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검궁인 의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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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2,709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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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1권 7장 일진풍(一陣風)



불야전(不夜殿).

이 곳은 구대신전 중의 하나로 타전과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른바 여인지전(女人之殿)이라고나 할까?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뇌정각 내에서도 특이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이 불야전이었다.

천일야화(千日夜花) 여취취(麗翠翠).

이것이 당년 불야전주의 이름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녀의 미색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 나이는 이미 40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주안술(駐顔術)을 익혀 20대의 미부(美婦)로 보이며 음탕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방중술에는 능하다 못해 달통(?)했으며 뭇 사내들을 치마폭에 휘감고 떡주무르듯 하는 희대의 요녀인 것이다.

그녀의 산하에는 십대야화(十大夜花)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불야전 소속으로 전주인 여취취 못지 않은 미색들을 겸비했음은 물론 능란한 기교 또한 그녀에게 뒤질 바가 아니었다.

불야전.

이는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뇌정각의 폐쇄 공간으로 정책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를테면 공창(公娼)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구대신전의 고수들에게 모든 환락을 제공하여 회포를 풀어주는 곳이 바로 불야전인 곳이다. 따라서 불야전의 위치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뇌정각을 떠받치고 있는 구대신전의 사기를 얼마 만큼 높여 주느냐가 바로 불야전에 달려 있으므로 .

"하하하 !"

"호호 아이 !"

이 곳에는 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불야전의 대전 안은 항상 대낮같이 밝았다. 또한 거기에는 여인의 숨넘어갈 듯한 교태로운 웃음소리와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가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대전을 지나면 방대한 규모의 요지(瑤池)가 나타났다. 인공으로 축조된 곳으로 천연의 온천수를 끌어들인 한편 훌륭한 설비를 갖춘 곳이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이러할까?

그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향락이 그 곳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무한정의 술과 온갖 방중술에 능통한 농염무비한 절색의 미녀들에 이르기까지.


"빌어먹을 ! 백리화(百里花)는 왜 보이지 않느냐?"

한 사내가 대전 안에 들어서며 노갑을 터뜨렸다. 그는 대략 30세쯤 되어 보이는 제법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키는 헌칠했으며 체격 또한 미끈했다. 단지 흠이 있다면 눈빛이 음습한 것이 여색(女色)을 꽤나 밝히게 생긴 것이 흠이랄까?

그가 대전에 들어서기 무섭게 한 소녀가 쪼르르 달려나와 그에게 매달렸다.

"아이 꼭 백리화라야 하나요? 저는 눈에 차지 않고요?"

나이답지 않게 아찔할 정도의 굴곡이 뚜렷한 몸매를 가진 소녀였다. 엷은 나삼 하나만을 걸치고 있어 환히 내비치는 육체는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녀의 탄력 있고 매끄러운 팔이 사내의 목을 휘어감았다. 그러나 사내는 딴전이었다.

"흐흐흐 요즘 들어 그 계집이 마음이 변한 모양이군."

"흥! 그 계집은 지금쯤 다른 사내와 어울려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걸요? 그러니 저와 ."

소녀는 질투심을 드러내며 더욱 끈끈하게 사내에게 엉겨붙었다. 사내는 안면의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어떤 놈과 배가 맞았느냐?"

"흥 ! 아직도 모르고 계셨어요?"

소녀는 샐쭉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음성에는 다분히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일순 사내의 손이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말해라! 어떤 놈이 가로챘단 말이냐?"

"헉 ! 이 이것 좀 놓고 !"

소녀는 불의의 사태에 자지러질 듯 놀랐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막무가내로 다그쳤다.

"빨리 말해! 말하지 않으면 목을 분질러 놓겠다!"

"직 직접 가보면 알게 아니에요?"

"어디냐?"

"천향소축(千香小築)!"

"천향소축이라고 ?"

사내의 두 눈에 살쾅이 번뜩였다.

"흐흐 감히 이 축공표의 계집을 건드려 ?"

천향소축이라면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곳이었다.

후덥지근한 온천수의 열기 속에서 초호화판의 주지육림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 역시 백리화와 그 곳에서 숱한 환락을 즐겨왔지 않은가?

축공표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질투로 폭발할 듯한 모습이 된 채 천향소축으로 향했다.


뿌연 수증기가 후끈한 열기와 함께 그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호호호 그만 그만 !"

여인의 간드러지는 교성이 더욱 뜨거웠다. 백리화였다.

"후후 아직 멀었다. 이제 고작 스물두 가지 비법(秘法)을 썼을 뿐이거늘 벌써 그친단 말이냐?"

"하악 ! 당신 정말 최고야 하지만 이젠 도 도저히 ."

그녀는 그 방면에 있어서는 대가였다. 그런데 어떤 사내가 그녀로 하여금 자진 항복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일까?

사내는 득의만만한 웃음을 흘렀다.

"후후 듣기로는 축공표란 자가 이 방면에서 도통했다고 하던데 그자와 비교하면 어떤가?"

"호호호 당신과 그 작자를 비교한다는 것은 보름달과 반딧불을 견주는 것과 같아요,"

"그 작자는 소문과는 달리 형편없는 모양이군. 후훗 !"

한편 밖에서 이들 두 남녀의 질탕한 음담을 모두 들어버린 사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마군자 축공표로서 다름아닌 대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이 이런 육시를 할 년놈들!"

그는 노기충천하여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는 보았다. 온천수가 넘실거리는 욕지 속에서 백리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사내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축 축 영주(竺令主) !"

그녀는 축공표를 보는 순간 대경실색하여 사내의 목을 죄였던 희디흰 팔을 풀어내렸다. 사내는 한 손에 술잔을 들었고 다른 한손으로는 여인의 나긋한 허리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태연자약했다.

"호오 저자인가? 축공표란 자가 ?"

취기어린 음성에는 기이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다름아닌 주천운이었다.

그는 벌벌 떨며 일어서려는 백리화를 꼼짝 못하게 바짝 끌어 안고는 술을 들이켰다.

"겁낼 것 없다구 ."

그는 유들유들했다. 상대를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의 손은 백리화의 가슴을 계속 주물러 댔다. 그 짓을 바라보고 있는 축공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흐흐 네놈은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놈이로구나."

"그 말은 맞는 것같군. 나는 아직도 도원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까. 흐음 좋군!"

주천운은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동그란 여인의 어깨를 입술로 핥았다. 백리향은 그의 수중에 갇힌 채 두려움과 쾌락이 엇갈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축공표는 부르르 한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쳐죽일 놈! 네놈이 바로 천소유(天小柔)란 놈이었구나."

"그런 것같소."

"얼마전 양늙은이가 제자를 하나 거두었다더니 바로 네놈이구나!"

주천운은 풋 하고 웃었다.

"푸풋 바로 맞추었구려."

축공표의 두 눈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는 주천운의 풀어 헤쳐진 앞가슴을 노려보며 분노에 차 부르짖었다.

"경고하겠다. 천소유. 더이상 백리화를 건드린다면 흐흐흐 네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날아갈 것이다."

천소유라는 가명(假名)을 쓰고 있던 주천운은 비양거리는 투로 응수했다.

"들었느냐? 백리화. 저 작자가 하는 말을 ?"

백리화는 간이 오그라드는 심정이 되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고 공자 그는 철혈전주님의 대제자예요 ."

"후훗 그게 어쨌단 말이냐?"

"아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분 ."

"누가 건드린다고 했지? 오히려 그가 나를 건드렸지 않은가?"

"고 공자 ."

백리화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였다. 축공표는 눈에서 혈광을 내품으며 일갈했다.

"다시 한 번 경고하겠다. 이후로 내 앞에서 이런 작태를 보인다면 그땐 너를 죽이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 홱 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주천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 놈 두고 보자 ."

축공표는 주먹을 움켜쥐며 기소를 흘렸다.


천소유와 축공표의 대립은 날로 심각해져 갔다. 대립은 어느 쪽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팽팽한 접전을 이루고 있었다.

천소유. 그가 뇌정각에 입문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뇌정각의 문무쌍성(文武雙星) 중 문창성 양몽경의 무기명 제자가 아닌가? 문창성의 비호를 받는 한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 축공표는 어떤가? 내정각 내에서 실권을 움켜쥐고 있는 구대신전 중의 철혈전주의 대제자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분 또한 만만찮은 것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들 두 사람의 대립은 여자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천소유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축공표는 불야전에서 인기가 있었다. 마군자라는 칭호가 말해주듯이 그는 그럴 듯한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기술도 뛰어나 여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역전되고 말았다. 천소유가 등장하자 불야전의 야화들이 모두 천소유에게 빠져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축공표는 자존심이 상함은 물론이거니와 자연히 여인들로부터도 소외를 당하게 되고 말았다.

축공표의 눈빛은 갈수록 사나워졌다. 그것은 조만간 크게 부딪칠 것같은 예감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흥미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일이기도 했다.


"못난 놈! 고작 계집애들 때문에 이성을 잃을 셈이냐?"

노호한 폭갈이 터지자 축공표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놈은 사사건건 제자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너는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이냐?"

축공표는 그 말에 비로소 흠칫했다.

이 곳은 구대신전 중의 하나인 철혈대전이었다. 철혈신군(鐵血神君) 구양수(歐陽修)는 자신의 수제자인 축공표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바보같은 놈! 천소유란 애송이 놈은 고의로 너의 감정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 ?"

"문창 영감은 교활하기 그지없다. 그가 갑자기 무기명 제자를 받아들인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

" !"

축공표는 얼이 빠진 얼굴로 철혈전주를 응시했다. 구양수는 노기 띤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영감은 노부를 눈의 가시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호시탐탐 노부를 제거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서 무서운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죽일 놈의 늙은이! 허나 영감의 권한은 무시할 수가 없다. 영감의 무공은 두렵지 않으나 놈의 심기(心機)가 무섭게 치밀하고 지지기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 그렇습니다."

그는 이를 갈았다.

"노부는 그가 고의로 노부를 충동질 하려는 것을 안다. 천소유란 놈은 바로 영감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단은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말에 축공표는 울분을 터뜨렸다.

"대체 언제까지 놈이 날뛰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합니까?"

"기회는 온다. 후후 조급해 할 것 없다. 분풀이는 그때 가서 해도 되느니라."

구양수는 기이한 웃음을 띄며 다짐하듯 말을 이었다.

"절대로 영감에게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아라."

축공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물러나는 것이 꽤나 애석한 얼굴이었다. 그때 구양수는 표정을 고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표아야."

" ?"

"너는 노부의 대제자다. 언젠가는 노부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것이다."

축공표는 감격하여 머리를 숙였다.

"사부님의 은덕이 하해와 같습니다."

구양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이 하나 있었다."

" !"

구양수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았다.

"너는 이 사부가 너를 각별히 총애하는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건 ."

축공표는 당혹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노부는 다섯 명의 제자가 있다. 그 중에서 솔직히 따지자면 너의 재질이 특출한 것은 아니었다."

축공표의 고개가 푹 떨구어지자 구양수는 담담히 말했다.

"그것은 자질탓이라기보다는 네가 너무 색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습니다."

"내게 아들이 있었다고 했지?"

구양수의 시선이 천정을 향했다.

"그러나 그놈은 열 셋의 나이로 죽었다. 노부는 아직도 그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눈에는 어렴풋이 이슬이 맺혔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부가 너를 유독 총애하는 것은 네가 바로 그 아이를 닮았기 때문이니라."

" !"

축공표는 충격을 받은 듯 일순간 경직되었다. 그것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축공표. 그는 애당초 어떤 인물이었던가. 철혈전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답시고 득의만면하여 거들먹거리던 위인이 아니던가?

그는 안하무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무공연마를 게을리 하고 색탐이나 즐기던 위인이었다. 그런 그도 사부의 말을 듣는 순간 느껴지는 바가 없지 않았다.

천천히 등을 돌린 구양수는 뒷짐을 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이만 가보아라. 조만간 노부는 너에게 철혈비전(鐵血秘傳)을 전수해 주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허허 내 언제 허언을 하더냐?"

"고 고맙습니다. 사부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축공표는 희색이 만면하여 그 자리를 물러났다.


툭 툭

작은 음향과 함께 잔가지들이 잘려져 나간다.

문창성 양몽경은 소도(小刀)를 들고 전지(剪枝)를 했다. 그가 쓰는 칼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고 얇은 박도(薄刀)였다. 그는 쓸데없는 곁가지들을 쳐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눈치를 챘군. 허허 과연 그자는 보통이 아니야."

그 음성을 들으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던 주천운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잘려진 가지 끝이 매끈하다. 이것은 양 노인의 내력이 조화경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문득 양몽경이 물었다.

"자네는 방법을 생각해 두었나?"

주천운은 담담하게 말했다.

"축공표는 단순한 위인이오. 그자를 요리하는 것은 별로 힘드는 일이 아니외다."

"그런가 ?"

양몽경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곧 그 눈은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닐세."

톡 톡

나뭇가지가 계속 잘려져 나갔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가 어떤 계락을 세웠는지 노부가 한 번 맞추어 볼까?"

주천운은 히죽 웃었다.

"노인장께 도박을 걸겠소."

"도박을 ?"

양몽경의 눈에 잠시 기광이 어렸다. 그는 껄껄 웃으며 물었다.

"허허 무얼 걸겠나?"

"소생이 지면 노인장을 위해 무엇이건 한 가지 일을 더 해드리겠소."

"노부가 지면 ?"

"전지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오."

양몽경은 돌아섰다. 그의 깊숙한 두 눈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꽃나무 자르는 법을 ?"

"꽃나무를 자를 수 있다면 사람의 목도 벨 수 있지 않소?"

주천운이 빙긋 웃자 그의 안색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헛헛 약군, 약아. 내 밑천을 아예 털어갈 생각인가?"

주천운은 문득 허리춤을 더듬었다.

술이 생각날 때면 으레히 행하던 습관이었다. 그런데 잡히는 것이 없었다. 있어야 할 술호로는 그가 뇌정각에 오면서부터 없어진 것이었다.

다른 신분으로 활동하는 대신 음주의 자유를 상실한 셈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벌렸다.

"소생이 지면 역시 손해를 보기는 마찬가지오."

양몽경은 꽃나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손을 놓았다.

"이제 되었군."

그리고 앞장 서 걸었다.

"따라오게. 술을 끊어 갈증이 나나보군. 노부에게 오래 묵은 매화로(梅花露) 한 단지가 있네."

주천운은 비로소 활짝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뱃속에서 주충(酒蟲)이 난리가 났소이다."

그가 인도된 곳은 단아한 소축(小築)이었다. 아무런 장식이나 소품이 없이 사방 벽을 따라 고서(古書)들만이 가득 꽂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양몽경이 손뼉을 치자 소동(小童)이 달려왔다. 12, 3세쯤 되었을까? 총기발랄해 보이는 소동을 향해 양몽경이 말했다.

"천운교(天雲橋) 아래 매화분이 있지. 그 밑을 파면 단지가 나올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오너라."

꾸벅 절을 한 소동은 그대로 사라졌다. 주천운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동자를 몇 차례 보기는 했으나 단 한 번도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소이다. 어찌된 것이오?"

양몽경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무심히 대꾸했다.

"노부는 입이 가벼운 것을 싫어하지. 그래서 혀를 잘랐네."

주천운은 내심 경악했다. 이때 양몽경이 다시 담담히 입을 열었다.

"헛헛 그럼 내기를 시작하세. 노부가 자네의 생각을 맞추면 되는 것인가?"

"그렇소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소박한 탁자가 놓여 있고 문방사보가 그 곁에 놓여 있었다. 양몽경은 먹을 갈더니 붓에 듬뿍 묻혀 종이에 썼다.

스슥 .

단숨에 몇 자를 쓴 그는 종이를 들어보였다.

"자. 보게."


<선살후생(先殺後生)>


종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주천운은 입을 딱 벌리며 대소했다.

"하하하 ! 과연 노인장의 혜지는 따르지 못하겠소이다."

양몽경은 빙긋 웃었다.

"그럼 내가 이긴 것인가?"

"무슨 말씀이오. 소생이 이겼소이다."

"그럼 내가 틀렸단 말인가?"

"물론 틀리지 않았소이다."

"그럼 ?"

양몽경이 의혹을 드러내자 주천운은 다소 치기어린 웃음을 흘렀다.

"후후 소생은 노인장이 맞출 것이라 생각하고 그쪽으로 내기를 걸었소이다."

"아뿔싸!"

양몽경은 무릎을 탁 쳤다.

"내가 당했군!"

그러더니 그는 껄껄 대소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볼수록 탐나는 재목일세."

그때 소동이 말없이 들어와 탁자 위에 술단지를 올려 놓았다. 주천운은 단지에 코를 대고 벌름거리는 시늉을 했다.

"흠 이십오륙 년쯤 된 매화로군. 정말 좋은 술이오."

" !"

양몽경은 이제까지와는 또다른 시선으로 주천운을 바라보았으나 시선은 곧 거두어 졌다.


사람이 참는 데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축공표는 며칠 사이 극도의 인내를 발휘했다. 그가 이토록 자신의 감정을 억제했던 때는 결코 없었다.

'놈은 고의로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 하지만 두고 보자!'

철혈신군 구양수의 신신당부가 있은 이후 그야말로 그는 꾹꾹 눌러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점차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녀석은 그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불야전의 야화 중 모란(牡丹)과 부용(芙蓉) 등 두 계집을 좌우로 끼고 안하무인의 작태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두 계집이었다. 녀석의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두 계집이 자신을 경멸할 때에는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를 앙다물었다.

'으으 한 번만 더 참자. 이번 한 번만 .'

저녁이 되자 그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답답해졌다. 이제껏 제멋대로 살아온 그로서는 참아도 너무 많이 참은 것이었다.

그는 목구멍이 콱 막히는 듯한 울분을 해소시키려 산책을 나섰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뒤로 하고 그는 연못가를 어슬렁거리며 울화를 삭이려고 애썼다. 그때였다.

창! 창!

병장기가 부딪치는 음향이 고막을 파고 들었다.

"으응 ?"

그가 놀라 귀를 기울이자 우측 도화림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휙!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막 다섯 그루의 도화목을 밟고 들어선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으악! 네 네놈이 !"

축공표는 흠칫했다.

'이 음성은 비황전(飛荒殿)의 자모쌍륜(子母雙輪) 금악비(金岳飛)의 음성이 아닌가 ?'

파파팍!

그의 신형은 야조(野鳥)처럼 쏘아져 나갔다.

도화림 중간에 한 청년이 쓰러져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땅바닥에는 청년의 무기인 자륜(子輪)이 떨어져 있고 모륜(母輪)은 두 그루의 나무를 베고 세 번째 나무에 박혀 있었다.

"으으 ."

신음하는 청년은 가슴이 갈라진 채 숨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어찌된 건가. 악비?"

축공표는 청년을 끌어안고 마구 흔들었다. 금악비는 힘겹게 눈을 치뜨며 간신히 입을 벌렸다.

"노 놈이 사매를 으으 부탁 ."

그것을 마지막으로 청년의 고개가 꺾였다.

"해옥경(海玉京)을 ?"

축공표는 짙은 의혹에 휩싸이고 말았다.

"대체 누가 ?"

그때였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는 순간 축공표는 입술을 씰룩이며 뇌까렸다.

"흐흐 잘 되었군. 그렇지 않아도 울화가 치미는 참인데 ."

휙!

그의 신형은 찰나지간 붕조처럼 솟구쳤다.

본시 여색을 밝혀 무공정진을 이룬 바는 없으나 그의 신법은 쾌속무비했다. 그것은 철혈신군 구양수가 워낙 그에게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자모쌍륜 금악비.

그는 원래 축공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비황전의 청년고수로 사매인 해옥경을 연모해왔던 터인데 축공표가 사이에 끼어든 때문이었다.

축공표는 해옥경을 유혹하여 불륜을 저지른 바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축공표와 금악비는 앙숙이 되었던 것이다.

부우욱!

옷이 찢겨져 나가며 두 쪽의 가슴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해옥경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반라(半裸)가 되고 말았다.

"후후 제법 익었군."

우악스런 손이 덥석 그녀의 가슴을 움켜 쥐었다.

"노 놓아요. 이 이런 식으로는 !"

그녀는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본시 해옥경은 그다지 품행이 단정한 편은 못되었다. 그러나 코 앞에서 사형이 살해되었고 자신은 겁간을 당하기에 이르고 보니 이런 일에 쾌락을 느낄 리가 만무했다.

사실 눈앞의 소년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었을 당시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내심 한 번 안겨보고 싶었던 것도 부인할 수는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다 당신 미쳤어요? 사형을 죽이다니! 사부께서 가 가만 둘 줄 알아요?"

"후후 상관없어. 너만 입을 다물면 되니까 !"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그의 손이 거침없이 하체를 파고들자 부르르 해옥경은 몸을 떨었다.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극도의 불안 속에서도 어느 틈에 악마적인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아 !"

앙다물었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짓궂게 웃었다.

"후후 소문을 듣자니 너는 축가 놈과 붙었다더군. 그놈이 그렇게도 좋던가?"

일순 찬물을 뒤집어 쓴 듯 해옥경은 몸을 굳혔다. 아무리 행실이 나쁘다고 한들 이런 모욕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요!"

그녀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크큭! 이제 알게 될 거야. 축공표란 놈이 별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부욱!

그나마 남아 있던 옷이 가랑이까지 길게 찢어지며 허연 허벅지가 드러남과 동시에 비문(秘門)의 모습도 보였다.

"아 안 돼!"

발버둥치는 해옥경을 소년은 나무로 밀어붙였다. 그리곤 무섭게 그녀의 가랑이를 열어 제쳤다. 해옥경은 무지막지하게 파고드는 소년의 다리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전신의 힘이 쭈욱 빠지는 느낌이 든 순간 그녀는 자신의 다리가 번쩍 허공에 들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門)이 강제로 열리며 그녀는 이제껏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하악 !"

드디어 이성을 잃은 해옥경은 소년의 머리칼을 움켜쥔 채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흐흐 잘 놀고 있군."

음산한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악!"

해옥경은 벼락을 맞은 듯 굳어버렸다.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다름아닌 축공표인 것이었다.

"흐흐 천소유. 오늘로 네놈의 방약무인한 짓은 끝이다."

소년은 해옥경에게서 떨어졌다.

"흑 !"

해옥경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오열을 터뜨렸다. 지는 석양 아래 희멀건 둔부가 묘한 빛깔로 물들었다.

천소유는 히죽 웃었다.

"뭐라고 했지?"

축공표는 그의 태연한 모습을 보자 이를 갈았다.

"네놈의 목을 분질러 주겠다고 했다."

"훗!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그 동안 비루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더니 ."

"으으 !"

축공표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있었다.

"훗훗 ! 저 계집 앞에서 남자의 위신을 세우겠다는 말인가?"

"주 죽일 놈!"

축공표는 분노성을 내지르며 다가섰다. 장삼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공을 극으로 끌어올려 그의 두 눈은 시뻘건 혈광을 내뿜었다.

"네 입을 아예 문질러주마!"

그가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었다.

쐐액!

열 개의 손가락에서 시뻘건 핏빛의 지강(指吁)이 발출되었다.

츠츠츠츳 !

괴이한 음향이 울리며 허공 가득 핏빛 지강이 펼쳐져 주천운의 전신대혈을 압박했다. 그러나 주천운은 낭랑하게 웃었다.

"후훗 어림없소."

그의 소매가 가볍게 한 번 펄럭였다.

수휘비파수(手揮琵琶手)였다. 그의 소매가 철벽처럼 둘러져 지강을 받아낸 것이다.

펑!

폭음이 울리는 순간 두 사람은 각기 두 걸음씩 물러났다. 축공표는 어깨를 흔들었을 뿐이나 주천운은 신형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축공표는 득의만면했다.

"흐흐 고작 그 정도로 감히 나를 건드렸단 말이냐?"

다시 장포가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축공표는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이 한차례씩 파여졌다.

"으으 ."

주천운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크크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휘익!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축공표가 덮쳐들었다. 주천운은 다급히 쌍장을 날렸다.

펑!

"욱 !"

폭음이 들리며 주천운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의 입가에는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축공표는 그것을 보자 만족한 웃음을 흘렀다.

"흐흐흐 이제껏 뭘 믿고 까불었느냐? 어서 네놈의 잘난 절기를 펼쳐봐라."

그는 재차 덮쳐들 기세였다. 바로 그 순간 주천운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서랏!"

축공표는 폭갈하며 그 뒤를 쫓았다. 주천운은 도화림 사이로 도주를 하였고 축공표는 그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해옥경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손가락 자국이 역력한 젖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옷을 대충 걸치며 중얼거렸다.

"천소유 그는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내 정신이 든 듯 안색이 변하며 부르짖었다.

"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

그때였다. 한가닥 처절한 비명이 그녀의 고막을 찢듯이 파고들었다.

" !"


꽃나무를 더듬던 주름진 손이 멈추었다.

"소유가 죽었다고 ?"

양몽경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그의 등 뒤로는 한 명의 중년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음침한 인상을 가진 인물로서 눈이 가늘고 콧날은 약간 굽은 자로서 일신에 자삼(紫衫)을 걸치고 있었다.

"구양전주(九陽殿主)께서 사과의 표시로 이걸 보내셨소이다."

자삼인은 말을 하며 하나의 목갑을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보광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구양 형이 아끼던 환광도(幻光刀)요. 쇠를 두부베듯 하는 보도로 ."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의 말을 끊으며 양몽경이 재차 물었다.

"소유가 죽은 이유는?"

그러자 자삼인은 눈을 번뜩이며 음산하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르오. 그 아이는 겁도 없이 일을 저질렀으니 말이외다."

양몽경은 몸을 돌이켜 비로소 그와 마주했다.

"무슨 뜻이오. 비황전주?"

자삼인, 즉 비황전주인 삼절수사(三絶秀士) 비여청(非如靑)은 낮게 웃었다.

"흐흐 그 아이는 본인의 제자를 살해했소."

양몽경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누구를 말이오?"

"악비가 녀석에게 살해되었소. 뿐만 아니라 옥경을 겁탈하려다가 그렇게 되었소."

"으음 ."

"마침 구양 형의 대제자인 축 소질이 발견하고 좋게 타이르려 했으나 도리어 덤비는 바람에 ."

비여청은 말을 하다가 뚝 그쳤다. 그는 말하는 도중 내내 양몽경의 표정을 살폈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자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이었다.

"이번 불상사는 애당초 잘못이 그 아이에게 있었으니만큼 구양전주는 일이 이것으로 마무리 되기를 원하고 있소이다."

"예물은 받아 두겠네."

양몽경은 담담히 말하며 목갑을 받아들었다. 비여청은 괴소를 흘렀다.

"후후 ! 구양전주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외다."

양몽경은 그 말에 대해서는 뭐라 부인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시신은 어디 있나?"

"입관하여 이리로 가져왔소이다."

"두고 가게. 구양전주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 주게."

"전해 드리겠소. 그럼 ."

비여청은 말을 마치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양몽경은 다시 꽃나무로 향했다. 문득 소도로 한 번 긋자 꽃나무가 갈라졌다. 놀랍게도 꽃나무는 108개의 조각으로 화해 우수수 흩어졌다.

그의 깊숙한 눈에서 일순 기광이 번뜩였다.

"성공했군. 천운 녀석은 노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을 잘해내고 있다. 대단한 놈 어쩌면 십년지한(十年之恨)의 내막을 파헤치고 복수를 할 시기가 놈으로 인해 앞당겨질 지도 모른다 ."

그는 고개를 들어 천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뿌연 안개가 어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가 낮게 내뱉았다.

"주군이시여 !"


철혈신군 구양수는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핫핫핫 ! 그 늙은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란 말이지?"

비여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영감도 도리어 형님께 미안하다고 하였소이다."

구양수는 기분좋게 껄껄거렸다.

"헛헛 영감은 이제 기가 많이 꺾였군."

"후후 그런 것같소이다. 놈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대세의 흐름은 어찌 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소? 흐흐 놈들은 이제 늙어 용기도 옛날같지 않은 거요."

구양수는 눈썹을 움직이며 말했다.

"후후 그들은 늙고 병든 호랑이에 불과하지. 뇌정각은 더이상 그 늙은이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머리를 잘린 용이 어찌 웅비하겠는가?"

비황전주 비여청은 음산한 미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크 !"

"하하하하 !"

구양수는 통쾌한 듯 일진광소를 터뜨렸다. 그런 그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벼락같이 돌아서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냐?"

순간 구양수의 손바닥에서 혈광이 뻗어나갔다.

펑!

"어이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짝이 박살났다. 문짝 뒤에 비틀거리는 인영이 서 있었다.

구양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호통소리에 기겁을 한 인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사 사부님께 사죄를 드리려고 ."

다름아닌 축공표였다. 그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죽는 시늉을 했다. 장인(掌印) 하나가 가슴 부위에 뚜렷하게 새겨진 것이었다.

혈수인(血手印)!

문짝이 부셔졌음에도 불구하고 혈수인은 그의 가슴을 격타했던 것이다.

비틀 하는가 싶더니 축공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로 쓰러졌다.

"못난 놈 !"

한순간 구양수는 분노했다.

명색이 대제자인 축공표가 도무지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키지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이내 눈녹듯 풀어졌다.

그가 소매를 젓자 축공표의 신형이 자력에 이끌린 듯 딸려왔다. 구양수는 축공표의 명문혈에 장심을 붙이고서는 기를 주입했다.

잠시 후.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그만 참지를 못하여 ."

구양수의 음성은 이미 부드러워져 있었다.

"소유인가 하는 놈을 죽인 것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 일이라면 이미 해결되었느니라. 사부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고 고맙습니다."

축공표는 비굴한 웃음을 띄며 넙죽 절을 했다. 구양수는 엄숙한 얼굴로 그를 타일렀다.

"앞으로는 더이상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가 보아라. 내일 너는 철혈관(鐵血關)에 들어가야 한다."

"철 철혈관 !"

축공표는 감동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에 비여청이 입을 열었다.

"후후 축 소질도 이번 일로 느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구양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또한 철혈관에서 놈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네. 노부는 그 아이를 위해 이미 안배해 둔 것이 있네."

비여청은 놀랐다.

"그럼 바로 그것을 ?"

대답대신 구양수의 두 눈에서 혈광이 폭사되었다.

"흐흐 바람(風)이 불고 있네. 머지않아 무림을 휩쓸 바람이 말일세."

비여청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일 일진풍(一陣風) ."


축공표는 철혈전의 후원에서 나뭇가지를 꺾었다. 나뭇가지를 손톱으로 긁자 몇가닥의 선이 그러졌다. 기이한 암호문의 표식과도 같은 선이었다.

잠시 후.

나뭇가지를 담장 밖으로 던진 그는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일진풍이라 ."

평소에는 하지 않던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를 달빛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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