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body바이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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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3,236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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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훌훌 벗어버리고는...◈
아파트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들어갔으면 했다. 그런데 입구에서, 또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지는 사람들로 인해 주리는 점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얼어 잠그고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으면 싶었다. 그리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몇 날 며칠을 물도 마시지 안고 계속 잠만 잤으면 싶은 생각이었다. 전화 코드를 뽑아 버리고,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시간이 부지불식간에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아파트 복도를 걸으면서 자신의 손에 묵직하게 들려져 있는 봉투들이 부질없는 것들처럼 보여졌다. 마치 먹고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먹이를 빌려오는 듯한 비감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파트 입구 문에 키를 넣어 비틀고는 들어서자마자, 현관에다 들고 온 봉지들을 내 팽개쳤다. 구두를 벗는 둥 마는 둥하고서는 얼른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는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그때서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둠에 파묻혀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는 희미하게 잦아드는 잠결을 느끼면서도 끝내 잠이 들진 못했다. 모처럼 만에 깊은 잠에라도 빠져야겠다고 야무지게 마음먹었던 탓인지 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온통 허무뿐이었다. 작은 불빛이라도 따스하게 비춰줬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 같은 게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그럴 만한 여유의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이 온통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제도라는 것에도 화가 치밀었다. 치안유지, 치안이라는 말만 믿고서 여태껏 살아온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그런 허무맹랑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을 믿어서 밤길의 공원으로 들어갔던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아까 혜진의 말을 들으면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허가해준 업소에서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인지, 만일 허가를 해줬다면 철저하게 단속해서 미성년자들이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방에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처에 널려 있는 독소를 피해가며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리는 끝내 잠들지 못했다. 오후 내내 그러고만 있다가 밤중에서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배도 고팠지만 이불 속에서의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베란다로 나가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벌써 어둠이 깊은 밤이었다. 차라리 좀더 일찍 일어났더라면 어디든 산책이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바깥은 10시쯤 되었을까. 아파트 밑의 주차 선이 그어진 데로 차들이 슬금슬금 들어와 박히는 걸로 봐선 대략 10시쯤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캄캄한 밤하늘엔 오늘도 어김없이 희뿌연 별들이 찾아와 우중충한 밤하늘에 떠 있는 게 보였다.
'이 서울엔 회색 빛과 우중충함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주리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젠 밤중에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무서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겉모습은 온화해 보이지만 그 속에 숨어 있을 불량한 양심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요즘 사람들은 완전히 사이코다. 머리가 돌아 버려도 이만저만 돈 게 아니라,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서 돌아 버리는 데엔 현대 문명병이 한몫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길을 걷고 있는데 무심코 다가와 귓전에 바싹 입을 대고는 속삭이는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남대문 시장 근처였으리라. 그런데 그 남자는 사십대 후반의 멀쩡한 사내로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잘 알아듣지 못해서 주리는 그 자리에 서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되물었던 적이 있었다. 혹시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물었던 것인데 그 남자는 비실비실 웃으면서 한다는 말이,
'그냥 한 번 그래봤어요. 그냥 가세요.'
하고는 후딱 사라져 버렸다. 주리는 그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었다. 무슨 남자가 저래? 하고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자리를 떴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남자는 그 말만을 남겨 놓은 채 주리를 앞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정장을 하고선 멀쩡하게 금테 안경까지 낀 남자가 무심코 다가와서 바로 귀밑에다 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린 그 사건은 분명 현대인의 질병의 하나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식으로 요즘 남자들 중에 머리가 돌아 버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다가 밤중에 여자가 술이 취해 휘청거리기라도 한다면 은근히 다가가서 갖은 수작을 다 부릴 수가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한 것이 더 심해지면 여자의 은밀한 부위를 흘끔거리며 살피거나, 여자가 헤퍼져서 노출이 쉽게 되기를 바라고 무작정 뒤를 따라오는 치들도 있었다. 주리는 의사가 지어준 약 생각이 났다. 아직 하혈 같은 건 없었지만 식사 때에 맞춰 약을 먹으라고 지어준 약을 기억해내자,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다. 그녀는 낮에 혜진과 같이 먹었던 분식 외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음을 기억해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려고 그랬던 것 같았는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한줌도 되지 않는 먼지들뿐이었다. 주리는 편의점으로 내려가서 컵 라면으로라도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나서 약을 먹을 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밤의 공간 속으로 내려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그 끝 부분에 바로 상가의 24시간 편의점이 있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어디에선가 그 나쁜 놈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왈칵 덤벼들 것만 같았다. 주리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기만 하다가 결국 11시가 다 되어서야 사온 미역을 물에 담가 불리고, 소고기를 잘게 썰어 넣고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밥은 어제 지어 놓은 밥이 밥통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 미역국이 끓으면서 구수한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부산에 있을 땐,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어보긴 했으나 이렇게 주리 혼자서 만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대충 눈여겨본 짐작으로 미역을 넣고, 소고기를 썰어 넣고, 나중에 파를 숭숭 썰어 띄워 놓으면 되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또 있다. 구수한 냄새의 장본인이 고소한 맛을 내는 참깨가루에 있다는 것을. 저녁을 먹고 나서 약을 먹었다. 주리는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는 얼른 불을 끄고 누웠다. 침대의 머리맡의 창가로 모처럼 만에 보는 달빛이 새어들고 있는 게 보였다. 반달이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반들은 노란빛을 내뿜으며 하늘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창문을 통해 잘 보이도록 누군가가 맞춤한 자리에 내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어디서 오는 슬픔일까. 넘실대며 잔 물살처럼 다가오는 슬픔이 가슴을 살랑 살랑 채우며 쉽사리 잠들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가만히 눈을 감아도, 혹은 눈을 떠서도 의식에 붙잡히지 않는 그런 고요의 침묵이 그림자처럼 생각 속을 오가며 잠을 쫓아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올려다본 사내들의 거친 어둠 덩어리가 눈앞에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픔. 처음엔 그것도 몰랐다. 잠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있었지만, 그 다음부턴 온몸이 묵직한 아픔으로 시달리기만 했다. 주리는 손을 내려 자신의 몸을 어루만져 보았다. 이때까지 한번도 과격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곳이 요 며칠 사이에 함부로 다루어지면서 으깨져 버린 것처럼 슬퍼졌다.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불안해지고, 또 자꾸만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분한 생각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몸에 함부로 씨앗을 퍼뜨리고, 오늘 아침 산부인과를 찾아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그 어둠의 자식들에게 예리한 칼날을 꽂아주고 싶도록 이가 갈렸다.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랬다.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지만 한번 기억 속에 박혀 버린 아픔은 쉽게 사그러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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