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검궁인의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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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2,898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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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1권 8장 빙화(氷花)



철혈관(鐵血關).

청동빛의 육중한 철문은 가히 위압적이다. 문 양쪽에는 금방이라도 살아서 뛰쳐나올 듯한 사자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구양수는 엄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곳에서 사십팔 일간의 연공을 마치면 너도 절정고수로 변신할 수 있다."

축공표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 사부는 너를 뇌정각에서 가장 강한 고수로 키우기 위해 이미 안배해 놓은 것이 있다."

구양수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축공표를 바라보았다.

"들어가라. 곧 사부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축공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복했다. 그가 일어났을 때 구양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로지 멀리서 안개처럼 희미한 음성이 들려올 뿐이었다.

"연공을 마치고 출관하는 날 네게 선물할 것이 있다. 하하핫 그럼 ."

축공표는 철문을 밀었다.

그그그긍!

지층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철문 내부에는 짙은 어둠만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묘한 불안감을 자아냈다.

"후후 이 곳에 어떤 안배가 마련되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게 사십팔 일은 너무나 길다오. 구양 나으리."

이렇게 중얼거리며 입가에 조소를 흘리는 자는 뜻밖에도 축공표가 아니라 주천운이었다.

그렇다면 며칠 전에 도화림에서 죽은 것은 주천운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주천운의 계략에 축공표는 걸려든 것이었다. 도망가는 주천운을 쫓아가던 축공표는 목숨을 잃었고 주천운은 축공표로 변장을 한 것이다.

그는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어둠을 뚫고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는 두 인영이 있었다.

" !"

주천운의 눈이 반짝였다.

칠순 가량 되었을까? 그들은 둘 다 추괴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보기에도 흉한 꼽추였다. 얼굴 표정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을 느끼게 했다. 가느다랗게 찢어진 눈에는 웬지 음울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눈자위를 허옇게 드러낸 봉사였다. 주천운은 그들을 처음 보는 순간 섬칫한 느낌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시오. 축 공자."

꼽추가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 ?"

주천운은 이 소름끼치는 노인들을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봉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가 입관하기를 십 년 동안이나 기다렸소이다."

" !"

그것은 축공표가 입관하기를 10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이 예정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천운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축공표 행세를 해야만 했다.

"내가 들어오기를 십 년 씩이나 ?"

꼽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철혈대제의 쌍비위(雙秘衛)인 천지쌍노(天地雙老) 입니다."

" !"

봉사가 푸르스름한 흰자위를 번뜩이며 말했다.

"구양전주께서 바로 철혈대제(鐵血大帝)라는 것을 공자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순간 주천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철혈대제라면 일백 년 전 마도무림을 한때 지배한 적이 있었던 전설적인 마문의 군주가 아닌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철혈신문은 무림에서 사라진 지 백여 년이 지난 마도제일문파(魔道第一門派)다. 그런데 이 곳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철혈대제가 거론이 되다니.

봉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대제께서는 이미 공자를 삼대 철혈제(鐵血帝)로 키우기 위한 안배를 해두셨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 !"

그들의 태도는 지극히 겸손했을 뿐만 아니라 주천운에 대해 존경심마저 느끼는 듯했다. 실상 그들이 존경하는 것은 축공표일 것이지만.

주천운은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안내한 곳은 한 칸의 밀실(密室)이었다. 장방형의 밀실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오로지 중앙에 단로(丹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황금빛 단로는 둘레가 일 장이 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 곳에서는 청색의 불꽃이 끊이지 않고 타올랐다.

휘르르릉!

불꽃은 한 덩어리로 뭉쳤다가는 다시 사방으로 흩뿌려지곤 했다.

어느 순간 주천운은 기이한 약(藥)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달기도 하고 쓰기도 했으나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이었다.

단로의 청색 불꽃을 바라보는 꼽추의 눈에 언뜻 신광이 어렸다. 그는 감회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노신들은 이 곳에서 공자를 위해 십 년 동안이나 약을 연단했소이다."

'십 년 동안이나 .'

주천운은 다시 한 번 구양수의 치밀한 안배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문득 봉사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본문의 전설적인 신단(神丹)인 철혈조화신단(鐵血造化神丹)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윽고 두 노인은 좌우로 갈라서더니 가부좌를 틀었다. 가부좌를 튼 그들은 청색의 불꽃을 향해 장력을 뻗었다.

슈우우욱!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한줄기 붉은 강기(吁氣)가 뻗어나갔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주천운은 지극히 놀란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한순간 붉은 색의 강기가 청색의 불꽃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다음 순간 청색의 불꽃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단로에서 불꽃이 크게 일며 핏빛의 연기가 솟구쳤다. 연기는 점점 뭉쳐지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더니 마침내 용안(龍眼)같은 홍황색의 신단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순간 꼽추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드십시오!"

주천운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서서히 다가갔다. 바야흐로 철혈조화신단이 완성되어 주인을 기다리는 숨가쁜 순간이었다.

주천운은 신단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차마 손을 뻗지는 못했다. 그때 봉사가 초조한 듯이 외쳤다.

"어서!"

그의 음성은 거역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실려 있었다.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신단을 움켜쥐었다.

'앗!'

뜨거웠다. 거대한 불꽃이 온몸을 연료삼아 맹렬히 태울 듯했다. 너무나 뜨거운지라 주천운은 하마터면 그것을 놓칠 뻔했다. 그러나 고도의 정제력으로 참았다.

어느덧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목에는 퍼런 힘줄이 곤두섰다. 신단을 쥔 손은 이미 감각을 잃고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꼽추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려워 말고 삼키시오!"

어차피 호랑이 굴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더이상 망설이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주천운은 신단을 삼켰다.

순간 뱃속에 불덩이가 들어간 듯 온몸이 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헉!"

참을 수 없는 열기 때문에 주천운은 외마디 비명을 토해 냈다. 전신은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 올랐고 엄청난 갈증과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두 노인이 재빠른 동작으로 주천운의 24개 대혈을 짚어나갔다. 그 곳은 모두 양경(陽經)에 속하는 혈맥이었다.

서서히 고통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온몸을 휘감던 열기는 이제 단전으로 몰려들어 뜨겁게 뭉치고 있었다. 그는 혈도가 짚힌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철혈조화신단은 천지간(天地間)에 존재하는 칠십이종의 순양영물(純陽靈物)을 배합해서 만든 극양지물로 체내의 양강지기(陽剛之氣)를 백 배로 증폭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강해 그대로 두면 전신이 숯처럼 타버리고 맙니다."

꼽추노인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휴르르릉!

주천운의 주위에서 붉은색 강기가 회오리를 형성하며 그를 에워쌌다.

"유일한 방법은 극음지체의 여인의 음정(陰精)을 취하는 것뿐입니다."

말을 끝마친 두 노인은 뻣뻣하게 굳은 주천운의 신형을 안아들었다.


작은 석실이었다.

한 쪽에 침상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중앙에 하나의 관(棺)이 놓여져 있었으니 .

형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투명한 관 속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잠든 듯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으나 뜻밖에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가냘픈 어깨와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하얗게 빛나는 유방은 가히 신의 예술작품 같았다.

버들가지처럼 유연한 허리의 굴곡을 타고 뻗어내린 옥주와 그 사이에 자리잡은 무수한 방초는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 일으킬 만큼 고혹적이었다.

얼굴은 다소 앳되 보였으나 기이하게도 청순미와 함께 어딘가 사요로운 기운을 느끼게 했다.

주천운은 묵묵히 여인을 바라보았다. 혈도가 잡힌 그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꼽추가 그녀의 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 소녀는 태어나자마자 원음지기(源陰之氣)가 사라지기 전에 이 빙관에 넣어졌습니다. 역시 천지간에 가장 음기가 강한 일흔두 가지의 약초를 복용하고 말입니다. 이 소녀의 전신은 극음지기로 가득해서 이제 공자께서 이 소녀와 교접하여 음정(陰精)을 흡수해야만 합니다."

다음 순간 주천운은 하나의 의심을 품었다.

소녀의 내력이 특이하기도 하거니와 곧 자신이 이 소녀를 취한 후에는 그녀가 어찌 될 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럼 이 소녀는 어찌되는 것이오?"

꼽추의 얼굴에 괴이한 표정이 스쳤다.

"음양화합으로는 죽지 않으나 대제께서는 공자의 연공이 끝난 후 제거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왜 그래야만 하오?"

봉사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도 공자와 똑같이 대공(大功)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죽여야만 합니다."

주천운은 정색을 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오."

" ?"

주천운은 억양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부께 말씀 드리겠소. 이 소녀는 도리어 크게 쓸모가 있을 것이오. 출관할 때까지 죽이지 마시오."

두 노인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주천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곧 체념한 듯이 말했다.

"알겠소이다. 공자."

두 노인은 곧 주천운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럼 공자의 무운을 빕니다."

두 노인은 동시에 말하며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주천운은 관 속의 나체 소녀를 바라보았다.

'놀라운 일이다. 태어나자마자 이 관 속에서만 줄곳 살았다니 .'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무서운 일이다. 구양수 그는 정말 잔혹한 짓을 했다.'

그때였다. 그의 단전에서 주체할 길 없는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으윽 !"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더이상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고통은 주천운을 내몰기 시작했다. 주천운은 괴로운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내가 살고 그대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차피 불가피한 일이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관을 열었다. 양초냄새에 뒤섞여 서늘한 한기가 솟아나왔다.

주천운은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으로 소녀의 혈도를 찍어나갔다. 태음경락을 따라 12개의 음혈을 풀면 소녀가 깨어날 것이고 그런 연후에 교접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회음혈을 찍을 차례가 되었다. 소녀의 신비림이 눈에 들어오자 주천운은 가슴이 진탕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결심한 일이 아닌가. 그는 망설이지 않고 회음혈을 찍었다.

그러자 감겼던 소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맑고 투명한 눈빛은 너무나도 순수하게만 여겨졌다. 주천운은 내심 탄식했다.

'이런 소녀를 범해야 하다니 .'

허공을 헤매던 소녀의 눈이 주천운의 눈과 맞닿았다. 바로 그 순간 소녀의 얼굴에 놀란 빛이 번졌다.

"아 으 ?"

소녀는 뭐라고 말을 하고자 하는 듯했으나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주천운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들고서 소중한 물건을 취급하듯 가만히 침상에 뉘였다.

소녀는 여전히 투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빙기옥골의 나신이 주위에 밝은 빛을 뿌리는 듯했다.

주천운은 속삭이듯 말했다.

"낭자. 어쩔 수 없이 그대와 난 한 몸이 되어야 한다오."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잠시 후 주천운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가 되었다. 약간 마른 듯 했으나 구릿빛으로 물든 단단한 근육에서는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소녀는 여전히 의혹에 찼으나 투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석실의 벽은 모두 10장의 벽화(壁畵)로 채워져 있었다.

철혈십대무결(鐵血十大武訣).

벽화는 온갖 짐승들의 동작을 그려놓은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핏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언뜻 보면 벽에 불꽃이 일어난 것같아 보일 정도였다.

주천운은 벽화를 따라 철혈십대무결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구결을 외었다. 동시에 손과 발이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따라 움직였다.

"철혈개벽장(鐵血開壁掌), 철혈마라도(鐵血魔羅刀), 철혈파천보(鐵血破天步), 철혈전광검(鐵血電光劒), 철혈투살지(鐵血透殺指), 철혈쇄심인(鐵血碎心印) ."

빙그르르 .

주천운의 몸은 더욱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발은 바닥에 닿고 있지 않았다. 다음 순간 기이하게도 벽화는 사라졌다 나타나곤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시선이 한 번 주어지면 그 그림은 피처럼 벽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벽화가 드러나는 극히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하고 손발을 움직여 연마해야 했다.

부스스스 .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일어났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신이 들린 듯 움직이는 주천운의 몸에서는 비오듯 굵은 땀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숨쉬기조차도 힘이 든 상태였으나 그런 와중에서도 머리가 점점 맑아오고 그림이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석실의 한 구석에는 긴 머릿결을 늘어뜨린 미소녀가 앉아 있었다.

주천운을 바라보는 그녀의 투명한 눈에 간간히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벽화와 주천운을 번갈아 보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바로 관 속에 있던 소녀였다.

갑자기 그녀가 일어섰다. 소녀는 주천운이 준 장삼을 걸치고 있었으나 뽀얀 젖가슴과 허벅지는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으므로 현깃증이 일 정도로 요염했다.

다음 순간 소녀가 서서히 손과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들자 장삼자락이 흘러내리면서 새순같이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 앙증맞은 발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렵하게 움직였다.

주천운은 마지막 벽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우우웅 .

붉은 혈강(血吁)이 원을 그리며 환출되었다가 하나로 합쳐지며 그대로 벽을 향해 뻗쳤다.

쾅!

뚜렷한 혈강인(血吁印)이 세 치 가량 깊숙이 박힌 것이다. 주천운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혈십대무결 예상보다 훨신 강한 무공이다!"

그때였다. 그의 동공에 들어오는 한 인영이 있었다. 바로 소녀였다.

소녀는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폭포수같은 머릿결이 나부끼고 장삼은 풀어 헤쳐져 이리저리 휘날렸다. 마치 훈풍에 꽃잎이 흩날리는 듯했다.

그 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주천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녀가 펼치고 있는 것은 춤이 아니라 셩혈십대무결이었기 때문이었다.

'노 놀라운 일이다. 글도 말도 모르는 소녀가 단지 그림과 나의 동작만 보고 무공을 익히다니 !'

순간 주천운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만일 저 소녀가 마도(魔道)에 빠진다면 엄청난 후환이 있을 것이다. 이제야 구양수가 소녀를 제거하려 했던 이유를 알 것같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소녀는 한 번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과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무서운 지혜력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주천운은 소녀의 청순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악(善惡)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맑게 빛났다.

'너를 결코 마(魔)에 빠지지 않게 하겠다.'

어느 순간에 주천운은 결심했다.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빙화(氷花)야."

소녀가 얼음처럼 맑고 투명해서 그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소녀가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천운은 천진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공을 익히고 싶으냐?"

"무 무 공 ?"

소녀는 더듬거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주천운은 빙긋 웃었다.

"이리 오너라. 차츰 가르쳐 주겠다."

소녀는 그에게 다가왔다. 장심자락이 떨어져 눈부신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전에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예의범절부터 배워야 겠구나."

빙화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끊임없이 그의 말을 되뇌었다.

"사람 도리 예 의 ."

주천운은 소녀의 옷을 여며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같지 않아 다행이다."

빙화는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멍하던 눈 속에 달콤한 빛이 스며 있었다. 그 눈빛을 대하는 순간 주천운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타고난 우물(尤物)이다. 누가 너의 그 눈빛에 흔들리지 않겠느냐 .'


그그그긍 .

철문이 열렸다. 드디어 48일간의 연공이 끝난 것이었다.

문이 열리자 대제자에 대한 기대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찬 구양수의 얼굴이 보였다.

"핫핫핫 ! 표아! 너의 대공 성취를 축하한다."

구양수는 대소를 터뜨리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가 잡은 손은 사랑하는 제자 축공표의 손이 아니라 주천운의 손이라는 것을.

주천운은 손을 통해 한가닥 웅혼한 진력(盡力)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내심 놀랐다.

'대단한 내공이다!'

그러자 자동적으로 그의 체내에서 반탄력이 일어나 그것을 밀어냈다. 그 순간 구양수는 움찔하여 손을 떨구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표정이 역력했다.

"껄껄 정말 달라졌구나. 하하핫 ! 이렇게 기쁠 수가! 너는 이제 철혈신문(鐵血神門)의 진정한 후예가 되었다."

주천운은 내심 한가닥 연민을 느꼈다.

'구양수. 당신의 제자를 위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편치가 않구려. 그대가 사랑하는 제자는 지금 흙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러나 주천운의 속내를 모르는 구양수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핫핫! 가자.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다. 이 사부가 널 위해 연회를 마련했다."

구양수는 몸을 돌려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철문 닫히는 소리가 구양수의 넓은 어깨 너머로 무겁게 내려 앉았다.


철혈대전의 후원(後園).

아담하게 꾸며진 전각을 배경으로 달이 기울기 시작했다. 달빛이 흘러내려 사방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런 후원의 한가운데 서 있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다름아닌 주천운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달빛을 받은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얼기설기 얽혀 있어 웬지 섬칫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달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철혈신군 구양수 그의 영향력이 그토록 막강할 줄은 몰랐다. 으음 .'

주천운은 낮에 있었던 연회의 광경을 떠올리자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출관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모두 4인이었다.

한결같이 뇌정각의 핵심인물들로서 비황전주(飛荒展主)를 위시하여 잔인전(殘人殿), 천살전주(天煞殿主), 불야전(不夜殿)의 전주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구양수에게 한 수 양보를 하고 있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불야전주인 천일야화(千日夜花) 여취취(麗翠翠)의 행동이었다.

본래 나이는 40이 넘었으나 주안술(駐顔術)로 20세 미만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요녀인 그녀는 연회 내내 구양수의 무릎에 앉아 갖은 교태와 아양을 다 부렸던 것이다.

문득 주천운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철혈전은 뇌정각의 구전 중 오대전(五大殿)의 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양 노인이 그를 제거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힘이 더 비대해진다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 양몽경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나에게 철혈전주를 죽여 달라고 했다. 철혈전주를 죽임으로써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뇌정각을 중심으로 구전은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 철혈전이다. 철혈전주는 이미 오개전을 규합했지 않은가? 필히 어떤 야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

짧은 동안이었으나 주천운은 많은 것들을 보고 알았다.

'그것이 양몽경을 제거하고 그 자신이 뇌정각을 지배하려는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생각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양몽경이 철혈전주를 제거하려는 목적은 ? 그것은 야심 때문만은 아닌 것같았다. 그는 철혈전주에 비해 담백한 위인이다. 그렇다면 뇌정각주의 명을 받은 것일까?'

그러나 이런 생각도 이딘지 이치가 맞지 않는 것같았다.

'구전이 뇌정각의 하부조직이면서도 독자적인 분열과 야심을 보이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뇌정각 대체 뇌정각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뇌정각은 그야말로 거대한 신비 그 자체였다.

뇌정각 속의 구전에 속한 인물들은 그가 보기에도 정과 사가 혼합된 인물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개개인의 내력도 달랐으며 뜻도 달랐다.

'출신과 성분이 다른 자들이 어찌하여 모이게 되었을까? 그들은 서로를 경원하면서도 뇌정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체 그들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주천운의 시선은 어둠 속에 거대한 탑처럼 솟아 있는 뇌정각으로 향해졌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뇌정각은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것일까? 뇌정각주는 누구란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버님 당신은 과연 뇌정각의 어떤 존재였습니까?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신이 뇌정각에 모든 것을 바쳤다면 어찌하여 또 뇌정각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까?'

주천운의 눈에 뿌연 물기가 어렸다. 그는 계속 뇌정각을 바라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모든 열쇠는 바로 저 뇌정각 속에 있겠지. 하지만 ."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신은 너무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당신과 뇌정각의 비밀을 파헤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었으나 바람 한 점 없었다. 그것이 그의 막막한 심정을 더욱 죄였다.

'아버님의 사인(死因)을 밝히고 뇌정각과의 연관을 풀어내는 것이 소자의 의무라고 하지만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잠시 후 뇌정각으로 향했던 주천운의 눈빛이 서서히 빛났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어느 때고 그 모든 것을 풀고야 말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소자가 아는 것이 너무 적기에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어느덧 그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떠올랐다.

'훗훗! 아버님은 너무 강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꺾이셨습니다. 이제부터 소자는 소자의 방식대로 할 것입니다.'

뚝!

주천운은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린 다음 그 곳에 손톱으로 미세한 선을 수십 개 그었다. 그는 재빨리 담장 밖으로 나뭇가지를 던졌다.

'양 노인. 당분간은 당신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구려.'

주천운은 굳은 얼굴로 돌아서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차후에 당신과 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구름을 거슬러 올라가던 달이 솟아나와 그의 얼굴에 짙은 명암을 드리웠다.


소박하게 꾸며진 석실 바닥에는 반들반들한 청석판이 깔려 있었다. 기물이라곤 몇 권의 책이 놓인 탁자 하나가 고작이었다.

탁자 앞에 선 양몽경이 손바닥에 놓인 나뭇가지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수십 가지로 그어진 미세한 금이 그에게 무언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는 듯이 그의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일이 복잡하게 얽혀 드는군 . 그 아이가 잘 해내긴 하겠지만 계획을 다소 수정해야 될 것같다."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 보던 양몽경이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구양수. 자네의 목을 잠시 더 붙여 두어야 할 것같군. 뿌리 깊은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말일세. 어쩌면 조만간에 마각이 드러날 것같은 예감이 들어 ."

부스스스 .

손가락 사이에 쥐었던 나뭇가지에 힘을 주자 그것은 곧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뭇가지를 가루로 만든 양몽경은 시선을 들어 우뚝 솟은 뇌정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뇌정각의 암류(暗流)는 지난 십 년간 너무도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움직이려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온화하던 양몽경의 얼굴에 서릿발이 어렸다.

"주공을 시해한 자들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판 위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그것의 깊이는 무려 3푼이 넘었다.

온갖 기화요초가 피어 있는 화원 한 쪽에 그림같은 정자가 서 있고 그 가운데는 호수를 연상시킬 정도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산들바람이 연못을 건너 불어왔다.

정자 위에는 구양수와 주천운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구양수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심사숙고해 보았느냐? 자칫하면 커다란 우환덩어리가 될 것이다."

말을 하면서 구양수는 연못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멍청한 눈빛으로 수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바로 빙화였다. 긴 머리칼을 허리까지 드리우고 있는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더욱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빙화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파문이 일어 얼굴이 흔들리자 그녀는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얼 얼굴 예뻐 ."

구양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보통 계집애가 아니다. 깨어난 지 고작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인데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다."

주천운이 빙긋 웃었다.

"빙화는 제자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주천운의 말에 구양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장담할 일이 못된다."

주천운은 의미심장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사부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빙화가 배신을 할까 봐서가 아닙니까?"

"그렇다. 언제고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그때는 어떤 행동을 할 지 모른다."

주천운이 빙그레 웃었다.

"빙화는 제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코 배신할 리가 없습니다."

"사랑 ?"

구양수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 계집이 너를 사랑한다니?"

"사부님께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 ?"

어리둥절해 하는 구양수를 아랑곳하지 않고 주천운은 빙화를 불렀다.

"빙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연못 위에 떠 있던 무수한 빛조각들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투명하게 빛났다.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번져갔다.

구양수는 흠칫했다.

'놀라운 염기(艶氣)다. 마치 혼백을 빨아들이는 것같구나.'

주천운은 더욱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리 오너라. 빙화."

소녀는 백치같은 미소를 뿌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풍염한 몸매가 옷선을 타고 그대로 드러나 숨이 막힐 정도였다. 주천운에게 다가온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주천운은 빙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빙화, 내가 누구지?"

"주 주인 ."

구양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 모습을 주시했다. 주천운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후훗 그렇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빙화는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

"주인 사랑 해요 나의 주인님 ."

주천운은 그녀를 살며시 가슴에서 떼냈다.

"그럼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느냐?"

빙화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주천운은 장난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후훗 그럼 네 뺨을 쳐라."

다음 순간이었다. 빙화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

멈출 줄을 몰랐다. 어찌나 세게 때리는지 어느덧 뺨에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기 사작했다. 마침내 입가에서 선혈까지 흘러내렸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됐어. 빙화. 이제 그만 해!"

지레 놀란 주천운이 손을 나꿔채며 외치자 그때서야 빙화는 손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천운을 향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구양수의 안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주천운은 득의만면하여 입을 열었다.

"사부님, 어떻습니까? 빙화는 제자의 말이라면 죽으라고 명령해도 들을 것입니다."

구양수는 낮은 신음성을 발했다.

"으음 너는 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아직 별로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먼저 말을 알아 듣는 것과 ."

어색한 듯이 주천운이 히죽 웃었다.

"습관이 되어서인지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 던지는지라 예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양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빙화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겁났던지 빙화는 얼른 주천운의 등 뒤에 숨었다.

"그 계집의 체내에는 너와 비슷한 수준의 내공이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무공을 익힌다면 무서운 고수가 된다."

일말의 두려움이 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주천운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심려 마십시오. 언젠가는 빙화의 무공을 써먹을 때가 올 것입니다."

다음 순간 구양수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많이 달라진 것같다."

주천운은 흠칫했다.

"제자가 말입니까?"

"그렇다. 철혈관에서 출관한 이후로 예전과 다른 느낌이 드는구나."

사부다운 염려가 깃든 음성에 주천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린애처럼 말했다.

"헤헤 그 동안 제자가 사부님의 속을 많이 썩여드렸지요. 그러나 이제 저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앞으로는 ."

굳었던 구양수의 얼굴이 펴졌다.

"그렇다면 기쁜 일이지. 너는 노부의 대제자이니 노부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호쾌하게 대답하는 주천운을 구양수는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허허 노부가 신경과민인가 보다. 아무튼 네가 정신을 차렸으니 기쁘구나."

구양수는 흐뭇한 얼굴로 정자를 내려갔다. 몇 걸음인가를 옮기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명심해라. 그 아이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

그런 구양수의 뒷모습에서 아렷한 살기가 스며나오는 것을 주천운은 보았다.

"즉시 죽여라."

낮았으나 진한 피냄새가 담긴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주천운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알 알겠습니다."

주천운의 등 뒤에 있던 빙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따금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했는데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구양수가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지자 빙화는 종종걸음으로 주천운의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불만감이 어렸다.

주천운은 한숨을 쉬며 빙화에게 속삭였다.

"빙화. 앞으로 너도 각별히 조심해야 겠다. 너를 보는 그의 눈빛이 좋지 않아."

빙화는 손을 뻗어 주천운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가 무엇인가 안타까운 듯이 계속 얼굴을 만지자 주천운은 피식 웃었다.

"이 얼굴은 싫단 말이냐?"

말귀를 알아 들은 빙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할 수 없구나. 얼마 동안은 이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단다."

철혈관에서 48일을 지내는 동안 주천운은 본래의 얼굴로 있었다. 그것에 익숙해진 빙화는 연공을 끝내고 출관하면서 축공표의 얼굴로 돌아온 주천운의 얼굴을 못마땅해 했던 것이다.

주천운은 빙화의 손을 잡고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빙화,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도 나를 좋아 하느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눈빛이 달콤하게 변했다.

"그러니 너는 내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으 응 ."

빙화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주천운은 당혹해 했다.

"빙화. 오늘은 안 돼. 가야 할 곳이 있다."

주천운은 그녀를 떼내려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네 피는 너무 뜨거워. 그것은 여자답지 못한 거야."

빙화는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로 그의 입을 막았다. 입술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빙화. 너는 지나치게 열정적이다. 세상의 어떤 여인도 너의 정열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빙화는 타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의 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 들었다.

'어쩌면 백치나 다름없기에 이러는지도 모르지. 불쌍한 녀석 .'

연민을 느끼며 주천운은 그녀의 한 줌밖에 안 되는 허리를 으스러져라 안았다. 빙화는 뜨거운 입김을 그의 얼굴에 쏟아부으며 속삭였다.

"사 랑 해 요 ."

빙화의 붉은 입술에서는 단내가 났다. 주천운은 빙화의 뜨거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달디단 꿀물이 입 안 가득 스며 들어왔다.

그는 빙화의 새하얀 목덜미를 입술로 더듬었다. 부드러운 솜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순간 주천운은 굳게 결심했다.

'빙화. 내 너만은 버리지 않으마. 지상에서 가장 지순하기에 너의 이런 행위는 결코 음탕하다고 할 수 없다.'

빙화의 손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한 마리의 붕어가 물속에서 노닐 듯 그녀의 손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의 마음 곳곳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천운은 그가 하는 대로 맡겼다.

빙화는 도화빛의 얼굴로 주천운의 장삼을 벗겼다. 이윽고 그의 마른 듯 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이 드러나자 그녀는 알 수 없는 신음성을 흘렀다.

천천히 그녀는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입술로 애무해 나갔다. 그녀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일어 그의 몸은 끓어오르는 욕정을 감당키 어려웠다.

마침내 빙화는 갑갑한 듯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빙기옥결.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눈부신 나신은 햇빛조차 무색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녀의 몸은 예전보다 더욱 성숙해 있어 소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풍염했다.

주천운은 아찔한 현깃증을 느꼈다. 이제까지 많은 여인을 상대해 봤으나 빙화만큼 마력을 지닌 여인은 없었다.

주천운은 빙화를 안은 채 뒤로 쓰러졌다. 두 남녀의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았다.

"하아 !"

빙화의 육체는 화녀(火女)처럼 끓고 있었다.

선악을 모르는 여인. 따라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여인. 빙화는 오로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주천운의 가슴에 눌려 기이한 형태로 이그러졌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삼단같은 머리칼이 마구 요동을 치며 춤을 추었다.

주천운은 모든 것을 망각한 듯 율동을 계속했다. 빙화는 붉은 입술을 벌린 채 온몸 가득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학!"

"허헉."

비오듯 쏟아지는 땀처럼 그들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후원에 한 쌍의 호접(蝴蝶)이 날아들었다. 호접은 정자 위로 팔랑거리며 날아왔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화르르륵 저만큼 도망가고 말았다.

정자 속의 열기가 너무 뜨거웠던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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