로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시니 이 또한 업무의 연장. 예는 갖추는 게 좋죠. 정 그러시다면 같이 호위를 데리고 오든가요.”

소월하는 냉랭히 잘랐다. 호위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할아버님들에게 근황 보고가 올라간다. 감시라기보다는 염려에 가까운 것이라 묵인하고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덕후 같은 인간과 대담으로 인해, 만에 하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녀들이 있는 소주는 심가장의 부재로, 대상련을 중심으로 천하문이 조력을 더해주고 있는 편이라 여차하면 방수들을 모을 수 있었다.

덕후의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범 같은 마누라들을 피하러 몰래 빠져나온 처지에 데리고 올 리가 없다. 공인(?) 보디가드인 형욱은 숭무단 조련으로 바빠 몸을 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 가십시다. 무공은 나보다 높겠지?”

뒤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으나 여차하면 몸은 알아서 지키라는 뜻임을 모를 리가 없는 소월하는 약간 입매를 치켜올렸을 뿐 무시했다. 선하령 전투의 내막을 나름 아는 까닭이다. 대외적으론 염미홍이 덕후를 지키며 사지를 헤어나간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 소월하가 아는 염미홍은 난전에서 상처 하나 없이 자기 몸을 지킬만한 실력은 없다. 무림 속담에 서푼은 늘 감추라는 말도 있고, 아마 덕후가 빈사지경으로 칼침을 맞은 것과 염미홍이 무사한 것과 연관 있겠지. 후일 참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덕후가 무슨 가공할 무공을 펼쳤다는 것은 없었고 여기저기 도망 다녔다는 것이 전부여서, 의혹을 더하고 있었다.

덕후는 소월하가 끝내 대꾸가 없자 찜찜한 기색으로 앞장섰다.

덕후와 소월하는 심가장을 벗어났다. 여러 다리를 건너니 도회지 특유의 번잡한 소음이 드문드문해지고 겨우내 빛바랜 이끼를 머금은 가옥들의 풍경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소란스럽고 바쁜 공기를 등 뒤로 한 남녀의 앞에 드러난 곳은 서호가 내다보이는 5층 다루였다. “무망루務望樓”라 적혀 있었다.

덕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1층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많은 곳이었나?”

변두리에 가까운 곳이다. 서호 근처에 전망이 좋은 곳은 시인묵객들로 북적거리므로, 약간 동떨어진 이곳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서호 안개가 은은히 보인다는 5층은 비쌌지만, 나머지 층들은 가격이 일반주루 수준이라, 한적함을 찾는 이들에게 수지가 맞는 편이었다.

덕후는 부채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소월하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몸도 알아서 지키라고 굽신거렸는데, 번잡하니 다른 데로 옮기자고 하면 푸대접으로 오인될 수 있다. 덕후는 내친걸음이라는 듯 입구로 들어섰다.

바쁜 와중에도 점소이가 마중 나왔다. 중늙은이 인상의 점소이는 얼굴 값을 하는지 덕후와 소월하의 위아래를 잠깐 훑어보는 것으로 돈 내를 맡았다.

“4층까지는 찼습니다만, 5층에 특석이 있습니다.”
“안내하게.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저번에 왔을 때는 한적하더구먼.”
“아직 모르시는군요. 계시다 보면 아실 겁니다.”

점소이가 알면서~ 하듯이 눈웃음을 치자 덕후는 정색했다.

“금시초문일세. 처와 머리나 식히려고 온 것인데....”
“아, 부인이 계셨습니까.”

점소이는 그제야 덕후 뒤에 있는 소월하를 발견했다. 조건반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눈을 화등잔하게 뜬다.

“대단한 미인이시군요. 선녀님들 못지않을 것 같습니다.”
“선녀라니?”
“아, 헤헤, 사실은 소주삼선녀蘇州三仙女 께서 저희 주루의 단골이거든요.”

덕후는 들은 적이 없을 텐데도 어디선가 들은 이름이라서 고개를 약간 모로 꼬았다.

“나 처음 올 때는 그 소리 못 들었는데. 최근에 나타났나보군. 소주삼선녀, 그러니까 매상을 올려주는 물목이란 말이지?”

귀공자 차림에게 상인처럼 흥정하는 듯한 어투가 나오자 점소이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겉멋 들린 졸부나 유복자으로 여긴 여긴 모양이다. 그리고 소월하를 보는 시선이 무언가 안쓰럽다는 투로 변했는데, 다소곳한 태도가 양갓집 규수로 여긴 듯했다. 몰락하는 문벌과 신흥 재계의 합작은 심심찮게 들은 적이 있는지 점소이는 눈앞의 한 쌍도 그런 부류라고 지레 짐작한 듯 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드실 것은 어느 걸로?”
“어허, 이사람. 장사 한 두 번 해보나. 알아서 내오게. 여기 단골로 확실히! 만들고 싶으면 말이지.”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리라는 거야, 바가지 씌우지 말라는 거야, 점소이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노련하게 내색하지 않고 둘을 안내했다. 층마다 다양하게 장식된 들보를 힐끗 보며 꼭대기에 오르자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탁자가 다섯 개인가 있었다.

“저기가 좋겠군.”

덕후가 서호가 아련하게 내다보이는 곳을 가리키자 점소이가 손 사레를 쳤다.

“저기는 지정석입니다요.”
“응? 아아, 그렇군.”

덕후는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군소리 않고 점소이가 가리킨 자리로 가 착석했다. 음식이 준비될 동안 차와 입가심할 다식이 나왔다. 차를 음미하는 소월하와 후룩 소리를 내는 덕후, 침묵을 음미하는 것 같지만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참이었다.

-부인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구려.

부인, 이라는 말에 소월하의 몸이 바늘에 찔린 듯 움찔했다. 부인이라 불릴 만큼 부부간의 정리가 있는 가? 복잡한 소월하의 심사와 달리 귓가로는 낭랑한 덕후의 음성이 들린다.

-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歲兮(쑥 캐러 간 그녀를 하루만 못 보아도 마치 삼년이 지난 듯하네.)

시경(詩經)에 나오는 노래로 총각이 처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구절이다. 대놓고 사모한다고 아부하는 것이다. 소월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신했다.

-窈窕淑女, 琴瑟友之, 鐘鼓樂之(아리따운 그녀와 거문고를 타고 사귀며 종과 북을 치며 즐기리.)

역시 시경에 나오는 구절로 약간 편집을 거친 것이다. 부부간의 화목과 가문의 번성함을 노래하고 있지만, 정황상 덕후의 노골적인 답신에 절도를 지키라는 풍자가 깔려있었다. 거문고인 금슬은 부부간의 정리이고, 종과 북을 울린다는 것은 종묘 앞에 제사를 지낼 때 치는 예식으로 집안의 흥성을 가리킨다.

덕후는 부채를 펼치며 쓰게 웃었다. 아직도 경계하고 있다. 얼렁뚱땅 순결을 훔친 도둑놈이다. 이지가 흐려진 틈을 타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 되게끔, 시커먼 양심에 최소한 자위가 되도록, 최소한의 책임을 전가시켜 올가미를 씌웠지만, 다 눈 가리고 아옹거리는 짓이다.

-청할 게 무엇인지요?
-혹시 온파穩婆를 아시오?

온파라는 말에 차를 들던 소월하의 하얀 손길이 멈칫했다. 비빈 출신이 아니고도 황궁에 출입이 가능한 여성들이 있는데 내파(유모, 명대에는 내구, 편의상 내파), 온파(산파), 의파(여의원)가 이에 해당되었다. 온파는 아이 받는 역할 외에 입궁 시킬 여성들을 선발하고 처녀성과 미색을 평가하는 역할을 맡았다. 황궁에서 출세와 총애를 바라는 여관女官들에게 심사권을 지닌 온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왜 자신에게 이야기 꺼내는 것일까. 순식간에 사고가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후궁 모집을? 관례대로 하려면 될 텐데요.
-양수마養搜馬들을 모으려 하오.

덕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소월하는 막 넘기려던 차를 도로 뿜을 뻔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피골이 상접한 말을 기른다는 좋은 뜻인데, 업계 전문용어로는 인신매매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의 여자아이 중 싹수가 있는 얘를 골라 부호의 양녀로 보내 가사 훈련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초경을 치러 15세 전후가 될 무렵에 전문 매파를 통해 관리나 거부에게 거금을 주고 첩으로 판다.

-제정신......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니오, 기왕이면 범위도 넓혀서 장차 사기(私妓)에 드나들 만큼 어려운 형편이면 좋소.

사기는 정식 기적에 오르지 않는 여자들로 농민이나 어부 출신으로 생계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경우다. 소월하는 위가 슬슬 아파왔다. 덕후가 자신과 독대를 청한 까닭은 알 듯했다. 천하문의 2인자이자 최고 실무자인 자신이라면, 덕후의 지령에 가장 적합한 존재이다. 다만 목적이 짐작이 가지 않는다. 눈앞의 인간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호색 난봉꾼은 아니니까. 덕후 주변에 모인 여자들은 의례처럼 그의 수작에 한 두 번은 당한 경력이 있으니 절실히 안다.

단면만 놓고 보면 엉뚱하기 그지없지만, 밑그림을 그리다보면 덕후의 안배가 상정 외의 호재로 적용하고, 완성되고 나면 덕후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갈무리하고 난 뒤였다. 불평을 터뜨리지 않는 것은 떡고물이 본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대상련에서도, 흑룡방에서도, 상관세가에서도 그랬다. 방바닥에 하릴없이 뒹굴 거려도,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을 책략이 이 순간에도 한 둘은 아니겠지.

무공은 몰라도 머리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고 자부하는 소월하다. 강호 초일류 모사들도 터득하기 어렵다는 귀곡산법鬼谷算法의 요체를 깨우쳤고, 췌마와 책술에는 일가견이 있다. 금보옥과 우희선의 재지에는 경의는 표하는 동시에 경쟁심도 품는다. 그러나 덕후에게 느끼는 감정은 질적으로 틀렸다. 경쟁으로 다투고 싶지 않고, 효과는 인정해도 경의를 보내고 싶지 않다. 소월하에게 덕후는 개인을 떠나 어둡고 이기적인 현실을 그대로 형상화 한 듯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구속감. 강호무림을 자유롭게 질타하고 싶다는 소월하의 바램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처럼 부질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막함으로 변했다. 소월하의 표정 없는 눈에 습막이 차오르는 것을 눈치 챈 덕후는 가슴 한 칸이 뜨끔해졌다.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요. 일단 적임자는 저 밖에 없잖아요? 문주님에게는 이야기했나요?
-아니오.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소. 문주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아, 천주에게는 상관없지만.

소월하는 이 일이 일견 장난스러워도 생각보다 중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굳은 얼굴을 보고 무언가 생각했는지 덕후가 덧붙였다.

-우리는 좋은 협력자가 될 것이오. 나 또한 그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소.

비즈니스처럼 사무적인 제스처, 소월하는 피식 웃음을 떠올렸다. 자조하듯 덕후를 비웃는 듯 무표정이 깨졌다. 그런가, 이 사람은 내가 팽을 당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걸로 착각하는 모양이야. 자신의 흉중을 모르는 걸 보니 덕후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박감이 사라지며 모호한 웃음의 경계는 비웃음으로 기울었다.

-꿈이라....그렇군요. 우리에서 정원만큼 확대된 정도겠지만.

소월하는 톡 쏘아붙였다. 당초 소월하의 의도는 염미홍을 상징으로 내세워 밖을 담당하고,  자신은 내부로 실권을 장악해 십패의 수좌를 다툴만큼 역량을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대상련과 한배를 타게 되었지만 여정의 끝까지 같이 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상련과 보조를 맞추고 상관세가를 몰락시키면서 묘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공조共助를 취한다는 명목으로 양측은 서로의 영역에 세력을 뻗었다. 대상련은 상권으로 신사와 지주를 흡수해갔고, 천하문은 이권을 수중에 넣는 과정에서 기민饑民과 무뢰無賴를 받아들였다. 마치 누군가 배후에서 조작한 것처럼 양파는 계층별로 영역을 다졌고 역할도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양파 사이에 충돌이 없던 것은 아니나 우희선이 배후에서 중재역을 맡았다. 동창과 금의위를 장악하고 관부를 통제하는 그녀의 입김이면 일사천리였다.

반 년도 안 되는 시간, 대상련과 천하문은 급속도로 팽창을 이루었지만, 소월하는 모사로서 직감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불현 듯 감지하곤 했다. 자신이 당초 구상과 조금씩 어그러지게 전개 되는 것을. 그러나 그 원인을 분명히 규명할 짬은 없었다. 소월하는 무척 바빴다. 상관세가의 영역 흡수와 더불어 염미홍이 안은 1천 넘는 군영대를 천하문의 품으로 안착시킬 수단을 강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덕후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며 느슨하게 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소 군사는 내가 부담스럽소?

이 남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소월하는 긴 속눈썹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그 날도 아닌데 신경질적으로 예민해진 감정을 비치고 싶지 않았다.

-.....편하게 대하라는 소리까지 할 마음은 없지만. 굳이 얽매이는 것 같아서 그렇소. 겪어봐서 알겠지만, 신분만 떼어놓고 본다면, 내 능력은 잡기雜技 수준이라 군사의 발끝에도 못 미치오.

이건 뺨 맞고 아프냐고 어루만지는 꼴일까. 덕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지금은 소월하의 분노를 자극했다. 점성으로 응고된 무언가에 불씨를 당기고 있었다. 그와 한편으로 덕후의 말을 머리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인정하네. 당신은 스스로 인정 했듯이 무척이나 치졸한 남자라는 걸. 어쩌나 이런 남자랑 엮어버렸을까.

소월하의 아담한 가슴이 크게 기복을 일으킨다. 여전히 해결된 것은 없다. 이 남자가 방금 말을 위로라고 한 것이라면 빵점이고, 희롱을 위해서라면 저질이다. 그러나 생각할 여유는 얻은 것 같았다. 머리 속으로 덕후을 대하며 문득문득 부셔질 것 같은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가슴 졸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월하는 허리를 바로 펴고 고개를 들어 덕후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각오를 다진 게 허무할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눈이다. 덕후가 눈을 사시로 모으며 혀를 입술 위로 올리며 히죽 웃자 소월하는 허파가 뒤집히며 풉, 하고 웃어버렸다.

“콜록! 콜록!”

사례가 들리자 덕후는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와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소? 아무래도 밖의 공기가 좀 안 좋은가....보....오.”

덕후의 마지막 말이 떨렸다. 허벅지 안쪽에 날카로운 것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소월하의 꼬집기다. 염미홍과 섹스를 할 때 허리를 쓰다듬다 보면 자지러지는 듯하는 데, 소월하한테 틈만 나면 꼬집혔다는 것과 관련 있는 걸까. 특별히 조공을 익힌 것도 아닐 진데 너무 아팠다.
 
겨우내 진정한 소월하는 식은 차를 마시고서야 꼬집던 손을 풀었다. 덕후는 탁자 밑으로 열심히 비벼댔다.

-크흐......필요한 예산은 세휘에게 알리면 될 것이오. 다소 비껴나가긴 해도 내탕금으로 써도 되는 일이니까.

소월하의 침묵이 길어지자 덮듯이 덕후가 눈치를 살피듯이 묻는다. 소월하가 침묵 끝에 꺼낸 전음은 덕후로서 뜻밖이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이죠?
-.....그때 말한 걸로 충분하오만.

관조觀照. 지켜보기.....처음에는 방관으로 이해했지만 지금은 틀리다. 부호들이 정원사들을 시켜 정원을 손질하는 것은 보기 좋게 하기 위함이다. 주인의 미학에 어긋나면 정원의 세계는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꽃을 잘 아는 정원사도 결국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소월하는 깨달았다.

-일단은 양주의 역량을 모두 보고 싶소.

덕후는 여기서 전음을 끊었다. 머리 좋은 소월하에게 앞지를 만한 힌트를 줄 생각은 없으므로.

남들 같으면 폭발적인 성장에 혹해 있을 텐데, 소월하는 여전히 한 줄기의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덕후의 의도는 천하문과 대상련이 진정한 이와 입술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단일문파로 설 수 없게끔 역할을 나누고 영역을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서고자 할 때는 절름발이 신세임을 알도록 시도한 것이다.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이런 조짐을 눈치 챈 일부 사람들이 불만이나 이의를 터뜨려도 대부분은 눈앞의 성과에 연연하여 자연스러운 대세로 받아들이고, 역행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자로 치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걸로는 부족하지...양주는 어디까지나 기반,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천하, 아니 세상의 잠재력이니까.

딱히 그 잠재력으로 가져다 어따 쓸 것은 아니지만. 복잡한 심사가 노출되지 않도록 덕후는 분홍빛 상상을 떠올렸다. 여자는 좋다, 미녀면 럭키, 미소녀면 더더욱 환영이다. 눈앞의 소월하도 덕후로서는 언감생심이 아닌가.

-그걸 그냥 확인해보고 싶은 거요.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합시다. 더 시킬 건 없소?
-한 잔 하고 싶네요.

소월하는 문득 술 생각이 간절했다. 약주도 몸에 좋다지, 그렇게 대꾸한 덕후는 점소이들이 접시를 담아오자 순한 술을 추가 주문했다. 둘은 젓가락을 들고 천천히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식사 시간은 길지 않았다. 갑자기 밑에서 인기척이 울리더니 일단의 청, 녹, 황 삼색의 청년검수들이 올라왔다. 둘은 5층 주루에 덕후와 소월하가 있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식사를 다 마치셨다면 자리를 양보해주실 수 있겠소?”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덕후는 말을 건 낸 이들을 멀뚱히 바라보다, 목구멍 안으로 꿀꺽 삼켰다.

“보다시피 식사중이지만, 그리고 자리는 많지 않소?”

청년검수들은 서로가 곤란한 듯 보다가 여러 번 해본 모양인 듯 눈에 힘을 잔뜩 주며,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식대는 저희들이 대신 치러 드릴 테니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잠시 후면 귀인들께서 행차하실 예정이라오. 그렇기에 이 장소는 미리 선약이 되어 있소.”

그 소리에 소월하의 아미가 올라갔다. 껄끄럽게 취급하고 있지만 자기 사람인 덕후가 이런 무시를 받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덕후의 진짜 신분상 일인지하를 빼고 오라 가라 할 이는 없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덕후는 탁자 밑으로 소월하의 무릎을 툭 쳤다.

“일단 점소이를 불러주시오.”

잠시 후, 덕후와 소월하를 5층으로 소개했던 중늙은이상의 점소이가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나타났다.

“어찌 된 일인가? 자네만 믿고 여기에 왔는데 선약이 있다니?”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선약 돼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 그게 원래보다 뜻밖의 시간인지라....”
“이놈! 이곳은 그분들께서 특별히 정취를 감상하기로 한 곳이니 잡인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잖느냐!”

청년검수 하나가 칼을 빼어들며 을러댔다. 중늙은이상의 점소이는 사색이 되어 다리를 덜덜 떨었다. 피바람이 불기 전에 덕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사정은 알았소. 점소이가 물욕에 어두워 그런 모양이니 넘어갑시다.”
“마, 맞습니다. 쇤네는 일자무식에 배운 것이 없어서 이런 대실수를 저질렀습니다요, 이 놈이 죽일 놈입니다!”

무릎을 꿇고 자기 뺨을 번갈아 치는 점소이. 칼을 빼어든 청년검수는 애검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도로 납검했다. 그와 동시에 덕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쯧, 사내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베어야지...”

막 안도하던 점소이의 얼굴이 도로 흙빛으로 변했고, 청년검수들 사이에 날카로운 안광이 폭사되었다. 납검한 청년이 노한 얼굴로 덕후에게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덕후는 점소이에게 걸어가 손가락을 꼽았다.

“어디보자. 맛은 그럭저럭인데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아주 빵점이군. 그대로 값을 지불하고 나가기는 좀 그렇지? 어떻게 생각 하나?”
“서, 서비수라뇨?
“토 달지 말고. 좋네! 인심 쓰지. 식재비만 내고 감세.”

점소이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허어, 본전도 못 건졌다는 그 얼굴은 뭔가? 혹시 식재비가 그만큼 싸다는....?”
“아, 아닙니다요! 본루는 최상의 맛과 질로 승부 합니다요!”
 
좋아, 하고 덕후는 딱 3분의 1로 계산을 하고 소월하를 재촉하여 5층에서 내려왔다. 둘이 순순히 물러나자 청년검수들은 무시당한 듯 한 찜찜함을 느꼈다. 그러나 목적은 달성한 셈이고 귀인들이 주루에 당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중늙은이 점소이에게 호령을 하여 재단장을 주문했다.

한편, 주루를 나온 덕후는 가만히 뒤 따라 나온 소월하를 향해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갈까? 돈 굳었으니 2차 가도 될 것 같소만.”
“.....장으로 돌아가요.”
 
소월하는 완연히 저기압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 덕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소? 날씨도 이렇게나 좋은데.”
“순순히 물러난 것도 다 까닭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작정인가요?”
“큰 일 낼 소리를 하고 계시는군. 그럼 거기서 사생결단을 내야한단 말이오?”
“체면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주삼선녀의 시중꾼들 따위에게....!”
“쉿! 일단 소리부터 낮추시오.”

소월하의 언성이 높아지자 덕후는 혹시나 듣는 사람이 없을까 급히 나무랐다. 소월하는 말을 끊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네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그렇게 강짜를 부렸겠소? 아니면, 그 자리에서 신분을 밝히고 소주삼선녀와 호위들과 번잡한 통성명을 하고 마음에 없는 교분을 터야 만족하겠소?”
“하지만...”
“그래도 무엄하다! 하고 엉덩이를 걷어 채이면서 쫓겨나간 건 아니니,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잖소?”

덕후가 아까 청년들의 음성을 흉내 내자, 소월하의 분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그라졌다.

“돌아가면 소주삼선녀의 내력을 한 번 알아봅시다. 양주의 유명 인사들은 거의 알고 있지만 처음 들어보지 않소? 호위대라고 자처하던 검수들도 유서 깊은 무공을 연마한 이들 같고....”

덕후의 음성이 뒤로 갈수록 사근사근해지고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그런 덕후를 두고 소월하는 유사하流砂河에 무심코 발을 담근 듯 가볍게 흠칫 떨었다. 밝은 큰 길을 가다가 문득 어둠 속으로 쑥 뻗은 좁은 거리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낀 섬찟함이었다.

소월하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 지 덕후는 느긋한 얼굴로 주루를 눈에 담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가볍게 안색을 바꿨다. 

“어라? 저 친구들은....?”

소월하의 시선도 자연스레 주루 입구 쪽으로 향했다. 북적거리는 주루에는 낯익은 이들이 보였다. 금보옥 휘하에 있던 이들로 강윤식, 황철웅, 초제학이었다. 정체를 확인한 덕후가 좋아죽겠다는 듯 눈을 반짝인다.

“소주삼선녀와 절강삼공자가 한 주루에 있다? 어쩐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걸.”
“예단은 금물이에요.”
“가봅시다.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지.”

쿨~하게 나왔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다시 들어가 잰다. 소월하는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덕후가 손을 잡아 끄는 바람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생존신고. 그럼 한 달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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