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벌거숭이 여전사들5(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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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693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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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커리어 우먼
지훈이 운전하는 백색 아카디아가 서초동의 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간선
도로로 나서고 있었다.
지훈은 4년제 경찰 대학을 졸업한 올해 스무 여들 살의 전직 경감이다.
지훈의 현직시절 마지막 근무 부서는 본청 특수부였다.
특수부에 소속된 사람을 보는 눈은 경찰 내부에서도 두 종류가 있다.
한직에 밀려갔다는 시각과 출세 코스를 타게 된다는 눈이다.
같은 부서를 두고 이렇게 정반대의 두 가지 시각으로 나누어 이유는
특수부가 하는 일에 있다.
특수부란 말 그대로 특수한 사건만 전담하는 부서다.
정책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지시를 내리면 그때부터 움직인다.
상부의 지기가 없이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상부의 지시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뜻이다.
상부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수사 지시가 내려도 정치적인
배경이 있거나 경찰 고위층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는 요원에게만 수사 지시가
내린다.
고위층이 만족할 정도로 수사를 완결하면 당연히 신임을 받게 되고 출세
길이 열린다.
반대로 정치적인 배경이나 경찰 상부의 눈에 난 수사 요원에게는 수사
지시가 내리지 않는다.
그런 수사 요원에게는 특수부가 영원한 한직이다.
지훈의 특수부 발령은 한직으로 밀려간 인사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지훈은 정계 실력자의 정치 자금과 관련된 부정의 꼬리를 잡고 수사에
나섰다.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상부의 수사 중단 압력을 받았다.
지훈은 압력을 묵살하고 수사를 계속한다.
결과는 한직 특수부 발령이었다.
경찰은 내부적으로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경비 경찰과 공안 경찰이다.
경비 경찰은 범죄 예방과 수사 교통 관계 등 국민 생활과 직접 관련되는
치안 업무를 담당한다.
공안 경찰은 정보 외사 등 일반적 사회 안전과 국가 안위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다.
시국 사범 같은 업무는 공안 경찰의 업무에 속한다.
경비 경찰과 공안 경찰은 경찰 조직법에 따른 공식적인 분류는 아니다.
관행상 그렇게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나라 경우 건 경찰은 내부적으로 커리어 그룹과 논(비)커리어
그룹으로 구분된다.
커리어 그룹은 경찰 대학 졸업생 중에서 성적이 상위에 속하는 그룹과
고시 출신이나 군 출신이나 기관 출신 특채자 등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적인 인맥을 가진 사람도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주로 공안 부서나 경찰 상급 기관에서 기획 등을 담당한다.
커리어 그룹이 아닌 경찰은 모두 논 커리어 그룹에 속한다. 이들은
일선에서 경비 경찰 업무를 담당한다.
논 커리어 그룹은 순경으로 들어 간 경우 대개는 경장이나 경사로 끝나고
경위로 투신한 경우에도 경감이나 경정에서 끝나게 된다. 기껏해야 총경으로
지방 경찰서장이 끝이다.
커리어 그룹은 승진 시험 등을 거쳐 30세 전후에 이미 경정으로까지
승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찰에서 커리어 그룹 수는 전체의 10%를 넘지 못한다.
이 10%가 전체 경찰 조직을 장악하고 끌고 가고 있다.
4년제 경찰 대학 졸업생이고 졸업 성적이 전체 5위 이내에 들었던 지훈은
당연히 커리어 그룹으로 발탁된다.
승진 시험을 통해 이미 20대 중반에 경감으로 승진해 있었다.
이번 경정 승진자 명단에서 지훈이 탈락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훈은 승진에서 탈락한다.
승진 시험에 나타난 점수만으로 합격자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 근무 태도나 적성 같은 것이 시험 성적 외에도 참작한다.
시험 성적은 좋았던 지훈을 진급에서 탈락시킬 수 있었던 구실은 바로 이
적성이라는 함정이다.
특수부로 발령이난 3개월후 지훈은 경찰을 사직하고 나왔다.
지훈의 사직에는 경찰 핵심 고위층만이 아는 숨은 기밀이 있었다.
경찰을 사직한 지훈은 강남의 작은 오피스텔에 G&W 리서치라는 간판을
걸었다.
G&W 리서치에는 직원이 없다. 지훈 혼자다.
윈디가 학교를 마치면 바로 G&W 리서치로 온다.
G&W 리서치는 지훈의 G와 윈디의 W를 딴 이름이다.
이웃 오피스텔 사람들도 G&W 리서치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고 있다.
토요일 오후.
지훈은 지금 윈디와 박혜린이 있는 카페 당신의 향기로 가는 길이다.
차를 운전하던 지훈의 눈에 인도로 걸어가고 있는 여자의 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정장을 하고 있었다.
엉덩이에 찰싹 올라붙는 타이트 스커트가 무릎 반쯤까지 올라가는 투피스
정장이었다.
엉덩이는 올라붙어 있었고 전혀 군살이라는 없었다.
타이트 스커트 밖으로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미끈한 두 다리가 아름답다
못해 외설적인 분위기까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뒷모습으로 보아 여자는 30대에 접어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지훈은 여자의 엉덩이와 타이트 스커트 밖으로 뻗어있는 두 다리가 기억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인도 가까운 차선으로 몰아 넣었다.
'아. 채정화군'
상대가 채정화라는 것을 알아 본 지훈이 경음기를 울린다.
채정화는 경음기를 울리며 자기 옆에서는 차에 흘깃 시선을 보냈다.
백색 아카디아 창문이 내려지면서
"최 여사."
지훈의 소리가 얼굴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또 채 여사네?"
채정화와 지훈은 아파트 같은 층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
사이다.
경찰을 그만 둔 지금도 채정화는 지훈을 옛날처럼 지 경감이라 부른다.
달리 부를 적당한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채정화. 33세.
서울 생명보험 직단 영업국 생활설계사로 뛰면서 팀 장을 겸하고 있는
독신 커리어 우먼이다.
생명보험 업계에서 말하는 직단영업은 직장 단체 영업의 준말이다.
채정화는 4년제 정규 대학 경제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한 때 다른
직장에서 근무한다.
5년 전 채정화는 당시 신설 회사였던 서울 생명보험이 4년제 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생활설계사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게 된다.
경제학을 전공해 생명보험 시장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채정화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응시해 전직한 미모의
생활설계사다.
"어서 타시지!"
지훈이 경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투로 말한다.
"나 집으로 가는 길 아닌데"
채정화는 지훈처럼 어정쩡한 말투로 답한다.
지훈을 바라보는 채정화의 눈 길속에는 서로의 육체를 아는 사람만이
주고받는 색깔이 담겨있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닌데."
"행선지도 묻지 안고 무조건 태워 어떡하게"
채정화가 요염한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상 곳에 끌고 가면 안되는데"
채정화가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아파트 문을 열면 되는 일까지고 이상한 곳까지 갈건 없지"
"토요일인데 윈디는 어디 두고 혼자지?"
채정화는 윈디가 언제나 금요일 오후면 지훈의 아파트에와 월요일
아침까지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직업을 가진 채정화도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윈디도 붙임성이 좋았다.
붙임성이 좋은 윈디와 채정화는 몇 번 만나는 사이 금세 친해졌다.
"지금 윈디 있는 쪽으로 가는 길이지."
"거기가 어딘데?"
"전철 3호선 강남역 부근. 채 여사도 그쪽으로 가시는 것 같은데?"
지훈은 채정화가 소속되어 있는 서울 생명보험 강남 영업국 사무실이
서초동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하철 강남역과 채정화의 회사가 있는 서초동 오피스 빌딩거리 가까운
거리다.
"그 채 여사 소리 좀 집어치우라니까 그러네 . 처녀에게 여사는 또 뭐야?"
"아차. 처녀였지. 그럴 깜빡 잊을 번 했군"
지훈이 처녀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한다.
채정화도 지훈이 처녀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뜻을 알고 있다.
"처녀가 바람이 났나?. 주말 오후에 야한 모습의 정장까지 하고 나섰으니"
지훈이 쭉 뻗어 나와있는 채정화가 다리에 눈길을 주며 말한다.
시트에 앉으면서 짧은 타이트 미니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두 다리가
합쳐지는 뿌리까지 훤히 드러나 있다.
그런 채화진의 다리 깊은 곳을 보면서 지훈은
'저 정도 말려 올라갔으면 팬티가 보일 만도 한데 보이지 않는걸 보면
지금 채정화는 노팬티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채정화도 지훈이 자기 스커트 자락 아래를 힐금 바라보는 이유를 눈치
채고 싱긋 웃는다.
"큰 것 하나 판촉이 있는 모양인가?"
"우리 업계도 경쟁이 치열하거든!"
"하긴 남자들은 노 팬티 여자에게는 약하지. 특히 미녀가 노 팬티라면
더욱 약할걸"
"착각은 자유라던가?"
"내가?"
"지금 내가 노 팬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라는 뜻이지"
채정화의 말에 지훈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힐긋 본다.
"윈디는 티 백 팬티가 없나보군"
"아이구. 그 나이에 티 백 팬티까지!"
"나이 많다고 구박할 여자 팬티 억지로 벗긴 사람이 누구더라"'
"숙녀가 벗겨달라고 자극하는 걸 알고 벗겨주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요즘은 뜸하더라!"
채정화가 선정적인 눈으로 지훈을 흘깃 바라보며 말한다.
"월요일 벗기러 갈까?"
"월요일?"
채정화가 머리 속으로 월요일 스케줄을 생각한다.
"늦어도 열 시까지는 돌아와 있을 거야"
"딱 좋은 시간이군":
"나 저 건물 앞에 좀 세워 쥐"
채정화가 저만 치에 보이는 세명빌딩을 가르키며 말한다.
"저기는 세명그룹 빌딩 아니야. 대기업은 토요일 오후에도 일을 하나?"
"6층에 세명전자 연구서가 있어. 연구소는 주말 격주 근무제야"
"티 백 팬티 입고가 근무 열심히 하는 사람들 자극시키려도 작정을
한거군"
"남자들 스트레스 해소에는 눈요기도 약이라면서?"
채화정도 지지 않는다.
"고객 관리 방범도 여러 가지군"
"생명보험 영업은 끈기 성실 친밀 신뢰 그리고 정보가 생명이야."
"결국 인간적인 신뢰와 유대라는 뜻이군"
"주말 오후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찾아 수고한다는 인사 한 마디 하는 것도
인간적인 유대를 깊게 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해"
"역시 커리어 우먼이라 다르군"
"비록 아이스 콘 한 개지만 나누어 먹으며 대화를 나누면 친근감이
생기게되거든"
채정화이 차에 탈 때부터 들고 있던 쇼핑 백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난 팬티 벗어 그 속에 넣어 두었나 했더니 아이스 콘이었군"
지훈은 처음 채정화가 생명보험 업계 일선에는 뛰는 현역 생활설계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랐다.
지훈과 채정화는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산다는 우연이 인연이 되어
이상한 관계로 발전한 사이다.
지훈의 아파트는 계단식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양쪽에 한 가구씩뿐이다.
지훈이 그 아파트로 옮겨온 것은 경찰을 그만 준 직후였다.
처음 옮겨와 자기 아파트 건너편에 누가 사는지 몰랐다.
아침 일찍 나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는 지훈은 자기와 같은 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한 번도 얼굴을 마주 친 일이 없었다.
그 아파트도 언제나 조용했다. 휴일에도 별 사람 기척이 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밤.
아파트로 돌아온 지훈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현관에서 젊을 여자가 뛰어 오며
"같이가요"
하고 엘리베이터를 멈추라는 손짓을했다.
지훈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여는 오픈 버튼을 눌렀다.
"고마워요"
여자가 들어서며 말했다.
여기가 갈 층의 버튼을 누르려던 여자가 16층 표에 불이 켜져 있는 걸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하며 지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훈도 이 여자가 자기와 같은 층으로 간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16층에 사시는군요"
지훈이 먼저 말을 걸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군요.
채정화예요"
채정화가 먼저 자기 소개를 했다.
"지훈입니다"
엘리베이터가 16층에 멈추었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왼쪽이 지훈이
아파트고 오른 쪽이 채정화가 사는 곳이다.
엘리베이터를 나선 두 사람은 동시에 열쇠를 꺼냈다. 그러다가 서로의
얼굴을 흘깃 본다.
열쇠로 열고 들어간다는 건 지금 집안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서로 얼굴을 흘깃 보던 두 사람은 또 동시에 미소를 교환했다.
"다른 일없으시면 들어와 차 한 잔하고 가시겠어요?"
채정화가 자기 아파트 현관문에 열쇠를 꽂으며 말했다.
처음 만나는 이웃끼리 흔히 있을 수 있는 초대다.
그러나 그때 시간은 이미 한 시를 넘어서 있었다.
밤 한 시는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도 손님을 초청하기에도 자연스러운
시간은 아니다.
거기다 지금 채정화의 아파트에는 아무도 없다.
새벽 한 시에 젊은 여자가 혼자 있는 집에 젊은 남자가 들어간다는 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실례가 아니라면 차 한 잔 얻어 마실까요"
지훈은 승낙하고 말았다.
지훈의 눈에 비췬 채정화의 첫 인상은 연예인이나 고급 술집 마담 같은
느낌이었다.
지훈이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화려한 옷에도 있었지만 밀폐된
엘리베이터에 있을 때 채정화의 몸에서 풍긴 약한 술 냄새 때문이었다.
상대가 술집 마담으로 생각한 지훈은 별 부담없이 따라 들어갔다.
"차 끓일까요? 아니면 맥주가 있는데 한 잔하시겠어요?"
거실로 들어서면서 채정화가 물었다.
"차 끓이자면 번거로운데 그냥 맥주 한 잔 주시지요"
채정화가 맥주와 잔을 받쳐든 쟁반을 들고 와 테이블에 놓은 다음
"들고 계세요."
하는 말을 남기고 침실인 듯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훈이 거실을 살폈다.
남자가 필요로 하는 가구나 물건이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경찰관은 실내 분위기만 보고도 그 집에 사람들을 짐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술 집 마담이 혼자 사는 집이군'
지훈을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맥주를 따러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지훈의 눈에 거실 구석에 있는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다.
'술 집 마담치고는 괴상한 취미를 가졌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채정화라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방문이 열리고 실내용 긴치마에 블라우스 차림의 채정화가 나왔다.
지훈이 또 하나의 잔에 술을 따렷다.
"고마워요"
채정화가 지훈이 따러 놓은 맥주 잔을 들며 말했다.
"여기 사신지 오래되었습니까?"
지훈이 물었다.
"3년 째 접어들어요"
"나보다 선배시군요"
"지 선생은 얼마나 되셨어요?"
"반년 조금 더 됩니다."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지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세요?"
"얼마 전까지는 경찰에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구만 두고 놀고 있습니다"
"경찰? 그럼 지 선생님이 경찰관이었다는 거예요?"
채정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묻는다.
"왜 경찰관 한 사람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언론계나 연예계에서 일하는 분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지훈의 그 말에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는다.
"부인은 어디 여행 떠나신 모양이지요?"
채정화가 묻는다.
"네?"
"젊고 예쁜 부인요. 지 선생님하고는 처음이지만 부인하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쳤어요. 이제 마주치면 미소 정도는 나누는
사이예요"
지훈은 채정화가 말하는 부인이 윈디 얘기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윈디는 매주 금요일에 와서 월요일이면 돌아간다.
평일에는 지훈이 특별히 오늘같이 자자는 말을 하지 않으면 자기 아파트로
간다.
윈디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같이 있자고 했다. 그러나 윈디는 지훈을
속박하기 싫다면서 따로 아파트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매력이 넘치고 젊은 부인 혼자 여행 보내고 걱정 안되세요?"
채정화가 웃으며 또 부인이라는 말을한다.
"나 아직 미혼입니다"
"네?. 아니 그럼 그분은 누구세요. 진 선생이 없을 때도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여러 번 보았는데요"
"열쇠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아내는 아닙니다"
"애인이 시군요"
"그런 샘입니다"
지훈이 부인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의미에서 편리하겠어요. 필요하면 애인도 만들고요"
"여자는 불편합니까?"
"소문과 남의 눈이라는 게 있잖아요?"
"소문 나지 않게 만드는 방법도 있을텐데요?"
"경찰관 출신이라 소문나지 않고 애인 만들어 놓는 비법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알고 계시면 그 비법 좀 배워 주세요"
말을 한 채정화가 장난기 서린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고 있다.
"간단합니다."
"간단해요?"
"내가 채 여사 애인이 되면 절대로 비밀이 세어 나갈 위험이 없지요.
엘리베이터가 서는 16층에는 우리 두 집밖에 없으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지훈은 채정화를 술집마담 정도로 여기고 진한 농담을
했다.
"그러고 보니 계단식 아파트는 그런 편리한 점도 있군요."
"편리한 만큼 위험 부담도 높습니다"
"위험 부담이라니요?"
"같은 층이라도 두 가구 외에는 서로 통로가 없는 밀폐된 공간이지요.
우리 16층의 경우 내가 채 여사를 덮치면 아무리 소리 질러도 듣는 구해
주러 올 사람이 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위험도 있군요"
"얼마나 위험한지 직접 보시겠습니까?"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채정화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채정화가 약간 당황하는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고 있다.
지훈이 채정화를 안았다.
채정화의 입에서
"어마!"
하는 말만 나올 뿐 강한 저항은 보이지 않는다.
채정화를 안으면서 가슴 탁력이 지훈의 가슴으로 전해 온다. 대단한
볼륨감이다.
감촉으로 브레지어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느껴진다.
지훈의 입이 채정화의 입을 덮는다.
입과 입이 겹치면서 지훈의 손이 블라우스 위로 채정화의 가슴을 만진다.
상상했던 그대로 볼륨 감에 넘치는 유방이다.
지훈의 손이 블라우스 위로 채정화의 젖가슴을 천천히 주무른다.
젖가슴을 주무면서 채정화의 혀가 지훈의 입술 사이를 헤치고 들어온다.
젖가슴을 주무르던 지훈이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간다.
단추가 풀어지면서 30대 초반 여인의 성숙된 유방이 블라우스 앞 가슴을
헤치며 밀고 나온다.
성숙한 여인의 거대한 유방은 일직선으로 돌출해 있었다.
흔히 말하는 포탄형 유방이다.
남자가 만지며 즐기기에는 매우 이상적인 형이다.
지훈의 손이 포탄형 살덩이의 탄력을 즐기기 시작한다.
지훈은 채정화의 유방을 만지며 진유라의 유방을 생각한다.
진유라도 채정화가 같은 앞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출해 있는 포탄형이다.
진유라는 꼭지 자극에 약하다. 꼭지를 조금만 자극해도 관능의 세계에
깊이 빠진다.
포탄형 유방을 가진 여자의 특징이다.
진유라의 그런 특징을 연상하며 지훈이 손가락 사이에 꼭지를 끼워 약간
강하다 싶을 정도로 비빈다.
"아앗!"
채정화가 펄쩍 뛰듯 소리친다.
채정화의 입을 덮고있던 지훈의 입이 가슴으로 내려와 남아 있는 가슴
무덤을 덮는다.
꼭지가 입 속으로 들어온다. 입 속으로 들어온 꼭지를 빨 사이에 넣어
가볍게 씹는다.
"아아앗"
채정화의 입에서 깜짝 놀란 만치 높은 음정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다.
그 증거로 채정화가 팔을 뻗어 자기 가슴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지훈의
머리를 껴안아 끌어당겨 더욱 강하게 밀착시킨다.
채정화의 가슴 탄력을 즐기고있던 지훈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아래로 내려간 손이 헐렁한 실내용 스커트를 들치고 들어간다.
"아!"
지훈의 손이 스커트를 들치고 들어오는 감각을 느끼면서 채정화의 입에서
짧은 울먹임 같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채정화는 지훈이 손이 오는 곳이 몹시 젖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떡하다보니 안겨 있는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처음 대하는
남자에게 질펀하게 젖어 있는 자신의 엄밀한 곳을 확인시킨다는 생각을
부끄러웠다.
거기다 채정화는 지금 여기가 자기 집이고 긴 치마를 입는다는 생각에
팬티를 입지 않고 있었다.
손이 들어오면 자기가 노 팬티 차림으로 손님을 맞았다는 것도 지훈이
알게된다.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파고 들어오는 지훈의 손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늦어있었고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스커트를 들치고 들어온 지훈의 손이 여자의 언덕으로 갔다.
언덕 위에 놓인 지훈의 손에 느껴진 것은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섬유
감각이 아닌 숲의 감각이었다.
"아! 부끄러워!"
지훈의 손길을 숲에서 느끼는 순간 채정화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손이 숲을 쓸기 시작한다. 손바닥으로는 숲을 쓸면서
가운데 세 개의 손가락이 계곡을 밀치고 들어간다.
계곡 주변은 이미 늪처럼 물이 흥건히 고여 넘쳐흐르고 있었다.
지훈의 손이 물기를 질퍽거리듯 움직인다.
"아아!"
채정화의 입에서는 또 한 번 비명이 흘러나온다.
비명과 한께 머리를 싸안고 있던 손이 지훈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며
"침실로 가요"
하고 속삭인다.
지훈이 벌거벗은 채 자기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채정화의 포탄형 젖무덤을
주무르듯 어루만지고 있다.
두 사람의 벌거벗은 몸은 땀으로 번쩍거렸고 방안은 동물성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격렬한 육탄전이 벌어졌다는 증거다.
"나 세상에 태어나 남자에게 안겨 정신을 잃어 보기는 처음이예요"
채정화가 아직도 초점이 흐릿해져 있는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놓치기 싫은 소중한 보물을 얻을 때처럼 지훈을 쥐고
놓지 않는다.
채정화의 손에 쥐어진 것은 이미 반 이상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채정화는 자기 손에 쥐어진 것의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을 알면서 또
한 번 지훈이라는 남자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채정화가 처음 놀란 것은 지훈이 자기 속으로 밀치고 들어올 때였다.
30대에 들어선 채정화는 사회적인 측면 뿐 아니고 성적인 면에서도 케리어
우먼이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훈을 처음 자기 집으로 대려고 들어 올 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여행 중인
이웃 집 잚은 남편에게 차 하잔 대접한다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얘기를 하는 사이 미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자기보다 나이 어린
총각이 덤비면 자기 주도로 한 번쯤 안겨주어도 좋다는 식의 기분이었다.
채정화는 지훈의 손으로 자기 적가슴을 애무 받으며 자기 계산이 꼬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실감해야했다.
채정화가 느낀 지훈의 유방 애무는 놀랍도록 정교했고 급소를 찾아
자극했다.
그때부터 자기를 잃기 시작했다.
손이 스커트를 들치고 들어온 다음에는 완전히 지훈에게 정복당한
기분이었다.
커리어 우먼 채정화는 자기가 나이 어린 남자에게 이토록 철저히 농락
당할 것이라는 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그 동안 상대한 남자 가운데는 업무적으로 연결된 중년들도 많았고 원숙한
50대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남자도 자기를 이토록 철저히 미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채정화로서는 하나의 놀라움이고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기도 했다.
채정화의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훈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 채정화는 열 여들 살 처녀 몸은 남자를 처음
받아 들일 때 느껴야했던 통증보다 명갑절 강한 아픔을 격어야했다.
채정화는 자기 몸의 일부가 갈기갈기 찧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쌓여
비명을 질렀다.
비명과 공포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흐느낌과 황홀감으로 변하고 이어
정신을 잃었다.
30대인 자기가 어디로 보아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지훈에게 안겨 그토록
소리치고 흐느끼고 정신까지 잃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채정화의 머리에 문득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듯
아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 경감 애인 이름이 뭐예요"
"지 경감이요?"
"갑자기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몰라 과거에 경감이 였다는 말이 기억나
그렇게 부른 거예요. 잘못 부른 건 가요?"
"편하도록 부르세요"
"그 아가씨 이름이 뭐예요?"
"윈디!"
"윈디? 외국 사람 이름 비슷하네요"
"윈디는 국적이 미국이예요. 유학 와 있지요"
"어마! 그랬군요"
"윈디를 왜 묻지요?"
"윈디라는 아가씨 괜찮아요?"
채정화가 자기 손에 쥐어진 것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말한다.
"윈디는 아직 남자를 나 밖에 몰라요"
"그럼 어린 숫처녀에게 이걸 들이밀었다는 거예요"
"윈디도 아프다고 소리 질렀지만 채 여사처럼 그렇게 외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채 여사가 뮈예요. 나 아직 처녀예요"
"아! 처녀라 그렇게 아프다고 소리쳤군요"
지훈이 웃지도 않고 말한다.
"이제 보니까 보통 능글맞은 사람이 아니네?"
채정화가 곱게 흘긴다.
"어쩔 거예요?"
"어쩌다니요?"
"앞으로 날 어쩔거냐구요. 처녀 바람 내 놓고 모른 척할 거냐구요"
"윈디는 금요일에 와 월요일에 돌아가요. 그 날만 빼고 나 여기 와서
잘까요?"
"누구 일 못하게 해 망칠 일 있어요?"
"그럼 어떡하지요?"
"한 주일에 한 번만 안아 줘요"
"한 주일에 한 번은 아쉬운데 두 번 안될 가요?"
"그 말 진정이예요?"
"채 여사는 내가 만난 여자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분입니다"
"매력적이라는 소리는 듣기 좋지만 그 채 여사라는 소리는 제발 좀 빼
주세요"
"그럼 뭐라고 부리지요?"
"그냥 정화하고 불러요"
"누님 같은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불러요?"
"누님 같은 여자 힘으로 벗겨 밀치고 들어오는 건 뭐예요"
"그럼 정화 씨로 부르지요"
"지 경감은 이상한 구석이 있네요?"
"뭐가요"
"남자들은 처음 보는 여자 만나면 대개 직업 묻잖아요?"
"물어보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겁이다"
"나 뭐 하는 여자로 보여요?"
"글쎄요. 뭐 하는 분으로 보인다기 보다는 연예인이나 고급 사교장 여주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칭찬이예요? 아니면 욕이예요"
"그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뜻이지요"
"나 생명보험 생활 설계사예요"
"정화 씨가 생명보험 생활설계사요?"
"그래요?"
"정화 씨 정도면 실적 많이 올겠군요"
"어마!. 생명보험 업계를 잘 아시나 보네요"
채정화가 의외라는 표정이다.
"한때 데리고 있던 부하가 생활설계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계
얘기 가끔 듣게 되지요."
"데리고 있던 부하라면 경찰관이라는 뜻인 가요?"
"형사 기동대의 민완 여형사였지요.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경찰
그만두고 보험 회사로 옮겨 생활설계사로 뛰고 있습니다"
"지 경감님이 말하는 부하라는 아가씨 혹시 삼선 생명보험에서 일하는
진유라라는 이름 아니세요?"
채정화의 눈이 또 한 번 반짝하고 빛난다.
지훈이 약간 놀란 눈으로 채정화를 흘깃 바라본다.
"역시 진유라 씨였군요"
채정화의 확인하는 듯한 말투다.
"진 경장을 잘 아는 모양이군요"
"아니요. 한 번도 만난 일은 없어요."
"그런데 진 경장을 어떻게?"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어요"
"정화 씨 같은 프로 생활설계사가 알고 있을 정도면 진 경장도 그
세계에서 조금씩 자리가 잡혀가는 모양이군요"
"동업자와 라이벌이 동의어로 해석되는 세계가 우리들 보험 업계예요"
"그래서 라이벌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는군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정보가 생명이더군요"
"그리고 프로만이 살아 남는 세계고요"
"우리 업계도 그래요."
채정화가 빙긋 웃었다.
"경찰도 프로만이 살아 남는 세계지요. 그런 의미에서 진 경장은 보험
업계에 뛰어 들 때부터 프로였습니다"
"언제 한 번 만날 기회 만들어 주세요"
"라이벌을 알아 놓아야 쓰러트릴 수 있다. 이것도 프로 세계의
법칙이겠지요"
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좋은 적수와 정정당당한 정면 승부 해 보고 싶은 건 남자들 세계의 독점
물만은 아니잖겠어요?"
이번에는 채정화가 빙그레 웃었다.
지훈의 채정화의 웃음 속에는 또 한 번 프로만이 가지는 여유를 느꼈다.
"진 경장도 좋아할 겁니다."
"그쪽에서는 진유라 씨를 아직도 진 경장이라 부르는 모양이군요"
"경찰은 동료 의식이 강한 세계지요"
"그래서 아무도 진유라 씨를 밀치고 경찰청을 파고들지 못하는 군요"
"한번 도전해 보시지요?"
지훈이 장난 끼 섞인 웃음을 지었다.
"도와주시겠어요"
채정화도 장난 끼 섞인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나에게 옛 부하를 배신하라는 겁니까?"
"아니요. 진정한 프로는 배신을 싫어해요. 자기가 배신당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작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배신을 강요하지도 않아요."
지훈이 채정화를 힐긋 바라보았다.
채정화를 바라보는 지훈의 눈에는
'이 여자는 대단한 프로구나'
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눈 다른 한 구석에는 감탄의 빛도 담겨 있었다.
"이건 실례가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정화 싸만 한 여자가 왜 결혼하지
않고 생활설계사 일에만 매달립니까?"
"간단해요. 경제적인 독립이에요."
"경제적인 독립이요?"
"난 전공이 경제학이예요. 경제학에서 하는 말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경제적인 독립 없이 사회적인 독립 없다 라는 말요"
"그렇군요.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도 경제적인 독립 없이는 진정한
독립이 없군요"
"초군사 강대국이던 옛 소련이 무너진 원인도 경제적인 취약성에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지훈은 채정화이라는 여자에 대해 다시 한번 놀랐다.
놀란 눈으로 자기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지훈에게
"또 이렇게 되었네요?"
채정화가 자기 손에 쥐어져 뜨겁게 달아 올라있는 것을 흔들어 보이며
말한다.'
"정화 씨 손에 잡혀 그렇게 되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병원으로
가 보아야할걸요"
지훈이 채정화를 끌어 안으며 웃는다.
"또 사람 죽일 작정이군"
채정화가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날 이후 지훈과 채정화는 스스러움 없이 몸을 섞고 대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 여기 좀 세워 줘"
지훈이 세명 그룹 산하 전자 연구소가 건물 앞에 차를 세운다.
"관리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너무 자극하지 말어"
"오래 걸려 거래에 성공한 거래처야. 빼앗기지 않으려면 물불가지지
말아해"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군"
"불쑥 찾아가 생명보험 가입하세요 하는 한마디로 예 그러지요 하고
가입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미 자기
발로 보험회사 찾아가 가입했을 거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보험 세일즈는 거절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절로부터 시작된다?."
"그래. 상대가 보험회사 사람이라는 걸 알면 일단 경계하고 거절부터 하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게 보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인 것 같아"
"알 만한데"
"지 경감도 과거에 그런 경험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어"
"하긴 권할 때마다 모두 가입하다가는 봉급 몽땅 보험료로 틀어넣어도
모자랄 테니까"
"어쩌면 저녁에 셰리네에 있을지도 몰라. 시간 있으면 와!"
지훈이 차를 세우며 말한다.
"윈디에게 혼나라고?"
채정화가 의미있는 웃음을 남기고 차에서 내린다.
지훈이 차를 스타트시킨다.
채정화가 들어서는 모습을 본 전자 연구소 경비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서 오십시오"
"주말인데도 고생하시네요"
"우리야 이게 일이지만 최 여사야 말로 토요일에도 쉬지 않고
웬일이십니까?"
"지나다 오늘이 근무하는 주말이라는 기억이 떠올라 잠깐 들렸어요. 이것
하나 드세요"
채정화가 아이스 콘을 탁자 위에 놓았다.
"이거 오실 때마다"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 가겠어요"
채정화가 머리를 숙이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채정화는 문득 자기가 경비실을 까다로운 절차
없이 이렇게 통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는
생각을 한다.
연구소는 일반 사무실과는 달라 외부인 통제가 엄격하다.
일반 사무실의 경우에도 수위나 안내실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특히 잡상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한다.
채정화가 생활설계사로 뛰던 지난 5년 사이 잡상인 취급을 받았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고 때로 울고 싶었고 실재 화장실에서 남몰래
울었던 일도 한 두 번 아니다.
그럴 때마다 채정화는 마음속으로
'이 정도로 좌절하고 이 정도 일로 눈물을 흘려서는 이 세계에서 성공하지
할 수 없어. 우는 건 약자야. 약자는 살아남지 못해. 채정화 너 지금 울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냐.'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달랬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웃는 얼굴로 먼저 머리로 숙이고 들어가면 상대도
인간적으로 대한다.
미소와 끈기.
이것이 채정화가 보험 업계 영업 일선에 뛰는 사이 터득한 지혜고 또
철학이다.
미소와 끈기.
그것은 말로 하면 쉽다.
감정의 동물인 인간으로는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특히 자존심을 생명처럼 여기는 여자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채정화는 투지로 극복해 내었다
거기서도 채정화의 프로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20분 뒤.
서울 생명보험 직단영업국 팀장 채정화는 세명 전자 연구소에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가지는 잠시 휴식 시간이다.
채정화를 중심으로 연구소 근무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가 손에 아이스 콘을 쥐고 있다.
"요즘 한려수도에 밤 볼락이 터졌다죠?"
"바다 낚시 하세요?"
채정화의 말에 바다 낚시광 중견 연구원이 환한 얼굴로 끼여들었다.
"가끔요"
"정보 좀 주세요"
"요즘은 완도 앞 바다 청산도 쪽에서 감성돔이 나온다던 데요"
"그럼 다음 금요일에는 그쪽으로 달려야겠는데"
"정보는 어디까지 정보일 뿐 보장은 못해요"
"낚시 세계에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미국 쪽에서 반도체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더군요"
채정화가 화제를 돌리다.
여러 사람과 한가한 대화를 할 때 화제를 한 곳에만 몰고 가면 다른
사람이 불만을 가지게 된 다는 것을 채정화는 알고 있다.
채정화의 유도로 잠시 반도체 시장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그때 주임 연구원이 들어섰다.
"채정화 씨 오셨군요"
"지난번 홀인원 하셨다죠?. 축하해요"
채정화가 구임 연구원에게 인사 대신 던진 말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자기 자리로 가려던 주임 연구원이 채정화 곁으로와 앉는다.
채정화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아이스 콘 하나를 집어 주임 연구원에게
건넜다.
주임이 그것을 받으면서 화제는 잠시 골프 쪽으로 흐른다.
채정화가 거래처를 찾을 때는 언제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한다.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야 여유로운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친근감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채정화는 알고 있다.
채정화가 직장 단위를 방문하면 항상 화제를 리드한다.
화제를 리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취향을 먼저 알아야 한다.
상대의 취향을 알아내는 것이 정보의 범주에 속한다.
정보는 그 자체만으로 무기가 되지 못한다.
상대의 취향에 맞추어 대화를 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교양의 범주에 속하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와 그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교양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프로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
채정화가 생명보험 업계의 프로 세일즈 우먼이 될 때까지는 뼈를 깎는
자기 노력을 한다.
모든 종류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했고 교양 서적에서 취미 서적까지
탐독한다.
필요한 지식은 항상 메모해 두었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부터는 컴퓨터를
통한 자료 정리까지 한다.
'서울 생명보험 채정화와 대화를 하면 즐겁다.'
'채정화는 어떤 얘기를 화제에 올려도 막히지 않는다'
채정화가 출입하는 거래처면 어디서건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채정화는 인간적인 차별을 하지 않는다'
채정화가 출입하는 거래처의 수위나 청소 아줌마 같은 잡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생명보험의 고객은 회사 내의 지위와는 상관없다'
이것이 채정화의 비즈니스 철학이다.
사장도 청소 아줌마도 모두가 생명보험 고객이다.
고객인 내가 그들을 최상으로 모실 의무가 있다.
이런 정신 자세로 영업 현장을 뛰는 사람은 채정화만은 아니다.
일선에서 뛰는 생활설계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주요한 것은 알고 있다는 자체가 아니다.
알고 실천을 할 때 효과를 발휘한다.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다.
채정화는 그것을 실천해 프로가 된다.
생명보험 영업 일선에서 뛰고 있는 프로 생활설계사는 모두가 끈기와 성실
그리고 인간적인 접근이라는 그들 나름의 노하우를 실천하고 있다.
그것을 실천했기에 그들은 살아 남을 수 있었고 프로 비즈니스 우먼이라는
자랑스러운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프로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프로는 자기 스스로가 프로를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성공한 프로 세일즈맨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정화는 자기 노력으로 스스로를 프로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프로 비즈니스 우먼 가운데 한 사람이다.
5. 여자의 재산
지훈이 카페 당신의 향기에서 김주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지 경감님. 나 교통사고 응급 환자 소식 듣고 무슨 생각한지 아세요"
김주희가 지훈을 건너다보며 말한다.
여기서도 지훈은 지 경감이라 부른다.
"그때 생각하신 거군요"
지훈이 김주희의 얼굴을 힐금 보며 말한다.
지훈이 말하는 그때 생각은 2년 전에 김주희의 신변에 일어났던 사건을
뜻한다.
"네. 그리고 생명보험이라는 제도 자체요"
"생명보험이라는 제도 자체라니요?"
"사고를 당한 그 사람은 생명보험에 가입했을까 하는 생각이요"
"이해가 갑니다. 김 여사는 생명보험과 깊은 관련이 있는 분 아닙니까?"
"제발 그 여사라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왜요?"
"거북해요"
"그럼?"
"주희라는 이름도 있고 또 이런 가게 경영하는 여자를 부르는 공통
대명사도 있잖아요. 마담이요"
"어느 쪽으로 불러 드릴까요?"
"과부에게 주희 씨하고 부르기에는 저항감을 느끼실 거고 그냥 김
마담으로 해요"
"그럼 미스 김으로 부르지요"
"지 경감님도 짓궂은 구석이 있는 분이예요. 남이 이러 라면 저러고"
김주희는 평소 남자 손님 자리에 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손님 접대는 여자 종업원에게만 맡긴다.
그걸 아는 손님도 무리해 김주희를 자리에 앉히려 하지 않는다.
그런 김주희에게도 예외가 있었다.
다른 손님 없을 때면 지훈의 자리에는 앉아 얘기를 나눈다.
지훈과 윈디가 애인 사이고 윈디가 김주희를 언니라 부르면서 따르는 격의
없는 사이라는 데도 원인이 있다.
"앞으로는 미스 김이라 부르게 해 주십시오"
"미스 김 !."
지훈이 미스 김 라고 불게 해 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김주희는 자기가
그런 식으로 불려 본 기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십니까?"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 난생 처음이네요"
"설마?"
"아니예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식으로 불린 경험이 한번도 없었네요"
"그 분은 그렇게 불렀을 텐데요"
"아니요. 그냥 주희야 하고 불렀어요"
김주희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미스 김이 진짜 보험 권유원인 진 경장 보다 더 생명보험 선전을 열심히
하는 걸 듣고 이상하게 생각 들 때가 있었습니다"
지훈은 진유라가 경찰을 떠난지 4년째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현직 때처럼
진 경장이라 부른다.
진유라는 형사 기동대 경장 출신이고 현직 때 지훈이 반장이었다.
"보험 권유원 소리하다 미스 진에게 야단맞아요"
"진 경장 놀리면서 하는 말이 버릇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스 진이 나를 찾아 왔을 때까지만 해도 생명보험이라는 게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모르고 있었어요."
"그건 미스 김만이 아니지요. 대다수 국민들이 생명보험의 필요성이나
사회적인 효능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미스 진이 생명보험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 경감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 였겠지요?"
"진 경장이 경찰 그만두고 보험회사 생활설계사가 되겠다고 나설 때 내
반응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진 경장!. 너 돌았어 였다지요?"
"진 경장이 그랬군요"
지훈은 자기 직속 부하인 진유라 경장이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을 그만 두고
생명보험 생활설계사로 전업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가 보인 반응이
기억에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그때까지만 지훈은 생활설계사가 어떤 일을 하는 업종인지 모르고 있었다.
생명보험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생명보험에 이해가 없었던 지훈은 유능한 부하면서 개인적으로 가까운
젊은 아가씨가 경찰관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보험 모집 인이 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유라가 무엇인가 착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누구의
감언이설에 빠졌다는 생각을 하고 적극 말렸다.
지훈의 만류에도 진유라는 자기 결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4년 전이고 진유라는 삼선 생명보험 생활설계사 겸 사망 조사
요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진유라가 직장을 옮긴 다음에도 두 사람은 인간적인 유대를 이어 갔다.
그후 진유라와 만나면서 지훈도 생명보험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미스 진은 생활설계사라는 자기 직업에 대단한 긍지와 보람은 느끼고
있어요"
"진 경장에게 생명보험의 본질이라고 할 까요 아니면 효능이라고 할까요.
그걸 들은 다음부터는 대형 사고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이상하게 생명보험이
떠올리게 되더군요"
"유족들의 생활 문제와 관련된 거 군요?"
"백화점이 무너지고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여객선이 침몰하고 기차가
전복하고 이런 사고들은 항상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런 대형 사고나 참사의 희생자는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아침 출근길이 나선 사람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김주희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잠시 말을 끊어다 다시 이어 갔다.
"그러다가 막상 격은 다음에야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더군요"
"불의의 사고나 참사의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게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숙명 아니겠습니까?."
"자기만 조심하고 안전 수칙을 지킨다고 안전해 지는 건 아니더군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의 숙명 같은 거지요. 이런 표현이 불행을
당한 당사자에게는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희생당한 당사자는 운명으로
돌린다고 합시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남아 살아가야 하는 유족들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절감해요"
"그렇겠군요"
"사람이란 어떤 역경을 만나도 살아 갈 수밖에 없더군요."
"그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의 권리고 또 의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거겠지요! 살아가자면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나서고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경제적인 문제를
뒷바침 해 주는 제도 가운데 하나가 생명보험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미스 김은 생명보험의 진가를 누구보다 실감하신
분이겠지요"
"미스 진이 찾아오던 그때 일 지금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뭐라고
할까요. 나에게는 현준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 이상의
충격적인 사건이 였어요. 물론 신선한 충격이지만 요"
"어느 날 젊은 여자가 불쑥 나타나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던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 가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나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우스운 얘기라니요?"
"현준 씨가 생명보험에 가입하기 전에 의논했더라면 나 한사코 반대했을
거예요. 나이도 젊은데 불길하게 생명보험에는 왜 가입하느냐고요"
"진 경장 말을 들어보면 생명보험을 기피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런 인식이라더군요"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친구 만나면 생명보험 권유하신다면 서요."
"미스 진이 그랬군요"
"덕택으로 진 경장은 실적이 올라가 좋다고 하더군요."
"아니요. 생명보험의 진가를 알고 나면 정말 좋아지는 건 가입자 자신과
가족들이라는 걸 알게 돼요."
김주희의 표정은 어느 사이 진지해져 있었다.
김주희는 생명보험이 화제에 오르면 언제나 표정이 진지해지고 목소리에
열기가 돈다.
"그 소리 생명보험 회사나 관련 단체에서 들었으면 당신이 향기를 전속
사교장 삼으려고 할지 모르겠군요"
"내가 친구들에게 생명보험을 권하는 건 진심이예요. 또 애들도 내 경험을
통해 생명보험의 필요성을 실감하나 봐요. 만일에 생명보험이라는 제도가
없었고 현준 씨가 생명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으면 지금 이 순간 김주희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설마 그렇게 까지야!"
"아니예요. 현준 씨에게 그런 불행이 닥치고 이제 그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난 혼자 살아 갈 자신이 없었어요."
"갑자기 당한 재난이고 거기다 그때는 학생 신분이 였으니 그런 두려움도
생겼겠지요"
"단순히 학생 신분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갑자기 당한 불행이라 충격도 엄청 났겠지요"
지훈이 무거워져 가는 분위기를 바꾸어 놓으려는 듯이 잠시 말을 끊고
맥주 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김주희도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지 경감님. 나 말이예요. 현준 씨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그런 여자였어요."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하고 김주희를 바라보았다.
"현준 씨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살아갔던 여자라는 뜻이예요."
"하라는 대로라면?"
지훈은 김주희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 김주희를 알게 된 동기는 진유라의 소개다.
진유라가 좋은 친구가 경영하는 카페가 있다면서 지훈과 윈디와 당신의
향기로 대려 왔다.
그때가 2년 전이다.
지훈이 처음 김주희를 보고 느낀 인상은 표정이 약간 어둡다는 것과
강인한 의지력을 지닌 여자라는 것이었다.
김주희의 표정에서 느낀 어두움은 최근 남편을 잃었다는 진유라의 설명을
듣고 이해가 갔다.
그런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첫 느낌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 김주희가 2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몰랐다는
말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모든 걸 현준 씨에게 맡겨 놓으면 됐어요."
"모든 걸요?"
"간단한 예로 난 주민등록 등본을 어디 가서 어떻게 발급 받는지 조차
모른 채 현준 씨에게 모든 걸 맡겨 놓고 살아 온 여자였어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럴 거예요. 현준 씨가 갑자기 내 곁을 떠난 다음에야 내가 어떻게 세상
살아가는 모든 걸 남에게 맡겨 놓는 그런 식으로 살아 왔던가 하고 스스로
놀랐고 그런 식으로 살아 왔다는 것 자체가 내 자신조차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미스 김 스스로가 맡겨 놓은 게 아니라 그 분이 모든 걸 처리해 주었던
것 아닙니까?"
"현준 씨는 나에게 공부 이외의 일에는 절대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어요"
"대단한 사랑이군요."
지훈이 감탄하듯 김주희를 은은히 바라보았다.
그런 지훈을 향해 김주희가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상하듯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현준 씨를 만난 건 열 다섯 번째 생일을 며칠 앞 둔 날이었어요."
김주희 말에 지훈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럼 여중 시절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 다음 2년을 쉬고 중학교에 들어간 1학년 때의
5월이었어요. 그때부터 세상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일을 현준 씨에게
맡겨 놓았으니 뭘 알겠어요"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 현준 이라는 분은 몇 살이 였습니까?"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준 씨와 나는 다섯 살 차이예요"
"대학생과 여중생의 만남이군요"
"현준 씨를 만나고 이년 후에 나는 소녀에서 여자로 변신한 거예요.
우리의 만남은 그런 숙명적인 요소가 있었어요."
김주희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아름다운 사랑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군요. 한번 들려주시겠습니까?."
지훈이 잔잔한 눈으로 김주희를 바라보았다.
김주희도 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김주희는 문득 내가 지훈이라는 사람 앞에 왜 자신의 과거를 틀어
놓는 걸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는 과거라는 그림자를 누구에 겐가 쏟아 놓고
싶어지는 충동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심정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지훈에게 모든 것을 틀어 놓고
자기 가슴속에 감추어져 있는 의혹에 대한 위문도 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누구에 겐가 쏟아 놓고 싶은 그런 심정이예요. 그리고 지
경감님께 의논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요"
김주희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말한다.
"의논이라면?"
"얘기를 하자면 긴데 지루하시지 않을까요?"
"듣고 싶습니다"
"현준 씨를 만났을 때 나는 성남에 있는 달동네에 살면서 공장에서 일을
하는 공단 여공 소녀였어요. ."
지훈이 또 한 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훈이 알고 있는 김주희는 국립대학 불문학과 출신의 인 인텔리다,
카페를 경영하고 있지만 몸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기품 같은
것이 넘친다.
표정도 언제나 우아하고 말투도 조용하다.
몸에서는 유럽 귀족 같은 체취가 풍긴다.
그런 김주희가 지금 자신은 공단 여공 출신이라고 한다.
지훈은 김주희의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미스 김이 여공이라니요?"
"말 그대로 공단 여공이었어요. 현준 씨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아직도
공단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거예요"
"현준이라는 분과는 어떻게?"
"구로 공단 여공과 부잣집 막내아들 대학생의 사랑 얘기죠"
김주희가 그때를 회상하듯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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