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건곤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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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가지망생
댓글 0건 조회 2,829회 작성일 17-02-1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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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坤一擲

제3권 24장 천마신경(天魔神鏡)



야수(野獸)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먹이에 굶주린 야수의 눈(眼)을. 지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궁일영의 눈은 바로 야수의 눈이었다. 그의 두 눈이 빛을 뿜으며 노리는 것은 잠룡표국의 표차였다.


표차의 행렬은 밤이면 일단 행군을 멈추었다. 그것은 마차를 끄는 말들을 쉬게 하기 위해서 였다.


오늘밤 행렬은 오룡구에서 30리 가량 떨어진 한 촌에서 멈추었다. 이 곳은 작은 마을이라 변변한 객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주막을 빌어 행렬은 하룻밤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마당에 5대의 표차가 원을 그리며 진을 치자 표사들은 횃불을 놓고 표차를 경비했다.


궁일영은 금도를 가슴에 안고 15, 6장쯤 떨어져 있는 농가의 지붕 위에 엎드려 있었다.


'오늘로 6일째 . 단 한 놈이 남을 때까지 씨를 말려 주마.'


그는 어둠 속에서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 표차 속에 갇혀 있는 사매를 구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놈들은 사매의 생명을 미끼로 나를 위협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놈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화안봉을 납치한 자들의 행적을 찾았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예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잠룡표국의 표차행렬을 보았을 때 육감적으로 끌렸다.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마침내 표차 속에 화안봉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된 것이다.


그날부터 궁일영은 살수를 뻗기 시작했다. 그는 은밀하게도 하루에 2명씩 살해했다. 처음에는 모두 60명의 표사들이 있었으나 그 동안 12인을 죽였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더욱 공포를 느끼는 법이다. 더욱이 바로 곁에서 원인 모르게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그 공포는 점점 더 극대화되는 법이다. 공포가 극에 달하면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고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이다. 궁일영은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이었다.


화안봉은 그의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천애고아의 몸이었다. 그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가 누구인지, 형제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던 시절 천하를 거지처럼 떠돌며 구걸을 하며 연명해왔던 것을.


만두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음식점 문 앞에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있다가 주인에게 얻어 맞던 일하며, 때로는 너무나 배가 고파 시궁창에 뛰어들어 썩은 밥알을 주워먹다가 배탈이 나서 하마터


면 죽을 뻔한 일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궁일영에게 구세주가 다가왔다. 때마침 그의 곁을 지나던 협객 한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 거두어 준 것이다. 그 협객이 바로 화무비였다.


당시 화무비는 강호협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불량배들에게 늘씬 얻어맞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무 아래 드러누워 하늘을 향해 씨익 웃고 있던 궁일영에게 그는 커다란 관심을 느낀 것이다.


궁일영은 그날부터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어엿한 강호협사의 제자가 되어 무공에 입문하게 된 것이었다. 과거의 남루했던 운명은 거짓말처럼 청산되었다. 그는 무공수련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불행했던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수련이라도 즐겁기만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자질은 뛰어났다. 그의 무공이 일취월장 하는 것을 보고 화무비도 좋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궁일영의 집념에 불길을 당겨준 것은 바로 화안봉이었다.


화안봉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상냥하게 대했다. 어린 소녀는 세상을 몰랐다. 가난이 무엇인지 거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오빠 하나가 생긴 것을 마냥 좋아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궁일영은 그녀를 위해서, 사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금도산장 제일의 고수가 되었고 장차의 장원의 주인으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리고 3년 전, 그는 일생일대의 기연을 만났다.


태백산의 한 동굴에서 천마신경을 얻은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천마신경을 가지고 산장으로 돌아오자


화무비도 크게 기뻐하였다. 그날부터 천마신경으로 궁일영의 내공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것이 결국 복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로 인해 금도산장이 일대겁난 속으로 빠져들고 말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붕 위에 엎드려 있는 궁일영은 한기를 느꼈다. 그의 내공은 이미 출신입화에 이르렀기에 한서불침(寒暑不侵)이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한기는 마음 속의 한기였다.


'사부 . 사매 . 모든 것은 이 궁일영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소. 내가, 내가 불러들인 화요.'


궁일영의 눈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시도 표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를 해서도 안 된다.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이다. 기다리자. 사매의 털끝 하나라도 손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하에 계시는 사부님을 뵈올 낯이 없게 된다.'


그는 주막의 마당에 원을 그리며 세워 있는 마차를 노려 보았다. 그 중 가운데 마차에 사매가 들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무공이 강하다 해도 마차를 지키고 있는 20명이 넘는 자들을 단숨에 해치울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아차하는 순간에 사매가 상처를 입게 되면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문득 그의 눈이 빛났다.


마차를 지키던 표사 하나가 자리를 떠나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자는 측간에라도 가는지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주막의 뒤켠으로 가고 있었다.


'열세 번째 .'


휙!


궁일영의 몸은 소리없이 날아 올랐다. 그의 신법은 표표하기 그지 없었다. 어둠 속을 소리없이 가르는 신법은 이미 어떤 경지를 뛰어넘고 있었다.



전포(田布)라는 이름의 사내.


그는 과거 흑도에 몸 담고 있다가 잠룡표국에 투신한 자였다. 그런데 투신하고 보니 잠룡표국은 평범한 표국이 아니었다. 표사가 되어 5년 이상을 일해 왔지만 국주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표국의 표두급들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데 기가 죽었다. 그는 최소한 자신의 무공이라면 표두 자리 하나쯤은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엄청난 착각을 했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공은 일개 표사가 되기에도 부족했던 것이다. 다행히 표사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리(地理)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천하곳곳을 두루 다녔던 경력이 표국업에 유용하게 작용되었던 것이다.


보수는 넘칠 만큼 많았다. 다만 표국의 내정에 전혀 가담할 수 없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그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표국에 투신한 이후로 그는 자신을 쫓고 있는 원수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과거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호색한(好色漢)이었다. 음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양가의 규수나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겁탈하던 자였다.


그러나 잠룡표국의 표사가 된 이후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체의 개인행동이나 무뢰배의 조직에서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여자를 품을 수 있는 것은 은자를 주고 살 수 있는 여인에 한해서 였다.


결국 음심을 채우기 위해서 전포는 표국에서 버는 은자를 몽땅 기원을 찾는 데 써야 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그런 대로 기녀를 품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싫증이 났다. 좀 더 색다른 취향을 즐기고 싶어졌던 것이다.


전포는 뒤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측간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다가가는 곳은 다름 아닌 주막의 내실이었던 것이다.


'흐흐 . 아까 주막집 계집이 추파를 던졌겠다. 보아하니 사내에 굶주린 모양이고 그 계집의 서방이란 놈은 그 방면에서 힘을 못쓰는 놈같았다. 흐흐! 어디 .'


그는 침을 삼켰다. 주막집 여자는 30대로 보였다. 이런 곳에서 썩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제법 풍만한 몸매와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내실은 밖으로 창이 나 있었다. 창문 앞에 붙어 귀를 기울이는 전포에게 계집의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쓸모없는 작자 같으니라구 ."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포는 이런 방면에는 귀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환했다. 그는 내실 안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환히 그릴 수 있었다.


계집은 사내에게서 불만을 느끼는 것이 확실했다. 사내의 힘빠진 한숨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흥흥! 그것도 물건이라고 ."


계집이 돌아눕는지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포는 더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순간 놀람에 찬 사내의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냐?"


겁에 질린 음성이었다. 전포는 서슴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에서 막 비쩍 마른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주막 주인이었다. 전포는 슬쩍 손을 휘둘렀다.


"윽!"


가벼운 손가락 짓에 그는 픽하니 쓰러졌다. 혈도를 찔린 것이었다. 전포는 사내에게 나직하게 위협했다.


"계집 하나를 다루지 못하는 놈은 쓸모가 없다. 쓸데없는 말썽을 일으키면 네놈은 뼈다귀가 성치 못할 거다."


사내는 부르르 떨었다. 지옥의 사자라도 온 것일까?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아내의 놀람과 희열에 찬 소리를 들었다.


"하악 ."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연신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점점 아내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고문(拷問)이었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고문이야말로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인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낯 모르는 남자와 그 짓을, 그것도 자신이 번연히 있는 앞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남자로서 그 이상의 수치가 어디 있으랴?


여인은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기쁨을 정체불명의 사내에게서 얻고 있는 것이었다.


침대는 요란하게 삐걱였고 사내는 마치 쇠로 만든 사람인 모양 힘차게 운동하고 있었다.


미칠 듯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여인은 사내의 등을 꼬집고 물고 할퀴었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으로 비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


"끄르륵 !"


문득 자신의 배 위에서 힘차게 움직이던 사내의 몸이 굳어지더니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여인은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 여보!"


그녀는 엉겁결에 일어났다. 순간 그녀 위에 있던 사내가 굴러떨어졌다. 동시에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황촉을 켰을 때 여인은 못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그녀를 충족시켜주던 중년사내가 아랫도리를 발가벗은 채로 침대 아래 벌렁 누워 있었다. 머리통은 침대 위에, 몸은 침대 아래에 각각 분리가 된 채로!


"아아아악!"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이미 여인의 손과 얼굴에도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뒷간으로 간다고 자리를 떴던 전포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같은 조를 이루었던 단대호(段大虎)는 의아해 했다. 곧이어 언뜻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


며칠 전부터 동료들이 하나둘 살해되었다. 누구의 짓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표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나 대열을 이끄는 3인의 표두들은 일체 함구하고 있었다. 다만 단호하게 명을 내릴 뿐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표차의 곁을 떠나지 말라는 명이었다. 또한 이탈하는 자가 생기면 표국의 율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잠룡표국의 율법은 엄했다. 명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되는 것이다.


단대호는 더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 일을 수석표두인 냉혼신검(冷魂神劍) 독강지(獨强支)에게 보고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응?'


문득 그는 전포가 사라진 주막의 모퉁이 쪽을 보다가 흠칫했다. 검은 인영 하나가 그를 향해 손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그 인영이 전포라는 것을 알았다. 전포는 그를 향해 계속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아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전포와 그는 죽이 맞았다. 두 사람 다 흑도 출신이었고 여색을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포가 아까 하던 말이 기억났다.


전포는 오늘밤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같다고 했던 것이다. 주막집 여주인과 눈이 맞았다고 하지 않던가? 여기까지 생각한 단대호는 단전 어림의 불두덩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흐흐 . 전포가 내게도 재미를 보게 할 모양이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옆의 동료에게 말했다.


"어이, 잠깐 측간에 다녀 오겠네,"


동료 표사 황가는 건성으로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졸리던 참이었다.


단대호는 전포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전포는 손짓을 하더니 곧바로 모퉁이로 돌아가 버렸다.


"전형 ."


단대호가 나직이 부르며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헉!"


그는 기겁을 하며 전신이 굳어지고 말았다. 과연 그를 부른 것은 전포였다. 전포는 모퉁이 벽에 붙어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눈알이 위 쪽으로 홱 돌아가 있는 것이었다.


"전형. 대체 으앗!"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툭!


전포의 머리통이 어깨로부터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단대호는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달려드는 것을 느꼈다. 불시에 모든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전포는 죽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


"컥!"


더 생각하기도 전에 금빛이 빛나더니 섬광같은 도기(刀氣)가 그의 가슴을 갈라놓았다. 가슴이 쩍 벌어지는 것을 단대호는 느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슴이 입을 벌리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어찌된 셈인지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대호는 죽음이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제 송전, 황삼이 죽었을 때만 해도 그는 바로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죽음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빨리 찾아든 것이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쓰러졌다. 몸뚱아리가 땅에 닿기도 전에 의식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열네 번째 ."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바로 그런 소리였다.



통현(通玄)을 출발한 표차는 3대로 줄어들었다. 잠룡표국의 표사들의 숫자도 현저히 줄어 이제는 30인에 불과했다. 60인 중 절반이 보이지 않는 마수에 의해 비명횡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수의 손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두두두두 !


달리는 3대의 표차의 마부석에는 3인의 표두가 타고 있었다.


수석표두 냉혼신검 독강지의 쭉 째진 눈은 지금 더욱 가늘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귀신같은 살수를 펴면서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가?'


처음 독강지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달라졌다.


'더이상 당할 수는 없다. 흐흐 . 이제 네놈이 당할 차례다.'


독강지는 과거 녹림(綠林)의 손꼽히던 고수였다. 잠룡표국에 투신한 이후로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12표두 중 1인이 된 것이다. 그의 특기는 냉혼검법(冷魂劍法)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그의 치밀한 독계(毒計)였다.


이윽고 관도가 좁아지며 숲이 나타났다. 독강지는 손짓을 하며 외쳤다.


"숲으로 들어가라!"


3대의 표차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울창한 침엽수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로 소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표차가 다시 관도로 나왔을 때 마부석에 있던 3인의 표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대의 표차는 행군을 계속했다. 이윽고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표차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각각 갈라지기 시작했다. 9인의 표사들이 호위한 채 세 방향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표차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휙!


그 자리에 황의인의 신형이 나타났다. 바로 궁일영이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표차가 사라진 세 갈래 길을 쏘아보았다. 일순 그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놈들이 행렬을 나눌 줄이야 .'


그는 생각에 잠겼다. 세 갈래 길에는 표차 바퀴자국이 뚜렷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표차에 화안봉이 타고 있는지 알길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결단을 내린 듯 오른쪽 길로 빛살같이 쏘아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그 자리에 2인이 나타났다. 바로 백룡과 포대강이었다.


포대강은 히죽 웃었다.


"헤헤 . 드디어 머리를 썼군요."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반이나 희생되었으니 머리를 쓴 것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그런데 그 석 대의 마차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요?"


"확률은 삼분의 일이다."


포대강은 입을 삐죽였다.


"쳇!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요?"


"궁대협이 오른쪽 길로 갔으니 나는 왼쪽으로 가보겠다."


포대강은 약간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제가 가운데 길을 쫓겠어요!"


백룡은 정색을 했다.


"조심해라. 그저 감시만 하고 절대로 일을 벌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포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은밀히 미행하면서 표기(表記)를 남기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


휘휙!


두 사람은 각기 정한 방향으로 사라졌다.


왼쪽 길로 신형을 날린 백룡은 일각 후 표차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표차가 막 고개 하나를 넘었을 때였다.


"누구냐?"


선두에 있던 표사가 고함을 쳤다.


관도 중앙에 한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신에는 백삼을 걸친 사나이의 얼굴은 눈부시게 희고 맑았으나 웬지 퇴폐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백룡이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술호로를 들고 술을 마셨다. 그는 표차를 쏘아볼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에 표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은 누구길래 감히 본국의 표행을 막는 것이냐?"


백룡은 빙긋 웃었다.


"뻔하지 않느냐? 표물을 막는 데 또다른 이유가 있겠느냐?"


표사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표물을 강탈하겠다는 거냐?"


백룡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9인의 표사들은 일제히 병기를 꺼냈다.


"건방진 !"


노성을 지르며 4인의 표사가 공격해 왔다.


쐐액!


백룡을 향해 검기가 뻗어오는 찰나에 백룡은 술호로를 들어올렸다. 순간,


따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퉁겨나가는 것이 아닌가. 4인은 비틀거리며 실 끊어진 연처럼 힘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때였다. 햇살을 가르며 날카로운 수도(手刀)가 그들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도를 본 것과 몸이 양단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크윽!"


"컥!"


그들의 마지막 비명은 곧 피분수와 함께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시신은 칼로 자른 듯 곧게 잘라져 있었다. 나머지 5인은 그 광경에 대경했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쳐라!"


그들은 일제히 백룡을 향해 덤벼들었다. 백룡은 유유자적하게 손을 흔들었다. 검풍도영이 난무하며 밀물같은 검기(劍氣)가 그를 덮쳤다. 그러나 곧 도영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흐느적거리며 그 기세를 잃고 말았다.


"크악!"


"컥!"


백룡의 손가락이 뻗을 때마다 한 명씩 쓰러졌다. 그들의 이마에는 동전 크기 만한 구멍이 뚫렸는데 그 곳에서는 섬칫한 피화살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백룡은 9인의 시신을 무감동한 얼굴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잠룡표국이 스무해 동안 기세를 날린 것은 깊이 도사린 마세(魔勢) 때문이었지.이 백룡이 무정하다고 탓하진 말게나."


그는 술을 들이켰다. 이어 그는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입을 떼었다.


"어차피 정과 마는 세불양립이 아니던가? 마쪽에 투신한 그대들의 운명을 탓하게."


그는 표차로 다가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 소저. 그만 나오시오."


순간, 펑! 하며 문짝이 박살남과 동시에,


슈슈슉!


표차 안에서 암기가 무섭게 폭사되어 나왔다. 백룡은 바로 문의 지척에 있었으므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수많은 암기가 박혔다. 암기를 맞은 백룡은 일 장이나 나가 떨어졌다.


"크흐흐 ! 백룡이란 놈도 노부 천수마영(千手魔影)의 천수금전표(千手金錢剽)에는 별 수 없구나."


스스슷!


옷깃 날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 속에서 흑영이 나타났다.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소름끼치는 사기(邪氣)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천수마영은 쓰러져 있는 백룡을 내려다보며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그때였다.


"하하하하 !"


문득 백룡이 대소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백룡의 전신에 박혀 있던 암기가 일제히 도로 퉁겨져 나갔다.


"크아악!"


천수마영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나동그라졌다. 그의 몸에는 어느새 고슴도치인 양 암기가 수없이 박혀 있었다. 바로 자신이 날린 암기로 백룡의 몸에 박혀 있던 것이 고스란히 돌아온 것이었다.


천수마영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술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크으으 ! 사라진 전설의 암기술 . 만천화우비술(滿天化雨秘術)이 어찌 너에게서 ? 큭!"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토해져 나오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백룡은 천수마영의 시신을 담담한 눈길로 내려다 보았다.


"운이 없었네. 친구, 자네는 격언을 철저히 증명한 셈이군. 칼로 흉한 자는 칼로 망하듯이 암기로 이름을 떨친 자는 암기로 그 대가를 받는 법일세."


백룡은 마차 안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함정이었군."


그 순간 멀리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백룡은 흠칫하여 그쪽을 바라다 보았다.


'궁일영이 쫓아간 곳이군 !'


문득 그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렇다면 진짜는 강아가 쫓아간 마차다.'


생각을 마친 순간 그의 신형은 벌써 숲을 향하여 쏘아져 가고 있었다.



"멈춰라!"


마차 안에서 음침한 음성이 명령했다. 표차는 멈추었다. 9인의 표사들은 얼굴이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그들이 가고 있는 좁은 산로는 막혀 있었다. 길 한가운데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치우지 않으면 도저히 통행이 불가능했다.


표사들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마차 안에서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애물을 치워라."


3인의 표사가 나무를 옮겼다. 그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이것이 벌써 3번째였다. 그들이 전진하는 곳마다 번번이 나무나 바위가 길 한복판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투덜대면서 산로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를 치웠다. 누군가 고의로 나무를 베어 쓰러뜨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쨌든 나무가 치워지자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백룡은 표기(表記)를 발견했다. 그것은 길 옆의 한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강아가 남긴 것이었다.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는 못했군."


강아가 손을 써 표차의 행렬을 방해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강아 녀석도 많이 늘었군.'


문득 그는 의문이 일었다.


'그런데 궁대협은 어찌 되었을까? 폭음이 들린 것으로 보아 표차가 폭발한 것같은데?'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전방을 바라보던 표사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마차 안을 향해 외쳤다.


"길이 끊겼습니다!"


표차는 멈추었다. 이제 더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앞은 막다른 절벽이었고 그 아래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마차 안에서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냐? 원래 이곳은 절벽으로 통하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


표사들중 한 명이 우거지상이 되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그때 표차의 문이 열리면서 회의(灰依)를 입은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의 냉막하기 그지없는 눈은 실처럼 가느다랗게 뜨여 있었고, 허리에는 폭이 좁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는 표차 앞을 가로막은 절벽을 보며 이를 갈았다.


"속았다. 누군가 길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렇다. 오는 동안 곳곳에 펼쳐져 있던 장애물에 정신이 팔려 마침내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게 된 것이었다.


회의 중년인은 바로 냉혼신검 독강지였다. 어느새 그의 두 눈에는 시퍼렇게 살기가 돋아 났다. 그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마차를 저 아래로 밀어버려라!"


"옛?"


표사들은 대경했다.


"어, 어찌하시려고 그런 명령을 . 마차 안에는 ."


"명령이다. 밀어버려라!"


그의 싸늘한 음성에는 냉막한 살기가 감돌았다. 표사들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어쩌자고 이런 명을 내린단 말인가? 마차 속의 계집은 국주(局主)의 특별명령으로 호송 중인데 .'


그러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9인의 표사들은 일제히 표차에 달려들어 절벽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히히힝!


두 필의 말은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표사들은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이윽고 표차는 절벽의 가장자리에까지 밀려났다. 잠시 후면 천야만야한 벼랑으로 떨어질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안 돼!"


문득 휙! 하고 나무 위에서 한 인영이 쏘아져 내려왔다.


펑! 펑!


"으아악!"


2인의 표사가 인영의 장력에 맞아 불시에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포대강이었다. 그는 상황이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냉혼신검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 네놈이었느냐? 그 동안 줄곧 우리를 귀찮게 한 놈이 ?"


말을 하다가 그는 문득 의혹을 느꼈다. 그의 암계에 말려들어 나타난 인영은 뜻밖에도 15, 6세 정도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아닌가? 체격은 비록 건장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어린애다운 치기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꼬마야! 네놈은 누구냐?"


포대강은 손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어르신은 포대강 나리다."


그는 내심 긴장했다. 비록 냉혼신검의 계략에 말려들어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고 말았으나 이제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해보았다.


'우선은 시간을 끌자. 그러면 백룡 형님이 오실 것이다.'


"포대강?"


냉혼신검은 잠시 염두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그런 이름은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 동안 네놈이 본국의 표사들을 죽였느냐?"


포대강은 히죽 웃었다.


"왜? 믿어지지 않나?"


냉혼신검의 눈이 더욱 가늘게 좁혀졌다.


"무슨 이유로?"


"헤헤 . 이유야 물론 있지."


그는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바로 저 안에 있는 낭자 때문이다."


순간 냉혼신검은 코웃음을 쳤다.


"그 계집과 어떤 사이냐?"


포대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포대강 나리의 정혼녀란 말이다."


냉혼신검은 어이가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느냐? 그 계집의 정혼자는 금도산장의 대제자라고 알고 있다."


"헤헤! 모르시는 말씀."


" ?"


포대강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화노영웅은 돌아가셨지."


"그래서?"


"무릇 혼인이란 존장의 승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본인(本人)들의 의사가 아닌가?"


" ?"


냉혼신검은 좁은 눈에 잔뜩 의혹을 품은 채 이 넉살 좋은 꼬마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포대강은 자신만만하게 계속했다.


"화노영웅이 돌아가신 이상 이제는 화 소저 개인의 의견이 존중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이지."


냉혼신검은 기가 막혔다.


"그럼 화안봉이 너를 남편으로 선택할 것이란 말이냐?"


포대강은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물론이오."


"너는 오래 전부터 화안봉을 알고 있었느냐?"


"아니요."


"그럼?"


포대강은 빙그레 웃었다.


"헤헷 ! 나는 화 소저를 본 적도 없소."


냉혼신검은 흠칫했다.


"뭐라구?"


"헤헤! 하지만 화 소저도 이 포대강을 한 번 보기만 하면 틀림없이 반할 것이오."


순간 냉혼신검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야 포대강의 말이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한 연극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제 보니 네놈이 !"


그는 대뜸 버럭 소리쳤다.


"저놈을 죽여 버려라!"


스스스!


표사 7인이 포대강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포대강은 당황했다.


'아이쿠! 이것 큰일났구나. 왜 형님은 아직 오시지 않는 거지?'


겁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전 경험이 별로 없는 그로서는 7인의 표사들이 바짝 포위망을 좁히자 적지 않게 불안했다.


"꼬마놈, 뒈져라!"


우웅!


2인의 표사가 장도를 휘두르며 맹렬한 기세로 짓쳐들어오자 포대강은 다급한 나머지 재빨리 몸을 굽혀 구르기 시작했다.


"어억?"


갑자기 사라진 포대강으로 인해 2인의 표사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그가 설마 땅을 구를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포대강은 그들의 하반신이 보이는 곳까지 굴러왔다. 그는 양손으로 번개같이 그들의 가랑이를 잡았다. 그 바람에 그들은 휘청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포대강은 조롱하듯 외쳤다.


"헤헷! 나리들, 저 아래로 가서 쉬시오!"


"으와앗!"


2인은 그만 다리를 잡힌 채 절벽 아래로 휙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절벽 아래로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비록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나 포대강의 완력은 대단했다.


"죽, 죽일 놈!"


동료들이 어이없이 당하자 이번에는 나머지 5인이 이를 갈며 협공을 해왔다.


쐐애액!


이번에는 결코 얕보지 않았다. 도광검영이 빗발치듯 쏟아져 왔다. 단숨에 도륙을 낼 작정인 듯했다. 포대강은 그만 아찔했다. 머리 속에는 백룡으로부터 배운 수많은 절기가 떠올랐으나 어찌된 셈인지 몸이 마치 물에 잠기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실전경험이 없는 탓이었다.


펑!


"아이쿠!"


그는 그만 등이 시큰함을 느끼며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멈칫하는 사이에 장력을 맞은 것이었다. 눈앞에 별이 오락가락하고 현기증이 나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다시 머리 위로 날카로운 검기가 쇄도해 왔다.


'이젠 죽었구나!'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최후의 발악으로 마구 쌍장을 날렸다.


"으악!"


느닷없는 비명소리에 포대강은 의아하여 눈을 떠보았다. 놀랍게도 그를 공격하던 상대방은 머리에서부터 가랑이까지 양단이 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구역질을 했다. 간이 크다고 자부하던 포대강이었으나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비켜라!"


한 가닥 흐릿한 인영이 귀영처럼 흐느적거리며 쏜살같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그가 스쳐갈 때마다 한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크아악!"


"캐액!"


혈선이 한 번 그어질 때마다 표사들은 몸이 양단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잠시 후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전신에 피로 얼룩진 걸레쪽같은 옷을 걸친 채로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금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바로 궁일영이었다.


표사들을 모두 죽인 궁일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냉혼신검에게 다가갔다. 냉혼신검은 경악했다. 그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네놈이 궁, 궁일영이란 말이냐?"


궁일영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3천관의 화약으로도 나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 궁일영이 쫓아간 표차에는 3천관의 화약이 채워져 있어 폭발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그의 온몸이 걸레쪽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냉혼신검의 눈알이 교활하게 이리저리 굴렀다. 문득 그는 신형을 벼락같이 날리며 장력을 뻗었다.


펑!


폭음이 울렸다. 놀랍게도 그는 표차를 향해 장력을 날린 것이다.


"아악!"


표차 안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궁일영의 안색이 변하는 순간 냉혼신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표차의 부서진 문짝으로 손을 뻗더니 무엇인가를 낚아챘다.


그의 손에 잡혀나온 것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화안봉, 바로 그녀였다. 냉혼신검은 화안봉의 목에 날카로운 검을 들이대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 다가오지 마라. 한 걸음이라도 접근하면 이 계집의 목을 날려버리 겠다!"


" !"


궁일영의 얼굴에 동요가 스쳤다. 그때 화안봉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그녀는 애절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사, 사형!"


그녀의 모습은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져 있었다. 숱한 고초를 당한 흔적이 얼굴 곳곳에 드러나 있었고, 윤기를 잃은 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의 수척한 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궁일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매 . 별 일은 없었는가?"


"사형 . 난, 흐흑 !"


그녀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의 울음은 듣는 이의 애간장을 끊어놓을 듯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화안봉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사형. 난 상관없어요. 어서 이자를 죽여요!"


궁일영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의 얼굴에 비장한 표정이 어렸다. 화안봉은 다그치듯 외쳤다.


"빨리 이자를 죽여요."


"닥쳐!"


짝!


"악!"


냉혼신검의 무지막지한 손이 화안봉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가냘픈 목이 홱 돌아갔다. 그 광경에 궁일영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사매에게 손대지 마라!"


번쩍!


전광석화(電光石火)! 아니 그보다 빨랐으면 빨랐지 결코 느리지 않았다. 허공에 한 줄기 금빛이 스쳤다고 생각한 순간,


"큭!"


냉혼신검의 어깨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는 대경했다.


'이, 이놈의 도(刀)가 이렇게 빠르다니 !'


그는 재빨리 뒤로 신형을 날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움직이지 마라! 한 번 더 움직이면 이 계집을 단칼에 양단내겠다."


찌익!


말과 함께 냉혼신검은 화안봉의 옷을 잡아챘다.


"악 !"


화안봉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상의는 길게 찢겨져 나갔다. 그 바람에 찢긴 옷자락 사이로 희디흰 젖가슴이 부끄러움도 없이 노출되고 말았다.


처녀의 몸으로 이런 수모를 당하자 화안봉은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함께 깊은 절망을 느꼈다.


"더, 더러운 놈!"


"흐흐! 닥치라고 했다."


부욱!


냉혼신검은 그녀의 어깨에 그나마 걸쳐져 있던 옷마저 사정없이 찢어내렸다. 화안봉의 동그란 어깨와 백옥같은 살결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제 반나가 되어버린 화안봉의 몸은 아찔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백설같은 피부는 가히 사나이의 욕정을 부채질하고도 남을 만큼 유혹적인 것이었다.


화안봉은 혈도가 찔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냉혼신검은 그녀를 나무 아래 기대게 했다. 터질 듯 부푼 유방에 그는 냉기가 감도는 검을 갖다 댔다.


"흐흐. 한 발만 움직여 봐라. 이 계집의 유방을 도려내겠다!"


"크으윽 !"


궁일영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가슴이 타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매가 더럽기 짝이 없는 적의 손에 걸려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졌다.


아까부터 이 광경을 지켜본 포대강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짓쳐들어가 냉혼신검의 목을 베고 싶었다.


"흐흑 ."


공포와 수치에 질려 화안봉은 흐느꼈다. 냉혼신검의 차가운 검이 그녀의 유방에 닿자 그녀는 부르르 경련했다. 한 번도 남 앞에 드러낸 적이 없는 순결한 몸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냉혼신검은 냉막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흐흐! 다시 한 번 말하겠다. 한 보(一步)라도 움직이면 먼저 한쪽 유방을 도려내겠다."


슥! 하고 검이 유실을 스쳤다.


"학!"


화안봉은 기겁을 했다. 그녀의 구슬같은 유실에 핏방울이 맺혔다. 그때였다.


"크흐흐흑 ! 멈춰라!"


궁일영은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극도의 분노로 인해 진기가 역혈한 것이었다.


냉혼신검이 차갑게 내뱉았다.


"흐흐. 물론 멈출 수는 있다. 그러나 먼저 도를 버려라."


쨍!


궁일영의 도가 땅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사매를 놓아다오. 시키는 대로 하겠다."


"흐흐흐 ."


냉혼신검은 음침하게 웃으며 검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유방 아래에 걸쳐져 있던 화안봉의 옷자락이 조각조각 베어지며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슬아슬하게 화안봉의 배꼽 아래 걸렸다. 만일 조금만 검을 내리면 그녀의 모든 것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 것이 뻔했다.


냉혼신검은 음탕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흐흐 . 꽤나 쓸 만한 몸을 지녔군."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다시 검을 움직이려고 했다.


순간, 나무 위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졌다.


"정말 파렴치한 놈이군. 더이상 세상에 있을 가치가 없겠군."


"헉!"


냉혼신검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백옥처럼 투명한 손바닥을 그는 보았다.


퍽!


그뿐이었다. 둔탁한 소리만 들렸을 뿐 비명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머리는 그대로 두부처럼 으깨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나무 위에서 인영이 내려섰다. 백룡이었다. 땅 위에 내려선 백룡은 손가락을 퉁겨 화안봉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사매!"


궁일영이 넋이 나간 얼굴로 달려오자 화안봉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형!"


그들은 굳게 포옹했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모든 것을 대신한 것과 다름 없었다. 포대강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쳇."


그는 주먹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의 뇌리에 포대봉이 떠오른 것일까? 백룡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녀석, 수고했다."


포대강은 입을 삐죽였다.


"쳇! 왜 이렇게 늦었어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단 말이에요."


"하하 .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지 않았느냐?"


그때였다. 궁일영이 백룡에게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는 감개무량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은공 덕분에 사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소이다. 이 은혜 백골난망이로소이다."


화안봉도 그의 옆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이들의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한 백룡은 급히 궁일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협의도의 인물이라면 당연한 일을 한 것이 아니오?"


궁일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오나 궁일영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올시다."


백룡은 빙긋 웃었다.


"하하 . 이제 환난은 사라졌으니 두 분은 어서 떠나시오. 보물을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오."


순간 궁일영의 눈동자가 한 차례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그럼 귀공께서도 천마신경 때문에 온 것이 ?"


백룡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보물이란 덕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또한 인연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오. 소생은 그런 복이 없는 자요."


궁일영은 처음에 그도 보물 때문에 온 줄 알고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동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사형 ."


화안봉은 냉혼신검의 시신에서 애초 그녀의 물건이었던 금열쇠를 꺼내왔다. 그녀는 궁일영과 눈길을 마주치더니 백룡에게 금열쇠를 내밀었다.


"우리 가문을 혈겁 속으로 몰아넣은 물건이에요. 저는 "


그녀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듯 말을 잇지 못했다. 궁일영은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백룡에게 말했다.


"사매와 나의 생각은 같소."


"사형 ."


화안봉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궁일영은 금열쇠를 내밀며 말했다.


"은공. 이것을 받아 주시오. 우리는 이길로 떠나겠소이다. 보물은 은공이 취해 주시오."


백룡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소. 이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소이다."


궁일영은 정색을 했다.


"받아주시오. 이번에 불초는 느낀 바가 많소. 사부께서도 유언을 하셨소이다."


" ."


"사매를 구한 뒤에 되도록이면 무림을 떠나라 하셨소이다. 천마신경도 적당한 주인이 나서면 넘겨주라 하셨소."


"나는 천마신경의 주인이 아니오."


궁일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원래 천마신경은 주인이 없는 물건이오. 그런데 귀공이야말로 자격이 있는 분이오."


백룡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포대강이 눈빛을 빛내며 은근히 말했다.


"형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강아!"


백룡의 호통에 포대강은 움찔했다. 순간 화안봉이 애원하듯 다시 말했다.


"은공께서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들은 또다시 천하인의 적이 되어 쫓기게 될 것입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들이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이상은 어디를 가나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들의 간곡한 부탁을 더이상 뿌리칠 수 없었다. 마침내 백룡은 금열쇠를 받기로 결심했다.


"그럼 내 잠시 보관하겠소."


백룡이 금열쇠를 받아들자 궁일영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정말 감사하오이다. 그런데 귀공의 성함은 ."


"백룡이라 하오."


" !"


순간 그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그들은 이미 백룡이라는 이름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던 터였다. 한 동안 할 말을 잊었던 궁일영이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 범상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소."


"과찬의 말씀이오."


궁일영은 나직하게 말했다.


"천마신경은 태백산 오지봉의 다섯 봉우리 중 제 사봉에 감추어져 있소. 귀두암(龜頭岩)의 꼬리 부분을 파면 철궤가 나올 것이오. 그 열쇠로 열면 되오이다."


백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적당한 임자가 나오면 드리겠소이다."


궁일영과 화안봉은 서로의 손을 잡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백 형의 은덕은 영원히 잊지 않겠소이다."


다음 순간 그들은 신형을 날리며 사라져 갔다. 궁일영의 금도는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백룡은 탄식했다.


"무림의 인재 한 명이 떠나는구나."


그때 사라지던 궁일영의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천마신경은 반드시 10성(十成)까지만 익히고 중단해야 하오. 십성을 넘으면 마성(魔性)에 빠져들게 되오이다.'


순간 백룡은 흠칫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염려마시오. 나는 그런 마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뭉클뭉클 솟아오른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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