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 이모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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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9,139회 작성일 17-02-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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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1
 

제가 나이는 좀 들었어도 글재주는 신통찮습니다. 별 재미없어도 한번 읽어 주십시오.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있었던 이야기이며, 다른 사이트 회원 가입을 위해 한번 올렸던 얘기입니다. 이곳에 새로운 얘기도 이어 써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재미있어 한다면 말이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희 집에는 지방 사는 친척들이 많이 찾아오고 또 한동안 같이 산 친척들도 꽤 됩니다. 특히 엄마가 형제 남매가 많아 외가 식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명순이 이모(물론 가명)도 그 중 하나로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저희 집에 와 제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엄마와 친 자매간은 아닙니다. 외가가 좀 복잡해 어떻게 이모 뻘이 되는 지는 설명하기 좀 어려우나 하여간 집에서는 제가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이제는 같이 늙어 가는 이모입니다. ㅎ ㅎ.

이모는 인천에 살았으나 그 당시는 교통이 발달하기 전이라(경인 고속도로 건설 전입니다) 서울로 출근하기 어려워 저희 집에 기거 했던 것 같습니다. 이모는 간호원이었습니다(단시는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원이라 했음).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 간호원이 아니라 간호조무사였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이모는 대학을 다니지 않고 무슨 학원(아마도 간호학원)을 다녔으니까요. 하여간 제가 고등학교 때는 누나가 간호사가 되어 안국동의 X병원에 다녔으며, 그 후로는 저희 집에서 나가 자취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병원 기숙사에서도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희 집에서 나가서도 이모는 자주 집에 놀러 왔습니다. 그 때가 고등학교 일학년인지 이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네요. 집에 제사가 있어 이모가 도와주러 왔고, 당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저희 집에서 자고, 저와 같이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제 학교와 이모 병원이 같은 방향이었거든요.

당시는 아침 출근 시간에는 버스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자 차장이 승객을 떠밀고, 버스는 일부러 S-자 주행을 하여 승객을 차 안으로 밀어 넣는 형상이었죠. 웬지 그날은 승객이 더 많았고 버스 몇 대는 정류장에 서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모와 내가 그나마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버스 안에 타고 보니 너무 사람이 많아 이모와 나는 몸이 꼭 붙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모보다 덩치가 제가 커서 먼저 버스에 올라서, 한 팔로는 학교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버스 출입문 난간을 밀어 공간을 만들어서 이모가 버스 위로 올라 서게 도왔습니다. 여자 차장은 버스 문을 닫지도 못해 양손으로 출입문 난간을 잡아 승객을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버스는 출발하였고 버스가 크게 S-자를 그리면서 출발해서야 승객들이 관성으로 안쪽으로 밀려들었고 차장이 간신히 문을 닫았습니다. 그때야 이모도 버스 출입문 계단을 올라 설 수 있었죠(그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어 답답).

 

하여간 이제 저와 이모는 바짝 밀착해 마주 선 상태였습니다. 이모는 저보다 키가 작아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댄 상태가 되고 가방을 든 제 손이 이모와 제 사이에 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가방을 든 손이 꼬여, 손바닥 쪽이 이모 쪽을 향하고 손등이 제 몸쪽이 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모를 보호하려고 제가 돌아서는 과정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로서는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마치 이모의 아랫배를 더듬는 꼴이 되어 움직이기가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손등으로나마 커지려는 제 성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죠. 그러나 이모의 머리가 제 어깨에 기대어 지면서 저는 이모의 건친 숨이 제 목덜미를 스치는 것이 이모의 젖가슴이 제 가슴에 짖눌려지는 것보다 더 큰 자극이 되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순간마다 어떻게든 덜 비좁은 버스 안쪽으로 몸을 조금씩 옮겨 갔고 이모 역시 저를 따라 버스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움직이고 이모 역시 저를 안쪽으로 발을 조금씩 움직임에 따라 가방은 제 손은 이모 아랫배를 더듬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실제로 제가 이모 몸을 만지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생각하기에 이모가 내가 그런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실제 이모가 어떻게 느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 이모의 사타구니, Y-자 모양이 정확히 그려지고 그곳이 평상시 내가 여자의 몸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도톰하게 느껴졌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모는 결코 뚱뚱하지도 않았거든요. 또 내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약간은 습기 찬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손의 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이 기회에 한번 그곳을 만져 볼까하는 생각도 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이모가 저희 집에 살 때, 저는 초등학교 말이었고(아마도 사춘기 들어 가기 직전), 그때의 호기심으로 이모가 목욕할 때 창문으로 엿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모의 그 곳에 검은 털이 덮혀 있는 것을 보았고, 그 기억을 하면서 혼자 자위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실제 이모의 몸을 만질 용기는 없었던 거죠. 하여간 잔뜩 발기한 제 성기를 가방을 든 손으로 감출 수 있는 것이 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 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자리에 앉았던 승객 한 사람이 비좁은 사람들 틈으로 손을 뻗어 제 가방을 들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만원 버스에서 앉아있는 승객이 서 있는 승객의 가방이나 짐을 들어 주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가방을 맡기지 않으려 했으나 한사코 가방을 받아 주겠다는 것을 계속 거절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방을 빼앗기 듯이 남에게 주고 나니 이모와 나 사이에 제 빈 손만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고의적으로 이모의 아랫도리에 대려는 모습으로 비칠까봐 저는 그 손을 빼어 냈고 결국 두 손 모두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게 되어, 이모와 나 사이에 아무 장벽 없이 발기한 제 성기가 들어 나게 되었습니다. 서 사람이 워낙 많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들킬 염려는 없었으나, 이모가 알게 되는 것이 저로서는 제일 큰 문제였죠. 그래서 저는 억지로, 정말 억지로 몸을 뒤로 빼어 이모를 제 앞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는 해결 되지 않더군요. 앞에 이모가 버스 창을 향해 서고, 제가 그 뒤에 바로 서게 되니, 발기한 제 성기가 이모의 엉덩이 닿게 되었습니다. 버스가 조용히 운행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몸이 닿지 않게 떼어낼 텐데, 정류장에 버스가 섰다가 출발할 때면 반드시 지그재그 모양으로 버스를 몰아 승객을 안쪽으로 쏠리게 하니, 제 몸이 이모의 엉덩이에 닿지 않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모도 그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몇 번은 버스가 흔들리지 않는 데도 밖을 내다보려는 듯이, 허리를 숙이며 엉덩이를 내밀어 억지로 떼어 놓은 제 발기한 성기를 확인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중엔 저도 포기했습니다. 아니 즐겼습니다. 그냥 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냥 대고만 있으려 했던 것이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인가 저도 모르게 제 성기를 이모 몸에 치대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승객이 쏠리는 움직임에 교묘히 편승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이모가 가만히 있는 것은 이모도 좋아서 그러는 것 아니면 승객이 많아 그런 것으로 이해해 주는 것이라 생각했죠.

 

그 후에 이모에게 그날 버스 안에서의 일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모는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 했지만 잘 믿어지지 않더군요(얼마 후 이런 얘기를 서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모와 친해졌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식구들 몰래 이모 몸을 더듬기도 합니다. 섹스도 전엔 했지만 근래 몇 년간은 직접 섹스를 한 적은 없던 것 같네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죠. 저만 그 일이 충격적이라 생생히 기억나는 일 일 수도 있죠.

그 날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제 발기된 성기가 엉덩이 사이에 빈 틈 없이 낀 상태에서 또 조금씩 움직여 성기를 안쪽 그리고 위로 치대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지더군요. 꼭 사정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시간이 얼마간 지나, 이모가 슬며시 엉덩이를 뒤로 밀어 내었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데 이모와 나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느끼지 못한 사이에 버스는 이미 시내 중심가를 지나 승객 사이의 공간에 조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습니다.

광화문을 지나 중앙청 앞에서 이모는 내려야 했습니다. 이모는 버스 내릴 준비를 하면서 창쪽에서 돌아서 제 쪽을 향해 섰습니다. 이모도 그때 제법 큰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제사 지내고 엄마가 싸준 음식도 들어 있었겠죠. 이모는 그 가방을 몸 앞 쪽에 들고 출구 쪽으로 승객 사이를 빠져 나가려 했습니다. 조금 여유로워진 틈을 타서 저도 모을 뒤로 뺐습니다. 이모가 ‘나 내릴게,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하면서 이모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가방을 든 손을 이용해 발기된 제 성기를 확인했습니다. 이모의 손등이 제 발기한 성기에 닿았을 때 제가 ‘억’하는 소릴 낼 뻔 했으니까요.

 

그 후로 이모는 항상 제 자위 대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모가 직접 제 성기를 만진 적도 있었고, 또 앞에 얘기한대로 섹스도 했지만 그날의 만원 버스 사건이 가장 생생히 기억 됩니다.

 

앞으로 기회 된다면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모 병원에서 맹장 수술을 받고 그때 이모가 제 성기를 만졌던 얘기, 또 이모 자취방에서 같이 잔 얘기 그리고 비교적 최근 제 집 사람과 같이 이모 집에 가서 식구끼리 노래방 갔던 얘기 등 할 얘기는 많네요.

 

글재주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야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얘기를 길게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이모 2

 

얘기가 계속 될지도 몰라 제목을 바꿨습니다. 아래 ‘이모와 같이 탄 만원버스’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의 다음 얘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얘기가 더 계속 되면 ‘이모 이야기 3’이라고 하겠습니다.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 부위는 그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가정 하에 묘사했습니다. 사실 무슨 말을 당시에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만원버스에서의 일은 이모와의 관계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모는 저희 집에 계속 놀러왔고, 저에게 아무런 변화 없이 대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저 혼자 쑥스러워 이모 눈길을 피하기도 했지만 그 후로는 이모는 그저 이모였습니다. 최소한 겉으로는 말입니다. 속으로는 이모에 대한 음험한 상상과 또 한편 일종의 죄의식에 싸여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모는 대학을 나오지는 못했지만 아주 자립심이 강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혼자 인천에서 올라와 저희 집에서 학원도 다니고 또 혼자 자취 혹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살았으니까요. 저희 부모님도 그런 이모를 무척 아꼈습니다. 특히 저희 엄마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그녀를 무척 안스러워 하면서 또 한편 대견해 했습니다. 남녀 문제에 무척 민감하신 엄마도 그녀를 믿어서인지 아니면 설마 하는 생각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그녀를 따르는 것에 이상한 편견을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 실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이모에게 큰 돈은 아니지만 몇 번 용돈을 받은 것 이외에 특별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모와 가까워진 것이 제가 맹장염을 앓게 되어서 부터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첫해, 대학을 떨어졌습니다. 이차 대학은 원서도 안 쓰고 재수를 하게 되었지요. 집안 교육열이 좀 심한 편이었거든요. 그 지겨운 재수생활 중, 전 맹장 수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 며칠 전부터 왠지 아랫배가 좀 거북한 것 같기는 했는데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은 영 먹지를 못하겠더군요. 크게 아프지는 않았고요. 학원에서 점심시간 후에는(싸온 도시락에 손도 못 댔습니다.)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아랫배가 아프더군요.

책상에 쪼구리고 웅크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학원 강사가 처음엔 저를 야단치며 일으켜 세우려 했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보기에도 제가 심상치 않았는지 집에 연락을 하라더군요. 그때 집으로 연락이 바로 되지 않아서였는지 하여간 전 같이 재수하던 친구 부축으로 급한대로 안국동 이모가 근무하던 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학원은 광화문 근처, 병원은 안국동 근처). 부모님이 병원으로 달려오시고, ‘더 지켜보자.’ ‘병원을 옮기자...’ 그러다가 시간을 허비하고 맹장이 터지고 나서야(시간 더 끌면 복막염이 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 의사의 말) 결국 그곳에서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모가 외과에서 근무해서, 외과 과장님이 퇴근했다가 밤에 나와서 수술해줬다고 하더군요. 아니면 짜증나는 보호자들이라서 딴 병원으로 보내버렸다고..... 저희 부모님이 좀 깐깐하셨거든요. ㅠㅠ.

 

수술은 잘 끝나고 외과 과장이 외과에서 근무하는 제가 이모의 조카라는 것을 알고 써비스 차원에서(이모의 말) 포경수술까지 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별로 고맙지 않았습니다. 잘 된 수술이라면서 배에는 수술 자국만 있는 게 아니라 뱃속 고름을 빼낸다고 드레인까지 밖아 놓아 움직이기 정말 아팠거든요. 게다가 포경수술까지 해 놓으니 죽겠더군요. 또 아픈 것은 그런대로 참을만 했지만 낮에는 부모님도 병원에 계실 수 없어 이모에게 간병을 맞기게 되었습니다. 병동 간호사들이 잘 해주기는 했지만 이모에게 소변 컵 들고 하고 ‘쉬’를 할 수는 제 존심이 허락지 않아 억지억지 움직여 소변을 보았습니다. 저보고 지독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병원 이상하데요. 수술 다음 날만 의사가 상처 치료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간호사가 하는 것이에요. 맹장 수술 상처는 아무나 해도 되는데, 간호사에게 고추 내놓기는 정말 저도 싫더군요. 간호사끼리도 서로들 킥킥 거리더니만 결국 이모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모에게 고추 내밀기는 저도 싫었지만 다른 선택이 저로서는 없었죠.

처음에는 아파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맹장이 터져 보름 이상 입원했던 것 같습니다.) 아픈 게 덜해지고 또 처음엔 낮에 치료하다가 나중엔 덜 바쁜 밤에 치료를 하니까 느낌이 좀 이상해지더군요. 그리고 병실이 2인실이었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이모가 퇴근을 안 하고 간병한다고 옆 침대에서 잤습니다. 아~ 부끄러운 얘기지만 또 있습니다. 그 당시 제 사타구니에 습진이 있었습니다. 잘 씻지 않아서 인지 곰팡이 때문이라고, 습진이 나서 가려웠는데 치료를 못하고 있다가 그 때 같이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이모가 손으로 회음부에 연고를 발라 주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자 바로 가려움은 없어졌는데도 재발한다고 퇴원할 떄까지 약을 발랐습니다. 나중엔 제가 직접 발라도 됐으나 그냥 이모에게 맡겼죠. 이모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엔 아파 발기 되지 않았으나 나중엔 당연히 발기 되었습니다. 어떨 때는 이모가 환자복을 내리기도 전부터 이미 발기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불룩해진 바지를 보고는 어떤 때는 이모가 웃는 것도 같았습니다. 포경수술하고 발기되면 얼마나 아픈지 아시는 분 많으실 겁니다. 처음엔 통증으로 고추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는 괜찮아 지더군요.

 

아픈 게 훨씬 덜 해지고 나서였습니다. 그날 이모는 저녁에 약속이 있었는지 저녁 늦게 제 병실에 들어 왔습니다. 얼굴이 발그스레 한 것이 술을 마신 것도 같았습니다. 드레싱 세트를 쟁반에 갖고 와, 제가 누워 있는 침대에 저를 향해 걸터 앉았습니다. 이모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미니스커트를 입었더군요(당시 경찰에서 단속도 할 때였습니다.). 평소에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이모는 사귀는 남자가 있어 저희 부모님에게도 인사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 사람 만나고 오는 거야?’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제게 생겼던 모양입니다.

이모는 그냥 씩~ 웃기만 했는데, 누워 있던 제게 침대에 걸터앉은 이모의 다리 사이로 이모의 속옷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모는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구요. 전 몸을 들어 조금 침대 안쪽으로 비켰습니다. 편하게 앉으라는 제스쳐를 쓴 것이죠. 그러자 이모는 정말로 몸을 일으켜 조금 더 침대 위로 엉덩이를 걸쳤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는데 이모의 왼쪽 다리가 침대에 더 깊이 얹혀지자 좀 더 다리가 벌어지면서 이모의 팬티가 들여다 보이더군요. 제 머리 맡에 있던 스탠드 불 때문에 허벅지 안쪽까지 훤히 보였습니다. 이모는 전혀 몰랐을 것이에요.

그날 낮부터 이모의 저녁 치료를 음흉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제 고추 바로 발딱 일어서더군요.

‘치료하자.’ 이모는 평소보다 더 거침없이 제 침대보를 겉어 내었고, 그 순간 불룩해진 환자복을 이모가 본 듯 했습니다. 아주 잠시 멈칫하는 느낌을 제가 받았거든요. 하지만 이모는 제 환자복 바지 끈을 끄르기 시작했고, 전 침을 한번 삼키고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바지를 끌어 내릴 수 있게 엉덩이를 쳐들었습니다.

 

그때의 기분 지금도 생생합니다. 고추를 세우고 엉덩이를 쳐드는데 제 고추가 어딘가에 닿아 막아지는 기분이 들었으면 했습니다. 그냥 허공만 찌르는 기분이 무진장 아쉬웠습니다. 그 기분 이해가 가세요?

 

그 날 낮에 저는, 이모가 저를 치료 하다가 이모 손으로 제 고추를(참 표현하기 적당한 말이 없네요. 이 나이에 ‘자지’라고 쓰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점잖게 성기라고 하기도 좀..... 그냥 고추라고 쓰겠습니다.) 흔들어 주는(이것도 그렇네요. ‘딸딸이’라고 쓰기도 뭣 하네요. 알아서 받아 들이세요.) 상상을 수없이 했었습니다. 포경수술한 자리는 아물어 거의 아프지는 않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병원에 있을 때 완전히 나아서 퇴원해야한다고 치료를 계속했습니다. 핀셋으로 소독약을 고추에 바르는데, 고추가 발기하니까 건드릴 때마다 고추가 벌떡거리는 난감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저도 어쩔 줄 모르겠는데, 이모가 한 손으로 고추 밑을 잡더군요. 그리고 귀두 주변을 따라 둥글게 약을 바르는데 소독약이 다를 때마다, 제 몸 전체가 움찔거리더군요.

‘아파서 그래?’ 이모가 묻는 데도 전 대답을 못 했습니다.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올 것 같아 그랬죠.

그리고 회음부에 연고를 바를 때는 더 했습니다. 이모가 한 손으로는 음낭을 받쳐 들어고 다른 손으로는 여기저기 약을 바르는데, 특히 항문 근처까지 손가락이 올 때는 아주 죽겠더군요. 그 느낌은 혼자 수음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적인 느낌의 단순한 촉감이라기보다는 내가 왠지 약해져 버리고 그 손가락의 주인에게 나를 맡기고 의지하고 싶은 그런 감정이 들게 하는 심리적 촉감이었습니다.

이모의 치료는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사무적으로 진행 되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이모 모습이 뭔가 가식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랬습니다.

 

제가 그렇게 용감해 진 것은 낮 동안 혼자의 몽상 때문이었을 겁니다. 치료가 끝나고 제 바지를 올리는 사이 저는 팬티가 드려다 보이는 이모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말했습니다.

‘그 남자랑 결혼할 꺼야?’ 침을 먼저 한 번 삼키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평범하게 낸다는 것이 이상하게 쇳소리가 나더군요.

이모의 맨 허벅지는 생각보다 차가웠습니다. 벌어진 허벅지에 갑자기 손을 넣는 제 행동에 이모는 당황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당장 떨쳐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 사심 없이 한 짓이란 듯이 표정 짖고 있는 교활한 제 연기 덕분이었겠죠. 전 이모가 달리 행동하기 전에 무심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좋아?’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모 허벅지에 얹은 제 손을 떨었을 겁니다.

‘누구?’ 이모는 제가 모르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좋아. 그렇지만 결혼까지는....... 글쎄.’ 이모가 웃었습니다. 말은 그리해도 그 사람 생각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뭐하는 사람이냐, 어떻게 만났느냐, 그런 것을 제가 물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사람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허벅지에 얹혀진 제 손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제 작은 음모였죠. 그러나 이모가 그걸 몰랐겠어요? 이모는 자신의 허벅지에 얹혀진 제 손을 가볍게 잡더군요. 당장 떨쳐내지는 않았지만 움직이지는 못하게 말이죠.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제 손을 밀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다리까지 오물여 더 이상 이모의 치마 속을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모는 드레싱 쟁반을 갖다 놓고는 다시 제 방에 들어 왔어요. 그럴 필요 없었는데도 이모는 제가 퇴원할 때까지 고맙게도 밤에는 제 방을 꼭 지켜 주었습니다.

 

제 연기는 그날 밤부터 계속 되었어요.

 

다음 얘기는 다음에...............

 

 

 

 

 

 

 

 

 

 

 

 

 

 

 

 

 

 

 

 

 

 

 

이모 3

 

ㅎㅎ

저에게 낚이셨습니다.

 

‘제 연기는 그날 밤부터 계속 되었어요.’라는 지난 글의 마지막 부분은, 병원에서 제가 무슨 은밀한 짓을 도모하였고 그래서 어떠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었다는 의미로 한 말인데 잘못 받아들이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실은 그때 저는 재수 중이어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바로 퇴원하였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며칠이라도 더 병원에 있고 싶었고, 그러면 뭔가 일이 더 진행 됐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이모에게 망신이나 야단맞고 끝났을 수도 있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떨결에 퇴원한 것이 다행이었네요.

 

퇴원 후 저는 밀린 공부하느라고 정신 없었습니다 (솔직히 열심히 하지도 않았지만....). 하여간 제 입원 기간 동안 이모가 성실히 저를 보살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저뿐 아니라 저희 부모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모와 이모 애인(이제부터 이모부라고 하겠습니다.)은 저희 집에 가끔 들렀고 저와도 몇 번 인사는 했습니다. 언제 다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을지 몰라 지금 간단히 이모부를 소개한다면, 이모부는 큰 덩치에 활달한 분입니다. 그리고 대단히 명석한 판단력을 가진 분입니다만, 조금 게으릅니다. 놀기 좋아 하고요. 당시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으나, 결혼하고 몇 년 후 회사에서 보내주는 일본 연수를 다녀와서는 회사를 사직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을 따라간다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단지 일본과 다른 점은 우리는 큰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사업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처음으로 일본 러브호텔을 흉내 내어 모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멀쩡한 모텔을 2-3년 마다 내부 인테리어를 다시 하더군요. 그것도 큰 돈 들여서 말입니다. 그래야 계속 손님이 든다고 하더군요. 한 때는 전국에 모텔을 열 개 가까이 운영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모든 모텔을 정리하고 완전 백수로 놀더군요. 가끔 부동산에 손을 대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거의 신선...........아주 ‘돈 많은 신선’처럼 놀고 지내고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이 보기에 정말 부럽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일 년 재수하고 다음 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때가 70년대 초반으로 정국이 어수선 할 때였죠. 유신발표로 박통이 영구집권하게 되고, 단 두 사람이 모여 정권을 비난해도 처벌 받는다는 긴급조치가 연속으로 발표되던 시기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도 그 당시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학년 2학기는 데모로 시험조차 치루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긴급조치 1호가 1월에 발표되고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 겁 대가리 없이 의대생들이 첫 데모로 군사법정에 끌려가던(의대생은 방학이 없어 1월 데모가 가능했음) 바로 그해였습니다. 당시 정치나 사회에 별 관심이 없던 철없던 저는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으로 세월을 다 보내고 있었습니다. 재수를 같이 했던 단짝 친구와 무교동에서 만나 술값이 모자라던 저는 결혼을 앞 둔 이모부를 뜯어 먹겠다고 이모부 회사로 전화를 했습니다. 이모부 회사가 근처였었고 전에 술 마시고 싶으면 찾아오라던 이모부의 인사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죠. 이모부 덕에 친구는 만취하였고 통금 전에 택시 태워 친구를 보냈습니다. 저도 집에 가야했으나 그때까지 취하지 못한 이모부는 저게 한잔 더 하자며 따라 오라 하더군요. 이모부와 술을 사들고 찾아간 곳은 안국동에서 자취하던 이모의 집이었습니다. 저도 이모의 자취집은 처음이었습니다. 삼청공원 밑 개량식 한옥의 뒷별채에 이모가 세 들어 살고 있더군요. 이모는 낮 근무를 하고 저녁에 퇴근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이모도 당황해 했지만 저희가 그 집에 들어 설 때 이미 밖에는 야경꾼의 소리(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방범대원이 막대를 두드린 것도 같고 ‘방~범~’이라고 소리 지르며 다닌 것도 같습니다.)가 들려오는 상황이라 저희를 집 밖으로 내 쫒아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급히 술상을 내왔지만 저는 더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바로 방 한 구석에 쓰러졌습니다. 이모부가 주로 마시고 이모도 조금 마시는 것도 같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술 상 치우는 소리가 나고 제게 이불을 덮어주고, 둘이 옥신각신을 조금하다가(좁은 방에서 서로 자는 자리 가지고 싸우는 듯 했습니다. 아직도 결혼도 안한 처지에 이모부가 이모 자취집에 들락거린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서운데 제가 있는 방에서 둘이 같이 자는 모습을 보이기가 이모는 꺼림직 했겠죠. 당시는 그런 평판을 무서워했잖아요.

하여간 저는 술 취해 정신없는 척하고 꼼짝 않고 한쪽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실제 술이 취해 기억이 군데군데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소리에 제가 잠깐 깨어났습니다.

‘안돼~’ 그 소리는 작았지만, 어떨 때는 작은 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 소리는 작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단호한 거부의 반응이 아니라 뭔가 끈끈한 느낌과 함께 웃음을 감춘 약간 달착지근한 소리였습니다. 그 작은 소리에 제 머리가 서는듯한 느낌이 오더군요.

이모와 이모부 둘은 뭔가 내게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을 벌리려는 것 같았습니다. 엎드려 있는 저는 고개를 밖으로 돌리고 있고 둘을 볼 순 없었습니다만, 지금 벌어지려 하는 일의 모든 느낌이 제 시각을 빼고 나머지 모든 감각을 통해 느껴졌습니다. 저는 당연히 계속 잠득 척 했죠.

다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날 때 그 소리는 이모가 이모부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순전히 상상일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저는 이모부가 이모의 뒤에서 이모 젖가슴이나 아니면 아랫도리에 넣은 손을 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후 다시 이모부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괜찮아’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읍~’ 뭔가에 놀란 이모의 소리였습니다. 저는 이모부의 손이 어딘가 이모의 깊은 부위까지 들어 간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전 두 눈을 떴습니다. 어두운 벽만 보이더군요. 그래도 전 제 뒤통수를 통해서 반대편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둘은 한 이불을 덮은 상태에서, 이모가 나를 향해 눕고 그 뒤에 이모부가 누워 있었습니다. 보나마나 이모부는 이모의 등 뒤에서 손을 이모 앞으로 돌려 안아 이모의 가슴이나 어쩌면 아랫도리를 집적거리고 있었겠죠.

그리고 한동안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둘의 숨소리만 약간 가빠진 듯이 느껴진 것은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분명히 이모의 신음이 들렸습니다. 입을 벌리고 낮게 내는 그저 ‘아~’하는 탄식소리 같았습니다.

이모부가 크크 낮게 웃음을 참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모부의 짓꿎은 장난에 이모가 당황해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딸각하는 소리가 들리고는 살그머니 쟈크 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불 속에서 허리 버클 푸는 소리와 쟈크 내리는 소리가 어떻게 들릴 수 있냐고 그러실 수 있지만 저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 부스럭 거리는 소리....... 이모의 거부 몸짓에서 나는 부스럭거림, 계속 치근덕대는 이모부이 몸짓 모두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제가 뒤돌아 누워 있었지만, 두 사람과의 거리는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참 조용했습니다. 제 고추만 터질 듯 했습니다. 한 손을 바지 속으로 넣어 잔뜩 발기한 제 고추를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려는 듯이 밀어 보았으나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소리를 죽이기 위해 입을 벌리고 내쉬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짧은 몸 움직임에 따라 놀라는 듯이 나오는 신음소리....... 분명 삽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상하죠? 전 그때까지 성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삽입이 이루워졌다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당시에는 비디오도 없어 포르노 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당시 본 것이라고는 스웨덴 덴마크 등의 북구에서 나온 포르노 사진을 우리나라의 엉성한 인쇄기술로 복사한 작은 책자들(당시 미국 포르노 사진은 거의 없었음), 그리고 원앙섬, 꿀단지와 같은 빨간 책뿐이었습니다. 아니, 필름으로 만들어져 영사기로 일본 포르노를 본 적은 있었습니다만 (헬리콥터라 했지요), 필름 상태가 좋지 않았고 또 당시에는 지금처럼 포르노를 근접 촬영한 것이 아니라 남녀 성기가 결합된 모습이 그리 쉽게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지금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모부의 움직임 그리고 이모의 억지로 참는듯한 낮은 신음 소리는 간간히 이어지고 또 한동안 끊어지기도 하면서 상당한 시간 계속 된 것 같았습니다(실제로는 시간이 길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둘을 등지고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갑갑함과 궁금증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죠. 두 사람의 움직임이 한동안 없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저는 마치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놈이 낼만한 적당한 소리를 내며 둘을 향해 돌아누웠습니다. 그리고도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하고 잠든 척을 계속했죠. 그러다가 마침내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두 눈을 차마 다 뜨지는 못하고 베게 쪽 아래 눈만 실눈을 떴죠.

그런데.... ㅎㅎㅎ...... 이모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모는 저를 향해 잔뜩 웅크리고 엉덩이만 이모부 쪽을 향하고 있으면서 이불을 머리까지 둘러쓰고 있어, 저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으나 이모부는 그 뒤에서 이불 위로 얼굴을 내 놓고 있어 저와 눈이 마주칠 수가 있었던 것이죠. 당황한 것은 저였고 이모부는 되려 웃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란 저는 바로 다시 뒤로 돌아 누워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차라리 가만있었으면 내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몰랐던 것처럼 처신 할 수 있었을 텐데,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 돌아 누워버린 제가 그 상황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하여간 이모부도 제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이모부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모부의 움직임이 더 커지고 당당해진 것 같았습니다. 이모의 숨소리도 더 거칠어지고요.

전 돌아누워 두 사람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아주 괴롭고 또 한 편 자극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이모부는 바로 출근했습니다. 저는 이모부가 나갈 때도 잠이 들어 깨어나지 못한 척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거든요.

이모부가 나가고 이모는 다시 자리에 와 누었습니다. 이모는 피곤했을 겁니다. 어제 늦게 퇴근하여 우리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또 이모부와는 .......

 

제 옆에 이모가 누울 때 저는 아직 깨지 못한 척, ‘음냐~ 음냐~’ 소리를 내며 무심코 하는 행동처럼 이모를 껴안았습니다. 이모는 잠시 놀란듯했으나 뿌리치지는 않고 그냥 가만 있더군요. 저는 이모 이불 속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습니다. 이모의 따뜻한 체온과 그리고 냄새 저는 극도로 인내심을 발휘하여 움직이지 않고 꼼짝 않고 오랫동안 그러고만 있었습니다. 이모가 저를 뿌리칠 구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죠.

 

 

 

별 얘기도 없으면서 글만 길어지네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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