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숙의 하루 2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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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7,531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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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에서 이어집니다.

<숙의 하루> 제2부 - 교장실, 돈봉투, 숙 ①

<1>

숙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머
리 속에서는 어제부터의 만 24시간동안 벌어진 일들의 기억을 털어내려 치열한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치 오르가즘의 서서히 오르는 상승곡선처럼 사건들이
연이어 떠올랐다가 - 밤의 기억에 미치면, 화들짝 눈이 질끈 감겨졌다. 처음이었
다. 조금의 호감도, 조금의 애정도 갖지 못한 남자의 손길에 속속들이 맡겨졌던
자신의 알몸. 지우개로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었다. 그 사건들이 적나라하게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차창에 머리를 부딪혀서라도 잊어버리고만 싶었다. 안돼,
생각하지 말자. 잊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은 생각하지마. 생각하지 말자.

집앞에서 택시를 내리자, 그녀는 그제서야 어제 아무 연락도 못하고 외박을 했다
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은이라던가, 희라면, 어제의 '밤일' 이 예정되었던 것이
지만, 숙에게는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려
다 멈추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어제밤부터 오늘 아침
까지의 모든 일들, 그것을 부모님들이 아신다면... 모르겠다. 그녀는 쉼호흡을
두어번하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그녀의 집에서는 법석이 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만한 성숙한 처
녀가 외박을 하다니,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장, 어떤 의혹의 낌새를 맡기
위해 마치 수사관같은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맞아요, 어머니 아버
지, 상상하시는 그대로에요 - 숙은 부모님에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랫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죄송해요. 어제 한선생님이라고...
부모님들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입술에선,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저희 강사들 맡고계신 분인데... 어머님이 상을 당하셨대요. 그래서 거기서...
일을 좀 해주느라고...
-그렇다고 전화도 못하니?
-죄송해요... 사, 상가집이... 그분 댁이라서... 곤란...했어요.
-일단, 들어가거라.
숙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어떤 냄새 - 아마도 가장 바라지 않는, 사내
의 냄새 - 를 찾는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는 척했다. 자기의
딸이 어제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 안다면, 그는 그렇게 태연하지는 못했을테지만.

숙은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등뒤로 방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는 한참을 문
에 기대어 섰다. 머리 속이 빙빙 돌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보다도, 그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밖에 없던 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다.
만약 이대로라면, 한선생, 마교장, 교육관, 그들에게 이제 익숙해진다면,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거짓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일단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그 세계, 그 인간들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출근해야돼. 가서 - 그리고는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행동을
해야하는 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일단은 어제처럼 오늘
도 지각일지는 몰라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흐트러지지 말아야 해. 은이나,
희, 심지어 한선생을 마주치더라도.

숙은 옷장 문을 열었다. 일단, 치마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팬티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갑자기 사시나무처럼 하반신에 소름이 끼쳤다.
아마 이 상태로 학교로 돌아가, 어제처럼 학생들에게 거울로라도 비춰보이는 날
에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 모텔 방 구석에 버려져있을, 어제 입고 나갔던 까만 레이스 팬티 - 하지만 서
랍 안에는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있다 하여도 그녀가 다시 입을리는 없지만.
그녀는 하얀색 팬티를 꺼내려다가, 멈추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순간적으로 흰색
은 분비물에 쉽게 더럽혀지는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머
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기집애야. 이젠 숫제 준비를
하겠다는 거니 -

그녀는 어느새 익숙해진 것이 아닌가, 겁이 났다. 아니야, 어제의 일은, 하루,
하루 뿐이야. 다시는... 그래서는 안돼... 그녀는 치마와 옷가지들을 벗고, 대신
진한 색깔의, 분홍색 팬티를 피곤한 가랑이사이로 끼워 넣었다.

-숙아, 안에 있니?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였다.
-예, 예!
숙은 무언가를 들킨 모양 다급하게 놀랐다.

팬티차림으로 빼꼼이 방문을 열자, 의외로 어머니는 인자한 웃음으로 돌아와 있
었다.

-학교에서, 전화 왔더라. 교장실이라던가...? 하여튼 너 어제 수고했다고, 오늘
은 출근 말라더라.
그래서구나. 한선생이나, 마교장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전화 한통이
그녀의 거짓말, 가짜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셈이었던 것이다. 다행이었다. 원래
출근문제는 서무과에서 전화를 하거나, 최소한 교무실이어야지, 교장실에서 그런
전화가 올 리는 없는데도, 눈치채지 못하신 모양이야. 이제 그녀의 어머니는 심
지어 그녀를 걱정해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침 먹었니? 상가집이면, 밤 샜을텐데...
-아, 아녀요. 엄마. 저 그, 그냥 쉴께요.

다시금 등뒤로 방문을 닫으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때서야, 어제
사건들이 엄청난 무게로 숙의 어깨를 눌러왔다. 엄청난 피로감이었다. 그녀는 그
대로 자기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아아, 지쳤어... 그녀는 속옷차림으로 쓰러진
채, 그냥 졸음이 쏟아져옴을 느꼈다.
-숙아, 안 씻고 자니?
그녀의 방문가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누군가 들었으면 큰 일
날 말을 잠결에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까... 호텔에서 샤워하고 나왔어...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한나절을 다자고 밤에야 일어났다. 저녁 밥상 앞에
서도, 집안 식구들은 이미 숙의 오늘 아침 거짓말을 믿는 눈치였다. 그녀 역시
도, 상가집 일을 물어보는 어른들에게 대충 살을 발라 얼버무렸다. 집 구석의 불
이 꺼진 뒤에도 그녀는 자기 침대 속에서 한참 동안을 깨어 있었다. 이젠 전날의
일보다도 내일의 출근이 걱정이었고, 그 많았던 사건들 그것을 어떻게 해야할 것
인가 - 그녀는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나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질끈 감은 눈가에 눈물이 베갯잇을 적실 것만 같았다.

꿈을 꾸었다. 악몽이었다. 훤히 사람들이 쳐다보는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추행을
당하고 있었다. 숙은 사내의 얼굴을 보려했지만,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 보았다. 사람들이 가득한 지하철의 바닥에서 그녀는 발가
벗긴 채 강간당하고 있었다. 아아... 안돼! 그녀는 꿈결에 소리쳤지만, 얼굴 없
는 사내는 그녀의 자제심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
보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그 곳은 그녀 학교의 교실로 바뀌어 있
었다. 음악실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에서, 그녀는 다
리를 벌린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온몸으로 덮쳐오는 것은, 얼굴을 볼
수 없던 사내는 - 바로 한선생이었다.



<숙의 하루> 제2부 - 교장실, 돈봉투, 숙 ②

<2>

다음날 아침, 다른 날보다는 숙은 좀 더 일찍 출근길을 서둘렀다. 컨디션이 좋아
서였기 보다는 일찍 가서 다른 선생님들 - 노처녀와 유부녀 여선생들 - 의 눈초
리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 타서도, 여전히 만원 지하철이었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문가 기둥에 등
을 돌리고 서있었다. 그저께의 일이 떠올라, 왠지 자기 뒤쪽에 낯선 사내가 서있
을까봐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다행히도 오늘은 아무도 그녀에게 추
근덕거리는 일이 없었지만, 그녀가 거의 학교앞 역에 도착할 때쯤 되어 사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나! 왜 이래요! 이 손 치워요!
전동차 안 어디에선가 새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지하철 칸 안의 사
람들이 웅성이는 새로, 철썩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고, 왜 이래 미쳤어? 하
는 남자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숙은 금방 무슨 일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었
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저께, 그저께 아침 그녀가 당한 일이다 -
그녀는 다시 한번 누군가가 자신의 몸매를 더듬는 것만 같아 파르르, 몸이 떨려
왔다. 저, 저게 또 나였다면... 주마등처럼 그녀 자신의 사건이 떠올랐다. 마치
지금 이 사건에도 자기가 한복판에서 당하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질근 눈을 감
은 그녀의 귓가에,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너무나 다행스럽게 들려왔다.

숙은 전동차를 내려 허위허위 걸어가면서도, 머리속에 긴장과 흥분이 맴돌았다.
아까, 좀 전의 경우가 나였다면, 또 어째야 했을까. 낯선 사내의 손길이 다시금
내 깊숙한 비밀스런 부분까지 침입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갑자기 치마속 허벅
지 사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오늘은...

아직도 짧은 팔이 낯설지 않은 날씨였지만, 그녀는 허벅지의 중간까지 내려오는
거들에, 팬티스타킹을 껴입고 있었다. 통이 넓은 플레어스커트였어도 다소 하체
가 조여 갑갑했다. 하지만 왠지 지하철에 다시 탄다는 것을 상상하니, 그녀는 아
침에 옷을 갈아 입기 전부터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 하루는, 화장실에서 불편할지도 모른다. 남자 중학교여서, 여직원 화장실이
일층과 이층까지 밖에 없기도 했고, 또 좌변기는 아니었다. 아마도 쪼그려 앉기
가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 그녀는 생각했다.

이미 한선생이 손을 쓴 모양일까. 임시교사석에 앉은 숙을 보고도 동료 강사나,
다른 교사들은 별반 의아해하지 않았다. 새파란 임시교사가 하루동안 출근을 하
지 않았는데도, 그다지 큰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 투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안도
의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불안해졌다. 저들이... 혹시 모든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접대 자리에 불려 나가고, 당연히 외박까지 했다는 사실
을, 저 다른 선생님들이 다 아는 한통속들은 아닐까?

그 때 누군가가 숙의 맞은편에 앉으며 아침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잘 쉬셨어요? 음악 선생님?
희였다. 그녀는 그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상큼한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깎듯
했다. 그저께의 일이 있기 전, 그녀가 그 날 그녀들의 비리를 알기 전, 바로 그
상태로 희는 숙에게 좋은 아침을 말하고 있었다.
-아, 안녕... 하세요, 과학 선생님...

희는 다시 한번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조회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오히
려 얼떨떨한 기분이 드는 것은 숙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예상을 했었고, 또 자
기 자신도 그러리라 다짐을 했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희
가 놀라웠다. 낮과... 밤이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비리 - 그것을 그
누가 알고 있을까. 저 순진한 외모의 희, 과학 선생님이 밤에는 낯선 중년사내의
손길에도 거리낌없이 자신의 치마를 스스로 끌어올려 속살을 내맡기는 여자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숙의 뇌리에 룸살롱과 일식집에서의 그녀 모습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허옇게 비
치던 희의 허벅지, 앞가슴, 조명에 드러나던 그녀의 하얀 팬티... 이런 모습들이
교차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불과 몇시간 뒤면 그런 속살들을 얇은 치마로 두
른 채 학생들 앞에 설 것이다. 숙은 머리가 어질거리며 혼란스러워졌다. 작게 고
개를 숙이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렇다면 자기는 어떤가. 낯선 사내에게 적나라
하게 벗겨진 엉덩이를 뒤쪽으로 내민 것은 그녀 스스로 아닌가.

그녀는 막혀오는 숨을 쉬기 위해, 휘청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다행히도, 아침 조
회시간까지는 몇분이 더 남아있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나도, 나도
저 희, 그녀처럼 행동해야 하다니.

순간 벽을 짚고 섰던 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군가가 자기의 엉덩이를 세게
철썩 쳤기 때문이다. 한선생...?

그러나 돌아본 그녀는 더욱 놀랐다. 그것은 한선생이 아니라 은이었던 것이다.

-안녕! 어제 푹 쉬었어?
은, 동갑내기 미술 강사인 그녀, 마교장의 섹스 파트너중 한사람인 그녀. 그녀는
변함없이 착 붙는 양장 미니스커트에 쭉 빠진 몸매를 내비치며 숙의 눈앞에서 생
글거리고 있었다.

-후훗, 뭘 그래? 놀란 토끼 눈처럼?
숙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이 은 선생한테도 얕잡아 보일 수는 없었
다.
-그, 그래요...? 아니... 그래 그, 그냥, 아무 것도 아냐...

숙은 재빨리 복도 주위를 둘러 보았다. 누군가 그저께 이후의 이 어색한 첫 대면
을 훔쳐보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마. 아무도 없어.

그녀의 불안한 눈초리를 은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색기어린 웃음을 능
글맞게 지으며 그녀 쪽으로 몸을 은근히 기울였다.
-숙이 너... 아침에 희 만났다며...?
이럴 수가. 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일까지 이 여자가 알고 있다니.

-킥킥... 뭘 그래? 이젠 다 그렇구 그런 사인데.
그렇고 그런 사이? 제발, 아니야! 그녀는 은의 앞에서 당당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도 주먹을 쥔 손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은은 그녀의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
지 더욱 몸을 바싹 붙이며 속삭였다.
-후훗... 그래서, 한선생님 어때? 잘해줘?
-무, 무얼 말이야...? 나, 난 돈 안받았어.

은은 숙의 대답이 우스웠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댔다.
-후후, 바보야, 그것 말고... 밤에... 허리 잘쓰느냐고... 제법 능숙할 것 같던
데...?
맙소사, 지금 무얼 물어보고 있는 거야?

-걱정마. 말 안해도 돼. 나도 다 알고서 물어본 거니까...
은은 눈마저 찡끗, 하며 그녀를 세워놓은 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교무실로 들
어갔다.

뒤돌아서는 은을 보며 숙은 수치스러움에 순식간에 귀밑까지 달아 올랐다. 온몸
이 경련하듯 떨려왔다. 이럴 수가. 내가 그녀들에게 이런 질문까지 당해야하다
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그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은이
자기도 안다니? 설마... 한선생이 그녀와도 잠자리를?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그녀는 간신히 조회를 위해 교무실로 돌아왔다. 눈앞
이 하얘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숙 선생님! 선생님!
몇번이나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숙은 정신이 돌아왔다. 맞은 편의
희가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네, 네, 과학 선생님?
희는 슬며시 눈을 깜빡였다.
-교장실로 오시래요.
교장실로? 무슨 이유로? 그녀는 엉겁결에 묻기 위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희가, 손으로 입을 가린채, 입모양으로 무언
가 말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지? 숙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희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입을 오물거렸다.
'좋. 겠. 어. 요'
좋다니, 뭐가?

아침조회도 빠지고 교장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숙은 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뭐가 좋다는 거야?

교장실 비서격인 서무과 여직원 하나가 인터콤으로 그녀가 왔다는 소리를 하자
뭔가 소리가 나더니 들어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숙은 두려움으로 주저하며 교
장실로 들어섰다. 날 왜부른 것일까?

숙이 교장실에 들어가 본 적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은 부임 첫날 채용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왜 방음시설이 방송실 외에 교장
실에도 두껍게 되어있는지 의아하게 여겨졌다. 마교장은 두꺼운 방음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서있었다.
-숙 선생, 거기 탁자 위의 것 가져 가세요.
돌아보지도 않으며 그가 말했다.

펑퍼짐한 소파사이에 놓여진 탁자 위엔, 하얀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 이게 뭔가요?
-뭘 묻나, 그냥 집어 넣고 가져가요.

숙은 의아했다. 무언데 무조건 가져가라니.
-그리고... 다른 선생들 못보게 해. 알았지, 숙이?
마교장은 어느새 접대하던 술집에서 그녀를 대하던 말투로 변해 있었다. 그 말에
겁이 난 숙은 잠자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커튼을 다시 닫더
니 자기 책상에 앉았다. 교장실 실내가 거의 밤처럼 어두워졌다.
-다음부턴... 계속 좀 부탁하겠어. 그리고... 아니,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아직도 얼떨떨한 숙은 나중에 무얼 부탁한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런 숙을 무시하고 마교장은 인터컴을 켰다.
-이봐... 영이... 영선생 지금 수업있나? 없으면, 지금 이리로 오라고 해.

숙은 어쩔 수 없이 봉투를 들고 교장실을 나서는 도리 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녀는 누군가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그녀와 맞딱드린
것은 영선생이었다. 국어 정교사. 스물 여섯에 다음 달엔가 결혼 한다는, 학교
안에서는 교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얼굴로 치면 학교 안에서 제일 나을지도
모르는 그 여선생이 교장실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엉겁결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사는 커녕 숙을 재빠르게 유심히 쏘아보고
있었다. 특히나 숙이 손에 든 봉투를 유심히.

그녀가 당황하여 등뒤로 봉투를 감추자, 영은 묘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겨 보더니
지나쳐 교장실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마교장의 호출이라... 정말 영, 그녀는 교
장실안에서 그와 무언가 소문날 일을 하는 것일까?

숙은 교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화장실로 꺾어졌다. 봉투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는 조심스럽
게 봉투 안의 내용물을 끄집어 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놀라움에 큰 숨을
들이마셨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뒷면이 하얀, 조그만 종이쪽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얼핏 보기에도 대여섯장 이상이 들어가 있었다.

연이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교무실로 돌아오자, 이미 교무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침 첫 수업을 위해 교실들로 올라가버린 뒤였다. 숙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자기 서랍 속에 넣고 잠궜다. 이럴 수가. 내가... 수표를 받다니... 그것
도, 은이나 희가 받은 것보다 배나... 잘못 받은 게 아닐까? 내가 마교장이나 교
육관과 밤을 보낸 것도 아니고, 은과 희 그녀들은 분명 - 석장씩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출근한 이후로부터 연달아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들 속에 머리가 핑 돌았
다. 이거였어, 희가 좋겠다고 한 건. 하지만 어떡해야 하지? 이 돈을 받아야 하
나? 하지만 돌려줄 수도 없고... 돌려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따르릉, 하는 전화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번이나 울린 다음에야, 숙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 여보세요...?
-아, 저 한주임인데... 누구야, 숙이?
한선생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아까 조회시간 직전까지도 그가 보이지 않았음을
기억해냈다. 하기사, 은, 희, 교장, 그것도 부족해서 한선생까지 마주쳤다면, 숙
은 아침부터 까무러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응, 난데... 나 오늘 좀 늦을 거야. 그렇게 알구 있어... 걱정마, 출장처리 됐
으니... 오후에...
숙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한선생이란 이 작자는 마치 그녀가 자기 마누라라
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아냐, 아니지, 이따가 교문 앞에서 보자구. 퇴근 후에. 알았지? 교문 앞에서 기
다리고 있어.
딸칵,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퇴근 후에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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